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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정도경 작품집

정보라 | 온우주 | 2013년 06월 29일 리뷰 총점8.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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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3년 06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445쪽 | 534g | 153*224*30mm
ISBN13 9788998711047
ISBN10 899871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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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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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1명)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대학에서 러시아와 SF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SF와 환상문학을 쓰기도 하고 번역하기도 한다. 중편 「호(狐)」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단편 「씨앗」으로 제1회 SF 어워드 단편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소설과...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대학에서 러시아와 SF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SF와 환상문학을 쓰기도 하고 번역하기도 한다. 중편 「호(狐)」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단편 「씨앗」으로 제1회 SF 어워드 단편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소설과 『씨앗』, 『왕의 창녀』 등의 소설집이 있고, 많은 앤솔로지에 활발히 작품을 게재하고 있다. 그외 작품으로 『문이 열렸다』, 『저주 토끼』, 『붉은 칼』 등이 있다. 영국 작가 로드 던세이니의 환상문학 작품집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을 비롯하여 『안드로메다 성운』, 『거장과 마르가리타』, 『구덩이』, 『유로피아나』, 『일곱 성당 이야기』, 『스타니스와프 렘』(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대학에서 러시아와 SF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저자 : 정도경
환상문학웹진 거울 59호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가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66호부터 거울 필진으로 합류하여 활동 중이다. 중편 「호狐)」로 제 3회 디지털 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공동단편집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에 「은아의 상자」를, 『아빠의 우주여행』에 「스위치, 오프」를, 『독재자』에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를,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에 「사랑, 그 어리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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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우리는 기다린다
지평선 너머에서 더럽고 거대한 기계의 날갯소리 대신
꽃가루가 날아오는 날을.


공주가 갇힌 탑, 술탄의 궁전, 매서운 동토부터 여기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이야기가 새로이 찬란한 옷을 입다


온우주 출판사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만 엄선해서 묶은 온우주 단편선의 네 번째 작품집으로 정도경의 『씨앗』이 출간되었다. 지난달에 출간된 곽재식 작품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와 『모살기』 이후 온우주 단편선의 두 번째 작가로서 정도경의 작품이 출간되었으며, 온우주 단편선은 앞으로도 국내 작가들의 단편만을 모은 작품집을 매달 한 권 이상 낼 예정이다. 출간 예정인 작가로는 이미 출간된 곽재식, 정도경 외에 이서영, 김현중, 전혜진, 박애진이 있으며, 2013년 한 해 동안 총 7명의 작가가 쓴 작품집 10권을 펴낼 예정이다.

정도경은 작품집 두 권을 한꺼번에 선보인다. 그중 『씨앗』은 동서고금의 옛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룬다. 보통 생각하는 “탑에 갇힌 공주와 기사” 이야기를 비틀어 어른의 이야기로 만든 ‘공주와 기사와 용’ 연작을 비롯해, 우리나라 전래동화와 괴담을 혼합한 「참기름」, 고려의 소년과 러시아의 소녀가 술탄의 나라에서 만나는 「사막의 빛」, 표제작이며 자연의 분노와 생명의 끊임없는 변화를 미래 배경으로 풀어낸 「씨앗」 등 이국적이고 먼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왕의 창녀』가 인연을 풀어내는 작가 정도경을 드러내는 작품집이라면, 『씨앗』은 이야기꾼 정도경을 만날 수 있는 작품집이라 하겠다.

감정의 기억은 논리나 이성의 기억보다 먼저 시작되고 더 깊이 각인되며 훨씬 오래 남는다고 한다. 나는 생활에서 이런 강한 감정적 경험에 부딪쳐 해결하기 힘들 때 소설을 쓴다. 감정 자체는 비슷하게 유지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겨나게 된 원인과 전개 과정은 전혀 다르게 재조립한다. 그렇게 재조립을 하다보면 나 자신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보게 되고 허구의 세계에서나마 감정을 해소할 방편을 마련할 수 있다. 혹은 내가 직접 겪은 감정이 아니더라도 신문기사나 다른 이야기에서 아주 강렬한 주제를 발견하고 거기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이야기가 된 경우도 있다. - 작가의 말 中

