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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곡의 1960년대 히트곡 모음집 (100 Hits of the '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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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00곡의 1960년대 히트곡 모음집 (100 Hits of the '60s)

엘비스 프레슬리 / 샘 쿡 / 로이 오비슨 외

[ 4CD ]
Carole King, Elvis Presley, Roy Orbison, Brenda Lee, Joe Brown 노래 외 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Not Now / Not Now | 2020년 09월 1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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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곡의 1960년대 히트곡 모음집 (100 Hits of the '60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9월 18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It Might As Well Rain Until September - Carole King
  • 02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 - Elvis Presley
  • 03 Runaround Sue - Dion
  • 04 Only The Lonely - Roy Orbison
  • 05 Speak To Me Pretty - Brenda Lee
  • 06 A Picture Of You - Joe Brown
  • 07 Three Steps To Heaven - Eddie Cochran
  • 08 Shakin' - Johnny Kidd & The Pirates
  • 09 Goodnight Mrs Flintstone - The Piltdown Men
  • 10 Halfway To Paradise - Billy Fury
  • 11 Well I Ask You - Eden Kane
  • 12 Cupid - Sam Cooke
  • 13 Perfidia - The Ventures
  • 14 The Theme From A Summer Place - Percy Faith
  • 15 Running Bear - Johnny Preston
  • 16 Stranger On The Shore - Acker Bilk
  • 17 Midnight In Moscow - Kenny Ball
  • 18 Moon River - Danny Williams
  • 19 Because They're Young - Duane Eddy
  • 20 Big Bad John - Jimmy Dean
  • 21 Our Favourite Melodies - Craig Douglas
  • 22 Bobby's Girl - Susan Maughan
  • 23 Walk Right Back - The Everly Brothers
  • 24 Rubber Ball - Marty Wilde
  • 25 Harbour Lights - The Platters
Disc2
  • 01 Sherry - The Four Seasons
  • 02 Let's Dance - Chris Montez
  • 03 Everybody's Somebody's Fool - Connie Francis
  • 04 Walkin' Back To Happiness - Helen Shapiro
  • 05 What'd I Say - Jerry Lee Lewis
  • 06 Dreamin' - Johnny Burnette
  • 07 Take Good Care Of My Baby - Bobby Vee
  • 08 Stay - Maurice Williams
  • 09 Sealed With A Kiss - Brian Hyland
  • 10 My Old Man's A Dustman - Lonnie Donegan
  • 11 True Love Ways - Buddy Holly
  • 12 The Lion Sleeps Tonight - The Tokens
  • 13 Things - Bobby Darin
  • 14 Travelin' Man - Ricky Nelson
  • 15 Come Outside - Mike Sarne
  • 16 Soldier Boy - The Shirelles
  • 17 On A Slow Boat To China - Emile Ford
  • 18 Sailor - Petula Clark
  • 19 The Mountain's High - Dick And Dee Dee
  • 20 Michael (Row The Boat Ashore) - The Highwaymen
  • 21 Let There Be Drums - Sandy Nelson
  • 22 Roses Are Red - Bobby Vinton
  • 23 Happy Birthday Sweet Sixteen
  • 24 Apache - The Shadows
  • 25 Nut Rocker - B. Bumble & The Stingers
Disc3
  • 01 The Locomotion - Little Eva
  • 02 Twistin' The Night Away - Sam Cooke
  • 03 It's Now Or Never - Elvis Presley
  • 04 Stairway To heaven - Neil Sedaka
  • 05 Johnny Horton - North To Alaska
  • 06 Mission Bell - Donnie Brooks
  • 07 I Can't Stop Loving You - Ray Charles
  • 08 Last Night Was Made For Love - Billy Fury
  • 09 You Got What It Takes - Marv Johnson
  • 10 Theme From Dixie - Duane Eddy
  • 11 Hey! Baby - Bruce Channel
  • 12 Good Timin' - Jimmy Jones
  • 13 I Want To Be Wanted - Brenda Lee
  • 14 Don't Ever Change - The Crickets
  • 15 Dream Baby - Roy Orbison
  • 16 Weekend - Eddie Cochran
  • 17 I Remember You - Frank Ifield
  • 18 Tossin' And Turnin' - Bobby Lewis
  • 19 What In The World's Come Over You? - Jack Scott
  • 20 Johnny Remember Me - John Leyton
  • 21 Please Don't Tease - Cliff Richard
  • 22 Poetry In Motion Johnny Tillotson
  • 23 Blue Moon - The Marcels
  • 24 The Wanderer - Dion
  • 25 Poor Me - Adam Faith
Disc4
  • 01 Runaway - Del Shannon
  • 02 Wonderful Land - The Shadows
  • 03 Big Girls Don't Cry - The Four Seasons
  • 04 Sharing You - Bobby Vee
