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12월 전사이벤트
12월 혜택 모음
북클러버
청춘 응원 이벤트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김초롱 아나운서가 추천하는 인생 도서

관련상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작가에게 세 명의 후배가 찾아온다. 그들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저 | 위즈덤하우스

마케팅 텍스트 배너

웹진채널예스


HBO 다큐멘터리 `디 아폴로` 영화음악 (The Apollo OST) [2LP]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수입
LP

HBO 다큐멘터리 `디 아폴로` 영화음악 (The Apollo OST) [2LP]

[ 180g / 디지털 다운로드 코드 삽입 ]
Ted Fox, Marion J. Caffey, T. Griffin 작곡/Kenneth J. Thompson, 버락 오바마 노래 외 1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Universal | 2020년 01월 1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40,600원
할인가 32,900 (19%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카드혜택
결제혜택
카드할인 정보
seyPay seyPay 첫등록시 2,000 포인트 지급 (첫가입+결제수단 등록시) 자세히 보기
 모바일팝 모바일 5% 즉시할인 (모바일 결제시) 자세히 보기
네이버페이 네이버페이 1% 적립 (전체결제) 자세히 보기
페이코 페이코 포인트결제 2% 적립 (신규고객 4,500원 할인) 자세히 보기
할인/적립 카드 더보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 명확한 재생 불량 사유가 확인된 경우에만 반품이나 교환이 가능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판매중| 한정판매

수량
배송비 : 무료 배송비 안내
  • 국내배송만 가능
1/4
광고 AD

HBO 다큐멘터리 `디 아폴로` 영화음악 (The Apollo OST)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01월 17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Side A] Kenneth J. Thompson, Apollo Greeter
  • 02 T. Griffin - Opening, The Apollo Theater - Featuring interview excerpts from Lana Turner, Harlem Resident; Pharrell Williams, R
  • 03 Charles Mingus - Take The 'A' Train
  • 04 Fletcher Henderson & His Orchestra - Memphis Blues
  • 05 Marion J. Caffey - Interview Excerpt / Amateur Night Producer, The Apollo
  • 06 Ella Fitzgerald - How High The Moon
  • 07 Duke Ellington & His Cotton Club Orchestra - Old Man Blues
  • 08 Pearl Bailey - She's Something Spanish
  • 09 Count Basie & His Orchestra - Jive At Five
  • 10 [Side B] Ted Fox - Interview Excerpt / Author, Showtime At The Apollo
  • 11 Billie Holiday - Strange Fruit
  • 12 Mikki Shepard - Interview Excerpt / Former Executive Producer, The Apollo
  • 13 Marvin Gaye - What's Going On
  • 14 Kamilah Forbes - Interview Excerpt / Executive Producer, The Apollo
  • 15 James Brown -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
  • 16 Ta-Nehisi Coates - Interview Excerpt / Author, Between the World and Me
  • 17 Robert Glasper - Apollo As Home / Featuring interview excerpt from Ted Fox, author, Showtime At The Apollo
  • 18 Gladys Knight & The Pips - Home Is Where The Heart Is
Disc2
  • 01 [Side C] Robert Glasper - Mission Statement - Featuring interview excerpts from Elinor Tatum, Publisher and Editor-In-Chief, New York Am
  • 02 Johnny Hodges - Come Sunday
  • 03 James Brown - Lost Someone (Live at the Apollo)
  • 04 Robert Glasper - Schiffman Cards - Featuring interview excerpt from Elinor Tatum, Publisher and Editor-In-Chief, New York Amste
  • 05 Jimmy Smith - T'aint No Use
  • 06 Robert Glasper - Obama Returns To The Apollo - Featuring interview excerpts from Lana Turner, Harlem Resident, and Angela Basse
  • 07 Aretha Franklin - Rock Steady
  • 08 [Side D] Kenny Burrell & Grover Washington Jr. - Asphalt Canyon Blues
  • 09 Etta James - Something's Got A Hold On Me
  • 10 Robert Glasper - Harlem Riots
  • 11 Dizzy Gillespie Octet - Duke's Last Soliloquy
  • 12 Ta-Nehisi Coates and T. Griffin - From the staged reading of his book Between the World and Me, Apollo Theater, April 2018 Feat
  • 13 Robert Glasper w/Ledisi - Don't Turn Back Now
  • 14 President Barack Obama at the Apollo Theater, January 19, 2012

아티스트 소개 (24명)

노래 : 버락 오바마 (Barack Hussein Obama)
2008 미국 44대 대통령 당선자로 200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수상하기 이전에도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 탄생이라는 화제를 낳은 버락 오바마는 1961년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와이에서 푸나호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대학교에 진학한 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과에 편입하였다. 그 시절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에... 2008 미국 44대 대통령 당선자로 200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수상하기 이전에도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 탄생이라는 화제를 낳은 버락 오바마는 1961년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와이에서 푸나호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대학교에 진학한 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과에 편입하였다. 그 시절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어 마약을 끊고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동안 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하다가 1985년부터 사회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카고 빈민가에서 주민들의 주거와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후 1988년 다시 학업에 뜻을 품고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한 뒤 1991년 최고 권위의 로스쿨 학술지로 인정받는 《하버드 로 리뷰 Harvard Law Review》의 첫 흑인 편집장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92년 로펌에서 만난 미셸 로빈슨(Michelle Robinson)과 결혼하였다.

