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사유의 자기중심성을 전복하는 타자성의 철학!
존재론적 전통이 곡해한 철학의 근본 주제들을 다시 사유하다!!
이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레비나스 선집 01)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소르본 대학에서 1975~1976년간 행한 두 강의를 제자인 자크 롤랑(Jacques Rolland, 1950~2002)이 엮은 것이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해 하이데거에서 정점을 이루는 서구 사유의 자기중심적 경향을, 자기에 대한 타자의 근본적 우선성을 증명함으로써 철저히 비판하려 한 레비나스. 그는 이 책에서 ‘신’, ‘죽음’, ‘시간’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철학적 주제들이 사실은 자기중심적 서구 철학에 의해 오염되어 왔다는 전복적 주장을 펼치며 자신의 전망을 제시한다.
레비나스 철학은 사물화·대상화될 수 없는 타인의 고유성과의 마주침을 ‘나’에게 던져지는 가장 강력한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책의 제목으로 제시된 세 가지 철학적 개념―신, 죽음, 시간―은 이 질문 앞에서 이제까지의 철학과는 다르게, 새롭게 문제시된다. 첫 번째 강의 〈죽음과 시간〉은 죽음과 시간을, 두 번째 강의 〈신과 존재-신-론〉은 신을 각각 주제로 삼아, 기존의 철학이 이들 개념을 합당한 방식으로 다뤄 왔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 개념들의 정당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레비나스는 서구 문명의 파탄을 예감케 하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겪으며, 서구 사유에 전체성과 동일성의 원리를 각인한 존재론적 철학 전통과 대결하는 것을 자기 철학의 제1목표로 삼았다. 동일자에게 결코 흡수될 수 없는 타자성이나 코나투스(conatus essendi; 존재하려는 자기보존 경향)에 앞서는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 즉 윤리의 강조가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것도 이 문제설정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레비나스의 사유는 블랑쇼나 데리다 같은 동시대인들에게 우정 어린 반향을 얻기도 했으며, 그 흔적 역시 이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 책에서 이제까지의 ‘정통’ 철학사를 의문에 부치고, 문명적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사유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려 한다.
죽음과 시간에 대한 다른 생각
첫 강의 〈죽음과 시간〉은 레비나스가 철학 저작들의 독해를 통해 다른 철학자들과 대화 또는 대결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특히 하이데거가 그 대화(대결)의 중심에 놓이고, 다음으로는 후설과 헤겔이, 그리스 고전철학자들이, 그리고 데카르트, 키르케고르, 칸트, 로젠츠바이크, 부버, 베르그송, 블로흐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철학의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자크 롤랑에 따르면 이런 면모는 레비나스의 다른 저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레비나스는 철학사 연구를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발전시키기 이전의 예비적 단계로 삼았고, 따라서 그의 저작들에서 다른 철학자와의 대결은 주로 “분석이라기보다는 암시의 방식으로”(341쪽)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은 그런 레비나스가 사유의 원숙기에 이르러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명시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어,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점한다 할 수 있겠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미래에의 책임’으로
서구 철학에서 죽음과 시간은, 플라톤에 의해 질문으로서 제기되고 다시 그에 의해 해답을 얻은 이래, 헤겔과 하이데거라는 두 거장이 사유 전통 전체를 총괄·극복하겠다는 기획 하에 이 두 주제를 다시 수면으로 부상시킬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었던 주제이다. 때문에 레비나스 역시 이 주제들로 육박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두 사상가를 경유해야 했다.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의 생애 속에서 그와 마주치며 사유 발달의 결절 지점을 형성케 한 이로서도 유명하다. 레비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1928~1929년) 하이데거와 후설에게 현상학 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프랑스에 이들을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후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과의 대결을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죽음과 시간〉은 하이데거의 시간·죽음관(觀)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이데거에 대해 우선 베르그송이, 다음으로는 칸트가 비교·대조된 다음, 이번에는 헤겔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거쳐 『희망의 원리』의 에른스트 블로흐를 유효한 전망으로 제시하는 구성을 취한다. 독해 가운데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부터 반박과 동조를 개진하면서 죽음과 시간에 관한 고유한 개념화들을 진전시켜 나가고, 그 결과 “죽음으로부터 시간을 사유한 하이데거와는 반대로, 시간으로부터 죽음을 사유”(159쪽)하기에 이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죽음과 시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분명한 하이데거의 기여였으나, 그는 시간을 죽음 앞에 선 현존재의 불안으로부터 구성함으로써 죽음과 시간에 대한 이해를 동일자적 지평에 가두는 과오도 저질렀다. 즉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라는 사건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유일한 나를 자각하게 하는 계기이자, 이 나를 무(無)로 이끌어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활동에 종말을 고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시간은 이 유일한, 즉 홀로인 주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비록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나’라는 개체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말함으로써 ‘나’를 절대화하는 단순한 유아론(唯我論)은 비껴가지만, 이렇게 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끝내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의미지평에 머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하이데거 철학의 한계는 결정적으로 ‘새로움’과 그 원천인 미래에 대한 사유 불가능성을 노정하는 데서 분명해진다. 동일적 주체에 포섭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비동일적인 것의 출현이 곧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우리 삶의 유한성을 의식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한성의 바깥, 말하자면 나의 죽음 바깥(=존재의 의미지평 바깥)의 시간과 내가 관계를 맺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는 오히려 그 바깥과의 관계야말로 존재에 앞서는 것임을, 이 ‘나의 죽음’의 확실성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하이데거와 달리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접근함으로써 보여 준다. 여기서 진정한 시간은 동일적 존재에 주어진 지평이 아니라 타자로부터(즉 ‘존재 너머’에서) 연원하는 것임이 드러나고, 우리는 항상 타자에 대해 갚을 수 없는 빚처럼 무한한 책임을 요구받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책임에 응답할 때 미래는 도래한다.
