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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뮤직 팝 캐럴 음악 모음집 (A Very Special Christma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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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유니버설 뮤직 팝 캐럴 음악 모음집 (A Very Special Christmas 2)

[ 재발매 ]
Randy Travis, Luther Vandross, Frank Sinatra, Cyndi Lauper, Boyz II Men 노래 외 1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A&M Records | 2004년 11월 1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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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뮤직 팝 캐럴 음악 모음집 (A Very Special Christmas 2)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11월 18일
시간, 무게, 크기 6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Christmas All Over Again - Tom Petty & The Heartbreakers
  • 02 Jingle Bell Rock - Randy Travis
  • 03 The Christmas Song - Luther Vandross
  • 04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 - Frank Sinatra/Cindy Lauper
  • 05 The Birth Of Christ - Boyz ll Men
  • 06 Please Come Home For Christmas - Jon Bon Jovi
  • 07 What Christmas Means To Me - Paul Young
  • 08 O Christmas Tree - Aretha Franklin
  • 09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 - Ronnie Spector/Darlene Love
  • 10 White Christmas - Michael Bolton
  • 11 Christmas Is - Run DMC
  • 12 Christmas Time Again - Extreme
  • 13 Merry Christmas Baby - Bonnie Raitt/Charles Brown
  • 14 O Holy Night - Tevin Campbell
  • 15 Sleigh Ride - Debbie Gibson
  • 16 What Child Is This? - Vanessa Williams
  • 17 Blue Christmas - ANN & NANCY WILSON
  • 18 Silent Night - Wilson Phillips
  • 19 I Believe In You - Sinead O'connor

아티스트 소개 (21명)

노래 : Randy Travis (랜디 트래비스)
노래 : Luther Vandross (루더 밴드로스,Luther Ronzoni Vandross)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흑인 남성 싱어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입지전적인 위치를 다진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본격적인 캐리어를 쌓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면서 20세기 후반 리듬 앤 블루스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그의 노래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의 높은 순위에 오르면서 알려졌다. 제작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나 프린스(Prince),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등과 동등한 위치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초코 우유처럼 감미로운 그의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음색으로 그려지는 가창력은 현존 최정상임을 입증한다. 1951년 4월 20일 뉴욕에서 태어난 이 재능 있는 뮤지션은 샘 쿡(Sam Cooke),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같은 소울 가수들의 음반들을 들으며 음악적인 진실함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채득했다. 1970년대에는 선배 가수들의 백보컬 활동과 TV 광고 노래를 부름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루더 밴드로스는 첫 번째 정규 앨범 < Never Too Much >를 자신이 직접 어레인지와 제작을 담당해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음반 제작을 관장하는 흑인 아티스트가 드물었기 때문에 루더 밴드로스의 처녀작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으로 그는 1980년대 초반 ‘소울의 영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위해 퓨젼 재즈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와 파트너가 되어 ‘Jump to it(24위)’, ‘Get it right(61위)’ 등을 작곡하고 음반을 제작하면서 그녀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이들의 관계는 음악적인 파트너쉽을 넘어 인간적인 우정으로 지속된다. 1980년대를 활동하면서 모두 6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지만 싱글 종합 차트와 국내에서의 반응은 흑인 음악 차트에 비해 폭발적이지는 못했다. 데뷔 곡 ‘Never too much(33위)’, 댄서블한 ‘Stop to love(15위)’와 ‘She won’t talk to me(30위)’, 그리고 ‘Give me the reason(57위)’과 ‘Any love(44위)’ 등이 주로 차트의 허리권에서 멤돌다가 사라지곤 했었다. 1990년대가 밝아오면서 루더 밴드로스는 지난 10년을 재조명하는 베스트 음반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신곡 ‘Here and now(6위)’가 최초로 Top10에 랭크되면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화려하게 장식할 준비를 시작했다. 1991년의 < Power Of Love >는 싱글 ‘Power of love/Love power(4위)’와 ‘Don’t want to be a fool(9위)’의 호 성적으로 그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1992년에는 영화 < 모 머니 >에 수록된 ‘The best thing in life are free(10위)’를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고 1994년에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Endless love(2위)’를 리메이크 했다. 루더 밴드로스의 음악 스타일과 역량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친절하게 멜로디를 살려주는 그의 노래들은 화음보다 최소한의 리듬을 강조하는 현재의 흑인 음악의 트랜드와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음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정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추어 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언제든지 사랑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노래 : Frank Sinatra (프랭크 시나트라,Francis Albert Sinatra)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그 주인공은 40년대의 빅 스타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셈이다. 40년대를 통해 그는 여성팬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42년 그가 ‘타미 도시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싱어로 활약하면서 뉴욕의 파라마운트 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수많은 여고생들이 입장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당시는 ‘빅 밴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지만 소녀들은 빅 밴드의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밴드의 젊고 깡마른 가수를 보려고 벌떼처럼 몰려든 것이었다. 그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서의 십대 소녀들은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고 급기야 복도에서 졸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때 졸도한 소녀들 가운데는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져 ‘흠집’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현대의 ‘팝 히스테리’가 탄생된 순간이었다. 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명의 틴에이저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나중에는 단축되어 ‘목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젊음의 음악인 록 뮤직이 아닌 당시의 팝, 그것도 ‘어른적인’ 스탠다드 팝을 가지고 소녀 관객의 흥분을 자극했다는 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그만큼 그는 충분한 매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전시(戰時)였고 젊은 남자들이 징병으로 끌려가 없고 여성들 가슴에 고독이 엄습해 왔을 때 ‘이웃집 청년’같은 그는 알맞은 해소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15년 뉴 저지주 호보큰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부르는 재질이 뛰어나 고교 때는 교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면 졸업 후에는 신문을 나르는 트럭 운전사, 스포츠 기고가로 활약했다. 36년 빙 크로스비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듬해 팝계에 데뷔했다. 그 후 그는 십대 소녀의 우상이 되었고 팝계뿐 아니라 영화계도 섭렵, 전천후 스타로 명성을 휘날렸다. 80세를 목전에 둔 지금도 활약을 계속하여 ‘팝 뮤직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음악팬들에게 ‘품위있는 노신사’, ‘노래하는 예술가’ 등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대중음악계 ‘보수 진영의 원로’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 비판적 시각의 젊은이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비난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청년 세대의 우상으로 무대생활이 펼쳐졌지만 그의 시대 이후 등장한 젊은 감각의 노래에는 등을 돌렸다. 그는 4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와 ‘중산층의’ 대중음악인 스탠다드 팝만을 고수했다. 그가 선 무대는 늘 그런 음악에 걸맞는 고급 사교홀이나 서민층은 접근하기 어려운 대극장이었다. 편안하게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는 50년대 중반 일대 위기를 맞았다. 대중음악계에 록 뮤직이 침투한 것이었다. 그는 뉴 뮤직인 록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다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자, 즉각 위기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여 록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사십대에 들어서 리듬이 강한 록 음악을 그가 수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시각은 너무도 강경했다. 그는 58년 의회의 연단에 등장, 록 음악의 폐해를 증언했다. 여기서 그는 록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다. 또 록큰롤 하는 가수들은 저능한 되풀이와 교활하고 저속한, 단순하게 말하면 더러운 노랫말로 십대를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쁘다는 어휘는 총동원시킨 듯한 이런 규탄도 부족했던지 시나트라는 “그런 빗나간 방식으로 록 음악은 지구상의 모든 구렛나룻 십대 범죄자들의 군대 음악이 되려 하고 있다”거 쏘아붙였다(구렛나룻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상징이었다). 스탠다드 팝의 위기라는 판단에서 록을 공박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록 뮤직의 이념적 특질이라고 할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도전적 가치를 혐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기 세대의 음악 스탠다드 팝에 평생 수절(?)한 만큼, 50년대 이후 록 음악과포크 음악이 내세운 ‘저항’의 기조에는 쌍심지를 켜고 반발했던 것이다. 저항을 이념으로 했던 70년대 말의 펑크를 비난한 것이나 90년대 미국 국가의 연주를 거부해 물의를 빚은 시네드 오코너의 행각에 크게 분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록 음악 불가론’을 제창했던 그는 록의 위용이 의외로 거세다고 판단, 곧 입장을 수정했고 60년 TV 프로그램에서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무대의 황제’라는 칭송과 함께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기도 했다. 그는 데뷔이래 부와 명성에 엄청난 집착을 보여온 인물로 유명하다. 한 예가 그의 대표작이 된 53년도 영화 <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와 관련된 에피소드. 40년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는 50년대 초반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갑작스런 슬럼프에 직면했다. 가수에게 중요한 목 상태가 악화되었고 두 번째 아내 에바 가드너와의 파경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것이 주원인이었다. 레코드 판매는 뚝 떨어졌고 영화 출연 제의가 끊겼으며 목에서는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재기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 지상에서 영원으로 >의 돋보이는 마지오 배역을 따내야 했다.