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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앨범 [레드 컬러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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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앨범 [레드 컬러 LP]

[ 180g / 게이트폴드 / 배순탁의 해설지, 영문 가사지 삽입 ]
Billy Joel, Natalie Imbruglia, New Kids On The Block, Air Supply, Whitney Houston 노래 외 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 Music / Sony Music | 2020년 09월 24일 리뷰 총점6.6 정보 더 보기/감추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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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앨범 [레드 컬러 LP]

이 상품의 시리즈 (2개)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9월 24일
제조국 독일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2개)

음반소개

<컬러 디스크 LP를 구매하실 때 아래 사항을 참고해 주세요>

디스크

Disc
  • A1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 Mr. Blue Sky
  • A2 Toto (토토) - Africa
  • A3 Kansas (캔자스) - Dust In The Wind
  • A4 Whitney Houston (휘트니 휴스턴) - I Will Always Love You
  • A5 Air Supply (에어 서플라이) -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
  • B1 New Kids On The Block (뉴 키즈 온 더 블록) - Step By Step
  • B2 Earth, Wind & Fire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 September
  • B3 Boston (보스턴) - More Than A Feeling
  • B4 Natalie Imbruglia (나탈리 임브룰리아) - Torn
  • B5 Billy Joel (빌리 조엘) - Piano Man

아티스트 소개 (10명)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 했던 그 아이, 바로 영원한 피아노맨 빌리 조엘(Billy Joel)이다. 빌리 조엘은 1965년부터 에코스(The Echoes), 해슬스(The Hassles), 아틸라(Attila) 등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팝 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허나 당시 하드록, 사이키델릭이 주를 이뤘던 음 세계는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사장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해 저널에 비평을 기고하고 음악적 실패로 인해 마약 센터에 들락거리며 자살을 기도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그를 엄습한 시기였다. 1971년에 빌리 조엘은 솔로 데뷔작 < Cold Spring Harbor >를 내놓으며 복귀식을 치렀다. 발표 직후 가졌던 공연 릴레이는 호평 받았지만 지지부진한 판매고는 여전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L.A.에 새 둥지를 틀었고, 빌 마틴(Bill Martin)이란 가명으로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재기를 꿈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비슷한 시기에 겹경사가 일어났다. 1973년 엘리자베스 웨버와 결혼하며 안정을 찾았고 ’Captin Jack’의 라이브 버전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을 간파한 콜롬비아(Columbia)가 구애의 손길을 보낸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같은 해에 2집 < Piano Man >이 등장했다. ’피아노맨’이라는 별명의 진원지이기도 한 앨범은 빌보드 차트 27위까지 올랐고 타이틀 트랙 역시 싱글 차트 40위권에 안착하며 그에게 처음으로 성공의 단 열매를 맺어주었다. 제이 가일스 밴드(The J. Geils Band), 두비 브라더스(The Doobie Brothers)의 오프닝을 맡아 투어를 돈 뒤, 1974년 말에 내놓은 3집 < Streetlife Serenade >(1974)은 차트 35위를 기록하며 탄탄대로를 열어주는 듯 했다. 허나 4집 < Turnstiles >(1976)는 명곡 ’New York State of Mind’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 차트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제작 전에 프로듀서인 궈시오(Guercio)를 해고하고 아내를 매니저로 기용하는 등, 잡음이 많았던 점이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1977년의 < The Stranger >는 오늘날의 빌리 조엘이 있게 한 명반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미국에서 각광받았던 시티 뮤직을 대폭 수용한 작품은 차트 2위까지 상승하며 단숨에 플래티넘을 따냈고 ’Just the way you are’(3위), ’Monin’ out’(17위), ’Only the good die young’(24위), ’She’s always a woman’(17위)등, 네 곡의 히트작을 쏟아냈다. ’Just the way you are’는 그래미에서 ’Record of the Year’와 ’Song of the Year’, 두 개 부문을 수상하며 비평적 찬사를 안겼다. 6집 < 52nd Street >(1978)도 맹렬한 기세를 이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능가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8주간 1위를 고수하며 한달 만에 200만장을 세일즈했고 ’My life’(3위), ’Big shot’(14위) ’Honesty’(24위)등이 수시로 울려 퍼졌다. 마침내 그는 그토록 소망했던 그래미 ’올해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펑크와 뉴 웨이브의 세상 속으로 과감히 돌진한 < Glass Houses >(1980)에서도 한번 불붙은 열기는 식지 않았다. 급격한 음악적 변화에도 기존 팬들은 쌍수 들어 그를 환영했다. 