정도경 소설의 힘은 강요에 굴복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모두가 굴곡된 말로 얄팍하고 뜨뜨미지근한 결말로 작가를 내몰아도, 정도경은 타협하지 않는다. 비정하게, 추악하고 끔찍한 세계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마주 본 다음 본 대로만 쓴다. 진실 아닌 것이 끼어들 틈이 없게 왜곡을 거부한다. 정도경의 소설에서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구원받지 않고,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속에서 아주 보기 드문 종류의 행복감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 정세랑, 권말해설 中

수록작에 대하여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탑에 갇힌 공주를 기사가 구하러 가보니, 공주는 기사와 얽힌 인연이 있어 기사를 믿지 않고, 사실 용에게 납치되어 갇힌 것도 아니었더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다시 쓰는 동화 이야기. 3편의 소설이 이어지는 연작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입맞춤을 느끼고 공주가 눈을 뜬다. 기사의 얼굴을 본다.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뛰어 일어난다.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열어 말한다.
“뭐야, 너? 여기까지 왜 또 왔어?”
기사의 표정이 구겨진다. 아아, 기사님을 기다렸습니다, 라든가,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라든가, 뭐 이런 종류의 대사를 기대한 것이 틀림없다. 기사가 설명한다. 그러니까 공주님, 나쁜 용에게 붙잡혀 이 높은 탑에 갇혀 있는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서 제가…….
“구출 좋아하네.”
공주가 말허리를 자른다.
“나가. 당장 나가.”
기사가 다시 설명한다. 아니 그렇지만 공주님. 사나운 용이…….
“나가라는 말 안 들려?”
공주가 눈을 부릅뜨고 기사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내 칼 어디 갔어? 혹시 내 칼도 네가 숨겼냐?”
기사는 당황한다. 아니 저기, 공주님, 칼이라뇨……. - 10쪽

기사는 보름달 아래에서의 그 맹세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황금빛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때 기사는 어렸고 그의 세상은 무척 좁았으며 그 좁은 세상 안에 바라볼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단 한 명 공주뿐이었고, 그런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데 대한 자만심이 공주에 대한 사랑 자체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공주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 뒤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제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 되어버렸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눈앞에 붙잡고 있는 이 황금빛 왕비는 진짜였다. 기사는 그녀와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고 그녀의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 75쪽

달은 검은 하늘을 한가롭게 떠 갔다. 천천히 여유롭게 흘러서 달은 하늘 한복판에 이르렀다. 새하얗고 둥근 얼굴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 띠를 두른 황무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황무지에 두 개의 창백한 형상이 나타났다.
왕자는 목 한쪽을 뜯어 먹히고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기사와, 양손과 목을 칼에 베어 상처를 입은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 117~118쪽

사막의 빛
루시의 여자아이는 굶어 죽기 직전인 동생을 위해 술탄의 상인들에게 팔려간다. 나는 양탄자를 타고, 동쪽의 고려에서 왔다는 소년을 만나기도 하면서 사막을 건너 여자아이는 상인을 따라 술탄 앞까지 간다.

조금 뒤에 시종들과 함께 나타난 것은 사막의 밤에 소녀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동쪽에서 온 소년이었다.
“아…….”
그러나 소녀가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소년은 날렵한 몸짓으로 탑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탑 꼭대기에서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기다렸다. 올려다보던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전처럼 광대뼈 부근이 통통해지고 눈이 가늘게 반달처럼 휘어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술탄이 긴 의자에 누운 채로 손을 까딱, 움직였다. 그와 함께 소년은 탑에서 힘차게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다니, 저렇게 높은 곳에서? 소녀는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 155쪽

씨앗
두 개의 회사가 모든 자원을 독점한 미래, 살아남기 위한 돌연변이로 식물과 융합한 식물인들 앞에 자본주의 독점회사에서 실사를 나온다. 식물인들은 이들의 실사에 응하는 한편으로 진짜로 목표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 머리를 모은다.

