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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명곡 모음집 (Sounds of the 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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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960년대 명곡 모음집 (Sounds of the 60s)

비틀즈 / 비치 보이스 / 애니멀스 / 제임스 브라운 / 로이 오비슨 외 작품 수록

[ 3CD ]
John Barry 작곡/Sam & Dave, Chris Montez, Mary Hopkin, Little Eva 노래 외 4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Not Now / Not Now | 2020년 03월 0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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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명곡 모음집 (Sounds of the 60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3월 06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Soul Finger - The Bar-Kays
  • 02 Love Me Do - The Beatles
  • 03 House Of The Rising Sun - The Animals
  • 04 Soul Man - Sam & Dave
  • 05 Let's Dance - Chris Montez
  • 06 Those Were The Days - Mary Hopkin
  • 07 The Locomotion - Little Eva
  • 08 Hit The Road Jack - Ray Charles
  • 09 Wooly Bully - Sam The Sham & The Pharoahs
  • 10 Green Onions - Booker T & The M.G.'s
  • 11 Light My Fire - Jose Feliciano
  • 12 Shakin' All Over - Johnny Kidd
  • 13 Stand By Me - Ben E. King
  • 14 Tobacco Road - The Nashville Teens
  • 15 I Got A Line On You - Spirit
  • 16 Backfield In Motion - Mel & Tim
  • 17 It Might As Well Rain Until September - Carole King
  • 18 She's Not There - The Zombies
  • 19 Build Me Up Buttercup - The Foundations
  • 20 Misirlou - Dick Dale
Disc2
  • 01 Knock On Wood - Eddie Floyd
  • 02 Batman Theme - The Marketts
  • 03 Walking In The Sand - The Shangri-Las
  • 04 Dance To The Music - Sly & The Family Stone
  • 05 Comin' Home Baby - Mel Torm?
  • 06 Baby Come Back - The Equals
  • 07 Harlem Shuffle - Bob & Earl
  • 08 Single Girl - Sandy Posey
  • 09 Sealed With A Kiss - Brian Hyland
  • 10 Let's Twist Again - Chubby Checker
  • 11 Telstar - The Tornados
  • 12 My Baby Just Cares For Me - Nina Simone
  • 13 Save The Last Dance For Me - The Drifters
  • 14 Walk Right In - The Moments
  • 15 Runaway - Del Shannon
  • 16 Baby, Now That I've Found You - The Foundations
  • 17 Only The Lonely - Roy Orbison
  • 18 Da Doo Ron Ron - The Crystals
  • 19 These Arms Of Mine - Otis Redding
  • 20 Jingo - Santana
Disc3
  • 01 Night Train - James Brown
  • 02 Rhythm Of The Rain - The Cascades
  • 03 Bobby's Girl - Susan Maughan
  • 04 Rescue Me - Fontella Bass
  • 05 Surfin' Safari - The Beach Boys
  • 06 What Do You Want - Adam Faith
  • 07 What Becomes Of The Broken Hearted - Jimmy Ruffin
  • 08 He's A Rebel - The Crystals
  • 09 Big Bad John - Jimmy Dean
  • 10 Time Of The Season - The Zombies
  • 11 Evil Ways (Live) - Santana
  • 12 Sherry - The Four Seasons
  • 13 When A Man Loves A Woman - Percy Sledge
  • 14 Halfway To Paradise - Billy Fury
  • 15 The Lion Sleeps Tonight - The Tokens
  • 16 In The Bad Bad Old Days - The Foundations
  • 17 Poetry In Motion - Johnny Tillotson
  • 18 Like I Do - Nancy Sinatra
  • 19 Please Mr. Postman - The Marvelettes
  • 20 James Bond Theme - John Barry

아티스트 소개 (47명)

노래 : Sam & Dave (샘 앤 데이브)
멤버 : 샘 무어(Sam Moore), 데이브 프레이터(Dave Prater) 멤버 : 샘 무어(Sam Moore), 데이브 프레이터(Dave Prater)
미국 기타 연주자, 가수 미국 기타 연주자,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노래 : Jose Feliciano (호세 펠리치아노,Jose Montserrate Feliciano Garcia)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 1980년대를 장식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그 다음의 글로리아 에스테 그리고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쏟아져 나온 미끈했던 리키 마틴, 배우활동도 겸한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등은 영미 음악과는 색조가 다른 라틴 팝으로 유명한 가수들이다. 이제는 흑인보다 미국에서 인종비가 높은 히스패닉 계들의 음악이라 할 중남미의 라틴 팝은 1950년대에 국내에도 번안되어 애청된 곡 ‘베사메무초’ ‘키엔 세라’가 말해주듯 특유의 낭만적인 리듬과 애조 띤 멜로디를 생명으로 구미사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기를 누려왔다. 라틴 팝 하면 상기한 이름들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원조는 그들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1960년대 후반 미국시장을 강타한 시각장애자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길거리 스피커와 라디오 전파를 뒤덮는 곡 ‘펠리즈 나비다드(Feliz Navidad-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뜻)’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호세 펠리치아노다. 