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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a Ronstadt (린다 론스태드) - Simple Dreams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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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Linda Ronstadt (린다 론스태드) - Simple Dreams [2LP]

[ 200g / 게이트폴드 / 45RPM ]
Linda Ronstadt, Buddy Holly, Warren Zevon, Dolly Parton, Roy Orbison 노래 외 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Analogue Productions / Analogue Productions | 2020년 08월 2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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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a Ronstadt (린다 론스태드) - Simple Dreams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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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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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20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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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A1 It's So Easy
  • A2 Carmelita
  • A3 Simple Man, Simple Dream
  • B1 Sorrow Lives Here
  • B2 I Never Will Marry
Disc2
  • C1 Blue Bayou
  • C2 Poor Poor Pitiful Me
  • D1 Maybe I'm Right
  • D2 Tumbling Dice
  • D3 Old Paint

아티스트 소개 (9명)

노래 : Linda Ronstadt (린다 론스태드)
팝계는 흥분과 격동의 60년대를 마감하고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린다 론스태드라는 뛰어난 여가수의 출현을 알린다. 70년대 초반 팝 음악은 불과 몇 해 전의 파워풀한 분위기와는 크게 다른 ‘차분한’ 기조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린다 론스태드는 이러한 소프트록과 ‘70년대식’포크의 상징이었다. 그의 인기는 70년대 중반부터 폭발해 이후부터 여가수 가운데 최고, 남자가수를 합쳐도 톱클래스라는 명성을 쌓아올렸다. 그... 팝계는 흥분과 격동의 60년대를 마감하고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린다 론스태드라는 뛰어난 여가수의 출현을 알린다. 70년대 초반 팝 음악은 불과 몇 해 전의 파워풀한 분위기와는 크게 다른 ‘차분한’ 기조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린다 론스태드는 이러한 소프트록과 ‘70년대식’포크의 상징이었다. 그의 인기는 70년대 중반부터 폭발해 이후부터 여가수 가운데 최고, 남자가수를 합쳐도 톱클래스라는 명성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슈퍼스타의 지위는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린다의 이름은 70, 80년대를 걸쳐 인지도가 가히 최고급으로 불멸의 애청곡 ‘아주 오랫동안(Long, Long Time)’ 하나만으로 기억하기 충분하고 ‘사랑에 빠지긴 너무 쉬워(It’s So Easy)’. ‘당신은 나빠요(You’re No Good)’등도 널리 알려진 노래들이다. 이십대 팝 팬들은 90년대를 강타한 수작 ‘많이는 몰라요(Don’t Know Much)’로 린다의 존재를 숙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린다에게서 우선 발견되는 유별난 특성은 가히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이다. 1967년에 팝계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활동 경력이 어느덧 사반세기를 넘겼다. 이처럼 롱런하는 동안 눈에 띄는 슬럼프를 경험함이 없이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인기만 유지한 것이 아니라 여가수 중 드물게 가창력은 물론 앨범으로서 음악성을 인정받아 ‘실력을 갖춘 여가수’라는 희소가치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말이 사반세기이지 그 기간 동안 팝 음악의 유행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랴. 너무나도 쉽게 변해버리는 팝음악의 조류를 쫓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린다는 이것을 거뜬히 해냈으며 바로 이 점이 그를 무수한 팝가수 가운데 우뚝 서게 해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영원한 인기를 보장해준 밑거름은 출생부터 딸려나온, 거의 천재적인 ‘유행의 포착능력’이었다. 그는 유행을 미리 내다볼 줄 알았다. 록 음악의 시대에는 남자 못지않게 록을 소화했고 유행이 컨츄리 음악 쪽이겠다 싶으면 지체없이 컨츄리를 노래했으며, 펑크가 거세질 때는 펑크를 음반에 담았다. 