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주의자에게 책은 곧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책에 대한 그의 욕망은 뿌리가 깊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 『컬러학습대백과』를 산 날을 ‘아홉 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날로 회상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와 만났던 날은 그에게 있어 ‘내 앞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던 때였다.
이처럼 책에 진하게 매혹된 경험은 질긴 욕망을 낳았다. 그는 “태어나 지금까지 두 번 책을 훔친 적이 있다”며 학급문고와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책을 훔쳤던 일에 대해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다. 욕망은 점차 부풀어 그는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못 말리는 서적광인 친구들을 포섭하여 책 절도단을 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대신 그는 ‘복사의 달인’으로 변신했다. 복사집 아저씨로 오인받을 만큼의 상당한 복사 실력은 결국 못 말리는 책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처럼 ‘준법의식마저 마비시켰던’ 책 욕심에 대해, 그는 예술에서 말하는 ‘탐미주의’의 뜻을 빌려 ‘탐서주의耽書主義’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표정훈이 정의하는 탐서주의자란 ‘책의 소유를 유일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책 내용보다는 책 자체를 중시하며, 책을 진眞과 선善 위에 두는 사람’을 말한다. ‘책 읽는 건 싫어도 책은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그는 ‘물질성’을 포함하여 책과 책을 둘러싼 매력에 지독스레 매혹된 사람이다. ‘책의 오용과 남용을 꾸짖는 모랄리스트의 훈계 따위는 무시하고’ , ‘책의 이름으로 다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질 것’을 말하는 그에게 책은 곧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책은 일사불란한 서가 풍경을 자아내는 수집과 소장 취미의 소중한 대상이어도 좋다. 난장亂場 풍경을 자아내는 마구잡이 잡독가雜讀家의 남획물이어도 좋다. 단 한 줄도 읽지 않고 서가에 고이 모셔둔 채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거실을 장식하여 한껏 뽐낼 요량으로 구입해도 좋다. 책의 오용과 남용을 꾸짖는 모랄리스트의 훈계 따위는 무시할지니, 책을 구하거나 소유하거나 읽거나 구입하는 모든 사람, 모든 경우에 대하여 책의 이름으로 다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질 일이다. ( 232p 중에서)
1부 - 눈을 뜨니 책이 있었다
자연인 표정훈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도 책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1969년을 새뮤얼 베게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박경리가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 해로 기억한다. 자기 소개 첫 줄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토머스 칼라일이 태어난 날짜에 1969년 서울 신촌에서 태어나…’로 시작할 정도이니, 그가 책 세상과 얼마나 애정어린 소통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책과 더불어 성장하고, 책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온 인간 표정훈의 진솔한 기록이 담겨 있다. 「매문의 한 역사」에서는 출판 세계에 진입하기까지의 눈물겨운 고군분투기가, 「어떻게 먹고 사나?」에서는 매문가로 자신을 정의하기까지의 고민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2부 - 호모- 비블리쿠스의 결정적 한 권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표정훈은 서슴없이 에드먼드 윌슨의 『근대혁명사상사』를 떠올린다. 표정훈은 「책과 통하였느냐」에서 바르트의 ‘푼크툼과 스투디움’ 개념을 빌려 책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나에게 깊고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책이 있는가 하면, 지적인 관심을 충족시키면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책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필이 팍 꽂히는 책’과 ‘많은 걸 정확하게 알려주는 책.’ (90p 중에서)
『근대혁명사상사』는 말하자면 표정훈에게 있어 ‘푼크툼’으로 각인된 책이다. 한편, 「보들레르 때문에 똥개를 걷어차다」에서는 책에 얽힌 추억들을 소개한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잠실야구경기장에서 『어린왕자』를 읽었던 기억, 고등학교 2학년 봄 중간고사 기간에 삼류극장에서 『보들레르 시선』을 읽다가, 울컥 솟구쳐올랐던 여러 감정들을 되짚는다.
3부 - 책을 둘러싼 모험
‘다양한 지식의 얼개와 갈피를 붙잡아 그물을 짓는 게 취미이자 일’이라고 말하는 표정훈은
책과 관련된, 책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관심의 그물망을 펼쳐놓는다. 3부에서는 도서관, 서재, 서점 등 책이 있는 공간, 의자나 조명 등의 부수적인 독서 환경, 책의 표지와 책 제목, 저자소개에 이르기까지 책에 관련된 여러 면면들을 섭렵해 들어간다.
대영도서관에서 사랑을 나누다 발각된 커플 이야기를 꺼내면서 “도서관에서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물음을 진척시켜나가는가 하면, 시인 셸리가 나체로 바위에 걸터앉아 땀이 다 식을 때까지 헤로도토스를 읽곤 했다는 일화에서 ‘book eroticism'의 일단을 찾기도 한다. 그 밖에도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이동 도서관의 효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책 제목은?’에 이르기까지 책을 둘러싼 모험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4부 - 읽고 쓴다, 고로 존재한다.
책을 읽는, 그리고 쓰는 인간의 운명은 어떠한가? 표정훈에 따르면 ‘전지全知는 다만 신의 몫이며, 우리 인간은 전지 가운데에 아주 작은 조각들을 한 권 한 권의 책으로 나누어 주고받으며 전지에 조금씩 아니 영원히 다가가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책 세계에서도 양질전화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생각이 「쓰는 놈한테는 못당한다」 「다만 읽어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렇다고 다만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개방성’과 ‘관용성’을 견지한 채 ‘책의 원리주의’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그가 제시하는 리더십readership이다.
‘한 권의 책, 하나의 장, 하나의 구절을 제대로 읽자면 그 밖의 무수히 많은 책과 장과 구절의 그물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에는 결국 책의 세계도 네트워크로 짜여져 있으며, 협주를 통해 완성된다는 겸손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