앨범 차트 6주간 1위, 4곡의 히트송 배출, 그래미 ’Best Rock Vocal Performance, Male’ 부문 수상이 마치 자연스런 수순처럼 보일 정도였다. 1년 뒤, 초기곡들의 라이브 콜렉션인 < Songs in the Attic >(1981)을 발표한 뒤, 빌리 조엘은 이혼과 오토바이 사고를 겪으며 위기의 남자가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삶에 대해 컨셉트 앨범으로 꾸민 야심작 < The Nylon Curtain >(1982)마저 낮은 판매량에 허덕이며 전성 시대가 지난 것 아니냐는 추측성 발언을 낳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과거 사운드로 회귀한 < An Innocent Man >(1983)을 내놓으며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 차트 1위에 오른 ’Tell her about it’을 비롯해, ’Uptown girl’, ’An innocent man’, ’Keeping the faith’ 등이 바톤 터치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MTV 시대를 맞이하며 비디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만난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결혼에 골인했다. 1985년에 중간 결산 차원에서 피아노 맨은 히트곡 모음집 < Greatest Hits, VolumeⅠand VolumeⅡ >을 내놓으며 미국에서만 무려 2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판매량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자 미국인들이 그의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 The Bridge >를 발표하여 성공을 이어나간 빌리 조엘은 1987년, 소련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의 실황을 담은 더블 앨범 < Kohuept(Live In Leningrad) >(1987)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장 결석과 법정 소송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 Storm Front >(1989)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을 선물한 작품이었다.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싱글 ’We didn’t start the fire’가 세계 역사를 훌륭히 그려냈다는 이유로 미국 전역의 고교에 악보가 배포되는 등 화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베스트 앨범에서 숫자로 드러난 미국인들의 애정이 공적으로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퀸시 존스, 자니 캐쉬, 아레사 프랭클린과 함께 1990년부터 1년 간 가졌던 월드 투어로 ’Grammy Living Legend’상을 수상한 빌리 조엘은 1993년 나온 < River of Dreams >(1위)로 순항을 거듭했다. 1996년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이혼한 후, 이 위대한 싱어 송라이터는 20세기 마지막 날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에서 가졌던 공연 결과물 <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 >를 발매하며 새 출발을 암시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히트송 콜렉션인 < The Essential Billy Joel >(2001)로 팝 아티스트로서의 화려했던 시절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빌리 조엘은 클래식 크로스오버 작품인 < Fantasies & Delusions >을 소개하며 클래식 작곡가로서의 야심한 행보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노래 : Natalie Imbruglia (나탈리 임브룰리아)
# ‘진정한 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정 ‘Torn’의 위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Natalie Imbruglia)의 데뷔싱글이었던 그 곡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영국에서만 1백만장이 팔려나갔고, 미국에서도 10주가 넘게 방송차트 1위를 고수하는 등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팝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그... # ‘진정한 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음악여정 ‘Torn’의 위력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Natalie Imbruglia)의 데뷔싱글이었던 그 곡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영국에서만 1백만장이 팔려나갔고, 미국에서도 10주가 넘게 방송차트 1위를 고수하는 등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팝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그 곡은 그러나 동시에 그녀에게 치명적인 해악이었다. 문제는 ‘Torn’과 그녀 자신이 너무나 예뻤다는 것. 상큼한 팝과 성난 록이 잘 정제된 음악적 내용물도, 시원한 향기가 배어나는 목소리도, 그리고 ‘밤비’ 같은 큰 눈을 가진 그녀의 얼굴도 너무 예뻤다. 때문에 대중들이 그녀를 소비하는 것은 단 한가지, 바로 그 예쁘장함이었다.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데뷔앨범 < Left Of The Middle >은 ‘Torn’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얼마 후에 발매되었다. 만만치 않은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곡의 빛에 가려 음반에 실린 다른 곡들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Torn’은 라디오를 통해, 또 수많은 컴필레이션 음반들을 통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으니 정규음반은 사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게다가 잡지나 신문들은 주로 그녀의 외모나 스캔들 따위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팬들은 그 매체에 실린 사진을 오려 방에 걸어두며 그녀를 ‘핀업 걸’로 대했다. 사람들은 그저 ‘Torn’만 들으면, 그녀의 얼굴만 보면 만족했다. 사실 어찌 보면 나탈리에게 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결과다. 태어나고 자랐던 호주에서 10대 시절부터 TV스타였던 그녀는 1996년 가수를 꿈꾸며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의 음반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녀의 데뷔앨범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 일도 못하고 1년여를 방황했던 탓에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가수가 되길 원했으며, 그 때문에 음반사에서 자신을 부르자 바로 계약했다. 따라서 음반계약 후에도 음악이나 이미지에 대한 선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그녀를 선택한 레이블은 그녀의 청순한 비주얼과 생기 있는 목소리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당시 강세를 보이던 앨라니스 모리셋 류의 여성 얼터너티브 록과 어쿠스틱 팝/록 사운드를 덧입히려 했다. 그를 위해 그룹 큐어(Cure)의 베이시스트였던 필 토낼리(Phil Thornalley), 라디오헤드의 < OK Computer >를 제작한 나이젤 고드리치(Nigel Godrich) 등의 일류 프로듀서들을 동원했고, 그들은 아주 훌륭하게 그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 결과 ‘Torn’이라는 빅히트곡을 탄생시켰으며 그 외에도 ‘Big mistake’, ‘Wishing I was there’, ‘Smoke’ 같은 괜찮은 느낌을 주는 곡들을 배출했다. 