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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크 & 블루스 명곡 모음집 (The Best of American Folk &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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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미국 포크 & 블루스 명곡 모음집 (The Best of American Folk & Blues)

[ 3CD ]
Albert King, Bob Dylan, B.B. King, Brownie McGhee, Eddie Kirkland 노래 외 2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Not Now | 2020년 04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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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크 & 블루스 명곡 모음집 (The Best of American Folk &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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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4월 17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I Get Evil - Albert King
  • 02 Baby, Let Me Follow You Down - Bob Dylan
  • 03 Hide Away - Freddy King
  • 04 Hold That Train - B.B. King
  • 05 Crying At The Station - Brownie McGhee
  • 06 Train Done Gone - Eddie "Blues Man" Kirkland
  • 07 Casey Jones - Pete Seeger
  • 08 Too Close Blues - Lightnin' Slim
  • 09 Stormy Monday - Jimmy Witherspoon
  • 10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 The Kingston Trio
  • 11 Stewball - Memphis Slim
  • 12 Highway Blues - Lightnin' Hopkins
  • 13 Roll On, Buddy - Paul Clayton
  • 14 Love My Baby - Shakey Jake
  • 15 Jack Went A Sailing - Lori Holland
  • 16 Just Make Love To Me - Muddy Waters
  • 17 Johnny Runkins - Pat Foster
  • 18 Rainin' In My Heart - Slim Harpo
  • 19 I'm Crazy 'Bout You Baby - Sonny Terry & Brownie McGhee
  • 20 Boom Boom - John Lee Hooker
Disc2
  • 01 The Hammer Song - Pete Seeger
  • 02 Dimples - John Lee Hooker
  • 03 I Wanna See My Baby - T-Bone Walker
  • 04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 - Dave Van Ronk
  • 05 Mean Ole Frisco - B.B. King
  • 06 Man Of Stone - Eddie "Blues Man" Kirkland
  • 07 Little Old Log Cabin In The Woods - Pegram And Parham*
  • 08 I've Made Nights By Myself - Albert King
  • 09 Patrol Blues - Lazy Lester
  • 10 Love Henry - Peggy Seeger
  • 11 I'm A Mojo Man - Lonesome Sundown
  • 12 A Worried Man - The Kingston Trio
  • 13 I Love You Baby - Smokey Hogg
  • 14 Wreck Of The Old '97 - Woody Guthrie
  • 15 Bye Bye Baby - Memphis Slim & T-Bone Walker
  • 16 Late Last Night - Slim Harpo
  • 17 Heads Up - Freddy King
  • 18 Peg And Awl - Doc Watson
  • 19 I'm A Rollin' Stone - Lightnin' Slim
  • 20 Hoochie Coochie - Muddy Waters
Disc3
  • 01 When My Heart Beats Like A Hammer - B.B. King
  • 02 Mean Old Frisco - Brownie McGhee
  • 03 In The Pines - Dave Van Ronk
  • 04 We're Gonna Rock - Memphis Slim
  • 05 I Wonder Why - Lightnin' Hopkins
  • 06 Tom Dooley - The Kingston Trio
  • 07 Mind Your Own Business - Lightnin' Slim
  • 08 Down On My Knees - Eddie "Blues Man" Kirkland
  • 09 The Yellow Rose Of Texas - Pegram And Parham
  • 10 Don't Start Cryin' Now - Slim Harpo
  • 11 I'll Never Be Free - Jimmy Witherspoon
  • 12 Jackhammer Blues - Woody Guthrie
  • 13 Can't Keep From Cryin' - Earl Gaines
  • 14 Strawberry Roan - Pat Foster
  • 15 Swooshy - Freddy King
  • 16 I'm In Love - T-Bone Walker
  • 17 Shake A Leg - Smokey Hogg
  • 18 Goodbye, Little Bonnie, Goodbye - Paul Clayton
  • 19 Goin Down Slow - Sonny Terry
  • 20 Last Night I Had The Strangest Dream - Pete Seeger

아티스트 소개 (26명)

블루스 기타 연주자, 가수. 블루스 기타 연주자, 가수.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B.B. King (비비 킹 ,Riley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티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Riley B. King)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19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T. Bone Walker)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19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1952년 ‘Three o’clock blues’, 19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리듬 앤 블루스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19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1969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19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었다.
