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네 선사들의 문헌과 언설 속 중화(中和) 담론을 살펴
마음에 관한 유ㆍ불의 공통분모와 분화 지점을 드러내다
한국과 중국의 고승, 네 선사의 ‘드러나지 않은’ 중화 담론
이 책은 유교의 핵심 경전인 『중용』 제1장에 등장하는 ‘미발(未發)’과 관련, 한ㆍ중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 감산 덕청, 우익 지욱, 퇴옹 성철, 탄허 택성―들의 중화(中和) 담론을 살핀다 유가의 ‘미발’은 불가의 ‘대무심(大無心)’과 비슷한 개념으로서 마음의 심처(深處)와 관련된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한량없는 백천삼매를 투과하여 마치 송장과도 같이 죽은 듯한 깊은 선정(禪定) 상태에서 듣는 찰나, 보는 찰나에 다시 되살아난 대사각활(大死却活)의 대각(大覺) 과정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한 생각도,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멸진정(滅盡定)의 선정을 깊이 증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중국과 조선사상사ㆍ논쟁사 전체를 관통했던 동양철학사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미발은 또한 인류의 영원한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용심(用心)’의 현실적 수행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의 연구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기존의 유교와 불교의 관계 논의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불가의 네 선승들의 중화 담론을 고찰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는 중화설과 미발 담론을 살피는 데 있어 중국이나 조선성리학 내부에서의 담론을 살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불가 선승들의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던’ 중화 담론을 고찰함으로써 불학(佛學)에서는 불학만을, 유학(儒學)에서는 유학만을 고수하던 고정된 시각에 활로를 개척한다.
그 방대한 분량의 자료와 미묘한 개념들을 이리저리 연결해서 회통시키는 솜씨가 내심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 정진배(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추천사 중에서
이렇듯 유가와 불가를 중심으로 도가(道家)의 문헌과 자료까지 살펴 회통해 학제 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이 책의 논의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독특하고 의미 있다.
중용을 보는 한 독법
이 책은 ‘미발’과 관련된 기나긴 역사상의 논변들을 먼저 살핀 뒤, 한ㆍ중 불교계의 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기존 유ㆍ불 관계 논의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각 가(家)의 공통분모와 분화 지점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낸다.
본격적인 논의는 중국 남송(南宋) 시대 인물인 주자(朱子)의 중화설 형성 과정을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자의 선불교로부터의 영향과 길항의 관계를 ‘애증(愛憎)’의 차원에서 살피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장에서 주자 초기의 중화구설(中和舊說)과 그 이후 새롭게 각성하게 되면서 발전된 중화신설(中和新說)을 살펴봄으로써 ‘주자학’이라 불리는 사상적 기반이 ‘중화론’을 기본 토대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희로애락의 미발지중(未發之中, 감정이 일어나기 전)과 이발지화(已發之和, 순리대로 일어남)가 인간 심성의 근본을 파악할 수 있는 유ㆍ불의 공통된 코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다음으로 중국과 한국 선사들의 중화 담론을 비교하며 유교와 불교의 회통(會通)과 분수(分殊)를 확인한다. 첫 번째 고찰의 대상은 중국 ‘명말사대사(明末四大師)’로 일컬어지는 선사 가운데 두 분인 감산 덕청(?山德淸) 선사와 우익 지욱(藕益智旭) 선사이다. 비슷한 시기의 불교계 고승이었던 두 선사는 “중용직지(中庸直指)”라는 동일한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하지만 두 선사가 바라보는 『중용』에 대한 시선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이들 시각을 각각 ‘중화일관론(中和一貫論)’, ‘유맥귀불론(濡脈歸佛論)’이라 명명한다.
