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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 Cash (조니 캐쉬) - Easy Rider: The Best Of The Mercury Recordings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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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Johnny Cash (조니 캐쉬) - Easy Rider: The Best Of The Mercury Recordings [2LP]

Mercury Records 베스트 음반

[ 180g / 게이트폴드 / 디지털 다운로드 코드 삽입 ]
Hank Williams Jr., Tom T. Hall, Rosanne Cash, Waylon Jennings, Roy Orbison 노래 외 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Mercury Records | 2020년 07월 2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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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 Cash (조니 캐쉬) - Easy Rider: The Best Of The Mercury Recordings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7월 24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1개)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A1 Waymore's Blues
  • A2 We Remember the King
  • A3 The Big Light
  • A4 The Night Hank Williams Came to Town
  • A5 Let Him Roll
  • A6 W. Lee O'Daniel (And the Light Crust Dough Boys)
  • B1 Ballad of a Teenage Queen
  • B2 The Last of the Drifters
  • B3 That Old Wheel
  • B4 Get Rhythm [1988 Version]
  • B5 Tennessee Flat Top Box [1988 Version]
  • B6 Sunday Morning Coming Down [1988 Version]
Disc2
  • C1 Veteran's Day
  • C2 A Backstage Pass
  • C3 Cat's in the Cradle
  • C4 Farmer's Almanac
  • C5 Monteagle Mountain
  • C6 I Shall Be Free
  • D1 I'm An Easy Rider
  • D2 The Greatest Cowboy of Them All
  • D3 Hey Porter
  • D4 The Mystery of Life
  • D5 Goin' By the Book
  • D6 The Wanderer

아티스트 소개 (10명)

노래 : Hank Williams Jr. (행크 윌리엄스 주니어)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노래 : Jerry Lee Lewis (제리 리 루이스)
노래 : Carl Perkins (칼 퍼킨스,Carl Lee Perkins)
컨트리, 로큰롤 기타 연주자, 보컬 컨트리, 로큰롤 기타 연주자, 보컬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공히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 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 롤링 스톤 >지은 84년 이 그룹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하고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대중주간지 < US >는 85년 “아일랜드에서 온 성난 십자군들이 미국을 산산조각내고 있다”며 그들의 미순회공연을 충격적으로 보도했다. < 타임 >지는 87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그룹이 비틀즈 다음에 랭크되어야 한다고 썼다. 언론의 지적처럼 이 그룹은 실로 ‘80년대 최고의 록 밴드’였다.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 < 롤링 스톤 >지은 84년 이 그룹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하고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대중주간지 < US >는 85년 “아일랜드에서 온 성난 십자군들이 미국을 산산조각내고 있다”며 그들의 미순회공연을 충격적으로 보도했다. < 타임 >지는 87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그룹이 비틀즈 다음에 랭크되어야 한다고 썼다. 언론의 지적처럼 이 그룹은 실로 ‘80년대 최고의 록 밴드’였다.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반 팬들에게 당대 록 그룹 인기서열 1위는 언제나 이들 차지였다. 심지어 “지진이 일어날 만큼 수많은 관객이 운집해 열광하는 그들의 공연을 누가 능가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교황만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얘기도 나왔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4인조 그룹 유투(U2). 그룹명을 고공첩보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이들은 이런 인기 외에 가수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영향력까지 누리고 있다. 아일랜드의 수상 가렛 피처랄드가 이 그룹 리더에게 정부의 실업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그 일례에 속한다. 