이렇게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음악과 이미지는 결정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는 ‘Torn’과 핀업 걸의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을 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그것은 분명 상당한 부담이었으며 앞날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뮤지션이라면 그러한 장애물은 음악을 통해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3년여 동안 음악에 전념하며 자신과의 투쟁을 벌였고, 드디어 이번에 그 흔적들이 담긴 두 번째 앨범 < White Lilies Island >를 내놓았다. # 예쁜 이미지 벗고 내적 성숙 완연한 새 앨범 그렇다고 이번 신보가 전작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Torn’의 작곡자였던 필 토낼리가 또 다시 참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풋풋하고 싱그러운 곡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전작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았다. 같은 상큼함이라도 더욱 멜랑콜리하게, 더욱 애처롭게 들린다. 그런 변화의 조짐은 1999년도 영화 < 스티그마타 > 사운드트랙에서 불렀던 ‘Identify’에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이 작곡했던 그 곡은 나탈리답지 않은 음울함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 부르는 보컬도 편안하게 들린다. 의도적으로 앨라니스 모리셋를 따라했던 전작에서의 보컬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으며, 또 발전했다. 첫 싱글부터 큰 차이가 난다. 전자기타와 피아노, 현악이 묘한 화음을 이루는 첫 싱글 ‘That day’에서 리드미컬한 나탈리의 보컬은 무언가에 불만에 찬 듯 노래하며 예쁘장함 따위는 벗어 던진다. 첼로의 묵직한 연주로 시작하는 ‘Wrong impression’은 어쿠스틱 기타의 영롱함에 슬라이드 기타의 푸근함이 더해져 분위기가 ‘업’된 팝/록 넘버다. 공간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Beauty on the fire’에서는 일렉트로닉의 몽롱한 전자음이 일렁이며, 사랑스런 느낌이 가득 한 ‘Satellite’는 따뜻한 어쿠스틱 기타 톤과 코러스가 돋보이는 곡. 앨범의 베스트라면 5번째 트랙인 ‘Do you love’을 꼽을 수 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절제된 보컬이 이끌어 가는 이 곡은 멜랑콜리함을 극대화시키는 중간의 하드 록 연주와 귀를 잡아채는 멋진 멜로디의 훅이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 있다가 뒤늦게 꿈에서 깨어나 절규하는 듯한 진행이 압권인 ‘Goodbye’, 인트로 부분이 국내밴드 미선이의 ‘진달래 타이머’를 연상시키는 ‘Everything goes’, "동화 속 신데렐라는 이제 없다"며 담담히 노래하는 마지막 트랙 ‘Come September’ 등이 매력적인 트랙들이다. 음반에 수록된 10곡 모두 나탈리 임부를리아가 공동작곡과 작사를 담당했으며, 그중 절반은 희망을, 나머지 절반은 삶의 비의(悲意)와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 외의 프로듀서들로는 마돈나의 작업으로 유명한 패트릭 레너드와 필 토낼리, 게리 클락 등이 앨범제작에 참여했다. 몇 년 간 내적 침잠의 결과물인 이번 앨범으로 그녀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했다.
노래 : New Kids On The Block (뉴 키즈 온 더 블록)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90년대 초반 구미 각국에 ‘뉴 키즈’ 태풍이 불었다.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그 태풍은 사정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보이던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태풍 뉴 키즈호는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스쳐 갔다. 92년 3월 서울 잠실벌에 불어온 뉴 키즈 태풍의 위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할퀴고 간 흔적에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다. 피해 상황은 사망 1명, 부상 40여 명, 외형적으로는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으나 급기야 청소년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 언론이 흥분했고 기성 세대들이 비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된 외국 팝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소녀를 몰고 다니는’ 그 그룹은 한국의 소녀들도 자극해 사망자까지 발생한 비극적 사태를 몰고왔다. 사건 직후 공연을 주최한 레코드사 사장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문화부의 해외 팝스타 공연 불허조치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무산 또는 연기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롤 우리 공연 문화가 수술대 위에 올랐고, 더 나아가 청소년 문화에 대한 전면적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뉴 키즈 사태의 후유증은 컸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피해복구 작업에 쏟게 했다. 뉴 키즈 사태는 한마디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가 빚어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환호 괴성 아우성 열광 기절 졸도 등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는 팝스타 공연만이 갖는 고유 현상이다. 십대들은 영화배우와 TV 탤런트보다는 가수에게 열광한다. 음반과 비디오로 접하고, 다른 연예계 스타들과는 달리 공연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를 통해 팬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관계로 공연장 경비 등 ‘히스테리를 객석에 한정시키는’ 대책이 강구되지 않을 경우 사고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 키즈 사태는 히스테리를 보인 청소년들을 매도할 것이 아니라 공연 기획 및 주최자의 준비 소홀에 그 책임을 지워야 한다. 팝스타와 관련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는 또 전통적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뉴 키즈가 팝 히스테리의 최초 사례는 아니다. 1971년 클리프 리차드 내한 공연 때와 80년 광주항쟁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개최된 레이프 가렛 공연 때는 흥분한 일부 여성 관중이 속옷을 벗어 던진 해프닝까지 발발하였다. 그때의 한국 사회는 지금처럼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의 시대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같은 해프닝은 충격적 히스테리였고, 따라서 뉴 키즈 공연 때 관객들이 보여준 히스테리는 오히려 약과일지도 모른다. 