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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 콘서트 모음집 (Rock & Roll Hall of Fame: In Concert) [블루레이]

[ 6 Blu-ray / 36p 롤링 스톤 매거진 부크릿 수록 ]
Simon & Garfunkel, Stevie Wonder, Aretha Franklin, Ozzy Osbourne, John Fogerty 노래 외 2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Time Life | 2020년 05월 0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6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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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 콘서트 모음집 (Rock & Roll Hall of Fame: In Concert) [블루레이]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5월 08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제품소개

감독/출연진 소개 (34명)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多才)를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1950년 5월 13일 스티브 랜드 모리슨(Steveland Morrison)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미조리주 출신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의 과잉 산소 공급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을 드러내 10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2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이끄는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다.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아름으로 발표한 그의 첫 싱글인 라이브 버전 ’Fingerprints-part 2’(1963)가 발표 즉시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한다. 1965년부터 이후 6년 간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9),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그는 명실상부한 모타운 대표 인기스타로 떠오른다. 21살이 되던 1971년 모타운 측과 재계약을 앞두고는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까지 철저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모타운 사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웠던 요구를 그는 끝내 관철시키며 셀프 프로듀싱으로 제작한 첫 앨범 < When I’m Coming From >(1971)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2년 < Music of my Mind: 앨범 차트 21위 >를 시작으로 같은 해 가을 발표된 명반 < Talking Book:앨범 차트 3위 >(1972)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앨범 모든 수록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해낸다. 또한 이 앨범은 A면의 첫 곡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와 B면의 첫 곡 ’Superstition’을 모두 싱글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다. 1972년 같은 해 발표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는 기존 3분대의 모타운 식 히트 곡의 틀을 벗어나 ’Super woman’, ’Maybe your baby’와 같은 6-7분대의 대곡을 과감히 수록했고, 재 계약을 통해 받은 계약금으로 클라비넷, OBX, ARP, 폴리포닉, 무그와 같은 다양한 신시사이저 장비들을 도입, 사운드의 혁신을 일궈낸다. 이듬해 발표한 < Innervisions >(1973)는 그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명반으로 흑인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Living in the city’와 재즈적인 접근을 강하게 드러낸 ’Too High’, ’Superstition’에 버금가는 펑키한 넘버 ’Higher Ground’, 절대자인 신에게 헌정하는 가스펠 곡 ’He’s Misstra know it all’을 담은 수작이었다. 전작에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 Innervisions >는 이듬해인 1974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 부문을 비롯,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올린다. 1974년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하며 잠시 활동의 위기를 맞은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 Fulfillingness’ First Finale >(1974)를 발표하며 ’You Haven’t done nothing’, ’Boogie on Reggae woman’을 각각 팝 차트와 R&B 차트 1위에 올리며 앨범은 1975년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 5개 부문을 석권한다.(올해의 앨범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건 스티비 원더가 처음이었다.) 1975년 모타운 사와 1천 3백만 불의 재계약을 한(당시 팝 음악계에선 최고의 액수)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더블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을 발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히트곡이 쏟아진 앨범에서 ’Sir Duke’, ’I Wish’가 팝 차트 1위에 오르고,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1998년에 리메이크 하기도 한 7분이 넘는 대곡 ’As’(36위)와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코러스와 재즈 플롯주자 바비 험프리(Bobby Humphrey)가 참여한 라틴 팝 ’Another star’(32위)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다. < Songs on the key of life >는 이듬해 1977년 다시 그에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다 준다. 70년대 말, 스티비 원더는 흑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음악 외에도 흑인의 권익신장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4년여의 공백 끝에 발표한 < Hotter than July >(1980)의 수록곡 ’Happy Birthday’를 통해 이런 그의 노력을 전 세계에 알린다.(결국 198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국경일로 지정된다) 앨범에선 이 외에 레게의 시인 밥 말리(Bob marley)에게 헌정하는 레게 넘버 ’Master Blaster(jammin’)’와 지금껏 애청되는 그의 러브 발라드 ’Lately’를 차트에 진입시키는(각각 5위, 64위) 성과를 거둔다. 영화 음악 작곡에도 열심이었던 스티비 원더는 <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 >(1979)를 시작으로, 그에게 오스카 주제가 상을 안겨준 영화 < Woman in Red >(1984)의 테마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팝 차트 1위에 올리며 전 세계를 스티비 원더 열풍 속으로 다시 한번 몰아넣는다. 그의 영화 음악 작업은 < Jungle Fever >(1991), < The adventure of Pinocchio >로 계속된다. 1983년엔 폴 메카트니와 함께 한 듀엣 곡 ’Ebony & Ivory’로, 1985년 ’Part time Lover’로 다시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 Character >(1987)이후 8년이라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 그는 < Conversation Peace >(1995)로 다시 팝 무대에 복귀한다. 90년대 활동은 비록 예전만큼의 날카로운 창조력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수많은 팝 음악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는 그 누구도 재현 못할 ’팝 음악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린다.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오지 오스본만큼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내린 록 뮤지션도 드물 것이다. 그는 여러 기행으로 숱한 가십거리를 만들어 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따라다닌 지독한 알콜 중독은 차치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얘깃거리는 무수하다. 착란 상태에서 부인이자 매니저인 샤론 아든(Sharon Arden)을 살해하려한 것, 알라모 기념비에 방뇨, 공연 중 박쥐의 머리를 물어뜯음. 이런 상상하기 힘든 에피소드들로 그는 메탈이 ‘악마의 음악’이... 오지 오스본만큼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내린 록 뮤지션도 드물 것이다. 그는 여러 기행으로 숱한 가십거리를 만들어 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따라다닌 지독한 알콜 중독은 차치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얘깃거리는 무수하다. 착란 상태에서 부인이자 매니저인 샤론 아든(Sharon Arden)을 살해하려한 것, 알라모 기념비에 방뇨, 공연 중 박쥐의 머리를 물어뜯음. 이런 상상하기 힘든 에피소드들로 그는 메탈이 ‘악마의 음악’이라는 오명을 쓰게 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는 부모들이 혐오하는 록 스타의 전형이었다. 특히 한 소년의 죽음에 그의 노래 ‘Suicide solution’이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토대로 그의 부모에게 오지가 기소당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이 모든 괴벽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오지 오스본은 헤비메탈 씬에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하며 정상의 록 보컬리스로 군림해 왔다. 사실 그의 가창력은 경탄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고, 이미지도 깔끔함, 말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대중을 휘어잡는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그러한 것들을 덮어 버리고도 남았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하는 그의 열정적인 스테이지 매너는 그 자체로 헤비메탈의 규범을 제시했다. 3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20여장에 이르는 음반을 공개하며 탄탄한 경력을 쌓아 온 오지 오스본의 유년기는 그러나 순탄하지 못했다. 1948년 영국 버밍햄에서 빈곤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도살장과 같은 허름한 일터에서 생계를 벌어야 했다. 집은 언제나 가난에 쪼들렸고, 오지는 상점을 터는 등 비행을 저지르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겁던 현실을 록 음악을 통해 날려 버렸다. 로컬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오지는 토니 아이오미(Toni Iommi)등과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결성해 공상에서나 가능할 듯했던 범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 Paranoid >, < Black Sabbath Vol.4 >등의 마스터피스를 터뜨렸다. 그렇지만 술과 마약에 빠진 오지와 멤버 사이에는 곧 반목이 발생했고, 그는 < Never Say Die >를 마지막으로 그룹 활동을 접었다. 곧 그는 솔로로서의 데뷔를 추진하는데, 오지는 오히려 그 시절 더 큰 명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의 솔로 활동 기간은 함께 했던 기타리스트의 변화와 함께 몇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랜디 로즈(Randy Rhoads)와 팀웍을 맞췄던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클래식 기타강사 출신인 랜디의 영향이 작품을 깊게 지배해 장엄하면서 스케일이 큰 음악을 추구했던 시기였다. 뛰어난 기타 플레이어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랜디의 도움으로 오지는 이 시기 상업적으로 괄목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었고,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허나 이 콤비네이션은 랜디 로즈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오래 가지 못하게 되고, 그에게 많은 부분을 의탁하고 있었던 오지는 실의에 빠졌다. 그에게 랜디 로즈란 단순한 동료이자 연주 파트너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교감하고 공유하는 소울 메이트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몸을 추스린 오지는 브래드 길리스(Brad Gillis)를 영입해 라이브 음반 < Speak Of The Devil >을 발표한다. 브래드는 곧 자신의 밴드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로 건너가게 되고 오스본 그룹에는 일본인 피가 흐르는 기타 연주자 제이크 E 리(Jake E Lee)가 가세한다. 제이크는 랜디와는 달리 공격적인 프레이즈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쯤해서 밴드의 음악도 랜디 시절의 어두움과 음울함을 어느 정도 벗어나 메탈 특유의 드라이브(Drive)감을 살리는 방향으로 맞춰지게 됐다. 제이크가 연주한 ‘Bark at the moon’이나 ‘Shot in the dark’를 들어보면 초창기 음악과 스타일 면에서 얼만큼의 차이가 생겼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하지만 랜디 로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밴드에 치명상을 입혔는데, 그는 랜디의 추모음반 < Tribute >를 제이크의 동의 없이 공개함으로서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오지의 돌출 행동으로 그룹은 커다란 전력 손실을 겪게 된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제이크가 팀을 떠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오지 오스본은 다시 기타리스트를 영입하기 위해 오디션을 실시했고, 채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잭 와일드(Zakk Wylde)가 새 멤버로 낙점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잭 와일드는 그 이름만큼이나 힘있고 거친(Wild) 플레이를 자랑하는 천재였고, 그의 가세로 밴드의 사운드는 ‘Miracle man’, ‘Mr. Tinkertrain’ 등에서 잘 나타나듯 결성이래 가장 헤비하게 변한다. 새 피의 수혈은 활기가 부족했던 밴드에 힘을 불어넣었고, 알코올의 해악을 깨달은 오스본의 성숙한 자세와 어우러져 비평가들과 대중들로부터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획득했다. < No More Tears >의 성공을 뒤로 한 채 팬들에게 은퇴를 표명했던 오스본은 1995년 귀환을 알렸다. 헤비메탈과는 관련없는 자신의 밴드 프라이드 앤드 글로리(Pride & Glory)를 운영중인 잭 와일드에 대한 미련을 지우지 못한 오지는 대신 조 홈즈(Joe Holmes)를 새 기타리스트로 대동하고 신작 < Ozzmosis >를 내놓았다. 그러나 아트 록계의 일급 키보디스트 릭 웨이크만(Rick Wakeman), 오랜 친우 기저 버틀러(Geezer Butler)가 도움을 준 컴백 작품은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그의 복귀를 기다려 온 사람들은 순간 실망했지만 얼마 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오지가 신세대 록, 메탈 그룹들이 대거 출연하는 페스티벌 < 오즈페스트(Ozz-Fest) >를 창시한 것. 그의 기획력 덕택에 팬들은 더 많은 록의 축제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지 오스본은 아직까지도 함성과 환호가 넘쳐나는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끓어오르는 동력으로 가득한 앨범들을 발표해 왔던 오지에게 육체적인 나이란 사실 부차적인 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록의 원천과도 같은 인물이다.
소울 펑크 가수 소울 펑크 가수
노래 : Cat Stevens (캣 스티븐스 (유수프 이슬람),Yusuf Islam )
북한에 애인을 남겨두고 남으로 내려온 한 남자의 사랑을 그린 최근 영화 을 보면 주인공인 두 북한 남녀가 놀이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The first cut is the deepest’라는 팝송이 들린다. 첫 사랑이 남긴 깊은 인상을 노래하는 이 곡은 1977년에 로드 스튜어트에 의해 히트되었고, 2003년에는 여가수 셰릴 크로우가 리메이크해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캣 스티븐스가 작곡하고 불렀던 곡... 북한에 애인을 남겨두고 남으로 내려온 한 남자의 사랑을 그린 최근 영화 을 보면 주인공인 두 북한 남녀가 놀이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The first cut is the deepest’라는 팝송이 들린다. 첫 사랑이 남긴 깊은 인상을 노래하는 이 곡은 1977년에 로드 스튜어트에 의해 히트되었고, 2003년에는 여가수 셰릴 크로우가 리메이크해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캣 스티븐스가 작곡하고 불렀던 곡이다. 캣 스티븐스는 1970년대 초중반에 ‘Wild world’, ‘Peace train’, ‘Morning has broken’, ‘Moonshadow’ ‘Oh very young’ ‘Another Saturday night’등 일련의 히트송으로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했던 인기 팝가수였다. 그 시절의 히트 퍼레이드는 최고 가수 엘튼 존에 못지않을 만큼 거셌다. 특히 ‘Wild world’는 나중 1993년, 록 그룹 미스터 빅(Mr. Big)이 소개해 줄기차게 전파를 탔고, ‘Morning has broken’은 얼마 전 어린 가수 조셉 맥매너스(Joseph McManners)를 포함해 무수한 가수가 즐겨 부르는 팝의 명곡으로 꼽힌다. 통기타의 찰진 울림을 강조한 그의 음악은 파워가 실린 보컬 덕분에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함을 내뿜은 것이 특징이었다. 1966년 그룹 ‘스프링필즈’ 출신의 마이크 허스트가 발굴, 그해 데카의 프로그레시브 록 레이블인 데람(Deram)에서 데뷔 싱글인 ‘I love my dog’을 냈고 세 번째 싱글이자 강한 메시지가 담긴 ‘I’m gonna get me gun’은 영국에서 톱10을 기록했다. 나쁜 건강으로 2년을 쉰 그는 1970년에 완연한 싱어송라이터로 복귀, 앨범 과 이국풍의 싱글 ‘Lady d’Arbanville’을 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때는 이듬해인 1971년 앨범 < Tea For The Tillerman >에서 ‘Wild world’가 미국 차트 11위에 오르는 히트를 치면서였다. (캣 스티븐스가 곡을 썼지만 영국에서 한 해 전 레게 가수 지미 클리프의 노래로 먼저 알려졌다) 같은 해 첫 빌보드 톱10을 기록한 ‘Peace train’과 19세기의 찬송가인 ‘Morning has broken’이 수록된 < Teaser And Firecat >을 비롯해 < Catch Bull At Four >(1972년) < Foreigner >(1972년) < Buddah And The Chocolate Box >(1973년) 등의 성공적인 앨범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1979년 이후로 팝 음악계에서 캣 스티븐스라는 이름은 영원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이름을 유수프 이슬람(Yusuf Islam)으로 바꾸고 이슬람교도로 개종하면서 서구 팝 무대와 작별해버렸기 때문이다. 인기를 버리고 신념을 택한 것. 그 뒤로 걸프전쟁 등 간혹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 멋진 팝 음악은 더 이상 내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음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슬람교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을 전파하기 위한 종교와 음악 활동을 지속해왔다. 일례로 딸 하산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앨범 < A Is For Allah >(2000년 재발매)은 서방세계에 불법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1999년에는 기존에 발표한 앨범들을 CD로 리마스터링하는 과정에서 영국 스튜디오에 나타나 화제를 모았으며 이 무렵 영국 BBC는 그의 음악을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2005년, 캣 스티븐스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쓰나미’ 희생자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했다. 동시에 자선기금 모금용 앨범 < Indian Ocean >도 만들었다. 그러나 음악 외적인 측면에서 근래 미국과 이슬람국가 간의 갈등으로 인해 그의 대외적 입장은 반미(反美)노선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실제로 그는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쟁을 수행한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2004년, 런던 발 워싱턴행 항공기에 탑승했다가 뒤늦게 테러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른 사실이 확인되면서 미국 입국은커녕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간 몰래 이슬람 저항단체인 ‘하마스’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비밀이 없고 평화적인 구호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안다.”며 혐의를 반박했다. 얼마 뒤에 그는 고르바초프재단이 주는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한편에서는 테러 요주의 인물이요, 다른 한편에서는 평화주의자라는 상반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입장을 떠나 그의 신념이 지구촌의 평화 정착에 대한 바람에 있음은 분명하다. 한창 팝 가수로 명성을 날릴 시절의 노래 ‘Peace train’이 생생하게 말해준다. 다만 이슬람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미국에 대한 반대의 이미지가 유독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 Indian Ocean > 앨범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캣 스티븐스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슬람 신도이자 예술가로서 나의 관심사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 특히 명분이 옳을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을 믿는다.” 이 말은 결국 음악을 하되, 인기에 영합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명분 즉 평화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는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뜻이다. 1947년, 그리스 혈통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팝 가수 출신임을 감안하면 그의 의식과 행적은 남다르다. 그래서 때로 그는 ‘기인’으로도 통한다. 이런 사실에 관심이 끌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캣 스티븐스를 기억하는 것은 훌쩍 30년이 지났어도 그 노래가 선사하는 빼어난 미학이다. 1976년 세계 순회공연실황을 담은 것으로 2004년에 발매된 앨범 < Majikat >가 말해준다. (국내에서도 2006년 라이선스로 발매되었다) 다시 들어보는, 단호하면서도 서정적인 그의 음악은 여전히 아름답다.