리드 싱어 보노(Bono)의 원시적 야수성이 번득이는 보컬, 에지(Edge)의 자극적인 기타 연주(그룹 후의 피트 타운센트는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 기타 연주를 포기하고 싶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아담 클레이튼(Adam Clayton)의 베이스, 래리 뮬렌 주니어(Larry Mullen Jr.)의 드럼이 융합되어 토해내는 ‘스트레이트 록큰롤’은 가히 일품이다. 발라드나 댄스곡 일색인 이 시대에 유투의 광포한 록 사운드처럼 팬들 가슴에 불을 당긴 밴드는 없었다. 록 뮤직의 본질인 폭발성과 열정 그리고 현장성의 부재에 갈증난 팬들에게 이들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그렇다고 유투가 이같은 록큰롤에 대한 투신만으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평가받게 된 보다 정확한 이유는 사회현실을 주시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매서운 감시 기능’에 자리한다. 워싱턴 대학의 부총장이자 록 역사가인 데이비드 P. 차트메리 씨는 91년 펴낸 『록킹 인 타임』이란 저서에서 “유투는 록 음악이 60년대에 보여준 ‘비판정신’이 복원되고 있음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실체”라면서 그들의 음악을 저항적이라고 기록했다. 유투 본인들도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주된 이유는 “좋은 노래, 즉 현실적(real)인 노래를 쓴다는 데 있다”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리드 싱어이면서 모든 가사를 쓰고 있는 그룹의 실세 보노(본명 폴 휴즌)는 더 구체적으로 “80년대 사람들은 칵테일 감성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들려나오는 소위 ‘무드음악’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들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세로 음악을 한다.”고 그룹 이념을 밝혔다. 바로 이런 태도가 그들에게 인기 외에 존경을 더해준 것이다. 지난 76년에 결성된 유투는 78년 기네스 맥주회사가 주최한 가요제에서 우승하면서 팝 무대에 공식 진출했다. 상당기간 충전을 거듭한 뒤 80년 첫 앨범 < 소년(Boy) >과 81년 < 10월(October) >을 연이어 출반했으나 비평가들의 찬사만 들었을 뿐 판매는 부진했다. 여기까지 그들은 평범한(물론 나중의 음반과 비교해서) 소재를 다루었으나 이후에는 음악에 정치적 메시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입장 정리를 끝내고 나자 유투는 < 전쟁(War) >, < 잊혀지지 않을 불꽃(The Unforgettable fire) >, < 여호수와 나무(Joshua Tree) >, < 분노의 소리(Rattle and Hum) > 등 걸작을 터뜨리면서 한 번도 현실과 등진, 공허한 상업성의 메아리를 울리지 않았다. 전환점은 82년 10월 북아일랜드의 항구도시 벨파스트에서 가진 공연이었다. 여기서 유투는 역사적인 아일랜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을 관객들에게 선보여 일대 주목을 받았다. 왜곡된 현실의 제문제들을 취급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이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유투의 눈에 걸려든 것은 자신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분단과 전쟁이었다. ‘아이들 발 아래 깔린 깨진 병들, 막다른 골목길에 널린 시체들, 투쟁이 막 시작됐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승리한 자는 누구인가. 참호가 패이는 것은 우리들 가슴 속이지. 어머니의 자식 형제들 누이들이 찢어지고 ...’ 아일랜드 상황을 그린 존 레논의 72년도 노래와 제목이 같은 이 곡에서 유투는 종교의 차이 때문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 끝없이 다투는 것을 두고 언제까지 우리가 레논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느냐며 ‘오늘밤에라도 우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유투의 소원은 고국 아일랜드의 통일이다. 보노는 “하나의 섬인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경계선은 완전한 허위”라고 주장한다. 유투의 눈에 세상은 투쟁과 분열로 혼탁하며 반민주적 상황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문제의 세상’이었다. 이 노래가 수록된 83년의 음반 < 전쟁 >이 시사하듯 세계적 현실은 여러 가지 레벨의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국제간의 정치 분쟁, 핵 지대화, 민권 침해 등 주요 문제들이 이 고공첩보기의 감시를 받는다. ‘서에서 동까지 당신들은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식이야. 야밤의 도둑처럼 당신들은 촛불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거야. .. 매일 매일이 혁명인 거야. 소련, 동독, 런던, 뉴욕, 북경! 배후를 조종하는 앞잡이들이야. 안녕, 안녕, 안녕하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아. 버튼을 누르고 플러그를 당겨. 안녕이야.’ ‘초(Seconds)’ 역시 < 전쟁 >에 실려 있는 이 곡은 핵무기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부서진 등은 천장에 걸리고 깨어진 코는 바닥에 닿아 있지. 난 문 뒤에서 웅얼거리는 침묵에 비명을 지르지. 간수는 말하는 거야. 비상구는 열려 있으니 나가려면 은과 금이 있어야 한다고. .. 이 사슬은 더 이상 날 묶지 못해. 발에 있는 족쇄도 마찬가지야. 죄수는 밖으로, 안에는 자유를! 그들을 풀어주라.’ ‘은과 금(Silver and Gold)’ 요하네스버그 남부에 사는 어느 흑인을 소재로 했다는 이 곡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서슬퍼런 흑인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신랄할 비판이 담겨 있다. 이 노래는 리틀 스티븐의 제창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반대를 호소한 음반 < 선 시티(Sun City) >에 보태기 위해 만든 곡이다. 유투는 특히 인권 탄압에 예민하다. 세계 도처에 행해지고 있는 인권 침해의 현실을 문책하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 깊이 관여하면서 85년, 86년 이를 위한 공연에 잇따라 참여했다. 유투의 팬들은 < 선전 >이라는 잡지를 발행, 독자들로 하여금 국제사면위원회를 대신해 인권을 탄압하는 각국의 정부에 편지를 띄우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유투의 노래 방향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어느 정치 체제나 경제 이데올로기의 입장에는 서있지 않다. 이들의 관심은 어떤 이념의 체제이든 그 국가가 현실정치에서 저지르고 있는 반민주적 요소와 왜곡을 규탄하고 전면적 반성을 촉구하는 데 집중된다. 따라서 60년대와 70년대 록 스타에게서 가끔 나타나던 반체제, 무정부주의, 반종교의 기색은 발견되지 않고 이념과 체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서 운동성이 출발한다. 이들의 음악이 우리의 귀에 다소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그 속에 70년대 중반 영국을 휘몰아쳤던 펑크 사운드가 살아 있는 까닭이다. 유투는 펑크의 소리만 되살린 데 그치지 않고 펑크의 ‘저항 정신’을 함께 복원시켜 저항을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반체제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다시 말해 ‘부정적인’) 옛 펑크와는 저항의 본질을 완전히 차별화했다. 기타주자 에지는 말한다. “펑크는 죽었다.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현재 밀어닥치는 새로운 팝의 소용돌이 속에 펑크는 버팀목으로서 음반 < 전쟁 >이 기획되었다. 우리는 클래시의 초기 주장과 리차드 헬,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를 좋아해왔다. 그러나 우린 분노와 사랑을 동시에 원한다. 우린 프로테스트(저항) 음반을 원하지만 분명히 ‘긍정적인’ 프로테스트 음반을 원한다.” 반종교 또는 반그리스도 주장 또한 이들에게는 ‘큰일날’ 소리다. 이들은 파문을 일으켰던 존 레논의 “우린 예수보다 위대하다”는 발언을 끔찍한 것으로 여긴다. 레논의 음악과 저항 자세는 존경할 만하지만 그가 무종교주의자라는 점은 배격한다.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특히 아일랜드산 가수 중에는 반미감정의 소유자가 적지 않은 편인데, 유투의 경우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탄력적’인 것은 이와 같은 ‘긍정적 비판’ 혹은 ‘비판적 지지’의 자세에서 연유한다. 이들은 < 여호수와 나무 >에 수록된 ‘푸른 하늘에 총탄을(Bullet the Blue Sky)’을 통해 80년대 중미 국가에 행사된 미국의 압력적 개입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악마의 씨를 뿌리고 화염을 일으킨다. 그들이 십자가를 불태우는 것을, 높이 높이 솟구치는 불꽃을 보라. .. 가시덤불의 장미처럼, 로열 플래시의 모든 색깔처럼 그리고 그는 달러 지폐를 낙하시키고 있다. 난 전투기가 아기가 잠든 진흙 오두막집을 가로지르고 조용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본다. .. 벽을 통해 우린 도시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미국이 밖에 있다. 미국이 밖에 있다.’ 그러나 결코 원색적 반미의 기조는 없다. 유투에게 미국은 ‘신의 나라’이며 ‘마음의 땅’이기도 하다. 보노는 87년 < LA 타임즈 >와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한 바 있다. “미국이 특히 중미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악몽인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농부와 인민의 황폐화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난 미국 시민에 대한 증오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존경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미국이 ‘악몽이면서 꿈’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다." 상당수는 이러한 유투의 ‘체제 인정, 현실 지적’의 노선(부연하자면 혁명을 통한 체제변화의 방식이 아닌 개혁에 의한 체제의 수정, 발전을 모색하는 방식)을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론’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것 같다. 87년에 발표된 < 여호수와 나무 >는 영국에서 1백50만 장, 미국에서 4백만 장, 전세계적으로 1천5백만 장이 팔려나가 팬들의 성원이 압도적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들이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미국의 제도권으로부터도 환영받는 것(언론의 그 호의적인 반응을 보라)은 이같은 노선에 힘입은 바 크다. 따라서 일부로부터는 - 당연히 급진적 좌파가 되겠지만 - 이들이 일정한 한계에 머물러, 앞서 지적한 영국의 클래시나 섹스 피스톨즈 같은 펑크 그룹이 보여준 진보성에는 훨씬 못미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유투는 60년대의 혁명정신을 계승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체제의 혁명’이 아니라 ‘사랑의 혁명’이다. 