  • 05 Walkin' To New Orleans - Fats Domino
  • 06 You're Sixteen - Johnny Burnette
  • 07 Lover Please - The Vernons Girls
  • 08 Alley-Oop ? The Hollywood Argyles
  • 09 Up On The Roof - Kenny Lynch
  • 10 Telstar - The Tornadoes
  • 11 Have A Drink On Me - Lonnie Donegan
  • 12 Vacation - Connie Francis
  • 13 Itsy Bitsy Teeny Weeny Yellow Polka Dot Bikini - Brian Hyland
  • 14 Venus In Blue Jeans - Mark Wynter
  • 15 Speedy Gonzales - Pat Boone
  • 16 He's A Rebel - The Crystals
  • 17 Tell Me What He Said - Helen Shapiro
  • 18 Quarter To Three - Gary US Bonds
  • 19 Hey Paula - Paul And Paula
  • 20 El Paso - Marty Robbins
  • 21 Hello Mary Lou - Ricky Nelson
  • 22 Let The Little Girl Dance - Billy Bland
  • 23 Will You Love Me Tom - The Shirelles
  • 24 Sheila - Tommy Roe
  • 25 Save The Last Dance For Me - The Drifters

아티스트 소개 (14명)

< Tapestry >로 19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 판매 앨범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캐롤 킹(Carole King)은 팝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캐롤 킹(본명: Carole Klein)은 1942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시절 ’코사인스(Co-Sine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 Tapestry >로 19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 판매 앨범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캐롤 킹(Carole King)은 팝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캐롤 킹(본명: Carole Klein)은 1942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시절 ’코사인스(Co-Sine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활동 초기에 가수보다는 작곡가로서 활동하는데 전념했다. 록앤롤과 포크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50년대 말엽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 흐름을 주도했다. 닐 세다카(Neil Sedaka), 게리 고핀(Gerry Goffin)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1959년 닐 세다카는 그녀를 모델로 한 노래 ’Oh, Carol!’을 히트시켰으며 게리 고핀은 캐롤의 첫 남편이 되었다. 캐롤과 게리 고핀은 ’브릴 빌딩(Brill Building)’이라는 대중음악 작곡 클럽을 만들어 많은 노래들을 만들어 내었으며, 여기서 연유하여 당시 이들의 음악을 ’브릴 빌딩 팝(Brill Building Pop)’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1961년 미국 최초의 여성 보컬그룹 ’셔를스(The Shirelles)’에게 차트 정상을 밟은 ’Will you love me tomorrow’를 만들어 주었으며, 바비 비(Bobby Vee)에게 준 ’Take care of my baby’도 정상을 밟았다. 최고의 작곡 듀오로 자리한 이들은 이후 100여 곡에 이르는 히트곡을 만들어 내었는데 리틀 에바(Little Eva)의 ’The locomotion’, 쉬퐁스(The Chiffons)의 ’One fine day’, 몽키즈(The Monkees)의 ’Pleasant valley sunday’, 드리프터스(The Drifters)의 ’Up on the roof’, 쿠키즈(The Cookies)의 ’Chains’(비틀즈에 의해 한 번 더 불리어졌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크리스탈스(The Crystals)의 ’He hit me (And it felt like a kiss)’와 같은 주옥같은 곡들이 모두 이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이들은 이혼과 함께 음악 활동에서도 결별을 선언하였고, 캐롤은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던 찰스 라르키(Charles Larkey)를 두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인다. 이들은 대니 코치마(Danny Kortchmar)를 끌어들여 ’더 씨티(The City)’라는 트리오를 결성하고 < Now That Everything’s Been Said >를 발표하였는데 캐롤의 무대 기피로 인해 홍보에 실패하면서 상업적으로도 실패하고 만다. ’더 씨티’ 시절의 음악은 이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다시 히트했는데 버즈(The Byrds)가 ’Wasn’t born to follow’를 다시 불렀고,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가 ’Hi-De-Ho’를,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You’ve got a friend’를 히트시켰다. 1970년 캐롤 킹은 솔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1970년 발표한 그녀의 데뷔 앨범 < Writer >는 실패했지만 1971년 발표한 < Tapestry >는 캐롤 킹을 1970년대 최고의 여가수, 팝 사상 여성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로 만들어주게 된다. 이 앨범은 당시 급작스럽게 증가한 독신자, 이혼부부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달래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앨범은 1975년까지 1,500만장이 팔려 나갔으며 15주간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무려 6년 동안 차트에 머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은 1970년대를 통틀어 세 번째로 많이 팔렸으며 솔로 뮤지션의 앨범으로는 197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자리했다. 