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와 바다
지금껏 우리는 육지의 관점에서만 철학을 논해왔는지 모른다. 지구 표면의 4분의 3을 바다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오로지 육지만 들여다보고 지내온 때문일까. 저자는 만약 인류가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지닌 바다 동물이었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다른 철학을 갖게 되었을 거라며 바다를 다른 시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서 철학적 사고가 바다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육지 동물인 인간에게 바다는 동경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인간의 오랜 습속에 자극을 주려는 듯, 저자는 바다의 관점에서 철학을 다루었던 사상가들을 소환해 우리를 넓고 깊은 세계로 이끈다. 그래서 바다를 잘 아는 항해사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된다. 훌륭한 안내자가 유명 관광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여 주려고 애쓰듯, 이 책 역시 원전을 꼼꼼히 인용하고 있다. 저자의 생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 텍스트가 직접 그 속내를 드러내도록 구성한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다.
고대 철학의 귀환
책을 읽다 보면 아득히 먼 고대 현인들의 음성이 살아나고, 그들의 예지와 사고의 심원함이 오늘의 우리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지나친 자의식과 관념의 과잉 상태에 빠져 무엇이 중요한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겐 ‘철학함’의 생생함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보쿰 대학 철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철학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보다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형이상학과 자연철학, 윤리학과 미학, 정치철학과 사회철학, 법철학과 역사철학까지. 이는 철학의 근본원리가 물이라는 인식 아래, 경계를 넘어서 특정 영역의 협소함을 이겨 내려는 학문이야말로 철학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그동안 ‘철학의 바다’에 빠져 표류하던 독자들에게 『바다의 철학』을 감히 권해드린다.
옮긴이의 말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이 고단한 삶을 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에서(Woher) 어디로(Wohin)?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Wie) 살아야 마땅한가? 이 세 가지 물음, 곧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태도를 우리는 철학이라 부른다.
어렵고 골치 아프며 배배 꼬인 말장난으로 오해받기 일쑤인 철학은 그 출발만큼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우리 인간의 출신을 궁금해 하는 물음은 죽어 어디로 갈지 묻는 물음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인간은 생각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이 물음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이 물음에 답을 주려한 다양한 시도들을 안다.
플라톤은 우리 인간의 탄생을 두고 레테강을 이야기한다. 본래 인간의 영혼은 완전한 지식을 자랑했으나 망각의 강물을 마시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 탓에 무지로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의미심장하고도 애매한 이야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신화는 인간의 탄생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심의 신 ‘쿠라’(Cura)는 근심을 잊고자 강물로 진흙을 빚어 생명체를 만든다. 쿠라는 이 진흙덩어리에게 정신을 불어넣어달라고 주피터에게 애원한다. 완성된 생명체에 이름을 붙이려는 쿠라를 보며 주피터는 정신을 불어넣어준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흙이 무슨 소리냐며 이 생명체는 어디까지나 재료를 제공한 자기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항변한다.
시비가 그치지 않자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가 심판을 맡는다. 그의 판결은 간단명료했다. 이 새 존재가 죽으면 주피터는 정신을 되돌려 받아라. 흙은 재료를 되찾아 가라. 그리고 이 생명체를 빚은 진짜 주인은 쿠라이므로 이 존재는 살아 있는 내내 ‘근심’의 차지가 될지라. 이 짤막한 신화가 담은 함의를 괴테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일단 차지한 사람은 / 만사가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 …… / 그는 풍성한 가운데 굶으리라 / 기쁨이든 괴로움이든 / 다른 날로 미루며 / 오로지 미래를 염려하며 / 절대 근심을 멈추지 못하리라.”(「파우스트 2부Faust Ⅱ」, 마지막 막에서.)
하루도 근심 잦을 날이 없는 우리네 인생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야기인즉 우리는 물과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며 이런 재료의 허망함 탓에 근심을 멈출 수 없다는, 아주 그럴싸한 비유다.
