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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1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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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264쪽 | 544g | 153*218*20mm |
ISBN13 | 9791160404548 |
ISBN10 | 1160404542 |
2024년 4월 30일(화) 저녁 7시 3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024년 03월 18일 ~ 2024년 04월 30일
4월의 굿즈 :책가도 독서대/스마트폰 거치대/우양산/북 스토퍼/우드 센서 무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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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 2024년 04월 30일
5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우리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수지구 상현동에 조광조와 그의 집안 묘가 모여있는 한양조씨 선산이 있다.
서울의 남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리집 근처에는 많은 선인의 묘가 있다.
사람은 살아서는 한양으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처럼 용인에는 많은 선인들의 묘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의 주인공인 조선 최고의 개혁정치가로 후세 사림들이 모두 그의 제자이기를 바라는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해서 충신의 대명사 포은 정몽주,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 선생, 대마도정벌 이종무 장군, 정약용의 선조들이 내가 사는 지역 근방에 묻혀 있다.
조광조의 묘비다. 비록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지만(아마도 죽었을 당시에는 이 비석이 없었으리라) 그는 조선 사림의 종주로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영의정 외 긴 관직이 새겨져 있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조금은 가파른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근처에 10억이 넘는 아파트들이 즐비한 번화가로 바뀌고 있다.
(언젠가 김영하 선생이 도시를 여행하면 그 도시의 공동묘지에 방문해 본다는데, 나는 선인들이 묻혀 있는 이런 OO묘에 많이 가본다. 그분들이 거기 누워 있다는게 신기하고 무언가 시대를 넘는 교감같은게 있다고나 할까.
조광조 선생의 묘비에는 정부인 증 정경부인 이씨 부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 성균관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
문정공 정암 조광조 선생 지묘 라고 되어 있다
이를 해석하면 정부인(조선시대 정이품,종이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붕직으로 숙부인의 위요 정경부인의 아래다, 조광조가 생전에는 대사헌(종2품)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증직으로 정경부인(조광조가 정1품 영의정이 되었기 때문에) 이씨가 합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광조 선생은 작위가 가선대부였고, 사헌부 대사헌 겸직으로 동지경연과 성균관사였다.
다음으로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에게 주어지는 작위) 의정부 영의정이면서 거느릴 령으로 명예직이지만 경연과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의 사를 겸직한다. 다음으로 시호인 문정과 조광조의 호인 정암이 쓰여져 있다)
사실 근처에 식당에 갔다가 들렀는데, 나는 이후로도 정암을 존경해서 세번이나 찾아갔다. 와이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런 것을 직접 가서 연구하고 보면 재미있다. 아, 조선시대 영의정이 되면 수많은 기관을 통솔하는구나. 분명 회의가 많겠지? 뭐 이런 생각도 들면서 말이다.
조광조는 1482년 성종 임금 시기에 태어난다. 조광조는 한양조씨로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이었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이며, 숙부인 조원기가 대사헌, 좌참찬 등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조선 제9대 왕 성종은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조선 건국후 100여년 만에 문물을 정비한 임금이다. 그는 할아버지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1년만에 승하하고, 장남 덕종(도원군)의 둘째아들(잘산군)로 12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한다. 이후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하게 되고 학문을 좋아했던 호학군주답게 신하들과 경연을 즐기며 당시 훈구파가 권력을 쥐고 있던 조정에 많은 사림들을 불러내어 훈구파와 사림파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각을 통해 정치를 진행했다.
그러던 1494년 3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고, 그의 장자인 융(연산군)이 즉위하게 된다. 연산군은 문종과 단종 이후 첫 장자 승계한 왕으로 아버지 성종의 안정된 정치력 위에 비록 폐비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장자 상속 왕으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한다.
이런 연산군은 학문을 멀리했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된다. 조광조가 철이 들고 커 갈 무렵 당시 조선은 이런 혼란기였다.
1498년 연산군은 조의제문으로 촉발된 무오사화를 통해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을 제거하고, 사림의 정치 진출을 봉쇄한다.
