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고, 너는 죽고……
: 내가 씹고 뜯고 맛보는 동안에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인 걸까. 견디는 방식, 견디기 위해 나보다 약한 것을 이용하는 방식, 그러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고기를 먹은 날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죄책감으로 끝이 났다. 회사에서 종일 털린 영혼을 간간한 양념에 푹 절은 KFC 치킨으로 회복한 어느 날엔가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견디는 방식, 견디기 위해 나보다 약한 것을 이용하는 방식, 그러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여기서 달아나면 겁쟁이가 되는 걸까?”
이때로부터 열흘쯤 지났을까,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다. 푸지게, 맛있게 먹고 죄책감에 눈물 흘리는 그 오랜 패턴에서 나를 구출하기로 한 것이다.
“마당에서 닭목을 잡아 비틀고 가마솥에 담가 털 뽑았다는 어른들의 시대도 다 지나가고 지금 우리는 닭을 컨베이어벨트에 거꾸로 매달아 뎅겅뎅겅 목 베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로부터 먹던 것이니 잡아먹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인류세를 살아가는 인간은 이미 전과 같이 먹고 있지 않으며 전과 같이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고 답하고 싶다.”
“동물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와 농촌을 구분하고 흙을 아스팔트로 덮고 오염된 내 집 공기를 공기청정기로 정화하며 살아간다 해도 우리와 가축, 야생동물, 식물과 미생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채식은 무엇보다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치는 세계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기름진 것, 좋은 것, 비싼 것을 탐하면 탐할수록 나는 나를 더 착취할 수밖에 없다. 처음 채식을 결심하게 된 건 윤리적 동기에서였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방황과 혼돈의 순간을 담담히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이 선택이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방법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메살따구 말고
: 즐거운 상상과 무한한 가능성
아직까지도 세상은 ‘고기를 먹지 않는’ 일상을 재미도 영양가도 없는 따분하고 금욕적인 무엇으로 상상한다. 그러니까 ‘채식’이란 건 그저 지독하게 맛없는 것을 건강상의 이유 혹은 윤리적인 이유로 감내하는 실천인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편견이 아닐까? 꼭 ‘나메살따구’(남의 살)를 씹어야 훌륭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는 믿음, 누군가를 대접할 땐 꼭 ‘피를 봐야’ 한다는 문화적 고정관념 같은 것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순 없는 걸까.
“육식을 줄이는 것은 다른 종을 착취하지 않고 공존하는 일과,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 또는 혹시 있게 될지 모를 자손의 미래를 지키는 것 둘 다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부디 모두 원래의 먹던 방식만 고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하던 대로 하고 싶은 게으른 관성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럽다’ ‘필수적이다’ 같은 말로 포장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기를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많이 있다.”
《섭식일기》를 통해 널리 공유하고 싶은 건, 세간의 편견과 달리 채식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즐겁고도 창발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고기 없이도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을 탐하고 욕망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더 창의적이고 더 맛있는 것을 개발해낼 수 있다는 걸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채식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인간이 만든 이 다채로운 문화, 원칙과 융통성, 잔머리와 끼 부림의 총합인 그것, ‘레시피’를 잃는 것이 솔직히 겁이 났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육식 중심으로 쏠리게 되면서 우리가 외면한, 그놈의 고기에 가려져 저평가된 장구한 역사의 식문화는 아깝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 채식을 지향하는 것은 짐승을 착취해 돈 버는 자본이 밀어낸 맛있는 것들을 되찾아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식 요리를 익히는 재미라는 건, ‘무엇은 어떠해야 한다’를 깨나가는 과정 자체인 것 같다.
“버터와 우유 없이 어떻게 고소하고 바삭한 파이를 만들어내지?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은 또 어떻고? 나는 이제 노루궁뎅이버섯탕과 양배추스테이크, 배추찜, 쑥버무리를 탐낸다. 탐구할 영역이 널려 있다는 것에 매일 감동한다. 치킨을 보면 생각한다. 이 맛있는 튀김옷 안에 버섯이 있으면 어떨까, 왜 안 될까, 최강의 식감을 개발해내고 싶다.”
“기름 넘치는 최상급 소고기를 사서 어떻게 그 값이 안 아깝게 먹을까 고민하는 건 별 재미가 없다. 그런 재료를 안 쓰고, 값싸고 흔한 재료로 어떻게 맛있는 걸 만들어낼까 하는 문제가 더 도전적이다. 창의성이란 무한정의 자유가 아니라 적절한 제약 조건이 있을 때 발휘되는 것 아닌가.”
식탁 뒤 숨겨진 마음을 찾아
: 먹을 것 내어주는 분들을 생각하며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의 문제만큼 중요한 게 또 있다.
하루하루 나만의 ‘섭식일기’를 써내려가며 먹을 것을 내어주는 분들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날부터 “시커먼 새벽에 나와 돼지와 소 사체를 해체하는 정육점 사장님”과 “하루 몇 마리 생선 목을 땄는지 알 수 없을 수산시장의 노동자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뿐인가. 외식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껴 보겠다고 여행가는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지지고 볶고, 그렇게 한 음식을 보자기에 바리바리 싸 챙기는 엄마, “나무틀에 얹힌 무거운 돌솥 몇 개씩”을 겹쳐 나르면서도 금새 또 새로운 반찬으로 새 상을 차려주시는 식당 언니들의 “프로페셔널리즘”엔 언제나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음식만큼이나 놀라운 게 언니들의 손놀림이었다. 큰 냄비에 가스불을 붙여놓고 방에 앉아 있으면 언니들이 먼저 전복을 싹싹 썰어 한입에 쏙쏙 들어가게 해주고 우리가 그것을 먹는 동안에 문어를 슥슥 잘라주었다. 이 모든 것을 낼름낼름 받아먹는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나의 선택, 지금껏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나의 채식 생활은 전부 이분들에게 빚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젠 밥 먹을 때 “남의 먹을 것을 제 것처럼 살뜰하게 챙기는 분들”의 그 수고로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밥상 위를 장식한 온갖 음식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