그러나 철학은 이런 다채로운 함의를 다룬 그럴듯한 비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 우리가 근심에서 놓여날 수 없는 존재라고? 근심을 만들어내는 뿌리는 뭐야? 어떻게 하면 이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철학은 말한다. 어디서 왔으며, 죽어 무슨 심판을 받고 어디로 갈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아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인지 하는 물음의 답일 뿐이다.
그러나 레테 강물을 마신 우리는 이 답을 잊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리스 신화는 또 다른 물을 상기시켜준다. 잊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해주는 강의 이름은 ‘므네모시네’(Mnemosyne: 라틴어 memoria)이다. 레테의 저주로 기억을 잃었으되, 밝히 생각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은 므네모시네의 축복을 누린다.
물론 이 역시 애매한 이야기다. 이런 신화에 만족하지 않고 철학은 기억의 상실과 회복을 함께 묶는 물의 포용성에 주목한다. 대립하지만 하나인 것,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같은 것, 다시 말해 근심으로 얼룩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풀어줄 하나의 원리는 무엇일까?
이쯤에서 다시금 사람들은 물으리라. 그거 봐, 복잡한 게 철학이잖아? 또다시 이야기가 꼬이는데……. 그러나 문제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이를 다룰 차원도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 눈앞의 이익에만 벌게진 나머지 근심의 포로로 남는 한, 이런 높은 차원은 찾아질 수 없다. 나무만 보지 않고 숲 전체를 굽어보려 노력할 때 이해가 충돌하는 갈등을 풀 열쇠가 주어지지 않을까?
전체를 굽어보려는 ‘메타 인지’의 훈련으로 「바다의 철학」만큼 좋은 책은 따로 없다. 나는 ‘철학함’의 생생함을 이처럼 손에 잡힐 듯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숄츠에게 경탄했다. 철학사라는 거대한 바다를 구석구석 안내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길라잡이를 제시하는 그의 안목에 깊은 울림을 받았다. ‘철학함’의 고민이 만져질 것만 같은 현장성과, 기왕의 철학 성과를 오늘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묶으려는 열정이 이런 좋은 책을 써낸 원동력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것은 침묵하자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철저히 따져 묻자. 칸트는 말했다. 누가 너의 뺨을 때리면 싫은 것처럼, 너도 남의 뺨을 때리지 말라! 이 말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가 풀릴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말인즉, 네가 신이 되는 삶을 살아라! 눈앞의 이해관계로 남의 등에 칼을 꽂는 인생은 살지 말자. 현실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생각의 차원을 높이 끌어올리면 모두가 만족하는 삶의 길이 열린다. 기억하자, 모든 것을 품고도 한결같은 푸름과 고요함을 자랑하는 저 거대한 바다는 우리가 어리석음에 빠질 때마다 격노와 격랑으로 일깨워왔다! 이 책은 그 생생한 증언이다.
2019년 12월 30일 김희상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이 고단한 삶을 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에서(Woher) 어디로(Wohin)?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Wie) 살아야 마땅한가? 이 세 가지 물음, 곧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태도를 우리는 철학이라 부른다.
어렵고 골치 아프며 배배 꼬인 말장난으로 오해받기 일쑤인 철학은 그 출발만큼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우리 인간의 출신을 궁금해 하는 물음은 죽어 어디로 갈지 묻는 물음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인간은 생각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이 물음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이 물음에 답을 주려한 다양한 시도들을 안다.
플라톤은 우리 인간의 탄생을 두고 레테강을 이야기한다. 본래 인간의 영혼은 완전한 지식을 자랑했으나 망각의 강물을 마시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 탓에 무지로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의미심장하고도 애매한 이야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신화는 인간의 탄생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심의 신 ‘쿠라’(Cura)는 근심을 잊고자 강물로 진흙을 빚어 생명체를 만든다. 쿠라는 이 진흙덩어리에게 정신을 불어넣어달라고 주피터에게 애원한다. 완성된 생명체에 이름을 붙이려는 쿠라를 보며 주피터는 정신을 불어넣어준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흙이 무슨 소리냐며 이 생명체는 어디까지나 재료를 제공한 자기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항변한다.
