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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앨범 [블루 컬러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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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앨범 [블루 컬러 LP]

[ 180g / 게이트폴드 / 배순탁의 해설지, 영문 가사지 삽입 ]
Tears For Fears, Culture Club, Robbie Williams, Player, Styx 노래 외 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Universal | 2020년 09월 24일 리뷰 총점2.0 정보 더 보기/감추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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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기념 앨범 [블루 컬러 LP]

이 상품의 시리즈 (2개)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9월 24일
제조국 독일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2개)

음반소개

<컬러 디스크 LP를 구매하실 때 아래 사항을 참고해 주세요>

디스크

Disc
  • A1 Tears For Fears -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 A2 Culture Club - Karma Chameleon
  • A3 Robbie Williams - Supreme
  • A4 Player - Baby Come Back
  • A5 Camel - Long Goodbyes
  • B1 John Lennon - Imagine
  • B2 Styx - Come Sail Away
  • B3 ABBA - Mamma Mia
  • B4 Bon Jovi - You Give Love A Bad Name
  • B5 Rainbow - The Temple Of The King

아티스트 소개 (10명)

노래 : Tears For Fears (티어스 포 피어스)
티어스 포 피어스는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Shout'', ''Sowing the seeds of love'' 같은 굵직한 히트곡들을 남기며 1980년대 뉴 웨이브 열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듀오 그룹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세련된 신시 팝과 정신 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인 가사로 인텔리전트 밴드로 평가받았다. 또한 커트 스미스(Curt Smith)와 롤랜드 오... 티어스 포 피어스는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Shout'', ''Sowing the seeds of love'' 같은 굵직한 히트곡들을 남기며 1980년대 뉴 웨이브 열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듀오 그룹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세련된 신시 팝과 정신 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인 가사로 인텔리전트 밴드로 평가받았다. 또한 커트 스미스(Curt Smith)와 롤랜드 오자발(Roland Orzabal)의 잘생긴 외모도 인기 상승에 한몫을 거들었다. 열 세 살 때 잉글랜드의 배스(Bath)에서 처음 만난 스미스와 오자발은 학교 스쿨밴드에서 함께 하며 파트너십을 다져나갔고, 졸업 후 펑크의 영향을 받아 스카 펑크 밴드 그레듀에이트(Graduate)에서 활동하며 펑크 키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듀오는 1981년 그레듀에이트가 해산하자 곧 바로 뉴 웨이브의 물결에 편승하여 티어스 오브 피어스(Tears Of Fears >를 결성하였다. 멤버들이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룹명은 오자발이 좋아하는 아서 자노브(Arthur Zanov >의 책 < Prisoner Of Pain >에서 따왔는데 프라이멀 스크림 치료 요법과 관련된 용어라고 전해진다. 티어스 오브 피어스의 1983년 데뷔작 < The Hurting >은 바로 아서 자노브의 이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앨범이다. 한 소년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재킷 사진으로 담은 음반은 팝 감수성이 물씬한 신시사이저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발매되자마자 영국 차트 정상에 등극하는 쾌거를 이룬 것은 물론이고, ''Change''(4위), ''Pale Shelter''(5위), ''Mad world''(3위) 등의 스매시 히트곡들을 토해냈다. 이러한 듀오의 인기는 1985년 소포모어 작품 < Songs From The Big Chair >를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음반은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하였고,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영국 2위, 미국 1위), ''Shout''(영국 4위, 미국 1위), ''Head over hill''(영국 12위, 미국 3위), ''Mothers talk''(영국 14위, 미국 27위) 등 수록곡 대부분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앨범은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천 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4년 뒤에 발표한 3집 < The Seeds Of Love >도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8위에 오르며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비틀즈에 대한 찬가 ''Sowing the seeds of love'', 필 콜린스(Phil Collins)가 드럼을 연주해 준 ''Woman In Chains'' 등의 명곡들이 실려져 있다. 뛰어난 판단력으로 펑크에서 뉴 웨이브로 위치 이동을 하여 재미를 봤던 듀오는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는 얼터너티브와의 소통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1991년 스미스와 오자발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선언하고 1992년 베스트 앨범 < Tears Roll Down(Greatest Hits 82-92) >를 이별선물로 교환했다. 이후 오자발은 티어스 오브 피어스란 이름으로 홀로 활동을 하며 1993년 < Elemental >, 1995년 < Raoul And The Kings Of Spain >을 내놓았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미스 역시 1993년 솔로 데뷔작 < Soul On Board >를 발표하고 잠잠하다가, 1998년 자신의 밴드 메이필드(Mayfield >를 결성하여 앨범 < Mayfield >를 공개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밴드 컬쳐 클럽(Culture Club)은 1981년 영국 런던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룹의 보컬이자 간판인 아이콘 보이 조지는 데이비드 보위와 티 렉스 같은 글램 록에 흠뻑 빠져 십대시절을 보냈고 이는 그의 외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이 조지와 베이시스트 미키 크레이그, 기타리스트 존 스웨이드는 드러머 존 모스를 만나며 밴드의 모습을 갖추어갔고 존 스웨이드 대신 들어온 기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밴드 컬쳐 클럽(Culture Club)은 1981년 영국 런던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룹의 보컬이자 간판인 아이콘 보이 조지는 데이비드 보위와 티 렉스 같은 글램 록에 흠뻑 빠져 십대시절을 보냈고 이는 그의 외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이 조지와 베이시스트 미키 크레이그, 기타리스트 존 스웨이드는 드러머 존 모스를 만나며 밴드의 모습을 갖추어갔고 존 스웨이드 대신 들어온 기타연주자 로이 헤이가 영입되면서 컬처 클럽은 완성되었다. 1982년에 버진 레코드와 계약한 이들은 싱글 ‘White boy’와 ’I’m afraid of me’를 발표했고 보이 조지의 독특한 스타일은 음악과 패션계에서 주목을 받게된다. 같은 해에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는 영국 차트 정상(미국 차트 2위)을 차지하며 화려한 성공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 대망의 데뷔 앨범 < Kissing To Be Clever >이 발표되었다. 영국 3위와 미국 9위의 실적을 올린 ‘I’ll tumble 4 ya’과 LP판에만 수록되어 영국 3위 미국 2위를 차지한 ‘Time(Clock of the heart)’이 수록된 이 첫 번째 음반은 록과 댄스, 소울까지 뒤섞인 잡종 음악에 보이 조지의 다분히 게이적인 성향이 짙은 현란한 옷차림과 메이크업, 그리고 복고적인 목소리로 ‘보이 조지’라는 하나의 트렌드를 탄생시킨다. 미국에서도 성공행진을 시작한 1983년엔 지금까지도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으로 손꼽히는 < Colour By Numbers >를 출시한다. 시사주간지 < 타임 >으로부터 ‘모든 팝을 담아낸 포켓’이라는 평을 받은 이 앨범은 ‘Church of the poison mind’, ‘Karma chameleon’, ‘Miss me blind’ 등 3장의 전미 톱10 싱글을 터뜨리면서 그룹을 듀란 듀란과 더불어 시장과 MTV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밴드로 부상시켰다. ‘Karma chameleon’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위에 올랐으며 국내에서도 상당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톱10 싱글 말고도 ‘It’s a miracle’은 13위에 올랐고 비록 싱글로 나오지 않았지만 엘튼 존 노래를 연상시켰던 ‘Victims’도 널리 애청되었다. 이들은 84년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고 브릿 어워즈에서도 포효했다. 하지만 1984년에 내놓은 앨범 < Waking Up With The House On Fire >는 ‘The war song’과 ‘Mistake No.3’만이 간신히 차트에 명함을 내밀었을 뿐 이전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1986년의 < From Luxury To Heartache >는 더욱 참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Move away’만이 순위에서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렸다. 이즈음 이미 보이 조지는 헤로인 중독 상태였고 불운은 계속되어 마리화나 소지혐의로 영국경찰에 체포되는가하면 앨범의 키보드 연주를 했던 마이클 루데츠키(Michale Rudestski)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보이 조지의 집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어 그는 언론의 돌팔매질을 당했다. 결국 < From Luxury To Heartache >는 마지막 앨범이 되었으며 1986년 밴드는 해체됐다. 보이 조지는 1987년 솔로 데뷔작 < Sold > 이후 5년 만인 1992년 불운을 딛고 영화의 동명 타이틀 ‘The crying game’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컬처 클럽은 1998년 공연 실황 앨범으로 자신들의 재결합을 알렸다. 1998년 아담 샌들러와 드류 배리모어가 주연을 맡은 80년대 뉴 웨이브 음악을 집대성한 영화 < 웨딩 싱어 >에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가 수록된 것을 비롯해 뉴 웨이브 복고 붐을 타고 재평가됨으로써 90년대 후반에는 그들 바람이 일었다.
