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11월 상품권
청춘 이벤트
북클러버
싱가포르
올해의 책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김초롱 아나운서가 추천하는 인생 도서

관련상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작가에게 세 명의 후배가 찾아온다. 그들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저 | 위즈덤하우스

마케팅 텍스트 배너

웹진채널예스


라스트 스쿨데이 [데이즈드 앤드 컨퓨즈드] 영화음악 (Dazed & Confused OST) [Limited Edition Green 2 LP]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수입
LP

라스트 스쿨데이 [데이즈드 앤드 컨퓨즈드] 영화음악 (Dazed & Confused OST) [Limited Edition Green 2 LP]

Alice Cooper, ZZ Top, Nazareth, Ted Nugent, The Runaways 노래 외 8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Warner Music / Rhino | 2013년 05월 0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47,500원
할인가 37,800 (20%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카드혜택
결제혜택
카드할인 정보
seyPay seyPay 첫등록시 2,000 포인트 지급 (첫가입+결제수단 등록시) 자세히 보기
BC카드 BC카드 4000원 할인쿠폰 (페이북 경유, 금요일 9시 1500장 한정) 자세히 보기
 모바일팝 모바일 4% 즉시할인 (모바일 결제시) 자세히 보기
네이버페이 네이버페이 1% 적립 (전체결제) 자세히 보기
할인/적립 카드 더보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 현재 새 상품은 구매 할 수 없습니다. 아래 상품으로 구매하거나 판매 해보세요.

일시품절

수량
배송비 : 무료 배송비 안내
  • 국내배송만 가능
1/4
광고 AD

라스트 스쿨데이 [데이즈드 앤드 컨퓨즈드] 영화음악 (Dazed & Confused OST) [Limited Edition Green 2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3년 05월 01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디스크

Disc 1
  • A1 Rock And Roll, Hoochie Koo - Rick Derringer
  • A2 Slow Ride - Foghat
  • A3 School's Out - Alice Cooper
  • A4 Jim Dandy - Black Oak Arkansas
  • A5 Tush - ZZ Top
  • B1 Love Hurts - Nazareth
  • B2 Stranglehold - Ted Nugent
  • B3 Cherry Bomb - The Runaways
Disc 2
  • C1 Fox On The Run - The Sweet
  • C2 Low Rider - War
  • C3 Tuesday's Gone - Lynyrd Skynyrd
  • D1 Highway Star - Deep Purple
  • D2 Rock And Roll All Night - Kiss
  • D3 Paranoid - Black Sabbath

아티스트 소개 (13명)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앨리스 쿠퍼는 현재 대부분의 헤비메탈, 익스트림 록 밴드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미지, 즉 기괴한 의상, 현란한 분장, 충격적인 무대 매너 등을 가장 먼저 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록의 산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거물이다. 음악 팬들은 30년 넘게 행해진 그의 엽기 반란의 음악과 무대를 ’쇼크 록’으로 명명하고 그를 대부로 임명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을 시작으로, 1990년대 데스, 고딕, 블랙, 둠 등으로 가지 치기를 한 익스트림 메탈에 이르기까지 앨리스 쿠퍼가 심어놓은 이미지 장치들은 헤비메탈의 올 라운드를 아우르고 있다. 또한 마릴린 맨슨으로 대표되는 인더스트리얼도 엘리스 쿠퍼의 편린들이다. 1948년 2월 4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앨리스 쿠퍼(본명: Vincent Furnier)는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 나즈(Nazz)라는 스쿨밴드를 결성하며 거친 록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1968년 앨리스 쿠퍼로 개명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밴드명으로 내걸고 쇼크 록의 오프닝을 알렸다. 음악 자체가 파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와 행동거지는 파격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검은 분장을 눈자위 가득 칠하고 영적인 듯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는 일부 대중에게 역겨움을 이끌어 내었지만 동시에 수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며 엽기와 극단이 록의 중추적인 흐름으로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엘리스 쿠퍼는 1969년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데뷔작 부터 1973년 7집 에 이르는 기간동안 쇼크 록의 제왕으로서 그 본분을 충실히 했다. ’I’m eighteen’, ’Under my wheels’, ’Elected’, ’No more mr. nice guy’, ’Teenage lament ’74’ 등 많은 하드 록 히트곡들을 쏘아올렸고, 1971년 투어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공연 모습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마녀가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하는 요상한 꿈을 꾼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만큼 그의 행동은 주술성이 강한 것이었다. 샤머니스트, 또는 ’악령의 전도사’와 같은 단어가 매우 잘 어울렸다. 공연에서는 누런 얼룩 구렁이와 입을 맞추고, 목을 매는 등 갖은 엽기 행각은 절정에 달했다. 1975년 부터 솔로 뮤지션으로 전향한 그는 강렬한 록 밴드의 프런트맨에서 인간미를 겸비한 싱어 송 라이터로 파격 변신을 했다. 당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던 그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 음악적으로 평가절하 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You & me’, ’I never cry’, ’How you gonna see me now’ 등 팝에 가까운 발라드 곡들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잠시동안의 휴지기 이후 앨리스 쿠퍼는 이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다시금 본령을 회복했다. 1986년 작품 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조 새트리아니, 롭 좀비, 슬래시 등 많은 후배 뮤지션들과 조우하며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고, 1994년 발표한 컨셉 앨범 등에서 특유의 개성 넘치는 창작력을 발휘하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월 18일 지지 탑은 텍사스인의 명예를 드높인 부시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공연을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부시가 지켜보는 가운데 화려하게 펼쳤다. 물론 부시와 지지 탑의 인연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텍사스 주지사로 재직하던 부시는 오스틴에서 5월 15일을 ''지지 탑의 날''로 선포하고 화려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부시는 지지 탑에게 텍사스인의 명예를 전세계에 떨친 공... 지난 1월 18일 지지 탑은 텍사스인의 명예를 드높인 부시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공연을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부시가 지켜보는 가운데 화려하게 펼쳤다. 