영미 팝계에는 고금을 통해 십대의 히스테리를 유발시킨 가수 또는 그룹이 끊임없이 출현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롤링 스톤즈. 오스몬즈, 몽키스, 잭슨5,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등등... 이들 중 강도에 있어서 가장 압권은 역시 비틀스라 할 수 있고, 그 가운데 더러는 제도권 팝계가 ‘마케팅’의 차원에서 틴에이저의 히스테리를 겨냥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작품’도 있다. 몽키스와 잭슨5(후자의 경우는 시각에 따라 ‘자생적’이라 볼 수도 있다)가 여기 해당한다. 뉴 키즈는 바로 이 방식의 최신형이다. 비틀스 현상의 충격이 너무 컸기에 십대 소녀들로부터 유별난 인기를 끄는 그룹이 등장할 경우 흔히 ‘제2의 비틀스’라고 붙여주는 습관이 있다. 몽키스가 그랬고, 베이 시티 롤러즈가 그랬다. 뉴 키즈가 데뷔할 당시 미국의 일부 다운타운 DJ들은 그들을 제2의 비틀스라 일컬었다. 그러나 제도권의 시나리오에 의해서 탄생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뉴 키즈는 제2의 비틀스라기보다는 ‘제2의 몽키스’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60년대의 몽키스가 제도권의 도구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처럼 뉴 키즈 역시 음악 관계자들로부터 비슷한 문책을 받았다. < 타임 >지는 90년 그들을 “모리스 스타(뉴 키즈의 프로듀서)라는 제페토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피노키오”로 비유했다. 모리스 스타는 80년대 중반 ‘뉴 에디션’이라는 흑인 틴에이저 그룹(바비 브라운이 이 그룹 출신)을 키워낸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그가 뉴 키즈 사단을 구성하려 했을 때의 출발점은 ‘경제 상황에 대한 고려’였다. 80년대 중반 당시 미국의 경기는 침체에 빠져있었고 따라서 호주머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시점. 모리스는 시장 조사를 통하여 그래도 돈 쓸 여유가 있는 백인 중산층의 자녀를 겨냥한 틴에이저 그룹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룹의 구성원은 그들을 충족시킬 백인 소년들이라야 했다. 그는 민첩하게 거리로 나가 백인 중산층이 압도적으로 운집해 있는 보스톤 시내를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애’들을 픽업해냈다. 도니 왈버그, 조나단 나잇, 조단 나잇, 조 매킨타이어, 그리고 대니 우드 등 5인조 ‘동네의 새 아이들’이 이렇게 하여 짜여졌다. 뉴 키즈는 ‘가장 완벽한 중부 미국적 그룹’이 되었다. 중부 미국(Middle America)은 지역적으로 중부일뿐 아니라 중산층이 많이 사는 지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뉴 키즈는 백인 중산층 자녀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그룹답게 외모나 의상 등 외형 총체에서 ‘고생 없이 자라난 신세대 애들’의 이미지가 진하게 풍겨나왔다. 당연히 그들 공연장에는 대부분 부모가 중산층인 백인 십대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이 그룹은 옛날의 그룹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그 중 하나가 ‘인기와 돈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었다. 이들의 선배 그룹들은 통상적으로 공연을 개최하면서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을 꺼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관객들에게 행여 돈벌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뉴 키즈는 스폰서가 붙는 것 자체를 ‘성공의 징표’로 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도니 왈버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팬들이 우릴 줄줄 쫓아오고 스폰서가 우리에게 계약서를 내미는 것은 내 입장에서 짜릿하기만 하다. 난 그들을 쳐다보며 ‘맥도날드, 여기서 나가주세요’라고 하지 않겠다. 난 ‘저와 함께 일해 보실래요?’라고 말하겠다.”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는 90년 뉴 키즈 미국 순회 공연 때 스폰서로 나섰다. 맥도날드측은 그들의 후원자가 되면서 “뉴 키즈는 맥도날드사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가족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매우 건전하고 가장 미국적인 그룹”이라며 즐거워했다. 뉴 키즈는 실로 90년대의 팝계가 ‘성공과 판매술’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표본적 존재였다. 멤버 전원의 기계적 율동, 현란한 쇼무대, 십대 감각을 예리하게 찌르는 음악 모두가 마케팅과 판매신장의 구도 아래서 기초되었다. 레코드가 팔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고 싱글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실패나 다름없다. 공연 티켓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십대 고객들이 공연장을 찾지 않으면, 또 아우성을 치지 않으면 게임은 끝이다. 이유는 단 하나, 돈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돈을 긁어모으려면, ‘소구력이 있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이 모리스 스타의 이념이었다. 그는 뉴 키즈를 구성하고 즉각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율동을 주입했다. 춤의 스타일은 빈틈없이 맞아 돌아가는 마이클 잭슨식의 리듬과 랩 뮤직 가수들이 구사하는 탄력적인 스텝을 혼합시켰다. ‘외형 가꾸기’와 더불어 음악의 색깔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모리스는 ‘전통적으로 대중에게 잘 먹히는’ 흑인 음악을 최적의 장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멋진 춤, 검은 음악, 흰 피부’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탄생했다. 모리스의 기획과정 및 생산과정은 매우 ‘유서깊은 방식’이었다. 인재의 발굴, 상품화, 소구력 제고, 품질관리, 마케팅 전략 도입 등 제반 방법은 이미 몽키즈나 잭슨5 시절에 적용된 바 있었던 것들이었다. 다만 소구 대상(백인 중산층의 십대 자녀)을 확실히 정하고 들어갔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모리스 기획의 효력은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출범한 뒤 86년 첫 음반을 발매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문제는 소구 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는 아직 뉴 키즈의 소구 대상이 팝계의 주체세력으로 군림한 시점이 아니었다. 그룹 유투나 휘트니 휴스턴 등의 록과 스탠다드팝을 소화할 수 있는 ‘20대 이상의 소비자들’이 팝시장의 주요 고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뉴 키즈가 성공하려면 십대 소녀가 음반의 주구매층, 공연의 주관객층으로 떠올라야 했다. 그들의 매니저인 딕 스코트는 “팝 사람들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성공은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팝 사람들(Pop People)이야말로 뉴 키즈가 고대하고 있던 소구대상이었는데, 바로 ‘백인 틴에이저 걸’을 지칭했다. 