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자기성찰의 바탕에서 써 내려간,
깊은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기는 124편의 빛나는 문장!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 그는 생전에 시인이라고 불리지 못했다. 시집을 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조부 윤하현이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손자가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햇수로는 2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자, 그의 조부 윤하현은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자의 비석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시인 윤동주 지묘’라고 썼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시인이 된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단 한 순간도 온전한 내 나라에서 산 적이 없다. 민족의 한이 서린 간도에서 태어나 식민지의 최전선인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후 압제자의 땅에서 쓰러졌다.
그는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독립투사도, 유명 시인도 아니었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문학을 통해 민족이 처한 아픔을 달래고,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문학청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여느 투사 못지않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서시〉의 구절처럼, 독립의 희망을 끝까지 잃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죽음의 늪에 빠진 민족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결국, 민족의 제단에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말았다.
그가 시를 쓰던 때는 문학이 철저히 외면받던 때였다. 오로지 전쟁의 광기만이 너울거렸다. 그러다 보니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었고, 벗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감시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창씨개명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옷’, ‘살구나무’ 등은 영락없는 불온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조국과 민족을 잊은 적이 없다. 민족의 아픔을 사랑으로, 분노를 꿈으로 피워내며, 죽는 순간까지 우리말로 시를 썼다.
《윤동주의 문장》은 어둡고, 암울한 시대 문학을 통해 민족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시인의 ‘부끄러움의 미학’을 대표하는 시 86편, 동시 34편, 산문 4편 등 124편의 작품을 창작연월일 순으로 담고 있다. 특히 작품에 깃들어 있는 시대적 아픔과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시인의 내면과 문학세계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벗들의 회고와 추모의 글을 함께 담아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고 부단히 애썼던 시인의 올곧은 정신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문학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며,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시인 윤동주의 올곧은 삶과 정신!
삶의 여정을 따라 진하게 울려 퍼지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고뇌의 기록
대부분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윤동주의 작품 역시 행간에 깃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단순한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행간의 의미를 알면 완전히 새로운 텍스트가 된다.
그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이던 1936년 6월 10일에 쓴 〈이런 날〉이라는 시가 있다.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 (중략) …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날’은 ‘일본의 국경일’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 채 이 시를 읽으면 하나의 서정시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만주에서는 일본의 국경일에 만주국 국기인 오색기와 함께 일장기를 함께 달았다. 어디에도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기념물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은 그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크게 웃고, 신나게 뛰어놀 뿐, 나라 잃은 설움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런 날>은 그 심정을 담은 작품이다.
124편에 이르는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동시 역시 마찬가지다. 평범한 소재를 아이다운 엉뚱한 생각과 동심으로 담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순진한 아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의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고 있다. ‘꿈에 가 본 엄마’와 ‘돈 벌러 간 아빠’가 등장하는 <오줌싸개 지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누구도 돌보는 사람 없는 형제의 비극을 티 없는 아이의 순진한 눈을 통해 그리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더 먹먹하게 한다.
빨랫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쏴서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이렇듯 시인의 작품에는 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또한, 그는 그런 아픔에 처한 민족을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보듬고자 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윤동주의 문장》은 어둡고, 암울한 시대 문학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며,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시인의 올곧은 삶과 정신을 담고 있다.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고뇌했던 시인의 삶이 오롯이 들여다보이는 깊은 울림의 기록인 셈이다. 이에 빛바랜 한 편의 드라마처럼 오롯이 펼쳐지는 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때로는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며, 또 때로는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 책 속에서
연희전문학교 입학 전까지 시인은 한 번도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시인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가 생긴 것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후다. 시인은 입학 몇 달 후 짝사랑의 애틋함이 담긴 시를 쓴다. … (중략) … 후배 정병욱에 의하면, 시인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이화여전에 다니는 여학생으로 시인과 같은 학년이었다. 그러나 교회 성경 공부 시간에 서로 눈길만 오갔을 뿐, 단둘이 밖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그 만남은 시인의 짝사랑으로 끝났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라는 <사랑의 전당>의 시어처럼 끝내 고백하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시인은 사랑 표현에 서툴렀다.