대학원 졸업 후 자신이 활동하던 시카고로 다시 돌아와 인권 변호사 및 시카고 대학 법과대학원에서 헌법학을 강의하며 교수로 활동했으며 1997~2004년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선거구에서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으로 3선을 거듭 당선되었다. 2007년 2월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 투쟁을 선언한 장소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존 에드워즈 등과 경쟁하였다. '변화와 희망'을 앞세워 2008년 1월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주 코커스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돌풍을 일으키며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경합 끝에 2008년 8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유권자들에게 '변화(change)'와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라는 희망으로 다가서면서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11월 4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당인 존 매케인 후보의 2배가 넘는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2009년 1월 20일에 제44대 미국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으로써 오바마는 '오바마노믹스'라 세간에 칭해지는 경제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의 경제정책은 서민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더 부여한다는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미국의 8분의 1의 국민들이 가난하고 6분의 1의 국민들은 비싼 의료비 때문에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걱정들을 덜어주기 위해서 오바마는 서민들에게 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또한 그의 한반도 정책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이슈 중 하나인데 ,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서는 전 부시 정권의 불안한 접근방식 등으로 인해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보유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북한에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이 집권하면, 단호하고 지속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계속 추진할 것을 공언한 바 있다. 또한 한미자유무역협정 비준 문제에서는, 체결시 미국의 근로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협정이 될 것이라며 비준 반대 및 재협상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상호호혜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이 미국에 자동차를 파는 만큼 미국도 한국(시장)에 (자국의)자동차를 팔 수 있어야 한다'며 자동차시장 분야에 문제를 집중 제기했었다.

그는 취임 이후 중동평화회담을 재개하는 데 힘쓰고 있으며 기후변화 대응 등에 노력하고 있다.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 200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케냐인 아버지와 인도네시아 출신의 새 아버지, 그리고 백인 어머니. 다인종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온 그는 그때의 경험을 잊지 않고 관용과 화합의 정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다. 가족으로, 미셸 오바마 여사 (Michelle Obama, 1964년 1월 17일 출생, 전 시카고대학교병원 부원장)여사와 두 딸들(말리아, 사샤)이 함께 살고있다.
노래 : Etta James (에타 제임스)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Pearl Bailey (펄 베일리,Pearl Mae Bailey)
배우, 가수 배우, 가수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항상 ‘버드 다음’이라는 식으로 ‘2인자’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버드의 음악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은 디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도 바로 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재즈 음악 ‘비밥’의 명칭 역시 디지가 고안했다.) 실제로 디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찰리 파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버드에게 선사한 디지의 공헌은 막대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물론 중간에 뛰쳐나온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찰리 파커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떠돌이 음악인 신세였고, 디지는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테디 힐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였다. 하지만 1941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의 이들 둘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디지는 버드가 지닌 천재성에 매료 되 그와 의기투합한다. 버드가 연주해서 유명해진 ‘Groovin’ high’, ’Salt peanuts’, ’Hot house’, ’Shaw ’nuff’등은 모두 디지가 작곡했다. 1945년부터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 콤비는 버드가 곡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디지가 그것을 흡수해 곡을 쓰는 방식이었다. 독보적인 음악성을 지닌 찰리 파커의 악상은 이렇듯 디지의 체계적인 음악지식에 의해 악보로 재현되었기에 우리가 지금 버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셈이다.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공헌은 버드와의 콤비 플레이 이상이다. 1947년 버드와 함께 한 퀸텟 활동을 접고 초유의 비밥 빅밴드(Bebop Big Band)를 결성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가 고안한 ‘쿠밥’(Cubop)이라는 장르인데,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 대가 차노 포조(Chano Pozo)를 초청해 비밥과 아프로 큐반 리듬의 온전한 결합을 시도하며 재즈 내에서 본격적인 ’퓨전‘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로 디지는 기억되다. 재즈의 명 스탠다드로 자리 매김 한 대표 곡 ’A night in tunisia’, Cubana bop’과 같은 곡은 아프로 큐반 재즈의 원형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밀트 잭슨, 제임스 무디, 유셉 라티프, J.J 존스과 같은 50-60년대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이란 이름으로 모인 걸출한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후 팻츠 나바로,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영향을 끼치며 비밥이 한층 그 흑인성을 더하며 하드 밥 (Hard Bop)으로 진화 해 가는데 기여한다. 1917년 노스 캘롤라이나 주 출신인 디지는 12세때부터 트럼펫을 손에 잡고 이후 대학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만, 뮤지션이 되기 위해 자퇴한다. 30년대 스윙시대를 빛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37년 테디 힐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프로로 데뷔한다. 