# 테이크 댓의 미운 오리에서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거듭난 로비 윌리엄스 지난 2001년 2월 26일 거행된 < 브릿 어워즈 >는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드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영국의 그래미’라 불리는 이 시상식에서 그는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를 포함 싱글 ‘Rock DJ’로 최우수 싱글, 최우수 뮤직비디오 등 주요 3개 부문을 독식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여러 부문에서 수상이 점쳐지... # 테이크 댓의 미운 오리에서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거듭난 로비 윌리엄스 지난 2001년 2월 26일 거행된 < 브릿 어워즈 >는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드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영국의 그래미’라 불리는 이 시상식에서 그는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를 포함 싱글 ‘Rock DJ’로 최우수 싱글, 최우수 뮤직비디오 등 주요 3개 부문을 독식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여러 부문에서 수상이 점쳐지던 로비의 최대 라이벌 크레이그 데이비드(Craig David)를 완전히 제친 쾌거여서 더욱 가치가 빛났다. 이러한 결과를 볼 때 당분간 영국에서 그의 인기는 예전보다 더욱 맹위를 떨쳐 나가지 않을까 싶다. # 영국의 국민가수 그러나 국내에서는 찬밥? 이렇듯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는 ‘국민가수’로 대접받고있다. 그렇다면 영국 밖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이나 특히 국내에서는 그 같은 지명도가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 공략을 위해 발표한 편집앨범 < The Ego Has Landed >는 평론가들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팬들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국내에서는 상황이 더 좋지 못하다. 테이크 댓(Take That)의 팬층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는 국내의 여건이지만 오히려 그 탓에 로비의 음악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의 솔로작품들은 테이크 댓 시절의 음악과는 전혀 개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른’ 음악은 보이밴드의 달콤함에 친숙한 국내 음악팬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만하다. 로비 윌리엄스는 9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보이밴드 테이크 댓 출신이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에 대한 영국의 답변’이라고 평가받던 테이크 댓은 다섯 미소년들의 깔끔한 이미지와 ‘Back for good’ 같은 소녀 취향의 아름다운 발라드로 영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팀의 막내였던 로비는 그러나 그룹의 그러한 댄디한 성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멤버였다. 말하자면 별종이랄까? 약물이나 여성편력 등으로 말썽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팀의 리더 게리 발로와 자주 충돌했다. 그 결과 1995년 로비 윌리엄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룹을 떠났다. 사실 그룹 내에서 그의 비중은 아주 적은 편에 속했다. 자신의 발언이 별로 반영이 되지 않는 그룹보다 솔로활동이 그의 비범함을 과시하기에 훨씬 적합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이 테이크 댓과 이질적인 건 당연하다. 솔로 데뷔와 함께 그가 가장 먼저 주력한 것은 ‘보이밴드 이미지 없애기’였다. 테이크 댓 시절엔 ‘반작용’을 일으켰던 알코올과 마약중독, 섹스어필은 아주 유용한 변신수단이었다. 그것은 단정한 보이밴드의 애송이가 아닌 불량한 성인 로커의 이미지였다. 이미지뿐 아니라 음악성향도 완전히 변모했다. 그룹 시절의 ‘안전한’ 버블 검 팝을 거부하고 록음악을 도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솔로활동 초반 그의 ‘성장’을 촉진시킨 스승은 또 다른 ‘악동’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였다. 그들은 로비 윌리엄스가 마약에 빠지도록 이끌었으며 자신들의 스트레이트한 로큰롤 사운드를 그에게 전수했다. 그때까지는 갤러거 형제가 로비에게 베스트 프렌드이자 정신적·음악적 지주였다. 하지만 얼마 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절친했던 사이가 영국 최대의 앙숙으로 돌변하고 만다. # 새로운 악동 출현 이러한 로비 윌리엄스의 ‘불량함’은 방정맞은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을 통해 유통되었다(오아시스와 블러의 브릿 팝 전쟁, 스파이스 걸스의 걸 파워 선풍 등 영국언론이 한 번 손대기만 하면 뭐든지 요란해진다. 그것은 그만큼 자국 뮤지션에 대해 애정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못했다. 처음엔 영국인들도 미심쩍은 눈초리로 관찰할 뿐이었다. 영국인들 역시 국내 팬들처럼 로비의 변이가 낯설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오아시스와 음악적 교류를 나누던 그는 동시에 술과 마약의 향연을 이어갔고 ‘살찐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좋지 못한 닉네임까지 얻었다. 이 무렵 로비는 레코드사와 불화를 거듭하다가 1996년 드디어 아티스트의 자유를 염원하는 자신의 첫 싱글 ‘Freedom `96’을 발표했다. 조지 마이클의 곡을 커버한 이 곡은 레코드사와 투쟁한 조지 마이클에게 존경을 표하는 곡이었으며 또한 그의 성공적 솔로활동을 닮고 싶은 열망을 담고 있는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싱글은 참담한 실패를 맛봤고 이어 1997년 말 발표한 솔로 데뷔앨범 < Life Thru A Lens >도 발표 당시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로비의 뒷심은 무서웠다. 그의 데뷔작은 발매한 지 28주만에 차트정상을 차지하며 뒤늦은 흥행가도를 달렸으며, 이듬해 발표한 2집 < I`ve Been Expecting You > 곧바로 1위에 올랐다. 게다가 그는 1999년 < 브릿 어워즈 >에서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영국 최고의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이미지만이 아닌 그의 진정한 모습, 즉 뮤지션의 모습이 영국 팬들에게 비로소 수용되는 순간이었다. 음악과 더불어 그는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각종 쇼와 공연을 통해 섹시함과 자유분방한 기질을 발휘하며 팬들의 눈과 귀를 만족시켰다. 2000년 < 브릿 어워즈 >에 수상자로 나온 로비가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에게 결투를 신청한 대목은 그 절정이었다. 끊이지 않는 스캔들도 주요 관심대상이다. 트레이시 쇼 같은 여배우들을 시작으로 올 세인츠의 니콜 애플턴,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 제리 할리웰 등과 화려한 연애행각을 벌이며 연일 신문과 잡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양성애자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리며 특히 결별한 옛 약혼녀 니콜 애플턴이 최근 그의 숙적 리암 갤러거와 결혼 직전이어서 앞으로 이 둘의 ‘결전’이 더욱 흥미롭다. # 보이밴드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솔로 뮤지션 영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로비 윌리엄스는 1999년 5월에는 1집과 2집의 히트싱글들을 모은 편집앨범 < The Ego Has Landed >를 미국시장에 내놓았다. 축구광이기도 한 그는 축구게임 < 피파 2000 >의 메인 테마 ‘It`s only us’를 부름으로써 전세계 축구 팬들의 기억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0년 9월 발표한 3집 < Sing When Your Winning >은 영국에서만 1백5십만 장이 팔려나갔고, 비틀스의 < 1 >에 이어 ‘아쉬운’ 판매 2위를 기록했다. 특히 첫 싱글 ‘Rock DJ’는 엽기 뮤직비디오로 쇼킹함을 주었다. 그 충격요법은 록의 이단아 마릴린 맨슨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3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로비 윌리엄스는 현재 그의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며 영국 음악계를 평정한 상태다. 테이크 댓의 핵심멤버였던 게리 발로와 마크 오웬이 각각 솔로앨범을 내며 활동을 벌였지만 로비의 활약에 비할 게 못된다. 그는 비틀즈의 존 레논, 왬의 조지 마이클에 뒤이어 그룹 출신으로서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아무튼 브릿팝의 쇠퇴와 미국 틴 팝의 득세로 한동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영국 음악계에 그의 존재는 분명 활력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국내로 돌아온다. 워낙 자국의 음악이 강세인 미국은 그렇다 치고 국내에서 그의 성적은 가혹할 정도다. 현재 국내에는 보이밴드의 나긋나긋한 버블 검 팝 아니면 림프 비즈킷 류의 하드코어라는 이분법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리 멜로딕하지도 않고 그리 세지도 않은 로비 윌리엄스 식 록음악은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번 테이크 댓이나 보이밴드의 음악은 과감히 포기하고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이 남자의 ‘어려운’ 음악에 귀기울여 보자. 색다른 음악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지도 모른다.
