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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영화음악 (Rushmore OST) [LP]

웨스 앤더슨 감독의 1998년 두 번째 작품

Mark Mothersbaugh 작곡/The Creation, Chad & Jeremy, Cat Stevens, Yves Montand 노래 외 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Guerssen / Guerssen | 2020년 02월 2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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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영화음악 (Rushmore OST)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 예정일 2020년 02월 28일

관련분류

디스크

Disc
  • 01 [Side A] Hardest Geometry Problem In The World - Mark Mothersbaugh
  • 02 Making Time - Creation
  • 03 Concrete & Clay - Unit 4 + 2
  • 04 Nothing In This World Can Stop Me Worrin' Bout That Girl - The Kinks
  • 05 Sharp Little Guy - Mark Mothersbaugh
  • 06 The Lad With The Silver Button - Mark Mothersbaugh
  • 07 A Summer Song - Chad & Jeremy
  • 08 Edward Appleby (In Memoriam) - Mark Mothersbaugh
  • 09 Here Comes My Baby - Cat Stevens
  • 10 A Quick One While He's Away - The Who
  • 11 [Side B] Snowflake Music (From Bottlerocket) - Mark Mothersbaugh
  • 12 Piranhas Are A Very Tricky Species - Mark Mothersbaugh
  • 13 Blinuet - Zoot Sims
  • 14 Friends Like You, Who Needs Friends - Mark Mothersbaugh
  • 15 Rue St. Vincent - Yves Montand
  • 16 Kite Flying Society - Mark Mothersbaugh
  • 17 The Wind - Cat Stevens
  • 18 Oh Yoko - John Lennon
  • 19 Ooh La La - Faces
  • 20 Margaret Yang's Theme - Mark Mothersbaugh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11명)

노래 : Chad & Jeremy (채드 앤 제레미)
멤버 : Chad Stuart, Jeremy Clyde 멤버 : Chad Stuart, Jeremy Clyde
노래 : Cat Stevens (캣 스티븐스 (유수프 이슬람),Yusuf Islam )
북한에 애인을 남겨두고 남으로 내려온 한 남자의 사랑을 그린 최근 영화 을 보면 주인공인 두 북한 남녀가 놀이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The first cut is the deepest’라는 팝송이 들린다. 첫 사랑이 남긴 깊은 인상을 노래하는 이 곡은 1977년에 로드 스튜어트에 의해 히트되었고, 2003년에는 여가수 셰릴 크로우가 리메이크해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캣 스티븐스가 작곡하고 불렀던 곡... 북한에 애인을 남겨두고 남으로 내려온 한 남자의 사랑을 그린 최근 영화 을 보면 주인공인 두 북한 남녀가 놀이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The first cut is the deepest’라는 팝송이 들린다. 첫 사랑이 남긴 깊은 인상을 노래하는 이 곡은 1977년에 로드 스튜어트에 의해 히트되었고, 2003년에는 여가수 셰릴 크로우가 리메이크해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캣 스티븐스가 작곡하고 불렀던 곡이다. 캣 스티븐스는 1970년대 초중반에 ‘Wild world’, ‘Peace train’, ‘Morning has broken’, ‘Moonshadow’ ‘Oh very young’ ‘Another Saturday night’등 일련의 히트송으로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했던 인기 팝가수였다. 그 시절의 히트 퍼레이드는 최고 가수 엘튼 존에 못지않을 만큼 거셌다. 특히 ‘Wild world’는 나중 1993년, 록 그룹 미스터 빅(Mr. Big)이 소개해 줄기차게 전파를 탔고, ‘Morning has broken’은 얼마 전 어린 가수 조셉 맥매너스(Joseph McManners)를 포함해 무수한 가수가 즐겨 부르는 팝의 명곡으로 꼽힌다. 통기타의 찰진 울림을 강조한 그의 음악은 파워가 실린 보컬 덕분에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함을 내뿜은 것이 특징이었다. 1966년 그룹 ‘스프링필즈’ 출신의 마이크 허스트가 발굴, 그해 데카의 프로그레시브 록 레이블인 데람(Deram)에서 데뷔 싱글인 ‘I love my dog’을 냈고 세 번째 싱글이자 강한 메시지가 담긴 ‘I’m gonna get me gun’은 영국에서 톱10을 기록했다. 나쁜 건강으로 2년을 쉰 그는 1970년에 완연한 싱어송라이터로 복귀, 앨범 과 이국풍의 싱글 ‘Lady d’Arbanville’을 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때는 이듬해인 1971년 앨범 < Tea For The Tillerman >에서 ‘Wild world’가 미국 차트 11위에 오르는 히트를 치면서였다. (캣 스티븐스가 곡을 썼지만 영국에서 한 해 전 레게 가수 지미 클리프의 노래로 먼저 알려졌다) 같은 해 첫 빌보드 톱10을 기록한 ‘Peace train’과 19세기의 찬송가인 ‘Morning has broken’이 수록된 < Teaser And Firecat >을 비롯해 < Catch Bull At Four >(1972년) < Foreigner >(1972년) < Buddah And The Chocolate Box >(1973년) 등의 성공적인 앨범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1979년 이후로 팝 음악계에서 캣 스티븐스라는 이름은 영원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이름을 유수프 이슬람(Yusuf Islam)으로 바꾸고 이슬람교도로 개종하면서 서구 팝 무대와 작별해버렸기 때문이다. 인기를 버리고 신념을 택한 것. 그 뒤로 걸프전쟁 등 간혹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 멋진 팝 음악은 더 이상 내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음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슬람교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을 전파하기 위한 종교와 음악 활동을 지속해왔다. 