그 시점이 이듬해 두 번째 음반 < 굳세게(Hangin’ Tough) >가 발표된 88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들의 인기는 폭발했다. 90년까지 뉴 키즈의 앨범은 미국에서만 1천 5백만 장이 팔렸다. 그들의 뮤직 비디오는 3백 30만 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그 부문 최고였던 마이클 잭슨의 기록을 앞질렀다. 89년과 90년 2년에 걸쳐 벌어들인 수입은 7천 8백만 달러나 되어 해마다 연예인 수입을 공개하는 < 포브스 >지의 리스트에 처음 오르면서 당당 5위에 랭크되었다(당시 1위는 코미디언 빌 코스비, 2위는 마이클 잭슨, 3위는 롤링 스톤즈 순이었고, 마돈나는 6천 2백만 달러로 8위를 차지했다). < 뉴욕 타임즈 >는 90년 뉴 키즈의 대성공을 더 많은 관객으로 향하려는 ‘흑인음악의 마케팅’과 ‘적절한 그룹을 시장의 적재적소에 심어놓은 프로듀서의 뛰어난 안목’ 등 두 가지 전략의 우연한 결합이 일구어낸 성과로 분석했다. 어쨌든 뉴 키즈는 잘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조립한 상품은 어딘가 허점이 있기 마련, 춤을 강조하다 보니 노래가 빈약해지고 특히 공연 현장에서 춤과 노래의 병행은 벅차게 되어 있다. 이 문제점을 가끔 노래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소위 ‘립 싱크’로 커버할 수 밖에 없는데, 뉴 키즈도 이러한 범행(?)을 수시로 저질러 마돈나, 폴라 압둘, 자넷 잭슨 등과 함께 ‘앵무새 가수 집단’으로 분류돼 비난받기도 했다. 잠실 공연에서도 이 점이 지적된 바 있었다. 립 싱크의 그룹, 돈과 성공을 위해 조직된 그룹 가장 양키적인 그룹,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할 뉴 키즈의 중요한 성격이 있다. 뉴 키즈 진영에 뉴 키즈 빼고는 스탭 전원이 흑인이라는 점이다.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 매니저 딕 스코트를 위시하여 로드매니저, 보디가드, 공연사회자, 백 밴드 모두가 흑인들이다. 뉴 키즈는 ‘흑인이 생산, 관리하는 백인 상품’의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를 흑백의 조화로운 결합이라고 했다. 흑백의 결합? 아니다. 그것은 생산자와 상품의 결합이다.
노래 : Air Supply (에어 서플라이)
호주 출신의 그룹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는 아름답고 포근한 노래들로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그룹이다. 그 무렵 이들의 스타덤은 마치 함락되지 않는 요새처럼 견고해 자국인 호주는 물론, 팝의 본고장 미국마저 완전 정복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이들은 인기가 한창이던 1982년의 첫 내한 공연으로 국내 팝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으며 1992년과 ... 호주 출신의 그룹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는 아름답고 포근한 노래들로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그룹이다. 그 무렵 이들의 스타덤은 마치 함락되지 않는 요새처럼 견고해 자국인 호주는 물론, 팝의 본고장 미국마저 완전 정복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이들은 인기가 한창이던 1982년의 첫 내한 공연으로 국내 팝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으며 1992년과 2001년에도 국내 무대를 가져 그 기억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1976년 호주에서 상연되는 뮤지컬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의 공연장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러셀 히치콕(Russell Hitchcock)와 그래함 러셀(Graham Russell)이 프랭크 에슬러 스미스(Frank Esler Smith/키보드), 데이비드 모이스(David Moyse/기타), 데이비드 그린(David Green/베이스), 랄프 쿠퍼(Ralph Cooper/드럼) 등과 의기투합해 결성했다. 그룹명이 말해주듯 산소처럼 청명한 노래들을 공급했고, 그런 맑은 보컬과 분명한 선율을 선호하는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로드 스튜어트의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북미 지역에서부터 대중과의 친화작업에 들어간 이들은 1980년에 공개한 데뷔 앨범 < Lost In Love >에서 ’Lost in love(3위)’, ’All out of love(2위)’, 그리고 ’Every woman in the world(5위)’가 차례로 빌보드 싱글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면서 화려히 비상했다. 차트 성적이 웅변하듯 미국에서도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지만 국내에서 특히 ‘All out of love’은 라디오 전파를 독식하며 널리 애청되었다. 데뷔 앨범을 통해 천부적인 작곡 실력을 과시한 그룹의 두 간판인 러셀과 그래함은 1981년의 < The One That You Love >와 1982년의 < Now & Forever >까지 3년 간 매년 한 장씩 음반을 발표, 이미 타오른 인기에 불을 붙였다. ’Here I am(5위)’, ’Sweet dreams(5위)’, ’Young love(38위)’, ’Two less lonely people in the world(38위)’,그리고 우리나라를 위시한 지구촌 전역에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 ’The one that you love(1위)’와 ’Even the nights are better(5위)’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대부분의 곡들은 바로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쉼 없이 달려오면서 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한 이 호주 밴드는 1983년에 신곡이 포함된 베스트 음반을 공개해 가쁜 숨을 골랐다. 보니 테일러(Bonnie Tyler)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나 미트 로프(Meat Loaf)의 ’I’d do anything for love (But I won’t do that)’을 주조해낸 인물로 유명한 짐 스타인만(Jim Steinman)이 작곡한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2위)’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웅장하고 화려한 오페라 스타일의 사운드스케이프를 그려냈다. 러셀 히치콕의 하이 톤 보컬이 압권인 이 곡은 에어 서플라이의 마지막 차트 톱10 히트곡이었다. 1984년에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I can wait forever’로 꾸준한 인기를 얻었지만 1985년에 발표한 정규 앨범 < Air Supply >부터 이들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밟기 시작했다. ’Just as I am’만이 19위에 올랐을 뿐 더 이상의 히트싱글은 없었으며 1986년에 나온 < Hearts In Motion >의 결과도 실망스러웠다. 