이 곡 말고도 그는 국내에서 ‘한때 사랑이 있었지(Once there was a love)’와 ‘집시(The gypsy)’, ‘레인(Rain)’, ‘케 사라(Che sara)’, ‘내추어 보이(Nature boy)와 같은 골든 팝송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상기한 노래 대부분은 국내에서는 라디오 전파를 잠식하며 절대적인 호응을 누렸지만 본고장 팝 팬들이 기억하는 곡들은 아니다. ‘레인’의 경우도 빌보드 차트에서 76위에 그쳤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전혀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우리 정서에 맞는 것들을 당대의 음악다방과 라디오 디스크자키들이 골라내 인구에 회자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 팝송’이다. 디제이들이 이 곡들을 숨겨진 보물 찾듯이 발굴한데는 ‘그 애조 띤 멜로디와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 음을 분명히 우리의 팝팬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했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서는 어떤 곡들이 사랑 받았을까. 그는 음악계에 데뷔한 1968년 그때부터 딴 가수들이 부른 것을 특유의 감성으로 놀랍게 바꿔낸 ‘리메이크’ 노래들로 명성을 떨쳤다. 우선 1967년 여름에 발표되어 수 주간 전미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대중화된 록그룹 도어스(Doors)의 명곡 ‘내 불을 밝혀라(Light my fire)’를 들 수 있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1년도 지나지 않은 이듬해 초에 이 곡을 다시 불러 내놓았다. 재해석해낸 곡의 질감은 원곡과는 영 딴판이었다. 능란한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바탕으로 로맨틱하면서도 클라이맥스에서 솟아오르며 사정없이 뿌려대는 보컬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겁했을 정도였다. 도어스의 곡과 다르기로 따지면 거의 환골탈태 아니면 둔갑 수준. 사이키델릭 곡이 단숨에 라틴 팝이 되어 나온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의 ‘Light my fire’는 리메이크임에도 불구하고 전미차트 3위를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팬들이 원작의 단순 재해석이 아닌 호세 펠리치아노 그만의 독창적 개조로 받아들인, 다시 말하면 그의 독자적 표현세계를 인정해준 덕분이었다. 지금도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 불을 밝혀라’는 팝 역사상 가장 득의에 찬 리메이크 곡으로 꼽힌다. 국내 팝 팬들은 마찬가지 이유로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Susie Q’ 그리고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케 세라’ 등을 오리지널 이상으로 호세 펠리치아노의 독창적인 버전으로 즐겨들었다. 이번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도 관객들은 오리지널 가수의 목소리로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 팝송들을 -비틀스의 ‘Yesterday’,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ondor pasa’, 바비 헵의 ‘Sunny’, 더스티 스프링필드 ‘The windmills of your mind’- 완전히 그의 것으로 새롭게 주조해내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에 감탄할 것이다. 호세 펠리치아노가 이처럼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노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티스트와 뮤지션으로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은 리메이크가 새로운 창조임을 웅변해냈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록된 리메이크 사례로는 그가 떠오른 해였던 1968년 10월7일 야구 월드시리즈 5번째 게임에서 초대가수로 부른 미국 국가(Star-spangled banner)가 꼽힌다. 어쿠스틱 기타로 워낙 ‘괴상하게’ 부른 바람에 국가를 신성시하는 미국의 국수주의자들과 보수진영으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경기장 라이브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차트에도 올라 전미 차트 50위에 오르는 히트를 쳤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했다. 1945년 푸에르토리코 생인 그의 주특기는 호소력 있는 얇은 고음의 보컬 외에 낭랑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앞을 볼 수 없는 불리를 타고난 재능과 하루 14시간씩 연습하는 노력을 통해 빼어난 기타연주자로 거듭났다. 이름 앞에 거물 기타리스트(virtuoso guitarist)라는 수식이 모든 공식자료에 붙을 정도. 기타전문지들에 의해 수도 없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40년 넘게 어쿠스틱 기타분야의 전설로 숭앙받으며 지금도 라틴 음악에 관한 한 ‘일렉트릭 기타는 산타나, 어쿠스틱 기타는 호세 펠리치아노’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립했다. 그의 발표 곡 가운데는 ‘Fireworks’ ‘Pegao’ 등 기타 연주곡들이 많다. 라틴 기타연주자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그의 대중적 인기가 떨어진 1980-1990년대에서도 전문가들의 존경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3년 ‘Me enamore’, 1986년 ‘Lelolai’, 1989년 ‘Cielito’, 1990년의 ‘Por que te tengo que olvidar?’로 그래미 최우수 라틴 팝 퍼포먼스 상을 무려 네 차례나 수상했다. 2000년대에도 그는 계속적인 월드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라틴 음악의 로맨티시즘을 전달하는 동시에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보를 발표하고 있다. 그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음악에 대한 헌신’과 ‘음악을 향한 열정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감동이 배가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재능과 노력 그리고 낙천적인 사고로서 예술가의 전형을 확립했다. 우리가 너무도 좋아했던 곡 ‘집시’를 통해 그의 음악 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난 노래를 연주하고 음반을 만들어 돈을 받는 그런 집시죠/ 난 순회하는 무리의 일부예요/ 난 온 땅을 돌아다니죠/ 내 동료를 위해 곡을 만들어주고/ 슬프고 때로는 행복한 음으로 모든 곡을 쓰고 연주해요/ 어떤 곡은 사람들을 웃기고/ 어떤 곡은 사람들을 울리죠/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난 끝없이 음악 여행을 계속해요/ 내 기타가 낡고 쉬 고되더라도...’ 이번 내한공연에서 팬들은 그가 남긴 무수한 추억의 골든 팝, 공연장에 울림을 가져다줄 상쾌한 보컬 그리고 라틴 기타 연주의 환상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뮤지션이 전하는 헌신과 즐거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라틴 팝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호세 펠리치아노의 재능과 존재감을 넘어설 인물은 없다. 우리는 세기말에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 쏟아진 라틴 팝가수들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한 호세 펠리치아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멤버 : Adrian Metcalfe, Arthur Sharp, John Allen, Len Surtees, Peter Agate, Ray Phillips, Rod Roach 멤버 : Adrian Metcalfe, Arthur Sharp, John Allen, Len Surtees, Peter Agate, Ray Phillips, Rod Roach