사실 우리가 놀란 것은 그들의 재채기나 기침 때문이 아니었다. 수많은 풀과 벌레와 꽃과 나뭇잎을 날려 죽이면서 요란스럽게 땅에 내려앉은 그 시끄럽고 냄새나고 거대하고 더러운 기계 때문도 아니었다. 이미 우리 모두 충분히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에 대면한 순간, 가까이에서 직접 그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게 된 순간 우리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머리로 아는 것과 스스로 겪어보는 것은 다르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
재채기와 기침 때문에 시뻘겋게 변한 얼굴이나 충혈된 눈을 보면 로봇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일그러진 표정이나 아름답지 못하게 흐르는 콧물이 그들도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 168쪽

참기름
어머니가 계단에서 구른 후 이유를 알 수 없이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며 일어나지도 못한다. 둘째 딸인 나는 과외는 잘리고 시간이 늦어 버스는 오지 않고 병원에 가 있을 줄 알았던 언니는 집에서 뭉개고 있는 통에 홧병이 날 지경이다. 그때 갑자기 배가 아파 들어간 공중화장실에서 이상한 대화를 엿듣게 된다.

언니는 곧바로 휴지를 주지 않고 다시 물었다.
“갑 휴지 줘? 아니면 여행용 휴지 줄까?”
“무슨 휴지가 그렇게 많아? 아무거나 주면 되잖아.”
그녀가 다시 짜증을 냈다.
“그러지 말고 결정을 해. 갑에 든 휴지가 좋아? 여행용 휴지가 좋아?”
말하면서 언니는 화장실 칸막이 밑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둠 속인데도 한 손에 든 빨갛고 네모진 갑에 든 휴지와 다른 손에 쥔 파란 포장에 싸인 여행용 휴지가 이상할 정도로 똑똑히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언니가 지금 집에 있다는 사실과, 그렇지 않더라도 어딘지 모를 곳까지 자기를 쫓아와서 화장실 휴지를 챙겨줄 정도로 자상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 209쪽

완전한 행복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참칭자가 장교의 집을 약탈한다. 아들과 딸, 어머니만 남은 집 안에서 마음껏 먹고 놀다가 황제의 군대에게 참칭자가 쫓겨나지만, 황제는 그동안 반역자를 먹이고 재운 이 가족도 반역자라는 판결을 내린다. 세 식구는 유형을 떠나며 점점 조각난다.

누이는 얼굴을 반듯하게 옆으로 돌리고 누워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을 보고 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누이의 가슴 위로 몸을 굽히고 칼자루를 잡고 뽑아냈다.
누이가 쿨럭, 기침을 했다.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누이가 고개를 돌렸다. 또렷한 눈이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느님은 선이시며 자비이시다.”
누이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작지만 분명하게 속삭였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하고, 용서받아라.”
그리고 누이는 죽었다. - 250~251쪽

그림자 아래
사람의 몸에는 생각보다 많은 그림자와 어둠이 있다. 그러므로 그 그림자를 뺏으면 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렇게 그림자를 뺏어서 암살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일을 성공시키지 못한 대가로 왼손 세 손가락을 제외한, 오른팔과 오른손, 왼팔과 왼손 두 손가락의 그림자를 묶이고 살아가고 있다.

빛이 밝게 보이는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윤곽이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음영이 그 테두리를 두르고 있을 때이다. 인간의 몸속에는 빛이 들지 않으므로 내장 기관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언제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인간의 두뇌는 매끈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름이 많이 지고 그 골이 깊이 파여 있을수록 기능이 뛰어나다. 인간의 마음속 골짜기와 그림자의 깊이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인간은 겉과 속에 여러 가지 어둠과 그림자를 수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그림자를 뺏긴 남자는 하루 정도 정신없이 잠을 잘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깨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남자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정신 기능을 잃었을 것이다. - 282쪽


미래로 비밀임무를 띄고 파견된 남자는 금방 들켜서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그곳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남자에게 위로가 된 건, 함께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미술치료 시간에 보았던 여자였다. 여자는 남자의 세상에서 익숙한, 미래에는 쓰지 않는 물건들을 그리고 있었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그 물체들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남자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화면 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여자의 오른손 손목 안쪽에 나 있는 흉터를 보았다.
흉터는 짙은 갈색이었고 가늘고 뚜렷했다. 하얀 피부 위에 길게 이어진 자국을 본 순간 남자는 흉터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쩐지 여자의 피부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다.
그때 여자가, 여전히 화면을 내려다보며, 손목에 금이 간 오른손을 무심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또렷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스며드는 것처럼 확실하게 들렸다. - 307쪽