1991년 < The Earth Is... >에서는 배드핑거(Badfinger)의 오리지널이나 해리 닐슨과 머라이어 캐리의 리메이크로 더 유명한 ’Without you’를 커버했으나 주목받는데는 실패했고, 2년 뒤 내놓은 < The Vanishing Race >에 수록된 ’Goodbye’는 본인들의 것이 아니라 나중 1998년 스웨덴에서 온 흑진주 제시카(Jessica)의 목소리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동하면서 6인조 밴드는 1990년대 들어서 러셀 히치코크와 그래함 러셀을 중심으로 한 2인조 듀엣으로 과감한 구조 조정을 감행했고, 현재는 신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음악 팬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공연 위주의 활동에 역점을 두고있다. 이들의 음악은 1970년대의 소프트 팝과 스탠더드 발라드의 전통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가공, 1980년대 초반의 컨트리와 뉴 웨이브 파고를 뚫고 나름의 지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사람들이 어떤 팝 음악을 선호하는지를 말해주는, 한국 음악정서의 바로미터 역할을 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밴드 : Earth, Wind & Fire (어스 윈드 앤 파이어 )
소울, 펑키 그룹 소울, 펑키 그룹
밴드 :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MIT 공과 대학,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 자신이 손수 제작한 기타와 이펙터,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팀워크에 의한 깨끗한 사운드. 바로 이런 것들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록음악 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보스톤(Boston)을 가장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들이다. 1976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해 록음악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스톤은 포리너(...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 MIT 공과 대학,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 자신이 손수 제작한 기타와 이펙터,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팀워크에 의한 깨끗한 사운드. 바로 이런 것들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록음악 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보스톤(Boston)을 가장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들이다. 1976년에 데뷔 음반을 발표해 록음악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스톤은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후반기의 스틱스(Styx) 등과 함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화려하게 수놓은 성인 취향의 하드록이 메인스트림에 정착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새로운 사운드를 창조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룹 보스톤의 중심 인물은 기타리스트 톰 슐츠(Tom Scholz)다. 메사츄세츠 공과 대학(MIT)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은 그는 자신의 박식한 전자 지식을 기타와 사운드 이펙터의 개념에 이식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구현했다. 보스톤의 깔끔하고 빈틈없는 연주는 완벽 주의자인 톰 슐츠의 기타 사운드가 정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70년대 초반 이 엘리트 청년은 지방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배리 구드루(Barry Goudreau)와 고음의 소화력이 출중한 브래드 델프(Brad Delp/보컬), 프랜 쉬한(Fran Ssheehan/베이스), 시브 하시한(Sib Hashihan/드럼)을 만나면서 보스톤의 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 데모 테이프를 제작해 에픽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이듬해에 공개된 처녀작이 록의 고전으로 추앙 받는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 Boston >이다. 기세 등등한 디스코와 펑크록의 물결 속에서 정통 록의 자존심을 지킨 이 LP에서 첫 싱글로 커트된 ’More than a feeling(5위)’을 필두로 ’Foreplay/Long time(22위)’, ’Peace of mind(38위)’가 차례로 싱글 차트를 방문해 록의 건재함을 증명해 보였다. 특히 1997년에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보이 밴드 엔 싱크(N’ Sync)가 발표한 아시아판 데뷔 앨범에서 ‘More than a feeling’을 리메이크해 실었으며, 1998년에도 라틴계 남성 3인조 댄스 보컬 그룹 노 머시(No Mercy)가 다시 한번 재해석함으로써 록과 팝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1978년에 발표된 두 번째 작품 < Don’t look back >도 록팬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들의 음악 중에서 가장 멋진 기타 리프를 선보인 앨범 타이틀 트랙 ’Don’t look back(4위)’을 비롯해 ’A man I’ll never be(31위)’와 ’Feelin’ satisfied(46위)’가 그 견인차 역할을 했다. 1집에 이어 이 음반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오름으로써 그동안 영국 세에 밀린 아메리칸 하드록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록밴드가 그러하듯 그들도 음반사와의 함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레코드사와의 의견 충돌 때문에 보스톤의 차기작 < Third Stage >는 < Don’t Look Back >이 탄생 한지 8년이 지난 1986년에 발표되었다. 국내에서 보스톤의 이름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록발라드 ’Amanda’는 그들에게 유일한 넘버원의 영광을 부여한 곡이며 ’We’re ready(9위)’와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Still in love(20위)’도 히트 차트를 누볐다. 하지만 8년이란 긴 세월은 보컬리스트인 브래드 델프와 팀의 리더 톰 슐츠만을 원년 멤버로 남겨 두고 나머지 구성원들을 보스톤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처녀작 공개 이후 정확히 10년이 흘러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해 제작한 음반 < Third Stage >는 이전의 음반들에 비해 확실히 연륜있는 여유가 느껴지기도 한 반면 전작들에 비해 스트레이트한 질주감이 반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로부터 다시 한번 8년이란 세월을 감내 한 보스톤은 1994년에 네 번째 앨범 < Walk On >을 내놓았지만 이번에는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브래드 델프 대신 새로운 목소리 프랜 코스모(Fran Cosmo)를 영입해 발표한 보스톤의 4집에서는 ’I need your love’만이 고독하게 51위에 올랐다. 