이후 1939-1941년까지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빅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리더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이윽고 해고된다. 이윽고 그의 첫 음악동지 테디 힐이 세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버드를 비롯한 비밥의 명인들과 음악적 교분을 나누며 1941-1943년까지 엘라 핏 제럴드, 베니 카터, 콜맨 홉킨스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며 비밥의 혁명을 준비한다. 1942년 얼 하인즈 빅밴드에 합류하며 디지는 버드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었고 이때 밴드의 보컬주자 빌 엑스타인의 보컬로 그의 대표작 ‘A night in tunisia’(1943)을 발표한다. 1945-1947년까지 버드와 함께 퀸텟을 조직, 비밥을 세상에 알렸고, 1947년부터 자신의 비밥 빅밴드를 이끌면서 아프로 큐반 음악을 재즈에 소개한다. 1950년엔 버드와 다시 만나며 < Bird & Diz >를 버브 레이블에서 공개했고, 이후 1950년대 내내 버브사를 통해 자신의 연주에 큰 영향을 준 로이 엘드리지와 함께 한< Dizzy Gillespie & Roy Eldridge >(1954), 10년 동안의 빅 밴드 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라이브 명반 < At Newport >(1957)을 발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이후 6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소규모 밴드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레오 라이트(Leo Wright), 라로 쉬프린(Lalo Schifrin), 제임스 무디(James Moody), 케니 바론(Kenny Barron)과 같은 60년대 스타급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했고, 70년대 초엔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라는 프로잭트 밴드를 결성, 델로니우스 몽크 ,소니 스티츠, 아트 블래이키와 같은 40-50년대 비밥 명인들과 재결합을 시도한다. 이후 재즈 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 들어갔지만, 후배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80년대까지 그와 함께 연주를 같이 한다. 그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리빙 하바나’를 통해 소개된 아르투로 산도발(트럼펫)과 파키토 리베라(색스폰)와 같은 쿠바 출신의 뮤지션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죽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디지는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뤘던 버드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파괴했던 버드와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낄 줄 알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드와 함께 ‘비밥의 산파자’라는 영예와 더불어 많은 후배 뮤지션들을 키워내며 재즈 사에서 버드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연주 : Grover Washington Jr.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Grover Washington Jr.)는 리듬 앤 재즈(Rhythm & Jazz)라는 대중적인 연주 음악의 선구자이다. R&B 디바의 팔세토(Falceto) 창법을 연상시키는 그의 달콤한 색스폰 연주는 1970년대 재즈 록 퓨전의 창궐과 함께 대중적인 지명도를 얻는다. 비슷한 시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백인 알토 색스폰 주자 데이빗 샌본(David Sanborn)과 함께 그는 80년대 등...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Grover Washington Jr.)는 리듬 앤 재즈(Rhythm & Jazz)라는 대중적인 연주 음악의 선구자이다. R&B 디바의 팔세토(Falceto) 창법을 연상시키는 그의 달콤한 색스폰 연주는 1970년대 재즈 록 퓨전의 창궐과 함께 대중적인 지명도를 얻는다. 비슷한 시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백인 알토 색스폰 주자 데이빗 샌본(David Sanborn)과 함께 그는 80년대 등장한 케니 지(Kenny G)와 90년대 나지(Najee)로 대변되는 ’팝 연주음악’ 인기의 견인차로 평가된다. 1943년 12월12일 뉴욕 주 버팔로 생인 그는 색스폰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교회 성가대 단원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10살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색스폰은 그를 프로 뮤지션을 향한 첫 발을 내딛게 한다. 일찍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16살 때 집을 떠나 오하이오에 있는 재즈 밴드 ’포 클랩스’(Four Clefs)에 가입한다. 1963년부터 프리랜서 뮤지션으로 활동한 그는 이후 군 복무를 하며 군악대 생활을 하게 된다. 1967년 제대한 후 그의 주 활동무대로 자리 매김 한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로 진출, 프레스티지(Prestige) 레코드 소속의 존 하몬드 스미스, 찰스 얼 랜드의 사이드 맨으로 활약한다. 1970년, CTI 레이블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인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의 도움으로 원래 녹음하기로 한 색스폰 주자 행크 크로포드(Hank Crawford)의 솔로 앨범이 개인 사정으로 무산되자 그를 대신할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에게 첫 솔로 앨범의 기회가 가게 된다. 1971년, 마빈 게이(Marvin Gaye)의 명반 < What’s going on >(1971)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데뷔 작< Inner city blues >를 발표하며 수록 곡 ’Inner city blues’, ’Mercy mercy me’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둔다. < All the king’s horses >(1972), < Soul box >(1973)를 연이어 발표한 그는 그에게 첫 골드를 안겨다 준 수작 < Mr. magic >(1974)을 필두로 < Feel so good >(1976)을 포함함 이후 발표된 6장의 앨범을 모두 빌보드 차트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얻는다. 1979년 일렉트라(Elektra)로 이적, R&B 가수 빌 위더스(Bill Whithers)가 보컬로 참여한 ’Just the two of us’가 수록된 명반 < Winelight >(1980)로 그는 빌보드 팝 싱글 차트에 5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렸고 팝 차트, 재즈 차트에 각각 52주, 102주간 머무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현재까지 1000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하며 그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 준 < Winelight >는 이듬해인 1981년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 상과 베스트 컨템포러리 재즈 상 2개 부문을 석권한다. 