물론 부시와 지지 탑의 인연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텍사스 주지사로 재직하던 부시는 오스틴에서 5월 15일을 ''지지 탑의 날''로 선포하고 화려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부시는 지지 탑에게 텍사스인의 명예를 전세계에 떨친 공로로 길이 남을 선물을 전달한 것이다. 지지 탑은 텍사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그룹이다. 그들은 텍사스인(Texan)이라는 특유의 자존심을 가지고 주(州) 사람들의 정서적 대변자 노릇을 해왔다. 해오고 있다. 지지 탑은 미국을 대표하는 블루스 록, 부기 록의 자존심이다. 1960년대 후반 흥했던 블루스 록과 부기우기 록의 양식을 전수 받아 오늘날까지 30년간 한번의 흐트러짐 없이 유지, 발전시켜 왔다. 그 동안 한 차례의 멤버 변화가 없었다는 점도 밴드를 위대하게 만드는 중요 요건이다. 또한 빌리 기본스(Billy Gibbons)과 더스티 힐(Dusty Hill)의 배꼽까지 내려온 긴 수염, 하얀 운동 모자, 그리고 코믹한 제스처와 뱀, 닭, 새, 황소 등을 무대 위에 직접 올려놓고 공연을 하는 독특한 풍경 등은 지지 탑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물론 ''Blue jean blues''도 빼놓을 수 없는 지지 탑의 보물이다. 지지 탑은 1969년 기타리스트 빌리 기본스, 베이시스트 더스트 힐, 드러머 프랭크 비어드(Frank Beard)의 트리오도 결성됐다. 밴드는 1970년 데뷔작 < Z.Z. Top''s First Album >, 1972년 두 번째 앨범 < Rio Grande Mud >를 발표했지만, 고향 텍사스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삼인조는 1973년 < Tres Hombres >가 차트 8위, 2년 뒤의 < Fandango! >가 차트 10위에 랭크되면서 미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후자는 라이브 실황과 스튜디오 녹음을 동시에 담아낸 독특한 작품으로 ''Tush''가 인기를 모았다. ''지지 탑이 내시빌에서 앨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를 능가한다''는 < 뉴스위크 >의 당시 기사는 트리오의 명성이 텍사스를 뛰어넘어 미국 전체로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 1976년 < Tejas >를 내놓은 밴드는 재충전을 위해 2년 가량의 휴지기에 들어갔다. 새롭게 각오를 다진 지지 탑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신시사이저를 가미시켜 현대적인 부기 록을 선보인 1983년 앨범 < Elimination >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천 만장이 넘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비록 차트에는 9위에서 멈췄지만 183주나 머무는 신기원을 창출해냈다. 영국에서도 3위에 오르며 135주간 자리를 지켰다. 2년 뒤에 발표한 음반 < Afterburner > 역시 4백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이 기간에 ''Sharp dressed man'', ''Gimme all your lovin'''', ''Legs'' 같은 히트곡들도 쏟아져 나왔다. 1990년대에도 지지 탑의 인기는 여전했다. 1990년 < Recycler > 6위, 1992년 < Greatest Hits > 9위, 1994년 < Antenna > 14위, 1996년 < Rhythmeen > 29위 등 세월의 흐름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특히 트리오는 1992년 다섯 장의 앨범을 내는 조건으로 3천만 달러를 받고 < 워너 >에서 < RCA >로 이적하는 ''대 사건''을 일으켰다. 웬만한 대형 아티스트조차 받기 힘든 금액을 받고 옮겨간 것이다. 다시금 그들의 진가가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1999 < XXX >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내놓고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나자레스(Nazareth)는 1969년에 스코틀랜드에서 결성된 하드록 밴드이지만 아직까지도 애청되고 있는 불멸의 러브 송 ‘Love hurts’와 ‘Dream on(에어로스미스의 곡과는 다른 곡)’ 때문에 정당한 평가와 관련해서는 손해를 보에 대해 손해를 보고있는 그룹이다. 블루스에서 영향을 받은 정통 하드록을 구사하면서 올드 록 매니아의 꾸준한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두 곡에 의해 발라드 전문... 나자레스(Nazareth)는 1969년에 스코틀랜드에서 결성된 하드록 밴드이지만 아직까지도 애청되고 있는 불멸의 러브 송 ‘Love hurts’와 ‘Dream on(에어로스미스의 곡과는 다른 곡)’ 때문에 정당한 평가와 관련해서는 손해를 보에 대해 손해를 보고있는 그룹이다. 블루스에서 영향을 받은 정통 하드록을 구사하면서 올드 록 매니아의 꾸준한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두 곡에 의해 발라드 전문 록그룹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로드 스튜어트 스타일의 허스키 보컬인 댄 맥카퍼티(Dan McCafferty)를 위시해 매니 찰튼(Manny Charlton), 피트 애그뉴(Pete Agnew), 다렐 스위트(Darrell Sweet) 등을 원년 멤버로 한 나자레스는 1970년대를 맞아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의 런던으로 본거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1년에 발표한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으로 신고식을 치른 이후 4년 동안 당시로는 드물게 라이브 음반을 두 장씩이나 발표, 실전에 강한 밴드로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공연뿐만 아니라 정규 앨범 제작에도 열심이었던 이들은 1년에 2장의 LP도 소화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면서 ‘Broken down angel’이나 ‘Bad bad boy’ 등의 노래들로 1970년대 초반까지 영국에서는 나름의 지명도를 축적했고 조니 미첼의 곡 ‘This flight tonight’과 밥 딜런의 ‘The ballad of Hollis Brown’를 9분으로 장대하게 재구성한 버전이 실린 앨범 < Loud’n’ Proud >로 강렬한 밴드의 인상을 굳혔다.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도 에벌리 브라더스, 밥 딜런, 우디 거스리 등의 곡을 주로 다룰 만큼 미국에 대한 구애(?)를 계속했지만 미국에서의 성공은 그때까지도 요원해 보였다. 음악의 구성이 비교적 잘 읽힌 상대적 개성 부재와 그 미국 지향적 사운드 때문에 비평가들로부터 성공한 뒤에도 점수가 나빴다. 이들에게 대망의 미국행(行) 성공 티켓을 쥐어 준 것은 1975년에 나온 여섯 번째 정규 앨범 < Hair Of The Dog >이었다. 여기서 싱글로 커트된 히트곡 ‘Love hurts’가 이듬해 빌보드 싱글 차트 8위에 오르면서 나자레스는 비로소 국제적인 밴드로 날개를 펴기에 이르렀다. 1950년대 로커빌리 명 듀엣이었던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1970년대와 1980년대 국내 라디오에서 엄청난 리퀘스트를 기록했으며, 한국인 좋아하는 팝송의 설문 조사에서도 빠짐없이 꼽히는 록발라드의 고전이 됐다. 이 곡은 팝 매니아들에게는 그램 파슨스(Gram Parsons)의 라이브 버전으로도 유명하며 ‘Believe’의 주인공 셰어(Cher)의 앨범 제목이 될 만큼 그녀의 버전으로도 널리 애청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후반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넘기면서 펑크의 강풍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난 뒤 1980년대부터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면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음반 제작은 계속되었지만 히트 행진은 뚝 끊겼다. 그러나 1982년에 공개된 음반 < 2XS >에 수록된 ‘Dream on’은 본고장에서는 사장된 노래였으나 국내에서만은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Love hurts’와 유사한 분위기의 록발라드로 199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요트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장면을 담은 캐주얼 복장의 CF에 사용되어 신세대 팬들의 귀를 잠식한 덕이었다. 1990년대까지 꾸준한 신보 발표와 지칠 줄 모르는 정력적인 공연 활동으로 21세기를 맞이했지만 ‘나사렛의 태양’은 이제 추억 저편으로 저물어 가고 있다.