스틱스(Styx)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를 통해 가장 성공한 ‘어덜트 취향의 팝 록’ 밴드로 각인되어있다. 당대 그들의 성공 가도는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첫 출발점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만발한 프로그레시브 록이었다. 대서양 건너편의 대륙에 비해 고전음악의 인프라가 형성되지 못한 미국은 그래도 더러 록 역사에 기억될 만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했다. 스틱스는 이 부문의 왕자였으며 동시대에 ... 스틱스(Styx)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를 통해 가장 성공한 ‘어덜트 취향의 팝 록’ 밴드로 각인되어있다. 당대 그들의 성공 가도는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첫 출발점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만발한 프로그레시브 록이었다. 대서양 건너편의 대륙에 비해 고전음악의 인프라가 형성되지 못한 미국은 그래도 더러 록 역사에 기억될 만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했다. 스틱스는 이 부문의 왕자였으며 동시대에 활동했던 캔사스(Kansas)와 앰브로시아(Ambrosia) 등 역시 미 대륙에 아트 록을 근착(根着)시키는데 공은 세운 그룹이다. 이들이 뿌린 프로그레시브 록의 씨앗은 1990년대 스팍스 비어드(Spock’s Beard) 같은 후배들의 등장으로 그 열매를 맺었다. 스틱스는 유럽의 아트 록 밴드와는 달리 고전음악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무그 신시사이저를 최대한 이용해 스페이스적인 공감각(共感覺)을 표현하는 동시에 다가올 미래의 음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했다. 1970년 척 파노조(Chuck Panozzo/베이스)와 존 파노조(John Panozzo/드럼) 형제, 그리고 그들의 고향 친구 데니스 디영(Dennis DeYoung/보컬, 키보드)이 구성한 아마추어 트리오 밴드(TW4)에 두 명의 기타리스트 제임스 영(James Young)과 존 쿠룰스키(John Curulewski)가 가세해 5인조로 몸집을 불린 팀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강’이란 뜻을 가진 스틱스다. 초기에 이들이 클래식과 재즈를 근간으로 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한 것은 드럼과 베이스를 맡았던 파노조 형제가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출신 배경도 작용을 했다. 1972년에 공개된 처녀작 < Styx >에서는 첫 싱글 ‘Best thing(82위)’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아트적 경향을 따른 앨범이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1977년의 소포모어 음반 < StyxⅡ >에서는 2년 후에 빌보드 싱글 차트 6위까지 오르는 초창기 대표곡 ‘Lady’와 ‘You need love(88위)’가 1번, 2번 트랙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3집 < The Serpent Is Rising >과 4집 < Man Of Miracles >의 실패 이후 제작된 < Equinox >는 보컬리스트 데니스 드영의 건반 연주가 불을 뿜는 ‘Lorelei(27위)’를 잉태하면서 음악적인 진보를 이룩했지만 존 쿠룰스키는 이 음반을 끝으로 스틱스를 떠나고 그 후임으로 팝과 록에 일가견이 있는 토미 쇼(Tommy Shaw)가 들어왔다. 그의 가세는 스틱스의 음악에 내재해있던 대중친화의 잠재력을 현재(顯在)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미 쇼와 함께 한 첫 앨범 < Crystal Ball >에서는 ‘Mademoiselle(36위)’이 싱글로 나왔고 집시 풍의 기타 연주로 시작하는 앨범 타이틀 트랙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는 곡이지만 전체적인 평과 판매력 모두 좋지를 못했다. 그러나 ‘Fooling yourself(29위)’와 명곡 ‘Come sail away(8위-1998년 애니메이션 < 사우스 파크 >에서 출연자들의 앙증맞은 목소리로 커버됨)’, 그리고 행진곡 스타일의 ‘The Grand illusion’이 수록된 1977년의 < The Grand Illusion >부터 이 시카고 출신의 그룹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가공할 히트 퍼레이드를 펼치기 시작했다. 1978년에 공개된 < Pieces Of Eight >에는 ‘Sing for the day(41위)’, 토미 쇼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하드록 트랙 ‘Blue collar man(21위)’과 ‘Renegade(16위)’가 지속적인 인기를 이어갔으며 1979년의 < Cornerstone >은 지금도 간간이 전파를 타는 차트 1위 곡 ‘Babe’를 배출했다. 하지만 수록곡 중 국내에선 특히 경쾌하고 소프트한 멜로디와 리듬의 노래 ‘Boat on the river’가 애청됐다. 본고장에서는 그 외에도 ‘Why me(26위)’와 ‘Borrowed time(64위)’로 지속적인 인기의 불꽃을 태웠다. 스틱스의 음반들 중에서 유일하게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한 < Paradise Theater >는 그 유명한 ‘The best of times(3위)’와 토미 쇼가 보컬을 맡은 ‘Too much time on my hands(9위)’, 그리고 ‘Nothing ever goes as planned(54위)’를 배출했고, 1983년의 < Kilroy Was Here >에서는 노래에 일본식 영어 발음이 나온다는 설득력이 부족한 사유로 당시 국내에서 금지 곡 처분을 받았던 ‘Mr. Roboto(3위)’와 발라드 ‘Don’t let it end(6위)’, ‘High time(48위)’등이 빌보드 차트의 높은 고지를 점하면서 스틱스가 인기그룹임을 다시금 증명했다. 그러나 1984년에 발표된 2장 짜리 라이브 앨범 < Caught In The Act >에서 커트된 새로운 싱글 ‘Music time(40위)’를 마지막으로 거의 모든 노래들을 만드는 데니스와 토미가 홀로 서기를 감행했다. 팀의 리더격인 그들이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의 밴드에 커다란 마이너스가 아닐 수 없었다. 데니스 드영의 솔로 히트곡 ‘Desert moon(10위)’과 토미 쇼의 ‘Girls with guns(33위)’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었지만 양자 모두 스틱스의 명성을 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이후 잠정적으로 밴드 활동을 접었다가 1990년 다시 손을 맞잡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1990년 하드록 밴드 댐 양키스(Damn Yankees)를 결성하기 위해 친정의 재결합에 참여하지 않은 토미 쇼 대신 글렌 버트닉(Glenn Burtnick)을 맞이한 스틱스는 새로운 싱글 ‘Show me the way(3위)’와 ‘Love at first sight(25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별히 ‘Show me the way’는 1991년 초에 발발한 걸프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안녕을 위한 노래로 쓰이면서 미국에선 대대적인 성공을 창출했다. 1997년에는 애주가였던 이 팀의 원년 멤버이자 드러머인 존 파노조(John Panozzo)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재결성된 스틱스는 1990년대 동안 신보 제작보다는 여느 고참 밴드들처럼 공연을 통해 그 수명을 재충전하고 있다. 스틱스 멤버들은 이러한 라이브 무대를 통해 클래식 록 팬들과 단순한 음악적인 교류가 아닌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비평적 홀대와 대중적 특대(特待)가 대립 각을 첨예하게 세운 대표적인 그룹으로 남을 것이다.
멤버 : 아그네사 팰트스코그(Agnetha Faltskog),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멤버 : 아그네사 팰트스코그(Agnetha Faltskog),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출전 티켓을 따기 위한 스웨덴 본선 당일이었다. 팀 동료 베니(Benny Anderson)의 약혼녀 안니 프리드(Anni-Frid)가 부랴부랴 그녀의 노래 파트까지 연습해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출산이 늦어져 무사히 아그네사는 무대에 올라 ‘링링(Ring ring)’을 부를 수 있었다. 이 네 사람의 그룹 아바()는 이날 3위에 그쳐 스웨덴 대표가 되지 못하는 고배를 마시지만 온전히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그 같은 길조는 당장 이듬해에 현실로 나타났다. 마침내 ‘워터루(Waterloo)’라는 노래로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 32개국 5억 TV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2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워터루’는 순식간에 영국 및 유럽에서 밀리언 셀링 싱글이 되었다. 이후 아바는 마치 천운을 타고난 그룹인 듯 쾌속 항진을 거듭했다. 영국 출신이 아니면 설령 유로비전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더라도 곧 잊혀지고 마는 관례마저 운 좋게 비껴 가는 ‘위대한 예외’를 창조했다. 발표하는 싱글마다 차트 상위권으로 치솟아 영국 차트에서는 18주 연속 톱 10싱글을 기록했고 그중 9곡이 1위에 등극하는 눈부신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이 ‘9곡의 넘버원’ 기록은 역사상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셋만이 장식한 대 기록이었으며 이로써 아바는 ‘1970년대에 가장 레코드를 많이 판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안게 됐다. 1978년까지 4년간 아바의 레코드 판매량은 세계적으로 무려 5천3백만 장에 달했다. 1977년 연간 소득이 110억원을 기록, 스웨덴의 자랑인 볼보 자동차 회사의 총판매고 90억원을 제치고 1위 기업으로 부상할 정도였다. 그들의 인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넘어 지구촌을 덮었다. 터키, 이스라엘에서도 음반 판매량 1위였고, 호주 사람 4명 가운데 하나가 1976년 앨범인 < 아바 히트곡집 >< Abba Greatest Hits >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소련의 암시장에서도 그들의 LP가 130달러의 고가(당시 LP 한 장 가격은 8달러)로 거래되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 인기는 막강해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 앨범에서 보통 4곡 이상이 방송과 다운타운가를 뒤덮었다. 1978년 < 앨범(The Album) >의 미국 히트 싱글은 ‘게임의 이름(The name of the game)’ ‘내게 승산을 걸어보라(Take a chance on me)’ 두 곡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독수리(Eagle)’ ‘무브 온(Move on)’ ‘음악을 감사해요(Thank you for the music)’도 덩달아 팝송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바는 그러나 결코 운으로 먹고 산 팀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들의 환호를 독점할 만한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아바의 모든 곡들은 출중한 작곡 실력을 보유한 남성 멤버 비욘과 베니가 당시 매니저이자 폴라(Polar)레코드사 사장인 스틱 앤더슨(Stig Anderson)과 함께 썼다. 그들의 음악이 이윤의 지상 명령에 따라 팝 시장을 요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음악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 했다. 베니와 비욘이 제조해 낸 아바의 경쾌한 ‘버블 검(Bubble gum) 음악’은 당시로 볼 때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했다. 신시사이저와 ‘스트링’의 풍요로운 사운드와 종소리 같은 여성 보컬은 유서 깊은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사운드의 벽’(Wall Of Sound) 방식을 따른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명랑한 리듬의 사운드 구조에 더구나 쉬운 멜로디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줄 아는 비범한 능력을 뽐냈다. 그리하여 누구나 듣기에도 좋고 춤추기에도 안성맞춤인 곡들을 뽑아내 1970년대 초중반에 세력을 떨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단순한 음악을 바라는 수요층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1978년 < 뉴스 위크 >지는 “아바의 부패되지 않은(antiseptic) ‘이지 리스닝’ 사운드는 틴에이저에서부터 할머니까지 포괄하는 전 수요층에 어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물론 그들도 비판으로부터 완전 해방되지는 못했다. 