1504년 그의 황음무도가 극에 달해 흔히 말하는 흥청망청, 채홍사라는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는 혼란의 시기 폐비 윤씨 사건을 재론하며 이번에는 훈구, 사림 할 것 없이 당시 연관된 수 많은 인물을 사사하거나 유배, 죽은사람에게는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린다.
조광조는 이러한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이 시기 어천찰방으로 유배중인 대 유학자 김굉필에게 수학한다. 특히 소학을 중시했던 김굉필에게 여러 유학적 지식을 사사받으면서 훗날 조선 유학의 정통을 잇게 된다. 당시까지의 유학자 계보는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야은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으로 영남사림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런중에 기호지방 출신이었던 조광조가 이를 사사하면서 드디어 영남사림이 그 범위를 확장하게 된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공모하여 여론이 급격하게 나빠진 연산군을 페위시키고 성종의 둘째아들로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었던 진성대군(역)을 조선 제 11대 임금으로 바꾸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중종은 그렇게 왕이 되었기에 강력한 신하들의 권력 앞에 눈치를 보게 된다. 즉위 후 7일만에 사랑하는 첫째 왕비가 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된다. 드라마로도 잘 알려진 7일의 왕비였다.
그런 중종의 반정 3공신이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친정을 펼치면서 자신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줄 세력을 찾게 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종은 반정의 왕으로 새로운 세상과 성군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조광조는 1510년 소과인 사마시에 장원급제하면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고, 그 바르고 곧은 성품과 굳은 의지로 광인 또는 화태라고까지 불린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그의 성품과 외관을 말해주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소년시절에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뜻을 세움이 고원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과거 보기 위한 글을 일삼지 않으니, 부형과 종족들에게 세속과 어긋나서 남의 비방은 산다고 꾸짖음을 당했다. 장성하여서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자기의 한 말을 실행하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하니, 한떄의 유사들이 애모하여 종유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초상과 장사와 제사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진실하게 하되 한결같이 주문공의 <가례>를 따랐음, 처자가 서울에 있었으나 일찍이 한 번도 성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성균관이 학행이 있는 자를 천거할 때에 조광조가 첫째로 뽑혔다. ---p.77 |
조광조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또 바르고 곧은 성품을 보이며 학문에 정진했고, 마침내 중종 9년인 1515년 알성시 별시에 2등으로 급제하며 조정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중종의 책문도 일품이거니와 조광조의 답은 정말 명문이고, 오늘날 시의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아 몇번이나 읽었다.
중종의 책문은 공자가 3년이상 정치를 하였다면 어떤 실적을 거뒀는가를 물으면서 중종 자신은 나라를 이어받아 10년이 다 되었지만 나라의 기강이 아직 서지 않고, 법도가 정해지지 않아서 공적을 이루기 어렵다고 했다. 이상적 사회에 대한 대책을 논해보라는 물음에 조광조는 서론과 크게 세가지의 대책을 가지고 논한다.
하늘과 사람은 근본이 같고, 하늘의 이치가 사람에게 전한다. 임금과 백성 역시 근본이 같으므로 임금 스스로 도를 익히고 덕을 갖춘다면 백성은 스스로 교화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첫째, 공자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 말하면서 고금의 사례를 들고 있고 여기서도 보편적인 진리인 도와 어진 마음, 덕을 갖추었지만 그 정치가 짧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밝힌다.