일례로 딸 하산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앨범 < A Is For Allah >(2000년 재발매)은 서방세계에 불법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1999년에는 기존에 발표한 앨범들을 CD로 리마스터링하는 과정에서 영국 스튜디오에 나타나 화제를 모았으며 이 무렵 영국 BBC는 그의 음악을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2005년, 캣 스티븐스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쓰나미’ 희생자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했다. 동시에 자선기금 모금용 앨범 < Indian Ocean >도 만들었다. 그러나 음악 외적인 측면에서 근래 미국과 이슬람국가 간의 갈등으로 인해 그의 대외적 입장은 반미(反美)노선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실제로 그는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쟁을 수행한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2004년, 런던 발 워싱턴행 항공기에 탑승했다가 뒤늦게 테러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른 사실이 확인되면서 미국 입국은커녕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간 몰래 이슬람 저항단체인 ‘하마스’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비밀이 없고 평화적인 구호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안다.”며 혐의를 반박했다. 얼마 뒤에 그는 고르바초프재단이 주는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한편에서는 테러 요주의 인물이요, 다른 한편에서는 평화주의자라는 상반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입장을 떠나 그의 신념이 지구촌의 평화 정착에 대한 바람에 있음은 분명하다. 한창 팝 가수로 명성을 날릴 시절의 노래 ‘Peace train’이 생생하게 말해준다. 다만 이슬람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미국에 대한 반대의 이미지가 유독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 Indian Ocean > 앨범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캣 스티븐스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슬람 신도이자 예술가로서 나의 관심사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 특히 명분이 옳을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을 믿는다.” 이 말은 결국 음악을 하되, 인기에 영합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명분 즉 평화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는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뜻이다. 1947년, 그리스 혈통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팝 가수 출신임을 감안하면 그의 의식과 행적은 남다르다. 그래서 때로 그는 ‘기인’으로도 통한다. 이런 사실에 관심이 끌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캣 스티븐스를 기억하는 것은 훌쩍 30년이 지났어도 그 노래가 선사하는 빼어난 미학이다. 1976년 세계 순회공연실황을 담은 것으로 2004년에 발매된 앨범 < Majikat >가 말해준다. (국내에서도 2006년 라이선스로 발매되었다) 다시 들어보는, 단호하면서도 서정적인 그의 음악은 여전히 아름답다.
배우, 샹송 가수 배우, 샹송 가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John Lennon (존 레논 (비틀즈))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r)은 1960년대 내내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를 주도하면서 시대를 대변했다. 1960년대는 그들의 것이었다. 1970년 그룹은 해산되었고 비틀스라는 이름은 무대에서 사라져 갔지만 멤버 모두가 빛나는 솔로 활동을 펼쳐 재결합설은 끊임없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룹 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레논이 1980년 괴한의 흉탄에 피살되면서 사실상 비틀스 스토리는 끝이 났다. 존 레논은 비틀스의 리더였다. 그의 이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을 이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그가 사망했을 때 시사주간지 < 타임 >과 < 뉴스위크 >는 동시에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던가(권위를 자랑하는 이 양대 주간지가 문화 예술인을 발행일이 같은 날에 표지인물로 취급하기는 존 레논이 최초였으며, 지금까지 그밖에 없다). 그는 우리에게도 유명하다. 비틀스의 리더라는 사실은 차라리 상식이고,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폴 매카트니와의 다툼으로도 유명하다. 아내가 일본 여인 요코라는 점도 유명하다. 특히 우리 팝 팬들에게 ‘이매진’, ‘러브’, ‘오 마이 러브’ 등 아름다운 팝송을 남긴 ‘부드러운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970년 비틀스 해체 전후로 정치, 사회적 제반 문제를 강도 높은 톤으로 노래하고 한때 일선 투쟁에까지 가담한 ‘투사’였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존 레논이라는 어찌보면 한 사람의 대중 스타의 존재에 시사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무게를 실어준 이 중요한 사실이 우리 대부분의 팝 팬들 기억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틀스 시절이 1960년대 후반 존 레논에게 대중음악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인기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꿰뚫고 그 인식을 전달하는 미디어로 파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3인칭 대중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사회적 사고를 전달하는 1인칭 다큐멘터리를 쓰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1968년 그는 ‘혁명(Revolution)’이란 제목의 노래를 싱글로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레논의 사실주의적, 정치적인 노래쓰기의 신호탄을 올렸다. ‘혁명을 원한다고들 하지. 