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에서 환생이나 천월(遷越, 시공간을 넘어서는 모티프를 가진 드라마 장르로 타임슬립물이 대표적이다) 소재는 드라마 제작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아예 배제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파란만장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열세 살 소녀의 이야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드라마는 드라마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소설의 매력은 그보다 더 묵직하고 강력하다. (역자 후기 중에서)
생사의 고비에서 빠져든 시간의 통로
고대 중국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시공을 초월한 운명
유년기엔 꽃 파는 소녀였고, 청소년기엔 소매치기였으며, 성년이 되자 사기 결혼의 제물이 되었던 한 여자가 도망 길에 절벽에서 굴러떨어진다. 사고였을 수도 있지만, 삶이 너무 고단해서 일부러 손을 놓았을 수도 있다고 여자는 회상한다. 그리고 다시 눈뜬 곳은 고대의 중국. 여자는 집 없이 떠도는 걸인의 어린 딸 화불기로 다시 태어났고, 전생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삶이지만 이번 생에서는 남한테 휘둘리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완전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녀는 무서웠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따귀를 입이 으스러지도록 세게 때렸다. 입 안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또 도박판에서 판돈을 걸 듯 그녀를 내놓고 돈을 찾은 뒤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어르곤 했다. (……)
그녀는 마음 졸이고 무시무시한 날들을 충분히 살았다. 그녀는 길에 다니던 공부하는 소녀들, 집이 있는 아이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바라고 또 바랐다. (본문 중에서)
그러나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으니, 바로 그녀를 철저히 통제하고 이용해왔던 열 살 연상의 남자가 부귀한 명문세가의 후계자 막약비로 다시 태어났다. 십삼 년이 지나 두 사람은 다시 운명적으로 조우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속 깊이 비밀을 감춰둔 채 서로의 곁을 맴돈다. 막약비는 불기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왠지 낯설지 않은 듯한 감정을 느끼고, 이 감정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혼란스러워한다. 불기는 그가 전생의 ‘그’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그를 두려워하는 한편 조심하고 경계한다.
이생에서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터이다. 그녀는 절대로 그에게 자신을 알아보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그가 다시금 그녀를 통제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본문 중에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삶이면 또 어떠한가
이번 생에서는 기필코 원하는 삶과 사랑을 찾을 것이다!
전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삶이지만, 불기에겐 더할 나위 없는 특권이 있었다. 바로 타임슬립을 했다는 것! 작은 몸속에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고 성인이 된 농익은 영혼이 깃들어 있었으니, 밑바닥 삶이라 해도 그 의미는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많다 해도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은 법. 칠왕야의 숨겨진 군주를 찾기 위한 은밀한 경쟁이 시작되며 불기의 삶에도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그녀 앞에 나타난 절세미남 전략가 막약비, 자신감 넘치는 열혈 미소년 운랑, 속을 알 수 없는 세자 진욱, 강호의 신비한 협객 연의객. 막약비는 자신이 ‘그녀’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고 방어해야 하는 대상이다. 자신에겐 어미나 다름없는 개를 죽인 운랑은 철천지원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불기를 챙겨주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세자 진욱은 ‘따귀를 날리면서 입에는 꿀 바른 대추초를 욱여넣는’ 존재이다. 그녀를 죽이러 왔다는 연의객은 늘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꽃피우려는 소녀 화불기는 그들과 만나면서 첫사랑의 아픔을 겪고, 애증의 대상을 다시 만나고, 보답할 수 없는 연심으로 괴로워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들 중 불기의 진정한 인연은 누구일까? 진정 그녀는 칠왕야의 숨겨진 군주일까?
만약 타임슬립을 한다면, 그들의 조숙한 영혼과 사회에 대한 빠른 인지가 전혀 다른 환경 속에 놓인다면, 그들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이 책 속에서 여자 주인공 화불기만큼은 우리 모두의 축복을 한몸에 받으며, 사랑과 아낌을 흠뻑 받으며, 집도 있고 아름다움도 만끽하는 그런 인생을 살았으면 하고 바랐다. (작가의 말 중에서)
‘불기’라는 이름은 ‘세상 모두가 널 버린다 해도 나는 널 버리지 않는다(不奇)’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이 ‘버리다’라면, ‘버리지 않는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불기 자신에게 이 이름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각인된다.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화불기라는 호명을 통해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할 뿐 아니라 타인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 표면적으로는 ‘거지(花子)’라는 신분을 가리키는 줄로만 보이는 그녀의 성은, 그래서 결국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피워내는 ‘꽃(花)’을 의미한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꽃, 소녀 화불기의 이야기는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처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낸 힘으로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는 자그마한 희망이 되기를 바라본다. (역자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