옛날 고리짝 시절의 스탠다드 팝을 선보여 8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맞추어 나갔고 멕시코 가요 음반을 내놓기도 했고 블루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미국의 팝 음악이 역사에 걸쳐 생성시킨 그 무수한 장르 가운데 린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장르는 없다! 90년대 그는 AP통신의 앤 피터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래 스타일이 어찌됐든 단지 노래를 계속 해야 한다”며 “현재의 캐리어에 그냥 머물러 앉는 것은 양에 차지 않는다”고 밝혔다.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능력이 닿는다면, 시대가 그 스타일을 원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시도하겠다는 얘기다. 장하다고 칭찬해 줄 만한 바로 이 점이 정반대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가 데뷔이래 지금까지 내놓은 음반을 쭉 분석하면 그것은 영락없는 ‘카멜레온’의 음악행각이다. 하나의 고정 장르를 오랜 기간 고집스럽게 밀고나간 족적이 없다. 변덕스럽기 작이 없다. 스타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프로의식을 다른 시점에서 보면 그 만큼 대중의 감각에 철저히 ‘영합’했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 유행의 흐름을 파도라 한다면 그는 실로 ‘파도타기의 명수’였다. 60년대말 록의 ‘저항’물결이 쇠락하면서 70년대가 소프트 록의 시대가 될 것을 간파한 그는 즉각 ‘보수적 신념’을 내비쳤다. 에벌리 브라더즈 또는 버디 할리의 컨츄리풍 록넘버를 리메이크해 ‘복고’의 기치를 드높였고, 60년대 록 스타들이 미국정부에 대해 도전한 것과 같은 공격성에 넌더리를 치며 “이 나라에 실질적인 애국심의 부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0년대 초 린다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위한 선거 캠페인을 끝낸 뒤 이렇게 말했다. “난 사실 그때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누구든 알겠는가. 만약 누군가 그것을 결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면 기업 ‘스탠다드 오일’은 대통령이 안될 게 뭐 있는가. 기업이 사실 득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스탠다드 오일에 만약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다국적 대기업이 국가를 통치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당신들은 말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기업을 필요로 하고 그 기업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기업으로부터 직장을 얻고 있다. 그 기업이 이 나라와 나머지 전세계 국가의 경제상황에 무엇이 유리한가를 결정하는, 더 바람직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체제에 회의를 품지 말고 나라사랑의 마음으로 미국체제의 근간인 경제적 과두제, 대기업에 의한 경제운용, 그리고 기업이익 추구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 시점부터 린다는 ‘미국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 비판을 하나의 기조로 하는 록 뮤직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스타들과는 달리 의미있는 노랫말과는 결별했다. < 뉴스위크 >지는 77년 2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린다는 상승추세의 록 무대 활동기간 중 록성좌들의 ‘붉은 거성’과 ‘블랙 홀’을 피했다”며 그를 운좋고 조심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했다. 저항적 색채 또는 정치색에 물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보수성은 간혹 이중적 자세를 엿보이게 했다. 린다는 70년대말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에 사회저항적인 펑크 록의 움직임이 확산될 무렵 보수적 색깔을 드러내 “펑크는 변비가 심해 ‘치질’의 록이라 불러야 한다”며 욕설조로 펑크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런데 펑크의 기세가 거대한 물결을 야기시키며 팝과 록의 여러 장르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듯 펑크의 이미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78년 펑크의 거목 엘비스 코스텔로의 노래 ‘앨리슨(Alison)’을 부른 것을 필두로 80년도 음반 < 광기의 사랑(Mad Love) >에는 펑크적 분위기를 적극 살려 스파이크 헤어스타일을 한 린다가 자켓에 등장했으며 코스텔로의 노래를 ‘파티여자(Party Girl)’, ‘여자들의 말(Girl’s Talk)’ 등 두 곡이나 수록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처크 베리, 엘비스 프레슬리, 스모키 로빈슨 등 옛곡을 재해석하는 ‘복고적 성향’을 잊지는 않았다. 외적으로는 최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구식’을 고수하는 이 자세야말로 린다의 전형적인 대중접근 수법이자 그의 진정한 색깔이기도 하다(70년대 린다의 히트곡 대다수가 옛노래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점은 특기할 사항이다). 80년대 들어서도 린다는 시대적 특성을 정확히 읽었다. 때는 바야흐로 레이건의 보수 시대였다. 그는 지금껏 줄기차게 구사해왔던 록 뮤직을 걷어치워버리고 83년 스탠다드 넘버로 채색한 음반 < 무엇이 새로운가(What’s New) >를 발표했다. 스탠다드 넘버란 40년대 이전까지 유행한 상류계층의 노래로 향수어린 이지 리스닝을 연상하면 되는데, 린다의 음반 가운데에선 가장 보수적인 색채라 할 만한 것이었다. 