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비문, 문맥, 문법, 글씨체를 다시 보자
- 새로운 연구방법으로 변조를 증명한 광개토태왕비문의 변조 논란의 종결판 -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와 동일 민족관계에 있는 ‘속민(屬民)’으로 보고 기록한 문장이므로 백제와 신라를 다시 동일 민족 관계가 아닌 신민‘(臣民)’으로 칭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신묘년 기사의 ‘신민’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왜(일본)를 칭한 말이며, 이 기사의 원래 문장은 당연히 ‘고구려가 왜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이다. 서예학자 김병기 교수가 증보하여 펴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의 핵심 내용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속민’과 ‘신민’의 확연한 의미 차이를 밝혀 이런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이어, 김 교수는 일본이 변조한 ‘도해파(渡海破: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부쉈다)’ 세 글자의 변조 전 원래 글자는 ‘입공우(入貢于: 왜가 백제, 가야, 신라에 조공했다)’였음을 글씨체를 분석하는 서예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였다. 광개토대왕비의 필획과 결구의 특징을 서예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김 교수가 선택한 획기적 방법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글씨 자체가 빼어난 서예 작품이므로 서예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동안 우리 학계는 이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김 교수는 또 일제가 제시한 ‘래도해파(來渡海破)’구에 대해 한 중? 일 어디에서도 고대에나 지금이나 ‘도래(渡來)’라는 단어만 사용해왔을 뿐 ‘래도(來渡)’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는 전무함을 확인함으로써 이런 구절을 제시한 자체가 변조의 증거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에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왜가 깨부숴 그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치욕적인 내용을 왜 새겨 넣었겠느냐?”면서, 일부 학자가 제시한 “백제와 신라를 깨부술 정도로 매우 강력했던 왜를 후에 고구려가 제압했음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광개토태왕의 무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근거 없는 개인적 ‘상상’일 뿐이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아울러, 일제가 가져간 최초의 탁본인 ‘사코본’ 이전의 탁본이 발견되었다는 중국학자 서건신(徐建新)의 논문에 대해서도 ‘신발견 탁본’의 모순과 허구성을 들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어, 김병기 교수는 현재의 광개토태왕비 연구는 대부분 각종 탁본의 글자를 대조한 후, ‘내 눈에는 이 글자로 보인다’면서 ‘주관적인’ 판독을 제시하고, 그런 판독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한, 중, 일의 고대사 자료를 자신의 판독에 유리한 방향으로 인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다 보니 비문의 원래 문장에 충실한 해독을 하지 않고 오히려 후대의 역사서, 심지어는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춰 비문을 왜곡 해석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염려하면서 이제는 일제가 쳐놓은 왜곡된 ‘실증주의’ 역사연구법의 덫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시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2019년 말 중국 정부는 ‘지린성 퉁화시 고구려 유물 ? 유적 관광지’를 관광지 최고등급으로 지정했다. 이곳에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와 광개토태왕릉, 장수왕릉 등 고구려 유적 5곳이 포함되어 있다. 이보다 앞선 2017년에는 광개토태왕비 앞에 ‘중화민족의 비석’이라는 내용으로 문화재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처럼 중국은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고구려사 전체를 통째로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계속 기도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탁본을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석회 칠을 하여 비를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치밀하게 변조한 광개토태왕비문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임나일본부를 통한 한반도 지배를 기정사실화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최초의 국내 연구서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는 2005년 초판 출간 후 국내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역사서이면서도 역사적 사료에 매몰되지 않고 ‘서예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비문 변조를 증명하고 비문을 복원했고, 당시로서는 광개토태왕비의 실상과 논쟁사를 다룬 책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8년 1월 3일 JTBC의 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에 저자가 출연하자마자 네이버, 다음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광개토태왕비문의 변조 사실과 원래 비문의 뜻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이번 증보판에서는 금석학적으로 글자 한 자 한 자를 꼼꼼히 살피고 문법적으로 비문 문맥의 전후 연결 관계를 따져 일제의 변조 증거를 한층 더 보강하였다. 또 초판 출간 후 제기된 일부 중국 학자와 한국 학자의 잘못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준비하였다. 초판이 나온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본과 중국 학자 90퍼센트가 글자 변조가 없다고 믿고 있으며, 국내 학자 중에서도 40퍼센트 정도는 이 견해에 동의”(『한국일보』 2005년 5월 25일 자)하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어떠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보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실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 역사 왜곡을 멈추는 데 이 책이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광개토태왕비, 고대사의 비밀 품은 ‘돌로 만든 역사책’
광개토태왕비. 414년 장수왕이 2년 전 세상을 떠난 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우람한 비석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잊혔다가 1880년경 발견되었다. 높이 6.3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비석 각 면에는 사잇줄이 쳐져 있고 이 사잇줄에 맞춰 1,775자가 새겨져 있으나 141자는 풍화되고 훼손되어 판독할 수 없다.