노래 : Peter Gabriel (피터 가브리엘)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음악 제국을 건설한 그는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민속 음악을 월드 뮤직(다분히 서양인 중심적인 시각이지만)이란 이름으로 알린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상업적이고 틀에 박힌 유행음악에 싫증을 느낀 팬들은 피터 가브리엘의 노래들을 통해 음악적인 갈증을 풀었고 지적인 배고픔을 채웠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피터 가브리엘은 명 프로그레시브 그룹 제네시스(Genesis)를 이끌면서 음악적인 이상을 찾았고, 1977년부터 시작된 솔로 활동은 그 유토피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실천의 시간이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제네시스는 1970년을 전후한 기간 동안 클래식을 근간으로 한 복잡한 곡 구조와 난해한 가사, 그리고 시각적인 충격 요법을 가미한 공연으로 가장 초현실적인 아트록 밴드로 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 선두엔 바로 피터 가브리엘이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친정인 제네시스를 출가한 이 영국 아티스트는 이전처럼 일반 대중들이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음악에서 좀 더 대중적인 음악으로 방향타를 틀었다. 그 대표적인 곡이 1986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Sledgehammer’이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성공이 그의 음악 철학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친숙한 멜로디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고집스런 눈으로 응시한 날카로운 가사와 긴장감을 풀지 않는 도전적인 실험 정신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은 그를 대중 음악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하고 있다. 1977년, 포크 스타일의 기타 연주로 포문을 여는 데뷔 싱글 ’Solsbury hill(68위)’이 수록된 처녀작 < Peter Gabriel >부터 1980년의 세 번째 음반까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앨범 타이틀로 정한 그는 이전 제네시스 시절과는 달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사로 거듭났다. 특히 < Peter Gabriel Ⅲ >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인륜적인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에게 헌정한 명곡 ’Biko’와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얼음처럼 차갑고 오싹한 백보컬이 전율적인 ’Games without frontiers(48위)’가 자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1994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발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피터는 관중들과 함께 ’Biko’를 열창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감동과 환희의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다. 제네시스 시절부터 짙은 화장과 화려한 공연으로 시각적인 면에서도 앞서갔던 가브리엘은 1981년 MTV가 개국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982년의 4집 < Security >에 수록된 ’Shock the monkey(29위)’의 긴박한 멜로디를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와 공포스런 화면으로 풀어낸 뮤직비디오는 MTV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스탑 모션으로 제작된 1986년도 싱글 ’Sledgehammer’도 여러 상을 수상하면서 뮤직비디오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렇듯 영상에도 깊은 조예를 나타낸 그는 1984년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 버디 >와 1988년 마틴 스콜세지의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활동 반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상한 4개의 그래미 트로피 중에서 3개가 뮤직비디오 부문일 정도로 ’보는 것’에 대한 그의 집념과 의지는 대단하다. 또한 그는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안을 제3세계의 민속음악에서 찾기 시작했다. 피터 가브리엘은 WOMAD(World of Music, Arts and Dance) 재단을 만들어 1980년대 폴 사이먼(Paul Simon),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리더 데이비드 번(David Byrne)과 함께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음악을 서방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자신의 곡인 ’Biko’의 도입부에서 들을 수 있는 아프리카 합창단의 음원과 < So > 앨범에 수록된 세네갈 출신의 남성 가수 유쑨 두루(Youssou N’Dour)를 백보컬리스트로 모셔온 ’In your eyes’ 등은 타지역의 민속음악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의미하는 대표곡이다. 1986년에 발표된 통산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So >는 피터 가브리엘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남성 가수로 등극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싱글 ’Sledgehamm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In your eyes(26위)’와 ’Big time(8위)’, 케이트 부시와 호흡을 맞춘 발라드 ’Don’t give up(72위)’이 무더기로 차트를 누비면서 일반 팝 팬들과의 거리감을 대폭 줄였다. < So >는 앨범 차트 2위까지 상승했고 그래미에도 여러 부문에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면서 대중성과 음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In your eyes’는 1989년에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의 영화 < 세이 애니씽 >에 삽입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다시 싱글 차트에 입적되기도 했다(41위). 1989년, 영화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 < Passion >으로 그래미 뉴에이지 부문을 수상한 그는 1992년에 < Us >를 발표했다. 피터 가브리엘과 핑크 빛 염문을 뿌렸던 아일랜드의 자존심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와 입을 맞춘 ’Come talk to me’를 위시해 그루브한 싱글 ’Steam(32위)’, ’Digging in the dirt(52위)’를 배출한 이 작품은 그러나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Secret Live’로 명명된 전 대규모 세계 순회 공연의 열광과 희열을 담은 음반과 비디오를 1994년에 발표해 다시 한번 그래미상을 거머쥔 피터 가브리엘은 현재 음악과 영상, 그리고 컴퓨터 산업을 아우르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에 가할 충격을 준비하고 있다.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데스, 고딕, 블랙, 둠 등으로 가지 치기를 한 익스트림 메탈에 이르기까지 앨리스 쿠퍼가 심어놓은 이미지 장치들은 헤비메탈의 올 라운드를 아우르고 있다. 또한 마릴린 맨슨으로 대표되는 인더스트리얼도 엘리스 쿠퍼의 편린들이다. 1948년 2월 4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앨리스 쿠퍼(본명: Vincent Furnier)는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 나즈(Nazz)라는 스쿨밴드를 결성하며 거친 록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1968년 앨리스 쿠퍼로 개명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밴드명으로 내걸고 쇼크 록의 오프닝을 알렸다. 음악 자체가 파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와 행동거지는 파격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검은 분장을 눈자위 가득 칠하고 영적인 듯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는 일부 대중에게 역겨움을 이끌어 내었지만 동시에 수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며 엽기와 극단이 록의 중추적인 흐름으로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엘리스 쿠퍼는 1969년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데뷔작 부터 1973년 7집 에 이르는 기간동안 쇼크 록의 제왕으로서 그 본분을 충실히 했다. ’I’m eighteen’, ’Under my wheels’, ’Elected’, ’No more mr. nice guy’, ’Teenage lament ’74’ 등 많은 하드 록 히트곡들을 쏘아올렸고, 1971년 투어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공연 모습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마녀가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하는 요상한 꿈을 꾼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만큼 그의 행동은 주술성이 강한 것이었다. 샤머니스트, 또는 ’악령의 전도사’와 같은 단어가 매우 잘 어울렸다. 공연에서는 누런 얼룩 구렁이와 입을 맞추고, 목을 매는 등 갖은 엽기 행각은 절정에 달했다. 1975년 부터 솔로 뮤지션으로 전향한 그는 강렬한 록 밴드의 프런트맨에서 인간미를 겸비한 싱어 송 라이터로 파격 변신을 했다. 당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던 그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 음악적으로 평가절하 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You & me’, ’I never cry’, ’How you gonna see me now’ 등 팝에 가까운 발라드 곡들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잠시동안의 휴지기 이후 앨리스 쿠퍼는 이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금 본령을 회복했다. 1986년 작품 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조 새트리아니, 롭 좀비, 슬래시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과 조우하며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고, 1994년 발표한 컨셉 앨범 등에서 특유의 개성 넘치는 창작력을 발휘하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노래 : Donovan (도노반 ,Donovan Philips Leitch)
포크 락 보컬, 기타 포크 락 보컬, 기타
노래 : Bruce Springsteen (브루스 스프링스틴)
미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 미국인에게 조국의 이미지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살기좋은 나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세계 제일의 국가가 미국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인의 그런 자부심은 어쩌면 당연하다. 실로 미국인치고 미국을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냉엄한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마저도 흔하지는 않다. 가수는 더구나 그렇다. 그런데 전형적인 양키이면서 미... 미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 미국인에게 조국의 이미지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살기좋은 나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세계 제일의 국가가 미국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인의 그런 자부심은 어쩌면 당연하다. 실로 미국인치고 미국을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냉엄한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마저도 흔하지는 않다. 가수는 더구나 그렇다. 그런데 전형적인 양키이면서 미국에 내재하는 부정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매우 유별난 가수가 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80년대에 팝 부문은 주지하다시피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가 석권했지만, 록 부문에 관한 한 최고의 영예는 그의 것이었다. < 뉴스위크 >지는 “84년 < 미국에서 태어나(Born in the USA) > 앨범이 발표된 후 스프링스틴은 ‘가장 위대한 미국의 록큰롤러’의 타이틀을 안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된 바 있듯 한동안 그의 인기 열풍은 마이클 잭슨 열풍을 넘어설 만큼 거세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록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그의 별명이 보스(Boss)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지난 70년대 중반 이후 줄곧 이 록계의 두목이 노래를 통하여 그려내고 있는 미국의 상태는 한마디로 ‘빨간 신호등’이다. 거기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를 비롯한 대다수 민중은 일등 국민의 자부심을 지니고 사는 선택받은 국민들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아메리칸 드림을 상실한 채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몸부림치는 가련한 무리들이다. 보스의 작업은 바로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서서 지금의 미국은 살기좋은 나라가 결코 아니며 그들은 ‘총체적 절망 구조’에 빠져 있음을 만방에 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업적이 됐다. 75년에 발표한 그의 걸작 레퍼터리 가운데 하나인 ‘날아나기 위해 태어나(Born to run)’의 노랫말을 보자. ‘낮에 우리는 빗나간 아메리칸 드림의 거리에서 땀을 흘리지. 밤에는 살인기계인 화려한 맨션을 돌아다니고... 이 도시는 당신의 등뼈를 갉아먹는다오. 죽음의 덫이요. 자살 장치라오. 우리는 젊을 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같은 방랑자들은 달아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스프링스틴은 이 곡에 미국 노동자 계급의 절박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그는 73년부터 음반 활동을 개시했지만 이 노래가 타이틀인 음반이 나오면서 일약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으로 급성장한다. 이 앨범이 출반된 다음달인 75년 10월 스프링스틴은 양대 시사주간지 < 타임 >과 < 뉴스위크 >의 커버스토리를 동시에 장식했다(월드판이 아니라 미국판이긴 했지만). < 타임 >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가수를 ‘록의 새로운 센세이션’이라고 추켜세웠다. 바로 한 해 전인 74년 4월에 존 랜도라는 록 평론가가 보스톤주 케임브리지시의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찰리스라는 조금만 술집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을 보고 보스톤의 주간지 < 리얼 페이퍼 >에 “나는 록큰롤의 미래를 보았다. 그의 이름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라며 극찬의 기사를 쓴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존 랜도는 이 공로로 그 이후 스프링스틴의 매니저 겸 공동 프로듀서가 된다. 이 때까지 그의 논조는 답답한 일상생활에서의 탈출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소재는 자동차, 여자, 거리 불량배 등의 관심사가 많이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78년에 발표한 < 마을 가장자리의 어둠(Darkness on the Edge of Town) >에서부터는 이런 감상적 수준을 벗어나 사회 비판으로 시각을 상향 조정한다. ‘이른 아침 공장의 휘슬이 울리면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는다. 노동, 노동, 노동의 삶! 하루가 저물어 공장의 휘슬이 울리면 남자는 그의 죽음을 안고 이 공장문을 걸어나온다. 누군가 오늘밤 아프게 될 거야. 노동, 노동, 노동의 삷일 뿐이야!’ ‘공장(Factory)’ 나이 30세를 넘긴 80년 스프링스틴은 어느 록 평론가에게 “난 이제 다른 사람이다. 30대가 되면 세상은 다르게 마련이다. 적어도 달라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시작됐던 변화가 이같은 의식 강화로 절정으로 향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의 변화가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80년은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고 ‘힘 있는 미국의 재건’이라는 보수적 슬로건이 내걸렸던 해였다. 하지만 실제 민중의 삶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두드러지고 있었다. 일례로 70년대에 미국 정부를 믿고 월남전에서 싸웠던 파병용사들은 패전의 멍에를 걸머진 채 직장도 못구하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스프링스틴은 자동차, 여자의 소재보다는 미국의 경기 후퇴와 부자에게만 이로운 경제 정책으로 고통스럽고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진 미국 시민의 처지를 다루기 시작했다. ‘난 존스타운 회사의 건축 노동자라는 직업을 얻었지. 그런데 최근 경기 침체로 일이 많지 않았지.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던 것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어. 이젠 기억도 안나. ... 과거 메리와 좋았던 시절이 기억나 날 괴롭히고 있지. 마치 저주처럼 기억들이 날 붙어다녀. 실현되지 않는다면 꿈은 거짓말 아닌가. 아니면 악화된 것 아닌가.’ ‘강(The River)’ 80년 말에 내놓은 음반 < 강 >에 수록된 타이틀 송인데 경기 침체라는 외부적 상황 때문에 아내와 직장을 잃은 어느 노동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2년 뒤인 82년에는 그야말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시각 변화를 결산하는 완결편 < 네브라스카(Nebraska) >가 등장한다. 이 음반에서 그가 그려놓은 미국은 거의 절망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말 마와의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아 랄프는 직업을 구하러 다녔지만 헛수고였지. 그는 집에 돌아와 탱거리와 술에 만취했지. 그리곤 총을 구해 야간근무자를 쏘았고 무법자 쟈니 99가 된 거야. 쟈니는 총을 휘둘러 미치광이처럼 날뛰었지. 그러나 비번의 경찰에 잡혀 수갑이 채워졌지. 법정에서는 주먹다툼이 일어나고 그들은 쟈니의 여자를 질질 끌고나갔지. 그의 어머니는 외쳤어. 판사나리, 내 아이를 이렇게 다루지 말아달라고. 난 정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쟈니99(Johney 99)’ ‘와이오밍의 거친 땅을 횡단하며 난 모든 것을 죽였다오. 난 내가 저지른 행위에 유감이라 말하지 않으리. 사실 재미까지 느꼈지. 재판관은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을 선고했지. 심야의 감방에 내 가슴은 가죽끈이 묶여졌지. 그들은 내가 삶을 영위하기에 부적합하고 긴 허공에 내 영혼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선언했지. 그들은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했지. 그거야, 단지 이 세상의 비천함 때문이야.’ ‘네브라스카’ 전자 악기와 테크노 사운드가 범람하던 그 시절에 난데없이 통기타와 하모니카의 반주로 꾸민 이 이색음반은 이같은 처절한 메시지가 황량함, 암울함, 긴박감 등의 분위기가 흐르는 곡조와 뛰어나게 잘 어우러져 그 전달 수준이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미국내의 거의 모든 음악 평론가가 이 작품을 ‘충격적 걸작’으로 꼽았다. 