그래,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지... 그러나 당신들이 파괴에 관하여 얘기할 때 나를 제외시키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요... 헌법을 개정할 거라고들 하죠. 예, 우리는 머리를 변화시키길 바라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들 하죠. 대신 정신 상태를 해방시켜야 할 거예요. 모택동의 사진을 들고 나선다면 여하튼 누구와도 성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미국과 영국 전역에 민주화 투재, 반정 운동으로 시위와 집회가 들끓기 시작하던 그 당시 존은 과격한 행동주의 노선에 앞서 ‘정신 개조’와 ‘의식혁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금의 풍조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의식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그 무렵 존은 자신이 양친 없이 이모 밑에서 자란 불우한 유년기를 비롯, 자신이 겪게 된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자각한 상태였다. 이러한 존재 규명을 토대로 그는 비틀스 해산 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971년도 음반 <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의 수록곡 ‘어머니(Mother)’에서 존은 ‘어머니 가지 말아요, 아버지 돌아오세요’라고 광기서린 듯 절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토해 내고는 곧바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란 곡에서는 전투 의지를 다지는 현재의 변모된 자신을 펼쳐 보인다.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하지.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하지. 그래서 당신은 돌아 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지.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거야... 그들은 당신을 종교와 섹스와 TV로 중독시키지.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현명하고 계급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여기는 거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여전히 형편없는 농부나 다름없다구.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하지... 영웅이 되려거든 자 나를 따르라구!’ 존은 무차별로 법, 종교, 도덕 등 자본주의의 이념적 베일을 들추어 그 실체를 통렬히 고발하면서 개량과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을 부르짖는다. 의식 혁명의 단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실천과 투쟁의 시점으로 진입해야함을 느낀다. 노래로써 그가 내세운 테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로 포장되었다. < 플라스틱 오노 밴드 >와 곧이어 공개된 < 이매진(Imagine) > 음반의 수록곡을 비롯해 해산 직후에 싱글로 발표한 노래를 살펴보자.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올 거야. 네 머리를 두드릴 거야. 자신과 만나야 할거야. 곧 당신은 죽게 될 터인데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사랑 앞에서 비웃으면서 말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당신에게 달려 있어...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찾아올 거야. 당신의 발을 움직이게 할 거야. 네 주위의 형제들을 인식하라구. 네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야... 우린 빛날 수 있어. 달과 별과 해처럼. 어서와, 만나자구.’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 카르마는 인연 또는 만남을 가리키는 말로, 존은 이 곡을 통해 미디어를 포함한 현대적이고도 ‘즉각적인 만남’을 역설하고 있다. 발표 당시 영미(英美)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상품 광고배경으로 이용돼 다시금 주목받았다.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라지. 똑바로 두발을 세워 거리로 나서야 해...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를 못받고 노동하고 있어.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줘요.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야.’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법관이 되고 싶지 않아. 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난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울고 싶지 않아.’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bed a Soldier)’ 직설적이고 과격한 메시지 일색이다. 마지막 곡에서 그 일단이 엿보이고 있지만, 특히 종교는 그의 독설을 피하지 못한다. ‘신은 우리가 고통을 재는 척도로서의 관념일 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신은 관념이야, 그것으로 우린 고통을 측정하는 거지... 난 마법을 믿지 않아. 성경을 믿지 않아. 히틀러를 믿지 않아. 예수를 믿지 않아. 케네디를 믿지 않아. 석가를 믿지 않아. 엘비스 프레슬리를 믿지 않아. 밥 딜런을 믿지 않아. 비틀스를 믿지 않아. 난 나만을 믿어. 요코와 나를. 그것이 현실이야. 꿈은 끝났어. 어제까지 난 꿈을 쫓고 있었지만 이제 난 다시 태어났어.’ ‘신(God)’이라는 노래다. 여기서 신은 종교적인 신 외에 현실적 우상으로서의 신을 포함하고 있는데 존은 모두를 깡그리 거부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극단을 노출하는 곡으로 비틀스 때인 1966년 “비틀스는 예수보다 유명하다”(Beatles is More Popular than Jesus)라는 발언으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전력을 면면히 이어나간 것이다. 