팻 분(Pat Boone)의 ‘모래 위에 쓴 사랑의 편지(Love letters in the sand)’에 기초해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I do, I do, I do, I do)’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 영미의 고전적인 팝 스타일에 편승, 기술 제휴함으로써 그들의 구미에 맞추고 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와 함께 음악 외적인 요소가 본질을 압도한다는 문제도 제기돼 한 스웨덴 음악 평론가는 “마케팅, 스테이지 조명 그리고 사운드 기술자를 빼고 나면 그들도 단지 그저 그런 그룹”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록 음악 진영은 < 롤링 스톤 >지 아닌 < 비즈니스 월드 >지를 읽으며 여가를 보내는 상업성 지향의 그들에게 애초부터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곡을 써서, 세대와 계층을 포괄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고 또한 외로이 스칸디나비아 출신 뮤지션들의 미국 상륙(Scandinavian Invasion)을 주도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사실 비(非) 영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영미 팝의 본고장을 정복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 때문인지 예외 없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비슷한 계열의 버블검 그룹들 오스몬즈(Osmonds), 카펜터스(Carpenters)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시달렸다. 아바가 인기를 얻는 데는 여성 멤버인 안니 프리드와 아그네사의 리드미컬한 보컬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끄럽게 곡조를 타면서도 강렬했고, 또 듣기 좋은 하모니를 일궈냈다. 이와 함께 북유럽형의 늘씬한 신체와 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창출의 밑거름이었다. 국내에도 개봉된 78년 다큐멘터리 영화 < 아바(Abba-The movie) >의 재미는 순전 두 여인의 ‘환상적인 엉덩이’로 초점이 맞춰질 지경이었다. ‘오디오+비디오’의 AV시스템을 일찍이 구현한 아바의 네 구성원은 하나로 뭉치기 전부터 본국 스웨덴에서는 알아주는 스타들이기도 했다. 기타를 친 비욘(1945년생)은 포크밴드 웨스트 베이 싱어스(West Bay Singers)를 거쳐 후테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의 멤버였고, 같은 1945년생인 베니는 ‘스웨덴의 비틀스’로 불린 그룹 헵 스타스(Hep Stars)의 베이스 주자로 활약했다. 1966년 우연히 어느 파티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간헐적으로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9년 각각 아그네사와 안니 프리드를 만나게 되면서 공동 전선을 펴기에 이른다. 유일하게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2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해 온 안니 프리드(1945년생)는 13살 때 이미 댄스 그룹의 리드 싱어로 나서 장래의 남편인 베니를 만나기 전까지 일본, 베네수엘라 등 국제 무대에 출전, 명성을 쌓았다. 탁월한 각선미의 아그네사(1950년생)는 스웨덴판 록 오페라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역을 맡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불러 주목받은 인기 가수였다. 그녀와 비욘은 스타들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으며 경찰이 하객을 통제하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1971년 7월 결혼식을 올렸고, 안니 프리드와 베니도 비슷한 시기에 약혼해 동거에 들어갔다. 배우자들로 짜여진 팀이라는 점은 독신주의가 팽배한 1970년대의 ‘감정 중독’ 경향과 견줄 때 신선한 자극이었고 그룹 내부의 갈등 요소를 감소시켜 주는 순기능을 발휘했다. 눈에 띄는 불협화음없이 순탄하게 1970년대 중반을 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그들도 베이비 붐 세대의 자유분방한 가치와 결별한 별종의 연예 스타는 못 되었다.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던 비욘과 아그네사가 1978년 12월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 동거 끝에 배니와 안니 프리드가 1978년 10월 웨딩마치를 올린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터진 일이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까, 베니 부부마저 2년 반만인 1981년 2월 갈라서고 말았다. 이혼과 그에 따른 팀 결속력 와해로 아바는 1981년 이후 급속히 인기 차트로부터 멀어져 갔고 1982년 안니 프리드(이 때부터 프리다), 1983년 아바 아그네사가 솔로 싱글을 내놓으면서부터 공식 해산, 뿔뿔이 흩어졌다. 베니와 비욘은 1984년 팀 라이스(Time Rice)와 연대해 뮤지컬 < 체스(Chess) >레퍼토리를 써 그중 머레이 헤드(Muray Head)의 ‘방콕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bangkok)’을 히트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전성기에 아바는 미국에서 4장의 톱 10싱글과 5장의 톱 40앨범을 기록했다. 물론 두드러진 성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멤버들은 미국을 유일한 ‘실패 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럽만큼 미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 팝 시장 진출의 교두보 확보’라는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들로 인해 훗날 많은 북유럽 출신 가수들이 미국 상륙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노르웨이 그룹 아하(A-ha)가 ‘아바 이후 최대의 스칸디나비아 사절단’으로서 미국 정복에 성공했고, 스웨덴의 록시트(Roxette),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가 아바의 후광을 업고 1990년대 미 팝계를 석권, 스웨덴 열풍을 일으켰다. 특히 혼성 4인조라는 라인업까지 계승(?)한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아바 신화의 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그들을 능가할 만큼의 기세를 떨쳤다. 이제 아바의 이름은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섰지만 이러한 후배들의 잇단 등장은 여전히 아바가 ‘채권자’로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 가수들 뿐 아니라 영미 댄스 음악 지향의 가수들도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아바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마돈나, 팻 숍 보이즈(Pet Shop Boys) 등 영국과 미국 댄스 가수들이 곧 아바에게 바치는 앨범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같은 사실 또한 아바가 팝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 그룹임을 암시하는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연주 : John Lennon (존 레논 (비틀즈))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r)은 1960년대 내내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를 주도하면서 시대를 대변했다. 1960년대는 그들의 것이었다. 1970년 그룹은 해산되었고 비틀스라는 이름은 무대에서 사라져 갔지만 멤버 모두가 빛나는 솔로 활동을 펼쳐 재결합설은 끊임없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룹 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레논이 1980년 괴한의 흉탄에 피살되면서 사실상 비틀스 스토리는 끝이 났다. 존 레논은 비틀스의 리더였다. 그의 이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을 이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그가 사망했을 때 시사주간지 < 타임 >과 < 뉴스위크 >는 동시에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던가(권위를 자랑하는 이 양대 주간지가 문화 예술인을 발행일이 같은 날에 표지인물로 취급하기는 존 레논이 최초였으며, 지금까지 그밖에 없다). 그는 우리에게도 유명하다. 비틀스의 리더라는 사실은 차라리 상식이고,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폴 매카트니와의 다툼으로도 유명하다. 아내가 일본 여인 요코라는 점도 유명하다. 특히 우리 팝 팬들에게 ‘이매진’, ‘러브’, ‘오 마이 러브’ 등 아름다운 팝송을 남긴 ‘부드러운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970년 비틀스 해체 전후로 정치, 사회적 제반 문제를 강도 높은 톤으로 노래하고 한때 일선 투쟁에까지 가담한 ‘투사’였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존 레논이라는 어찌보면 한 사람의 대중 스타의 존재에 시사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무게를 실어준 이 중요한 사실이 우리 대부분의 팝 팬들 기억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틀스 시절이 1960년대 후반 존 레논에게 대중음악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인기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꿰뚫고 그 인식을 전달하는 미디어로 파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3인칭 대중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사회적 사고를 전달하는 1인칭 다큐멘터리를 쓰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1968년 그는 ‘혁명(Revolution)’이란 제목의 노래를 싱글로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레논의 사실주의적, 정치적인 노래쓰기의 신호탄을 올렸다. ‘혁명을 원한다고들 하지. 그래,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지... 그러나 당신들이 파괴에 관하여 얘기할 때 나를 제외시키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요... 헌법을 개정할 거라고들 하죠. 예, 우리는 머리를 변화시키길 바라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들 하죠. 대신 정신 상태를 해방시켜야 할 거예요. 모택동의 사진을 들고 나선다면 여하튼 누구와도 성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미국과 영국 전역에 민주화 투재, 반정 운동으로 시위와 집회가 들끓기 시작하던 그 당시 존은 과격한 행동주의 노선에 앞서 ‘정신 개조’와 ‘의식혁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금의 풍조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의식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그 무렵 존은 자신이 양친 없이 이모 밑에서 자란 불우한 유년기를 비롯, 자신이 겪게 된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자각한 상태였다. 이러한 존재 규명을 토대로 그는 비틀스 해산 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971년도 음반 <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의 수록곡 ‘어머니(Mother)’에서 존은 ‘어머니 가지 말아요, 아버지 돌아오세요’라고 광기서린 듯 절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토해 내고는 곧바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란 곡에서는 전투 의지를 다지는 현재의 변모된 자신을 펼쳐 보인다.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하지.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하지. 그래서 당신은 돌아 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지.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거야... 그들은 당신을 종교와 섹스와 TV로 중독시키지.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현명하고 계급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여기는 거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여전히 형편없는 농부나 다름없다구.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하지... 