앨범 수록곡 중 ’So far away’와 ’It’s too late’가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제임스 테일러가 먼저 불러 히트시킨 ’You’ve got a friend’, 셔를스가 히트시킨 ’Will you love me tomorrow’, 아레사 프랭클린이 히트시킨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 작곡자인 그녀의 목소리로 다시 실려 큰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1971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팝 여성가수’, ’It’s too late’으로 ’올해의 레코드’, ’You’ve got a friend’로 ’올해의 노래’까지 4개 부문을 수상했다.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 붐의 선두에 자리한 그녀는 1971년작 < Music >을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렸으며 ’Sweet seasons’를 히트시켰다. 1972년작 < Rhymes And Reasons >도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1974년작 < Wrap Around Joy >는 ’Jazzman’이 차트 정상에 오른데 힘입어 앨범도 정상을 밟았다. 1976년에는 전 남편이자 음악적 동반자였던 게리 고핀과 다시 손을 잡고 < Thoroughbred >를 발표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1977년 < Simple Thing >을 발표한 후 작곡 동료였던 릭 에반스(Rick Evans)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이지만 릭 에반스는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결혼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80년 고핀과 작업했던 곡들을 모아서 내놓은 < Pearls >를 히트시킨 후 그녀는 산골 마을인 아이다호(Idaho)로 들어가 환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83년 < Speeding Time >, 1989년 < City Streets >, 1993년 < Colour Of Your Dream >을 발표하는 등 간간이 앨범을 내어놓고 있지만 현재 가수로서보다는 뮤지컬 작곡가나 후배 뮤지션들의 작곡가, 프로듀서로 더 많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셀린 디욘(Celine Dion)등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많은 여성 뮤지션들에게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1999년에는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아레사 프랭클린, 머라이어 캐리, 샤냐 트와인(Shania Twain), 셀린 디욘,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등 쟁쟁한 여가수들이 ’You’ve got a friend’를 함께 노래하며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노래 : Eddie Cochran (에디 코크란,Ray Edward Cochran)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잇 The Girl Can't Help It》(1956), 《언테임드 유스 Untamed Youth》(1957), 《고 자니 고 Go Johnny Go》(1959)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첫 히트곡인 《시틴 인 더 발코니 Sittin' in the Balcony》(1957)에 이어 힘찬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담은 《서머타임 블루스 Summertime Blues》(1958)와 《크몬 에버리바디 C'mon Everybody》(1958)는 초기 록의 완벽한 본보기로 꼽힌다.

인기가 절정이던 1960년 영국 순회공연 도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유일한 앨범인 《싱인 투 마이 베이비 Singin' to My Baby》는 그가 죽기 몇달 전에 녹음한 것으로 그 속에 수록된 《스리 스텝스 투 헤븐 Three Steps to Heaven》은 그가 죽은 뒤 영국에서 인기순위 1위에 올랐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노래 : Sam Cooke (샘 쿡 ,Dale Cook)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당시 흑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공민권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그는 노래를 통해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한 그의 의욕적 활동에 흑인들 모두 지지를 보냈다. 사회활동가로서의 지지도는 장차 그에게 돌아올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다름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기성과 청춘의 세대적 통합자로서 그의 호소력은 당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었다. 1931년 1월에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합창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카고로 이주한 후 삼형제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대중음악의 흐름 또한 놓치지 않았다. 틴 하이웨이 큐씨스(Teen Hightway QCs)라는 성가대의 멤버였던 그는 1950년, 전국적 가스펠그룹 소울 스터러스(Soul Stirrers)에 합류했다. 6년여의 활동기간 중 ‘그의 옷자락을 만질 수만 있다면’(Touch the hem of his garment), ’당신에게 더 가까이‘(Nearer to thee), ’내겐 천국 이었어’(That’s heaven to me)와 같은 노래를 통해 흑인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와 흑인계를 넘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 소울 스터러스와 결별한 그는 1956년, 싱글 ‘사랑스러운’(Lovable)을 발표하며 진정한 자아 정체성 탐구를 위한 새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195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팝과 알앤비 차트 정상을 차지한 ’You send me’는 2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가스펠과 팝 R&B 요소가 응집력 있게 혼합된 노래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소울 음반이었다. 