그의 역사관, 사회관은 1971년의 명곡 ‘이매진(Imagine)’으로 완결된다. 존은 이곳에서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고는 말미에 가서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유도하고 있다.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리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이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게나.’ 루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기초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원리로 파악된 사유재산제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초반 영화 < 킬링 필드 >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 사운드 트랙의 백미라고 칭송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존의 생활권인 영미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부정이 테마인 만큼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영화에 이 곡이 삽입된 것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어느덧 가수의 위치에서 크게 일탈, 노래 운동가이자 행위주체로 변해 있었다. 평화를 주제로 한 정치색 짙은 일련의 이벤트에 적극 나섰으며 1960년대 말 대학가의 시위를 주도한 제리 루빈이나 애비 호프먼 등 신좌익 활동가와 친교를 긴밀히 한다. 활동 거점은 미국의 뉴욕. ‘정치 가수’로서의 존 레논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1960년대 말 불길처럼 퍼져나간 공민권 투쟁, 반전 운동은 1968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월남전의 격화를 계기로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갔다. 대학가의 징병 거부 시위는 무장 투쟁의 단계로까지 진입했고 평화를 주창한 비폭력 노선의 히피들 간에도 과격집단 이른바 ‘이피’(Yippie)가 등장했다. 이피들은 흑인 무장 투쟁 그룹인 ‘블랙 팬더’와 제휴, 폭력 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는데, 이 이피들의 리더적 존재가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만이었다. 비틀스 말기부터 이피의 입장에 공감을 가졌던 존은 이들에 동조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해 정치색을 노골화한다. 1969년 5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베드인’ 행사, 같은 해 9월 캐나다 터론터에서의 ‘라이브 피스’ 공연을 가진 데 이어 1970년에는 미국으로 파고들어가 11월 뉴욕 아폴로극장에서의 ‘애티카 자선 콘서트’, 12월 미시건주 앤아버의 미시건대학에서의 ‘존 싱클레어 자선 콘서트’(제리 루빈도 참석) 등에 잇따라 출연하여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 및 모순을 규탄한다. 애비 호프만과 제리 루빈과 같은 신좌익(New Left)과 손잡고 일선 투쟁에까지 나섰으니 일련의 사회운동을 체제에 대한 도발로 간주했던 미국정부가 어찌 가만히 있었겠는가. 존의 행동은 백악관의 닉슨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닉슨 정권은 ‘위험 인물’인 존의 미국 추방을 궁리하게 됐던 것이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존은 강도높게 미공화당 정부의 사기성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 닉슨의 미움을 샀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었던 닉슨 정권은 존 레논이 급기야 그 무렵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미국땅에서 내쫓아야 했다. 닉슨 정부가 두려워했던 인물은 무장투사보다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특히 효과적인 존 레논 부류의 ‘문화적 게릴라’인 까닭이었다. 이때부터 FBI가 존과 요코의 생활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존은 정부 차원의 ‘외압’이 자신에게 가해져오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외쳤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든 또한 어디에 있게되든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할 참이다.” 1972년 2월로 기한이 끝나게 된 그의 미국 체류 비자 연장 신청은 기각되고 말았다. 표면상의 기각 사유는 1968년 그의 체포까지 몰고왔던 영국에서의 마리화나 소지죄였다(궁색하지 그지없다). 이후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는, 존의 미국 정부 당국을 대상으로 한 길고도 치열한 법정 투쟁이 전개되었다. 비자 연장 신청 기각으로 가시화된 닉슨 정부의 국외추방기도에 분기탱천한 그는 1972년 6월 가장 과격한 메시지를 담은 2장짜리 음반 < 뉴욕에서의 한때(Sometime in New York) >를 출반하여 미정부에 응답한다. 그때까지 나온 대중 가요 음반을 통틀어도 가장 급진적이라 할 만한 이 작품에서 존은 19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반민주적 사태를 성토하고 있고, 영국정부에도 핏발을 세워 당시 격화일로를 걷고 있던 북아일랜드 식민 정책에 대해서도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그는 영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경한 자세를 보여 1969년 11월 영국군이 월남과 나이지리아 전쟁에 참전한 데 항의, 비틀스 시절 받았던 국가공로훈장 MBE를 반환해버렸다). ‘죄수를 쏘다니. 43명의 가련한 여인들을. 언론은 죄수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죄수들은 서로 죽이지 않았어. 록펠러가 방아쇠를 당겼지! 그게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거야.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 ‘애티카(Attica State)’ ‘앵글로 잭슨 돼지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북부(아일랜드) 식민지화를 위해 보내졌지. 피에 젖은 유니언 잭을 흔들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찌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감히 억류한단 말인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게 맡기고 영국군은 바다로 되돌아가라!’ ‘일요일, 피에 젖는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고 역시 북아일랜드 식민화 정책을 비판한 노래 ‘아일랜드인의 운명(The Luck of the Irish)’과 함께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은 매상의 이익금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게릴라 단체인 북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부되었다. 이 곡은 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80년대 팝계를 강타한 그룹 유투(U2)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투는 곡은 존의 것과 다르지만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이 앨범에는 또 ‘안젤라(Angela)’라는 노래가 들어 있는데, 흑인 여성운동가인 안젤라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탄압을 고발하고 있다. ‘안젤라, 그들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죠. 당신의 배우자를 총살했구요. 정말, 당신은 세계의 무수한 정치적 죄수 중 한 사람이죠... 안젤라. 세계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가요? 세상은 당신을 주시하고 있어요. 당신은 곧 세계의 누이 형제들에게 돌아가게 될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민중의 교사지요.’ 그런데 과연 안젤라를 탄압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고 나중 8년간 미국 대통령에 재임한 로널드 레이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레이건은 1970년 말 카터를 꺾고 대권을 쥐었고, 레논은 그때 피살되었으니 운명의 엇갈림치고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 뉴욕에서의 한때 >음반의 꽃은 ‘여성은 세계의 노예(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라는 곡이었다. ‘우리 여성더러 가정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하지. 그리곤 그녀가 친구가 되기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녀가 하인이 아니면 우릴 사랑하게 아니라고 하거든.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야.’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기둥인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노래는 대중 가요 최초로 우먼리브(Woman lib), 즉 여성해방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곡이라는 게 정설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우먼리브 물결이 솟구쳐 1969년 뉴욕에서 제1회 페미니스트회의가 개최되어 남녀의 완전 평등이 주창되었고 1972년에는 미국 최초의 여성월간지 < 미즈 >가 창간되었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대한 공식적 항의가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는 우먼리브운동에 열정적이었던 아내 요코의 사고방식이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우먼리브를 매우 적절하게 소화해냈다고 평가받았다. 존은 노래만 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념을 적극 실행에 옮겨 요코와 숫제 남녀 역할을 교체해버린다. 요코와 잠시 헤어졌다가 필생의 반려자임을 재확인하고 1975년 재결합한 이후 내내 집안에 들어앉아 아들 숀의 육아에 전념하는 등 안살림에 치중,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불렀듯 ‘하우스 허스번드’(House Husband : 主婦 아닌 主夫가 되는 셈이다)로 변신하여 모든 바깥일은 요코에게 일임한다. 요코가 존의 사후에 사업가의 면모를 견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 덕분(?)이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이 곡이 발표됐을 때 니거(Nigger)가 차별 용어에 해당된다고 해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차별을 고발한 노래인데 용어가 차별적이라고 금지되다니 우습기만 하다. 존의 노래는 그 이념성, 급진성, 그리고 묘사의 대담성으로 인해 방송 금지라는 억압이 유달리 자주 가해졌다. 심지어 ‘어머니’ 같은 곡은 너무 광기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발표 당시 일부 방송국에서 금지 지정을 받기도 했다(이유치고는 너무 인색하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존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고 만다. 이 무렵 내놓은 음반 < 마인드 게임즈(Mind Games) >나 < 벽과 다리(Walls and Bridges) >에서 나타나듯 투사적 대열에서 극단적 퇴각을 시사, 민주화 투쟁에 지친 모습을 군데군데 노출시키고 음악적 주장은 자취를 감춘 채 공허한 사랑타령을 해대기도 한다. 물론 이 두 앨범은 요코와 별거중일 때 출반되어 절망과 공허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급진성에 매료된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 전 그것은 꿈속에서였을까? 단지 꿈이었을까? 알아, 난 알아. 그것은 너무 현실 같았어. 거리를 산책했고 열기 속으로 속삭이는 나무들. 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 두 개의 정신이 이상하게 춤을 추고 있었지...’ ‘9번째 꿈(#9 Dream)’ 빅히트한 노래였지만 그의 작품으로서는 너무 무게가 제거되어버렸다. 불과 2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같은 외형상의 사상 전향(?) 때문인지 미국 정부는 마침내 1975년 10월 존에게 미국영주권을 발급해주었다. 더구나 그는 이후 음악 생활을 단절한 채 작품 출반은 물론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꺼렸다. 한편 1987년 전기작가 앨버트 골드만은 존의 전기문인 『존 레논의 삶』을 내놓고 그 무렵 그가 깊이 마약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 일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뉴스위크 >지는 이와 관련한 갑론을박을 커버스토리로 취급했다). 