그러나 < Winelight >의 엄청난 성공으로 갑자기 스포라이트를 받게 된 그는 정신 없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되지만 이후에 나온 그의 작품에 ’진부함’이라는 혹평이 따라 붙게 된다. < Come morning >(1981), < The best is yet to come >(1982), < Inside move >(1984)를 발표하지만 < Winelight >에서 누린 영광은 재현하지 못한다. 이런 차에 1986년 그는 CBS로 이적, 희극 배우 빌 코스비 쇼(Bill Cosby show)의 스코아 앨범 < A house full of love >(1986)을 발표하고, 텔레비전 시리즈물 ’블루 문 특급’< Moonlightin’ >의 스코아 작업에도 참여, 재즈 보컬 알 자로(Al Jarreau)가 보컬에 참여한 테마 곡 ’Moonlightin’(1987)에서 강한 인상이 느껴지는 알토 색스폰 연주로 다시 한번 대중들의 호응을 얻는다. ’팝 재즈’의 공식에 입각했던 그의 연주에 늘 못마땅해한 평론가들을 늘 의식한 그는 론 카터, 허비 핸콕 등이 참여한 앨범< Then & now >(1988)로 정통 재즈의 귀환을 온전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얻으며 80년대의 그의 계속된 부진을 다소 만회시킨다. 이후 정통 재즈의 어법의 입각한 그의 연주 행보는 90년대에까지 지속되며 40-50년대 클럽에서의 생생한 재즈 연주를 리바이벌한 수작< All my tomorrow >(1994)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불행이 그에게 찾아온다. 1999년 12월 17일 CBS TV의 ’The saturday night show’의 녹화 도중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음악을 아끼던 전 세계의 음악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듬해 초 그의 유작 < The posthumous aria >(2000)가 발매된다.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Robert Glasper (로버트 글래스퍼 )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연주 : Count Basie (카운트 베이시)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빅 밴드만의 차별점을 제시했다. 그는 멤버들 각자의 탁월한 연주 기량에 더해 솔로와 리듬연주간의 긴밀한 조화를 일궈내며 재즈 연주에서 앙상블(Ensemble)의 매력을 만끽케 한다. 그는 1920년대 스트라이드(랙타임에서 발전된 피아노 연주법)의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의 피아노 주법을 계승하며 부기우기(Boogie Woogie)라는 독특한 리듬 패턴을 제시한다. 12마디 블루스 형식의 부기우기(셔플 리듬이라고도 함)는 일반적인 스윙 연주가 1박과 3박에 강세가 오는(츄우 추 취- 츄우 추 취-)리듬패턴이었던 것과는 달리 2박과 4박에 비트가 가해지는(칙 둥- 칙 둥-)식의 리듬을 창조해내며 향후 재즈에서 비트(Beat)가 중요해 질 것을 예견케 했다. 카운트 베이시가 제시한 이 ’리듬의 혁명’은 당시까지 밴드 안에서 그 역할이 미비했던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기타의 리듬 연주를 강화하며 재즈 쪽에서 1940년대 비밥(Bebop)의 전야(前夜)를 수놓았고, 블루스 쪽에선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와 같은 점프 블루스(Jump Blues) 스타의 출현을 가져오게 한다. 1904년 미국 뉴저지주 생으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음악 레슨을 받았고, 1920대에 이르러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 주자 팻츠 월러로부터 사사한다. 1927년 미국 중소도시를 도는 유랑극단인 보드빌(vaudeville) 무대에서 처음 직업 음악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28년 곤젤 화이트의 빅 재즈 잼보리(Gonzelle White’s Big Jazz Jamboree)의 멤버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다 뉴 올리언즈에 버금가는 재즈의 고장 캔사스(Kansas City)에 도착해 밴드의 해산을 맞았지만 곧바로 캔사스에 정착한다. 뉴욕은 대공황으로 실업자들이 들 끌고 금주령으로 클럽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지만 정치적인 보스였던 톰 팬더개스트의 지배 아래 캔사스 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불법적인 음주와 도박이 벌어지던 수많은 클럽이 도시 안에 성행했고, 거의 모든 클럽에서 재즈 라이브가 열렸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일자리를 찾아 캔사스 시티로 몰려들어 1930년대 스윙 시대에 만개할 ’리듬의 향연’을 준비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 캔사스 시티 >(1995)를 보면 1930년대 그곳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캔사스 지역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한 월터 페이지(Walter Page)가 이끄는 블루 데빌스(Blue Devils)의 멤버로 가입, 여기서 훗날 그의 페르소나(Persona)로 남게 된 가수 지미 러싱(Jimmy Rushing)과 테너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ung)을 만난다. 이듬해엔 캔사스 시티 출신인 밴드 리더 베니 모튼(Bennie Morton)을 만나며 모튼의 빅 밴드에 가입한다. 모튼의 밴드에서 편곡을 맡았던 그는 1935년 모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밴드의 리더로 나서게 되고, 이때 블루 데빌스 시절에 만났던 동료들을 규합해 1936년 자신의 밴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이때 자신의 본명 윌리엄 베이시(William Basie) 대신 ’백작(Count)’의 작위를 수여하며 ’카운트 베이시’로 개칭한다. 1936년, 그의 음악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접했던 세기의 명 프로듀서 존 해몬드(John Hammond)의 주선으로 그와 그의 밴드는 캔사스를 떠나 뉴욕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1937년 1월, 데카(Decca)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수많은 밴드의 명곡들을 녹음하게 된다. ’One o’clock jump’(1937)를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Boogie woogie’(1937), 지미 러싱의 보컬로 더 유명한 ’Stop beatin’ round the Mulberry Bush’(1938), ’Cherokee’(1939)등을 모두 차트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의 창작력의 정점이었던 이 당시 그의 대표 곡들은 3장 짜리 CD 박스세트 < Count Basie-The Complete Decca Recordings >를 통해 만날 수 있다. 1940년대 들어 그의 밴드는 전 세계를 투어하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42-1944년까지 그와 밴드는 미국 서부에 머물며 5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I didn’t know about you’(1945), ’Red bank blues’(1945), ’Rusty dusty blues’(1945) ’Jimmy’s blues’(1945), ’Blue skies’(1946)등을 팝, R&B 차트에 진입시키면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모던 재즈 창궐과 함께 스윙음악이 점차 그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도 몇 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인 1952년에서야 다시 그의 밴드를 부활시켜 활동에 들어간다. 버브 (Verve) 레이블을 통해 활동한 1950년대는 그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시기다. 지미 러싱에 이은 재즈 보컬리스트 조 윌리엄스(Joe Willliams)를 밴드에 영입해 만든 < Count Basie Swings, Joe Williams Sings >(1955), < April In Paris >(1955)를 각각 앨범차트 톱40와, R&B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며 성공적인 재기를 거둔다. 