영웅이 되려거든 자 나를 따르라구!’ 존은 무차별로 법, 종교, 도덕 등 자본주의의 이념적 베일을 들추어 그 실체를 통렬히 고발하면서 개량과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을 부르짖는다. 의식 혁명의 단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실천과 투쟁의 시점으로 진입해야함을 느낀다. 노래로써 그가 내세운 테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로 포장되었다. < 플라스틱 오노 밴드 >와 곧이어 공개된 < 이매진(Imagine) > 음반의 수록곡을 비롯해 해산 직후에 싱글로 발표한 노래를 살펴보자.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올 거야. 네 머리를 두드릴 거야. 자신과 만나야 할거야. 곧 당신은 죽게 될 터인데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사랑 앞에서 비웃으면서 말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당신에게 달려 있어...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찾아올 거야. 당신의 발을 움직이게 할 거야. 네 주위의 형제들을 인식하라구. 네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야... 우린 빛날 수 있어. 달과 별과 해처럼. 어서와, 만나자구.’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 카르마는 인연 또는 만남을 가리키는 말로, 존은 이 곡을 통해 미디어를 포함한 현대적이고도 ‘즉각적인 만남’을 역설하고 있다. 발표 당시 영미(英美)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상품 광고배경으로 이용돼 다시금 주목받았다.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라지. 똑바로 두발을 세워 거리로 나서야 해...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를 못받고 노동하고 있어.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줘요.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야.’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법관이 되고 싶지 않아. 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난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울고 싶지 않아.’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bed a Soldier)’ 직설적이고 과격한 메시지 일색이다. 마지막 곡에서 그 일단이 엿보이고 있지만, 특히 종교는 그의 독설을 피하지 못한다. ‘신은 우리가 고통을 재는 척도로서의 관념일 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신은 관념이야, 그것으로 우린 고통을 측정하는 거지... 난 마법을 믿지 않아. 성경을 믿지 않아. 히틀러를 믿지 않아. 예수를 믿지 않아. 케네디를 믿지 않아. 석가를 믿지 않아. 엘비스 프레슬리를 믿지 않아. 밥 딜런을 믿지 않아. 비틀스를 믿지 않아. 난 나만을 믿어. 요코와 나를. 그것이 현실이야. 꿈은 끝났어. 어제까지 난 꿈을 쫓고 있었지만 이제 난 다시 태어났어.’ ‘신(God)’이라는 노래다. 여기서 신은 종교적인 신 외에 현실적 우상으로서의 신을 포함하고 있는데 존은 모두를 깡그리 거부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극단을 노출하는 곡으로 비틀스 때인 1966년 “비틀스는 예수보다 유명하다”(Beatles is More Popular than Jesus)라는 발언으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전력을 면면히 이어나간 것이다. 그의 역사관, 사회관은 1971년의 명곡 ‘이매진(Imagine)’으로 완결된다. 존은 이곳에서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고는 말미에 가서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유도하고 있다.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리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이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게나.’ 루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기초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원리로 파악된 사유재산제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초반 영화 < 킬링 필드 >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 사운드 트랙의 백미라고 칭송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존의 생활권인 영미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부정이 테마인 만큼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영화에 이 곡이 삽입된 것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어느덧 가수의 위치에서 크게 일탈, 노래 운동가이자 행위주체로 변해 있었다. 평화를 주제로 한 정치색 짙은 일련의 이벤트에 적극 나섰으며 1960년대 말 대학가의 시위를 주도한 제리 루빈이나 애비 호프먼 등 신좌익 활동가와 친교를 긴밀히 한다. 활동 거점은 미국의 뉴욕. ‘정치 가수’로서의 존 레논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1960년대 말 불길처럼 퍼져나간 공민권 투쟁, 반전 운동은 1968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월남전의 격화를 계기로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갔다. 대학가의 징병 거부 시위는 무장 투쟁의 단계로까지 진입했고 평화를 주창한 비폭력 노선의 히피들 간에도 과격집단 이른바 ‘이피’(Yippie)가 등장했다. 이피들은 흑인 무장 투쟁 그룹인 ‘블랙 팬더’와 제휴, 폭력 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는데, 이 이피들의 리더적 존재가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만이었다. 비틀스 말기부터 이피의 입장에 공감을 가졌던 존은 이들에 동조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해 정치색을 노골화한다. 1969년 5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베드인’ 행사, 같은 해 9월 캐나다 터론터에서의 ‘라이브 피스’ 공연을 가진 데 이어 1970년에는 미국으로 파고들어가 11월 뉴욕 아폴로극장에서의 ‘애티카 자선 콘서트’, 12월 미시건주 앤아버의 미시건대학에서의 ‘존 싱클레어 자선 콘서트’(제리 루빈도 참석) 등에 잇따라 출연하여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 및 모순을 규탄한다. 애비 호프만과 제리 루빈과 같은 신좌익(New Left)과 손잡고 일선 투쟁에까지 나섰으니 일련의 사회운동을 체제에 대한 도발로 간주했던 미국정부가 어찌 가만히 있었겠는가. 존의 행동은 백악관의 닉슨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닉슨 정권은 ‘위험 인물’인 존의 미국 추방을 궁리하게 됐던 것이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존은 강도높게 미공화당 정부의 사기성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 닉슨의 미움을 샀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었던 닉슨 정권은 존 레논이 급기야 그 무렵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미국땅에서 내쫓아야 했다. 닉슨 정부가 두려워했던 인물은 무장투사보다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특히 효과적인 존 레논 부류의 ‘문화적 게릴라’인 까닭이었다. 이때부터 FBI가 존과 요코의 생활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존은 정부 차원의 ‘외압’이 자신에게 가해져오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외쳤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든 또한 어디에 있게되든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할 참이다.” 1972년 2월로 기한이 끝나게 된 그의 미국 체류 비자 연장 신청은 기각되고 말았다. 표면상의 기각 사유는 1968년 그의 체포까지 몰고왔던 영국에서의 마리화나 소지죄였다(궁색하지 그지없다). 이후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는, 존의 미국 정부 당국을 대상으로 한 길고도 치열한 법정 투쟁이 전개되었다. 비자 연장 신청 기각으로 가시화된 닉슨 정부의 국외추방기도에 분기탱천한 그는 1972년 6월 가장 과격한 메시지를 담은 2장짜리 음반 < 뉴욕에서의 한때(Sometime in New York) >를 출반하여 미정부에 응답한다. 그때까지 나온 대중 가요 음반을 통틀어도 가장 급진적이라 할 만한 이 작품에서 존은 19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반민주적 사태를 성토하고 있고, 영국정부에도 핏발을 세워 당시 격화일로를 걷고 있던 북아일랜드 식민 정책에 대해서도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그는 영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경한 자세를 보여 1969년 11월 영국군이 월남과 나이지리아 전쟁에 참전한 데 항의, 비틀스 시절 받았던 국가공로훈장 MBE를 반환해버렸다). ‘죄수를 쏘다니. 43명의 가련한 여인들을. 언론은 죄수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죄수들은 서로 죽이지 않았어. 록펠러가 방아쇠를 당겼지! 그게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거야.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 ‘애티카(Attica State)’ ‘앵글로 잭슨 돼지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북부(아일랜드) 식민지화를 위해 보내졌지. 피에 젖은 유니언 잭을 흔들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찌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감히 억류한단 말인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게 맡기고 영국군은 바다로 되돌아가라!’ ‘일요일, 피에 젖는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고 역시 북아일랜드 식민화 정책을 비판한 노래 ‘아일랜드인의 운명(The Luck of the Irish)’과 함께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은 매상의 이익금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게릴라 단체인 북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부되었다. 이 곡은 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80년대 팝계를 강타한 그룹 유투(U2)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투는 곡은 존의 것과 다르지만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이 앨범에는 또 ‘안젤라(Angela)’라는 노래가 들어 있는데, 흑인 여성운동가인 안젤라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탄압을 고발하고 있다. ‘안젤라, 그들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죠. 당신의 배우자를 총살했구요. 정말, 당신은 세계의 무수한 정치적 죄수 중 한 사람이죠... 안젤라. 세계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가요? 세상은 당신을 주시하고 있어요. 당신은 곧 세계의 누이 형제들에게 돌아가게 될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민중의 교사지요.’ 그런데 과연 안젤라를 탄압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고 나중 8년간 미국 대통령에 재임한 로널드 레이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레이건은 1970년 말 카터를 꺾고 대권을 쥐었고, 레논은 그때 피살되었으니 운명의 엇갈림치고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 뉴욕에서의 한때 >음반의 꽃은 ‘여성은 세계의 노예(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라는 곡이었다. ‘우리 여성더러 가정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하지. 그리곤 그녀가 친구가 되기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녀가 하인이 아니면 우릴 사랑하게 아니라고 하거든.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야.’