둘째, 법도와 기강을 세우는 원리에 대해 임금 스스로 부단히 정진하고 노력하기를 말한다. 특히 임금에게도 성실을 강조하면서 부단히 노력하고 뜻을 깨우쳐 정치에 임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정치의 말단에서 기강을 따로 세우고 법도를 정할게 아니라 근본부터 시작하면서 임금은 큰 것을 보고 신하를 믿고 많은 부분은 그 권력을 이양해 함께 다스리라고 하면서 왕도정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셋째는 오늘의 급선무에 대한 시책으로 임금부터 먼저 바뀌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하면서 윗사람(사회지도층의 의무와 책무)에 대해서 논하면서, 특히 남이 보든 보지 않든 한결같은 심정과 태도로 임하면 분명 바뀐다고 강조했다. 도를 밝히고 혼자있을때에도 조심하여 부단히 노력하여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세우기를 말하는 이 조광조의 대책문은 중종의 마음뿐만 아니라 혼란한 시기를 사는 나에게도 너무나 맞는 이야기였다. 성리학 원칙주의자 조광조의 기개와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조광조는 중종의 발탁을 받아 종 6품 선무랑부터 시작하여 조지서 사지를 거쳐 사간원의 정언에 임명된다. 삼사의 청요직에 발탁된 것이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통해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까지 38세의 나이에 과거 급제후 불과 4년도 안된 시간만에 지금의 검찰총장의 위치까지 이르게 된다.
조광조는 소릉 복위운동부터 소격서 철폐, 현량과 실시, 향약과 소학의 보급을 통해 유학의 원리에 바탕을 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향약과 소학을 전국에 보급해 전 국민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정국공신의 대다수가 박원종 등에게 아부하여 된 것을 알고 위훈삭제를 단행하여 훈구파의 전횡을 정지시키는 개혁정치를 시작한다.
사실 조광조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이름값에 비해 그가 활약한 시기는 매우 짧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조광조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문과 급제해서 38세에 사망하기까지 4년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것이다.
특히 조광조는 경연에서 중종을 대학자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조광조같은 사림은 기본적으로 왕도정치에 입각해 왕은 사대부 중 으뜸으로 그를 철인처럼 만들어 대신들과 함께 밝은 정치를 해 나간다면 자연히 왕도정치는 실현된다고 믿었다.
결국 조광조는 이런 강인하고 급진적인 성격, 원리원칙주의로 중종을 압박하다가 그의 마음이 변심하자 결국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능주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게 된다.
그 유명한 주초위왕 사건으로 대변되는 1519년 11월 16일은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긴박한 날이었다. 사실 중종은 정국공신 삭제 이후 훈구파와 합심하여 조광조를 조정에서 몰아내려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역습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 김식, 박훈 등의 사림파는 모두 귀양을 가게 되고 권력을 잃는다.
조광조는 결국 귀양간지 한달여만인 1519년 12월 20일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하게 된다. 사실 조광조는 이때까지도 중종을 믿어 사약을 가져온 사람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중종은 매몰차게 조광조를 밀어냈고, 조광조의 사사 이후 중종의 개혁정치는 실질적으로 멈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시행했던 많은 개혁정치는 다시 과거로 회귀된다.
이후 조광조는 아이러니하게도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에 의해서 복권되고, 선조대를 지나 광해군대에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된다.
정조대에는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조선에서 본받아야 할 존숭해야 할 업적이라 칭하면서 제문을 지어 올리면서 천인성명, 요순군민, 풍포경류, 군자시식, 소인시회 등의 구절을 통해 조광조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의 묘소 아래 심곡서원이 있었고, 이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 깊은 존숭을 표시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을 사림파의 정통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이,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된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했다.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주체가 되어 모든 백성이 고르게 혜택을 받는 사회, 성리학적 이념이 온 나라에 두루 미치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라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사회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추진했다.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은 어쩌면 우리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가장 개혁적인 조치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급진성과 과격함, 그리고 개혁 지지기반의 상실 등으로 말미암아 개혁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p.236 |
조광조의 개혁 정치와 그 실패원인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이다. 그가 보여준 개혁정치와 도덕적 이상사회에 대한 지향은 21세기를 지나는 오늘까지도 요원해 보인다.
불같은 그의 개혁정치, 완성형의 군자가 다스리는 나라다운 나라를 기대해본다.
(한겨레 역사평전을 좋아한다. 모아놓고 보니 결국은 자신의 시대에서 뜻을 펴지 못한 인물들 중심으로 되어 있다. 정암 조광조, 추강 남효온, 고산 윤선도 모두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위해 살다간 인물들이었다)
*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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