넬슨 리들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제작한 이 앨범은 < 타임 >지 선정 그 해 팝음반 베스트 10의 하나였다. 이 작품이 예상외로 호평을 받자 린다는 84년 다시 한번 넬슨 리들과 손잡고 < 돌진하는 삶(Rush Life) >을 내놓았고, 이후 87년에는 멕시코 전통가요로 꾸민 < 아버지의 노래(Canciones de Mi Padre) >를, 88년에는 컨츄리 스타인 돌리 파튼, 에밀루 해리스와 노래한 < 트리오(Trio) >를 각각 출반했다. 이런 유형의 작품들은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린다의 시도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여하튼 그는 레이건 통치 8년간 단 한 번도 록 뮤직 또는 파워풀한 음악과 재회함 없이 부드러운 노래로 일관했다. 린다의 보수성은 가정환경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1964년 미국 애리조나주 턱슨에서 태어난 그의 가정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린다에게는 어렸을 적에 벌써 조랑말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과학 방면에서 뛰어난 지식을 소유한 인텔리였고, 아버지는 턱슨에서 대규모 하드웨어사업을 경영했다. ‘자본과 기술’이 제휴된 부르조아 부모 덕분에 린다는 전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풍족하게 살았다. 대다수 록스타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린다의 소녀시절과 사춘기는 여느 록스타들처럼 도발적 끼가 넘쳐흘렀다. 여고시절에 그가 펼친 상상 가운데 하나는 ‘목사를 유혹하는 것’이었고, 아리조나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를 수료한 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결혼하거나 수녀가 되는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하겠다는 제 3의 길을 택할 만큼 대담했다. 그는 스스로 그 시절의 자기를 ‘사악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남성 지배의 록 세계로 뛰어든 것 자체가 용기였고 공연을 다니면서 남자의 세계에 깊이 동화될 정도로 순종적 자세를 거부했다(“난 공연을 다니면서 남성적 태도를 배웠다. 록큰롤의 실질적 자세를 말이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올 때 내 말버릇은 마치 트럭 운전사와 같았다”). 그는 나이 50세가 되어가는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간 제이 디 사우더, 돈 헨리, 믹 재거, 그리고 캘리포니아 시장 제리 브라운과 열애하거나 동거하기도 했지만 관계를 오래 끌지 않았다. 77년에는 ‘난 결혼하지 않으리(I Never Will Marry)’라는 곡을 내놓아 독신을 공식선언한 바도 있다. 부잣집 딸이, 게다가 용모까지 아름다운 여자가 사서 고생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린다가 반항적 기질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성년기의 린다는 상층사회의 흐름에 거역치 않는 타협적, 보수적 자세로 일관해오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음악에 임하는 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무질서로부터 질서의 확립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술을 창조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린다가 노래하는 것은 다름아닌 질서와 안정이다. 그는 무질서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현실과 사회에 대한 도전적 자세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Listen To Me : 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와 빅 바퍼 리차드슨 주니어 (The Big Bopper Richardson Jr)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천재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영원한 별이 된 그날을 일컬어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음악이 숨을 거둔 날(The Day Music Has Died)"라고 말했다. 수많은 로큰롤의 별들이... Listen To Me : 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와 빅 바퍼 리차드슨 주니어 (The Big Bopper Richardson Jr)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천재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영원한 별이 된 그날을 일컬어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음악이 숨을 거둔 날(The Day Music Has Died)"라고 말했다. 수많은 로큰롤의 별들이 명멸해 갔지만 버디 홀리가 숨을 거둔 그날 음악도 죽었다라고 일컬을 만큼 버디 홀리가 남겨준 유산은 그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2011년 9월 7일 그의 75회 생일을 맞아 발매된 이 앨범은 일주일 간격으로 Rave On(Fantasy/Concord)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또 한 장의 트리뷰트 앨범과 함께 그가 뿌려준 음악적 세례에 대한 수혜자들의 즐거운 음악적 고백들이다. 특히 이 앨범을 제작한 피터 애셔(Peter Asher)는 그의 영국판 카피캣이었던 피터 & 고든 (Peter & Gordon)의 바로 그 인물이란 점에서 그가 평생 동안 가져왔던 그의 음악적인 멘토였던 버디 홀리에 대한 뒤늦은 감사의 표시이다.