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으며 배당금을 취소로 정하는 수모도 감내했다. 이를 악물고 덤벼든 결과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위기관리의 천재다운 면모였다. 그는 소속 레코드사인 캐피톨을 떠나 61년 리프라이즈 레코드사를 차려 사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2년 뒤인 63년 회사를 대기업인 워너브라더스에 팔아넘겼다. 리프라이즈의 매매는 그에게 엄청난 돈을 안겨주었고, 그는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엔터테이너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그에게 최고가치는 언제나 달러였고 그는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 그는 사업운영에 있어서 간혹 정계와 손을 대기도 해 논란을 빚었으며 72년에는 경마장의 부정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의회의 범죄색출위원회에 출두, 신문의 톱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같은 스캔들은 80년대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마피아와 밀월관계에 있었으며, 마피아를 등에 업고 연예활동을 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86년에는 시나트라와 마피아의 관계를 폭로한 그의 전기 『그의 길』(His Way)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가장 비난이 집중되었던 사건은 보츠와나 공화국의 ‘선 시티’ 공연 부분이었다. 81년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만든 초호화판 휴양지인 이 공연장의 개막식에 리자 미넬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특별무대를 가졌다. 그는 9일간 여기에 출연하는 대가로 1백 6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그의 선 시티 출연은 폭압적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 남아공의 체제유지에 기여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의식 있는 팝 가수 진영으로부터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 85년 리틀 스티븐(스티븐 밴 잰트)의 발의로 결성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아티스트연합’은 ‘반(反)선 시티’를 주장하면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한 일부 팝 가수들의 비양심을 맹공했다. 선 시티 출연으로 평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되어온 그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본래의 보수성을 그럭저럭 잘 감추어온 그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준 ‘오점’이 되었다. 그는 정당과 관련하여 애초 40년대에는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개혁지향적인 민주당 쪽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진보파인 민주당후보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지지했으며 루즈벨트를 존경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따 자기 아들의 이름을 프랭클린 웨인 시나트라로 짓기도 했다. 47년에는 쿠바를 방문해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할 정도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의 고수는 정치에 대한 관심과 반비례했다. 그는 74년 미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안드레오티 수상을 환영하기 위해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베푼 백악관의 만찬석상에 출연,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속뜻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입지를 변화시킨 ‘철새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히트송 레퍼터리는 나열이 벅찰 정도로 무수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나의 길(My Way)’일 것이다. 원래는 프랑스 샹송으로, 라스베가스에 함께 출연하고 있던 폴 앵카가 은퇴를 앞둔 시나트라를 위해 영어 가사를 붙여 개작해준 곡이다. 시나트라의 인생이 그려진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그다지 크게 히트하지 못했으나, 영국에서는 40위권내에 무려 122주간 랭크되는 전무후무한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인생의 종반부가 다가와 난 종막을 맞이하고 있네. 여러 벗들에게 나만이 확실히 알고 있는 인생 기록을 말하겠노라. 난 인생의 항로를 고루 밟아가며 꽉찬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후회도 얼마간 있었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었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해내었지. 항상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전세 낸 인생 코스를 계획했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물론 감당하지 못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 의혹의 순간도 있었다오, 그러나 난 그것을 나 혼자 씹어 삼키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 당당히 일어섰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그것이 나의 길이었소.’ 이 노래로 인생을 정리한 그는 70년 은퇴를 공식 선언했으며, 71년에는 화려한 고별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과 2년 후인 73년 그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팝계에 복귀해 노래와 연기를 계속했다. 그러한 것이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길이었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 1983년 후반, 두 백인 여성 가수의 데뷔곡이 2개월의 짧은 간격을 두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나란히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두 여가수의 경합은 1980년대 동안 가장 흥미롭고(본인들에게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겠지만) 긴장감 넘치는 팝의 핫 이슈였다. 두 여인은 1983년 10월에 데뷔 싱글을 차트에 등록시킨 이후 현재까지 20년이 달하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는, 매브릭 음반사의 CEO 마돈나(Madonna)와 2개월 늦게 인기차트에 합류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나선 끝내 마돈나에게 밀려버린 ‘귀여운 악녀’ 신디 로퍼(Cyndi Lauper)다. 마돈나의 ‘Holiday’와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아직까지 그들을 정의하는 대표 곡으로 남아 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흐른 현재, 레이스의 최후 승자는 알다시피 마돈나다. 그것도 판정승 아닌 분명한 KO승이다. 그러나 그들이 풋풋했던 데뷔 시절, 둘의 위치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애초 평단에서 마돈나는 ‘아니 벌써’의 반짝 스타로, 신디 로퍼는 ‘장수 만세’의 아티스트로 전망되었다. 평론가들이 신디 로퍼를 높이 산 이유는 페미니즘을 남근의 음악인 록과 포스트 펑크가 어우러진 ‘뉴 웨이브’로 설파했다는 점과, 마돈나처럼 섹시한 외모나 춤으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약간은 덜 섹시한 이미지를 고집하면서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중퇴, 소규모 클럽에서의 노래 시작, 자신이 결성한 밴드 블루 엔젤(Blue Angel)의 상업적인 실패와 파산,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불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터득한 그녀의 인생관이 배양했다. 3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망가질(?)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이 굴곡의 삶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떳떳함이 원천이다. 그녀의 성공을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요구에 정확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소녀적 감성을 읊은 신디의 밝고 통통 튀는 가사는 그 시대 정서의 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로 괴롭히지 않았으며, 당대의 뉴 미디어인 MTV의 지원사격을 받은 것이었다. 10대 소녀들을 정신 없으면서도 쾌활하게 묘사한 뮤직비디오 덕분에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차트 2위라는 스매시 히트를 치면서 이 신인 여가수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음을 알렸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 < She’s So Unusual >에서는 발라드인 ‘Time after time(1위)’과 ‘She bop(3위)’, ‘All through the night(5위)’, 그리고 ‘Money changes everything(27위)’를 포함해 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를 유린하면서 그 무렵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1984년 팝 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미상도 펄펄 난 그녀를 응대해 신인상 트로피를 안겼다. 그 해 마돈나는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당시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 구니스 >의 주제가 ‘The goonies ‘r’ good enough(10위)’로 기세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1986년 가을에는 두 번째 대결인, 이른바 ‘True 경쟁’을 통해 신디는 마침내 마돈나에게 추월을 당했다. 록, 팝, 펑크, 뉴웨이브, 펑크(funk), 레게 등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색조의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해 큰 성공을 낚은 < She’s So Unusual >에 비해 두 번째 앨범 < True Colors >는 그녀 특유의 톡 쏘는 감각이 많이 희석된 대중적 팝으로 약간 빛깔을 달리했다. 앨범의 타이틀 트랙 ‘True colors’로 두 번째 차트정상의 영광을 안고, ‘Change of heart(3위)’와 ‘What’s going on?(12위)’, ‘Boy blue(71위)’가 연속으로 차트를 밟았지만 기존 팬들은 성인 취향의 팝으로 전향한 신보에 적지 않게 실망했고, 이 LP를 기점으로 그녀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 600만장에서 200만장(현재)으로 격감했다. 반면 경쟁자 마돈나의 < True Blue >는 7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1989년에 공개된 세 번째 음반 < A Night To Remember >에서는 싱글 ‘I drove all night(6위)’와 ‘My first night without you(62위)’가 차트에 등장하긴 했지만 어느덧 음악적인 매력은 뚝 떨어져있었다. 반면 마돈나는 역작 < Like A Prayer >를 발표해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 모두를 포유(包有)하면서 5년간의 라이벌 대결은 마돈나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신디 로퍼는 그러나 새 앨범의 홍보 차원으로 내한공연을 가져 국내 팬들에게 시원스런 무대를 선사했고 공연실황이 TV로도 방송되어 열기를 현장에서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달래주었다). 1993년과 1998년에는 < A Hat Full Of Stars >와 < Sisters Of Avalon >을 발표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1994년에는 < 12 Deadly Cyns And Then Some >이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리믹스한 ‘Hey now(87위)’로 마지막 희미한 불꽃을 태웠다. 이 곡은 또한 1970년대 팝 그룹 레드본(Redbone)의 히트곡 ‘Come and get your love(댄스 팝 그룹 리얼 맥코이가 커버해 1995년 19위)’를 샘플링했으며 1995년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와 패트릭 스웨이즈(Patrick Swayze)가 주연한 영화 < 투 웡 푸 >(To Wong Foo)에 삽입되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신디 로퍼의 노래 실력을 두고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데뷔 싱글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1960년대 틴 아이돌 팝 가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I’m gonna be strong’, 그리고 ‘My first night without you’, ‘True colors’ 등은 그녀의 뛰어난 곡 소화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펑크적인 스타일에 의해 굳어진 ‘왈패’ 이미지로 인해 그녀의 음악적 진가는 과소평가 받기 일쑤였으며, 성인 취향의 팝 록으로 변신하자 많은 팬들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신디 로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깜직한 소녀(계집애?) 목소리, 중고품 할인가게 풍의 패션,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 그리고 MTV 시대. 하지만 무엇보다 팬들은 그녀를 통해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단지 재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디 로퍼야말로 ‘1980년대 팝의 바로미터’라고 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녀만큼 ‘비범하게’ 산 사람도 없다.