노래 : Brownie McGhee (브라우니 맥기)
노래 : Eddie Kirkland (에디 쿼크랜드)
블루스 뮤지션 블루스 뮤지션
피트 시거는 아마도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도 모던 포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음악학자 찰스 시거(Charles Seeger)의 아들인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대명사가 되는 5현 밴조를 자신의 주악기로 다뤘다. 피트는 30년대 말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노조설립을 증진시키고 파시즘을 비난하는 몇몇 다른 포크음악가들과 함께 정치적인 그룹 알... 피트 시거는 아마도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도 모던 포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음악학자 찰스 시거(Charles Seeger)의 아들인 그는 십대 시절부터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대명사가 되는 5현 밴조를 자신의 주악기로 다뤘다. 피트는 30년대 말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노조설립을 증진시키고 파시즘을 비난하는 몇몇 다른 포크음악가들과 함께 정치적인 그룹 알마낙 싱어스(Almanac Singers)를 조직했다. 그룹의 리더인 그는 또한 People’s Song과 People’s Artists와 같은 단체의 공동 창설자였다. 1948년 그는 다시 포크그룹 위버스(The Weavers)를 만드는데, 이 그룹은 레코드 계약관련 권리를 모두 잃기 전, 즉 1950년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색깔론적 마녀사냥 기간 전 기간 동안, ‘제나, 제나, 제나’(Tzena, Tzena, Tzena), 리드벨리의 포크 고전 ‘Goodnight Irene’ 그리고 ’On top of old smokey’ 등의 엄청난 히트로 포크 뮤직계의 선봉에 나섰다. 이후 시거는 미 하원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 앞에서의 증언을 거부해 의회모욕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으나, 이 고소는 1962년 기각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포크웨이즈 레코드사를 위해 수많은 솔로 앨범을 만들었고, 뱅가드 레코드사를 위해서 위버스의 더 많은 음악들을 작사 작곡했다. 1961년 그는 콜롬비아레코드사와 계약, 1960년대 말까지 소속아티스트로 활동을 지속했다. 피트 시거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의 중요 인물이자 떠오르는 신인들을 섭외하기도 했다. 그의 연이은 공연은 스페인 노래, 아프리카 노래, 흑인 노동요, 새로운 저항 노래, 그리고 포크의 고전들까지 폭넓은 장르와 스타일의 곡들을 포함한 다양한 레퍼토리로 채워졌다. 가끔은 즉흥적으로 개사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다양한 화성으로 변주해 관객들과 같이 다함께 노래 부르기를 실천하기도 했다. 간혹 다른 곡의 소스를 빌어다 개작한 것을 포함해 시거의 노래는 주위 동료나 후배들이 불러 히트한 경우도 많았다. Trini Lopez와 Peter, Paul&Mary를 위한 ‘If I had a hammer’, The Byrds가 노래한 ’Turn!, Turn!, Turn!’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Malvina Reynolds가 부른 ‘Little boxes’를 위시한 ’We shall overcome’, ’Guantanamera’ 외 다수 곡들도 유명하기는 마찬가지. 1970~80년대 환경관련 이슈에 몰두하고 앞장섰던 피트는 특히 1969년에 허드슨 강의 환경개선을 위해 클리어워터 범선을 띄우는데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지는 야외콘서트, 페스티벌 순회공연 등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노동조합에서부터 반공해 법률제정까지 다양한 사건들의 주최가 되는 사회활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는 73세 생일 며칠 후인 뉴욕 주 Sparkhillshad Festival에서 자신의 전혀 노쇠하지 않은 건장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Baptist 교회 앞에서 임시무대를 오픈했을때 그는 ‘허드슨 강이 20년 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1990년까지 모던 포크의 선봉장 피트 시거는 케네디 센터로부터 최고의 국가적 예술인에게 수여하는 명예 상을 수여한 것을 비롯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 ‘Harvard Arts Medal’ 획득하는 등 다방면에서 그의 공로를 인증 받았다. 그는 또 1996년에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트레디셔널 포크 앨범‘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1999년에는 쿠바를 여행하던 중 ’Felix Varela Medal’(환경보호와 반인종주의에 입각한 인도주의적 예술 활동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쿠바 최고의 영예)을 수여했다. 음악인으로서 그는 그야말로 진솔, 정직, 온후, 순수했으며 지구촌 모든 이들의 아버지였다.