노래 : Ted Nugent (테드 뉴전트)
1970년대 펑키(funky), 소울(soul), 재즈 그리고 록을 결합한 고유상표의 음악을 창조, 일련의 팝 히트곡을 낸 추억의 흑백 혼성그룹이다. 그들의 펑키한 멜로디와 정치성이 강했던 음악은 1990년대 들어와 신세대 록과 힙합 그룹에게 암암리에 영향력을 미친 그룹으로 재조명된 바 있다. 애초 애니멀스(Animals) 출신의 백인 블루스 로커 에릭 버든(Eric Burden)이 그룹의 간판으로 활동했으며 우... 1970년대 펑키(funky), 소울(soul), 재즈 그리고 록을 결합한 고유상표의 음악을 창조, 일련의 팝 히트곡을 낸 추억의 흑백 혼성그룹이다. 그들의 펑키한 멜로디와 정치성이 강했던 음악은 1990년대 들어와 신세대 록과 힙합 그룹에게 암암리에 영향력을 미친 그룹으로 재조명된 바 있다. 애초 애니멀스(Animals) 출신의 백인 블루스 로커 에릭 버든(Eric Burden)이 그룹의 간판으로 활동했으며 우리들에게는 ’Before the rain’ 등 감성적인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준 리 오스카(Lee Oskar)가 몸담았던 그룹으로도 유명하다. 영국의 록그룹 애니멀스의 리더였던 에릭 버든은 1969년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가 작곡자 겸 프로듀서인 제리 골드스타인(Jerry Goldstein)의 기획에 따라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그룹을 구상했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새 그룹을 만들었고 이 것이 에릭 버든 앤 워(Eric Burden And War)였다. 멤버들은 1960년대 크리에이터스(Creators)에서 나이트 시프트(Night Shift)란 이름으로 캘리포니아 롱 비치에서 활동하던 흑인 플레이어들이 중심이 되었다. 건반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로니 조단(Ronnie Jordan), 기타 하워드 스코트(Howard Scott),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찰스 밀러(Charles Miller) 베이스 피터 로센(Peter Rosen) 그리고 드럼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이 그들이었다. 워에는 당시 버든과 친교하던 백인 하모니카주자 리 오스카가 포함되었다. 그룹이름은 당시 1970년대 평화물결에 대한 집착과 상반(相反)하려는 의도에서 붙였고 거기에는 이들의 정치적 지향이 담겨있었다. 곧바로 피터 알렌이 약물과용으로 숨지자 전 크리에이터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던 비 비 디커슨(B. b. Dickerson)이 들어왔고 건반주자 토마스 알렌(Thomas Allen)이 추가로 영입돼, 7인조 라인업이 확립됐다. 1970년에 발표된 첫 앨범 < Eric Burden Declares War >에서 ’Spill the wine’이 차트3위에 오르며 골드 레코드를 기록, 단숨에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71년 2집 < The Black man’s Burden >의 발표와 함께 2월에 단행된 에릭 버든은 유럽 순회공연에서 피로함이 역력해 공연을 마치지 못한 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 버렸다. 그룹과 매니저는 그 없이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에릭 버든 없이 그 해 5월 발표된 앨범 < War >에서는 싱글 ’All day music(36위)’가 커트되었고 로니 조던이 리드보컬을 맡고 난 이 때부터 워의 전성기가 열렸다. 에릭 특유의 샤우트 창법을 버리고 펑키하면서 라틴 풍의 리듬을 살린 곡들이 발표되어 차트와 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이듬해인 1972년 신보 < All Day Music >에서 편집하여 새롭게 다듬은 싱글 ’Slippin’ into darkness’는 차트16위에 머물렀지만 골드를 달성했고 그 해 겨울 내놓은 새 앨범 < The World Is Ghetto >는 2주간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단숨에 밀리언셀러가 됐다. 완연한 펑키 및 소울 냄새가 물씬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10분 길이였고, 수록곡 ’City, country, city’는 러닝타임이 13분이나 됐다. 싱글 ’The world is ghetto(7위)’와 ’The Cisco kid(2위)’는 모두 골드 디스크를 따냈다. 이후 ’Gypsy man(8위)’ ’Me and baby brother(15위)’, 라이브 ’Ballero(33위)’에 이어 1975년 앨범 < Why Can’t We Be Friends >에서 타이틀곡(6위)과 라틴 풍 펑키 ’Low rider(7위)’가 연속 빅히트를 쳤다. 특히 ’Why can’t we be friends’는 당시 지구궤도 순환에 모처럼 조우한 미소(美蘇) 우주인에게 보내는 축하 곡으로 채택되어 지금도 그룹 워를 대표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하지만 골드가 된 그 해 여름의 싱글 ’Summer(7위)’을 끝으로 이들은 다시 차트 톱10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1976년 그룹과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nited Artists)와의 마케팅을 둘러싼 갈등으로 소속 레이블을 옮기고 인원이 잇따라 교체되면서 그룹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리 오스카도 이 무렵 솔로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룹은 블루 노트, MCA, RCA로 옮겨 다니면서도 1980년대 내내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1990년대 초반 그들의 앨범이 재발매된 가운데 R&B와 힙합에 대한 그들의 영향이 신세대 그룹들에게 평가되면서 다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복원된 인기를 밑천으로 모처럼 만든 1994년 신보 < Peace Sign >는 평단의 격찬을 낳았다. 스카펑크 그룹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는 1997년 앨범 < Fush Yu Mang >에 ’Why can’t we be friends’를 리메이크했고 그 해 개봉된 영화 < 부기 나이츠 >(Boogie Nights)에 ’Spill the wine’이 삽입되는 등 1970년대 소울 펑키 복고 붐이 일면서 그들의 노래는 지금도 끊임없이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고있다.