< Tapestry >로 19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 판매 앨범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캐롤 킹(Carole King)은 팝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캐롤 킹(본명: Carole Klein)은 1942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시절 ’코사인스(Co-Sine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 Tapestry >로 1970년대 단일 뮤지션 최다 판매 앨범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캐롤 킹(Carole King)은 팝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캐롤 킹(본명: Carole Klein)은 1942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여 고등학교 시절 ’코사인스(Co-Sine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활동 초기에 가수보다는 작곡가로서 활동하는데 전념했다. 록앤롤과 포크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50년대 말엽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 흐름을 주도했다. 닐 세다카(Neil Sedaka), 게리 고핀(Gerry Goffin)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1959년 닐 세다카는 그녀를 모델로 한 노래 ’Oh, Carol!’을 히트시켰으며 게리 고핀은 캐롤의 첫 남편이 되었다. 캐롤과 게리 고핀은 ’브릴 빌딩(Brill Building)’이라는 대중음악 작곡 클럽을 만들어 많은 노래들을 만들어 내었으며, 여기서 연유하여 당시 이들의 음악을 ’브릴 빌딩 팝(Brill Building Pop)’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1961년 미국 최초의 여성 보컬그룹 ’셔를스(The Shirelles)’에게 차트 정상을 밟은 ’Will you love me tomorrow’를 만들어 주었으며, 바비 비(Bobby Vee)에게 준 ’Take care of my baby’도 정상을 밟았다. 최고의 작곡 듀오로 자리한 이들은 이후 100여 곡에 이르는 히트곡을 만들어 내었는데 리틀 에바(Little Eva)의 ’The locomotion’, 쉬퐁스(The Chiffons)의 ’One fine day’, 몽키즈(The Monkees)의 ’Pleasant valley sunday’, 드리프터스(The Drifters)의 ’Up on the roof’, 쿠키즈(The Cookies)의 ’Chains’(비틀즈에 의해 한 번 더 불리어졌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크리스탈스(The Crystals)의 ’He hit me (And it felt like a kiss)’와 같은 주옥같은 곡들이 모두 이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이들은 이혼과 함께 음악 활동에서도 결별을 선언하였고, 캐롤은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던 찰스 라르키(Charles Larkey)를 두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인다. 이들은 대니 코치마(Danny Kortchmar)를 끌어들여 ’더 씨티(The City)’라는 트리오를 결성하고 < Now That Everything’s Been Said >를 발표하였는데 캐롤의 무대 기피로 인해 홍보에 실패하면서 상업적으로도 실패하고 만다. ’더 씨티’ 시절의 음악은 이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다시 히트했는데 버즈(The Byrds)가 ’Wasn’t born to follow’를 다시 불렀고,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가 ’Hi-De-Ho’를,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You’ve got a friend’를 히트시켰다. 1970년 캐롤 킹은 솔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1970년 발표한 그녀의 데뷔 앨범 < Writer >는 실패했지만 1971년 발표한 < Tapestry >는 캐롤 킹을 1970년대 최고의 여가수, 팝 사상 여성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로 만들어주게 된다. 이 앨범은 당시 급작스럽게 증가한 독신자, 이혼부부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달래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앨범은 1975년까지 1,500만장이 팔려 나갔으며 15주간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무려 6년 동안 차트에 머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은 1970년대를 통틀어 세 번째로 많이 팔렸으며 솔로 뮤지션의 앨범으로는 197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자리했다. 앨범 수록곡 중 ’So far away’와 ’It’s too late’가 차트 정상을 밟았으며 제임스 테일러가 먼저 불러 히트시킨 ’You’ve got a friend’, 셔를스가 히트시킨 ’Will you love me tomorrow’, 아레사 프랭클린이 히트시킨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이 작곡자인 그녀의 목소리로 다시 실려 큰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1971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팝 여성가수’, ’It’s too late’으로 ’올해의 레코드’, ’You’ve got a friend’로 ’올해의 노래’까지 4개 부문을 수상했다.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 붐의 선두에 자리한 그녀는 1971년작 < Music >을 다시 한 번 차트 정상에 올렸으며 ’Sweet seasons’를 히트시켰다. 