그는 이 앨범과 관련하여 음악 전문지 < 뮤지션 >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70년대는 무엇보다 우선 ‘사기’가 정당화되어버린 시기였다. 워터게이트를 보라. < 달아나기 위해 태어나 >음반이 ‘가치’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면 < 네브라스카 >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상징하는 ‘가치의 붕괴’를 다룬 작품이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존재감을 상실하는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것이다. 이제 그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사회에 연결시킬 의욕을 갖지 못한다. 그는 정부에 소외되어 있고 직장에 소외되고 있고 가정에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84년 6월에 나온 그의 최대 히트작이자 수작으로 평가받는 < 미국에서 태어나 >음반에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전 앨범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묘사도 더욱 생생하다. ‘조그만 고향의 혼잡 속에 있던 내게 그들은 총을 쥐어주었지. 그리곤 외국 땅으로 날 내보냈고 거기의 황인종을 죽이도록 했지. ... 고향으로 돌아와 제련소에 일자리를 얻으러 갔지. 고용자는 나더러 재향군인회에 가보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 하며 ... 교도소의 그늘 아래서, 제철소의 가스 불꽃 옆에서 난 10년간 땅을 치며 살고 있어. 탈출할 곳이 없어 .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어. 난 미국에서 태어났어. 난 미국에서 태어났어!’ 이 음반의 타이틀 곡이다. 미국 태생이라는 어느 월남전 용사의 반복적 외침은 결코 미국인의 긍지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 정부를 겨냥한 순전한 비아냥이다. 스프링스틴은 이 노래에서 월남전 파병용사의 방황이라는 소재를 내걸어 미국 정부의 민중에 대한 정신적 착취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65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내가 다니던 고교에도 흑백간의 싸움이 수도 없이 많았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지. 토요일밤에 헤드라이트를 켠 두 대의 차가 다가왔어. 뒷좌석에는 총이 있었지. 총성이 울렸어. 시련기가 내 고향을 엄습한 거야. ... 이제 한길에는 회색칠한 창문과 텅빈 상점만이 있어 이곳에 오고 싶은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여. 철길 건너의 방직공장은 문을 닫았고 직공은 이 직업이 이제 내리막길이고 그래서 그들은 네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나의 고향(My Hometown)’ 이 곡 또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식의 고향 찬가가 아니다. 공업지대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중부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한 어느 마을이 겪는 황량한 변화를 그린 노래다. 정치와 경제 정책 실패는 사람만 괴롭힌 것이 아니라 이처럼 고향도 철저히 파괴했다고 보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망과 고통을 다룬, 얼핏 보면 ‘피곤한’ 작품이지만, 이 음반은 아주 잘 먹혀들어갔다. 먹혀들어간 대상은 당시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였다. 젊어서 반전을 외치고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던 그 ‘60년대의 주인공들’은 지금은 나이가 들어 기대의 좌절과 가치의 상실을 절감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메시지는 바로 이같은 베이비붐 세대의 공통정서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월드 와이드 히트였다. 미국에서만 1위가 아니라 딴 나라에서도 < 미국에서 태어나 >음반 열풍이 일어나 영국, 서독, 네덜란드 등에서도 차트 정상을 석권했다. 이 앨범에서는 무려 다섯 곡이 싱글 차트 10위권에 진입했고 80년대 말까지 천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처절하리만큼 비판적인 스프링스틴의 시각이 엉뚱하게 ‘신애국주의’의 물결을 야기시킨 촉매제가 된 것이었다. 노래 제목이 그래서이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나’는 마치 팝송 애국가라도 된 듯 애국심 고취용 노래로 널리 불러졌으며 그의 논조도 단단히 왜곡되어 ‘미국은 지금 고통스런 나라’가 아니라 ‘미국은 지금 좋은 나라’로 받아들여졌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졸지에 ‘우익의 우상’이 돼버렸다. “월남전, 워터게이트 사건, 이란의 인질 사태 등 미국은 우리 민중을 제멋대로 이용하고 조종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그리 됐으니 참 딱한 노릇이었다. 보수적인 글을 쓰기로 유명한 컬럼니스트인 조지 윌이 워싱턴시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84년 9월 스프링스틴의 출신주인 뉴 저지에서 선거 유세를 하면서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낼 목적으로 그의 인기를 ‘허락없이’ 이용했다. “미국의 미래는 무수한 꿈에 기초합니다. 그 미래는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존경하는 한 사람의 노래 속에 담겨 있는 희망의 메시지에 기초합니다. 그 사람은 뉴 저지가 낳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입니다.” 희망의 메시지라니. 실상 절망의 메시지인데 어쩜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브루스는 레이건이 그와 같은 코멘트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심야의 불한당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즉각 반격에 나섰다. 유세 발언이 있고 난 다음달인 10월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레이건 대통령의 TV광고를 봐서 알고 있겠지만 그에 따르면 미국은 아침이다. 그러나 피츠버그는 아침이 아니다. 뉴욕의 125번가 상공도 아침이 아니다. 되레 심야다. 사악한 달이 뜨고 이는 심야다”라며 그다운 맹공을 가했다. 87년에 출판된 스프링스틴의 전기 『영광의 시절』(Glory Days, 그의 히트곡 제목을 땄다)을 집필한 유명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는 거기서 “스프링스틴은 미국의 거대 양당에 속해 있지 않은 점만을 보더라도 극좌파적인 인물”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마시 씨는 자신이 자유민주주의 및 정당정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자신은 ‘체제 바깥에 위치하여 무언가 하고 있는 인물’을 좋아한다면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바로 그런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마시 씨도 인정하듯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이념적인 가수는 결코 아니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이다. 또한 그가 미국의 절망을 노래한다고 해서 애국심이 전혀 없는 그런 반미(反美)주의자는 아니다. “내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미국은 배포가 큰 사랑이 가득찬 나라”라는 그의 공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오히려 그의 절망과 좌절에 대한 노래는 너무 애국적이기에 나올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은 분명 유효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한계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 그룹 듀란듀란의 멤버인 존 테일러는 “스프링스틴은 너무 미국적이어서 선은 넘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난 늘 그에게 실망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스프링스틴은 몇 안되는 언행(言行)일치의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노래뿐 아니라 반핵 운동의 일선에 나섰으며 특히 집없는 사람들, 파업 노동자들, 고통받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에게 번 돈을 희사하는 등 적극적인 자선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어떤 록 평론가는 “팬들이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반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는 성인에라도 추대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돈 욕심이 없어 보인다. 85년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 리 아이아코가가 1천2백만 달러(약 95억원)을 줄 테니 자사 광고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록 뮤직의 신화에 허덕이지 않아 여느 록 가수와 달리 마약은 물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였다. 그는 < 미국에서 태어나 >열풍이 한창이던 85년 미녀 수퍼모델 줄리안 필립스와 결혼했다. 예쁜 처녀를 아내로 삼는 게 뭐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 못가서 둘은 이혼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90년에는 자신이 이끄는 E 스트리트 밴드에서 백업 보컬하는 패티 시알파와 염문에 휩사이더니 결국 애까지 낳았다. 뒤에는 패티 시알파가 “애를 낳아주기까지 했는데 그가 정식 결혼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청빈해 보이고, 스캔들 하나 없는 깨끗한 인물로 보이던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행각이었다. 보스 말고 또 하나 그의 별명이기도 한 ‘미스터 USA’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처럼 ’제가(齊家)‘에 문제점을 노출해서인지 ’치국평천하‘도 차질이 생겨 < 미국에서 태어나 > 다음에 나온 89년 음반 < 사랑의 터널(Tunnel of Love) >은 예전의 반응에 전혀 미치지를 못했다. 92년에 발표한 < 인간적 터치(Human Touch) >와 < 운좋은 마을(Lucky Town) >은 동시에 2장의 음반 발매라는 화제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부진, 그의 퇴조를 실감하게 했다. 스프링스틴은 49년 뉴 저지주의 프리홀드에서 택시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 대해 혐오감을 가졌으며 따라서 외로운 시절을 보냈으며, 열세 살 때즘 본인의 고백대로 기타와 음악에 ‘구원’을 받는다. 그의 음악 생활은 좀더 좋은 직업을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에 빗나간 것이어서 때로 부자간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일했지만 대가는 없었고 고통만이 있었죠. 이제 그는 이 텅빈 방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원망할 것을 찾아요.’ ‘아담이 카인을 길렀어요(Adam raised a Cain)’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록 가수가 되기로 한 그는 대학을 포기한 채 여러 그룹을 전전하면서 실력을 함양한 노력으로 카인의 후예에서 미국의 위대한 록큰롤러가 됐다. 그는 음반 작업에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특히 ‘록 뮤직의 현장성’을 강조, 공연 중심의 활동을 펼치며 또 ‘관객을 공동의 경험 수준으로 이끌 줄 아는 유일한 가수’라는 찬사가 말해주듯 혼신의 정열로 콘서트에 임한다.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그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록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다. 덧붙여 음반 활동을 해온 20년간 한번도 일탈 내지 변절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앞으로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가수이다.
‘음악이 없어진 후에 형벌이 무겁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거짓이 성하게 되었다. 음악을 만들지 않으면 천지의 화기로움을 이룰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산 정약용이 설파한 ‘음악론’이다. 경제위기와 IMF 한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되새길 만한 말이다. 절약과 긴축의 분위기 때문에 ‘없어도 당장은 ... ‘음악이 없어진 후에 형벌이 무겁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거짓이 성하게 되었다. 음악을 만들지 않으면 천지의 화기로움을 이룰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산 정약용이 설파한 ‘음악론’이다. 경제위기와 IMF 한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되새길 만한 말이다. 절약과 긴축의 분위기 때문에 ‘없어도 당장은 괜찮을 듯한’ 문화의 분야 전반이 맨 먼저 희생을 당하고 있다. 이 판국에 누가 한가로이 음악을 듣고 있을 터인가. 일리는 있지만 지나친 음악의 위축은 안될 말이다. 요즘의 상황에 들을 만한 팝송 음반을 하나 소개한다. 독일 태생의 미국 가수 잭슨 브라운의 히트곡 모음집 < The Best Of Jackson Browne >이다. 그는 1978년에 발표된 메들리 곡 ‘로드 아웃/스테이(Load-out/Stay)’로 우리의 올드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차분하면서도 깊은 맛을 전달해주는 이 곡은 라이브의 생동감과 함께 진한 피아노 연주, 데이비드 린들리의 가성 보컬로 듣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 노래는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에 더욱 헌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노래가 지닌 매력은 단연 드높은 서정성이다. 이글스,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 JD 사우더 등 미국 서부지역의 낭만적인 컨트리 록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의 음악은 왠지 쾌활함보다는 우울에 가깝다. 실제로 77년 작품 ‘위선자(Pretender)’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감과 고뇌가 짙게 깔려있다. 또한 노래는 당시 디스코의 소란속에서 천연히 피어났다는 점이다. 비지스의 ‘토요일밤의 열기’가 폭발하고 빌리지 피플이 ‘YMCA’로 목청을 높일 때 그 사이를 비집고 차분함을 바라는 수요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보기 드문 ‘서정성의 질주’는 80년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인기 절정기도 없었지만 슬럼프도 겪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노래 ‘누군가의 연인(Somebody`s baby)’, ‘부드러운 밤(Tender is the night)’은 지치고 흔들리는 청취자의 마음을 쓸어주었다. 이 베스트 앨범은 대표곡을 완벽하게 엮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72년부터 지금까지 주요 히트곡을 총망라하고 있다. ‘반역자 예수(Rebel Jesus)’, ‘다음의 목소리(Next voice you hear)’ 등 신곡 2곡도 실었다. 특히 ‘다음의 목소리’는 이 베스트 모음집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내용은 변화의 암시가 아니라 ‘다음의 목소리도 변함이 없다’는 그의 음악신조를 담아 인상적이다. 잭슨 브라운의 진가가 여기에 있다.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반핵운동에 앞장 서오고 있는 ‘행동파’ 음악인이기도 하다. 그의 서정적인 음악이 결코 상업적 계산의 방편이 아님을 일러주는 단서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들은 감상자를 위무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구두끈을 매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어려운 시점에 더 잘 어울릴 것으로 본다. 경제위기와 문화위축의 상황을 맞아 한편으로 그동안 외면했던 스타일의 음악이 자리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노래 : B.B. King (비비 킹 ,Riley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티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Riley B. King)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19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T. Bone Walker)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19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1952년 ‘Three o’clock blues’, 19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리듬 앤 블루스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19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1969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19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었다.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R&B, 소울 가수 R&B, 소울 가수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 했던 그 아이, 바로 영원한 피아노맨 빌리 조엘(Billy Joel)이다. 빌리 조엘은 1965년부터 에코스(The Echoes), 해슬스(The Hassles), 아틸라(Attila) 등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팝 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허나 당시 하드록, 사이키델릭이 주를 이뤘던 음 세계는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사장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해 저널에 비평을 기고하고 음악적 실패로 인해 마약 센터에 들락거리며 자살을 기도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그를 엄습한 시기였다. 1971년에 빌리 조엘은 솔로 데뷔작 < Cold Spring Harbor >를 내놓으며 복귀식을 치렀다. 발표 직후 가졌던 공연 릴레이는 호평 받았지만 지지부진한 판매고는 여전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L.A.에 새 둥지를 틀었고, 빌 마틴(Bill Martin)이란 가명으로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재기를 꿈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비슷한 시기에 겹경사가 일어났다. 1973년 엘리자베스 웨버와 결혼하며 안정을 찾았고 ’Captin Jack’의 라이브 버전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을 간파한 콜롬비아(Columbia)가 구애의 손길을 보낸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같은 해에 2집 < Piano Man >이 등장했다. ’피아노맨’이라는 별명의 진원지이기도 한 앨범은 빌보드 차트 27위까지 올랐고 타이틀 트랙 역시 싱글 차트 40위권에 안착하며 그에게 처음으로 성공의 단 열매를 맺어주었다. 제이 가일스 밴드(The J. Geils Band), 두비 브라더스(The Doobie Brothers)의 오프닝을 맡아 투어를 돈 뒤, 1974년 말에 내놓은 3집 < Streetlife Serenade >(1974)은 차트 35위를 기록하며 탄탄대로를 열어주는 듯 했다. 허나 4집 < Turnstiles >(1976)는 명곡 ’New York State of Mind’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 차트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제작 전에 프로듀서인 궈시오(Guercio)를 해고하고 아내를 매니저로 기용하는 등, 잡음이 많았던 점이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1977년의 < The Stranger >는 오늘날의 빌리 조엘이 있게 한 명반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미국에서 각광받았던 시티 뮤직을 대폭 수용한 작품은 차트 2위까지 상승하며 단숨에 플래티넘을 따냈고 ’Just the way you are’(3위), ’Monin’ out’(17위), ’Only the good die young’(24위), ’She’s always a woman’(17위)등, 네 곡의 히트작을 쏟아냈다. ’Just the way you are’는 그래미에서 ’Record of the Year’와 ’Song of the Year’, 두 개 부문을 수상하며 비평적 찬사를 안겼다. 6집 < 52nd Street >(1978)도 맹렬한 기세를 이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능가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8주간 1위를 고수하며 한달 만에 200만장을 세일즈했고 ’My life’(3위), ’Big shot’(14위) ’Honesty’(24위)등이 수시로 울려 퍼졌다. 