짙은 화장과 외계인 같은 복장, 굽 높은 구두로 상징되는 키스(Kiss)는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함께 아메리칸 록을 30년 이상 양분해 온 미국의 국가대표 급 하드록 헤비메탈 그룹이다. 미국에서만 3천 8백만 장의 판매고와 미국 그룹으로는 세 번째로 많은 골드레코드(총 24장, 이중 13장은 플레티넘)를 보유하고 있는 키스의 역사는 아메리칸 하드록의 흥망성쇠와 그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짙은 화장과 외계인 같은 복장, 굽 높은 구두로 상징되는 키스(Kiss)는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함께 아메리칸 록을 30년 이상 양분해 온 미국의 국가대표 급 하드록 헤비메탈 그룹이다. 미국에서만 3천 8백만 장의 판매고와 미국 그룹으로는 세 번째로 많은 골드레코드(총 24장, 이중 13장은 플레티넘)를 보유하고 있는 키스의 역사는 아메리칸 하드록의 흥망성쇠와 그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후배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3분 내외의 간결한 곡 구성과 치밀한 기타솔로, 팝적인 멜로디와 ’즐기자’는 파티용 가사는 1980년대 L. A. 메탈의 지침서로 통했다. 또한 일본의 가부키 연극에서 힌트를 얻은 짙은 분장과 회전폭죽, 드라이 아이스를 이용한 시각적인 무대장치는 일본의 비주얼 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994년에 공개된 키스의 트리뷰트 앨범 < Kiss My Ass >에 엑스 재팬의 드러머 요시키가 참여한 것을 상기!). 또한 악마(Demon), 스타차일드(Starchild), 우주인(Spaceman), 캣 맨(Cat)으로 불리던 각 멤버들의 캐릭터는 10대들에게 크게 어필하여 공연마다 멤버들의 메이크업으로 분장한 키스 매니아들이 양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개성을 부각한 만화와 게임까지 제작되는 등 그 문화적 파급력도 엄청났다. 1960년대 후반 위키드 레스터(Wicked Lester)라는 하드록 밴드에서 활약하던 진 시몬스(Gene Simmons/베이스, 보컬)와 폴 스탠리(Paul Stanley/기타, 보컬)는 광고를 통해서 피터 크리스(Peter Criss/드럼, 보컬)와 에이스 프렐리(Ace Frehley/기타, 보컬)를 선발하여 완전한 라인업을 갖추었다. 1973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첫 출발은 순탄치 못했다. 매스컴은 진한 분장을 한 키스를 글램록 아티스트의 아류로 비난했고, 피를 토하고 불을 뿜는 무대는 ’서커스를 하는 광대들’이라며 혹평을 가했다. 앨범 판매고 역시 저조했다. ’Strutter’, ’Deuce’, ’Black diamond’ 등 훗날 록의 고전으로 그 평가가 격상된 넘버들이 수록된 데뷔앨범 < Kiss >는 87위에 그쳤고, L. A. 메탈의 원형을 제시한 2집 < Hotter Than Hell >은 더 저조했다(100위). 일주일에 일곱 번 무대에서는 ‘철인 3종 경기성’ 강행군으로 고정 팬들을 끌어 모은 키스는1975년의 3집 < Dressed To Kill >(32위)이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면서 그 노력의 열매를 수확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실황음반 < Alive >가 앨범차트 9위를 기록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3분에 달하는 피터 크리스의 드럼 솔로를 담은 ’100,000 years’와 싱글 차트 12위를 기록한 최고의 라이브 송 ’Rock and roll all nite’ 등 살아있는 라이브 현장을 담은 < Alive >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황 음반의 대열에 올랐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는 ‘키스 타임’이었다. < Destroyer >(11위), < Rock N’ Roll Over >(11위), < Love Gun >(4위), < Alive II >(7위), < Double Platinum >(22위) 모두가 플레티넘을 기록할 정도로 이들의 능력과 재능은 팬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멜로디 감각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나타내어 발라드 ’Beth(7위)’를 비롯해 ’Calling Dr. Love(16위)’, ’Hard luck woman(15위)’이 싱글 차트에 진입했으며, ’Detroit rock city’, ’God of thunder’, ’Love gun(61위)’ 등은 록 팬들의 애청, 애창곡이 되었다. 1978년 9월 18일에는 멤버 전원이 발표한 솔로앨범 모두가 플레티넘을 기록해 그 가공할 인기를 입증했다. 1979년에는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I was made for loving you(11위)’를 장전한 < Dynasty >(9위)를 발표하여 순식간에 더블 플레티넘을 획득했지만, 당시의 대세였던 디스코 사운드를 도입한 ‘눈치보기 작전’은 팬들을 실망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드러머 피터 크리스는 탈퇴를 결정했고 곧 이것은 전성기의 퇴행으로 이어졌다. 전자 음악이 대세를 쥐기 시작한 1980년대는 키스의 시대가 아니었다. < Unmasked >(35위)는 간신히 골드를 기록했지만 에릭 카(Eric Carr)를 새로운 드러머로 맞이해 록 뮤지컬을 시도한 컨셉트 앨범 < Music From ’The Elder’ >(75위)와 초기 파워를 되살린 < Creatures In The Night >(45위)는 오히려 그룹을 더욱 깊은 슬럼프에 빠뜨렸다. 설상가상으로 키스의 중추신경인 기타리스트 에이스 프렐리 마저 알콜 문제와 교통사고로 탈퇴하는 최악의 악재가 이어지면서 해산 설까지 나돌았다. 속주 기타 플레이어 비니 빈센트(Vinnie Vincent)의 가입으로 팀을 재 정렬한 쿼텟은 두터운 분장을 지우고 경쾌한 사운드로 업데이트 된 < Lick It Up >(24위)을 발표해 3년 만에 골드를 따내며 재기에 성공했다. 인기를 회복한 이들은 < Animalize >(19위), < Asylum >(20위), < Crazy Night >(18위), < Smashes, Thrashes And Hits >(23위)까지 모든 음반들이 히트를 기록했다. 이 앨범들에서 ’Lick it up(66위)’, ’Heaven’s on fire(49위)’, ’Tears are falling(51위)’, ’Crazy crazy night(65위)’가 배출되었고, 1989년의 < Hot In The Shade >(29위)에서는 발라드 ’Forever’가 8위를 기록해 싱글 차트에서의 성공도 재현했다. 10년 동안 드러머 자리를 지켰던 에릭 카가 1991년 11월 뇌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후임으로 에릭 싱어(Eric Singer)를 영입한 키스는 < Revenge >(6위)와 < Alive III >(9위)를 골드 앨범으로 장식하며 에릭 카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올드 팬들은 짙은 메이크업을 한 키스를 여전히 그리워했고, 오리지널 드러머 피터 크리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팬들에게 돈을 받고 사인을 해주며 연명하고 있다는 소문이(후에 사실 무근으로 밝혀짐) 도는 등 옛 향수를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돌자 창단 멤버인 진 시몬스와 폴 스탠리, 에이스 프렐리, 그리고 피터 크리스는 1995년 MTV 언플러그 무대를 위해 함께 섰다. 15년만의 상봉이다. 이 공연실황을 담은< MTV Unplugged >(15위)가 발표되자 팬들은 분장을 한 오리지널 라인업의 재결성과 투어를 원했다. 팬들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 이들은 얼굴을 마분지로 삼아 짙은 그림을 그려가면서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한 전미투어를 시작했다. 1998년에 공개된 < Psycho Circus >는 발매와 동시에 3위를 기록하면서 노장의 저력을 증명했지만 피터 크리스는 2001년에, 그리고 에이스 프렐리는 2002년에 다시 탈퇴했다.