윤리로부터 신을 사유하다
‘신’을 주제로 삼는 2부(〈신과 존재-신-론〉)는 1부와는 또 다른 접근법을 보여 준다. 1부의 입론이 죽음과 시간의 개념이 철학 전통 안에서 너무 성급하게 결론지어졌다는 데서부터 출발했다면, 2부는 철학이 신 개념을 은폐해 버렸다는 데서 출발한다. 근대 이래의 서구 철학은 신학과 자신을 구분 지음으로써 성립한 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렇게 신 개념을 자신의 철학 체계에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려는 레비나스의 시도는 확실히 독특하다. 물론 신 개념의 정립에 있어서도 최대의 맞상대는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헤겔 독해를 거쳐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이라는 문제 설정을 얻는다. 형이상학(철학)은 신학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존재 사유를 존재-신-론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이것이 ‘존재 망각’이다). 그러나 존재 사유로 충분한 것일까? “존재-신-론에 따라 신을 사유하는 것은 존재를 잘못 사유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을 잘못 사유하는 것인가?”(188쪽) 이 책의 두 번째 강의는 하이데거적 “사유가 형이상학을 통해 부당한 특권을 가”지고서 “농락한 신의 자유를 신에게 돌려 주”려 한다(362쪽).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주재하는 신
우선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점은 레비나스의 ‘신’은 신앙의 대상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레비나스에게 존재론과 신앙은 억견(doxa)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형적이다. 신은 세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절대적 존재자가 아니다. 유한한 우리 의식의 척도에 귀속되는 세계를 주재할 뿐인 신은 결국 존재의 내재성에 머무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신이 진정으로 초월적이려면 존재의 내재성 바깥에 거할 수밖에 없다. 즉 존재 너머가 신의 영역이어야 하고 따라서 신은 증언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신-론이 신을 존재의 세계에 유폐시켰다면, 하이데거는 철학에서 신을 완전히 분리해 냄으로써 존재-신-론에 의한 존재 망각을 극복하고 존재 사유로 나아가려 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존재 너머(즉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신 개념의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이 시도는 데카르트의 ‘무한’ 개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한이 존재 너머로의 초월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가르쳐 준 무한의 관념은 수동적인 주체 안에서 이 초월을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214쪽) 그러나 데카르트는 무한을 말하는 동시에 동일자에 모든 타자를 통합하는 전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레비나스는 이 지점을 바로잡음으로써 철학 안에 신 개념의 정당한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 즉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주재하는 제삼자로서의 신으로 말이다. ‘동일자의 왕국’에서 안온하고 게으른 휴식 속에 빠져드는 것,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이 ‘부르주아’가 되는 길이며, 나의 주체성을 존재의 코나투스에 종속시키는 길이다. 신은 이때 나를 깨워 타자의 호소를 향하게 하고, 내가 ‘타자에 우선하는 일자(一者)’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일자’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타자에의 책임을 짐으로써 나의 유일함, 나의 주체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왜 레비나스인가?
그린비출판사는 이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을 시작으로 미출간된 레비나스의 저작들을 속속 펴낼 예정이다. ‘타자’, ‘얼굴’, ‘바깥’, ‘초월’ 등의 독창적 개념화를 통해 자기를 중심에 두고서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서양 문명을 그 입각점으로부터 비판하려 한 레비나스의 철학적 기획은, 이후 ‘타자성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흐름의 초석이 되었다. 레비나스 사후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오늘날, 타자를 포식(捕食)적으로 동일화하며 지배력을 확장해 온 전 지구적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한 철학적 자원으로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관심은 더없이 높다. 그러나 그간 국내에서는 레비나스의 일부 저작만이 산발적으로 소개되는 데 그쳐, 체계적으로 그의 저작들과 철학이 소개 및 수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거듭 말해졌다. 앞으로 계속될 ‘레비나스 선집’이 그런 필요성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