갑자기 꾼 꿈에서 나는 문방구에 들어가 있다. 카운터에 있는 남자가 너에게 이건 꿈이지만 자신에게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회사에 다니면서 평범하고 능력 있는 회사원을 만나고 있는 나는, 매번 점점 이어져 나가는 같은 꿈을 꿀 때마다 무언가 현실이 낯설어진다.

남자는 다시 카운터 뒤로 몸을 굽혔다. 그는 뭔가 비닐이 잔뜩 비어져 나온 상자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그가 상자를 비우고 겹쳐 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후의 가게 안은 한산했고,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빛은 일하는 남자와 지켜보는 여자를 진하고 풍요롭게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상자들을 구석으로 치우고 허리를 폈다.
“넌 지금 꿈을 꾸고 있어.”
그가 말했다.
“넌 꿈속에 있지만 나한텐 이건 현실이야.”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마스킹 테이프 찾지? 접착테이프 종류는 저쪽에 있어. 네 왼쪽, 카운터 앞줄에.”
그녀는 왼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헤매도 보이지 않던 마스킹 테이프가 다른 접착테이프들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녀는 파란 플라스틱 테두리가 있는 투명하고 폭 넓은 마스킹 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았다. 1시 40분. 점심시간은 아직 이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 340쪽

영생불사 연구소
영생불사 연구소의 98주년을 맞아 말단 김과장이 기념식을 치르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연구원 중 한 명은 국회의원 후보란 사람이 스토커처럼 계속 연락해서 골 아프고, 위에서 섭외하라고 한 배우는 죽도록 정중한 메일과 문자와 전화를 수십 통을 해도 까딱도 하지 않으며, 기념식 팜플렛은 동네북처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

“초대하는 글”을 써서 올리라고 해서 또 시키는 대로 끙끙거리면서 죽도록 공손하게 초대하는 글을 써서 올렸다. 올린 글은 이사님들 사이를 돌아돌아 소장님한테까지 올라갔다. 소장실에서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초대하는 “글”을 초대하는 “말씀”으로 바꿔라.
그래서 바꿨다. 다시 올렸다. 그러자 A 이사님에게서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초대하는” 말씀을 “초대의” 말씀으로 바꿔라.
그래서 바꿨다. 그러자 B 이사님에게서 이런 지시가 떨어졌다.
?초대의 “말씀”을 초대의 “글”로 바꿔라.
이건 바꿀 수가 없었다.
“이사님, 그건 소장님 지시대로 바꾼 건데요…….”
“아, 그래? 그럼 그대로 두게.”
그리고 약 삼 분 이십 초 후에 이번에는 C 이사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초대의” 말씀을 “초대하는” 말씀으로 바꿔라. - 377쪽

한 번 사는 인생
한 번 사는 인생은 좀 특이한 모텔 이름이다. 4층 한 층만 사용하고, 현금만 받고, 자고 가는 손님만 받는다. 제일 특이한 점은, 볼일이 끝나면 마시라며 드링크제를 주고, 전화기 0번을 누르라고 하는 것이다. 전화기 0번을 누르는 순간 손님은 모텔에 들어오는 순간으로 돌아간다.

여자가 팔을 뻗어 전화기 옆에 놓인 조그만 약병을 집는다. 금속 뚜껑이 달린, 흔한 반투명 갈색 유리병이다. 여자는 뚜껑을 돌린다. 조그맣게 빠각, 하는 소리가 난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양을 재어 반만 마신다. 남자가 병을 건네받아서 마저 마신다.
“전화해?”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응.”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고 번0을 누른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현관에 서 있다. 등 뒤로 막 문이 닫히는 중이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정확히 열두 시간을 되돌려 남자와 여자는 방에 들어선 그 순간으로 돌아와 있다. 분과 초 단위까지 틀림이 없다. -408~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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