1957년 데뷔해서 1959년 2월 사망하기까지 불과 18개월 동안 세 장의 앨범과 남겨 놓은 명곡들은 그의 음악적 인생을 반추해 보기엔 너무나 작은 숫자이지만, 그가 남겨준 음악적 영향력은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너무도 명백해 보인다. 음악적으로 두 대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밴드의 전형을 제시한 그는 외향적으로도 결코 록큰롤이 반항의 음악만이 아니었음을 그의 스타일로 입증했다. 엘튼 존에서 존 레논에 이르기까지 그의 외모가 결코 록스타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보여주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심지어 비틀즈의 이름 역시 그의 밴드 크리켓츠(귀뚜라미들)에서 따왔으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첫 레코딩 역시 버디 홀리의 That'll Be The Day 였으며, 롤링 스톤즈의 최초의 히트곡도 Not Fade Away 였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비트와 모드세대 전반을 걸쳐 록큰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Words of Love)에서 롤링 스톤즈(Not Fade Away)에 이르는 브리티쉬 인베이젼에서부터, 제임스 테일러(Everyday)에서 돈 맥클린(Mayby Baby) 등의 싱어송라이터뿐 아니라. 험블 파이 (Heartbeat), 이레이져 (True Love Ways). 그레이트풀 데드 (Not Fade Away), 블론디 (I'm Gonna Love You Too), 블라인드 페이스 (Well All Right), 모터헤드(Love's Made a Fool of You) 등 다양한 장르의 록밴드들의 음악적 자양분의 근간에 그의 음악이 있었던 점은 지난 오십년 간의 역사를 넘어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이 앨범에 참여한 폭넓은 스펙트럼의 아티스트들 링고 스타와 브라이언 윌슨과 같은 동시대의 뮤지션에서부터, 록의 다양성을 펼쳐낸 스티비 닉스(Fleetwood Mac), 잭슨 브라운, 제프 린(E.L.O), 린다 론스태트를 거쳐 크리스 아이작, 나탈리 머천트(10000 Maniacs), 팻 모나한(Train), 더 프레이, 패트릭 스텀프(Fall Out Boy), 주이 데샤넬, 이멜다 메이에 이르기 까지 그의 음악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오며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한 장의 음반에서 감동적으로 만나 볼 수 있다.

특히, 이 앨범이 참여한 거의 모든 아티스트에 그래이엄 내쉬, 폴 앵카, 키쓰 리차드와 보즈 스캑스 등의 슈퍼스타가 모두 모여 그의 75주년 생일이었던 2011년 9월 7일 헐리우드의 뮤직 박스 씨어터에서 성대한 축하공연이 열려 더욱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속에 녹아든 그의 음악의 다양한 일면들은 그의 음악이 그의 사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한 생명력으로 이 시대의 팝음악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 시켜준다.

그리고 잭슨 브라운은 돈 맥클린의 말에 대해 이렇게 화답했다.
"그날은 음악이 죽은 날이 아니다. 바로 음악이 불멸의 날이 된 날이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컨트리 곡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보인 < 보디가드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비롯해 4인조 보컬 그룹 올 포 원(All 4 One)의 ‘I swear’, ‘I can love you like that’ 등의 원곡은 모두 컨트리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9 to 5''로 유명한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1974년에 발표한 노래이고, ‘I swear’와 ‘I can love you like that’은 남성 컨트리 싱어 존 마이클 몽고메리(John Michael Montgomery)의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 1946년 1월 19일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테네시 주에서 출생한 돌리 파튼은 작사, 작곡은 물론 영화 배우와 TV 프로그램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컨트리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실력자다. 1960년대 컨트리 싱어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와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차세대 컨트리 음악의 기대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컨트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은발의 컨트리 여성 싱어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1980년대 영화 < 나인 투 파이브 >가 개봉하면서 드높아졌다. 영화의 주연도 맡고 주제가도 불러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는 이 곡으로 컨트리 차트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돌리는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음악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고, 1983년에는 비지스(Bee Gees)의 배리 깁(Barry Gibb)이 작곡한 ‘Islands in the stream’을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듀엣으로 취입해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탈환했다. 이 곡에서 케니 로저스가 돌리 파튼의 보컬에 눌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보컬이나 곡의 소화력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밀물로 들어왔으면 썰물로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1980년대 초반 이렇듯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더 이상 컨트리 팝은 컨트리 팬들은 물론 팝 팬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했다. 그 타개책으로 이 영특한 가수가 선택한 것은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정통 컨트리로 회귀한 음반 < Trio >였다. 그 당시 랜디 트래비스(Randy Travis)를 중심으로 신 전통주의 컨트리가 개화하려던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멋지게 부활했다. 돌리 레베카 파튼(Dolly Rebecca Parton-본명)은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 구상하면서 컨트리 음악계의 지존으로 남아 있다. Hello Dolly!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미국 음악가 미국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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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w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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