― 1937년 7월 26일 작, 〈그 여자〉 중에서
육필 원고에 ‘모욕을 참아라’라는 메모가 눈길을 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제 암흑기를 살면서 시인이 겪은 내적 갈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우의 인상화>는 아우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인상과 생각을 그린 작품으로,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에 비유하여 일제 강점기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인의 대부분 시가 내면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면, <아우의 인상화>는 자신이 아닌 아우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와 걱정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 1938년 9월 15일 작, 〈아우의 인상화〉 중에서
시인 역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탐독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그의 산문시 중 가장 인기를 끈 <거지>를 오마주한 것이다. … (중략) … 젊은 지식인의 비극적 삶을 다룬 소설 《루딘》 역시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시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지식인의 고뇌와 괴로움의 출발점은 《루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1939년 9월 작, 〈투르게네프의 언덕〉 중에서
1939년 9월 이후 1940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하루에도 몇 편씩 시를 쓰던 시인이 절필하게 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즈음의 상황을 통해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1939년 11월 10일, 일본은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 이른바 ‘창씨개명’을 공포한다. 나라와 우리말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민족의 성과 이름마저 빼앗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본의 만행에 시인은 매우 분노하고 허탈해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그렇게 좋아하던 시를 쓸 의욕마저 빼앗아간 것이리라.
― 1939년 9월 추정 작, 〈산골물〉 중에서
국내에서 쓴 마지막 작품으로, 시인을 일컬을 때 말하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가장 대표하는 작품이다. 육필 원고에 ‘시(詩)란? 부지도(不知道)’, ‘생존(生存)’, ‘생활(生活)’, ‘힘’ 등의 낙서가 어지럽게 쓰여 있어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단상을 떠올리며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 (중략) … 창씨개명을 닷새 앞두고 쓴 〈참회록〉은 그때의 참담함과 괴로움을 담은 작품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가 그것을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보여준다.
― 1942년 1월 24일 작, 〈참회록〉 중에서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작품으로 현재 전하는 것은 <흰 그림자>와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여진 시>, <봄> 등 5편뿐이다. 5편 모두 릿쿄대학 재학 시절 쓴 것으로, 압수되지 않은 이유는 이 작품들만 연희전문학교 시절 벗이었던 강처중에게 쓴 편지에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흰 그림자>에서 ‘흰’은 우리 민족을 뜻한다. 유학 시절에도 나라 잃은 설움을 눈물로 삼켜야 했던 민족이 그림자가 되어 눈앞에 아른거린 것이다. 이에 시인의 유고인 육필 원고 19편을 보관했던 후배 정병욱은 시인을 존경하는 뜻을 담아 호를 ‘백영(白影, 흰 그림자)’이라고 지었다.
― 1942년 4월 14일 작, 〈흰 그림자〉 중에서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이바지를 한 사람이 벗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라면,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1947년 초,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던 정지용을 같은 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시인의 벗, 강처중이었다. 그는 죽은 벗의 육필 원고를 건네며,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고, 정지용은 꼼꼼한 검토 후에 그중 하나를 1947년 2월 13일 자 신문에 싣는다. 유작 <쉽게 씌여진 시>였다. 하지만 정지용은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직접 소개 글까지 덧붙인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 1942년 6월 3일 작, 〈쉽게 씌여진 시〉 중에서
시인은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하지만 출생 당시 손 위 누나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라서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누나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이 작품은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이 오지 않는 곳으로 간 누나를 떠올리며, 편지로라도 눈을 담아 보내고 싶은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누구나 좋은 것을 대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자신이 먼저 먹는 것이 못내 미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그 사람은 아마 어린 시절 유명을 달리한 누나가 아니었나 싶다.
― 1936년 12월 작, 〈편지〉 중에서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시인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조부 윤하현이다. 시인이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햇수로는 29년)이라는 짧은 삶을 마감하자, 윤하현은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주의 비석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시인 윤동주 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썼다. ‘왜떡(센베이)’은 쓰다고 하는 이 작품에서 시인은 일본 떡은 비록 그 맛은 달지도 모르지만, 결국 우리 민족에게 쓴맛을 줄 것이라며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 1933년 3월 10일 작, 〈할아버지〉 중에서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일제 헌병은 동지섣달의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 아무렴! 또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 시인, 정지용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갑게 마주 앉아주었다. …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제 홀로 간직한 채 힘써 감춘 것이다.
─ 연희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혀지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 내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주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