마침내 그는 그토록 소망했던 그래미 ’올해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펑크와 뉴 웨이브의 세상 속으로 과감히 돌진한 < Glass Houses >(1980)에서도 한번 불붙은 열기는 식지 않았다. 급격한 음악적 변화에도 기존 팬들은 쌍수 들어 그를 환영했다. 앨범 차트 6주간 1위, 4곡의 히트송 배출, 그래미 ’Best Rock Vocal Performance, Male’ 부문 수상이 마치 자연스런 수순처럼 보일 정도였다. 1년 뒤, 초기곡들의 라이브 콜렉션인 < Songs in the Attic >(1981)을 발표한 뒤, 빌리 조엘은 이혼과 오토바이 사고를 겪으며 위기의 남자가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삶에 대해 컨셉트 앨범으로 꾸민 야심작 < The Nylon Curtain >(1982)마저 낮은 판매량에 허덕이며 전성 시대가 지난 것 아니냐는 추측성 발언을 낳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과거 사운드로 회귀한 < An Innocent Man >(1983)을 내놓으며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 차트 1위에 오른 ’Tell her about it’을 비롯해, ’Uptown girl’, ’An innocent man’, ’Keeping the faith’ 등이 바톤 터치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MTV 시대를 맞이하며 비디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만난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결혼에 골인했다. 1985년에 중간 결산 차원에서 피아노 맨은 히트곡 모음집 < Greatest Hits, VolumeⅠand VolumeⅡ >을 내놓으며 미국에서만 무려 2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판매량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자 미국인들이 그의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 The Bridge >를 발표하여 성공을 이어나간 빌리 조엘은 1987년, 소련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의 실황을 담은 더블 앨범 < Kohuept(Live In Leningrad) >(1987)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장 결석과 법정 소송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 Storm Front >(1989)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을 선물한 작품이었다.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싱글 ’We didn’t start the fire’가 세계 역사를 훌륭히 그려냈다는 이유로 미국 전역의 고교에 악보가 배포되는 등 화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베스트 앨범에서 숫자로 드러난 미국인들의 애정이 공적으로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퀸시 존스, 자니 캐쉬, 아레사 프랭클린과 함께 1990년부터 1년 간 가졌던 월드 투어로 ’Grammy Living Legend’상을 수상한 빌리 조엘은 1993년 나온 < River of Dreams >(1위)로 순항을 거듭했다. 1996년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이혼한 후, 이 위대한 싱어 송라이터는 20세기 마지막 날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에서 가졌던 공연 결과물 <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 >를 발매하며 새 출발을 암시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히트송 콜렉션인 < The Essential Billy Joel >(2001)로 팝 아티스트로서의 화려했던 시절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빌리 조엘은 클래식 크로스오버 작품인 < Fantasies & Delusions >을 소개하며 클래식 작곡가로서의 야심한 행보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락 기타 연주자, 보컬 락 기타 연주자, 보컬
< 롤링 스톤 >지은 84년 이 그룹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하고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대중주간지 < US >는 85년 “아일랜드에서 온 성난 십자군들이 미국을 산산조각내고 있다”며 그들의 미순회공연을 충격적으로 보도했다. < 타임 >지는 87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그룹이 비틀즈 다음에 랭크되어야 한다고 썼다. 언론의 지적처럼 이 그룹은 실로 ‘80년대 최고의 록 밴드’였다.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 < 롤링 스톤 >지은 84년 이 그룹을 ‘올해의 밴드’로 선정하고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대중주간지 < US >는 85년 “아일랜드에서 온 성난 십자군들이 미국을 산산조각내고 있다”며 그들의 미순회공연을 충격적으로 보도했다. < 타임 >지는 87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이 그룹이 비틀즈 다음에 랭크되어야 한다고 썼다. 언론의 지적처럼 이 그룹은 실로 ‘80년대 최고의 록 밴드’였다.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반 팬들에게 당대 록 그룹 인기서열 1위는 언제나 이들 차지였다. 심지어 “지진이 일어날 만큼 수많은 관객이 운집해 열광하는 그들의 공연을 누가 능가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교황만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얘기도 나왔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4인조 그룹 유투(U2). 그룹명을 고공첩보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이들은 이런 인기 외에 가수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영향력까지 누리고 있다. 아일랜드의 수상 가렛 피처랄드가 이 그룹 리더에게 정부의 실업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그 일례에 속한다. 리드 싱어 보노(Bono)의 원시적 야수성이 번득이는 보컬, 에지(Edge)의 자극적인 기타 연주(그룹 후의 피트 타운센트는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 기타 연주를 포기하고 싶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아담 클레이튼(Adam Clayton)의 베이스, 래리 뮬렌 주니어(Larry Mullen Jr.)의 드럼이 융합되어 토해내는 ‘스트레이트 록큰롤’은 가히 일품이다. 발라드나 댄스곡 일색인 이 시대에 유투의 광포한 록 사운드처럼 팬들 가슴에 불을 당긴 밴드는 없었다. 록 뮤직의 본질인 폭발성과 열정 그리고 현장성의 부재에 갈증난 팬들에게 이들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그렇다고 유투가 이같은 록큰롤에 대한 투신만으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평가받게 된 보다 정확한 이유는 사회현실을 주시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매서운 감시 기능’에 자리한다. 워싱턴 대학의 부총장이자 록 역사가인 데이비드 P. 차트메리 씨는 91년 펴낸 『록킹 인 타임』이란 저서에서 “유투는 록 음악이 60년대에 보여준 ‘비판정신’이 복원되고 있음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실체”라면서 그들의 음악을 저항적이라고 기록했다. 유투 본인들도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주된 이유는 “좋은 노래, 즉 현실적(real)인 노래를 쓴다는 데 있다”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리드 싱어이면서 모든 가사를 쓰고 있는 그룹의 실세 보노(본명 폴 휴즌)는 더 구체적으로 “80년대 사람들은 칵테일 감성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들려나오는 소위 ‘무드음악’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들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세로 음악을 한다.”고 그룹 이념을 밝혔다. 바로 이런 태도가 그들에게 인기 외에 존경을 더해준 것이다. 지난 76년에 결성된 유투는 78년 기네스 맥주회사가 주최한 가요제에서 우승하면서 팝 무대에 공식 진출했다. 상당기간 충전을 거듭한 뒤 80년 첫 앨범 < 소년(Boy) >과 81년 < 10월(October) >을 연이어 출반했으나 비평가들의 찬사만 들었을 뿐 판매는 부진했다. 여기까지 그들은 평범한(물론 나중의 음반과 비교해서) 소재를 다루었으나 이후에는 음악에 정치적 메시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입장 정리를 끝내고 나자 유투는 < 전쟁(War) >, < 잊혀지지 않을 불꽃(The Unforgettable fire) >, < 여호수와 나무(Joshua Tree) >, < 분노의 소리(Rattle and Hum) > 등 걸작을 터뜨리면서 한 번도 현실과 등진, 공허한 상업성의 메아리를 울리지 않았다. 전환점은 82년 10월 북아일랜드의 항구도시 벨파스트에서 가진 공연이었다. 여기서 유투는 역사적인 아일랜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을 관객들에게 선보여 일대 주목을 받았다. 왜곡된 현실의 제문제들을 취급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이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유투의 눈에 걸려든 것은 자신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분단과 전쟁이었다. ‘아이들 발 아래 깔린 깨진 병들, 막다른 골목길에 널린 시체들, 투쟁이 막 시작됐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승리한 자는 누구인가. 참호가 패이는 것은 우리들 가슴 속이지. 어머니의 자식 형제들 누이들이 찢어지고 ...’ 아일랜드 상황을 그린 존 레논의 72년도 노래와 제목이 같은 이 곡에서 유투는 종교의 차이 때문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 끝없이 다투는 것을 두고 언제까지 우리가 레논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느냐며 ‘오늘밤에라도 우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유투의 소원은 고국 아일랜드의 통일이다. 보노는 “하나의 섬인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경계선은 완전한 허위”라고 주장한다. 유투의 눈에 세상은 투쟁과 분열로 혼탁하며 반민주적 상황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문제의 세상’이었다. 이 노래가 수록된 83년의 음반 < 전쟁 >이 시사하듯 세계적 현실은 여러 가지 레벨의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국제간의 정치 분쟁, 핵 지대화, 민권 침해 등 주요 문제들이 이 고공첩보기의 감시를 받는다. ‘서에서 동까지 당신들은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식이야. 야밤의 도둑처럼 당신들은 촛불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거야. .. 매일 매일이 혁명인 거야. 소련, 동독, 런던, 뉴욕, 북경! 배후를 조종하는 앞잡이들이야. 안녕, 안녕, 안녕하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아. 버튼을 누르고 플러그를 당겨. 안녕이야.’ ‘초(Seconds)’ 역시 < 전쟁 >에 실려 있는 이 곡은 핵무기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부서진 등은 천장에 걸리고 깨어진 코는 바닥에 닿아 있지. 난 문 뒤에서 웅얼거리는 침묵에 비명을 지르지. 간수는 말하는 거야. 비상구는 열려 있으니 나가려면 은과 금이 있어야 한다고. .. 이 사슬은 더 이상 날 묶지 못해. 발에 있는 족쇄도 마찬가지야. 죄수는 밖으로, 안에는 자유를! 그들을 풀어주라.’ ‘은과 금(Silver and Gold)’ 요하네스버그 남부에 사는 어느 흑인을 소재로 했다는 이 곡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서슬퍼런 흑인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신랄할 비판이 담겨 있다. 이 노래는 리틀 스티븐의 제창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반대를 호소한 음반 < 선 시티(Sun City) >에 보태기 위해 만든 곡이다. 유투는 특히 인권 탄압에 예민하다. 세계 도처에 행해지고 있는 인권 침해의 현실을 문책하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 깊이 관여하면서 85년, 86년 이를 위한 공연에 잇따라 참여했다. 유투의 팬들은 < 선전 >이라는 잡지를 발행, 독자들로 하여금 국제사면위원회를 대신해 인권을 탄압하는 각국의 정부에 편지를 띄우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유투의 노래 방향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어느 정치 체제나 경제 이데올로기의 입장에는 서있지 않다. 이들의 관심은 어떤 이념의 체제이든 그 국가가 현실정치에서 저지르고 있는 반민주적 요소와 왜곡을 규탄하고 전면적 반성을 촉구하는 데 집중된다. 따라서 60년대와 70년대 록 스타에게서 가끔 나타나던 반체제, 무정부주의, 반종교의 기색은 발견되지 않고 이념과 체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서 운동성이 출발한다. 이들의 음악이 우리의 귀에 다소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그 속에 70년대 중반 영국을 휘몰아쳤던 펑크 사운드가 살아 있는 까닭이다. 유투는 펑크의 소리만 되살린 데 그치지 않고 펑크의 ‘저항 정신’을 함께 복원시켜 저항을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반체제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다시 말해 ‘부정적인’) 옛 펑크와는 저항의 본질을 완전히 차별화했다. 기타주자 에지는 말한다. “펑크는 죽었다.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현재 밀어닥치는 새로운 팝의 소용돌이 속에 펑크는 버팀목으로서 음반 < 전쟁 >이 기획되었다. 우리는 클래시의 초기 주장과 리차드 헬,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를 좋아해왔다. 그러나 우린 분노와 사랑을 동시에 원한다. 우린 프로테스트(저항) 음반을 원하지만 분명히 ‘긍정적인’ 프로테스트 음반을 원한다.” 반종교 또는 반그리스도 주장 또한 이들에게는 ‘큰일날’ 소리다. 이들은 파문을 일으켰던 존 레논의 “우린 예수보다 위대하다”는 발언을 끔찍한 것으로 여긴다. 레논의 음악과 저항 자세는 존경할 만하지만 그가 무종교주의자라는 점은 배격한다.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특히 아일랜드산 가수 중에는 반미감정의 소유자가 적지 않은 편인데, 유투의 경우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탄력적’인 것은 이와 같은 ‘긍정적 비판’ 혹은 ‘비판적 지지’의 자세에서 연유한다. 이들은 < 여호수와 나무 >에 수록된 ‘푸른 하늘에 총탄을(Bullet the Blue Sky)’을 통해 80년대 중미 국가에 행사된 미국의 압력적 개입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악마의 씨를 뿌리고 화염을 일으킨다. 그들이 십자가를 불태우는 것을, 높이 높이 솟구치는 불꽃을 보라. .. 가시덤불의 장미처럼, 로열 플래시의 모든 색깔처럼 그리고 그는 달러 지폐를 낙하시키고 있다. 난 전투기가 아기가 잠든 진흙 오두막집을 가로지르고 조용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본다. .. 벽을 통해 우린 도시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미국이 밖에 있다. 미국이 밖에 있다.’ 그러나 결코 원색적 반미의 기조는 없다. 유투에게 미국은 ‘신의 나라’이며 ‘마음의 땅’이기도 하다. 보노는 87년 < LA 타임즈 >와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한 바 있다. “미국이 특히 중미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악몽인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농부와 인민의 황폐화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난 미국 시민에 대한 증오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존경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미국이 ‘악몽이면서 꿈’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다." 상당수는 이러한 유투의 ‘체제 인정, 현실 지적’의 노선(부연하자면 혁명을 통한 체제변화의 방식이 아닌 개혁에 의한 체제의 수정, 발전을 모색하는 방식)을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론’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것 같다. 87년에 발표된 < 여호수와 나무 >는 영국에서 1백50만 장, 미국에서 4백만 장, 전세계적으로 1천5백만 장이 팔려나가 팬들의 성원이 압도적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들이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미국의 제도권으로부터도 환영받는 것(언론의 그 호의적인 반응을 보라)은 이같은 노선에 힘입은 바 크다. 따라서 일부로부터는 - 당연히 급진적 좌파가 되겠지만 - 이들이 일정한 한계에 머물러, 앞서 지적한 영국의 클래시나 섹스 피스톨즈 같은 펑크 그룹이 보여준 진보성에는 훨씬 못미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유투는 60년대의 혁명정신을 계승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체제의 혁명’이 아니라 ‘사랑의 혁명’이다. 그들이 87년 < 뮤지션 >지에 밝힌 내용을 통해 유투의 혁명관을 분석할 수 있다. “황량하기만 한 시대인 현 80년대에서 우린 60년대를 돌아본다. 그 시대는 정말 ‘재능’과 ‘드높은 이상’ 그리고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욕구’의 저장탱크였다. 나는 그때의 아티스트들처럼 사랑의 혁명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그들의 일부는 사회혁명을 외쳤지만 우리는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혁명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주변사람들과의 인간 관계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의 모든 노래는 결국 ‘사랑을 통한 화합’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적 박애의 분위기다. 이런 탓에 급진성의 함량 미달이라는 혹평 말고도 너무 잘난 척만 일삼고 성직자연한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투는 60년대 히피처럼 사랑만이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 사람이 사랑의 이름으로 왔다네. .. 4월 4일 이른 아침 멤피스의 하늘에 총성이 울렸지. 마침내 자유다! 그들이 당신의 목숨은 앗아갔지. 그러나 당신의 자부심은 빼앗지 못했지. 사랑이라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은. 사랑의 이름 이상의 그 무엇이 있으랴.’ ‘프라이드(Pride in the Name of Love)’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비폭력 민권운동 지도자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유투는 이 곡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 ‘나는 나의 과거를 정복했지. 마침내 미래가 여기 있지. 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네. 내 바로 앞에 있는 파멸들은 곧 나를 놓치게 될 것이야. 사랑은 나를 구조한다네.’ ‘사랑이 나를 구조하네(Love Rescue Me)’ 유투는 래리 뮬렌이 열네 살 때 마운트템플 고교 게시판에 공고를 내 조직한 그룹. 보노나 뮬렌 둘다 모친을 병 또는 사고로 잃어 그 동병상련을 깊은 연대감으로 승화시킨 그룹. 처음에는 악기 하나 소리 하나 제대로 못내다가 절차탁마를 거듭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된 ‘노력지향’의 그룹(보노는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보이지 않아 매니저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천부적 노래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가사는 보노가 쓰지만 작곡은 모든 멤버가 임해 스스로를 ‘네발 달린 테이블’이라고 하는 공동체적 민주주의 그룹. 이들에게 단단한 팀웍이 구축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네 명의 유투 멤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투의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들과 같은 공동체 의식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의 매니저인 폴 맥기니스와 관련한 소식 하나. 맥기니스는 평소 솔직한 발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나있는데, 90년 더블린에서 가진 한 세미나에서 슈퍼스타 폴 매카트니와 피트 타운센트를 크게 꾸짖었다. 이유는 그들이 돈많은 갑부인데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떼돈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순회 공연을 하면서 비자카드의 후원을 잡아 수백만 달러를 챙기고 티켓을 살 때 그 카드만 사용하도록 한 것을 보면 그는 정말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공연할 때 후원이 없으면 남지 않는다고 그가 주장한다는 것은 정말 ‘개똥’ 같은 얘기다. 그처럼 돈많은 사람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그룹 ‘후’가 맥주회사를 공연 후원업체로 잡았을 때 난 무지 당황했다. 피트 타운센트는 회복기의 알콜중독자 아닌가. 이러한 이율배반을 그가 몰랐던 게 아니라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맥기니스는 심지어 그들의 공연 후원잡기 행태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는다는 뜻에서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맹공했다. 매니저부터가 실로 유투적이다! 유투는 88년 < 분노의 소리 >이후 4년간 공백을 갖다가 92년 < 액퉁 베이비(Achtung Baby) >라는 제목의 새 앨범을 내놓았다. 슈퍼스타답게 역시 이 음반은 크게 히트했고 기독교적 사랑을 전체 수록곡을 통해 제창하고 있다. 앞으로 또 음반을 내도 유투는 계속해서 기독교적 사랑을 노래하고 사회현실을 지적할 것이다. 이 작업은 87년의 빅 히트곡 ‘난 아직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의 가사처럼 아마도 끝없는 여로일 터이다. ‘난 가장 높은 산을 올라갔지. 난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지. 난 뛰었고 기었지. 이 도시의 벽을 기어오르기도 했지. 오로지 그대와 함께 하기 위하여. 그러나 난 아직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