노래 : Boyz II Men (보이즈 투 맨)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랩(Rap) 음악의 열풍은 한편으로 기존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소울 음악에 대한 향수라는 역풍(逆風)을 몰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4명의 흑인 청년들로 구성된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BoyzⅡMen)은 수려한 보컬 하모니를 무기로, 무너진 소울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단번에 R&B계의 주류로 일대 신분이 상승, 1990년대 R&B 최강자로 떠올...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랩(Rap) 음악의 열풍은 한편으로 기존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소울 음악에 대한 향수라는 역풍(逆風)을 몰고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4명의 흑인 청년들로 구성된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BoyzⅡMen)은 수려한 보컬 하모니를 무기로, 무너진 소울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로 단번에 R&B계의 주류로 일대 신분이 상승, 1990년대 R&B 최강자로 떠올랐다. 흑인 음악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모타운(Motown) 레코드사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위 확실하게 밀 카드가 없어 부진의 늪에 빠졌으나 필라델피아 고교 동창생인 나산 모리스 (Nathan Morris), 마이클 맥커리(Michael Mccary), 숀 스톡맨(Shawn Stockman), 와냐 모리스(Wanya Morris) 이들 4명의 데뷔앨범은 90년대 모타운 사운드의 부활을 예고했으며 모타운 사의 중흥을 1990년대까지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해냈다. 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뉴 에디션(New Edition) 출신의 마이클 비빈스(Michael Bivins)에 의해 발탁, 정식 데뷔를 하게 된 보이즈 투 멘은 1991년 달라스 오스틴(Dallas Austin)과 트로이 테일러(Troy Taylor)가 공동 프로듀서한 데뷔앨범 < Cooleyhighharmarmony >로 대중들 앞에 첫 선을 보였다. 순식간에 차트 3위를 기록하며 플래티넘 고지를 점령한 첫 싱글 ’Motownphilly’는 모타운 사와 보이즈 투 멘 자신들을 홍보하는 내용(모타운+필라델피아의 신조어를 제목으로 따옴)에다 뉴 잭 스윙 형식을 취한 현대적 두 왑 곡으로 그들의 은인 마이클 비빈스가 제작에 참여하고 랩을 담당했다. 이 곡이 아카펠라의 맛 보여주기를 시도했다면 두번째 싱글 ’It’s so hard to say goodbye to yesterday’는 아카펠라의 진수를 보여준 곡이었다. 그들의 주무기인 환상적인 보컬 하모니를 들려준 이 곡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Black or white’에 밀려서 2위에 수주간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들의 음악 색깔을 여과 없이 드러낸 명곡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곡의 영향으로 보컬 그룹들은 가창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아카펠라 곡을 앨범에 수록하는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앨범에선 이외에도 고급스런 R&B 스타일을 선보인 ’Uhh ahh’(이상 3곡의 싱글은 차례로 R&B차트 정상에 올랐다.)와 맨하탄스(Manhattans)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Please don’t go’ (9위)등이 인기를 얻었고, 앨범도 최고 순위 2위까지 오르며 9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엄청난 히트작이 되었다. 각종 시상식에서 R&B 부문의 상들을 휩쓸며 아직 10대의 티를 벗지 못한 4명의 소년들을 R&B계의 가장 주목할 신성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에서 데뷔작의 성공은 시작에 불과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2년 그들은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첫 인연을 맺고 에디 머피(Eddie Murphy) 주연의 영화 < 부메랑 >의 사운드트랙 수록곡이자 역작인 ’End of the road’를 부르게 된다. 다분히 보이즈 투 멘을 위해 만들어진 곡임을 증명하듯 4명의 멤버는 자신들의 파트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또한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Don’t be cruel/Hound dog’으로 기록한 11주의 기록을 훌쩍 넘어서 13주간 싱글차트 정상을 지키는 신기원을 이룩한다. 그래미상 2연패와 플래티넘 획득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해 또 하나의 사운드트랙 < 더 잭슨스: 아메리칸 드림 >에 다시 아카펠라 곡을 선사한다. 파이브 새틴스(Five Satins)의 1956년도 오리지널을 리메이크한 전통적인 두 왑 스타일의 ’In the still of the nite(I’ll remember)’로, 이 곡 역시 팝 차트 3위, R&B차트 4위에 오르며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3년 발매된 캐롤 앨범 < Christmas Interpretations >은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가 제작에 참여하고 함께 입을 맞춘 ’Let It snow’(19위)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듬해 대망의 2집 앨범 < Ⅱ >를 내놓게 되는데 이들에겐 소모포어 징크스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로 데뷔하여 5주간 그 자리를 지켰고 미국에서만 12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렸다. 모타운 레코드사에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베이비페이스가 만들고 프로듀서한 첫 싱글 I’ll make love to you’는 빠른 속도로 차트 정상을 점령하더니 14주간이나 머물러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불과 1년만에 갱신한 대선배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과 타이를 이루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곡을 차트 1위에서 끌어내린 곡이 두 번째 싱글 ’On bended knee’였다는 점이다. 비틀즈와 엘비스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기록을 20대 초반의 흑인 청년들이 손쉽게 이루어낸 사실에 팝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지미 잼 & 테리 루이스가 프로듀서한 ’On bended knee’는 아름다운 화음과 세련된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으로 1위 자리를 2번에 걸쳐 오르며 총 6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외에도 ’Thank you’(21위), 매끄럽기 그지없는 ’Water runs dry’(2위), ’Vibin’(56위)등이 차례로 차트에 올라 인기를 얻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앨범에는 팝계의 최고의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 앞서 언급한 베이비페이스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데뷔 앨범을 함께한 달라스 오스틴, 트로이 테일러, 브라이언 맥나이트, 엘 에이 레이드, 토니 리치등 모두가 쟁쟁한 일급 프로듀서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보이즈 투 멘은 다시 한번 1995년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 함께 한 ’One sweet day’로 인기 정점에 오른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와 최고의 보컬그룹의 만남을 대중들은 16주간 차트 정상이라는 신기록으로 환호했으며 판매고는 200만장을 훌쩍 넘어섰다. 같은 해에 보컬 그룹으로 드물게 리믹스 < The Remix Collection >앨범에 도전했는데 이 앨범엔 브랜디(Brandy)와 와냐의 듀엣곡 ’Brokenhearted’(9위), 엘 엘 쿨 제이(L.L. Cool J)와 함께한 플래티넘 싱글 ’Hey lover’(2위)등이 기존의 히트곡들의 리믹스 버전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고 신곡 ’I remember’(46위)도 선전을 했었다. 이후 2년 동안을 필라델피아 교외에 묻혀 앨범 제작에 몰두했고 97년 3집 < Evolution >을 들고 나타났지만 이들의 새 앨범은 기대만큼 큰 화제를 얻지는 못했다. 그 단적인 면이 앨범 판매고에서 나타나 신작은 반짝 인기에 그치며 200만장을 넘기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였다. 지미 잼 & 테리 루이스의 ’4 Seasons of loneliness’와 베이비페이스의 ’A song for mama’를 적극 밀었지만 첫 싱글은 차트 1위에 1주간 머무르는데 그쳤고, 두번째 싱글은 영화에 삽입하면서 홍보전략을 폈지만 7위까지 오르는 그들로선 평범한 히트를 기록하고 말았다.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퍼프 대디(Puff Daddy)를 프로듀서로 초빙한 수고로움도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결과만 초래했다. 1998년에는 다이안 워렌이 만든 < 이집트의 왕자 > 사운드트랙의 수록곡 ’I will get there’(32위)로 차트에 다시 등장했고, 데뷔 이후 모타운 레코드의 달러박스로 큰 몫을 차지했던 이들은 이듬해 레코드사의 인수 합병으로 인해 유니버살(Universal) 레코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대망의 2000년을 맞이하여 멤버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네번째 앨범 < Nathan Michael Shawn Wanya >를 발매하기에 이른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그 동안의 앨범 작업마다 참여했던 유명 프로듀서들의 이름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멤버 자신들이 직접 곡을 쓰고 프로듀서 했기에 자신들의 색깔을 제대로 냈고 진정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처음 시도하는 빠른 라틴 비트의 ’Beautiful women’, ’Good guy’로 시대의 흐름을 읽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테크노를 듣는 듯 신선한 ’Bounce, shake, move, swing’, 포크 송처럼 부드러운 ’Do you remember’, 특기인 아카펠라를 가미한 두 왑 ’I do’등 전체적으로 수작으로 손꼽을 만한 앨범이었다. 