1972년작 < Rhymes And Reasons >도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1974년작 < Wrap Around Joy >는 ’Jazzman’이 차트 정상에 오른데 힘입어 앨범도 정상을 밟았다. 1976년에는 전 남편이자 음악적 동반자였던 게리 고핀과 다시 손을 잡고 < Thoroughbred >를 발표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1977년 < Simple Thing >을 발표한 후 작곡 동료였던 릭 에반스(Rick Evans)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이지만 릭 에반스는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결혼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80년 고핀과 작업했던 곡들을 모아서 내놓은 < Pearls >를 히트시킨 후 그녀는 산골 마을인 아이다호(Idaho)로 들어가 환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83년 < Speeding Time >, 1989년 < City Streets >, 1993년 < Colour Of Your Dream >을 발표하는 등 간간이 앨범을 내어놓고 있지만 현재 가수로서보다는 뮤지컬 작곡가나 후배 뮤지션들의 작곡가, 프로듀서로 더 많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셀린 디욘(Celine Dion)등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많은 여성 뮤지션들에게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1999년에는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아레사 프랭클린, 머라이어 캐리, 샤냐 트와인(Shania Twain), 셀린 디욘,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등 쟁쟁한 여가수들이 ’You’ve got a friend’를 함께 노래하며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래 : Foundations (파운데이션스)
노래 : Eddie Floyd (에디 플로이드)
가수, 작사가 가수, 작사가
노래 : Sly & The Family Stone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을 불렀다. ‘Don’t call me nigger, Whitey(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을 불렀다. ‘Don’t call me nigger, Whitey(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무쌍한 폴리리듬이었다. 때문에 펑크(funk)의 원조로 항상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함께 언급되며 나중의 디스코에도 길을 열어준 ‘리듬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재즈의 거성 마일스 데이비드(Miles David)도 펑크(funk)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이들의 음반을 열심히 들었을 정도. 흑인가수의 경우 단일 곡이 팔릴 뿐 앨범판매는 저조한 관행에도 이 그룹의 앨범은 잘 팔렸다. 1970년 히트곡 모음집은 판매고 500만장을 상회했다. 하지만 슬라이 스톤은 마약에 찌들어 1970년대 중반부터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빠졌다. 천재는 기인임을 말해주는 사례. 대표곡으로는 ‘Dance to the music’, ‘Everyday people’, ‘Hot fun in the summertime’ 등이 있다.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일랜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노래 : Del Shannon (델 섀넌,Charles Weedon Westover)
락앤롤, 컨트리 가수 락앤롤, 컨트리 가수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노래 : Crystals (크리스탈스)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리메이크하는 등 1960년대 소울과 록이 동반자 사이임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출연진이 백인 뮤지션 일색이었던 1967년 몬터리 페스티벌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조지아주 도손 출신으로 샘 쿡(Sam Cooke)에 영향 받아 가수활동에 입문했다. 전성기였던 1967년 12월에 비행기추돌로 27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1968년 전미차트 정상을 밟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톤을 낮춘 소울 발라드의 수작. 이외에 ‘I’ve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와 ‘Try a little tenderness’도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들이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노래 : Fontella Bass (폰텔라 베이스)
노래 : Adam Faith (아담 페이스)
멤버 :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 1961년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 멤버 :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

1961년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가 모여 결성했다.

1962년 《셰리 Sherry》를 시작으로 5년 동안 무려 25곡이 히트했다. 버라이어톤스(Varietones)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으며, 포 러버스(Four Lovers)로도 알려졌다. 리드싱어 프랭키 볼리의 높은 가성으로 잘 알려졌으며,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두왑에 기반을 둔 화음 중심의 보컬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프로듀서 보브 크루(Bob Crewe)와 함께 베이스 연주자 가우디오가 주로 작곡을 맡아 리듬앤드블루스와 로큰롤의 히트곡을 냈다. 인기순위 톱 10에 기록된 히트곡으로는 《빅 걸스 돈트 크라이 Big Girls Don’t Cry》(1962), 《워크 라이크 어 맨 Walk Like a Man》(1963), 《돈 (고 어웨이) Dawn (Go Away)》(1964), 《레츠 행 온! Let’s Hang On!》(1965) 등이 있다. 3옥타브에 이르는 음역의 소유자였던 볼리는 솔로로도 활동하여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스 오프 오브 유 Can’t Take My Eyes Off of You》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나 1970년대 중반 볼리가 《마이 아이스 어도어드 유 My Eyes Adored You》 《그리스 Grease》 등의 싱글을 발표하여 인기순위 1위에 올랐고, 그룹은 《후 러브스 유 Who Loves You》와 《디셈버 1963 (오 홧 어 나이트) December 1963 (Oh What a Night)》가 히트하여 한때 인기를 회복하기도 했다. 199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노래 : Nancy Sinatra (낸시 시나트라)
소울, 알앤비, 펑크 그룹 소울, 알앤비, 펑크 그룹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세와 조화를 향한 열정,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자연적 ‘감성’에 무게가 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음악은 감성이 지성을 만든다. 비틀스가 그런 그룹이다. 비틀스는 바로 피와 땀으로 세계정복의 열매와 천재라는 칭송을 획득했다. 그들의 성공은 천재성 아닌 가혹한 고행의 결과물이다. 천재성도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하늘이 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존 레논과 폴이 만난 게 1957년이고 존이 ‘Hey little girl’을 쓴 게 1958년이며 가장 멋진 밴드명인 비틀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1960년이다.