멤버 : James Hetfield, Kirk Hammett, Lars Ulrich, Robert Trujillo ‘스래시 메탈의 제왕’메탈리카는 메탈이라는 장르명과 동의어로 불릴 만큼 헤비메탈의 거칠게 질주하는 흐름 속에서 매우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룹이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 극점에 다다른 펑크의 애티튜드와 1980년대 초반 전세계를 진동시킨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흐름, 즉 NWOBHM(Ne... 멤버 : James Hetfield, Kirk Hammett, Lars Ulrich, Robert Trujillo

‘스래시 메탈의 제왕’메탈리카는 메탈이라는 장르명과 동의어로 불릴 만큼 헤비메탈의 거칠게 질주하는 흐름 속에서 매우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룹이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 극점에 다다른 펑크의 애티튜드와 1980년대 초반 전세계를 진동시킨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흐름, 즉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음악적 자양분을 받고 음지에서 등장한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계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슬레이어(Slayer), 메가데스(Megadeth), 앤스랙스(Anthrax) 등과 함께 ‘스래시 메탈의 사인방’으로 불리며 1980년대 헤비메탈 네트워크를 점령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한 그들의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사운드는 스래시 메탈의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등장한 데스 메탈, 블랙 메탈 등 익스트림 메탈 계열의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펑크 세례를 받은 직선적인 기타 리프, 커다란 울림을 자랑하는 투 베이스 드럼과 파워 베이스, 포효하는 보컬은 헤비메탈의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메탈리카가 위대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진지함’에 있다. 그들은 무겁고 심각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앞세워 기존의 헤비메탈이 폭력적이고 그루피를 양산해내는 가벼운 음악이라는 이미지를 깨트리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이는 1980년대 주류 미디어(MTV)와 동반자 관계를 맺고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예쁘장한 팝 메탈에 대한 얼터너티브이기도 했다. 때문에 메탈리카는 헤비메탈 키드들은 물론이고, 음악팬들 나아가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받는 흔치 않는 메탈 그룹이다. 메탈리카는 1981년 덴마크 출신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Lars Ulrich)에 의해 미국 LA에서 결성된 밴드. 울리히는 NWOBHM의 간판 밴드인 모터헤드(Mortoehead)의 팬클럽을 운영하면서 보다 강력하고 기운 센 사운드를 분출하는 그룹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제임스 헷필드(James Hetfield, 보컬·기타), 로이드 그랜트(Lloyd Grant, 기타) 등과 함께 메탈리카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같은 해 데모 음반 < Hit The Lights >의 녹음직후 로이드가 팀을 떠나자 그 자리에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을 끌어들였고, 추가로 베이시스트 론 매거브니(Ron McGovney)를 영입하여 밴드의 첫 진용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데모 테이프의 녹음과 클럽 등지의 공연 등을 통해 멤버들간의 실력차가 확연히 드러나자 메탈리카는 론 매거브니와 데이브 머스테인을 퇴출시키고 클리프 버튼(Cliff Burton)과 커크 해밋(Kirk Hammett)을 차례로 맞아들였다. 그룹에서 쫓겨난 데이브 머스테인이 ‘타도! 메탈리카’를 외치며 메가데스(Megadeth)를 조직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완벽한 라인업을 갖춘 메탈리카는 1983년 데뷔작 < Kill ’Em All >, 1년 뒤인 1984년 소포모어 앨범 < Ride The Lightning >을 발표하며 스래시 메탈의 탄생을 고했다. 이 작품들은 비록 발매 당시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현재 하드코어 펑크와 NWOBHM의 조우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메탈리카의 고전으로 기록되어진다. 앞 선 두 장의 음반이 스래시 메탈의 초석을 다졌다면, 1986년 내놓은 3집 < Master Of Puppets >는 스래시 메탈의 완벽한 정의를 내린 작품이었다. 물샐틈없이 꽉 짜인 연주, 대곡 지향적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곡 구성, 사운드의 거침없는 쿵쿵거림은 스래시 메탈을 넘어서 헤비메탈 역사의 절정이었다. 라디오 전파를 탈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미국 차트 29위, 영국 차트 41위에 랭크되며 단숨에 3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부터 메탈리카는 음악성과 상업성을 두루 획득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1986년 9월 27일 스웨덴에서 버스사고로 인해 사망한 클리프 버튼을 대신에 정식 멤버로 제이슨 뉴스테드(Jason Newsted)가 가세하여 만든 1988년 4집 < ...And Justice for All >(미국 6위), 팝 감각을 대폭 수용한 1991년 5집 < Metallica >(미국 1위) 등이 연이어 메인스트림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에서 ‘One’, ‘Enter sandman’, ‘The unforgiven’, ‘Nothing else matters’등의 인기곡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그러나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 공개한 1996년 6집 < Load >에서 깜짝 놀랄만한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 음악계의 트렌드였던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를 받아들인 것이다. 밴드의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해 한편에서는 메탈리카가 메탈을 버렸다며 혹평을 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사운드와의 조화로 더욱 발전된 메탈리카로 재탄생했다며 호평을 하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허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밴드의 위력을 뽐냈고, 1년 뒤에 내놓은 < Load >의 클론 7집 < Reload > 역시 차트 1위에 우뚝 올라섰다. 이 같은 그들의 궤도 이탈은 얼터너티브 록에 그치지 않고 1999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라이브 앨범 < S&M >을 내놓으며 클래식과의 크로스오버로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 별다른 기복 없이 꾸준히 나아가던 메탈리카의 음악길에 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상태다. 지난 1월 베이시스트 제이슨 뉴스테드가 갑작스레 탈퇴 선언을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라고 하지만, 사실 밴드 멤버들간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음이 여러 외지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때문에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내년 초에 선보일 그들의 새 앨범도 예정대로 나올지 확실치 않아 보인다. 앞으로 메탈리카가 얼마만큼 멤버들간에 신뢰성을 회복하느냐가 그들이 영원한 메탈의 지존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러시(Rush)는 1968년에 결성되어 30여년간 자신들만의 확고한 음악 영역을 구축하며 성공신화를 일구어온 캐나다의 국보급 3인조 록 그룹이다. 러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꾸준함과 결속력 일 것이다. 러시는 1973년의 데뷔앨범< Rush >부터 2002년의 < Vapor Trail >까지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23장)이 미국에서 골드레코드를 획득했을 정도로 슬럼프 없이 인기리에 활동 해왔... 러시(Rush)는 1968년에 결성되어 30여년간 자신들만의 확고한 음악 영역을 구축하며 성공신화를 일구어온 캐나다의 국보급 3인조 록 그룹이다. 러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꾸준함과 결속력 일 것이다. 러시는 1973년의 데뷔앨범< Rush >부터 2002년의 < Vapor Trail >까지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23장)이 미국에서 골드레코드를 획득했을 정도로 슬럼프 없이 인기리에 활동 해왔으며, 그룹 정립기인 1974년에 단 한차례 멤버 교체가 있었을 뿐 20여년간 탄탄한 팀웍을 유지하는 놀라운 결속력을 보여 왔다. 이런 러시의 역사는 대중음악계 전반을 통틀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진기록이자 귀감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는 대중들 뿐만 아니라 뮤지션들에게도 존경받는 밴드로 드림 씨어터(Dream Theater)등 후배 밴드들에게 영향을 미쳐 프로그레시브 메탈이라는 장르를 여는 데 결정적인 키워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혹자는 러시를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러시의 음악 팔레트는 보다 넓다. 이들은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기반으로 음악적 목표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이들의 음악을 유연하게 변형, 업데이트하여 ‘러시사운드’라고 할 만큼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음악세계를 펼쳐보였다. 1968년 알렉스 라이프슨(Alex Lifeson, 기타), 게디 리(Geddy Lee, 보컬, 베이스) 그리고, 존 럿지(John Rutsey, 드럼)의 라인업으로 토론토에서 그룹을 결성한 이들은, 클럽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73년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토론토 공연에서 오프닝 밴드로 출연하여 뛰어난 연주실력을 선보이면서 지명도를 획득했다. 이를 계기로 메이저 레이블인 머큐리(Mercury)사와 계약을 맺은 이들은 1974년에 앨범 < Rush >(미국 105위)를 공개하면서 데뷔하게 되었다. 러시의 데뷔 앨범은 ’Working man’등의 트랙들에서 재기 넘치는 비전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게디 리의 보컬을 비롯하여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영향을 곳곳에서 드러내는 등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문제로 탈퇴한 드러머 존 럿지의 후임으로 닐 퍼트(Neil Peart)를 가세시키면서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닐 퍼트는 탁월한 박자감각과 창작력으로 러시 사운드의 뼈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향후 그룹의 가사를 전담하여 초현실적인 가사로 그룹의 방향 추 역할을 했다. 닐 퍼트의 가세로 다음 앨범들인 < Fly By Night >(1975년, 미국 113위), < Caress Of Steel >(1975년, 미국 148위)에서 발전된 음악성을 선보인 이들은 1976년 < 2112 >(미국 61위)를 발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닐 퍼트의 SF적 상상력이 깃든 가사와 뮤지컬적인 구성이 결합되어 프로그레시브 메탈이라는 원형을 제공한 걸작이었으며 그룹에게 첫 플레티넘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동년 발표한 실황음반 < All The World’s A Stage >(미국 40위)으로 뛰어난 라이브 솜씨를 알린 이들은 < A Farewell To Kings >(1977년, 미국 33위, 영국 22위), < Hemispheres >(1978년, 미국 47위)로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초극점을 실험했다. 러시의 마니아들에게 현재까지도 마스터 피스로 손꼽히는 ’Xanadu’, ’Cygnus X-1’, ’La villa strangiato’등 대곡 구성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명곡들이 이시기에 탄생되었다. 1980년을 맞이하면서 그룹의 음악은 약간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데, ’The spirit of radio’(미국 51위, 영국 13위)를 히트시킨< Permanent Waves >(1980년, 미국 4위, 영국 3위)는 그 신호탄이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구성미학은 유지하면서도 장황할 정도로 긴 편성의 곡들이 많았던 전작들에 비해 많이 간결해졌다. 이런 경향은 다음앨범인 < Moving Pictures >(1981년, 미국 3위, 영국 3위)에서 보다 명확해졌다. ’Tom sawyer(미국 44위, 영국 25위)’, ’Limelight(미국 55위)’등 싱글 곡을 히트시키기도 했던 이 앨범은 비평가와 팬들 모두에게 환대받았다. 실황앨범 < Exit...Stage Left >(1981년, 미국10위, 영국6위)로 화려했던 초기사운드를 정리한 이들은 ’New world man’(미국 21위, 영국 41위)을 히트시킨 < Signals >(1982년, 미국 10위, 영국 3위)를 공개하여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했다. 날카로운 고음역의 보컬을 자제하고 키보드가 비중이 커졌고 대곡구성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변화는 공격적인 사운드를 원했던 러시 마니아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팬층의 대폭적인 교체를 야기했다. 러시는 단점을 수정, 보완해가면서 < Grace Under Pressure >(1984년, 미국 10위, 영국 5위), < Power Windows >(1985년, 미국 10위, 영국 9위), < Hold Your Fire >(1987년, 미국 13위, 영국 10위)를 연이어 히트 시켰으며, 이 앨범들에서 ’Distant early warning’, ’The big money’(미국 45위, 영국 46위), ’Prime mover’(영국 43위)등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러시를 정리하는 실황음반 < A Show Of Hands >(1989년, 미국 21위, 영국 12위)로 또 한 차례의 골드레코드를 따낸 이들은 1989년 12월 < Presto >(미국 16위, 영국 27위)를 발표, 1990년대를 맞이할 채비를 한다. 디스토션을 좀더 정갈하게 다듬고 어쿠스틱한 곡들로 업데이트 한 이들은 얼터너티브 록과 랩 등 트랜드를 반영하며 공개한 < Roll The Bones >(1991년, 미국 3위, 영국 10위), < Counterparts >(1993년, 미국 2위, 영국 14위), < Test For Echo >(1996년, 미국 5위, 영국 25위)를 연속 베스트셀러화 시켰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러시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드러머 닐 퍼트에게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 1996년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그는, 슬픔이 채 가시기도전인 1998년에 아내가 폐암에 걸려 사망했다. 러시 트라이앵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던 닐 퍼트가 흔들리면서 그룹에도 먹구름이 드리웠지만 멤버 교체나 해체 없이 휴지기를 가지며 재충전한 이들은 2002년, 17번째 스튜디오 앨범 < Vapor Trails >를 공개하였다. 인더스트리얼과 하드코어 작풍이 가미된 새로운 음악성으로 다시 한번 팬들을 놀라게 한 이 앨범은 발표되자마자 앨범 차트 6위를 기록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3년에는 무려 4만명이 운집한 브라질의 리오에서 펼쳐진 실황을 담은 < Rush In Rio >를 발표, 건재를 과시했다. 30곡이 수록된 앨범에는 ’Working man’, ’2112’등의 초기곡과 ’Tom sawyer’ 같은 중반기곡 ’Bravado’같은 후기 곡들이 어우러져 러시의 30년 역사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입증했다.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 지난 1979년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시작하는 ‘I want you to want me’의 라이브 버전은 그룹 창단 여섯 돌을 맞이하는 칩 트릭(Cheap Trick)에겐 고대하던 성공의 축포였다. 1973년의 공식적인 결성 이후 6년 동안 년(年) 200회 이상의 초인적인 공연을 강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 전미차트 7위에 오르는 이 곡의 차트정복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칩 트릭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3년 미국의 일리노이즈에서 결성된 4인조 팝 록 밴드 칩 트릭의 뿌리는 기타리스트 릭 닐슨(Rick Nielsen)과 베이시스트 톰 피터슨(Tom Petersson)이 1960년대 후반에 결성한 퓨즈(Fuse)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 현재의 이름 칩 트릭으로 개명하고 번 E. 