그는 또한 로맨틱한 발라드와 틴 팝 싱글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다. ‘감상적 이유 때문에’(For sentimental reasons), ’모두 차 차 차를 좋아해‘(Everybody loves to cha cha cha), ’겨우 16세‘(Only sixt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를 비롯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yday)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Tribute to the Lady >에 실린 노래들까지 당대를 대표할만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소속사인 킨 레이블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메이저 레이블로의 이적을 계획, 콜롬비아(Columbia), 데카(Decca)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레이블 중 하나인 RCA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음반뿐 아니라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해 왔던 그는 출판사 칵스 뮤직(Kags Music)과 레코드레이블 SAR을 설립해 뮤직비즈니스에 본격 착수했다. RCA에 둥지를 튼 쿡은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싱글 ’한 사슬에 묶인 옥외 노동죄수들‘(Chain gang, 1960년 싱글2위)로 팝과 소울에 새 지평을 열었으며 블루스적인 로맨틱 ‘슬픈 분위기(Sad mood, 1960년 싱글29위), 목가적 로맨틱 소울 ’큐피드‘(Cupid, 1960년 싱글17위), 보통의 댄스넘버 ‘밤새도록 트위스트를 춰요’(Twistin’ the night away, 1962년 싱글9위), ’나의 집으로 그걸 가져오세요‘(Bring it on home to me, 1962년 싱글13위)’와 같이 다채로운 음악요소와 사회적 인식을 한데 엮어낸 곡들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곡들을 포함, 무려 13곡의 히트넘버가 2년간 차트를 장식했다. 틴에이저와 기성세대 그리고 흑인 전 세대에 걸쳐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그는 특히 백인 청취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흑인뮤지션에게 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1957년 초 뉴욕 코파(Copa)에서 연주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했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왔다. 경험미숙이 문제였다. 1964년 그는 그러나 당당하게 클럽으로 컴백해 라이브실황을 녹음했고 그해 가장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수확을 올렸다. 중년과 백인중산층만을 위한 무대가 됐다는 주위의 냉정한 평가가 뒤따르긴 했지만. 1963년 중반 쿡은 마이애미의 할렘 스퀘어 클럽에서의 공연과 실황을 담은 음반으로 자신의 진가를 확증했다. 흑인청취자들과 함께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열창하며 황홀한 연주무대를 통해 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소울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라이브 레퍼토리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라이브의 황제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63년 중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한 것. 쿡은 그해 말까지 깊은 시름에 잠겨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매니저 앨런 클라인(Allen Klein)과 함께 재정적으로 그리고 음악활동을 위한 독립의 발판을 견고히 다졌다. 1963년 11월 초 마침내 그의 레코드들에 대한 최종 소유권을 확보했고 지휘감독권도 성취했다. 그가 다시 음반작업에 들어갈 즈음은 1960년대 초의 저항음악적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쿡은 흑인들을 포함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치료제와 같이 작용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 크게 감화되었다. 피터, 폴&메리도 그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커다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식있는 아티스트들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에 그도 두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변화(의 시기)는 올 겁니다’(A change is gonna come)가 이때 나왔다. 공민권투쟁의 산물로 나온 가장 위대한 노래중 하나. 가스펠부터 팝까지 다양한 음악성향 안에서 탄생한 이 곡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도 우아한 예술적 찬양가였다. 이 시기동안 그는 또한 싱글 ’Shake’ 를 통해 더 진보한 댄스 본위의 소울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두 노래는 쿡의 음악여정에 새로운 가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알리는 장이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꿈과 희망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64년 11월 11일 이른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저급한 모텔에서 쿡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언쟁에 휘말려 모텔매니저의 총탄을 맞고 싸늘히 식어갔다.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미궁으로 남았다. 쿡의 죽음으로 흑인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5년에 발매된 싱글 ‘A change is gonna come‘과 < Sam Cooke At The Copa > 앨범이 그랬듯 싱글 ‘Shake’는 유작으로 사후 탑 텐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 : Jerry Lee Lewis (제리 리 루이스)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밴드 : The Ventures (더 벤처스 (락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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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Orb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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