훈적비(勳籍碑)라는 성격을 넘어 고대 동아시아사의 생생한 현장을 전해주는 ‘타임캡슐’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또 삼국시대 정사인 『삼국사기』보다 700년이나 앞서, 그것도 당대인의 눈으로 기록된 ‘돌로 만든 역사서’라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의의를 지닌다. 저자는 “역사는 아는 자의 것”이라 말한다. 광개토태왕비문의 어디가 어떻게 조작되었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지, 변조되기 이전의 글자는 무엇인지, 그렇다면 원래 비문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보자.
100년 비문 전쟁을 촉발한 최초의 탁본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는 『회여록』(1990년)에 실린 탁본이 있다. 지금까지 제작 연도가 확인된 것으로는 최초의 탁본(정확히 말하면 ‘쌍구가묵본’)이다. 어느 일본군 대위가 1993년경 일본으로 처음 들고 간 이 탁본(‘사코본’)을 가지고 이후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繹) 등 일본의 대표적인 한학자와 역사학자들이 5년간 비밀리에 비문 해독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15종의 해독본이 작성되었고 최종적으로 사코 가게노부(酒?景信)라는 일본군 대위를 불러 확인하게 했다. 정체는 물론 이름조차 없이 그저 ‘아무개’란 호칭으로 문헌과 학계를 떠돌던 사코 가게노부가 광개토대왕비의 쌍구본을 만드는 데 직접 관여했음을 의미한다. 일제는 어학생(語學生)이란 명목으로 10여 명의 참모본부 군인을 청나라에 위장 파견했고, 조선에도 군인을 보내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지지(朝鮮地誌)』를 편찬하기도 했다. 어학생은 한마디로 스파이다. 사코 가게노부는 청나라에 파견된 스파이였다.
‘사코본’은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 아니다. 비면을 직접 탁본한 ‘원석정탁본’이 아니라 한 쌍(雙)의 갈고리 같은 선(鉤)을 끌어 베껴 그린 다음 글자 외의 바탕 면을 먹으로 칠한(加墨) 쌍구가묵본이다. 글자 부분만 그려 뜨기 때문에 애당초 잘못 그릴 수도 있고, 고의적으로 어느 글자를 다르게 그릴 수도 있고, 빈칸으로 두었다가 나중에 다른 글자를 그려 넣을 수도 있다. 실수든, 고의든 조작할 수 있다. 이 사코본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창이던 2004년 ‘중국의 서(書)’라는 표찰 아래 도쿄국립박물관에 ‘특별전시’되기도 했다.
열쇠는 서예학이다
오랫동안 서예학을 해온 저자는 광개토태왕비체의 필획은 별다른 장식 없이 질박하다고 표현한다. 획은 투박하게 보이는 직선과 단조로운 점으로 이뤄져 있다. 가로획이 두 획 이상 중첩될 경우는 나란히 수평을 이루고, 길이도 가지런한 편이다. 체형(글자의 윤곽)은 기본적으로 사각형이다. 자형(글자의 구조)은 예서이지만 전서로 쓴 글자도 섞여 있으며, 간단히 생략한 초서 형태의 간체(簡體) 문자도 썼다.