1969년에 탄생한 포그햇(Foghat)은 하드록에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초기 록크롤을 혼합한 미국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던 영국의 4인조 밴드였다. 사전 지식없이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미국 출신이라고 믿을 정도로 직선적이고 호방한 음악으로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큰 성공을 낚았다. 그러나 록순수주의자들이나 록평론가들은 포그햇이 하드록과 팝에 블루스와 부기우기를 혼합한 것 자체를 타협이란 시각으로... 1969년에 탄생한 포그햇(Foghat)은 하드록에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초기 록크롤을 혼합한 미국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던 영국의 4인조 밴드였다. 사전 지식없이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미국 출신이라고 믿을 정도로 직선적이고 호방한 음악으로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큰 성공을 낚았다. 그러나 록순수주의자들이나 록평론가들은 포그햇이 하드록과 팝에 블루스와 부기우기를 혼합한 것 자체를 타협이란 시각으로 보며 관대한 평가를 유보한다.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활동했던 블루스록 그룹 사보이 브라운(Savoy Brown)에 몸담고 있던 론섬 데이브 페버렛(Lonesome Dave Peverett, 보컬&기타)과 로저 얼(Roger Earl, 드럼), 토니 스티븐스(Tony Stevens, 베이스)가 작당해 새로이 포그햇을 결성했고 로드 프라이스(Rod Price)를 기타리스트로 영입해 준비 태세를 갖췄다. 로드의 합세는 앞으로 지향하는 이들의 음악적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왜냐하면 데이비, 토니, 로저는 ‘블루스맨’이었지만 로드는 하드록맨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블루스와 하드록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 이들의 볼륨은 다른 블루스 하드록 밴드들보다 몇 수치 더 높은 데시벨에 고정됐으며 이박사만큼 신바람 나는 질주감이 있었다. 처녀작부터 3집까지는 초기 록커빌리 성향의 복고적인(?) 분위기로 채색됐지만 1974년에 발표한 < Rock And Roll Outlaws >부터는 속도감 있는 블루지한 하드록을 선보여 전성기를 이룬다. 이듬해 나온 < Fool For The City >는 그 정점에 위치한 앨범으로 자신들만의 ‘포그햇 스타일’을 확립한다. 이 4인조의 대표곡 ‘Slow ride(20위)’를 비롯해 고속도로에서 듣기 안성맞춤인 ‘Fool for the city(45위)의 선전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동시에 차기 작품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 후반 펑크와 디스코의 도전을 이겨낸 포그햇은 이번엔 뉴웨이브와 맞서야 했다. 그러나 리더 데이브는 뉴웨이브에 대해 “이 음악은 내게 록커빌리를 생각나게 한다”면서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81년에 발표된 < Girls To Chat & Boys To Bounce >에서 뉴웨이브를 시도했는가 하면 윌리 딕슨(Willie Dixon), 알 그린(Al Green),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 같은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뮤지션들의 고전들을 소화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귀향이었다. 1984년에 해산했다가 지난 1990년 다시 ‘해쳐모여’를 한 이들은 다시 데뷔 시절의 원초적인 블루스 하드록으로 회귀한 음반 < Return Of The Boogie Men >으로 회춘을 시도했지만 애석하게도 2000년 2월 7일 리더 역할을 해왔던 데이브가 암으로 사망함으로써 포그햇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다. 데이브의 죽음으로 포그햇은 평단으로부터 유보된 가치를 새롭게 맞이할 시점에 있다.
밴드 : Black Oak Arkansas (블랙 오크 아칸사스)
서던 록 밴드 서던 록 밴드
1970년대에 ‘Fox on the run’이나 ‘Ballroom blitz’, ‘Action’, ‘Love is like oxygen’ 같은 록 넘버들로 사랑 받은 스위트(Sweet)는 남들이 준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보다 자신들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길 원했다. 명 작곡가 콤비인 니키 친(Nicky Chinn)과 마이크 채프만(Mike Chapman)의 노래들로 전성기를 달리던 1970년대 중반에 그들의 ... 1970년대에 ‘Fox on the run’이나 ‘Ballroom blitz’, ‘Action’, ‘Love is like oxygen’ 같은 록 넘버들로 사랑 받은 스위트(Sweet)는 남들이 준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보다 자신들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길 원했다. 명 작곡가 콤비인 니키 친(Nicky Chinn)과 마이크 채프만(Mike Chapman)의 노래들로 전성기를 달리던 1970년대 중반에 그들의 도움을 거부하며 ‘Made in Sweet’의 음악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성공이 보장된 현재대신 불확실한 미래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문 작곡가가 수혈한 10대 취향의 버블검 사운드를 뽑아냈던 스위트는 후대에 상대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으며 록 역사의 한 칸을 차지한다. 스위트의 보컬리스트 브라이언 코놀리(Brian Connolly)와 드러머 믹 터커(Mick Tucker)는 그룹 결성 이전인 1960년대에 웨인라이츠 젠틀멘(Wainwright’s Gentlemen-딥 퍼플의 보컬리스트 이안 길란이 첫 번째 보컬리스트였다)이라는 그룹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음악에 대한 공감대를 조율했다. 하지만 웨인라이츠 젠틀멘은 단 한 장의 정규 앨범을 공개하지 못한 채 1968년에 해산하자 브라이언과 믹은 새내기 기타리스트 프랭크 토피(Frank Torpey)와 베이시스트 스티브 프리스트(Steve Priest)를 영입해 더 스위트 샵(The Sweet Shop)을 결성했다. 곧 이름을 스위트로 간단명료화 시키며 세계를 향해 웅비할 준비를 갖춘다. 폰타나 레코드에서 발표한 싱글이 주목 받지 못하자 성미 급한(?) 프랭크 토피가 탈퇴하지만 그 후임으로 가입한 앤디 스코트(Andy Scott)는 복덩어리였다. 이후에 스위트는 RCA 레코드사에서 제시한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음반사에서 당시로서는 무명 작곡 콤비였던 니키 친과 마이크 채프만을 스위트의 전담 작곡가로 점지(?)해 주면서 이름처럼 ‘달콤한’ 성공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반, 니키 친과 마이크 채프만이 작곡한 ‘Little Willy’, ‘Blockbuster’, ‘Ballroom blitz’, ‘The six teens’, ‘Teenage Rampage’ 같은 노래들이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랑데부 히트를 기록했다. 스위트가 이렇게 10대 우상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글램 록에서 영향을 받은 화려한 모습이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나 퀸(Queen), 티 렉스((T-Rex) 등 동시대의 다른 글램 록 뮤지션들과는 달리 스위트의 음악은 쉽고 확실한 멜로디 훅을 가지고 있어 이름처럼 달았다. 바로 이것이 스위트가 버블검과 글램 록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유다. 1970년대 중반에 스위트는 니키 친과 마이크 채프만의 몸값을 불려주는 대행업체 역할과 틴에이저 그룹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통해 ‘아티스트’가 되길 원했다. 