하지만 앨범 홍보가 미비했고 3집에서 시작된 대중들의 피로감 때문에 이미 많은 팬들이 등을 돌린 탓도 있었다. 결국 2001년 베스트 앨범 < Legacy: The Greatest Hits >를 끝으로 아리스타(Arista) 레코드로 새롭게 둥지를 틀었고 절치부심 새 음반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10대에 데뷔하여 현재 30대 초반이 된 이들이 10년 동안 팝과 R&B계에 끼친 영향력은 그들 이후 많은 보컬그룹들이 생겨났다는 점과 더불어 이런 보컬 그룹들의 음악적 실력을 비교하는 잣대가 되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곡들이 차트에 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져 갔지만 유독 이들의 노래들만은 오랫동안 머물며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이들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웅변하는 대목이다.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그러나 가장 천대받는 가수 이처럼 극도로 엇갈린 가수는 없다. 미국의 대중 주간지 < 피플 >은 92년 “그는 팝 음악의 창공에 독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며 “팬들로부터 그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동시에 음악 비평가들로부터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받는 아티스트도 드물 것이다”고 기술했다. ‘이 시대의 스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1990년 신년 벽두에 ‘그대없이 어떻게 살아가리?(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1990년대 첫 슈퍼스타가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메가톤급 히트 앨범 < 영혼의 공급자(Soul Provider) >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기록적인 판매로 대중적인 명성을 구가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 당했다. 평론가들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호된 질책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거의 ‘두들겨 패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그를 가리켜 창조성 없이 악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단계에 그친다는 의미에서 ‘팝의 썰매’라고 규정짓고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이 돌파 할 수 없는 노래에 결코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틀 속에 안주하려 한다. 그와 음악과의 관계는 스티븐 시걸과 영화와의 관계나 같다” 말이 그렇지 이것은 모욕이나 매 한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평자들로부터 아티스트란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볼튼이 소울의 고전을 비롯해 흘러간 명곡을 멋들어지게 재해석해 노래해도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구동성으로 “원작의 기품을 버려 놓았다”고 질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 롤링 스톤 >지의 평가였다. 이 잡지는 1993년 43명의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 그를 ‘최악의 남자 가수’로 선정했다. 또한 빅 히트작 < 불후의 고전(Timeless, The Classics) >를 ‘최악의 앨범’으로 뽑아 미국에서만 5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간 대중적 인기를 무색케 해 버렸다. 그가 이처럼 비평계의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물론 그의 보컬 스타일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핏줄을 솟게 하고 마치 토해 내는 듯한’ 창법을 구사한다. 4옥타브를 충분히 넘나드는 넓은 음역, 이것이 팬들에게는 환상이었지만 평론가들의 귀에는 높고 답답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가창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금방 눈치챌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곧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들은 예술적 고뇌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없는 그 작위가 결국은 상업성을 노린 것임을 경계한다. 로버트 힐번이 지적하는 ‘안주적 자세’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대중적 성공에 떠밀려 아티스트적 실험 정신을 휴지화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볼튼은 < 영혼의 공급자 > 이후 앨범들인 < 시간, 사랑 그리고 부드러움(Time, Love And Tenderness) >과 < 불후의 고전 >에서 새로움을 선사하기보다는 전작의 성공패턴을 답습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옛 곡의 리메이크가 성공하자, 줄줄이 리메이크 작품을 내놓았으며 더구나 보컬 스타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변명의 여지없이 전작의 성공 재창출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리는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모험을 가능한 배제한 채 빅히트된 음반(Soul provider)을 모델로 그 스타일을 철저히 쫓는다는 얘기다. 비평가들이 이처럼 유난히 그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냥하는 데는 그가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평론가들은 노래만 하는 싱어일 경우 그가 대중적 호응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대중의 기호에 따라 그들의 정서를 위무해 주는 팝 가수도 나름대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곡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싱어송라이터의 경우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가 앨범 판매량을 늘리기에 얽매여 있을 때는 가차없이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린다. 만약 볼튼이 단순한 싱어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그처럼 잔인한 혹평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연 이러한 비평가들의 철저한 외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평가들이 뭐라 떠들어도 압도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대중이라는 ‘응원군’을 내세워 여유를 잃지 않았고 앨범의 높은 판매고를 ‘비평에 견디는’(Critic-proof) 방파제로 제시하곤 했다. 사실 그의 노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음악 관계자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그가 1988년 ‘만의 부두에 앉아(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를 리메이크했을 때 이 곡의 원작자인 오티스 레딩의 미망인 젤마 여사로부터 극찬을 받은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튼에게 편지를 써서 또는 공개석상에서 그의 노래가 “지금까지 나온 남편 곡의 무수한 버전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만약 지하에 있는 남편도 들었다면 흡족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볼튼의 강력한 후원자인 어머니 헬렌 볼로틴(볼튼의 본명은 Bolotin) 여사는 “내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라며 비평계의 시각을 몰지각으로 단정한다. 그와 곡을 함께 쓰는 오랜 친구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은 한편으로 볼튼에 대한 평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대중의 호응을 증폭시켰다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한 남자가 혹독하게 비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노래할 때 여성들은 오히려 그를 사랑해 준다. 여성들은 거기서 녹아 버린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평론가들의 무차별 공격이 도리어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그를 감싸주게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그의 음악팬들은 절대 다수가 여성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처럼 비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남자가-더구나 수려한 외모를 갖춘 남자가!