5년간 동면하고 난 후인 1980년 그는 앨범 < 이중환상(Double Fantasy) >을 들고 화려히 컴백하여 새출발의 의지를 팬들에게 알렸다. 그렇지만 그 새출발의 정체란 일반인이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매일 우린 사랑을 나누곤 했지. 왜 우리 둘은 멋지고 편하게 사랑을 나누지 못할까. 이제 우리들의 날개를 펴고 휠훨 날아가야 할 때야. 또 하루가 우리 사랑을 비껴가지 않도록. 마치 새출발하는 것처럼 말이야.’ ‘새출발 하듯(Just Like Starting Over)’ 그의 새 모습은 ‘바퀴를 바라보며(Watching the Wheels)’라는 곡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난 그저 여기 앉아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을 응시할 테야. 난 정말 그것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을 테야.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거야.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내게 질문하지. 난 문제는 전연 없고 해결만이 있다고 말하지. 그러면 그들은 마치 내가 이성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젓지. 난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지. 난 단지 여기 앉아 시간을 즐길 뿐이야.’ 참으로 많이 변질된 상태다. 과연 존은 훼절한 것인가. 엄청난 부와 안락에 취해 투쟁 의지를 저버린 것인가. 이런저런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앨범 발표 몇 개월만인 1980년 12월 8일 그는 팬이라고 자처하고 순순히 다가온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체불명의 청년이 쏜 총에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얼마 전 미국 CIA의 조종으로 마크 채프먼이 존을 살해했다는 미확인 외신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존의 사망과 함께 미국은 레이건의 보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존의 후반기 삶을 집중 조명한 사람들은 “그도 별 수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1970년대 초반의 거침없는 돌진과 견주었을 때 이같은 단정이 무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성급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방법론에 변화가 있었을 뿐 최후의 앨범에까지(아무리 냉정하게 따져도) 그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과 평화’는 결코 그의 두뇌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다만 가정이 큰 관심사로 부각되었을 따름이었다. 그의 유작 < 이중 환상 >에는 과잉이라고 여겨지리만치 요코에 대한 헌신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전편을 흐르고 있다. 그에게서 가정이란 의미는 개인에게 가치뿐만 아니라 ‘변화의 밑거름’인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의 살아있는 세포’로 간주되었다. 그간의 현실 투쟁에서 이제 가족을 단위로 한 길고 긴 ‘역사투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존 레논의 전설은 신비와 혼돈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그가 보여준 인생의 드라마틱한 굴곡이 그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방체제의 제반 가치를 통렬히 고발한 투사로서의 존의 모습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진 지 10년이 훨씬 흘렀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서방의 순종파 가수들’과 달리 현실 개혁과 직접 투쟁으로 일생을 숨가쁘게 달려간 그는 여전히 많은 가수들에게 ‘노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서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 퀸의 브라이언 메이, ELO의 제프 린, 유투 그리고 조지 마이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스타들이 그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레논이 사망했을 때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폴 매카트니는 이러한 추모사를 남겼다.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
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구미에서도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정은 비슷하다. 국내에서는 과거 라이선스 시절 후의 앨범 출발은 앞선 두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집 음반은 소개되었지만 후는 그나마 그것도 없었다(하기야 히트 곡이 거의 없긴 했지만). 설사 판을 찍어 봤자 잘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우리 정서가 원하는 선율이 없었다. 따라서 후의 곡이 팝의 일상성을 획득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는 달리 그들이 평자를 비롯한 록관계자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편애라 해도 별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1965년 데뷔작 < 후가 나의 세대를 노래한다(The Who Sings My Generation) >에서부터 1975년 < 후 바이 넘버스(The Who By Numbers) >에까지 그 사이에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들이 수작으로 거론될 정도다. 특히 1969년 < 토미(Tommy) >와 1971년작인 < 후의 다음(Who’s Next) >은 예외 없이 비평가 선정 명반으로 뽑히고 있다. 후가 록역사에서 전설의 자리를 틀어쥐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사실이 바로 비평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며 음악 팬들이 기억해야 할 상식이기도 하다. 첫째 후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과격한 청춘문화 이른바 모드(Mod)와 함께 등장했고 그것을 강도 높게 반영했다. 