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기둥인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노래는 대중 가요 최초로 우먼리브(Woman lib), 즉 여성해방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곡이라는 게 정설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우먼리브 물결이 솟구쳐 1969년 뉴욕에서 제1회 페미니스트회의가 개최되어 남녀의 완전 평등이 주창되었고 1972년에는 미국 최초의 여성월간지 < 미즈 >가 창간되었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대한 공식적 항의가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는 우먼리브운동에 열정적이었던 아내 요코의 사고방식이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우먼리브를 매우 적절하게 소화해냈다고 평가받았다. 존은 노래만 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념을 적극 실행에 옮겨 요코와 숫제 남녀 역할을 교체해버린다. 요코와 잠시 헤어졌다가 필생의 반려자임을 재확인하고 1975년 재결합한 이후 내내 집안에 들어앉아 아들 숀의 육아에 전념하는 등 안살림에 치중,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불렀듯 ‘하우스 허스번드’(House Husband : 主婦 아닌 主夫가 되는 셈이다)로 변신하여 모든 바깥일은 요코에게 일임한다. 요코가 존의 사후에 사업가의 면모를 견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 덕분(?)이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이 곡이 발표됐을 때 니거(Nigger)가 차별 용어에 해당된다고 해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차별을 고발한 노래인데 용어가 차별적이라고 금지되다니 우습기만 하다. 존의 노래는 그 이념성, 급진성, 그리고 묘사의 대담성으로 인해 방송 금지라는 억압이 유달리 자주 가해졌다. 심지어 ‘어머니’ 같은 곡은 너무 광기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발표 당시 일부 방송국에서 금지 지정을 받기도 했다(이유치고는 너무 인색하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존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고 만다. 이 무렵 내놓은 음반 < 마인드 게임즈(Mind Games) >나 < 벽과 다리(Walls and Bridges) >에서 나타나듯 투사적 대열에서 극단적 퇴각을 시사, 민주화 투쟁에 지친 모습을 군데군데 노출시키고 음악적 주장은 자취를 감춘 채 공허한 사랑타령을 해대기도 한다. 물론 이 두 앨범은 요코와 별거중일 때 출반되어 절망과 공허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급진성에 매료된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 전 그것은 꿈속에서였을까? 단지 꿈이었을까? 알아, 난 알아. 그것은 너무 현실 같았어. 거리를 산책했고 열기 속으로 속삭이는 나무들. 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 두 개의 정신이 이상하게 춤을 추고 있었지...’ ‘9번째 꿈(#9 Dream)’ 빅히트한 노래였지만 그의 작품으로서는 너무 무게가 제거되어버렸다. 불과 2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같은 외형상의 사상 전향(?) 때문인지 미국 정부는 마침내 1975년 10월 존에게 미국영주권을 발급해주었다. 더구나 그는 이후 음악 생활을 단절한 채 작품 출반은 물론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꺼렸다. 한편 1987년 전기작가 앨버트 골드만은 존의 전기문인 『존 레논의 삶』을 내놓고 그 무렵 그가 깊이 마약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 일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뉴스위크 >지는 이와 관련한 갑론을박을 커버스토리로 취급했다). 5년간 동면하고 난 후인 1980년 그는 앨범 < 이중환상(Double Fantasy) >을 들고 화려히 컴백하여 새출발의 의지를 팬들에게 알렸다. 그렇지만 그 새출발의 정체란 일반인이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매일 우린 사랑을 나누곤 했지. 왜 우리 둘은 멋지고 편하게 사랑을 나누지 못할까. 이제 우리들의 날개를 펴고 휠훨 날아가야 할 때야. 또 하루가 우리 사랑을 비껴가지 않도록. 마치 새출발하는 것처럼 말이야.’ ‘새출발 하듯(Just Like Starting Over)’ 그의 새 모습은 ‘바퀴를 바라보며(Watching the Wheels)’라는 곡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난 그저 여기 앉아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을 응시할 테야. 난 정말 그것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을 테야.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거야.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내게 질문하지. 난 문제는 전연 없고 해결만이 있다고 말하지. 그러면 그들은 마치 내가 이성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젓지. 난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지. 난 단지 여기 앉아 시간을 즐길 뿐이야.’ 참으로 많이 변질된 상태다. 과연 존은 훼절한 것인가. 엄청난 부와 안락에 취해 투쟁 의지를 저버린 것인가. 이런저런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앨범 발표 몇 개월만인 1980년 12월 8일 그는 팬이라고 자처하고 순순히 다가온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체불명의 청년이 쏜 총에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얼마 전 미국 CIA의 조종으로 마크 채프먼이 존을 살해했다는 미확인 외신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존의 사망과 함께 미국은 레이건의 보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존의 후반기 삶을 집중 조명한 사람들은 “그도 별 수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1970년대 초반의 거침없는 돌진과 견주었을 때 이같은 단정이 무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성급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방법론에 변화가 있었을 뿐 최후의 앨범에까지(아무리 냉정하게 따져도) 그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과 평화’는 결코 그의 두뇌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다만 가정이 큰 관심사로 부각되었을 따름이었다. 그의 유작 < 이중 환상 >에는 과잉이라고 여겨지리만치 요코에 대한 헌신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전편을 흐르고 있다. 그에게서 가정이란 의미는 개인에게 가치뿐만 아니라 ‘변화의 밑거름’인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의 살아있는 세포’로 간주되었다. 그간의 현실 투쟁에서 이제 가족을 단위로 한 길고 긴 ‘역사투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존 레논의 전설은 신비와 혼돈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그가 보여준 인생의 드라마틱한 굴곡이 그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방체제의 제반 가치를 통렬히 고발한 투사로서의 존의 모습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진 지 10년이 훨씬 흘렀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서방의 순종파 가수들’과 달리 현실 개혁과 직접 투쟁으로 일생을 숨가쁘게 달려간 그는 여전히 많은 가수들에게 ‘노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서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 퀸의 브라이언 메이, ELO의 제프 린, 유투 그리고 조지 마이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스타들이 그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레논이 사망했을 때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폴 매카트니는 이러한 추모사를 남겼다.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
30년에 가까운 경력을 자랑하는 카멜은 유난히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아트 록 그룹이다. ‘Long goodbyes'', ''Stationary Traveller''는 대중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곡으로 방송을 통해 지금까지도 널리 리퀘스트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Lady fantasy'', ‘Rainbow''s end'', ‘Hymn to her'', ‘Lies'', ‘Song within a song''... 30년에 가까운 경력을 자랑하는 카멜은 유난히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아트 록 그룹이다. ‘Long goodbyes'', ''Stationary Traveller''는 대중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곡으로 방송을 통해 지금까지도 널리 리퀘스트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Lady fantasy'', ‘Rainbow''s end'', ‘Hymn to her'', ‘Lies'', ‘Song within a song'', ‘Rose of Sharon''등 아트 록 밴드로서는 드물게 인기 레퍼토리의 수도 상당하다. 적어도 국내에서 그들은 프로그레시브, 아트 록 계의 거물급 인사인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킹 크림슨(King Crimson)에 뒤지지 않는(혹은 그 이상의) 지명도를 쌓아 올렸다. 하지만 카멜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역사에서 널리 기록될 만한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일반인들에게 받는 편애에 가까운 사랑과는 다르게 킹 크림슨의 데뷔작 <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 The Wall >과 같이 항시 꼽히는 ‘명반’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 사운드의 특징인 ‘서정성’에서 찾을 수 있다. 영롱한 키보드 파트를 주축으로, 앤드류 라티머(Andrew Latimer)의 더 이상 부드러울 수 없는 질감의 기타가 어우러진 카멜의 음악은 동료 그룹들의 ‘난해하고 사변적인’ 혼돈의 미학과는 대척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밴드에 비해 다분히 팝적인 성향으로 인식됐다. 이런 대중 지향적인 접근법 때문에 그들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선율과 곡은 카멜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의 밴드로 각인시켰다. ‘요정의 세계’, ‘백조의 사랑’과 같은 깜찍한 앨범의 컨셉트도 팬들에겐 충분한 플러스가 됐다. 카멜은 1972년 영국에서 결성되었다. 앤드류 라티머, 덕 페르구손(Doug Ferguson), 앤디 워드(Andy Ward), 피터 바든스(Peter Bardens)의 4인조는 그 해에 데뷔작 < Camel >을 발표하면서 긴 여행의 출발을 알렸다. 처음으로 이들이 주목받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은 1974년 공개한 < Mirage >였다. ‘Lady fantasy'', ‘Freefall''이라는 멋진 넘버를 수록했던 이 음반은 미국 차트에 진입하며 앞으로 나올 수준급의 앨범들을 예고했다. < The Snow Goose >와 < Moonmadness >는 이들의 초창기 대표작으로 인정받으며 차트에서도 좋은 성과를 올렸다. 이 앨범을 끝으로 창단 멤버 덕 페르구손이 탈퇴 의사를 밝혀 캐러반(Caravan)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리차드 싱클레어(Richard Sinclair)가 대체 주자로 수혈됐다. 이후 < Breathless >, < I Can See Your House From Here >, < Nude >등에서 변치 않은 음악성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맞은 카멜은 1982년 앨범 < The Single Factor >를 앞두고 앤드류 라티머를 제외한 모든 구성원이 팀을 떠나면서 잠시 위기를 맞는다. 