이 욕심 많은 밴드는 미국에서 5위까지 오른 ‘Fox on the run’과 1970년대에 국내의 9시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Action(20위)’, 그리고 ‘Fever of love’ 같은 하드 록 트랙으로 자립했는데, 이것은 또한 펑크의 ‘네 스스로 하라(Do it yourself)’를 실천한 스위트의 치열한 노력으로 이뤄진 결과였다. 1978년에 공개된 < Level Headed >는 전체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을 담아내어 자신들에게 두 번째 자극을 주었다. 수록곡 ‘Love is like oxygen(8위)’과 ‘California nights(76위)’가 히트 밴드로서의 위상을 지켜주었지만 다른 곡들은 아트 록을 지향하고 있으며 심지어 ‘Strong love’는 펑크(funk)를 시도하고 있다. 스위트는 이 음반으로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넓히고 그 깊이를 서서히 담아냈다. 이 앨범을 끝으로 보컬리스트 브라이언 코놀리(1997년 사망)는 스위트를 떠나고 건반 연주자 개리 모벌리(Gary Moberly)가 가세했지만 더 이상 앞서가는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1982년에 해산을 선언했다. 하지만 앤디 스코트와 믹 터커는 1989년에 스위트를 재가동시켜 지금까지 런던의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 1960년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반(反)문화(counterculture), 히피(hippie) 혁명이 현실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판명 나자, 1970년대 록의 전반적인 지형도는 큰 변화의 폭을 그렸다. 일명 ’We dacade’에서 ’Me dacade’로의 이동이었다. ’1970년대 들어 반문화적인 주장들이 그 힘을 잃고 일종의 판매기법으로 전락하자 록 걸작들의 특별한 지위는 점차 공동체의 견지가 아닌 개인적 예술의 견지에서 설명되기 시작했다.’ 라는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의 주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연스레 뒤따른 것은 ’장르의 세분화’였다. 특히 록 신에서는 하드 록 혹은 헤비메탈의 급격한 성장세가 도드라졌다. 1960년대 말부터 꽃을 피웠던 하드 록 사운드가 젊은 혈기의 대변자임을 자청, 록의 메인 장르로 우뚝 올라섰던 것. 바로 수많은 밴드들이 자웅을 겨뤘던 록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개막이었다. 그 중에서도 딥 퍼플은 ’소리의 볼륨’에 있어서 절대 강자였다. 1968년 영국 허트포드(Hertford)에서 결성된 이 하드 록 제왕은 한때 기네스 북 공인의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그룹’임을 뽐낼 만큼 열혈 헤드뱅어들을 휘하로 집결시켰다. 비록 월드 마케팅에서는 레드 제플린에 비해 뒤졌지만 적어도 국내와 일본에서만큼은 그들이 인기 넘버원이었다. 일례로 밴드의 시그니처 송이자 딥 퍼플이 오프닝을 섰던 스위스 몬트뢰 빌딩에서의 프랭크 자파 공연 당시의 화재를 보며 작곡한 ’Smoke on the water’는 록을 알기 위한 통과의례로 변함 없이 극빈 대접을 받고 있다. 또한 딥 퍼플은 기수로 구분될 만큼 잦은 멤버 교체로 유명했는데 명 기타리스트이자 리더 격이었던 리치 블랙모어의 독선이 그 주된 이유였다. 최초 그룹은 존 로드, 닉 심퍼, 리치 블랙모어, 로드 에반스, 이언 페이스의 라인업으로 출항의 닻을 올렸다. 허나 처녀작 < Shades of Deep Purple >(1968), 소포모어 음반 < Deep Purple >(1969), 3집 < The Book of Taliesyn >(1969) 등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듯 그들만의 캐릭터가 명확히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수록곡 대부분이 조 사우스(Joe South)의 ’Hush’(빌보드 4위)와 ’Hey Joe’,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Kentucky woman’(38위), 비틀즈의 ’Exposition/We can make it out’, 팝 클래식 ’River deep-Mountain high’(53위) 등, 리메이크로 채워져 있다는 데서 잘 파악된다. ’April’과 ’Anthem’ 등, 존 로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클래시컬한 넘버들 역시 별다른 피드백 효과를 얻지 못했다. 같은 해 로드 에반스와 닉 심퍼가 팀을 등지고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새로이 투입되면서 딥 퍼플의 황금 시대가 비로소 개막되었다. 권력의 축이 존 로드에서 리치 블랙모어에게로 옮겨간 것 또한 이 즈음이었다. 리치 블랙모어의 진두지휘 아래 그룹은 막강한 하드 록 사운드를 내뿜기 시작했다. 존 로드 작곡의 ’Concerto Group and Orchestra’를 기초로 완성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작 < Concerto Group and Orchestra >(1969) 이후에 발표한 일련의 앨범들이 이를 잘 대변한다. ’Child in time’, ’Speed king’ 등이 사랑 받았던 1970년의 < Deep Purple in Rock >, ’Strange kind of woman’, ’Black night’(66위) 등이 히트했던 빌보드 앨범 차트 32위의 < Fireball >(1971), 불멸의 명곡 ’Smoke on the water’(4위)와 ’Highway star’를 담고있는 1972년의 마스터피스 < Machine Head >(7위) 등이 그것들이다. 실황 작품인 < Made In Japan >(6위, 1972)은 각종 라이브 명반 선정에 빠지지 않고 등재될 만큼 동종(同種) 품목 중 발군임을 뽐냈다. 허나 1973년의 < Who Do You Think We Are >를 끝으로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탈퇴하면서 2기는 막을 고했다.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를 맞이하며 시작점을 찍은 3기 역시 찬란한 성과를 이어나갔다. 숨겨진 보석 ’Burn’이 수록된 동명 타이틀의 < Burn >(9위, 1974), 같은 해의 < Stormbringer >(20위)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던 것. 곡들 중, 후자에 실린 ’Soldier of fortune’은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바 있다. 여러 발라드 선곡집에 현재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골든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바로 리치 블랙모어가 레인보우(Rainbow)를 결성, 밴드를 떠남으로써 딥 퍼플은 좌초의 위기에 몰렸지만, 천재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Tommy Bolin, 1976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이 그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었다. 그의 음악적 취향이 적극 반영된 재즈풍의 음반 < Come Taste The Band >가 이 시기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헤비 메탈 지향성과 삐걱 화음을 자아내면서 딥 퍼플은 1976년 영국 투어를 끝마친 후 휴지기에 들어갔다. 밴드가 끊임없는 재 결합설에 부응하며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편 때는 1984년. 리치 블랙모어, 존 로드, 이언 길런, 로저 글로버, 이언 페이스의 드림 팀으로 구성된 그들은 < Perfect Stranger >(1984), < The House of Blue Light >(1987) 등을 내놓으며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이언 길런과 리치 블랙모어의 갈등으로 이언 길런 대신 조 린 터너를 보컬로 기용했던 < Slaves and Masters >(1990)를 기점으로 그룹의 인기 곡선은 완연한 하향세를 그렸다. 