카를로스(Bun E. Carlos)와 랜디 호건(Randy Hogan)을 각각 드러머와 보컬리스트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자 공동 리더인 릭과 톰은 팀의 프론트를 랜디 호건에서 미소년의 외모를 소유한 전직 포크 싱어 로빈 잰더(Robin Zander)로 전격 교체하고 비상을 준비한다. 1977년에 공개된 역사적인 데뷔 앨범 < Cheap Trick >은 비록 싱글 히트곡은 없었지만 비틀스에게서 물려받은 확실한 선율 감각과 더 후(The Who)로부터 전수 받은 듯한 파워풀한 연주가 유머러스한 가사와 앙상블을 이뤄 이들의 재능이 꿈틀대고 있음을 내비친 작품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 In Color >에서는 2년 뒤 공연 실황 버전으로 차트를 강타하게 될 ‘I want you to want me’가 온전한 스튜디오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8년에 발표된 < Heaven Tonight >도 가능성을 재확인하면서 이들에게 첫 번째 싱글 히트곡 ‘Surrender’(62위)’를 제공했다. 펑크적인 기타 백킹 연주와 팝적인 멜로디가 찰떡 궁합을 과시한 이 곡은 전형적인 칩 트릭 사운드를 구현한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이다. 그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보단 태평양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로빈 잰더의 잘생긴 외모와 귀를 슬슬 잡아당기는 자연스런 멜로디의 매력에 빠진 일본 소녀들은 칩 트릭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8년 4월, 이들은 일본의 그 유명한 공연장인 무도관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고, 그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음반이 바로 록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 Live At Budokan >이다. 실은 이 앨범도 일본음반자본이 지원해 탄생되었다. 이전의 어떤 음반 못지 않게 화끈한 연주와 후끈 달아오른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한 이 앨범에서 ‘I want you to want me’와 1950년대 흑인 로큰롤 스타 팻츠 도미노(Fats Domino)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Ain’t that a shame’은 싱글로 커트되어 각각 7위와 35위를 기록하면서 일본, 미국,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을 풍미한 버블검 사운드를 표현한 ‘I want you to want me’는 그 앙증맞은 후렴구 때문에 지금까지도 칩 트릭을 정의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이 LP는 라이브 실황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올랐고,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상업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모두를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인 1979년, 싱글 ‘Voices(32위)’와 ‘Dream police(26위)’가 들어 있는 다음 앨범 < Dream Police >로 확실하게 스타급 밴드의 반열에 올랐지만 비틀스와 아메리카(America)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초빙해 제작한 1980년 < All Shook Up >은 과욕 탓인지 제1의 프로듀서와 최고 인기 밴드의 상봉은 융화되지 못한 채 어색한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앨범 후 톰 피터슨은 그룹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존 브랜트(Jon Brant)를 영입해 ‘If you want my love(45위)’와 ‘She’s tight(65위)’가 싱글 차트에 입적한 < One On One >을 발표하면서 팝의 시대인 1980년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무렵 톰이 없는 칩 트릭은 예전과 같은 음악을 뽑아 내지 못한 채 힘겨움을 드러냈다. 상생(相生)의 필요성을 절감한 칩 트릭과 피터슨이 재회한 것은 1988년에 공개한 < Lap Of Luxury > 때였다.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영광을 안겨 준 발라드 ‘The Flame’과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원곡을 커버한 ‘Don’t be cruel(4위)’, ‘Ghost town(33위), ’Never had a lot to lose(75위) 등을 4장의 싱글을 토해낸 이 음반으로 칩 트릭은 1980년대의 부진을 걷어내고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경쾌한 분위기의 ‘Don’t be cruel’이 애청되면서 다시 일어선 칩 트릭의 인기를 주도했다. 1988년 말에는 로빈 잰더가 하트(Heart)의 보컬리스트 앤 윌슨(Ann Wilson)과 함께 멜 깁슨과 미셸 파이퍼가 주연한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곡 ‘Surrender to me’를 불러 6위에 랭크 시키기도 했다. 곡은 우리에게 ‘Now and forever’와 ‘Right here waiting’, ‘Endless summer night’ 등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썼다. 이들의 음악은 1980년대에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와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그룹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전수했다. 후배 뮤지션들은 인터뷰를 통해 “칩 트릭의 힘이 넘치는 기타 리프와 사운드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며 무한한 존경과 신임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는 자신들의 오프닝 무대를 칩 트릭에게 부탁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팝 시대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 포 파이러스(Porno for Pyros)의 리더인 페리 파렐(Perry Farrell)이 주창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페스티벌의 대명사 롤라팔루자에 참여한 바 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다시 한번 음악적 침체기를 맞이한 칩 트릭은 현재까지 새로운 음반 제작보다는 데뷔 초기처럼 ‘최고의 라이브 밴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줄기찬 공연 활동을 전개하고있다. 칩 트릭의 노래들은 이름처럼 결코 값싸지도 않으며 속임수 또한 아니다. 저항성과 함께 록의 양 날개 중 다른 날개인 ‘대중성’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극점에 위치하는 그룹이다. 앞으로도 이들만큼 ‘완벽한 기타 주도의 팝 록 사운드’를 구현한 그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시카고(Chicago)는 1960년대를 보내며 다양한 장르로의 분화를 시작한 록이 잉태시킨 장르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재즈 록’의 선두그룹이다. 동시대 활약한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And Tears)와 더불어 재즈 록의 대중화를 주도한 그룹으로서 30여 년 동안 12장의 톱10 앨범과 3곡의 1위 곡을 기록, 미국 팝을 대표하는 밴드로 역사를 장식한다. 1967년 클래식, 록, 재... 시카고(Chicago)는 1960년대를 보내며 다양한 장르로의 분화를 시작한 록이 잉태시킨 장르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재즈 록’의 선두그룹이다. 동시대 활약한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And Tears)와 더불어 재즈 록의 대중화를 주도한 그룹으로서 30여 년 동안 12장의 톱10 앨범과 3곡의 1위 곡을 기록, 미국 팝을 대표하는 밴드로 역사를 장식한다. 1967년 클래식, 록, 재즈 등 서로 다른 음악적 배경을 가진 테리 캐스(Terry Kath, 기타 보컬), 피터 세테라(Peter Cetera, 베이스 보컬), 로버트 램(Robert Lamm, 키보드 보컬), 월터 패러자이더(Walter Parazaider, 색소폰), 다니엘 세러핀(Daniel Seraphine, 드럼), 제임스 팬커(James Pankow, 트롬본), 리 러프네인(Lee Loughnane, 트럼펫) 등 7인조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출발 당시 그룹의 이름은 시카고 트랜시트 오소리티(Chicago Transit Authority)였으며, 같은 시기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의 프로듀서를 동시에 맡았던 제임스 구에르치오(James Guercio)에 의해 결성되었다. 긴 이름을 쳐내고 시카고를 개명한 이들은 69년 데뷔앨범 < Chicago Transit Authority >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큰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1970년 발표한 2집 < II >(이들은 1978년 전까지 앨범제목을 모두 숫자로 했다)에서 ‘Make me smile(9위)’, ‘25 or 6 to 4(4위)’ 그리고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7위)’가 연이어 히트하면서 스타그룹으로 비상한다. 특히 싱글히트행진을 점화시킨 ‘Make me smile’의 뒷면 곡이었다가 1971년 ‘Beginnings(7위)’와 양면 싱글을 이룬 ‘Colour my world’는 이후 올타임 리퀘스트로 사랑 받았으며 이어 골드를 획득한 1972년의 ’Saturday in the park(3위)’과 이듬해 10위에 오른 ‘Feelin’ stronger everyday’와 4위를 차지한 ‘Just you’n’ me’로 최고의 재즈 록 밴드로서 위상을 굳힌다. 하지만 1974년 ‘Wishin’ you were here’, 1976년 그룹 최초로 차트 정상을 밟은 ‘If you leave me now’와 같은 피터 세테라의 보컬이 강조된 곡들이 히트하면서 그룹의 음악은 변화를 예고했다. 1977년 4위에 오른 ‘Baby, what a big surprise’를 끝으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이어가던 이들은 프로듀서로서 10년여를 함께 한 제임스 구에르치오와 결별하고 새 프로듀서를 맞이한다. 바로 현재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는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였다. 그는 그룹의 16번째 정규앨범을 맡아 과감한 변신을 시도, 피터 세테라의 보컬 즉 감성적인 선율을 부각했으며 기타와 키보드 위주로 사운드의 틀을 변형했다. 재즈와 록의 균형에서 록의 비중을 높인 셈이었고 이후 시카고는 완연한 팝 그룹으로 재탄생한다. 1982년 넘버 원의 영광을 안겨준 16집 수록곡 ’Hard to say I’m sorry’로 발진된 인기 퍼레이드는 1984년 17집의 ’Stay the night’ 16위, ’Hard habit to break’ 3위, ’You’re the inspiration’ 3위, ’Along comes a woman’ 14위의 연쇄 히트를 낳았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카고는 1985년 그룹의 간판 보컬이던 피터 세테라가 솔로로 독립하면서 중대 위기를 맞는 듯 했다. 붕괴설까지 나돌았지만 시카고는 새로 맞아들인 보컬 제이슨 셰프(Jason Scheff)과 함께 안정을 찾아 1986년 ’Will you still love me’ 3위, 1988년 ’Look away’ 1위, 1989년 ‘You’re not alone’ 10위, 1990년 ‘What kind of man would I be?’ 5위로 히트행진을 계속해갔다. 1990년 20번째 앨범을 발라드 모음집으로 꾸민 이들은 이듬해 21집을 발표한 이래 긴 공백기를 가지며 히트선상에서 퇴각한다. 투어 위주의 활동을 벌이던 이들은 1997년과 1998년 결성 30주년을 기념하는 두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며,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 레니 크레비츠(Lenny Kravitz),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 등 쟁쟁한 후배뮤지션들과 작업한 신곡들을 선보였다.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견지에서 설명되기 시작했다.’ 라는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의 주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연스레 뒤따른 것은 ’장르의 세분화’였다. 특히 록 신에서는 하드 록 혹은 헤비메탈의 급격한 성장세가 도드라졌다. 1960년대 말부터 꽃을 피웠던 하드 록 사운드가 젊은 혈기의 대변자임을 자청, 록의 메인 장르로 우뚝 올라섰던 것. 바로 수많은 밴드들이 자웅을 겨뤘던 록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개막이었다. 그 중에서도 딥 퍼플은 ’소리의 볼륨’에 있어서 절대 강자였다. 1968년 영국 허트포드(Hertford)에서 결성된 이 하드 록 제왕은 한때 기네스 북 공인의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그룹’임을 뽐낼 만큼 열혈 헤드뱅어들을 휘하로 집결시켰다. 비록 월드 마케팅에서는 레드 제플린에 비해 뒤졌지만 적어도 국내와 일본에서만큼은 그들이 인기 넘버원이었다. 일례로 밴드의 시그니처 송이자 딥 퍼플이 오프닝을 섰던 스위스 몬트뢰 빌딩에서의 프랭크 자파 공연 당시의 화재를 보며 작곡한 ’Smoke on the water’는 록을 알기 위한 통과의례로 변함 없이 극빈 대접을 받고 있다. 또한 딥 퍼플은 기수로 구분될 만큼 잦은 멤버 교체로 유명했는데 명 기타리스트이자 리더 격이었던 리치 블랙모어의 독선이 그 주된 이유였다. 최초 그룹은 존 로드, 닉 심퍼, 리치 블랙모어, 로드 에반스, 이언 페이스의 라인업으로 출항의 닻을 올렸다. 허나 처녀작 < Shades of Deep Purple >(1968), 소포모어 음반 < Deep Purple >(1969), 3집 < The Book of Taliesyn >(1969) 등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듯 그들만의 캐릭터가 명확히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수록곡 대부분이 조 사우스(Joe South)의 ’Hush’(빌보드 4위)와 ’Hey Joe’,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Kentucky woman’(38위), 비틀즈의 ’Exposition/We can make it out’, 팝 클래식 ’River deep-Mountain high’(53위) 등, 리메이크로 채워져 있다는 데서 잘 파악된다. ’April’과 ’Anthem’ 등, 존 로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클래시컬한 넘버들 역시 별다른 피드백 효과를 얻지 못했다. 같은 해 로드 에반스와 닉 심퍼가 팀을 등지고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새로이 투입되면서 딥 퍼플의 황금 시대가 비로소 개막되었다. 권력의 축이 존 로드에서 리치 블랙모어에게로 옮겨간 것 또한 이 즈음이었다. 리치 블랙모어의 진두지휘 아래 그룹은 막강한 하드 록 사운드를 내뿜기 시작했다. 존 로드 작곡의 ’Concerto Group and Orchestra’를 기초로 완성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작 < Concerto Group and Orchestra >(1969) 이후에 발표한 일련의 앨범들이 이를 잘 대변한다. ’Child in time’, ’Speed king’ 등이 사랑 받았던 1970년의 < Deep Purple in Rock >, ’Strange kind of woman’, ’Black night’(66위) 등이 히트했던 빌보드 앨범 차트 32위의 < Fireball >(1971), 불멸의 명곡 ’Smoke on the water’(4위)와 ’Highway star’를 담고있는 1972년의 마스터피스 < Machine Head >(7위) 등이 그것들이다. 실황 작품인 < Made In Japan >(6위, 1972)은 각종 라이브 명반 선정에 빠지지 않고 등재될 만큼 동종(同種) 품목 중 발군임을 뽐냈다. 허나 1973년의 < Who Do You Think We Are >를 끝으로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탈퇴하면서 2기는 막을 고했다.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를 맞이하며 시작점을 찍은 3기 역시 찬란한 성과를 이어나갔다. 숨겨진 보석 ’Burn’이 수록된 동명 타이틀의 < Burn >(9위, 1974), 같은 해의 < Stormbringer >(20위)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던 것. 곡들 중, 후자에 실린 ’Soldier of fortune’은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바 있다. 여러 발라드 선곡집에 현재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골든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바로 리치 블랙모어가 레인보우(Rainbow)를 결성, 밴드를 떠남으로써 딥 퍼플은 좌초의 위기에 몰렸지만, 천재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Tommy Bolin, 1976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이 그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었다. 그의 음악적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재즈풍의 음반 < Come Taste The Band >가 이 시기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헤비 메탈 지향성과 삐걱 화음을 자아내면서 딥 퍼플은 1976년 영국 투어를 끝마친 후 휴지기에 들어갔다. 밴드가 끊임없는 재 결합설에 부응하며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편 때는 1984년. 리치 블랙모어, 존 로드, 이언 길런, 로저 글로버, 이언 페이스의 드림 팀으로 구성된 그들은 < Perfect Stranger >(1984), < The House of Blue Light >(1987) 등을 내놓으며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이언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의 갈등으로 이언 길런 대신 조 린 터너를 보컬로 기용했던 < Slaves and Masters >(1990)를 기점으로 그룹의 인기 곡선은 완연한 하향세를 그렸다. 이언 길런을 재 수혈해 녹음했던 < The Battle Rages On >(1992)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리치 블랙모어가 또 다시 굿바이를 선언, 밴드는 결국 타이타닉 호의 운명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컨트리 록 기타의 달인 스티브 모스를 후임으로 낙점하면서 그룹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나갔다. 통산 16집인 1996년작 < Purpendicular >, 17집인 < Abandon > 등으로 호평 받았던 딥 퍼플은 국내에서 가졌던 몇 차례의 공연을 포함, 지금도 여러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밴드 : Joan Jett And The Blackhearts (조안 제트 앤 더 블랙허츠)