시비가 그치지 않자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가 심판을 맡는다. 그의 판결은 간단명료했다. 이 새 존재가 죽으면 주피터는 정신을 되돌려 받아라. 흙은 재료를 되찾아 가라. 그리고 이 생명체를 빚은 진짜 주인은 쿠라이므로 이 존재는 살아 있는 내내 ‘근심’의 차지가 될지라. 이 짤막한 신화가 담은 함의를 괴테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일단 차지한 사람은 / 만사가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 …… / 그는 풍성한 가운데 굶으리라 / 기쁨이든 괴로움이든 / 다른 날로 미루며 / 오로지 미래를 염려하며 / 절대 근심을 멈추지 못하리라.”(「파우스트 2부Faust Ⅱ」, 마지막 막에서.)
하루도 근심 잦을 날이 없는 우리네 인생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야기인즉 우리는 물과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며 이런 재료의 허망함 탓에 근심을 멈출 수 없다는, 아주 그럴싸한 비유다. 그러나 철학은 이런 다채로운 함의를 다룬 그럴듯한 비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 우리가 근심에서 놓여날 수 없는 존재라고? 근심을 만들어내는 뿌리는 뭐야? 어떻게 하면 이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철학은 말한다. 어디서 왔으며, 죽어 무슨 심판을 받고 어디로 갈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아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인지 하는 물음의 답일 뿐이다.
그러나 레테 강물을 마신 우리는 이 답을 잊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리스 신화는 또 다른 물을 상기시켜준다. 잊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해주는 강의 이름은 ‘므네모시네’(Mnemosyne: 라틴어 memoria)이다. 레테의 저주로 기억을 잃었으되, 밝히 생각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은 므네모시네의 축복을 누린다.
물론 이 역시 애매한 이야기다. 이런 신화에 만족하지 않고 철학은 기억의 상실과 회복을 함께 묶는 물의 포용성에 주목한다. 대립하지만 하나인 것,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같은 것, 다시 말해 근심으로 얼룩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풀어줄 하나의 원리는 무엇일까?
이쯤에서 다시금 사람들은 물으리라. 그거 봐, 복잡한 게 철학이잖아? 또다시 이야기가 꼬이는데……. 그러나 문제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이를 다룰 차원도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 눈앞의 이익에만 벌게진 나머지 근심의 포로로 남는 한, 이런 높은 차원은 찾아질 수 없다. 나무만 보지 않고 숲 전체를 굽어보려 노력할 때 이해가 충돌하는 갈등을 풀 열쇠가 주어지지 않을까?
전체를 굽어보려는 ‘메타 인지’의 훈련으로 「바다의 철학」만큼 좋은 책은 따로 없다. 나는 ‘철학함’의 생생함을 이처럼 손에 잡힐 듯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숄츠에게 경탄했다. 철학사라는 거대한 바다를 구석구석 안내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길라잡이를 제시하는 그의 안목에 깊은 울림을 받았다. ‘철학함’의 고민이 만져질 것만 같은 현장성과, 기왕의 철학 성과를 오늘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묶으려는 열정이 이런 좋은 책을 써낸 원동력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것은 침묵하자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철저히 따져 묻자. 칸트는 말했다. 누가 너의 뺨을 때리면 싫은 것처럼, 너도 남의 뺨을 때리지 말라! 이 말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가 풀릴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말인즉, 네가 신이 되는 삶을 살아라! 눈앞의 이해관계로 남의 등에 칼을 꽂는 인생은 살지 말자. 현실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생각의 차원을 높이 끌어올리면 모두가 만족하는 삶의 길이 열린다. 기억하자, 모든 것을 품고도 한결같은 푸름과 고요함을 자랑하는 저 거대한 바다는 우리가 어리석음에 빠질 때마다 격노와 격랑으로 일깨워왔다! 이 책은 그 생생한 증언이다.
2019년 12월 30일 김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