그들은 1964년 세계를 휘몰아치기 전 최소 4-5년 밑바닥생활을 했다. 이 점에서 비틀스는 그들이 꽃을 피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호시절을 타고 졸속으로 결성된 다른 그룹들과는 종이 달랐다. 그들은 그동안 무수한 오디션 실패와 해외 투어로 연주력을 다졌으며 오로지 세계정복이란 목표를 위해 눈물과 배고픔을 삼켰다. 정말 그들 말대로 손이 아프도록 기타를 쳤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리버풀 캐번과 저 멀리 독일 함부르크 클럽을 왕래하며 연주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구촌 석권을 위한 숨가쁜 열정이자 가혹한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리버풀에서 길러졌지만 함부르크에서 성장했다”는 존의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 < 백비트 >에 잘 묘사되었듯 그들은 이곳 클럽무대에서 댄서들 뒤에서 반주를 했고 비좁은 단칸방에서 집단 기식했다. 그들은 그러면서 당시 서구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열심히도 챙겼다.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블루스와 로커빌리, 모타운 R&B, 틴 팬 앨리 팝, 라틴 음악 등 갖가지 계열의 곡들을 골라 커버 연주했다. 아이슬리 브라더스 ‘Twist and shout’, 스모키 로빈슨 ‘You really got a hold on me’, 캐롤 킹 ‘Chains’, 리틀 리처드 ‘Long tall Sally’, 척 베리 ‘Rock and roll music’ 등이 그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로 빚어낼 줄 알았다. 거기서 ‘Love me do’가 ‘From me to you’가 ‘A hard day’s night’가 ‘I feel fine’’이 나왔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 길러낸 창조성, 이를테면 노력에 의해 축적된 내공의 폭발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남들 곡의 템포와 볼륨을 업그레이드했고 그 작업을 통해 이후 그들만의 코드 진행감각 즉 독자적 화성을 찾아낸 것이었다.

비평가 그렉 쇼(Greg Shaw)는 말한다. “비틀스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그리고 첫째가는 로큰롤 팬이었다. 그리고 바로 음악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감성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그 두 가지의 환상적 퓨전! 비틀스의 이 무명시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이번에 나온 앨범 < The Beatles 1 >에서 초기 곡인 ‘Love me do’에서 ‘Help!’까지는 이 출발 이전의 워밍업 시기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실상 비틀스 초기 작품은 이 준비기를 떼어놓고는 논할 수도 없다. 하긴 연습 없이 실전을 잘 치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비틀스는 나중 실전을 연습처럼 해야한다는 진리도 잊지 않았다. 제2부 < 지구촌 전체를 손에 넣다 > 1964년 2월7일 영국의 더벅머리 네 남자가 미국 케네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세계의 음악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비틀매니아’의 시작. 그것은 이후 음악의 중심이 ‘젊은이들’과 ‘대중음악’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른과 고전음악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비틀스가 먼저 1963년 영국을 뒤흔들었을 때 그 광풍은 당시 내각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추문 이른바 ‘프로퓨모 스캔들’도 잠재워버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정치 판에 관심을 깡그리 잊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지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비틀스가 오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전국이 들썩들썩했다. 비틀스는 이처럼 정치 사회적 회오리마저 제압하는 엄청난 팝 폭발(pop explosion)현상이었다. 비틀스 초기 음악은 한마디로 경쾌한 로큰롤이었다. 1950년대 미국 로큰롤에 영국 특유의 셔플 리듬과 보컬 하모니를 덧입힌 스타일로, 강했으되 느낌은 밝았다. 기본 코드를 이용한 로큰롤만의 단순한 진행이었지만 1950년대의 로큰롤보다는 훨씬 템포도 빠르고 볼륨도 컸다. 본격적인 밴드중심 로큰롤의 개막이었다.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들처럼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비틀매니아 시대의 음악은 이처럼 ‘로큰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1963년 ‘From me to you’는 7주간 1위에 오르면서 당시로 볼 때는 경이적인 65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것은 비틀스가 이후 발표한 11장의 싱글이 모두 정상에 오르는 ‘넘버원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다음 싱글 ‘She loves you’는 선(先)주문만도 31만장에 달하면서 영국에서만 160만장이 팔려나갔다. 이 기록은 폴 매카트니의 1977년 ‘Mull of kintyre’에 의해 깨질 때까지 무려 14년 간 ‘영국 최고판매의 싱글’ 타이틀을 지켰다. 같은 해 12월 발표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She loves you’로부터 1위 자리를 승계하며 선주문 94만장에 총 15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들의 꿈이던 미국정복을 이룩해낸 곡도 바로 이 노래였다. 이 곡은 전미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1964년 미국에서 ‘Can’t buy me love’는 판매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주문 170만장에 발매와 동시에 모두 200만장이 팔려나간 것이다(영국에서도 첫 주 122만6천장). 굳이 판매고를 거듭 언급하는 것은 비틀스광풍을 설명하기에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공할 행진은 직접 출연한 영화의 주제곡 ‘A hard day’s night’, ‘I feel fine’, 두 번째 영화에 삽입된 ‘Ticket to ride’ ‘Help!’로 이어진다. 이 때까지 넘버원 싱글 가운데 느린 곡은 하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당시 세대와 호흡하는 로큰롤의 대중성을 신뢰했다. ‘Help!’ 만해도 존 레논은 "원래 느린 곡조로 썼으나 대중의 반응을 고려해 빠르게 불렀다"고 밝혔다. 그 속도감을 갖춘 로큰롤에 소녀들을 미치게 한 곡 중간의 함성 ‘yeah yeah yeah’(비틀스 시대의 상징어가 됐다)으로 그들은 영국의 침공을 견인하며 지구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성공하기 전 그들이 주로 커버했던 곡을 골라 녹음한 폴 매카트니의 1999년 앨범 < Run Devil Run >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I got stung’를 부른 경위에 대한 폴의 설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엘비스 레퍼토리는 아니었으나 인트로가 맘에 들었고 난 엘비스보다 조금은 더 난폭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뜨리고 질러대는 로큰롤을 가지고 그들은 마침내 ‘최강의 로큰롤밴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비틀스는 더 나아가 ‘최강의 팝 밴드’가 되고자 했다. 그 비상을 알리듯 1965년 가을 때마침 현악 반주의 ‘Yesterday’가 나왔다. 제3부 < 거리의 록을 전당의 예술로 >(중기 비틀스) 엄밀히 말해서 로큰롤은 거리의 젊은이들 음악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그것이 등장했을 때 그것은 어른들이 듣는 이전의 스윙 재즈와 스탠더드 팝 발라드와 완전히 ‘분리와 독립’의 선을 그었다.