다음 고찰의 대상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대표 고승이며 지금도 종문(宗門)의 상징이 되는 퇴옹 성철(退翁 性徹) 선사와 탄허 택성(呑虛 宅成) 선사이다. 사실 이 두 선사가 유교 경전인 『중용』에 대해 전면적으로 기술한 독립된 저술은 없다. 다만 몇몇 저작 가운데 편재하고 있는 유교 중용 혹은 중화에 대한 언급들을 만날 수 있는데, 저자는 두 선사의 대표적 저술과 언설을 추출ㆍ검토하여 유교 중화론에 대한 각 선사의 견해를 명백히 밝힌다. 두 선사의 유교 중화 담론은 감산 선사와 지욱 선사의 그것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저자는 각각 두 선사의 법명 혹은 법호에서 따와 ‘철(徹)적 가풍’, ‘탄(呑)적 가풍’이라 이름한다.
동서와 고금, 유ㆍ불ㆍ도가 만날 수밖에 없는 ‘한 지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유가와 불가의 심성론(心性論)의 다양한 논의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주장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심성(心性)의 수련이라는 수도(修道)의 당위에 대해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 책은 20대 10년 동안의 문제의식을 30대 10년 동안 참구하여 쓰고, 40대 10년 동안 묵히고 발효시켜, 50대가 되어 수정하여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속에는 내 삶의 많은 문제의식과 수행의 과정이 오롯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_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20여 년 전 출가 당시, ‘죽거나[死] 미치거나[狂] 깨치거나[覺]’ 라는 다짐을 세웠다. 죽기를 각오한 그는 끊임없는 의심을 도반으로 삼아 진리를 좇았다. 저자의 지난한 공부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의 배경은 동서와 고금, 그리고 유교와 도교, 불교가 예외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한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유ㆍ불ㆍ도 3교의 진리는 어디에서 하나로 용해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중국의 앙산 스님은 『열반경』 40권 가운데 얼마만큼이 부처님 설이고 얼마만큼이 마구니 설인가 하는 스승 위산 스님의 물음에 『열반경』 전체가 마구니 설이라 대답했다. 어찌 『열반경』 40권만 마구니 설이라 하겠는가? 팔만대장경 전체가 마구니의 설이며, 유교 경전 13경 전체가 이단(異端)의 설이며, 기독교 신약ㆍ구약성서 전체가 사탄의 설이다. 이 말의 낙처(落處)를 바로 짚어내지 못한다면 설산(雪山)에서 6년 고행한 부처님과,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님과,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님의 은혜에 반 푼 어치도 보답할 수 없는 것이다. 미발의 극처(極處)에, 중(中)의 심처(深處)에, 성(性)의 묘처(妙處)에, 무극(無極)의 오처(奧處)에 그 밀지가 함장되어 있다. 만약 이번 생 안에 수행을 통해서 이것을 찾지 못한다면 내 살림은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하고 석가, 공자, 예수의 종노릇만 하다가 다음 생을 다시 기약해야 할 것이다. _ 본문 288쪽
이 책에 펼쳐지는 일련의 논의는 결국 ‘인간의 마음[心]’에 닿아 있다. 인간 마음의 본체[體]와 사용[用], 그리고 마음의 수련[修心]의 문제를 전면에 걸어 유가에서의 마음에 대한 파악과 수신(修身) 문제, 그리고 불가에서의 마음에 대한 인식과 수련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다.
‘진리(眞理)’란 사전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 또는 사실’을 뜻한다. 저자가 이 책의 지면에서 펼치는 고찰의 저변에는 각 가(家)의 성인(聖人)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공통적으로 전하려는 진리, 즉 ‘마음’에 관한 가르침이 숨어 있다. 결국 이 책은 그 ‘한 지점’을 향한 하나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무애세계(無碍世界)가 현실화된 작금의 상황 속에서 학제 간 벽을 허물고 동서고금을 회통해 보기 위한 새로운 안목이 절실한 시대이다. 이 연구서를 통해 향후 유ㆍ불ㆍ도 삼교(三敎) 교섭(交涉) 논의에는 물론, 여기에 기독교까지 더한 사교(四敎) 교섭의 논의에 새로운 논점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