거칠면 거친대로, 있는 그대로, 가공하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을 미덕으로 하는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런지 시대에 깔끔하고 깨끗한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보스톤의 프로페셔날한 사운드 사이에는 분명한 갭이 존재했었다. 현재는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공연 위주의 활동을 통해 팬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발명한 기타와 이펙터를 통해 능숙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프로 뮤지션으로 데뷔 한지 25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단 4장의 정규 앨범을 공개한 아메리칸 하드록의 지존 보스톤은 레코드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음반을 제작했다. 그 원초적인 힘은 음악적인 믿음을 고집하는 리더 톰 슐츠의 장인 정신에서 기인한다.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 세션 맨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뿌렸던 토토는 그 탄탄한 연주 실력과 고혹적인 팝 감수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되는 엄밀한 곡 구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열렬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냈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룹의 양대 산맥 스티브 루카서와 고(故) 제프 포카로는 전문 연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초, 중반기 레퍼토리들은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다. 1970년대 제프 포카로와 스티브 루카서의 고등학교 밴드로 출발한 토토는 그 개개인의 출중한 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이미 스타들의 세션을 도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팀이 완전히 정비된 후 발표한 대망의 데뷔 앨범 < Toto >는 밀리언셀러로 부상했으며, 재즈와 록이 정교하게 교직된 독특한 사운드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국내에서도 자주 리퀘스트를 받는 ‘George porgy’, ‘Hold the line’등이 실려 있다. 토토는 < Hydra >와 < Turn Back >를 계속해서 내놓으며 특급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비록 1집에 비해 판매고는 저조했으나 곡들은 한층 세련되고 연주는 엄격해져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3장의 음반으로 비행을 시작한 토토는 1982년에 공개한 4집 < Toto Ⅳ >로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된다. 빌보드 정상을 밟은 ‘Africa’, 2위에 오른 ‘Rosanna’등 차트를 맹폭한 히트곡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래미는 < 올해의 앨범 >을 포함한 장장 7개 부문의 상을 < Toto Ⅳ >에 안겨주며 1982년을 토토의 해로 선포했다.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이 음반에서 토토는 예측불허의 변박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이 난무하던 기존의 현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듣기 좋은 멜로디를 부가해 골수 팬들과 팝 키드들을 동시에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엄청난 성공 뒤에 토토는 데이빗 헝게이트와 바비 킴볼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5집 < Isolation >을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퍼지 프레데릭슨(Fergie Frederiksen)의 보컬은 킴볼을 따라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전전긍긍하던 팀원들은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 Fahrenheit >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고품격 발라드의 비중이 높아진 이 앨범은 ‘Lea’, ‘I’ll be over you’등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키보디스트 스티브가 떨어져 나가는 등 멤버 교체와 탈퇴의 악순환을 계속 경험하던 토토는 1992년 팀의 중핵 제프 포카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 평가받던 그의 요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과 슬픔을 안겼다. 토토의 통산 여덟 번째 작품인 < Kingdom Of Desire >는 ‘Only you’라는 매혹적인 곡을 남긴 채 제프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 셍커 그룹(Michael Schenker Group >을 거친 1급 레벨의 록 드러머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가세로 힘을 얻은 토토는 1999년 오리지널 멤버 바비 킴볼이 보컬리스트로 재가입해 또 한번의 비상을 노리고 있다. 멤버들 중 스티브 루카서는 재즈 기타의 도인 래리 칼튼과 공동 투어를 나서는 등 특히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6년 있었던 토토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있었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회자된다. 그들은 라이브와 스튜디오 앨범에서 모두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으며, 결성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팀웍과 기량으로 사랑 받고 있다. 가수의 뒤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션 맨에서 토토는 당당히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경륜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밴드 : Kansas (캔사스 (프로그레시브 락, 하드락 밴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의 불모지 미국에서도 예술성을 향한 몸짓은 작지만 분명 존재했다. 불후의 발라드 곡 ‘Dust in the wind’로 기억되어지는 캔사스는 심포닉 록에 아메리칸 록의 역동성을 더하며 이른바 ‘아메리칸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자성을 확립한 그룹이다. 캔사스는 1970년 미국 캔사스 주의 토페카(Topeka)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케리 리브그렌(Kerry Livgren, 기타, 키보드), 베이브 호프(Dave Hope, 베이스), 필 이허트(Phil Ehart, 드럼)에 의해 결성된 밴드. 