비틀스도 초기 로큰롤의 영웅들인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할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로큰롤(전에 지적한 듯 좀 더 강하긴 했지만)을 구사했다. 초기에 그들은 기타로 곡을 썼고 그래서 그 때의 곡들은 업 비트의 장조계열 곡들이었다. 그러나 ‘제5의 비틀’이라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그로부터 피아노의 미학을 터득하면서 그들은 느린 단조계열의 발라드 팝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의 록은 완전히 근사한 전당의 예술로 ‘신분상승’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곡이 ‘Yesterday’ ‘Eleanor Rigby’ 그리고 앨범 < Rubber Soul > < Revolver >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였다. 또 하나의 변화는 가사였다. 이전의 그들의 신나는 로큰롤에 담긴 노랫말이라곤 고작 젊은 남녀의 풋사랑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한마디로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내용이 주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포크와 통기타의 영웅 밥 딜런(Bob Dylan)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가사의 중력을 절감했다. 특히 존 레논에게 이 부분의 충격은 절대적이었다. 갑자기 비틀스 노래는 사랑타령에서 ‘사색과 인생’으로 바뀌어갔다. 중기의 대표적인 노래들인 ‘Girl’ ‘In my life’ ‘Eleanor Rigby’는 이전 노래와는 확실히 깊이가 달랐다. 비틀스는 싱글 중심이 아닌 앨범 중심으로 음악작업의 축을 전환했다. 곡도 커버 버전은 완전히 걷어치우고 철저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콤비(더러 조지 해리슨)의 자작으로 앨범을 채우기 시작했다. 평자들이나 대중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비틀스의 최고 명반으로 중기작품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런 저간의 상황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도 우수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영국인들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권위 있는 ‘버진 올 타임 톱 1000 앨범’ 여론조사가 말해준다. 이 리서치에서 < Revolver >가 당당 1위를 차지했으며 < Sgt. Pepper’s.. >는 3위, < Rubber Soul >은 34위에 올랐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미국 문화계 인사들과 히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간 싸이키델릭(psychedelic) 풍향이다. 환각과 약물로 이미지화된 이 흐름은 기존의 지배적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문화적 대안(代案)을 찾고자 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의식확장을 위해 약물 LSD를 실험했고 동양종교를 탐색했고 갖가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항의의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적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평화’였다. 버진 조사에서 1등을 뺏겼지만 여전히 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1967년 앨범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는 바로 싸이키델릭과 히피의 ‘안티’ 성향을 농축해낸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다시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타임에 커버로 두 번 등장한 대중가수는 비틀스밖에 없다). < The Beatles 1 > 앨범은 넘버원 곡들만 수록해 싱글을 내지 않은 이 앨범의 레퍼토리들이 수록되어있지 않지만 대신 ‘Yellow submarine’ ‘All you need is love’로 그 메시지와 분위기를 희미하게 맛볼 수 있다. 중기의 포크와 싸이키델릭 시대를 통해 비틀스는 ‘자기 음악중심’을 확립했다.

단순한 성공공식으로 일관하면서 실험을 배제하는 여타 그룹들과는 달랐다. 초기에 그토록 흔하던 히트싱글 발표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의, 소위 얼터너티브를 찾아 실험하고 탐구했다. 오늘날에도 비틀스가 최강의 그룹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음악혁명’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비틀스의 이러한 성과의 뒷면에는 그룹의 결속력의 약화라는 음지가 존재했다. 4인 각자의 개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서적으로 하나의 그룹 아닌 ‘존 폴 조지 링고’로 흩어지면서 비틀스는 말기를 맞는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반 생산을 게을리 하지는 않지만.. 제4부 < 미래의 기약-4분의 4는 역시 하나! >(말기 비틀스) 1968년 자신들의 음반사 애플(Apple)을 설립했을 때, 그리고 애플의 첫 싱글 ‘Hey Jude’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 때 비틀스의 웅대한 새 출발은 이상하게도 그룹의 결속력 와해로 이어졌다. 비틀스라는 우산 아래 뭉쳤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독자 영역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그룹을 대표하던 존은 비틀스 아닌 필생의 동반자 오노 요코와의 관계에 빠져 들어갔으며, 폴은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넷 가운데 단연 최강자로, 실세로 솟아났다.