특히 1957년 발표한 < Count Basie At New Port >는 레스터 영(Lester Young), 지미 러싱(Jimmy Ryshing),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 프레디 그린(Freddie Green)등 과거 1930년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밴드 멤버들을 다시 불러들여 만든 연주라는 점에서도 가치 있는 스윙 명반이다. 1960년대 들어 그는 주로 보컬 연주의 대가들과 함께 음반을 발표한다.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와 함께 한< Ella And Basie! >(1963),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한 < Sinatra Again >(1964- 수록곡 ’It might as well be swing’이 팝 차트 톱20에 오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한 < Our Shining Hour >(1965), 밀스 브라더즈와 함께 한 < The Board Of Directors >(1968), 그리고 소울 가수 재키 윌슨과 함께 한 < Manufacturers Of Soul >(1968)등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지병인 심장병으로 예전처럼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 그는 계속 세계 투어를 통해 연주활동을 지속했고, 파블로(Pablo)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말년 작들은 그래미 상 재즈 부문에 다수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얻으며 변함 없는 노익장을 드러냈다. 리드 악기 주자 주트 심스(Zoot Sims)와 발표한< Basie & Zoot >(1975), 그의 빅 밴드 작품 < Prime Time >(1976), 혼 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한 < The Gifted Ones >(1978)은 모두 그래미 상 재즈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다. 1981년 건강 악화로 결국 무대를 떠나 병원 생활을 하던 카운트 베이시는 암으로 1984년 향년 79세에 ’찬란한 스윙 백작’의 일대기를 접는다.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음악엔 그만의 음색이 느껴진다. 여기에 그는 재즈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화성 전개를 고안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곡(suite) 형식의 대곡을 재즈로 소화해낸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유산은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 많은 음악 학자들이 “듀크 엘링턴은 세계 대중음악을 20년 이상 앞당겼다”고 평했을 만큼 그는 재즈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899년 4월29일,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접한다. 아버지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집사였고 당시 흑인들 중에선 드물게 중산층에 속했던 덕에 가정교사를 통해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Soda fountain rag’와 ’What you gonna do when the bed breaks down’를 처음으로 작곡했고, 18세 때에는 워싱턴 지역의 유명한 밴드 리더로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1923년 재즈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 진출한 그는 자신의 밴드 ‘더 워싱턴스’(The Washingtons)를 결성한다. 이 때 자신의 이름에 영예로운 공작(Duke) 칭호를 부여하며 듀크 엘링턴으로 개칭한다. 1927년에 이르러 밴드는 뉴욕 지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인정을 받았고, 얼마 후 백인 전용클럽이었던 코튼 클럽(Cotton Club)에 입성한다. 그가 악장으로 일하게 된 코튼 클럽은 미국의 상류층들이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이후 재즈의 상징어가 된다. 뉴 올리언즈의 스토리 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음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바야흐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첫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1927)가 발표된다. ’와우-와우‘하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당시까지의 재즈 연주가 대부분 장조였던 것과 달리 구슬픈 멜로디가 들리는 단조 풍의 연주곡이었다. 독특한 악기 음색과 치밀한 계산이 돋보이는 연주 편곡은 당시 28세를 갓 넘은 청년 듀크 엘링턴을 일약 재즈의 비범한 뮤지션으로 상승시킨다. 1931년까지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경제 한파는 코튼 클럽에 사람들의 발길을 주춤케 했고 그는 잠시 유럽으로 진출, 이후에 있을 전성기를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미국 사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여기에 NBC, CBS, 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기면서 재즈 음악인들은 금주(禁酒)령으로 묶인 그들의 창작 혼을 다시금 살려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맞이한다. 듀크 엘링턴은 이 절호의 찬스를 통해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며 1930-40년대를 그의 음악 경력 상 최고의 절정기로 기록되게 한다. 경제 공황이라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1930년대 미국 시민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필요로 했고, 1935년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의 폭발은 뉴욕 시내의 무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코튼 클럽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은 듀크 엘링턴은 이 시기에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1932),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에 발표한 ’Dimuniendo in blue’는 재즈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7분이 넘는 대곡이다. ‘Dimuniendo in blue’가 탄생하기까지엔 웃지 못할 애피소드가 있다. 1930년대 당시 SP(78회전)음반 한 면에는 대략 3분 정도의 음악 밖에 수록할 수 없었다. 이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앞뒷면을 전부 사용해서 녹음을 했고, 결국 7분이 넘는 연주 테입은 SP 음반에 앞뒷면으로 나뉘어져 실린다. ‘3분 짜리 춤곡’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스윙 음악 스타일에 그는 자신의 음악성을 한정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윙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그는 스윙이라는 음악을 단순한 ’춤곡‘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던 플런저(Plunger; 트럼펫 앞을 막았다 닫았다 하며 음색을 조절하는 기구, 우리말로 소음기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트럼펫의 독특한 울림은 여전히 연주 전체에 ’약방의 감초‘처럼 짜릿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연출하는 세련된 편곡은 스윙 연주 편곡의 전형을 제시했다. 