-애절하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노래할 때 대부분이 여성들은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이클 볼튼과 비평과의 대치는 곧 ‘감성적인 여성 팬들’과 ‘날카로운 평론가들’간의 보이지 않는 대결(?)의 측면도 가세된 셈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란 어떤 형태로든 비평가들의 눈초리를 암암리에 의식하게 된다. 그는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지 1991년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 가수상을 받던 날 밤 기자들에게 “무례한 사람들은 내 엉덩이에 키스하라”고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무례한 사람들이란 마구 펜을 휘갈기는 저널리스트나 비평가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그런데 1993년 하반기에 그가 내놓은 앨범 < 한가지 >는 상당히 비평가들을 의식해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보컬의 톤도 많이 낮추고 자작곡의 비중을 높였으며 비판의 핵이었던 리메이크 남발도 자제, 옛곡은 빌 위더스의 ‘내게 기대어(Lean on me)’ 한 곡으로 대폭 줄여 버린 것이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제까지 볼튼의 앨범 중 최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가로 대중적인 음반 판매 실적은 과거에 비해 저조해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지는 못했다. 그의 상업성이 유달리 지적 받게 된 데는 또한 그의 ‘눈물겨운 과거’도 한 요인이 되었다. 7살 때 섹스폰을 잡고 11살에 기타를 치는 등 음악 생활을 일찍 시작했지만 그의 청년기는 지극히 불우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실패해 야간 업소 출연으로 겨우 연명해 나갈 정도였다. 1975년 레코드점 여직원인 모린(Maureen)과 결혼한 이후에도 생활은 개선되지 않아 노래 과외와 아이 돌봐주는 일, 즉 베이비시터로 집세를 충당하곤 했다(참고로 그가 봐 준 아이 중의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폴라 압둘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한 악연으로 발전해 1990년 마이클 볼튼의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가리?’를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곡이 폴라 압둘의 ‘오포지츠 어트랙트(Opposites attract)’였고 이듬해 앨범 1위를 볼튼과 바통 터치한 주인공도 폴라 압둘이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볼튼 부부와 세 딸은 마카로니와 치즈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며 볼튼은 허구한 날 식탁에 앉아 “어떻게 집세 내고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가”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터널의 끝에서도 빛을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고 표현했다. 때문에 36세가 되어서야 성공했을 때(그는 1954년생으로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 출신) 주변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스타가 된 케이스’라고 하자 “무슨 소리냐. 성공하기까지 대략 3천6백42번의 밤을 보냈다”고 응수했던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가 바닥 생활을 청산하자마자 곧바로 상업적으로 치달은 것을 못마땅해한다. 그럴수록 과거의 고난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작품에 구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성공은 사생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 영혼의 공급자 >가 수면 위로 부상하던 1989년 아내 모린과 15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점이 볼튼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필 가장 잘 나가는 때에 성공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이혼 증언 서류에 대한 변호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너무 아이러니컬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이듬해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리하여 방문하는 관계로 매듭짓긴 했지만 세 딸들 아이사(20), 홀리(18), 타린(16)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성심 성의껏 딸들을 보호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인정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TV배우인 니콜레트 셰리단(Nicollette Sheridan)과 건전한 연인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마이클 볼튼은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성공한 뮤지션과 비평계간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를 생각하게 한다. 앨범이 많이 팔려 나갈수록(진지함이 없을 경우) 비평가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그처럼 실감나게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는 성공과 함께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 스스로도 “성공하면 할수록 그것은 네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비디오 게임처럼 첫 번째 스크린을 통과하고 나면 너를 쏘려고 레이저 미사일을 단 비행접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의 대가는 쓰디쓴 법이다.
‘과연 미국 대중음악의 힘과 독점적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이며 선수 층(?)은 얼마나 두터운가?’ 매년 2월이 되면 떠오르게 되는 우문(愚問)들이지만 그래미상은 이 물음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2002년 올해에도 이름도 모르는 인디아 아리(India Arie)라는 신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주요 4개 부문을 포함, 모두 7개 부문의 후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라스(NARAS)... ‘과연 미국 대중음악의 힘과 독점적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이며 선수 층(?)은 얼마나 두터운가?’ 매년 2월이 되면 떠오르게 되는 우문(愚問)들이지만 그래미상은 이 물음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2002년 올해에도 이름도 모르는 인디아 아리(India Arie)라는 신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주요 4개 부문을 포함, 모두 7개 부문의 후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라스(NARAS) 위원들은 그 어리석은 질문에 친절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는다. 북미 대륙에서조차 지지 기반이 미약한 아티스트일지라도 일단 실력과 가능성이 검증만 되면 미국의 음악관계자들은 그 음지의 무명을 양지로 초대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그들에 대한 커트라인도 없다. 지금 막 데뷔한 신인일 수도 있고, 경력은 오래 되었으되 불운으로 빛을 보지 못한 늦깎이 싱어가 대상이 될 수도 있다. 1989년 32회 그래미상 시상식장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보니 레이트(Bonnie Raitt)도 ‘20년 무명’의 긴 잠복기를 깨고 수면 위로 급부상해 비로소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한 대기만성형 블루스 여가수다. 그녀가 불혹의 나이에 < Nick Of Time >으로 그래미 트로피를 품에 안지 못했다면 현재와 같은 대가로서의 명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음반은 당시 ‘그래미효과’ 덕분에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올라 레이트는 음악적 인정과 더불어 상업적 성공이란 전리품도 얻었다. 보니 레이트는 1949년 11월 8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 195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였던 존 레이트(John Raitt)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유전적 형질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내비쳐 12살에 기타의 매력에 도취되었고, 청소년 시절부터는 블루스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델타 블루스, 미시시피 블루스, 시카고 블루스 등 큰 땅덩어리만큼 그 특유의 지방색이 무지개처럼 각양각색인 미국 전역의 블루스를 들으며 감성을 확대시켜 나간 그녀는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 하울링 울프(Howlin’ Wolf)와 여성 블루스 싱어 시피 월레스(Sippie Wallace) 등과 무대에 함께 서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젊은 그녀의 잠재력과 시장성을 발견한 워너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71년에 처녀작 < Bonnie Raitt >를 세상에 띄워 보냈지만 대중들로부터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생의 슬픔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구슬픈 블루스를 소화하기엔 너무나 평탄한 삶을 영위한 그녀와 블루스는 어쩌면 물과 기름처럼 융화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평자들은 젊고 여린 외모의 백인 여자가 직접 기타를 연주하면서 블루스를 구사한다는 사실, 그 희소가치에 주목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보니 레이트에 대한 평단의 호의는 그녀가 슈퍼스타로 등극한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1970년대 동안 거의 매년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지만 월남전의 패배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적인 위기를 잊기 위해 단순한 팝, 디스코 아니면 헤비메탈에 빠진 미국 대중들은 그녀의 청승맞은(?) 