존과 폴 간의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헤쳐’ 상황은 비틀스를 ‘존과 폴의 그룹’에서 ‘폴의 그룹’으로 재편했다. 조지 역시 자신의 음악세계에 액센트를 두기 시작했고 곡을 쓰지 못했던 링고도 마침내 ‘Don’t pass me by’나 ‘Octopus’s garden’과 같은 곡을 써내면서 자신감을 획득했다. 애플사에서 낸 첫 앨범 < The Beatles >(일명 화이트 앨범)는 불가피하게 ‘한지붕 네가족’의 앨범이 되어 나왔다. 자신이 쓴 곡을 녹음할 때 다른 멤버들은 그룹동료가 아니라 거의 세션 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틀스의 재정문제를 관장하는 사업고문 발탁을 놓고 존 조지 링고와 폴 간의 입장차이가 불거지면서 멤버들간의 갈등도 노출되었다. 존과 폴은 모든 면에서 가령 예를 들면 결혼날짜와 장소와 같은 문제에서도 사사건건 경쟁적 심리전을 전개했다. 말기에서 비틀스가 차지한 차트 넘버원 곡들은 존의 ‘The ballad of John & Yoko’ ‘Come together’, 조지의 ‘Something’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폴이 주도적으로 쓴 곡이었다. 폴의 작곡 감각은 이후에도 접하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해산 직전에 나온 ‘Let it be’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드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곡들은 비틀스 작품이기보다는 폴의 솔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폴의 천재성은 말기의 앨범 < The White Album > < Abbey Road >에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굳이 싱글이 아니었어도 전자의 ‘Obladi oblada’ ‘Martha my dear’ ‘I will’, 후자에서는 ‘You never give your money’ ‘Golden slumber’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 등 그가 주조한 곡들은 어떤 싱글보다도 사랑을 받았다.

기습적인 비틀스 해산 기자회견을 가진 것도 폴이었다. 전설의 4인들은 해산 후에도 각각의 길을 걸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1970년대의 어떤 싱어 송 라이터나 팝 스타들보다 굵직한 행보를 보였다. 네 사람 모두 차트 넘버원 곡을 기록했다. 그룹 출신으로 솔로활동에서 멤버 모두가 1위 곡을 가진 그룹은 비틀스밖에 없고 이는 앞으로도 깨질 수 없는 기록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윙스(Wings)라는 그룹을 만든 폴의 히트행진은 비틀스 업적을 거의 재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존 폴 조지 링고를 아무리 개별적으로 기억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비틀스라는 집합으로 기억한다. 말기 이후가 ‘4분의 4’이었을지언정 대중의 뇌리에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임은 비틀스 재결합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관측을 깨고 1995년 폴 조지 링고가 투합해 존의 노래 ‘Free as a bird’ ‘Real love’를 만들어 내놓았을 때 다시금 입증되었다. 여기서 링고 스타의 비틀스론(論)을 들어보자. "우린 신비로웠고 그것은 텔레파시였다. 우리가 녹음실에서 작업했을 때…그걸 묘사하기란 정말 어렵다. 우린 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였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동시에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비틀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에 묻히지 않고 갈수록 위대성과 가치가 증대한다. 미국 브라질 쿠바 일본 그리고 한국을 가리지 않고 < The Beatles 1 >가 전 세계적으로 판매열풍을 일으키고있다는 사실은 뉴 밀레니엄 첫 스타가 비틀스라는 것을 말해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1960년과 2000년 사이의 40년 세월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비틀스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밴드 : The Animals (애니멀스,Eric Burdon And The Animals)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록의 탄생에 동기를 부여함으로서 1960년대 팝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건반 주자 알란 프라이스(Alan Price)가 흑인 음색을 소유한 에릭 버든(Eric Burdon)과 존 스틸(John Steel/드럼), 힐튼 발렌타인(Hilton Valentine/기타), 브라이언 채스 챈들러(Bryan Chas Chandler/베이스)를 만나 1964년부터 애니멀스의 웅대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비참한 생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오래 동안 금지 곡의 사슬에 묶였던 ‘House of the rising sun’은 비틀즈의 해로 기억되던 1964년 5주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밥 딜런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이 미국의 구전 민요를 애니멀스는 전자 기타가 울부짖는 블루스 넘버로 완벽하게 재 탄생시켰다. 이 음악을 듣고 음악 쇼크를 받은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부여잡고 포크록을 탄생시켰다. 원래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취입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9위)’는 애니멀스의 록 버전으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특히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 라틴계 디스코 밴드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댄스 버전(15위)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디스코 클럽의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들 중에서 가장 정통 록적인 ‘It’s my life(23위)’는 록의 고전으로 대우받고 있다. 