밴드 : Journey (저니 (락 밴드))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저니는 1980년대 초, 중반을 강타했던 록 그룹이다. 하드록, 재즈록 밴드로 출발했던 저니는 미성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페리(Steve Perry)를 영입하면서 팀컬러를 팝 록으로 완전히 전환한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어서 그 변화가 처음으로 나타난 앨범인 < Evolution >부터 이들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수백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는 빅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멤버들의 역량이 집대성된 1981년작 < Escape >는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하며 저니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음반에서만 ‘Open arms’(후에 머라이어 캐리가 리메이크), ‘Don''t stop believin''’, ‘Who''s crying now’등 톱 텐 싱글이 3개가 쏟아졌다. 이들은 곧 동시대의 포리너(Foreigner), REO 스피드웨건(REO Speedwagon)등과 함께 성인 취향의 록(AOR)과 발라드를 가장 잘 만드는 팀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세계인들을 열광시키며 연이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인 저니는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Santana)에서 활약하던 두 청년 닐 숀(Neal Schon)과 그렉 롤리(Greg Rolie)가 손을 잡으면서 출범했다. 여러 뮤지션들을 영입해 록 밴드의 모양을 갖춘 저니는 곧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며 단번에 씬의 실력파 그룹으로 각광받았다. 달콤한 멜로디보다 청자의 예측을 거부하는 굴곡이 심한 리듬과 재기 발랄한 솔로 파트를 강조한 저니의 초창기 작품들은 다분히 매니아 취향이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서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데뷔작 < Journey >에서 < Look Into The Future >, < Next >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들은 다소 거칠지만 록의 원시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곡들로 넘쳐 났다. 저니의 중, 후반기 사운드는 아련한 키보드를 축으로 선율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가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어필한 시기였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가지고 점층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극적인 구성이 밴드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고혹적이고도 애절한 보이스를 지닌 스티브 페리는 그 구성에 꼭 맞는 보컬리스트였고 완벽한 시스템을 장비한 밴드는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던 싱글 ‘Wheel in the sky’가 수록된 앨범 < Infinity >는 첫 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고, 이어 < Evolution >부터 < Frontiers >에 이르는 멈추지 않는 성공가도가 열리게 되었다. 저니의 포근한 록은 여러 세대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샘솟던 그들의 창작력도 이후 둔화되기 시작했고, 멤버들의 빈번한 과외 활동까지 겹치면서 저니는 결국 1986년 < Raised On Radio >를 마지막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다. 해산 이후 밴드 사운드의 핵이였던 닐 숀은 배드 잉글리시(Bad English)를 결성해 ‘When I see you smile’, ‘Price of love’라는 히트 싱글들을 제조해 냈고, 드러머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는 자신의 전공인 재즈로 돌아갔다. 싱어 스티브 페리 역시 앨범들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캐리어를 다져 나갔다.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각자 개인 플레이에 열심이던 멤버들은 정확히 해체 10년이 되는 1996년 < Trial By Fire >로 다시 뭉쳤고, 차트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 스티브는 결국 투어 도중에 이별을 선언했고, 새롭게 정비된 저니는 2001년 통산 11번째 음반 < Arrival >을 내놓으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저니는 팝 전성시대의 화사함 속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던 그룹이다. 록에 이유모를 부담감을 느끼는 이들마저도 살며시 보듬어 안았던 이 매력적인 밴드는 앞으로도 ‘편안한 록’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아직 남아 있을 팬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펄 잼(Pearl Jam)은 극도로 상업화되고 겉멋에 좌우되는 1980년대 팝에 ‘분노한 젊은이들’의 극단적 음악조치라고 할 그런지와 얼터너티브 록을 대표하는 검투사격 그룹이다. 그들은 너바나와 함께 흐리고 비가 잦은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시애틀에서 발화한 이 반격의 X세대 록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며 시대를 갈랐다. 하지만 < Nevermind >에 조금 늦게 공개된 펄 잼의 데뷔작 < Ten >은 당시 판매량과 ... 펄 잼(Pearl Jam)은 극도로 상업화되고 겉멋에 좌우되는 1980년대 팝에 ‘분노한 젊은이들’의 극단적 음악조치라고 할 그런지와 얼터너티브 록을 대표하는 검투사격 그룹이다. 그들은 너바나와 함께 흐리고 비가 잦은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시애틀에서 발화한 이 반격의 X세대 록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며 시대를 갈랐다. 하지만 < Nevermind >에 조금 늦게 공개된 펄 잼의 데뷔작 < Ten >은 당시 판매량과 인기에서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치와 역사적 위상에서는 밀려났다. 이른바 ‘2인자 콤플렉스’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런지 1세대 밴드인 마더 러브 본(Mother Love Bone)의 보컬리스트 앤드루 우드(Andrew Wood)가 마약 과용으로 사망하자 기타리스트 스톤 고사드(Stone Gossard)와 베이시스트 제프 아멘트(Jeff Ament)가 에디 베더(Eddie Vedder/보컬), 마이크 맥크리디(Mike McCready/기타), 데이브 크루센(Dave Krusen/드럼)을 규합해 결성했다. 이 5인조 밴드의 음악은 펑크와 하드록의 성분으로 호쾌함을 전해 주는 동시에 소량의 사이키델릭이 칵테일처럼 섞여 있어 몽환적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이들에 대한 지지도가 다른 고향 동료 밴드들보다 미약한 이유는 펄 잼의 노래에는 모던 록에 끌리기 시작한 국내 신세대들에게 소원(疎遠)한 미국적 하드록의 인자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초 너바나의 역사적인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이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오르면서 그런지 시대를 개막하자 펄 잼은 물론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 같은 시애틀 출신의 그런지 밴드들이 일제히 전면에 솟구쳤으며, 펄 잼의 음반 < Ten >도 뒤늦게 인기 대열에 합류했다. 아이들에 대한 사회와 부모들의 무관심을 얘기한 ‘Jeremy’와 X세대의 송가 ‘Alive’ 등은 1990년대 록 씬에 획을 그은 노래들로 이 5인조 밴드에게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해 주었다. 특히 에디 베더의 광기 어린 모습이 뇌리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Jeremy’의 뮤직비디오 클립은 M-TV 뮤직비디오 시상식에서 여러 부문을 휩쓸면서 얼터너티브의 클래식으로 남았다. 이 음반을 발표한 직후 드럼 주자 데이브 크루센이 데이브 아브루지스로 교체되었으며 1990년대 록페스티벌의 대명사 롤라팔루자와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영화 < 싱글스 >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면서 분주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영화 < 싱글스 >에서는 카메오로 직접 출연도 해 달콤한 외도(?)를 즐기기도 했다. 1집의 대대적인 성공은 펄 잼을 인기 밴드로 등극시켜 주었지만 그들은 본격적으로 음반사의 스타 시스템에 대항해 단호하고도 신념에 찬 저항을 시작했다. 좀 더 강렬한 방향으로 사운드스케이프를 꾸려 간 1993년의 두 번째 음반 < Vs >에서는 일체의 싱글도 커트 하지 않았고, 뮤직 비디오 제작도 거부했다. 무엇보다 대규모 공연장에서의 라이브를 지양하고 소규모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진정한 팬들과의 인간적인 교감을 중요시했으며 대중음악 상업성을 대표하는 공연 프로모터 티켓마스터(Ticket master)를 상대로 고가의 입장료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달걀로 바위 치기의 이 싸움에서 패소하긴 했지만 펄 잼이 보여준 용기는 록의 진정성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너바나가 이상주의자라면 펄 잼은 행동주의자였다. 선의의 경쟁자이자 음악적 동지였던 커트 코베인이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마감 한지 8개월 후에 공개된 < Vitalogy >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후반부로 접근할수록 몽롱하면서 발라드 트랙들이 여러 곡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절친한 친구를 잃은 펄 잼의 음악적인 고뇌를 반영한 것을 의미한다. 드럼 플레이어가 데이브 아부르지스에서 잭 아이언스로 바뀌면서 팀 내 분위기를 쇄신하고 발표한 이 작품부터 싱글 커트를 재개했다. ‘Tremor christ(18위)’와 모던록 차트 정상을 호령한 ‘Better man(13위)’, ‘Spin the black circle(58위)’, 그리고 ‘Corduroy(53위)’ 등이 팬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특히 싱글 ‘Spin the black circle’이 제 38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하드록 부문을 수상하면서 펄 잼은 격분한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반항의 이미지를 넘어 진지하고 솔직한 아티스트로서 승격했음을 알렸다. 마이크 맥크리디는 엘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의 보컬리스트 레인 스탈리(Layne Staley)와 매드 시즌(Mad Season)을 조직해 활동 반경을 넓혔으며, 펄 잼의 멤버 전원이 영원한 우상 그래서 ‘그런지의 대부’로 불린 닐 영(Neil Young)의 < Mirror Ball >에 힘을 보태면서 국경을 초월한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情)을 과시했다. 이 무렵 처녀작에 수록된 ‘Jeremy’가 뒤늦게 싱글로 발표되었고 동시에 B면에 자리하고 있던 ‘Yellow ledbetter’도 인기가 동반 상승했다. 특히 싱글이란 개념이 없는 국내에선 록 팬들이 이 곡을 찾기 위해 펄 잼의 1집부터 3집을 구입하는 헛수고를 하거나 수입 음반 취급 점을 찾아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싱글 ‘I got Id(7위)’가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톱10에 진입하면서 히트 싱글을 보유한 밴드를 체험하기도 했다. 제3세계의 영적인 영감과 음악, 그리고 실험주의를 대폭 수용한 1996년의 음반 < No Code >에서 펄 잼의 직선적인 통쾌함은 많이 묽어졌다. 비록 ‘Who are you(31위)’와 ‘Hail Hail(69위)’를 차트에 올렸지만 동지 너바나의 부재(不在)로 인한 커다란 부담감은 음반 제작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입김으로 작용했으며 이것으로 이들은 밴드 결성 6년 만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기 시작했다. < No Code >의 실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본령을 되찾은 것인지 1998년에 공개한 < Yield >는 다시 하드록에 기반을 둔 본래의 사운드로 회귀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의 록 음악계는 철저하게 변했고 상업화된 얼터너티브와 그런지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비록 싱글 ‘Given to fly(21위)’와 ‘Wishlist(47위)’, ‘Do the evolution’이 사랑 받긴 했지만 앨범의 판매력은 현저히 하락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유고 내전 당시 고통받던 코소보 난민을 위해 제작된 음반 < No Boundaries >에서 펄 잼은 J. 프랭크 윌슨(J. Frank Wilson)이 1964년에 히트시킨 ‘Last kiss’를 커버해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진입했다. 팝의 기류가 틴 팝과 하드코어, 그리고 라틴 댄스로 도배되던 2000년, 이들은 통산 여섯 번째 작품 < Binaural >을 공개했지만 인상적인 반향을 끌어내지 못한 채 서서히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10년이란 세월은 ‘그런지의 큰 별’ 펄 잼의 날카로운 충격파마저도 무디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변화에 단 한번의 불평도 없이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걷고 있다. ‘2인자’는 결코 1등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식의 패배주의적 뉘앙스가 아님을 1960년대의 롤링 스톤스에 이어 1990년대의 펄 잼은 증명한다. ‘그런지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점만으로도 펄 잼은 위대하다. 너바나는 ‘짧고 굵게’로 모든 것을 가졌지만 펄 잼은 이 시대가 가장 싫어하는 ‘길게’로서 굵음으로 남으려는 역사와의 고단하고 질긴 투쟁을 전개하고있다.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우리는 종종 한 장르와 동일시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목도하는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된다. 예스(Yes)는 대중 음악의 수많은 장르 중,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것의 원조이자 그 자체로서 평가받는 슈퍼 밴드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음악 동료였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and Palmer), 제네시스(Genesis) 등과 함께 197...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우리는 종종 한 장르와 동일시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목도하는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된다. 예스(Yes)는 대중 음악의 수많은 장르 중,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것의 원조이자 그 자체로서 평가받는 슈퍼 밴드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음악 동료였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and Palmer), 제네시스(Genesis) 등과 함께 1970년대 초 프로그레시브 록의 중흥기를 선포하면서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30년 이상 펼쳐왔다. 이런 탐미적 음악관은 비록 동시대의 펑크(Punk) 진영에게 뭇매를 맞았지만 그들이 일궈놓은 예술 지상주의 록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위대한 업적임에 분명하다. 국내에서도 밴드의 정교한 록 사운드는 수많은 추종자를 낳아,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 록 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예스는 1968년 보컬 존 앤더슨(Jon Anderson)과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퀘어(Chris Squire)를 주축으로 드러머 빌 브루포드(Bill Bruford), 기타리스트 피터 뱅크스(Pete Banks), 키보드의 토니 가예(Tony Kaye)가 합류하면서 출항의 경적을 울렸다. 그 당시 영국 음악 씬은 사이키델리아가 뒤로 후퇴하면서 크림(Cream)으로 대표되었던 헤비한 사운드가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동시에 19세기의 클래식 음악을 전격적으로 도입한 프로그레시브 록 역시 키스 에머슨(Keith Emerson)이 몸담았던 나이스(The Nice)와 딥 퍼플(Deep Purple)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밴드는 같은 해 11월에 로얄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펼쳐진 크림의 고별 무대 오프닝을 장식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그 유명한 존 필(John Peel)의 라디오 쇼에 출현하면서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아틀란틱 레코드(Atlantic Record)와 계약한 뒤 1968년에 셀프 타이틀 데뷔작 < Yes >를 내놓으며 단번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총아로 떠올랐다. 1970년에 기타리스트를 피터 뱅크스에서 스티브 하우(Steve Howe)로 교체한 이들은 같은 해 2집 < Time and a Word >(1970)를 발표하며 향후 전개될 ’예스 심포닉 록’의 얼개도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절정부를 위한 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 등장한 < The Yes Album >은 복잡하고 심오한 록의 예술을 펼쳐내며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싱글 ‘Your move’는 밴드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차트 40위권에 진입하며 대서양을 건너 예스를 알리는데 선봉 역할을 해주었다. 앨범은 영국에서 7위, 미국에서 40위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예스의 진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1년 키보디스트를 토니 가예에서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릭 웨이크먼(Rick Wakeman)으로 대신한 뒤 발매한 < Fragile >(1972)에서 밴드는 음악적, 상업적으로 전작을 뛰어넘는 결과를 이뤄내며 최고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 우뚝 섰다. 각자 최상의 기술적 완성도를 지닌 멤버들이 밴드라는 우산 아래 합일점을 찾아내어 완벽한 연주 하모니를 일궈낸 것이다. 로저 딘(Roger Dean)이 디자인한 초현실적인 앨범 커버는 웅장한 밴드의 사운드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얻어냈다. < Close to the Edge >(1972) 역시 영국 차트 4위, 미국 차트 3위에 랭크되며 밴드의 성공을 이어나갔다. 이 시기에 빌 브루포드(Bill Bruford)가 킹 크림슨(King Crimson)으로 떠났고 대신 앨런 화이트(Alan White)가 드럼 스틱을 쥐게 되었다. 밴드는 1973년에 빌 브루포드가 있었던 때의 공연 실황 모음인 < Yessongs(live) >를 발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스는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했던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1974)를 기점으로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운드 메이킹의 주축을 이뤘던 릭 웨이크먼이 음악적 견해차를 보이면서 탈퇴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공석은 곧바로 패트릭 모라쯔(Patrick Moraz)로 대체되었고 멤버들의 솔로 활동과 함께 병행한 < Relayer >(1974)는 어지러운 팀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범작에 그치고 말았다. 릭 웨이크먼이 다시 복귀한 뒤 1977년에 등장한 < Going for the One >은 전작의 실패를 만회할 만한 역작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야심작인 < Tormato >(1978)는 당시 영국 음악계의 대세였던 펑크 밴드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으면서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 Tormato >의 좌절은 예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 결과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먼이 밴드를 등졌고 트레버 혼(Trevor Horn, 보컬)과 제프 드라운스(Geoff Downes, 키보드)가 공석을 대신했다. 밴드는 새로운 라인업으로 1980년 < Drama >를 발매하며 항해를 계속하였고 앨범은 영국에서 2위, 미국에서 18위를 기록하며 자신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다음해에 예스는 결국 해산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제프 드라운스와 스티브 하우는 아시아(Asia)를 결성하며 1980년대 초반에 짧지만 화려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1983년 재결성 뒤 내놓은 < 90125 >는 당시의 주류였던 록/댄스 사운드를 예스라는 필터로 걸러낸 수작이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1987년 < Big Generator >를 발표하였고 이어 법적인 분쟁에 휘말려 예스라는 상호 대신 어퍼머티브(Affirmative)라는 명칭으로 < Anderson, Bruford, Wakeman and Howe >(1989)를 선보였다. 밴드는 1991년에 법적인 문제가 마무리되자 곧바로 순회 공연을 갖고 < Union >(1991)으로 미국 앨범 차트 10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계속해서 ‘The calling’, ‘I am waiting’등이 히트한 < Talk >(1994)와 라이브 앨범인 < An Evening of Yes Music Plus >(1994), < Keys to Ascension >(1996), < Keys to Ascension 2 >(1997)를 내놓은 밴드는 1997년 < Open Your Eyes >의 등장과 함께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예스는 1999년의 < The Ladder >, 2001년의 < Magnification >을 꾸준히 선보이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선조가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만방에 선포했다.