그 어려움은 1984년 그룹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 Stationary Traveller >로 완전히 극복됐다. ‘Ballad for a lost friend'', ‘Nothingness''로 유명한 네덜란드 아트 록 밴드 카약의 키보디스트 톤 세르펜질(Ton Scherpenzeel)이 가세해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 귀를 휘감는 멜로디로 무장한 이 음반은 동, 서독 간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여 화제를 모았다. 1980년대 중, 후반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메탈 그룹들에게 관심을 빼앗기고 망각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던 카멜은 1991년 존 스타인벡의 소설 < 분노의 포도 >를 테마로 만든 앨범 < Dust And Dreams >를 발표하며 건재함을 증명했다. 계속해서 상당히 긴 터울을 두고 < Harbour Of Tears >와 < Rajaz >를 각각 공개하며 시들지 않은 감각을 자랑했다. 카멜은 쉽고도 예쁜 작품들로 프로그레시브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데 기여한 그룹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팝’에 경도된 인물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클래식에 기반한 탄탄한 연주력을 바탕으로 록, 팝, 재즈를 자유롭게 왕복하며 꽉 잡힌 연주력을 뽐냈다. 또한 일관성 있는 테마를 가지고 곡 하나하나 보다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신장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 해도 카멜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가 그다지 후한 편은 아니다. 허나 외부의 잣대와는 관계없이 ‘서정성’이라는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음악을 해 온 이들을 굳이 외면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그들은 ‘외골수 탐미주의’와 ‘마지막 낭만파’사이에 위치한 그룹이다.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지 30년 동안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 불혹(不惑)은 나이 사십을 일컫는다.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迷惑)됨이 없이 앞으로 정진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 논어 > ‘위정편(爲政篇)’에서 언급한 말이다. 예쁘장한 뉴저지 소년들 본 조비가 어느새 우리네 나이로 불혹이 됐다. ‘그룹의 존재 이유’ 존 본 조비(John Bon Jovi, 1962년 생)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 1962년 생)이 올해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리치 샘보라(Richie Sambora, 1959년 생)와 티고 토레스(Tico Torres, 1953년 생)는 과거에 이미 안착했다. 그들은 1980년대부터 자신들의 특허품 ‘뉴저지 사운드’를 들고 나와 현재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음악성이 떨어진다, 이젠 변해야 산다, 제발 음악 인테리어 좀 다시 해라 등의 주변의 입방아와 시선에도 그들은 ‘Keep the faith’와 ‘It’s my life’를 부르며 현혹되지 않았다. 불혹은 그러한 밴드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격려의 나이테이다. 바로 이번에 발표되는 본 조비 최초의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앞으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굳건한 의지가 담긴 뜨거운 열기의 현장이다. # Always 본 조비는 1980년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음반 산업이 빚어낸 ‘의도적’ 결과물인 팝 메탈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그룹이다. 하지만 그들은 머틀리 크루(Motley), 래트(Ratt), 포이즌(Poison), L.A. 건스(L.A. Guns), 워런트(Warrant), 슬로터(Slaughter), 도켄(Dokken), 스키드 로우(Skid Row) 등 대부분의 동료 헤어 메탈 밴드들이 1990년대 들어 얼터너티브 열풍에 밀려 강제 퇴출 당하는 수모를 겪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차트를 점령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또는 상업적인) 록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본 조비의 성공 요인은 ‘건강함’에 있다. 그들은 퇴폐 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는 LA 출신 그룹들과 달리, 아메리칸 하드록의 전통을 흡수하여 밝고 경쾌한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한때의 유행을 지배하는 충격 요법보다 은근하지만 뿌리가 깊은 정공법을 택하여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존 본 조비의 루츠적인 목소리와 리치 샘보라의 블루스에 기반을 둔 기타 스타일이 대변한다. 가사 또한 대부분 건강미를 한껏 뽐낸다. 술과 마약, 걸(Girl)들을 찬양했던 타 밴드와 갈라서게 되는 두 번째 지점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반쯤 왔어요/ 기도로 살아요/ 내 손을 잡으세요/ 단언컨대 우린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1986년 앨범 < Slippery When Wet >의 수록곡 ‘Livin’ on a prayer’ 중에서-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에요/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의지할 누군가가 아무도 없을 때 버텨내기란 힘이 들어요/ 신념, 당신은 빗속을 헤쳐나갈 수 있어요/ 신념을 지키세요’ -1992년 앨범 < Keep The Faith >의 수록곡 ‘Keep the faith’ 중에서- 그들은 결코 실패와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와 믿음을 준다. 때문에 남녀 노소 들어도 부담이 없다. 본 조비를 얘기하면서 동향 출신의 로큰롤러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팝 메탈과 노동자 록이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트래디셔널’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미국의 전통 록 사운드를 둘 다 품고 있다. 본 조비는 바로 ‘보스(Boss)’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았다. 1984년 셀프 타이틀 데뷔작에 실린 ‘Runaway’가 대표적이다. 서로는 또한 뉴저지를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 각종 자선 단체의 기금 모금 공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1998년에는 탈주 범에게 살해된 뉴저지 경찰관 패트릭 킹 가족들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함께 합동 공연을 열기도 하는 등 뉴저지의 음악 일꾼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 조비의 건강함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에게서 파생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 New Jersey 본 조비는 1983년 고등학교 친구사이였던 존 본 조비와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브라이언이 뉴저지주의 세이레빌(Sayreville)에서 만든 밴드. 곧이어 리치 샘보라와 베이시스트 알렉 존 서치(Alec John Such), 드러머 티코 토레스가 가세하여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다. 그들은 1984년 데뷔 음반 < Bon Jovi >, 1985년 2집 < 7800 Fahrenheit > 등을 발표하며 음악의 바다로 힘차게 닻을 올렸다. 각각 앨범 차트 43위와 37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키보드에 주안점을 둔 경쾌한 하드록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밴드는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엘리스 쿠퍼(Alice Cooper),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그리고 요즘의 리키 마틴(Ricky Martin) 등에게 굵직한 히트곡들을 제공한 명 작곡가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와 전격 제휴하였다. 데스몬드의 입김에 의해 팝 적인 감각을 대폭 받아들인 그들은 팝 메탈로 그룹의 음악 방향을 확정했다. 그래서 완성된 결과물이 바로 1986년의 < Slippery When Wet >이였다. 귀를 단숨에 자극하는 훅(Hook)과 신나고 흥겨운 그들의 메탈 사운드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Livin’ on a prayer’, ‘You give love a bad name’, ‘Wanted dead or alive’, ‘Never say goodbye’ 등의 인기 곡들을 쏘아 올렸다. 음반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천 만장이 훨씬 넘게 팔려나갔다. 본 조비의 가장 빛나는 마스터피스이자 팝 메탈의 위대한 명반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데스몬드 차일드와 끈끈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번 점화된 본 조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88년에 발매된 작품 < New Jersey >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정상을 밟았고, ‘Bad medicine’, ‘Born to be my baby’, ‘I’ll be there for you’, ‘Lay your hands on me’ 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 나갔다. 한편 그들은 1989년에 열린 MTV 뮤직 비디오 시상식에서 강한 하드록 ‘Wanted dead or aliv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불러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이는 1990년대 들어 MTV에 의해 기획된 언플러그드 공연에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휴지기에 돌입하여 각자의 솔로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찬란했던 1980년대를 마감한 본 조비는 1990년대의 개막과 함께 영국에서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2년 컴백 앨범 < Keep The Faith >, 1994년 베스트 앨범 < Crossroad >, 1995년 정규 6집 앨범 < These Days >(1994년 알렉 존 서치가 견해차로 탈퇴하여 후임 베이스 주자로 휴 맥도널드(Hugh Mcdonald)가 가세했다) 모두 영국 차트 넘버원을 차지했다. 미국에서 각각 5위, 8위, 9위에 올라선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당시 너바나가 주도한 얼터너티브 록이 미국을 휩쓸고 있었기에, 조금은 피해가 덜한 영국에서 비상(飛上)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Keep the faith’, ‘Bed of roses’, ‘I’ll sleep when i’m dead’, ‘I believe’, ‘Always’, ‘Someday i’ll be saturday night’, ‘This ain’t a love song’, ‘Something for the pain’, ‘Lie to me’, ‘These days’ 등의 무수한 히트곡들이 이 기간동안 쏟아져 나왔다. 본 조비는 얼마 후 개인 플레이와 음악적 충전을 위해 또다시 장기간의 칩거에 들어가며 1990년대를 보냈고,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재기 작품 < Crush >와 함께 뉴 밀레니엄을 맞았다. # One Wild Night 우선 수록곡의 질적인 면이나, 사운드의 완성도를 떠나 본 조비의 이번 라이브 앨범 < One Wild Night >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7년 동안의 음악 이력서에 처음으로 올리는 실황 음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라이브는 흥겹기로 정평이 나있다(국내에서도 이미 1995년 내한공연으로 확인했다). 한해 공연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만 2천 8백 4십만 달러, 매진 사태로 인해 무조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막무가내 팬들의 잦은 부상 등은 그들의 공연이 얼마나 인기가 높은지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밴드는 1987년 몬스터 록 페스티발, 1989년 모스크바 뮤직 피스(Peace) 페스티발, 앨범 발표 후 가지는 월드 투어 등을 통해 스타디움 록 밴드로서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장의 라이브 앨범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다. 