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무죄, 사형, 무죄, 무죄.
하지만 무죄 판결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_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
1995년 6월 12일, 저녁 뉴스 화면은 서울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 현장을 비추고 있었다. 욕조에서 치과의사인 30대 여자와 한 살짜리 딸이 끈으로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여론은 순식간에 의사인 남편이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몰아붙였고, 그날 이후 이 남자의 삶은 무너지고 말았다. 검찰은 이 남자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공세적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1심 사형!
저자는 불리한 증언을 횡설수설 늘어놓으며 검찰의 공세에 속수무책이었던 이 남자를 보며, 그를 변호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항소심 무죄, 2년 뒤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3년 뒤 고등법원에서 다시 무죄, 2년 뒤 대법원 무죄 확정. 8년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사형과 무죄 사이를 오간 이 남자에게 과연 무죄 판결은 위로가 되었을까? 아내와 딸을 잃고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려 법정에 서야 했던 이 남자의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저자는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의 재판과정을 복기하면서 법의학, 화재실험 등 수많은 과학적 쟁점을 가지고 있던 이 사건의 진실을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 남자의 억울한 심정과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도 함께.
저 불타는 망루는 누구의 잘못인가? _용산참사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 남일당 망루는 화염에 뒤덮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 5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평범한 아저씨, 할아버지 다섯에, 앞날이 창창한 30대 경찰 하나, 이렇게 여섯 목숨이 불에 타 죽었다. 이들의 죽음에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가족과 동료를 잃은 철거민들만 ‘테러범’이라는 낙인과 함께 감옥을 향해야 했다. 민변 변호사들은 참사 직후부터 철거민들을 도왔다. 그러나 검찰에서 3000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맞서, 재판은 파행에 빠졌다. 재판부는 이 기록 없이 재판을 강행하려 하였고, 결국 변호인들은 전부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저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신뢰하는 후배 변호사들이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파행에 빠진 법정에 서 달라고? 저자는 망설였다. 그 망설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결국 피의자가 된 억울한 이들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해 진실을 밝히고, 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의 형량을 1년이라도 줄여야 했다.
그날의 진압작전은 누가 보아도 잘못이었다. 경찰 지휘부와 말단 특공대원들은 잘못을 스스로 인정했다. 하지만 법원은 1,2,3심 모두 이런 진압이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판결했다. “모두가 공범인 우리는 용산참사의 책임을 면제받고, 용산은 그저 책임질 사람이 없는 ‘참사’로 남았다. 아니, 망루 밖으로 화염병을 던진 철거민 ‘테러범들’만이 그 책임을 몽땅 도맡아 졌다. 무간지옥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감옥으로, 까맣게 타 죽은 자들은 무덤으로.” - p.162
억울한 죽음은 계속된다
_양평 생매장 사건, 서울 달동네 재개발, 각종 의문사, 인혁당 재심 등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벌어진 ‘양평 생매장 사건’은 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카메라가 재판 모습을 담아 방송할 정도로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살인범 이성준은 체포 과정에서 사망하였지만, 그 죗값은 공범으로 지목된 남은 사람들이 치러야 했다. 특히 이성준의 스물한 살 여자친구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자신의 20대를 감옥에서 보내고 서른셋 나이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 여자의 변호인이었던 저자는 재판부에 형사소송법 절차를 지키라고 호소하고,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무죄임을 항변하였지만,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국가는 ‘본보기’가 필요했다. 1988~1989년 저자는 돈암동 재개발지구 세입자들과 함께했다. 작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1997년 여름에도 전농동 철거지역에서 용역과 전경에 둘러싸인 채 갈등 중인 세입자들 사이에서 중재를 이끌어내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며칠 전 커피를 건네던 아주머니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때는 이것이 10년 뒤 용산참사의 전주곡일 줄 몰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을 비롯해 죽음의 진실조차 밝히지 못한 원혼들도 무수히 만났다. 정권이 짜놓은 시나리오를 거부하다가 변사체로 발견된 이내창,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지 단 사흘 만에 피투성이 주검으로 돌아온 최종길 교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자살로 위장된 주검으로 발견된 청년 신호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되어 널리 알려졌으나 여전히 군 보급대 창고에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김훈 중위, ‘의문의 투신’으로 숨진 후 영안실에 투입된 ‘백골단’으로부터 또다시 욕볼 수밖에 없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그뿐만 아니다. 유신체제 보위를 위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과 생전 남편과의 단 1분 만남마저 남남인 체해야 했던 그 아내의 처절한 비극. 저 죽을 구덩이 제 손으로 파고, 조금 뒤 제가 그 구덩이에서 총살되어 묻힐 줄도 모르고 웃고 있었던 시골 촌부 보도연맹원들. 이들의 죽음은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는, 하지만 웃을 수 없는
_송두율 사건, PD수첩 광우병 보도 관련 소송,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라 불린 송두율 사건은 결국 송 교수의 완승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대형 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뉴스였다. 하지만 송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세우며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세력과 언론들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 무죄판결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PD수첩 광우병 관련 민?형사소송 역시 PD수첩 제작진의 연전연승이었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당시 문화방송의 잘못된 정보가 국민의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 점은 언론사의 책무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며 ‘뉴스데스크’를 통해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이를 버텨낸 피디들, 갖은 고생을 다해 재판을 이긴 변호인, 잘못한 게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대법관들을 모두 허탈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특검 역시 슬픈 코미디였다. 파업을 유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검찰을 수사하라며 생긴 특검은 오히려 검찰에 수사 자료를 빼앗기고 말았다. 잠재적 피의자인 검찰이 특별검사에게 압수된 물건을 돌려달라고 큰 소리치고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그대로 실현되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현장이었다.
광기의 시대, 그 한복판에 선 변호사 김형태의 씻김굿
곽병찬 〈한겨레〉 대기자는 발문에서 김형태를 ‘씻김이’라 불렀다. 위대한 문학은 억압과 착취 속에 망각된 존재를 불러내어 장례를 치러 준다는, 이를 통해 치유와 위로를 주고 인간 현실의 비극적 조건을 드러내 그런 현실을 변혁하는 동력을 부여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며, 저자의 이번 작업이야말로 문학의 정수를 실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저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음과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 모습 그대로 다 부처’라는 깨달음의 법률적인 번역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형제 폐지와 인권 옹호에 늘 앞장서왔던 것은 바로 이 헌법 제10조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권력의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는 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을 변호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법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법을 믿고 이를 실천해온 것이다. 김형태 변호사가 법정에서 마주한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들을 차근차근 돌아보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라는 말의 뜻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