블루스를 외면했다. 1970년대에 나온 7장의 앨범 모두가 공개되는 족족 실패했다. ‘평단의 찬사’와 ‘대중의 냉담’이란 대치전선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1990년 < Nick Of Times >으로 대중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기 전, 차트에 명함을 내민 곡이라곤 ‘Runaway(57위)’와 ‘You’re gonna get what’s coming(73위)’ 뿐이다. 그나마 앞 곡은 1950년대 로큰롤 싱어 델 섀넌(Del Shannon)의 원곡이며 후자는 ‘Bad case of loving you’의 주인공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가 작곡해준 것으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였다. 특히 ‘Runaway’가 1977년 본고장 라디오에서 환영을 받으면서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것도 잠시, 1980년대 신시사이저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보니 레이트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우울했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서 발표한 < Nick Of Time >은 레이트의 음악 인생을 180도 바꾼 역작이었다. 팝 록 밴드 워스 낫 워스(Was Not Was)의 멤버인 돈 워스(Don Was)와 본인이 공동으로 프로듀스한 이 작품으로 그녀는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 ‘여성 팝 가수’, ‘여성 록 가수’ 부문 트로피를 품에 안았고, 그녀의 음악적 지주인 블루스의 거장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와 함께 ‘I’m in the mood’를 불러 ‘정통 블루스’ 부문도 수상, 총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또한 오랜 무명과 알코올중독을 극복했다는 점이 대중의 온정을 자극하면서 순식간에 앨범은 500만장이 팔려나갔다. 앨범의 광채는 싱글 ‘Have a heart(49위)’와 ‘Nick of time(92위)’의 저조한 성적과 큰 대조를 이뤘다. 1991년에 공개된 < Luck Of The Draw >에 와선 앨범 아닌 싱글로도 시장을 관통하는데 성공한다. 그녀에게 최초 톱10이란 영광을 안겨준 ‘Something to talk about(5위)’와 음악 전문지 < Mojo > 선정 가장 위대한 노래 100곡 중 당당 8위를 차지한 발라드 명곡 ‘I can’t make you love me(18위)’, 업 템포의 ‘Not the only one(34위)’가 연이어 차트를 누볐다. 앨범 판매량은 자그마치 700만장. 이 음반으로 그녀는 또 다시 ‘록 보컬’, ‘팝 보컬’, ‘록 보컬 그룹’(델버트 맥클린튼과 함께 부른 ‘Good man, Good woman으로 수상)의 3개 부문의 그래미 트로피를 수상했다. 1994년의 CD < Longing In Their Hearts >에서도 ‘Love sneakin’ up on you(19위)’를 배출했고 이 앨범은 ‘그래미 단골’임을 증거하면서 ‘팝 앨범’ 상을 수상했다. 다시 1996년에는 지미 본(Jimmie Vaughan),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버디 가이(Buddy Guy),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 비 비 킹(B. B. King), 닥터 존(Dr. John), 아트 네빌(Art Neville) 같은 대가들과 함께 연주한 ‘SRV Shuffle’로 ‘록 연주’ 부문을 수상했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듯 지난 20여년 동안 고대했던 그래미 트로피를 6, 7년 만에 집중해 싹쓸이한 것이다. 이제 어떤 누구도 당대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블루스의 명인으로 보니 레이트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본고장에서는 이처럼 화려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불우하다. 가장 미국적인 컨트리, 포크, 블루스의 감성을 아우른 음악이 대부분 10대와 20대가 팝 음악 수용연령층인 국내시장과 친화되지 못한 탓이다. 1995년에 개봉된 영화 < 보이스 온 더 사이드 >에 수록된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You got it(33위)’을 커버한 것이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보니 레이트의 곡으로 남아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1991년 미국 팝 계는 새로운 신동의 출현으로 들떠 있었다. 데뷔앨범 < T.E.V.I.N. >을 막 발표했던 열 네 살짜리 흑인소년 테빈 캠벨은 당시 그 나이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경이에 가까운 가창력과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리듬감을 보여주었다. 뉴 잭 스윙 풍의 댄스와 발라드를 자유자재로 소화해냈던 그에게 팝 관계자들과 팬들은 ‘제2의 스티비 원더’를 기대했다. 게다가 캠벨을 후원하고 있는 이들이 당대 ... 1991년 미국 팝 계는 새로운 신동의 출현으로 들떠 있었다. 데뷔앨범 < T.E.V.I.N. >을 막 발표했던 열 네 살짜리 흑인소년 테빈 캠벨은 당시 그 나이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경이에 가까운 가창력과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리듬감을 보여주었다. 뉴 잭 스윙 풍의 댄스와 발라드를 자유자재로 소화해냈던 그에게 팝 관계자들과 팬들은 ‘제2의 스티비 원더’를 기대했다. 게다가 캠벨을 후원하고 있는 이들이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와 프린스였으니 기대감은 더욱 컸다. 세간의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테빈 캠벨은 몇 년간 상승곡선을 타며 그에 부응했다. 그러나 그는 스티비 원더가 되지는 못했다. 스물 두 살이 되어 내놓은 네 번째 앨범 < Tevin Campbell >에는 한층 성숙해진 그의 면모와 괜찮은 내용물들을 담겼지만 예전만큼의 번뜩이는 재능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앨범은 현재까지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뛰어난 자질과 음악성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너무 일찍 만개해서인지, 아니면 주위의 과도한 기대에 따른 부담 때문이었는지 결국 조로하고 말았다. 텍사스에서 나고 자란 테빈 캠벨은 1988년 텔레비젼 쇼 프로그램인 < Wally & The Valentines >와 프린스의 영화 < Graffitti Bridge >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의 존재를 알린 것은 이듬해 퀸시 존스의 명작 < Back On The Block >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여성 싱어 시다 가렛의 추천으로 앨범에 참여한 캠벨은 ‘Tomorrow (Better you, better me)’를 기가 막히게 부름으로써 팝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거장 퀸시 존스의 눈에 든 테빈 캠벨은 데뷔작 < T.E.V.I.N. >을 내놓으며 솔로가수로서 성공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프린스와 퀸시 존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그 앨범에서 < Graffitti Bridge > 사운드트랙에 수록되었던 프린스의 ‘Round and round’와 발라드 ‘Tell me what you want me to do’ 등의 노래들이 히트했고, 사람들은 곧 마이클 잭슨의 어린 시절과 프린스 전성기 사이의 공통분모를 그에게 찾아냈다. 1993년에 발표한 2집 < I’m Ready >에서도 변성기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의 미성을 들을 수 있었다. 프린스와 퀸시 존스가 여전히 그를 독려하는 가운데 베이비페이스가 참여해 당시의 트렌디한 감각을 덧입혔다. ‘Can we talk’, ‘I’m ready’ 같은 곡들이 베이비페이스의 놀라운 대중적 감성을 확인할 수 있는 트랙들. 한편 프린스는 프레이슬리 파크(Paisley Park)라는 예명으로 ‘The halls of desire’, ‘Uncle Sam’ 같은 펑키한 노래들을 작곡해줬고, 코러스에도 참여했다. 그 곡들에서 테빈 캠벨의 보컬은 거의 프린스처럼 들린다. 3년 만에 내놓은 앨범 < Back To The World >는 테빈 캠벨의 성인신고작이다. 베이비페이스, 숀 퍼피 콤스 등이 프로듀서로 나선 이 앨범은 그러나 상업적인 실패를 처음으로 맛봤고 이때부터 테빈 캠벨의 짧은 신화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1999년 발표한 < Tevin Campbell >도 전술한 바와 같이 수작이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현재로선 비록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일지 몰라도 테빈 캠벨이 몇 년간 보여줬던 신선한 충격과 주옥같은 트랙들의 소중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테빈 캠벨을 모르는 요즘 세대 R&B 팬들에게 2001년에 나온 그의 베스트 앨범 < The Best Of Tevin Campbell >을 권한다. 스티비 원더에서 마이클 잭슨, 프린스까지 넘나든 그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댄스 팝 음악 씬을 볼 때 미국에서는 마돈나,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등이 최고의 스타였던 1980년대 중반을 넘어 등장한 데비 깁슨은 (마돈나가 팝계의 현상이라고 한다면) 1980년대 후반 팝의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마돈나 이후, 그리고 1990년대 말의 브리트니 스피어스 이전에 데비 깁슨이 있었다는 것이다. 