단조와 장조를 교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이용한 원활한 감정 처리,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빠르기 조절과 다양한 악기 음색을 실험하며 그는 정통 재즈(mainstream)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자신의 음악에 모두 담아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재즈의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의 선풍에 아랑곳없이 듀크 엘링턴은 여전히 자신의 빅 밴드를 지속시키며 스윙을 고집했고, 주변의 많은 밴드들을 위해 수많은 곡을 써 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유지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그는 작곡 구조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조곡’(suite)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갖고 여러 소품들을 만들어 전체가 하나의 큰 대곡 형식을 갖추는 조곡을 재즈에 도입해 그는 다시 한번 재즈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곡 콤비로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작곡가 빌리 스트레이혼(Biily Strayhorn)과 공동으로 작, 편곡하여 1957년 발표한 < Such Sweet Thunder >같은 앨범은 조곡 스타일의 재즈 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세익스피어(Shakespear)의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재즈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56년 뉴욕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듀크 엘링턴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의 활동은 비록 1930년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빅 밴드를 이끌며 세계 투어를 비롯하여, 활발한 음반 발표와 곡 작업을 지속한다. 이 당시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Tourist point of view’(1966)같은 곡에선 말년에 아랑곳없이 기세 등등한 멤버들의 연주실력과 그의 변함 없는 음악성이 느껴진다. 빅 밴드 단원들은 기복 없는 안정적인 연주를 했는데, 이는 1930년대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한 단원들이 함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리톤 색스폰 주자 해리 카네이(Harry Carney)는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데뷔한 1927년 때부터 무려 47년 동안 그가 그의 밴드 멤버로서 활동한다. 후반기 명작으로 거론되는 재즈 조곡 < Latin American Suite >(1970)를 발표하고 끊임없는 투어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듀크 엘링턴은 결국 1974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끊임없이 재즈 음악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자기개발에 부단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놓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재즈 맨’ 듀크 엘링턴은 그의 밴드와 자신의 곡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국보인 재즈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클래식 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지금까지도 초연 되지 않은 그의 곡들을 연구하며 지금도 그의 놀라운 음악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플레처 핸더슨은 초기 재즈 음악에 처음으로 빅 밴드(Big Band) 연주 형식을 도입한 사람이다. 미국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명성을 얻은 그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돈 레드먼(Don Redman), 콜맨 홉킨스(Coleman Hopkins)등 1930년대 미국에서 폭발한 스윙 열풍의 주역들을 배출한 스윙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30년대 중반 스윙이 명실상부 미... 플레처 핸더슨은 초기 재즈 음악에 처음으로 빅 밴드(Big Band) 연주 형식을 도입한 사람이다. 미국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명성을 얻은 그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돈 레드먼(Don Redman), 콜맨 홉킨스(Coleman Hopkins)등 1930년대 미국에서 폭발한 스윙 열풍의 주역들을 배출한 스윙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30년대 중반 스윙이 명실상부 미국의 국민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플레처 핸더슨의 새로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12월 18일 랜돌프 직업학교의 교장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선생인 어머니 오지 핸더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 애틀란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다. 석사학위를 위해 1920년 뉴욕에 진출한 플레처는 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대학 입학을 거절당한다.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프레처는 페이시 핸디 음악회사에 취직, 피아노 연주자로 일한다. 블루스 보컬주자이기도 했던 사장 페이시 핸디는 평소 흑인음악 전문 레이블을 설립할 계획이 있었는데, 플레처 핸더슨이 적임자라 여겨 그에게 동업을 권유한다. 이에 핸디는 1921년 최초의 흑인 레이블 블랙 스완(Black Swan)을 설립, 플레처 핸더슨은 레이블 내의 전속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1924년 1월에는 빅 밴드 플레처 핸더슨 앤 히스 오케스트라(Fletcher Henderson & his Orchestra)를 조직한다. 밴드의 구성원이었던 알토 색스폰 주자 돈 레드먼과 콜맨 홉킨스는 당시까지 생소했던 서구 클래식 오케스트라 편곡을 재즈 연주에 도입, 플레처 핸더슨을 일약 재즈 계의 혁신자로 이름을 날리게 한다. 1924년에는 킹 올리버 밴드에서 활동했던 루이 암스트롱이 합류해 1년 간 플레처 핸더슨 밴드에서 활동하며 그의 번뜩이는 트럼펫 솔로를 통해 재즈에서 솔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플레처에게 가르쳐준다. ‘재즈 연주의 신기원’으로 평가된 플레처 핸더슨 밴드는 1927년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 등장 할 때까지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돈 레드먼이 1927년 탈퇴하고, 그 자리에 베니 카터와 호레이스 헨더슨이 들어와 밴드의 편곡을 담당한다. 1920년대 전성기를 거쳐 1930년대에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였지만 스윙 붐을 타고 등장하는 여러 밴드들과의 경쟁에서 차츰 밀리게 된다. 특히 미국을 강타한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음악을 들을 여유를 빼앗아가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이미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1934년 밴드의 핵심인 콜맨 홉킨스마저 탈퇴, 결국 밴드는 이듬해 해산하고 만다. 