나는 어떤 사람인가? 독립적인가, 아니면 의존적인가?
마커스 교수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다. 주황색 네 개와 초록색 한 개로 묶은 펜을 주고 설문에 답하게 했다. 사실 설문 내용은 이 실험과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이 어떤 펜을 사용하는가를 보고 자아의 성향을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서양인이 한 개뿐인 초록색 펜을 선택한 데 반해, 동양인들은 같은 색이 여러 개인 주황색 펜을 선택했다.
통상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자아를, 동양인들은 상호의존적인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게 마커스 교수의 설명이다. 자아에도 유형이 있나? 그렇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독립적인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로 생각할 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자아와 환경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한(그러면서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상호의존적인 자아’는 스스로를 관계 지향적이라 여기고, 가능한 한 주변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키려 한다. 사회나 조직의 전통과 의무에 따르며, 자신을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보려 한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문화 충돌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웬 자아 타령인가 싶을지 모른다. 저자는 어떤 성향의 자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나 느낌, 생각, 행동이 모두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같은 성향의 자아들이 모여 이루는 지역사회, 문화권은 서로 다른 사회, 문화권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예는 어떤가? 미국에서 한 중국인 대학원생이 자신의 점수와 학위 문제에 앙심을 품고 지도교수와 동료들을 살해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 신문들은 범인의 불안했던 정서와 평소 성격 등을 분석하며 그가 “심각한 문제 인물”이었음을 규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반면, 중국 기자들은 범인과 지도교수 사이의 갈등, 쉽게 총기류를 구할 수 있는 미국사회의 특성 등을 사건의 원인으로 꼽았다. 여기서도 독립적 성향의 자아와 상호의존적 성향의 자아가 대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보자. 여러분의 집안에 불이 났다. 그 안엔 어머니와 배우자가 자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밖에는 구할 시간이 없다.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저자는 미국인 학생과 대만 학생, 각각의 그룹에게 질문했다. 그 결과 상호의존적 성향의 대만 학생들은 효의 정신에 걸맞게 어머니를 압도적으로 많이 선택했다. 반면 독립적인 성향의 미국 학생들은 ‘선택의 힘’을 중시하는 만큼 자신이 직접 선택한 사람, 즉 배우자를 구하겠다는 대답을 더 많이 했다. 이처럼 우리의 자아는 상황 인식, 감정을 일으키는 방식, 동기부여를 받는 방식 등에 모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 지도를 그려보자
나는 어떤 존재이고, 또 사람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싸우는지, 그것을 이해하려고 저자는 사람들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특정한 자아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제도와 문화는 어떠한지 지도를 그려보는 작업을 시도했다. 문화심리학자다운 접근이다. 이는 인간의 두뇌와 유전자를 분석하는 과학적인 접근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책의 전반부에서 사람과 지역에 따라 독립적인 자아와 상호의존적인 자아가 어떻게 다르게 드러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양상들을 - 예컨대 빈부격차, 지역갈등, 남녀차별, 인종차별 등을 - 자아의 충돌로 바라보며 문제의 해법을 찾아간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는 독립적 자아와 상호의존적 자아를 전략적으로 통합하여 활용하는 모습과 방법을 제시한다.
원래 폭력적인가?
이러한 접근과 해설을 통해, 예컨대 최근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 일명 샤를리 에브도 사건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사건이 2005년에도 덴마크에서 발생한 바 있다(본문 9장 참조). 그해 무하마드를 사기꾼으로 묘사한 덴마크 신문 [율랜츠포스텐]의 만화를 떠올려 보자. 한 장면에서는 무하마드가 폭탄 모양을 한 터번을 두르고 있고, 다른 장면에서는 천국에 있는 무하마드가 길게 줄을 선 시커먼 자살폭탄 테러범에게 이렇게 외친다. “그만! 그만! 이제 처녀들이 다 떨어졌다고!”
서구 독자들에게 그 만화는 단지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실천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슬람권 독자들에게 그건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곧장 시위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하며 유럽 국가들의 국기를 불태웠다. 덴마크 대사관 건물을 공격하고, 파키스탄에서는 방화와 폭발이 계속 이어졌다. 소동이 가라앉을 즈음엔 이미 1백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자신이 믿는 종교의 지도자를 풍자한 만화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이나 극단적 파괴 행위로 맞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은 왜 그 만화에 그토록 폭력적인 경련을 일으켰던 걸까? 무하마드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죄악이라고 믿는 이슬람인들에게 그러한 만화 자체는 직접적인 공격과 다름없었다. 즉,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그들은 누군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면, 이를 곧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 자녀, 친척들의 명예까지 더럽힌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네트워크에 있는 구성원들이 기꺼이 함께 보복에 동참한다. 그들의 명예문화와 네트워크 결속은 다른 문화권의 짐작보다 훨씬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사실 911 테러나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벌인 전쟁 이전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의 이슬람권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은 극단적으로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영화와 뉴스, 각종 미디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슬람권을 수류탄과 폭탄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이미지로 만든 것이 이후의 갈등 상황에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갑을 문제, 유독 한국에서만?
우리에게 좀 더 가까운 문제를 살펴보자. 이 책에 추천 글을 쓴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 교수는, 상호의존적인 자아가 지배하면 독립적인 목소리가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갑-을 간의 갈등은 항상 잠재적인 시한폭탄처럼 존재한다. 게다가 우리는 피해의식이나 관계의 부담 등을 더욱 크게 느끼기에 갑을 문제가 더욱 자주 부각된다는 것.
황 교수는 서구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저자의 통찰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면 한 차원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독립적 성향이 강한 미국 사회와 달리, 한국의 상호의존적인 문화 속의 개인들은 뚜렷한 자아를 형성하지 않은 상태이거나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 문제가 일어나도, 그것을 제도와 같은 환경 탓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갈등과 충돌은 ‘상황’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인식과 통찰이 우리에겐 여전히 아쉽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에서 균형 있게 살아가기
세상의 크고 작은 문화적 충돌들을 파헤쳐 보면, 결국 그 속에 자아의 충돌이 숨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제 상황을 자아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고, 거꾸로 자아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 더 나아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해하도록 도움으로써 이 복잡한 세상에서 균형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문화적?정치적?계층적 격차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지금, 이 책은 그러한 분열을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