이언 길런을 재 수혈해 녹음했던 < The Battle Rages On >(1992)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리치 블랙모어가 또 다시 굿바이를 선언, 밴드는 결국 타이타닉 호의 운명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컨트리 록 기타의 달인 스티브 모스를 후임으로 낙점하면서 그룹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나갔다. 통산 16집인 1996년작 < Purpendicular >, 17집인 < Abandon > 등으로 호평 받았던 딥 퍼플은 국내에서 가졌던 몇 차례의 공연을 포함, 지금도 여러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누구에게나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존재는 있게 마련이다. 1990년대 대거 등장한 블랙 메탈, 고딕 메탈을 하는 밴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의를 표하는 블랙 사바스는 흑마술과, 오컬티즘(Occultism)을 음악에 본격적으로 끌어 온 최초의 그룹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그들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밤의 제왕’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기존의 록 밴드들이 낭만적이고,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들은 음침했고... 누구에게나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존재는 있게 마련이다. 1990년대 대거 등장한 블랙 메탈, 고딕 메탈을 하는 밴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의를 표하는 블랙 사바스는 흑마술과, 오컬티즘(Occultism)을 음악에 본격적으로 끌어 온 최초의 그룹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그들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밤의 제왕’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기존의 록 밴드들이 낭만적이고,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들은 음침했고, 전율스러웠으며, 철저히 반(反)미학적이었다. 그들이 데뷔한 1970년을 전후, 헤비메탈은 융성기를 맞고 있었다. ‘불멸의 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은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이미 빅 스타로 부상했으며, 새로운 보컬리스트 이안 길런(Ian Gillan)이 가세한 딥 퍼플(Deep Purple)또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전선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평화와 사랑이 가득했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등장한 그 격한 음악은 개성을 중시하게 된 당대 젊은이들의 기호에 꼭 맞는 것이었다. 때를 잘 만난 블랙 사바스는 록음악의 영역 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해냈다.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의 마법 같은 기타 솔로도,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의 탁월한 가창력도 없었지만, 이들에겐 여타 거목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망자(亡者)를 불러내는 듯한 주술적인 보컬의 소유자인 그룹의 상징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은 어두운 카리스마를 마음껏 발산하며 ‘산뜻한’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Toni Iommi)는 촌철살인의 기교파는 아니었지만, 우울하고 비장한 염세적 분위기를 전하기에 이보다 뛰어난 연주자는 없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빌 워드(Bill Ward)와 기저 버틀러(Geezer Butler)가 풍기는 이미지도 ‘암흑의 정령’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추종 세력이라 할만한 많은 이들을 몰고 다닌 블랙 사바스였음에도, 이들의 표면적 인기는 라이벌들에 미치지 못했다. 우선 레퍼토리에서 차이가 난다. ‘Stairway to heaven''를 포함해 숱한 명작을 남긴 레드 제플린은 제껴 놓고라도, 그들의 인기는 ‘Smoke on the water'', ‘Child in time'', ‘Speed king'', ‘Highway star''등의 수많은 애청곡을 보유한 딥 퍼플에도 뒤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긴 미국 차트의 히트곡이라곤 2집의 ‘Iron man'', ‘Paranoid''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블랙 사바스는 가시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룹이 아니었다. 또 그들의 팬들은 차트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도 않는 이들이었다. 블랙 사바스에게는 블랙 사바스만의 음악이 존재했다. 그들을 흠모하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공연장에 찾아와 신도이기를 자청했고, 그룹이 내뿜는 유독한 주문에 감염되었다. 블랙 사바스는 1967년 어스(Earth)라는 팀명으로 처음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영국의 공업도시 버밍엄의 외곽에서 자란 이들은 가난한 하층 계급으로 태어났고, 본능적으로 록음악에 빠져들었다. 곧 자신들과 같은 이름의 팀이 있음을 알게 된 이들은 1969년 ‘검은 안식일’이라는 뜻의 블랙 사바스로 간판을 바꿨다. 그리고 이듬해 충격적인 첫 번째 앨범을 공개하며 ‘지하의 세계’를 평정했다. 흔히들 얘기하는 이들의 최고작으로는 4집 < Black Sabbath Vol.4 >를 꼽는다. 국내에서 잘 알려진 발라드 ‘Changes''가 수록되어 유명해지기도 한 이 음반은 싸이키델릭의 요소와 기존의 헤비 사운드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큰 반향을 얻는다. 정점에 달한 밴드의 창작력은 계속해서 걸작 < Sabbath Bloody Sabbath >와 < Sabotage >를 낳았고, 이들의 명성은 최고 수위에 달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블랙 사바스는 그러나 팀의 요축 오지 오스본이 알콜중독으로 갈팡질팡하면서 누수가 발생했다. 결국 그는 < Never Say Die! >를 마지막으로 팀과 작별을 고하고 더 큰 명성을 획득하게 되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많은 록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블랙 사바스도 이후 멤버 교체 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게 되는데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 이안 길런(Ian Gillan), 토니 마틴(Toni Martin)등 싱어의 자리에만 3번의 자리이동이 있었다. 팀의 얼굴들이 앨범 발표마다 달라지면서 혼선을 느낀 것은 멤버들 자신보다 팬들이었다. 이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지지도도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칭 명반이라 일컬어지는 앨범도 드물어지게 된다. 디오 시절의 < Heaven & Hell >이 수작으로 꼽히지만 역시 블랙 사바스의 전성기는 오지 오스본이 프론트맨으로 적을 둘 때였다. 그를 이어 가입한 보컬들의 실력이 부족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누구도 오지의 묵시록적인 목소리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이후 잠잠하기만 했던 블랙 사바스는 1998년 말, 오리지널 멤버로 다시 규합해 투어를 시작하며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팀원들의 모습에선 예전같은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이미 이들은 다시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될 정도의 위력을 가진 대 그룹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블랙 사바스는 기존에 정통이라 믿었던 ‘밝음의 예술’을 뒤집어 그 뒤편에 ‘음산한 미학’의 세계가 있음을 보였다. 그들은 당시 주류 헤비메탈 내의 이단아들이었고, 언더그라운드였다. 하지만 이들이 있었기에 헤비메탈의 역사가 더욱 풍요로운 유산을 쌓았고, 다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밴드 : Lynyrd Skynyrd (리너드 스키너드)