해산 직후 잠시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an)의 편곡자로 활동한 플레처는 그를 위해 많은 곡들을 편곡한다. 그가 편곡한 ‘King Porter somp’, ’Sometimes I’m happy’, ‘Down south camp meeting’은 베니 굿맨에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 주지만 정작 플레처 핸더슨의 공헌은 평가절하 된다. 1936년 다시 밴드를 조직해 ‘Christopher Columbus’를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지만 그것도 오래 못 가 1939년 와해된다. 1940년대 내내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편곡가로 활동하며 기회가 오길 기다린 끝에 1950년 럭키 톰슨과 섹스텟(sextet)을 결성해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지만 와신상담의 보람도 없이 그 해 뇌일혈로 쓰러져 2년 후인 1952년 세상을 떠난다.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 재즈계의 ’보스’(Boss)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전방위 재즈 뮤지션이었다. 비밥을 시작으로 모던재즈와 실험적인 빅밴드까지 관통하는 그의 연주 여정은 일반적인 베이스 연주인의 영역을 넘는 것이었다. 비밥 혁명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찰스 밍거스는 그의 전성기인 1950-60년대 중반까지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베이스 플레이어로, ’ Good-bye pork pie hat’ (1959)를 위시해 수많은 재즈 연주를 작곡한 작곡자로, 소울 빅밴드(Soul Big Band)의 리더로서 스윙에 한정되지 않는 한층 복잡다단한 현대적인 재즈 오케스트라를 확립한 음악 감독이었다. 이런 음악적 열정과 더불어 밍거스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인 1950-60년대 재즈 음악계에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흑인 실력자였다. 흑인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으로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자신의 음반사인 ‘Debut’을 창립했고, 빅밴드를 이끌던 1960년엔 ’재즈 아티스트 길드’(Jazz Artist Guild)란 조직을 창립시키며 뉴욕 클럽 지역에서 활동하던 흑인 재즈 뮤지션들과 연대해 클럽 주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적극 대응하기도 했다. 흡사 보스를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처럼 그의 인생은 가히 보스다웠다. 인종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밍거스는 1961년 미국 뉴욕 카네기 홀 앞에서 맥스 로취를 비롯한 흑인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백인들 사이에선 그는 경계해야할 흑인 뮤지션 블랙리스트에 단연 선두를 자리 잡았고, 재즈 뮤지션들도 흡사 ‘재즈 정치인’과 같은 그의 음악외적인 활동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기인에 가까울 정도의 이런 그의 급진적인 행동은 음악으로도 표출된다. 대표적으로 늘 거론되는 < Mingus Ah-um > (1959) 의 수록곡 ’Fables of Fabus’에서 ‘Fabus’는 당시 ’리틀 룩 사건’이란 인종차별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아칸사스 주의 주지사의 이름을 써 풍자적인 연주로 표현했고, ’Oh Lord, Don’t Let Them Drop That Atomic Bomb on Me’ 와 ’Remember Rockefeller at Attica’ (1974) 역시 제목이 암시하듯 흑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억압의 굴레를 파격적인 연주로 한풀이하고 있다. 흡사 지사와도 같은 이런 밍거스의 모습은 하지만 그가 창조해 낸 풍성한 연주 세계에 비할 바 아니다. 스윙과 비밥을 근간으로 한 그의 연주세계는 하드밥과 가스펠, 소울의 영향이 짙게 깔린 소울 빅밴드 연주를 창조해냈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빅밴드의 차원을 넘어서 밍거스는 10인조미만의 소 편성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한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멤버들의 솔로 기량을 앞세우기 보단 작, 편자의 의해 악보에 근거한 밍거스 빅밴드의 사운드는 빅밴드가 스윙을 벗어나 프리/아방가르드에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밍거스가 씨를 뿌린 소울 빅밴드의 유산은 훗날 프로그레시브 빅밴드란 스타일로 이어지며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 베이시스트 데이브 홀랜드,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하며 현대 빅밴드의 선구자와 같은 위상을 점유한다. 1922년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태어난 찰스 밍거스는 L.A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교회를 출석하면서 어께너머로 피아노, 트럼본,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지역을 방문한 듀크 엘링턴 빅밴드 연주를 관람한 밍거스는 재즈에 매료됐고 특히 밴드의 베이스 주자였던 지미 블랜튼(Jimmy Blanton)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고 베이스 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베이스에 빠른 두각을 보인 밍거스는 1940년, 이런 저런 밴드를 거쳐며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인으로 나선다. 키드 오리(Kid Ory),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 밴드에선 초기 뉴 올리언즈와 스윙을 연주했고 40년대 중반부턴 뉴욕 52번가에서 바야흐로 막 물이 오르던 비밥 열풍에 동참하며 찰리 파커와 버드 파웰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 1950년대 초, 걸출한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대다수 슬럼프에 빠져있던 것과 달리 밍거스는 기타리스트 탈 팔로우, 테너 색소폰니스트 스탄 게츠 등 백인 뮤지션들과 협연을 했고, 이런 기회를 통해 주류 재즈 무대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1953년엔 ‘비밥의 종언’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연 < Live at Massey Hall > 을 비밥의 동료였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취, 버드 파웰과 함께 ‘더 퀸텟’이란 밴드 멤버 자격으로 녹음해 자신이 설립하게 될 레이블 데뷔를 통해 발표한다. 이렇게 화려한 사이드 맨 시절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밍거스는 1952년, 드러머 맥스 로취와 의기투합해 자신의 레이블인 ‘Debut’을 창립한다. 여기에 1953년부턴 정기적으로 클럽을 빌려 작곡한 연주를 발표하는 식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이란 행사를 개최했다. 재즈 워크숍은 흑인 연주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호레이스 실버, 델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레이키, 맥스 로취와 같은 하드밥의 주역들이 그의 워크숍에 동참한다. 음악인답지 않은 그의 비즈니스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밥에서부터 실험적인 사운드까지 폭넓게 아우른 그의 음반사업은 그러나 경영 악화로 결국 1955년 그가 설립한 Debut 레코드는 문을 닫고 만다. 음반사업을 정리한 밍거스는 어트랜틱을 통해 첫 리더작 < Pithecanthropus Erectus : 직립 원인 > (1956)을 발표한다. 