저자는 35년 전 유학 시절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우연히 접하고 비문 글씨의 매력에 빠져 베껴 쓰기(臨書)를 하다가 문제의 신묘년 기사 부분에서 “붓이 멈칫하더니 콱 막히는”(88쪽) 경험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놀랍게도 붓길이 막혔던 글자가 바로 재일 사학자 이진희가 변조된 글자로 주장한 글자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장 20년에 걸쳐 비문 변조 추적 작업을 한다. (참고로 초판 출간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므로 당연히 일제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짐작’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탐구하는 데는 별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탁본만으로 비교해서는 새로운 증거를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러 금석문과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서예학적 눈으로 분석하고, 한 ? 중 ? 일 3국 학자들의 주장을 비교 검토하며 변조의 증거를 찾는다. 이렇게 신묘년 기사에 섞여 있는 ‘판이한 글씨체’를 발견했다.
신묘년 기사의 ‘도해파(渡海破)’는 변조된 글자다
일본은 역사서라 할 수 없는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신묘년 기사에 구두점을 찍고 이렇게 해석한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본문 63쪽
‘도해파(渡海破)’는 변조된 글자다. 광개토태왕비의 모든 필획이 거의 직선 형태인 데 반해 ‘渡’의 마지막 두 획, 즉 ‘?(별획)’과 ‘?(날획)’은 굽은 형태이다. 1880년 무렵 일본에 근대식 인쇄 활자가 도입되면서 만들어진 ‘명조체’의 형태이다.
‘海’ 자의 母(어미 모) 부분은 탁본 다른 곳의 海 자와 달리 정방형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다. 또 가운데의 세로획 또한 두 개의 점이 아닌 세로획으로 처리되어 있다.
‘破’ 자의 ‘石’ 두 번째 획은 다른 곳의 破 자처럼 직선이 아니라 활처럼 굽어 있다. 또 ‘石’과 ‘皮’의 상단의 가로획이 다른 곳에서는 전부 나란한데 신묘년 기사에서만 ‘皮’가 ‘石’보다 아래에 있다. 이는 오늘날의 명조체와 비슷한 형태로, 매우 중요한 변조의 흔적이다.
‘도해파(渡海破)’가 아니라 ‘입공우(入貢于)’였다!
비문 변조를 서예학적으로 확인한 저자의 관심은 당연히 변조되기 이전의 글자는 무엇인가로 향한다. 저자는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를 하나하나 파헤쳐 들어간다. 단서는 ‘신민(臣民)’과 ‘속민(屬民)’에 있었다.
우연히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을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 차이를 가정하고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비롯한 옛 문헌을 조사한 결과, 신민과 속민은 분전혀 다른 뜻을 지닌 다른 용어임을 발견해냈다. 즉 ‘신민’이 왕에 대한 복종의 의사를 표하거나 예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뜻의 단어라면, ‘속민’은 비록 현재는 다른 나라로 분리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의 민족 관계에 있는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저자가 찾아낸 원래 비문은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入貢于百殘□□新羅 以爲臣民 - 본문 162~163쪽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
지나간 역사를 다시 쓸 수는 없지만, 바로잡을 수는 있다. 이제라도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바로 보고 제대로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미 역사 전쟁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정작 실증이지도 못한 실증만을 고집할 일이 아니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했듯이 이제는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입장과 관점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나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니까 우리도 왜곡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일제가 남긴 식민 사학적 관점이나 오랫동안 중화주의의 물들어 있던 사대주의적 관점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역사관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자는 뜻이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역사를 외세에 빌붙은 역사로 오도해서도 안 되고, 앞으로도 우리의 역사를 정략적 빌붙음을 통하여 안정을 유지하려는 비굴한 역사로 이어갈 생각도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사 앞에 언제라도 당당한 민족으로서 자랑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본문 3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