1980년대 중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두 곡의 록발라드 ‘These dreams’와 ‘Alone’가 널리 애청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빛을 본 하트(Heart)는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혼성 5인조 그룹이다. 언니 앤 윌슨(Ann Wilson, 1950년 생)과 기타리스트인 동생 낸시 윌슨(Nancy Wilson, 1954년 생) 자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드한 팝록을 음악 아이덴티티로 삼아 상... 1980년대 중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두 곡의 록발라드 ‘These dreams’와 ‘Alone’가 널리 애청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빛을 본 하트(Heart)는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혼성 5인조 그룹이다. 언니 앤 윌슨(Ann Wilson, 1950년 생)과 기타리스트인 동생 낸시 윌슨(Nancy Wilson, 1954년 생) 자매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드한 팝록을 음악 아이덴티티로 삼아 상당한 상업적 실적을 쌓았다. 그리하여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았지만 결코 록 평단의 찬사를 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상을 보여준 하트는 포크와 정통 하드록, 그리고 실험적인 스타일이 혼합된 독특한 음악을 구사함으로써 타 그룹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e)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꽤 직선적인 록을 외연으로 하면서도 내면에는 포크적인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간직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대중성이 위치했다. 보컬리스트 앤 윌슨은 여성판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라고 불릴 만큼 파워풀한 보컬을 과시했다. 그래서 초창기 하트의 노래들은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록발라드 이미지와는 판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워싱턴 주(州)의 시애틀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앤과 낸시 자매는 포크 음악에 심취했고 곧 낸시는 기타와 플루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두 자매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프로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후 낸시는 포크 싱어로, 앤은 캐나다 벤쿠버에 적을 두고 있는 남성 그룹 디 아미(The Army)에 가입했다. 곧이어 동생 낸시가 국경을 넘어 언니 그룹에 가세해 두 번째 이름 화이트 하트(White Heart)를 간단히 하트로 줄이며 활동에 진력해 벤쿠버에서는 고정적인 추종자들이 생겨날 만큼 로컬 인기그룹으로 뻗어났다. 1976년에 공개된 처녀작 < Dreamboat Annie >는 1970년대 록 앨범 중 가장 멋진 데뷔작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까지 이들의 대표 곡으로 남아 있는 ‘Crazy on you(35위)’, ‘Magic man(9위)’, 그리고 컨트리 음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밴조의 낭랑한 연주와 포크가 멋지게 어깨동무를 한 ‘Dreamboat Annie(42위)’가 자리하고 있는 이 첫 작품은 록의 고전이 되었다. 1년이 지나 발표한 두 번째 앨범 < Little Queen >에서도 여러 히트 싱글들이 배출되어 미국에서만 100만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신인들에겐 두려움인 소포모어 징크스를 거뜬히 넘어섰다. 선동적인 리듬과 기타 연주의 ‘Barracuda’(얼마 전 2000년에 개봉된 영화 < 미녀 삼총사 >에 삽입되어 활달한 영화 분위기에 일조했다)가 차트 11위에 올랐고, 그밖에 ‘Kick it out(79위)’, 펑키(funky)한 기운이 도는 하드록 트랙 ‘Little queen(62위)’ 등이 애청되었다. 그러나 그룹의 결속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남성 멤버들이 탈퇴하고 가입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발표된 < Magazine >, < Dog & Butterfly >, < Bebe Le Strange >, < Private Audition >, < Passionworks >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하트의 역사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앨범들이었다. 하지만 ‘Heartless(24위)’, ‘Straight on(15위)’, ‘Dog & Butterfly(34위)’, ‘Even it up(33위)’, ‘Tell it like it is(8위)’, ‘This man is mine(33위)’, ‘How can I refuse?(44위)’ 등의 싱글 곡들을 차트에 꾸준하게 밀어 올려 대열에서 후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1979년에 마이크와 로저 피셔 형제가 나가고 그 후임으로 하워드 리스(Howard Leese)가 들어왔고, 1982년에는 스티브 포센과 마이클 데로시어 대신 팝록 밴드 파이어폴(Firefall)에 있었던 마크 안데스(Mark Andes)와 데니 카마시(Denny Carmassi)가 합류하면서 1980년대 중반과 후반을 화려하게 비상(飛上)할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1985년에 나온 여덟 번째 정규 음반 < Heart >는 이들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 주었다. 처음으로 넘버 원의 영광을 선사한 록발라드 ‘These dreams’를 비롯해 ‘What about love(10위)’, ‘Never(4위)’, ‘Nothin’ at all(10위)’, ‘If looks could kill(54위)’은 당시 라디오에서 골든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으며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초기부터 이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던 골수 하트 매니아들은 한결 쉬워진 팝록 사운드에 적지 않게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작 < Heart >보다 좀 더 대중적인 취향에 맞춘 < Bad Animals >로 하트는 전 세계 음악 팬들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파워 발라드 ‘Alone(3주간 1위)’를 분수령으로 ‘Who will you run to(7위)’, 낸시 윌슨이 부른 ‘There’s the girl(12위)’, 비장미 넘치는 발라드 ‘I want you so bad(49위)’가 차트를 누비며 1987년과 1988년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하트의 추종자들을 늘리는 기폭제가 됐다. 1990년 초에 공개된 < Brigade >에서도 ‘All I wanna do is make love to you(2위)’와 ‘I didn’t want to need you(23위)’, ‘Stranded(13위)’, ‘Secret(64위)’ 등의 싱글로 그들의 명성을 지속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윌슨 자매의 고향(그 유명한 시애틀!) 후배들의 분기충천(憤氣沖天)한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음악 파고에 밀린 1993년도 CD < Desire Walks On >은 하트가 그동안 쌓아 온 이름값에 한참을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싱글 ‘Will you be there (In the morning)’ 만이 39위에 간신히 턱걸이했을 뿐이다. 이후 이들은 공식적인 신보 발표를 유보하고 공연 실황이나 히트곡 모음집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 위주로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음악적인 교류를 단행하고 있다. 언니 앤 윌슨은 러버보이(Loverboy)의 리드 보컬리스트 마이크 레노(Mike Reno)와 함께 댄스 무비인 < 풋루스 >의 사랑의 테마 ‘Almost paradise(1984년 7위)’를 취입한 것 외에도 에디 머피가 주연한 < 골든 차일드 >의 주제곡 ‘The best man in the world(1985년 61위)’와 멜 깁슨과 미셀 파이퍼가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 데킬라 선라이스 >의 주제가로 리차드 막스(Richard Marx)가 작곡한 ‘Surrender to me(1989년 6위)’를 칩 트릭(Cheap Trick)의 로빈 젠더(Robin Zander)와 호흡을 맞춰 독행(獨行)으로도 히트 차트에 입성했다. < 세이 애니씽 >, < 싱글스 >, < 제리 맥과이어 >, < 올모스트 페이머스 > 그리고 최신작 < 바닐라 스카이 > 등을 만들어 작년에 내한하기도 했던 영화 감독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의 부인인 동생 낸시 윌슨은 간혹 남편의 영화 음악 스코어를 작곡함으로써 록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밴드 : Red Hot Chili Peppers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락 밴드))
Christ, I’m a sidewinder, I’m a California King. I swear it’s everywhere it’s everything(주여, 나는 미사일이고 캘리포니아의 왕입니다. 맹세컨대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것은 (나에게) 전부입니다.) -‘Parallel universe’ 중- It’s the edge of the world and all of western civilizat... Christ, I’m a sidewinder, I’m a California King. I swear it’s everywhere it’s everything(주여, 나는 미사일이고 캘리포니아의 왕입니다. 맹세컨대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것은 (나에게) 전부입니다.) -‘Parallel universe’ 중- It’s the edge of the world and all of western civilization. The sun may rise in the East. At least it settles in the final location. It’s understood that Hollywood sells Californication(그곳은 세상의 끝 그리고 서구 문명의 모든 것이지.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를지 몰라도 적어도 그것은 마지막 장소에서 머무르지. 할리우드가 캘리포니아화(化)를 파는 것은 이해가 돼.) -‘Californication’ 중- 미국, 그 중에서도 캘리포니아(California)는 매우 특별한 장소이다. 그곳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라는 메트로폴리스의 거점으로서 최첨단 자본주의의 상징인 동시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한데 섞여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1980년대 초까지 철저히 분리노선을 추구하던(혹은 당했던) 흑과 백이 중반 이후부터 이 장소에서 교류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멀티컬처(Multiculture), 그리고 LA식 평등주의가 지배하는 색다른 공간의 탄생. 가사에서 잘 보여지듯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RHCP)의 음악적 뿌리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앤소니 키에디스(Anthony Kiedis), 플리(Flea 본명:Michael Balzary)와 힐렐 슬로박(Hillel Slovak), 잭 아이언스(Jack Irons)의 라인업으로 1983년 미국 LA에서 결성되었다. 훗날 밴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광적인 무대 매너를 초기 시절부터 뽐내면서 서서히 유명세를 탄 이들은 1984년 셀프타이틀인 < Red Hot Chili Peppers >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LA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장악하고 있던 과격한 펑크(Punk)사운드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팔리아먼트(Parliament)등에 영향 받은 흑인 펑크(Funk)의 크로스오버를 실현한 이 앨범은 LA만의 특수한 문화 형성 과정을 대중 음악의 관점에서 표현해냄으로서 밴드에게 펑크 메탈(Funk Metal)이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었다. 1970년대 이후 하드코어 흑인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인 펑크와 백인 하드코어의 상징인 펑크/메탈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된 시점이었다. 각 밴드마다 미세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제인스 어딕션(Jane’s Addiction), 리빙 컬러(Living Color), 피시본(Fishbone)등도 같은 흐름에 속해있는 이들로 평가받는다. 1985년에 발매한 < Freaky Styley >는 밴드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었다. 우선 펑크(Funk)의 대부인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펑크의 고향인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손수 프로듀스를 해줌으로서 이들의 음악 지향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1집 때 잠시 밴드를 떠났던 슬로박과 아이언스가 다시 가세함으로서 탄탄한 멤버쉽을 구축해냈다. 자연스레 내용물은 대만족. 비록 상업적으로 히트하진 못했지만 앨범은 신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는데 산파 역할을 해줌으로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지도를 넓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막 성공 가도의 입구에 들어선 이들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1987년 < The Uplift Mofo Party Plan >을 선보인 후 슬로박이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잭 아이언스도 그룹을 떠나고 만 것. 다행히 사태는 더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 채드 스미스(Chad Smith)를 새로이 보강한 이들은 밴드 역사상 최강의 호흡을 보여주며 절정기를 구가했다. < Mother’s Milk >(1989)와 < Blood Sugar Sex Magik >(1991) 두 작품이 이를 대변하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만의 사운드트랙이다. 특히 후자는 같은 해에 등장한 너바나(Nirvana)의 < Nevermind >, 펄 잼(Pearl Jam)의 < Ten >과 함께 얼터너티브가 주도한 최상의 대중적/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걸작이었다. ‘Give it away’와 최초로 싱글 차트 10위권에 진입한 ‘Under the bridge’등이 선전하며 7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몬스터 히트를 기록했다. 테크니컬한 펑키 라인을 선호하는 플리의 베이스와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존 프루시안테의 기타플레이간의 완벽한 매치,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와 퍼블릭 에네미(Public Enemy)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프로듀서 릭 루빈(Rick Rubin)의 참여가 성공의 주원동력이었다. 이 후 밴드는 25년 만에 다시 개최된 1994년 우드스탁(Woodstock)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최고의 공연을 치러내는 등,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허나 갑작스런 부(富)에 따르는 부작용은 이들에게도 여지없이 급습했다. 특히 과도한 약물 중독 증세를 보인 존 프루시안테는 결국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애릭 마샬(Arik Marshall), 제시 토비아스(Jesse Tobias)등이 잠시 거쳐간 후 최종 낙점된 후임자는 데이브 나바로(Dave Navarro). 같은 계열의 동료 밴드인 제인스 어딕션(Jane’s Addiction)의 일원이었던 그의 가입으로 밴드는 전열을 재정비하며 새출발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95년의 < One Hot Minute >는 음악적인 포커스가 흐려지는 결과를 양산해냈다. 전작과는 반대로 플리의 베이스와 정돈된 메탈 스타일을 선호하는 데이브 나바로의 기타가 평행선을 그으며 합일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데이브 나바로는 탈퇴했고 존 프루시안테 역시 솔로작인 < Niandra Ladies and Usually Just a T-Shirt >(1995), < Smile from the Streets You Hold >(1997)를 내놓으며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해체설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와 밴드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릭 루빈까지 가세, 전성기 때의 작업 멤버로 돌아간 RHCP는 1999년에 < Californication >을 내놓으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가장 팝적인 접근법을 선보인 이 작품은 단숨에 빌보드 정상을 꿰찼고, ‘Scar tissue’, ‘Otherside’등의 차트 1위 싱글들을 배출하며 어느새 노장이 되어버린 밴드에게 음악적 활로를 개척해주었다. 상복도 많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Scar tissue’만이 그래미(Grammy)에서 베스트 록 송 부문을 수상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밴드 : Crosby, Stills, Nash & Young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 Nash, CSN, CSN&Y)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Neil Young, Stephen Stills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Neil Young, Stephen Stills
밴드 : Small Faces (스몰 페이시스)
멤버 : 스티브 매리엇(Steve Marriott), 로니 레인(Ronnie Lane), 지미 윈스턴(Jimmy Winston), 케니 존스(Kenney Jones) 멤버 : 스티브 매리엇(Steve Marriott), 로니 레인(Ronnie Lane), 지미 윈스턴(Jimmy Winston), 케니 존스(Kenney 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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