멤버 : 밥 쉐인(Bob Shane), 닉 레이놀즈(Nick Reynolds), 데이브 가드(Dave Guard) 멤버 : 밥 쉐인(Bob Shane), 닉 레이놀즈(Nick Reynolds), 데이브 가드(Dave Guard)
노래 : Lightnin' Hopkins (라이트닝 홉킨스,Sam John "Lightnin'" Hopkins )
컨트리 블루스 기타 연주자, 가수 컨트리 블루스 기타 연주자, 가수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1983년 4월 30일,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누구보다 블루스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시킨 ‘블루스 거목’으로 기억된다. 그에게 영향 받은 이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머디 워터스는 훗날 후배 블루스맨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머디 워터스의 초기 레코딩에서 밴드의 이름을 따온 롤링 스톤스 뿐만 아니라 척 베리,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존 메이올, 버디 가이, 에릭 클랩튼, 피터 그린, 자니 윈터 등은 머디의 계승자들. 일례로 머디 워터스의 골든 레퍼토리를 장식하는 ‘Standing around crying’, ‘Rollin’ and tumblin’, ‘Hoochie coochie man’, ‘Honey bee’ 등은 당대 걸출한 뮤지션들을 블루스의 세계로 인도했다. 때문에 블루스 역사는 그를 두고 ‘일렉트릭 블루스의 왕(The King of Electric Blues)’이라 칭송한다. 1915년 4월, 매킨리 모건필드(McKinley Morganfield)라는 본명으로 남부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머디 워터스의 이름은 정작 별명에서 유래되었다. 어릴 적부터 진흙탕에서 기타 치며 뛰어 놀길 좋아하던 그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그의 얼굴 생김새만 봐도 금새 진흙이 연상될 정도. 일찌감치 ‘델타 블루스의 거성’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과 선 하우스(Son House)의 레코딩에서 자극 받아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구축한 그는 1943년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연주 여행을 떠난다. 1948년 곡 ‘I can’t be satisfied’, ‘I feel like going home’을 시작으로 1951년과 1956년 사이에 머디는 ‘Hoochie coochie man’, ‘Just make love to me’, ‘Still a fool’ 등 14개의 히트 송을 배출하게 된다. 머디 워터스를 논할 때 그의 음악을 빛내준 < 체스 > 레코드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가 무려 30년 간 < 체스 >와 파트너십을 지속시켰고, 그곳에서 다수 앨범을 내고 연주 인생을 꽃피우기 때문이다. 로큰롤 명인 척 베리(Chuck Berry)와 보 디들리(Bo Diddley) 등도 거기 출신. 그 후 < 콜롬비아 >에서 발표한 1977년 앨범 < Hard Again >은 후반기 대표작이다. 머디의 음악 생애는 사후 4년 뒤인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면서 전설로 남았다. 모던 블루스의 왕좌에 오른 비비 킹(B. B. King) 마저도 그를 존경했고, 에릭 클랩튼은 1994년 음반 < From The Cradle >을 그에게 헌사했다. 2004년 3월 < 롤링스톤 >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명인 50인’ 순위에는 17위로 랭크돼 그 존재 가치를 더했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딴 블루스 가게마저 생길 정도로 머디 워터스의 존재는 20세기 대중음악 역사를 빛낸 ‘블루스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비탄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왜냐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전설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가 지난 2001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는 거칠고 투박한 보컬과...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비탄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왜냐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전설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가 지난 2001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는 거칠고 투박한 보컬과 대쪽같이 올곧은 기타로 대변되는 블루스의 원형을 1948년 첫 싱글 ‘Boogie chillen’부터 시작하여 한차례의 변화도 없이 반세기 넘게 줄곧 지켜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트를 자유자재로 세분화하여 만들어 내는 독창적인 부기 그루브는 그를 ‘부기의 왕(King Of The Boogie)’의 지위에 올려놓았고, 슬프고 애절한 델타 목화밭의 노동요는 그를 ‘진정한 블루스맨’으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생전에 그가 남긴 100장이 넘는 방대한 디스코그라피와 ‘Boogie chillen’, ‘Boom boom’, ‘I’m in the mood’, ‘Crawling king snake’ 등의 불멸의 고전 등에서 쉽게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그만큼 그에게 블루스는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고달팠던 삶의 궤적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항상 어루만지면 위안을 주던 유일한 친구였다. 