팬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 것은 당연지사. 이에 대해 존 본 조비는 "이 음반은 팬들이 오랫동안 리퀘스트 해왔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는 라이브 앨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대와 신세대 그들을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팬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현장(現場) 사운드가 세상에 공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음반은 1985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스위스, 영국, 남아프리카 등을 돌며 녹음한 곡들 중에서 최고의 소스만을 뽑아낸 14곡과 < Crush >의 수록곡 ‘One Wild Night’의 리믹스 버전을 담고 있다. 본 조비의 음악 여정을 가늠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데뷔작의 ‘Runaway’, < 7800 Fahrenheit >의 ‘In and out of love’, < Slippery When Wet >의 ‘Livin’ on a prayer’, < New Jersey >의 ‘Bad medicine’, < Keep The Faith >의 ‘Keep the faith’, < These Days >의 ‘Something for the pain’, < Crush >의 ‘It’s my life’ 등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들에서 알짜배기만을 엄선했다. 또한 닐 영(Neil Young)의 ‘Rockin’ in the free world’와 밥 겔도프(Bob Geldof)의 ‘I don’t like mondays’를 리메이크한 것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특히 ‘I don’t like mondays’는 밥 겔도프가 직접 참여하여 존 본 조비와 번갈아 부르는 흐뭇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존 본 조비는 영국의 헤비메탈 전문지 < 케랑 >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시대의 음악 조류를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기자의 가시 돋친 질문에 "나는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과 음악의 고향 뉴저지를 계속 고집하겠다는 뜻이다. 때론 변화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바꾸어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절한 시점이 요구된다. 아무 때나 하면 위험스런 탈주의 모험밖에 안 된다. 본 조비 스스로도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오직 한 길만을 걸어간다. 주위의 비판에 아랑곳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뉴저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은 스스로 뉴저지를 떠날 것이다. 불혹이 아닌가. 팬들의 환호와 함께 메아리치던 ‘It’s my life’의 노랫말이 아직도 귓가를 뒤흔든다. ‘이게 나의 삶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난 영원히 살수 없어요/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나의 마음은 훤히 트인 고속도로 같아요/ 프랭크가 나의 길을 갔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단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원해요/ 이게 나의 삶이에요’
밴드 : Rainbow (레인보우,Ritchie Blackmore's Rainbow)
독단은 때론 명반을 만든다. 이 명제를 하드 록 그룹 레인보우에 한정한다면 맞는 말이 될 것이다. 그룹의 전제적 리더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는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외고집으로 밴드 내 멤버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적인 조율과 컨트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메탈 역사에 길이 남을 < Ritchie Blackmore''s Rainbow >나 ... 독단은 때론 명반을 만든다. 이 명제를 하드 록 그룹 레인보우에 한정한다면 맞는 말이 될 것이다. 그룹의 전제적 리더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는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외고집으로 밴드 내 멤버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적인 조율과 컨트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메탈 역사에 길이 남을 < Ritchie Blackmore''s Rainbow >나 < Rising >, < Long Live Rock ''n'' Roll >과 같은 걸작들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절대적인 영향을 얻고 악상을 사사 받은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이나 헬로윈(Helloween) 또한 야심차게 등장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리치 블랙모어라는 이름의 무게는 컸다. 그의 그 거대한 네임밸류는 딥 퍼플(Deep Purple) 재적 시절의 역작 < In Rock >, < Machine Head >를 통해 이미 입증된 것이었다. 이미 거대해져 버린 딥 퍼플에서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1974년 별 미련 없이 밴드를 나왔다. 그의 새 출발에 힘을 실어준 버팀목은 엘프(Elf)출신의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였다. 작달막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량을 뿜어내는 그의 목소리는 리치에겐 커다란 위안거리가 됐다. 카리스마에서 그는 결코 리치에 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고 자아 강한 둘의 만남은 적절한 긴장감의 유지란 측면에서 밴드의 출범에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이 두 사람의 합작 기간이 레인보우의 황금기였다. 디오가 함께 했던 1978년까지는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와 디오의 보컬이 경쟁하듯 뒤섞이며 상호 상승 곡선을 그렸던 시기였다. 클래식이 바탕에 깔린 리치의 기타는 당대의 록 키드였던 바로크 메탈 뮤지션들에게 지침서가 되었고, 에너지가 넘치는 디오의 목소리 역시 수많은 록 보컬 지망생들이 거쳐 넘어가야 할 ''필수교과''였다. 역시 이 때에 발표한 곡들 중에 애청되는 곡들이 많다. ''Man on the silver mountain'', ''Catch the rainbow'', ''Starstruck'', ''Stargazer'', ''Gates of Babylon'', ''Kill the king''등 레인보우의 핵심 레퍼토리가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만 뚜렷한 자기 주장을 소유한 두 명 사이의 ''위험한 동거''가 영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79년 디오가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뒤를 이어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프론트맨이 되길 결심하자 리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디오와 동등한 파워를 지닌 보컬리스트를 단기간 내에 구하기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기에 리치는 레인보우의 자체 색깔에 변화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가입한 짧은 머리의 말쑥한 그레함 보닛(Graham Bonnet)은 이전보다 파퓰러해진 팀의 사운드에 걸맞는 보컬리스트였다. 후에 임펠리테리(Impellitteri)가 리메이크해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 ''Since you''ve been gone''을 비롯, ''Lost in hollywood'', ''All night long''등 수록곡들은 간결해지고 한층 더 다듬어졌다. 낭비하지 않고 핵심만 나열하는 연주가 < Down To Earth >앨범 전체를 채웠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스마트함과 현대적 느낌을 얻은 밴드는 그 반대급부로 그때까지 거두어들인 많은 노획물들을 버려야 했다. 가장 많은 손해를 감수한 것은 리더인 리치 블랙모어였다. 추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던 화려한 솔로 애드립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때까지 본연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놓지 못한 그레함 보닛의 목소리도 레인보우와 융화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사로잡은 팬들보다 이전의 풍성함을 그리워하며 떨어져 나가는 이들의 수가 더 많았다. 마침내 과오를 깨달은 리치는 그레함을 해고했고, 새 싱어를 찾아 나섰다. 3기 보컬리스트 조 린 터너(Joe Lynn Turner)를 맞이해 발표한 세 장의 앨범은 각기 다른 색깔을 보인다. 1981년 공개한 < Difficult To Cure >는 예전의 클래식적인 접근과 < Down To Earth >의 상업적인 전술이 접점을 이룬 음반으로 후반기 대표 싱글인 ''I surrender''를 위시해 전작의 부진을 만회했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테마로 도입되고, 키보드와 기타의 접전이 정면에 떠오른 이 작품은 초창기 멜로딕 메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 1년 후에 나온 < Straight Between The Eyes >의 방법론은 다시 바뀌었다. 전작의 잘 세공된 듯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투박하고 거친 하드 록이 가득했다. 이 앨범은 레인보우 역사상 가장 덜 정제된 음반이자, 다른 측면에선 기본으로 돌아간(Back-to-basics) 작품이다. 화려한 건반은 다시 뒤로 숨고, 스포트라이트는 기타와 보컬에게 맞춰졌다. 리치의 스트레이트한 연주와 조 린 터너의 시원스런 보이스의 매치 업은 서로 잘 어울렸다. 리치의 변덕은 차트에서는 재미를 안겨주지 못했지만, 무언가 ''강한 것''을 내심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큰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레인보우의 사실상 마지막 정규 앨범인 7집 < Bent Out Of Shape >는 한 번 더 굴절되며 아트 록을 끌어들였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인스트루멘탈 ''Anybody there'', ''Snowman''은 레인보우가 가진 분광(分光)의 영역이 헤비 메탈에만 제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리치 블랙모어의 지도하에 일곱 가지 색깔의 영롱한 수채화를 완성했던 레인보우는 1984년 리더가 다시 딥 퍼플의 일원으로 가담하면서 그 생을 다했다. 이후 1994년 리치 블랙모어는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라는 이름을 걸고 앨범을 한 장 더 공개했지만 이 그룹이 오래갈 것이라 판단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레인보우가 어떤 위상을 지니는 밴드라고 규정짓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우선 이들은 헤비메탈을 빛낸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그룹이다. 그 주지의 사실 이외에도 이들은 많은 록 뮤지션들을 길러내는 요람 역할을 담당하며 그들이 팀을 떠난 이후에도 다른 밴드의 주축으로 자리잡게 했다. 한편으론 딥 퍼플과 함께 기타와 키보드간의 다양한 접속 경로를 탐사하여 후대의 그룹들이 그 미학의 지평을 활짝 넓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초석을 놓고 길을 닦았던 헤비메탈은 쇠퇴하여, 더욱 골방의 세계로 침잠해 갔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색 창연한 거장의 풍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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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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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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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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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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