모드는 본래 패션 운동으로 저임금의 단조롭고 지루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영국 중산층 이하의 젊은 노동자들이 TV와 고급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서 유혹적으로 선전되는 값비싼 것들을 향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독특한 복장에 의한 욕구불만의 발산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었다. 오토바이와 로큰롤을 가까이 한 ‘로커(rocker)’와 함께 청춘문화를 주도했으나(비틀스는 로커에 속한다) 모드는 하층민적인 로커와 달리 잘 입고, 정규 직업을 유지하고, ‘스쿠터’를 타며 약물을 즐기는 도시적 패턴을 취했다. 후의 멤버들은 1964년 프리랜서 피트 미든(Pete Meadon)의 권유에 따라 ‘하이 넘버스’(The High Numbers)라는 이름 아래 모드의 세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한 모드 정서는 분노와 청춘 세대의 공격성이었고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었다. 후의 기둥인 기타 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영국의 모드 운동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운동이었고 히피 무브먼트보다 규모가 컸다. 그것은 군대, 강력하고 거친 틴에이저들의 군대였다. 모드가 되기 위해서는 짧은 머리에 스마트한 복장, 좋은 구두와 셔츠를 살 돈이 있어야 했고 미친놈처럼 춤출 수 있어야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있어야 하고 램프로 뒤덮인 스쿠터를 가져야 했다.” 후로 그룹명을 바꾼 그들은 1965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현실을 신랄히 비난하는 모드족의 성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나의 세대(My generation)’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억누르려 한다. 단지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몹시 추워 보이는 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늙기 전에 죽고 싶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Hope I die before I get old). 이 한마디가 초창기 후의 이미지 전부를 말해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록역사상 최초로 과격한 어조를 동원해 청춘과 기성 세대와의 분리를 획책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 충격적 선언은 한편으로 ‘늙기 전에 죽지 못한’ 그들을 막판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데뷔시 그들이 펼친 모드 운동은 그들을 단숨에 살찌울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역시 모드 세대의 찬가인 ‘어쨌든 어찌해서든 어디에서든(Anyway anyhow anywhere)’도 타운센드에 따르면 ‘반 중년, 반 상층 계급 그리고 젊어서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의미의 노래’였다. ‘애들이 옳다(The kids are alright)’ ‘난 설명할 수 없어(I can’t explain)’과 함께 이러한 노래들은 어느 노래보다 먼저 ‘청춘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록의 규범을 확립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연주나 무대 제스처에 있어서도 록의 규범을 제시했다. 이것이 후가 갖는 두 번째 의미이다. 공연장에서 후는 영락없는 네 명의 ‘폭도’들이었다.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은 부수어대듯 드럼을 쳤고(후 사운드의 상징이다) 피트 타운센드는 펄쩍펄쩍 뛰면서 풍차를 돌리듯 팔을 휘두르며 기타 스트링을 가로질렀으며 싱어 로저 달트리(Roger Daltry)는 마음껏 외치며 청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베이스 주자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성 세대나 엘리트의 품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멤버들의 외모도 ‘불량 서클’ 아이들을 무색케했다. 피트 타운센드는 한 마리 독수리였고 키스 문은 무정부주의자 같았으며 로저 달트리는 테러리스트의 인상 그것이었다. 언제나 비(非)스페셜리스트였던 존 엔트위슬도 잘해 봤자 폭도의 ‘보급계’같았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도무지 폴 매카트니의 세련된 매너와 믹 재거의 섹스 어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록의 ‘하위문화’적 특질과 정확히 맞물리는 요소였다. 그들은 록이었기에 도리어 ‘특혜’를 받았고 그에 따른 모범생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또 록의 슬로건인 ‘제한된 공간에서의 파괴’를 증명한 존재들이었다. 무심결에 야간업소 공연에서 낮은 천장으로 인해 기타 목을 부러뜨린 것에 착안, 그들은 이후 콘서트 때마다 악기를 부수어 버리는 파괴 연출을 일상화했다. 실상 영화제작자로 나중 후의 관리자가 된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크리스 스탬프(Chris Stamp)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행위는 모드와 더불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의 멤버들은 공연 뒤 머문 호텔마다 그 시설물을 부수는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음악이 조용할 리 없다. 후의 사운드는 소음으로 정의되며 애초부터 발라드와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앰프 사용을 극대화했다. 일례로 밥 딜런과 함께 공연한 와이트 섬(Isle of Wight) 페스티벌에서는 그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사운드 시스템을 동원해 사상 최고의 출력을 내뿜었다. 그때 스피커 중 하나는 청중들에게 “15야드 안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딱지가 붙어 있었다. 1976년 5월에 있었던 미국 찰튼 애드레틱 풋볼 클럽 콘서트는 록 그룹에 의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무려 1백 20데시벨!)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들은 소음 발산을 통해 하드 록 생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드 록 또는 헤비메탈 계보도의 맨 위에는 후가 있다. 역시 메탈의 산파 역할을 한 지미 헨드릭스도 타운센드가 나서서 공식무대 데뷔를 주선했고 지미의 죽음과 실연 때문에 좌절한 에릭 클랩튼의 재기를 도와준 사람도 타운센드였다. 