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지고 또 던졌던 ‘대성불패’ 구대성의
기나긴 야구 여정을 함께 걷는 최초의 에세이
한국·일본·미국·호주 4개국에서 활약한 최초의 한국인 야구선수! 올림픽, WBC 등의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맹활약! 한화 이글스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레전드!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혹사당했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저 한 이닝이라도 더 던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팀이 부르면 언제든 마운드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구대성을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을 수는 없겠지만, 가장 독특한 행보를 걸었고, 그 누구보다 ‘야구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선수로 수식한다면, 쉽게 이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단지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 해 한 해 선수 생활을 연장해온 그저 그런 ‘롱런’ 선수가 아니었다. 한국(KBO)에서 투수 4관왕, 정규 시즌 MVP, 한국시리즈 MVP, 골든글러브 수상 등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올림픽 등의 국제무대에서 능력과 가치를 입증한 뒤 일본(NPB), 미국(MLB) 같은 야구 선진국에서 높은 몸값으로 모셔간 스타 중의 스타였다.
그런 그가 훗날 현역 은퇴 후 지도자 수업을 받는 대신 호주로 건너가 선수로서 새 길을 모색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우려와 걱정을 표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야구에 대해 변함없는 애정이 있었고, 마운드에 오를 기회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언제든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새로운 무대를 찾아 떠난 것이었다. 최종 행선지는 호주였지만, 독일 등 유럽 리그나 중국 같은 변방까지 수소문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야구사랑은 정말 가늠하기 쉽지 않다.그렇게 야구를 아끼고 진지하게 대하며 팀에 승리를 안겨다 주는 선수를 세상 어떤 팬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팬들은 패배 자체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된 패배에도 웃음을 보이며 야구를 가벼이 여기는 듯한 선수들의 태도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가 10년 넘게 활약했던 ‘친정팀’ 한화 이글스 팬들은 여전히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대성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린다. 선발, 중간, 마무리, 그 어떤 자리를 맡겨도 믿음직스럽게 제 몫을 다해냈던 구대성. 여전히 보고 싶고, 그립고 생각나는 애달프고 고마운 이름이다.
바다와 대륙을 건너 야구로 소통했던 글로벌 베이스볼맨!
그의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이 비단 한화 팬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철저한 프로의식과 도전정신은 현 세대의 선수들을 비롯해 수많은 야구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마치 도장을 깨며 더 강한 상대를 찾는 무도인처럼, 밀림을 정복하는 맹수처럼 정상에 오르고 나면 늘 새 무대를 찾아 나섰다. 더 높은 레벨에서, 더 뛰어난 선수들과 겨루면서 자신을 갈고닦으려는 향상심이 가득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황하는 여정을 거닐지 않았다. 한국의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한화 이글스에서 기량을 꽃피웠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전 세계 야구팬들을 상대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후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해 한 단계 높은 야구를 경험했고, 2005년 한국 나이로 서른일곱이 되던 해에 뉴욕 메츠에 입단하며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거가 됐다.그리고 ‘사상 최초의 야구 월드컵‘ 같은 대회였던 2006 WBC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건재함을 과시했고, 친정팀 한화 이글스와 다시 계약하며 KBO 복귀를 알렸다. 보통 선수들이라면 이미 유니폼을 벗고 인생 후반전을 시작해도 이르지 않을 황혼기였지만,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경험한 선진 야구를 바탕으로 선수로서, 선배로서 한국 야구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이 시기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뛰어든 ’괴물‘ 고졸 신인 류현진 선수에게 체인지업을 전수하는 등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는 얘기가 훗날 류현진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류현진은 국내외 여러 매체를 통해 선배 구대성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으며, 미국 「LA타임즈」, 캐나다 「더스타」 등이 두 선수의 인연을 크게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구대성은 ‘내가 현진이의 좋은 스승이라기보다, 류현진이라는 훌륭한 선수가 나를 좋은 스승으로 만들어준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구대성은 KBO에 복귀하여 다섯 시즌 동안 활약한 후 2010년 한화 이글스에서 공식 은퇴경기를 갖고 한국야구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 후의 행보를 궁금해 했는데, 구대성의 선택은 다름 아닌 현역 연장이었다. 다시 말해 현역 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은퇴를 택한, 아이러니한 결정이었다. 게다가 야구에는 아무 관심도 없을 것만 같은 나라 호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으니 팬들은 물론 야구계 안팎의 지인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선수로서의 야구, 투수로서의 야구를 사랑했던 구대성에게는 그저 ‘구대성다운 선택을 했을 뿐이다.
구대성, 완전히 떠난 것일까? 다시 돌아오게 될까?한국, 일본, 미국 야구를 통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그에게 신생 리그인 호주 ABL은 사실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무대였다. 데뷔 첫해부터 시드니 블루삭스의 클로저를 맡아 세이브 1위에 올랐으며, 다섯 시즌 플레이하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구원왕을 차지했다. 리그 최정상의 마무리투수로 활약했지만 KBO, NPB, MLB에서와 같은 좋은 대우는 없었다. 그저 교통비와 식대를 정도를 해결할 수 있는 용돈에 가까운 연봉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원하는 야구를 즐기면서 좀더 오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고 만족스러웠기에 호주 커리어를 이어갔다.구대성이 ABL 생활을 마감하고 선수 경력을 끝마친 시즌은 2015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후 호주 청소년 대표팀에서 지도자로 변신했고, 시드니 블루삭스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한국인 선수들로만 이뤄진 ‘외인구단’ 질롱 코리아의 초대 감독을 맡아 어려운 처지에 놓인 후배들을 돕기도 했다. 아직 지도자로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시드니에서 현지의 야구 소년들을 가르치며 언젠가 있을지 모를 한국야구로부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4개국의 리그에서 활약한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언제 어떻게든 고국의 후배들에게 전해주겠다는 마음은 굳건하고 확실하다.이 책은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았던 그의 상징적인 투수 커리어에서 따온 ‘선발’, ‘중간’, ‘마무리’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파트 ‘Strike 1.선발’에서는 구대성이 프로야구 선수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두 번째 파트 ‘Strike 2.중간’에서는 그가 성장, 발전하며 한국, 일본, 미국 프로야구와 국제 대회에서 활약한 시기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한화 이글스의 첫 우승 이모저모, 그 유명한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한일전 완투승, ‘30년 망언’ 이치로를 응징했던 WBC 비하인드스토리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기가 가득하다. 세 번째 파트 ‘Strike 3.마무리’에서는 그가 KBO에서 은퇴하고 호주로 건너간 후의 에피소드와 그의 오늘날 일상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은 명백히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 ‘자전 에세이’로 분류되겠으나,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한 권의 자기계발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