새로 조직한 퀸텟 ‘재즈 워크숍’의 첫 작품이기도 한 앨범에서 타이틀 곡 ‘직립원인’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위대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변화무쌍하고 익살스런 편곡으로 그려낸다. 심오하기까지 한 블루스와 가스펠의 연주 영역을 제시한 ‘직립원인’을 계기로 찰스밍거스 재즈 워크숍은 향후 10년간 ‘흑인에 흑인을 위한 흑인의 빅밴드’라 할 소울 재즈 빅밴드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어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밍거스는 특유의 당차고 힘 있는 재즈 앙상블로 명반행진을 이어간다. 시종일관 우렁찬 혼 섹션으로 위풍당당한 재즈 앙상블을 소화한 ‘Haitian Fight song’ (1957), 박수소리와 때창, 고함소리를 활용해 흑인 교회 수요 예배의 전경을 이색적으로 표현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 (1959)을 연이어 발표한다. 베이스 주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던 밍거스의 유일한 피아노 연주 앨범 < Oh Yeah! > (1962) 또한 어틀랜틱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이런 가운데 그의 재즈 워크숍은 5인조에서 7인조라는 확장된 편성되고 그의 밴드 연주에서 편곡은 더욱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간다. 그의 또 다른 수작으로 추앙되는 ‘밍거스 아 움’ < Mingus Ah-Um >(1959) 도 바로 새로 정비된 7인조 편성으로 녹음됐다. 메이저 레이블 콜럼비아를 통해 발표된 < 밍거스 아 움 >은 향후 트럼펫터 마일스 데이비스와 명콤비로 활동하게 된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Teo Macero)가 프로듀싱했다. 앨범에선 재즈 명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를 히트시켰고 당시 막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bus’ 또한 주목받았다. 6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밴드 재즈 워크숍은 11인조라는, 가히 빅밴드다운 위용으로 변모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란 프리 재즈 전도사의 등장으로 재즈뮤지션, 그중에서도 흑인들도 프리 적인 사운드에 차츰 심취해갔고 밍거스 또한 이런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시작으로 한껏 볼륨을 높인 밍거스의 재즈 워크숍엔 당시 한창 줏가를 올리던 프리-아방가르드 사운드의 주역들이 포진돼 있었다. 만능 리더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를 위시해 롤랜드 커크(Rolnad Kirk), 잭키 맥린(Jackie Mclean)와 같은 명연주인들이 그의 밴드를 거쳐갔다. 기존 그의 발표한 곡들과 스탠더드를 11인조 앙상블로 리메이크해 녹음한 < Mingus,Mingus,Mingus,Mingus,Mingus > (1963)를 시작으로 같은 해 발표된 < The black saint & the sinner lady > 로 밍거스는 또 한번의 일가를 이뤄낸다. 앨범서 밍거스의 밴드는 연주의 자유로운 즉흥성을 배가시키며 멤버 개개인 자발적인 사운드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불협의 매력을 제시했다. 이름 하여 총체적 즉흥(Collective Improvisation)을 통해 재즈 빅밴드가 한층 모던한 사운드로 탈바꿈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 오넷 콜먼의 프리 재즈처럼 불협으로 일관하는 무형식의 난해한 사운드가 아닌, 불협과 앙상블을 오가며 기승전결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프리 사운드였다. 음악적으로 한창 정점에 달달한 찰스 밍거스는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차츰 쇄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음악 외적으로 ‘아티스트 길드’를 조직해 흑인 재즈 뮤지션의 권리 보장에 앞장섰지만 그의 의도처럼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출간하기로 했던 자서전의 계약이 무산으로 돌아갔고, 무리한 밴드 운영으로 인해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여기에 거래 은행의 도산과 신경쇄약까지 이어져 밍거스는 60년대가 끝나갈 시점까지 이렇다 할 후속 작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돈이 필요해 다시 음반 작업에 나선 밍거스는 역작 < 밍거스 아 움 >의 제작자 테오 마세로를 찾아간다. 그리고 테오와 다시 손을 잡고 찰스 밍거스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 Let my children here music > (1971)으로 다시 한번 혁신적인 사운드를 일궈낸다.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풍성한 관악기편곡이 돋보인 앨범서 ’Adagio ma non troppo’로 주목받는다. 문제되던 재정문제도 해결 돼 그가 창립했던 Debut 레코드를 판타지 레이블에서 인수해 밍거스는 다시 창작의 안정적인 기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년에 접어든 1974년, 초기 퀸텟 사운드로 돌아간 밍거스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돈 풀렌(피아노), 잭 왈라스(트럼펫), 조지 아담스(색소폰)처럼 당시 신예 뮤지션들을 불러 모아 < Changes 1&2 > 를 발표한다. 치밀한 계산과 프리적인 연주가 강화된 작곡은 그의 후기 명연으로 기록된다. 영화음악에도 관여해 밍거스는 < Cumbia & Jazz Fusion > 의 스코아를 맡으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이런 열화와 같은 노익장에도 불구, 1977년 밍거스는 파킨스씨 병을 얻고 만다. 휠체어 신세가 된 밍거스는 이듬해부턴 사지가 마비돼 더 이상 베이스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망 1년 전인 1978년,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예비 돼 있었는데, 그 주역은 찰스 밍거스와 포크 가수 조니 미첼이었다. 당시 재즈 퓨젼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던 조니 미첼은 평소 밍거스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사운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차에 밍거스의 육성을 담아 자신의 독집 앨범에 담게 된다. 1979년 1월 밍거스는 파란만장한 재즈 일대기에 종지부를 찍으며 57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그의 음악성에 깊은 오마주를 담은 조니 미첼의 < Mingus > 가 발표됐고 밍거스의 분신과도 같은 스탠더드 ‘Goodbye pork pie hat’은 망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조니 미첼의 체념하는 듯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재즈 음악 이상의 족적을 남긴 찰스 밍거스를 기념하기 위해 미망인 슈 밍거스(Sue Mingus)는 그가 남기고 간 전 재산을 투자해 밍거스 재단을 설립한다. 그가 불철주야 매달렸던 재즈 뮤지션들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재단은 차츰 규모가 커져 1991년엔 밍거스의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 밍거스 빅밴드(Mingus Big band)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랜디 브레커, 케니 드류, 잭 왈라스 등 재즈계에 내노라 할 실력파 뮤지션들이 포진된 밍거스 빅밴드는 1993년 첫 앨범 < Nostagia in time sqaure > 를 발표하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통해 밍거스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밴드 : Gladys Knight & The Pips (글래디스 나이트 앤 핍스)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544-7758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