다른 남부 록 밴드들이 서던 록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을 당시 이들이 추구한 음악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71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로비 스타인하트(Robby Steinhardt)를 바이올린 주자로 영입하면서 미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시도했던 것이다. 로비를 영입하면서 잠시 밴드 이름을 ‘화이트 클로버(White Clover)’로 바꾸기도 했던 이들은 1972년 스티브 월쉬(Steve Walsh, 보컬, 키보드), 리차드 윌리엄스(Richard Wiliams, 기타)를 연이어 맞이하며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다시 캔사스를 이름으로 내걸었다. 클럽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이들은 1974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 < Kansas >를 발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이들의 음악은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사운드였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의 전유물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이 미국적인 사운드와 프로그레시브를 결합하며 나름대로 독자적인 음악성을 만들어 나간 캔사스에게 딴지를 걸고 넘어 졌다. 같은 해 발표한 < Song For America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캔사스는 1970년대 중반 핑크 플로이드를 위시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의 위풍당당이 진행되면서 그 흐름에 전격 편입했다. 1975년 음반 < Masque >는 수록곡인 ‘Icarus borne on wings of steel’이 심오한 가사와 함께 주목을 받으며 20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전작 < Song For America > 역시 골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 번 불붙은 상승세는 1976년 블록버스트 앨범 < Leftoverture >로 이어지며 캔사스를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록곡 ‘Carry on wayward son’이 차트 5위 권 진입에 성공했으며, 앨범은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미국적 프로그레시브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캔사스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 밴드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부기(Boogie)를 프로그레시브에 도입했다는 것 외에도, 이들이 표현하는 대상, 서정성, 서사적인 전개는 이들만의 특화된 강점이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심오한 가사를 다루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심포닉 록을 구사했지만 동시에 미국 록이 가진 역동성과 파워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캔사스는 아트 록 매니아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점 때문에 먼저 이 분야를 개척한 영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밴드는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77년에는 음반 < Point of Know Return >을 선보였다. 지구 끝에 매달린 범선을 그리고 있는 앨범 재킷으로도 유명한 이 앨범은‘Dust in the wind’ 덕분에 국내 팬들에게서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앨범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형태와 일치하는 곡은 아니지만 발라드 넘버 ‘Dust in the wind’는 캔사스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 곡의 카리스마 덕분에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밴드임을 모르는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Dust in the wind’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록에 있었고, 1979년 밴드가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 Monolith >를 톱 텐에 올리며 화려하게 미 디케이드(Me- Decade)를 마감했다. 하지만 1980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캔사스의 행보는 뿌연 안개 정국 속으로 휘말렸다. 데이브 호프와 케리 립그렌이 종교적인 문제로 멤버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룹의 상업적 성공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스티브 월시는 탈퇴해 ‘스트리트(Street)’라는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는 등 팀의 내분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존 엘르판테(John Elefante, 보컬)로 스티브의 빈자리를 채우며 1982년 < Vinyl Confessions >, 1983년 < Drastic Measures >를 발표하지만 밴드는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았다. 해체 3년 후 캔사스는 필 이허트, 리차드 윌리엄스, 스티브 월시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에 의해 부활했다. 이후 스티브 모스(Steve Morse, 기타), 빌리 그리어(Billy Greer, 베이스) 두 명의 멤버를 보강하여 오 인조 라인업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심포닉 록보다는 하드 록적인 면을 살리며 1986년 < Power >를 통해 재기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 Power >가 잠시 주목을 끌었을 뿐 < In the Spirit of the Things >(88), < Freaks of Nature >(95), < Always Never the Same >(98)로 이어지는 음반 모두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앨범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 꾸준한 활동을 보여온 이들은 2001년에 1980년도 작품 < Audio-Visions > 이후 20년 만에 오리지널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 Somewhere To Elsewhere >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대 그룹의 부활을 알리듯 1975년 자신들의 히트곡 ‘Icarus…’의 속편 격인 ‘Icarus II’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성기에 가졌던 매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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