데뷔 당시 17살의 틴에이저였던 데비 깁슨은 풍부하고 잘 조합된 목소리로 발라드 뿐 아... 댄스 팝 음악 씬을 볼 때 미국에서는 마돈나,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등이 최고의 스타였던 1980년대 중반을 넘어 등장한 데비 깁슨은 (마돈나가 팝계의 현상이라고 한다면) 1980년대 후반 팝의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마돈나 이후, 그리고 1990년대 말의 브리트니 스피어스 이전에 데비 깁슨이 있었다는 것이다. 데뷔 당시 17살의 틴에이저였던 데비 깁슨은 풍부하고 잘 조합된 목소리로 발라드 뿐 아니라 마돈나가 펼쳐놓은 댄스 팝의 경향들을 캐치해내며, 재능있는 팝 뮤지션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US 차트에서 데비 깁슨의 시대는 비록 짧았지만, 그 기간동안 데비 깁슨은 2개의 No. 1 곡과 두 개의 멀티 플래티넘 앨범을 만들어냈다. 5살 때부터 빌리 조엘의 스승이었던 모튼 애스트린(Morton Estrin)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곡을 쓰기 시작한 음악적인 ‘어린이’ 데비 깁슨은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Make sure you know your classroom’이라는 곡을 쓰기 시작했고, 12살 때엔 ‘I come from America’라는 곡으로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사방에 알렸다. 그녀의 부모들은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치맛바람 못지않게 자식에게 열정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어서, 직접 뛰어다닌 결과 덕 브레잇하트와 계약을 해냈고, 이때무터 데비 깁슨ㅇ은 편곡, 엔지니어, 프로듀스의 일들을 겸비하며 여러가지 악기들을 다루게 되었다. 이후 1985년까지 만든 곡만 해도 100곡이 넘는다는데… 한때 프린스라 불렸던 아티스트와 같은 과인였나보다. 그리고 나온 앨범들과 히트곡들, 아마도 1980년대 말의 흥겨운 데비 깁슨만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데비 깁슨을 당시의 상업직인 하이틴 팝 스타로 여기는데서 그칠 것이 분명하지만 검증된 팝 음악적 재질을 가지고 있던 데비 깁슨은 ‘데비 깁슨 현상’이 사라진 1990년대에도 데보라 깁슨이라는 성인용(?)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자신의 음반들을 제작했고, < 그리스(Greese) >, < 레 미제러블 >, < 미녀와 야수 >와 같은 뮤지컬과 영화 등에 출연하며 끊임없는 음악적 욕심을 실현해오고 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아티스트이다. 아직까지도 데보라 깁슨의 공연들은 끊임없는 매진 행렬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동시대의 음악 씬에서 그녀가 여전히 평가받을 가치가 있는 음악적 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데뷔한 지 14년, 그리고 6장의 정규 스튜디오 앨범을 발표한 그녀를 노땅 혹은 나이먹은 올드 뮤지션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분들에게 한가지만 상기시켜주고 싶다. 데비 깁슨 아니 데보라 깁슨은 이제 30대에 들어선 창창한 현재진행형의 뮤지션이라는 것. 인터넷 상에서 존재하는 데보라 깁슨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수많은 팬클럽들, 그것은 왕년의 틴에이지 스타라고만 그녀를 기억하는 한국의 팬들에게 데보라 깁슨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래 : Vanessa Williams (바네사 윌리암스)
미스아메리카 출신으로 팝 음악계에 나름의 강렬한 무늬를 새긴 여가수다. 동시에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ynn Williams)는 부모가 모두 음악학위를 가진 ‘뮤직 패밀리’ 출신으로 유년기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프렌치 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으며, 목소리 또한 빼어났다. 1981년... 미스아메리카 출신으로 팝 음악계에 나름의 강렬한 무늬를 새긴 여가수다. 동시에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난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ynn Williams)는 부모가 모두 음악학위를 가진 ‘뮤직 패밀리’ 출신으로 유년기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프렌치 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으며, 목소리 또한 빼어났다. 1981년 시라쿠스(Syracuse) 대학 연극예술학과에 진학하여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을 구체화시켜 나가지만 외모 덕분(?)에 샛길로 빠지게 된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던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캠퍼스 퀸으로 손꼽혔고, 결국 ‘미스 뉴욕’을 거쳐 역사상 최초의 흑인 ‘미스 아메리카’에 오르는 영광을 맞이한다. 그러나 미인대회에 참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마저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한다. 미국의 인종주의 언론은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그녀가 성인잡지 < 펜트하우스 >에서 찍었던 누드사진으로 바네사는 마침내 1984년 미스아메리카 왕관을 박탈당하고 만다. 절망은 그러나 곧 전화위복의 기회로 다가온다. 다시 노래에 열정을 쏟아 펑키의 대부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백업 보컬로 참여, ‘Hey good looking’, ‘Do fries go with that shake?’와 같은 곡에서 가능성을 타진했다. 곡 자체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바네사의 매력에 관심을 가진 윙 레코드(Wing Record)는 그녀에게 본격적인 가수로서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1988년 ‘미스아메리카’ 축출 사건을 겪은 지 4년 만에 드디어 데뷔 앨범인 < Right Stuff >을 발표한다. ‘어번 R&B’ 장르를 선보인 그녀는 이 앨범 하나로 4년 전 불명예를 대중의 기억 속에서 말끔히 씻어낸다. 첫 싱글인 ‘Dreaming’이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He’s got the look’, ‘Darling I’가 내리 인기를 얻었고, 연이은 인기행진으로 그 해 최우수신인 부문을 포함한 그래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광명을 맛본다. 덩달아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에서 이미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1년 작 < The Comfort Zone >도 데뷔 앨범의 성공을 확대 재현했다. 수록곡인 발라드 곡 ‘Save the best for last’는 5주간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대박을 터뜨렸고, ‘Running back to you’ 등이 인기를 누리며 앨범 역시 더블 플래티넘(200만장)의 성공을 거둔다. 당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던 < 비벌리힐스의 아이들 >(Beverly Hills, 90210) 사운드트랙 역시 그녀의 성공 화염에 기름을 붓는다. 여기선 브라이언 맥나이트와 호흡을 고른 ‘Love is’가 차트 5위에 오르며 당시 인기가 절정에 올랐음을 알렸다. 전작에서 펑크, 재즈, R&B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기 시작한 그녀는 세 번째 앨범 < The Sweetest Days >에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는 음악적 욕구를 다시 한 번 실현시키며 비주얼 가수가 아니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준다. 동명 타이틀 곡 ’The sweetest days’, 스팅(Sting)의 재즈 넘버를 리메이크한 ‘Sister moon’등이 인기를 얻었다. 특히 후자는 곡의 주인 스팅이 직접 백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맡아 화제가 되었다. 스타의 자리를 굳힌 그녀는 어린 시절 꿈꾸어 왔던 연기 활동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하고, 결국 1994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 Kiss Of The Spiderwoman >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다. 이후 < Motown Returns To The Apollo >, < The Boy Who Loved Christmas And Stompin’ At The Savoy >, < Another You >, < Harley Davidson And The Marlboro Man >등 다수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주연했으며, R&B TV쇼 < The Soul Of VH-1 >의 진행을 맡기도 하였다. 1995년 디즈니 만화영화 < 포카혼타스(Pocahontas) >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주제곡인 ’The color of the wind’를 히트시키고 캐롤 앨범, 1997년작 < The Next >까지 가수로서의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전성기의 드라이브는 끊겼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음악보다는 영화에 치중했다. 이 무렵 아놀드 슈왈츠네거와 함께 한 영화 < 이레이저 >(Eraser)를 통해 영화배우로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TV 미니시리즈인 < Odyssey >에 출연하여 인기를 누렸고, 영화 < Dance With Me >에서는 화려한 라틴 댄스까지 선보이며 연기자로서 기반도 확실히 구축했다. 1998년에는 10년 음악생활을 정리하는 베스트 < Greatest Hits-The First Ten Years >를 발표했다.