그의 그룹 후는 또 하나의 공적인 록과 팝의 역사에 깊이 새겼다. 그들을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록사상 최초로 ‘록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1969년에 만들어 낸 < 토미 >는 타운센드의 탁월한 음악 감각과 정신적 동경이 합쳐진 것이었고 모험적 시도를 넘어 음악 예술의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작품이었다. 그것은 무대와 음반 세계에 갇혀진 록의 ‘비상’을 뜻하는 신기원이기도 했다. 이제 록은 못할 것이 없어졌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오페라를 록이 꾸려 냈다는 것은 록의 무한한 잠재력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60년대의 록이 사회성 뿐 아니라 ‘예술성’에도 적극 손짓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토미 >는 실로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밴 모리슨의 < 천체 주간(Astral Weeks) >과 함께 록이 더 이상 순간의 흥분이 아닌, 영구 불변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뽐냈다. 토미는 충격으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말할 줄도 모르는 아이가 된다. 마음속의 장벽 때문에 자아를 찾지 못하는 토미는 핀볼의 마법사가 되어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호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마침내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성공한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인 < 토미 >의 메시지는 ‘독립’과 ‘자유’였다. 거창한 듯 하지만 결국은 후가 추구해 온 모드와 무대 위의 폭발이라는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타운센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10대의 반란이라는 순간에 지속되는 ‘대결’과 ‘도피’ 사이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또한 로큰롤의 주제이기도 하다. 10대 때는 자신을 결코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결하든 도피하든, 클래시(Clash)의 말로 하면 머물든 나아가든 간에(Should I stay or should I go) 틴에이저 시절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당신이 홀로 서 있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 토미 >가 의미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오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록의 찬란한 영광으로 남아있다. 오페라 실연으로, 앨범으로 또 1975년 켄 러셀(Ken Russel)의 영화로, 1979년 웨스트 엔드 연극으로, 이어서 199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다채롭게 해석되면서 하나의 전설로 상승했지만 최후의 영예는 역시 후의 록이었다. < 뉴욕 타임스 >지는 < 토미 >를 두고 “수미상관은 물론 거창한 어휘인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순환 테마를 가지고 있다”면서 “우수한 곡들로 가득차 있고 우아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긴 형태 록(long form rock)의 경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사실 < 토미 >를 최초의 록오페라라고 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미니이긴 하지만 타운센드가 1967년 < 후 셀 아웃(Who Sell Out) >의 ‘라엘(Rael)’로 시도한 바 있고 킹크스(Kinks) 그룹의 송사이클 걸작 앨범 < 아더(Arthur) >도 1969년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록 뮤지컬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도 1969년이라는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최초’라는 타이틀마저 < 토미 >에게 안겨 주었다. < 토미 >의 영광은 엄청난 부담으로 타운센드를 짓누르지만 그는 언제나 보여 온 ‘시대적 추세’와 ‘록 본연의 폭발’의 절충적 감각을 또 한차례 유감없이 발휘해 1972년 걸작 앨범 < 후의 다음 >을 발표, 위세 행진을 계속한다. 1970년대 중후반의 대대적인 공연 성공은 한층 후의 무게를 늘려 놓았다. 롤링 스톤스와 함께 ‘록의 공룡’으로 펑크 진영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이러한 대중적 성공과 ‘젊어서 죽기를 거부한’ 자세는 1978년 < 후 아 유(Who Are You) >의 도도함과 거만으로 나타나기도 했다(이 점에서 록의 가장 큰 적은 나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외부의 펑크 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드러머 키스 문의 돌연사였다. 그의 죽음은 ‘존 보냄의 사망과 레드 제플린의 관계’처럼 그룹의 총체적 위기로 다가왔다. 후의 멤버들은 해산을 선언한 제플린과는 달리 전 페이시스(Faces) 드러머 케니 존스(Kenny Jones)를 영입하여 중단 없는 전진을 다짐하지만 활력의 소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3년 해산하고 만다. 후의 멤버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 1989년 캐나다 토론토 공연차 다시 모이지만 그때 후의 이름은 어느덧 역사가 되어 있었다. 온갖 모순과 교묘한 절충 속에서도 후는 끊임없이 내적 긴장, 진지한 야망, 모험욕을 통해 1960년대 록이 확립한 반란, 파괴 그리고 모험의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후를 해부하는 것은 실로 록의 호흡과 함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베이비 붐 세대의 가슴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록의 부활이 기대되는 근래 우리 대중 음악의 변화 조짐을 감안할 때 ‘록의 위대한 개척자’인 후의 재조명이 한층 요구된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1960년대 서구 록의 뜨거운 피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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