그들이 87년 < 뮤지션 >지에 밝힌 내용을 통해 유투의 혁명관을 분석할 수 있다. “황량하기만 한 시대인 현 80년대에서 우린 60년대를 돌아본다. 그 시대는 정말 ‘재능’과 ‘드높은 이상’ 그리고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욕구’의 저장탱크였다. 나는 그때의 아티스트들처럼 사랑의 혁명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그들의 일부는 사회혁명을 외쳤지만 우리는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혁명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주변사람들과의 인간 관계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의 모든 노래는 결국 ‘사랑을 통한 화합’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적 박애의 분위기다. 이런 탓에 급진성의 함량 미달이라는 혹평 말고도 너무 잘난 척만 일삼고 성직자연한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투는 60년대 히피처럼 사랑만이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 사람이 사랑의 이름으로 왔다네. .. 4월 4일 이른 아침 멤피스의 하늘에 총성이 울렸지. 마침내 자유다! 그들이 당신의 목숨은 앗아갔지. 그러나 당신의 자부심은 빼앗지 못했지. 사랑이라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은. 사랑의 이름 이상의 그 무엇이 있으랴.’ ‘프라이드(Pride in the Name of Love)’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비폭력 민권운동 지도자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유투는 이 곡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 ‘나는 나의 과거를 정복했지. 마침내 미래가 여기 있지. 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네. 내 바로 앞에 있는 파멸들은 곧 나를 놓치게 될 것이야. 사랑은 나를 구조한다네.’ ‘사랑이 나를 구조하네(Love Rescue Me)’ 유투는 래리 뮬렌이 열네 살 때 마운트템플 고교 게시판에 공고를 내 조직한 그룹. 보노나 뮬렌 둘다 모친을 병 또는 사고로 잃어 그 동병상련을 깊은 연대감으로 승화시킨 그룹. 처음에는 악기 하나 소리 하나 제대로 못내다가 절차탁마를 거듭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된 ‘노력지향’의 그룹(보노는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보이지 않아 매니저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천부적 노래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가사는 보노가 쓰지만 작곡은 모든 멤버가 임해 스스로를 ‘네발 달린 테이블’이라고 하는 공동체적 민주주의 그룹. 이들에게 단단한 팀웍이 구축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네 명의 유투 멤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투의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들과 같은 공동체 의식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의 매니저인 폴 맥기니스와 관련한 소식 하나. 맥기니스는 평소 솔직한 발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나있는데, 90년 더블린에서 가진 한 세미나에서 슈퍼스타 폴 매카트니와 피트 타운센트를 크게 꾸짖었다. 이유는 그들이 돈많은 갑부인데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떼돈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순회 공연을 하면서 비자카드의 후원을 잡아 수백만 달러를 챙기고 티켓을 살 때 그 카드만 사용하도록 한 것을 보면 그는 정말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공연할 때 후원이 없으면 남지 않는다고 그가 주장한다는 것은 정말 ‘개똥’ 같은 얘기다. 그처럼 돈많은 사람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그룹 ‘후’가 맥주회사를 공연 후원업체로 잡았을 때 난 무지 당황했다. 피트 타운센트는 회복기의 알콜중독자 아닌가. 이러한 이율배반을 그가 몰랐던 게 아니라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맥기니스는 심지어 그들의 공연 후원잡기 행태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는다는 뜻에서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맹공했다. 매니저부터가 실로 유투적이다! 유투는 88년 < 분노의 소리 >이후 4년간 공백을 갖다가 92년 < 액퉁 베이비(Achtung Baby) >라는 제목의 새 앨범을 내놓았다. 슈퍼스타답게 역시 이 음반은 크게 히트했고 기독교적 사랑을 전체 수록곡을 통해 제창하고 있다. 앞으로 또 음반을 내도 유투는 계속해서 기독교적 사랑을 노래하고 사회현실을 지적할 것이다. 이 작업은 87년의 빅 히트곡 ‘난 아직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의 가사처럼 아마도 끝없는 여로일 터이다. ‘난 가장 높은 산을 올라갔지. 난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지. 난 뛰었고 기었지. 이 도시의 벽을 기어오르기도 했지. 오로지 그대와 함께 하기 위하여. 그러나 난 아직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
밴드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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