이 외에도 히트 차트에 등록된 ‘I’m crying(19위)’와 ‘Bring it on home to me(32위)’, 싱글로 히트하진 않았지만 록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We’v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인 지미 리드(Jimmy Reed)의 곡을 리매이크 한 ‘Bright lights, Big city’, 그리고 같은 백인 블루스 싱어들과의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에릭 버든의 완벽한 가창 실력을 입증한 ‘For Miss Caulker’까지 영국에서 온 5명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 카리스마로 알란과의 알력이 스멀스멀 피어나자 알란 프라이스는 애니멀스를 탈퇴해 나름의 활동을 시작했고, 이 쟁탈전의 승리로 밴드의 주도권을 쥔 에릭 버든은 공석으로 비어 있는 자리에 데이브 로베리(Dave Rowberry)를 앉히고 그룹의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에릭은 알란의 반쪽이었고, 알란도 에릭의 절반이었다. 그 둘은 헤어지고 나서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면서 1976년에 원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음악의 최소주의 미학을 구현한 3인조 뉴웨이브 밴드 폴리스(Police - 스팅이 있었던)의 기타리스트 앤디 서머스(Andy Summers)는 1960년대 후반 에릭과의 친분으로 애니멀스에 몸담기도 했었다. 1970년대 들어서 에릭은 이 위대한 밴드를 접고 두 차례나 내한 공연을 가진 덴마크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Lee Oskar)와 여러 흑인 뮤지션들을 규합해 소울 그룹 워(War)를 조직해 치열한 순위 경쟁에 참전해 ‘Why can’t we be friends?(6위)’를 랭크 시켰다. 이 트랙은 1997년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가 재해석해 자신들의 데뷔 음반에 수록하기도 했다. 1976년과 1983년에 다시금 모여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지만 역전된 음악 환경은 ‘새로운 애니멀스’에게 호의적이지 못했고 다시 이들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만든 옛 영예의 그림자 속에서 현재의 숨결을 이어가는 것이다.
밴드 : Booker T. & the M.G.'s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멤버 : 랜디 캘리포니아(Randy California, 기타, 보컬), 에드 캐시디(Ed Cassidy, 드럼), 존 로크(John Locke, 키보드), 마크 안데스(Mark Andes, 베이스), 제이 퍼거슨(Jay Ferguson, 보컬, 퍼커션) 멤버 : 랜디 캘리포니아(Randy California, 기타, 보컬), 에드 캐시디(Ed Cassidy, 드럼), 존 로크(John Locke, 키보드), 마크 안데스(Mark Andes, 베이스), 제이 퍼거슨(Jay Ferguson, 보컬, 퍼커션)
멤버 : 로드 아전트(Rod Argent, 보컬, 오르간), 콜린 블런스톤(Colin Blunstone, 보컬), 크리스 화이트(Chris White, 베이스기타), 휴 그런디(Hugh Grundy, 드럼), 폴 앳킨슨(Paul Atkinson, 기타) 멤버 : 로드 아전트(Rod Argent, 보컬, 오르간), 콜린 블런스톤(Colin Blunstone, 보컬), 크리스 화이트(Chris White, 베이스기타), 휴 그런디(Hugh Grundy, 드럼), 폴 앳킨슨(Paul Atkinson, 기타)
밴드 : Dick Dale & His Del-Tones (딕 데일 앤 히스 델-톤스)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 당시 팝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브라이언은 더빙 반복을 통해 이 앨범의 사운드를 놀라울 만큼 두껍게 했고 종소리, 경적소리, 외침 같은 효과음을 많이 응용했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술적 개가를 접하고 스튜디오 음악의 실체를 알기 시작했다. 폴 매카트니가 1967년, 팝 사상 최고의 명반인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를 만든 후 “만약 < 펫 사운즈 >가 없었더라면 이 앨범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다. 톰 페티, 린지 버킹햄, 그룹 소닉 유스 등도 < 펫 사운즈 >가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비치보이스를, 얼핏 < 서핑 USA >하나로 이름을 날린 그저 그런 그룹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적이 의아스러울 만한 부분이다. 이 앨범은 국내에 ‘그리운 고향’(‘앞마을 옛터에 빨래하는 순이...’로 시작되는)으로 번안된 ‘슬룹 존 B’와 같은 히트곡을 내긴 했지만, 출반 당시에는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음반을 낸 캐피톨 레코드사 측도 브라이언이 쓸데없는 음반을 만들었다고 불평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이 90년 CD로 나왔을 때도 골든 레코드(50만장 판매)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앨범 가치는 상승해 ‘전설적인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근착 빌보드는 < 펫 사운즈 >발매 30주년을 기념해 CD 박스 세트를 오는 5월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이 작품이 명반임을 깨달은 캐피톨사가 음반의 의미를 기리려는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이 박스 세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캐피톨사는 이 앨범을 ‘상품’으로서뿐 아니라 ‘역사적 다큐멘트’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곡을 리마스터한 것들 외에, 당시의 신곡 및 실패본들이 총망라돼 실릴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팬이 캐피톨사 측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로이 버크허트는 이런 말을 했다. “그와 같은 일은 마땅히 레코드회사가 해야 한다고 본다. 백년이 지나면 비틀스,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는 우리 시대의 베토벤, 브람스, 바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옛 음반이 거의 재발매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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