존 리 후커는 1917년 8월 22일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클라크스데일(Clarksdale)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십대 시절 양아버지인 윌 무어(Will Moore)에게 기타를 배우며 흑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노예나 다름없었던 비참한 소작농 삶을 벗어나고자 열 네 살 되던 해에 군대에 입영한 것을 시작으로,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의 극장 안내원,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서의 공장 노동자, 그리고 모타운 디트로이트에서의 자동차 공장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을 횡단하며 갖은 고생을 겪었다. 물론 그 시기에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델타 블루스의 명맥을 이어갔는데, 점차 대도시로 이동해가면서 기타를 낡고 허름한 어쿠스틱에서 세련되고 큰 소리를 내는 일렉트릭 블루스로 바꿨다. 기타를 교체한 이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큰 도시의 생활을 음악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고출력의 앰프로 무장한 전기 기타가 필수였다. 이런 후커의 이동 경로와 음악적 변화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미시시피 지역의 블루스 뮤지션들과 흑인들에게 이미 이뤄졌던 사항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델타 지역의 목화밭에 목화를 해치는 병충해가 강타하면서 많은 흑인들이 일자리를 잃어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였던 것이다. 시카고가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3년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여 가스펠 싱어와 블루스 연주자로 경력을 쌓아가던 그는 1948년 주술적인 측면이 강하게 느껴지는 ‘Boogie chillen’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Boogie chillen’은 존 리 후커의 원시적인 보컬과 강한 기타 연주에 힘입어 레이스(Race) 시장(후일 R&B로 바뀜)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미 전역에서 5년 동안 100만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부기의 왕은 이 당시에 비비 킹(B.B King),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이 속해있던 LA의 < 모던 레코드(Modern Records) >와 계약을 체결했다. < 모던 레코드 >는 비하리(Bihari) 형제들이 세운 음반사로 하울링 울프(Howlin’ Wolf), 리틀 월터(Little Walter),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등이 몸담고 있던 시카고의 < 체스 레코드(Chess Records) >와 함께 리듬 앤 블루스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49년부터 1954까지 존 리 후커는 < 모던 레코드 > 산하의 < Acorn Regal >, < Gotham >, < Staff >, < Chart > 등을 포함한 21개의 군소 레이블에서 델타 존(Delta John), 자니 리(Johnny Lee), 자니 윌리엄스(Johnny Williams), 부기 맨(The boogie Man), 존 리 부커(John Lee Booker) 등의 예명으로 70 여장의 싱글을 발표하며 < 모던 레코드 >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도어스(Doors)가 리메이크한 1949년 작품 ‘Crawling king snake’, 1951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를 주름잡은 ‘I’m in the mood 등이 주요 히트곡들이다. 1950대 중반 로큰롤의 탄생과 함께 존 리 후커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59년 < Folk Blues >를 시발점으로, 1960년 < That’s My Story >, < I’m John Lee Hooker >, < Travelin’ >, 1962년 < Burnin’ > 등을 연속해서 발표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 Burnin’ >에 수록된 ‘Boom boom’은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음악 시장이 낙관적인 서핑 뮤직과 스탠더드 팝으로 기울면서 점차 잊혀져 갔다. 