가끔 천재 뮤지션의 자녀들이 불우하게 자라는 것을 본다. 그들의 명성이나 재능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종종 그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부담과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자녀들은 부모의 기에 억눌려 지내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부모들이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못 할 때다. 팝 역사를 보면, 소위 천재로 불리는 뮤지션들의 상당수가 가정불화로 이혼해 딴 살림을 차리거나 약물에 빠... 가끔 천재 뮤지션의 자녀들이 불우하게 자라는 것을 본다. 그들의 명성이나 재능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종종 그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부담과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자녀들은 부모의 기에 억눌려 지내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부모들이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못 할 때다. 팝 역사를 보면, 소위 천재로 불리는 뮤지션들의 상당수가 가정불화로 이혼해 딴 살림을 차리거나 약물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존 레논이 그랬고, 밥 딜런이 그랬다. 때문에 그 아들인 줄리앙 레논과 월플라워스의 제이콥 딜런은 가슴에 큰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야만 했다. ‘California dreaming’의 주인공 마마스 앤 파파스, 그리고 비치 보이스의 멤버들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들이 모두 이혼한 이유로 딸들은 한쪽 부모를 등진 채 성장했다. 그렇게 쓸쓸히 자란 그 딸들이 모여 만든 그룹이 바로 여성 팝 트리오 윌슨 필립스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존과 미셸 필립스의 딸 차이나 필립스, 그리고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의 두 딸 카니 윌슨, 웬디 윌슨으로 구성된 윌슨 필립스는 가녀린 팝 감수성과 부모들에게 물려받은 아름다운 하모니로 순식간에 팬들을 매료시켰다. 1990년 8월, 프로듀서 글렌 발라드(Glenn Ballard)와 이글스의 조 월시,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 등 베테랑 뮤지션들을 초빙해 만든 데뷔앨범 < Wilson Phillips >는 무려 5백만 장이 팔려나갔다. 신인으로서는 놀랍게도, ‘Hold on’, ‘Release me’, ‘You’re in love’ 등 3곡의 싱글차트 1위곡을 비롯해 5곡의 히트곡을 배출했다. 분명 이들의 실력도 꽤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아무래도 이름난 부모들의 위력이 컸다. 부모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유명세 덕에 데뷔 이전부터 화제를 모을 수 있었고, 데뷔하자마자 그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었다. 1992년 1월에는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기념앨범 < Two Rooms >에 참여해 ‘Daniel’을 녹음하기도 했다. 에릭 클랩튼, 로드 스튜어트, 티나 터너, 스팅, 조지 마이클 같은 최정상급 뮤지션들과 함께 앨범작업을 했다는 사실에서 윌슨 필립스가 꽤 평가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의 호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92년 7월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Shadows & Light >는 ‘You won’t see me cry’ 같은 히트곡을 내며 초반에 반짝하더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윌슨 필립스의 끝을 의미했다. 실패의 아픔을 견딜 수는 없었는지, 이듬해 트리오는 곧바로 해산했다. 팀 해체 후 윌슨 자매는 1993년 < Hey Santa! >를 내놓았고, 1997년에는 아버지 브라이언 윌슨과 화해하고 윌슨스(The Wilsons)라는 그룹을 결성, 앨범을 발표했다. 미모가 가장 빛났던 차이나 필립스도 역시 1995년 솔로앨범 < Naked And Sacred >을 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배우 윌리엄 볼드윈과 결혼한 필립스는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천재의 딸들’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분연히 뭉쳤던 윌슨 필립스는 90년대 초반 가장 성공했던 여성 트리오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부모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보냈던 팬들의 사랑은 자신들의 옛 우상에 대한 잠시간의 예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부모를 이겨내기란 역시 쉽지 않다.
노래 : Sinead O'Connor (시네이드 오코너)
밴드 : Tom Petty & The Heartbreakers (탐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즈 (락 밴드))
멤버 : 톰 페티(Tom Petty, 보컬, 기타), 조니 선더스(Johnny Thunders, 보컬, 기타), 왈터 루어(Walter Lure, 보컬, 기타), 제리 놀란(Jerry Nolan, 드럼), 빌리 래쓰(Billy Rath, 보컬, 베이스) 멤버 : 톰 페티(Tom Petty, 보컬, 기타), 조니 선더스(Johnny Thunders, 보컬, 기타), 왈터 루어(Walter Lure, 보컬, 기타), 제리 놀란(Jerry Nolan, 드럼), 빌리 래쓰(Billy Rath, 보컬, 베이스)
미국 보스턴 출신의 헤비메탈 밴드 익스트림은 이름처럼 극단적인 음악을 하는 그룹이 절대 아니다. LA 메탈의 끝물에 등장하여 밴 헤일런(Van Halen) 스타일의 하드 록과 팝 메탈을 적절히 구사하는 팀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속에는 펑크(Funk), 블루스, 재즈, 스탠더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용해되어 있다. 그래서 딱히 어느 특별한 카테고리에 묶는 것은 별 반 의미가 없어 보인다. 록 사운드를 중심으로 여... 미국 보스턴 출신의 헤비메탈 밴드 익스트림은 이름처럼 극단적인 음악을 하는 그룹이 절대 아니다. LA 메탈의 끝물에 등장하여 밴 헤일런(Van Halen) 스타일의 하드 록과 팝 메탈을 적절히 구사하는 팀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속에는 펑크(Funk), 블루스, 재즈, 스탠더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용해되어 있다. 그래서 딱히 어느 특별한 카테고리에 묶는 것은 별 반 의미가 없어 보인다. 록 사운드를 중심으로 여러 장르를 끌어들이는 ‘크로스오버’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More than words'', ‘When I first kissed you'' 같은 곡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익스트림은 이미 1985년에 < The Dream >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던 밴드 드림(Dream)에서 보컬을 맡았던 게리 세론(Gary Cherone)과 드러머 폴 기어리(Paul Geary)가 신펄(Sinful)이라는 로컬 그룹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누노 베텐커트(Nuno Bettencourt)와 함께 1986년 결성하였다. 이듬해 누노의 소개로 베이시스트 팻 배저(Pat Badger)가 합류하면서 완벽한 진용을 갖췄다. 1989년에 발표된 그룹의 데뷔작 < Extreme >은 차트 80위에 머물며 그다지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Rock a bye bye'', ‘Kid ego'' 등은 후속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1991년에 내놓은 2집 < Extreme Ⅱ: Pornograffitti >는 그룹의 명성을 전세계로 전파시킨 견인차 역할을 한 작품이다. 록 기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최첨단 하이테크 기교까지 펼쳐내는 누노 베텐커트의 기타 테크닉은 절정에 달했고, 게리 세론의 시니컬한 음색은 곡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타고 있다. 헤비메탈의 장르 범주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음악 텍스쳐를 도입했다. 차트 정상을 차지한 어쿠스틱 발라드 ‘More than words''를 비롯해, ‘Hole hearted'', ‘Get the funk out'' 등이 대변한다. 그러나 2집 앨범의 엄청난 성공은 1992년의 세 번째 음반 < Ⅲ Sides To Every Story >의 음악적 실험을 그늘로 드리워지게 했다. ‘Yours’, ‘Mine'', ‘The Truth''의 총 3부작으로 나눠진 이 앨범은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하여 오페라적이고 클래식컬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퀸(Queen)을 연상케 하는 ‘Stop the world'', 잔잔한 누노의 어쿠스틱 기타와 70인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심포닉 느낌이 강조된 ‘Rise ''n shine'' 등으로 작품성 측면에서는 전작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실적은 저조하였다. 드러머를 마이크 맨기니(Mike Mangini)로 바꾸고 3년 뒤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 < Waiting For The Punchline >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익스트림은 음악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More than words''의 벽을 넘지 못해 1996년 10월 해체하고 말았다. 1990년대 가장 전도유망(前途有望) 했던 록 밴드 중의 하나가 종언을 고한 순간이었다. 이후 게리 세론은 새미 해이거(Sammy Hagar)를 대신하여 밴 헤일런의 보컬리스트로 ‘영전(榮轉)’되었고, 누노 베텐커트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얼터너티브 록으로 방향전환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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