올맨 브라더스(Allman Brothers)와 함께 서던 록(Southern rock)의 양대 봉우리로 1970년대 록 토양을 한층 기름지게 했던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는 그들이 오선지 위에 창조한 수많은 고전들과 함께 그 비극적인 종말로 인해 우리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그룹이다. 1973년에 처녀작을 발표한지 4년만인 1977년에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핵심 멤버 3명을 동시에 하... 올맨 브라더스(Allman Brothers)와 함께 서던 록(Southern rock)의 양대 봉우리로 1970년대 록 토양을 한층 기름지게 했던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는 그들이 오선지 위에 창조한 수많은 고전들과 함께 그 비극적인 종말로 인해 우리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그룹이다. 1973년에 처녀작을 발표한지 4년만인 1977년에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핵심 멤버 3명을 동시에 하늘 나라로 먼저 보내면서 생명 연장의 꿈을 접어야 했던 레너드 스키너드의 음악은 그러나 서던 록을 창시한 올맨 브라더스의 그것과는 차별되는 자신들만의 독창적 스타일이었다. 올맨 형제들의 음악에는 컨트리, 블루스, 하드록 외에도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재즈적인 즉흥 연주가 인상을 깊게 드리운 반면, 레너드 스키너드는 하드록에 좀 더 비중을 두어 육중한 사운드 풍광을 담아냈다(리드 기타리스트가 무려 3명이었다!). 1960년대 중반 플로리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로니 반 잔트(Ronnie Van Zant/보컬), 알렌 콜린스(Allen Collins/기타), 게리 로싱턴(Gary Rossington/기타)이 뜻을 모아 조직한 마이 백야드(My Backyard)가 레너드 스키너드의 모체(母體)였다. 곧이어 에드 킹(Ed King/기타), 레온 윌크슨(Leon Wilkeson/베이스), 빌리 파웰(Billy Powell/키보드), 그리고 밥 번스(Bob Burns/드럼)를 영입한 후 장발의 남학생들만을 골라 괴롭혔던(?)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의 이름 레너드 스키너(Leonard Skinner)를 감히 변형해 자신들의 그룹 이름으로 정했다(이들도 그 교사의 희생자였을 듯 싶은데 나중 성공한 제자들과 선생은 감격의 재회를 했다).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명성이 달아오르자 재즈 록 밴드 블러드 스웻 & 티어스(Blood Sweat & Tears)의 리더였던 알 쿠퍼(Al Kooper)가 적극적인 후원에 나섰고 1973년 대망의 데뷔 앨범이 공개되었다. 첫 음반의 제목 < Pronounced Leh-Nerd Skin-Nerd >의 뜻은 ‘레너드 스키너드로 발음해달라’였다. 이름이 미국인들에게도 꽤 어려웠기 때문에 본인들이 앞장서서 친절하게 발음을 시범한 셈이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전설이 된 서던 록의 창시자 듀안 올맨(Duane Allman)에게 바치는 영원한 고전 ‘Freebird(19위)’, 어머니가 충고하신 인생의 가르침을 가사로 읊은 감동적인 ‘Simple man’, 국내 매니아들이 애청했던 ‘Tuesday’s gone’과 같은 보석들이 수록된 이 한 장의 음반으로 레너드 스키너드는 일약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도약했다. 특히 ‘Simple man’의 기타 인트로 연주는 스콜피온스(Scorpions)가 1979년에 발표한 ‘Always somewhere’와 너무나 흡사해 혼동을 초래했고, 1977년에는 라이브 버전으로 다시 한번 히트 차트에 등록되어 38위를 기록한 바 있다. 1988년 혼성 댄스팝 듀오 윌 투 파워(Will to Power)는 ‘Freebird’와 피터 프램튼(Peter Frampton)의 ‘Baby, I love your way’를 이음새 없이 자연스럽게 메들리로 엮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Freebird’가 미국인들에겐 부정할 수 없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1집의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74년에 내놓은 두 번째 작품 < Second Helping >에서는 그 유명한 남부의 찬가 ‘Sweet home Alabama(8위)’가 들어있다. 록의 거목 닐 영(Neil Young)이 1972년에 발표한 남부사람들의 보수적 기질을 질타한 곡 ‘Southern man’에 대한 응분의 답가로 남부인의 열창이 뒤따랐다. 이 곡은 니콜라스 케이스가 주연한 영화 < 콘에어 >에서 비행기를 탈취한 탈옥수들이 비행기 안에서 신나게 춤추며 즐길 때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는 등 수많은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면서 대중의 뇌리에 호방하고 뚝배기 같은 미국 남부의 정서를 심어주었다. 이 음반 이후 드러머 밥 번스는 아티머스 파일(Artimus Pyle)로 교체되었고 기타리스트 에드 킹은 밴드를 떠났다. 그리하여 6인조로 재정비 된 레너드 스키너드는 1975년의 < Nuthin’ Fancy >에서 ‘Saturday night special(27위)’를 싱글 커트시켜 앨범 차트 10위권 안에 들었지만 전체적인 음반 평은 전작들을 상회하지 못했다. 1976년에 나온 두 장 짜리 실황 앨범 < One More From The Road >부터 레너드의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합세한 스티브 게인스(Steve Gaines)와 백업 보컬리스트로 고용된 그의 여동생 캐시 게인스(Cassie Gaines)와 함께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Street Survivors >의 제작에 착수했다. ‘What’s your name?(13위)’과 ‘You got that right(69위)’, 그리고 이 음반의 하이라이트 ‘That smell’이 들어있는 이 작품이 공개된 지 3일 후인 1977년 10월 17일, 이들이 탄 비행기는 연료 부족으로 추락해 팀의 리더 로니 반 잔트와 스티브 게인스, 그리고 캐시 게인스가 사망했고 나머지 식구들도 중상을 입었다. 1980년대 들어서 생존 멤버인 게리 로싱턴과 알렌 콜린스는 로싱턴 콜린스 밴드(Rossington Collins Band)를 결성했고, 아티머스 파일은 아티머스 파일 밴드(Artimus Pyle Band)를 구성했으며 로니 반 잰트의 동생 도니 반 잰트(Donnie Van Zant)는 38 스페셜(38 Special)을 조직해 삼인삼색(三人三色)으로 서던 록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원년 멤버 알렌 콜린스는 자동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1990년에 이승을 달리 해 ‘자유로운 새’가 된 고향 친구 로니와 재회했고 다른 친구들은 먼저 간 그들을 위해, 그리고 식어 가는 서던 록의 부활을 위해 레너드 스키너드를 재가동했다.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544-7758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