그를 포함해서 로큰롤의 광풍에 한 축을 담당했던 흑인 블루스 뮤지션들이 암흑의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고국 미국에서 후커를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을 때, 한편 대서양 건너편의 영국에서는 그의 음악을 연구하고 들으며 새롭게 재창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4년 애니멀스(Animals)가 후커의 ‘Boom boom’과 ‘Dimples’를 재해석한 것이 좋은 증거이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영국에 불어닥친 블루스 리바이벌 붐으로 이어져 존 리 후커를 부활시켰다. 1967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커는 < ABC > 레코드사와 앨범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 It Serves You Right To Suffer >, 1년 뒤인 1968년에는 < Urban Blues >, 그리고 1969년에는 < Simply The Truth > 등을 내놓으며 블루스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으로 금의환향하여 1971년 부기록 밴드 캔디드 히트(Canned Heat)와 공동으로 더블 앨범 < Hooker ’N’ Heat >(73위)발표했고, 그해 말에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이 피처링한 음반 < Never Get Out Of These Blues Alive >(130위)를 공개하는 등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70년대 싱어 송 라이터 시대의 개막은 또 다시 존 리 후커를 지하세계로 몰아 넣었다. 블루스맨은 부정기적으로 앨범을 발표하면서 시름을 달랬고, 1980년 영화 < 블루스 브라더스(The Blues Brothers) >에 카메오로 출연하여 잠깐 대중들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켰을 뿐 20년 가까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불어닥친 2차 블루스 리바이벌 열풍은 존 리 후커를 과거에서 현재로 화려하게 컴백시켰다. 후커는 자신의 음악인생 40주년이 되는 1989년에 발표한 앨범 < The Healer >(미국 62위, 영국 63위)에 수록된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와의 듀엣곡 ‘I’m in the mood’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트래디셔널 블루스 레코딩’ 부분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재기작 < The Healer >는 보니 레이트를 비롯하여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로스 로보스(Los Lobos) 등 쟁쟁한 후배뮤지션들이 참여하여 부기의 왕에게 힘을 실어줬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때부터 존 리 후커에 대한 음악계의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조 카커(Joe cocker), 알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 라이 쿠더(Ry Cooder), 보 디들리(Bo Diddley), 자니 윈터(Johnny Winter) 등이 출연한 1990년 10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존 리 후커 트리뷰트’ 콘서트, 1991년 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헌액 등이 그것이다. 후커 역시 고희가 넘은 고령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 Mr. Lucky >(1990년), < Boom Boom >(1992년), < Chill Out >(1995년), < Don’t Look Back >(1997년) 등을 내놓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존 리 후커는 2001년 6월 21일 세월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영면했다. 그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비비 킹은 “나는 매우 좋은 친구를 잃었고, 세상은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며 슬퍼했고, 유투(U2)의 보노는 “그의 죽음은 비극이라며”말을 잊지 못했다. 흑인의 고통을 대변했던 블루스, 그 고통의 음악을 껴안았던 존 리 후커. 그는 이제 고통이 없는 낙원을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편히 잠드소서.
노래 : Dave Van Ronk (데이브 반 롱크)
노래 : Lazy Lester (레이지 레스터)
기타리스트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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