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울과 도시 문헌학어떤 면에서 『갈등 도시』는 저자가 자신의 작업에 이름 붙인 그대로 [도시 문헌학]의 출발을 알리는 저술이다. 전작 『서울 선언』에서 아이디어로 제시했던 몇몇 개념들이 보다 명료해졌고, 도시 답사를 위한 방법론도 꼴을 갖추었다. 먼저 이 책은 좁은 의미의 [서울시]와 확장된 서울로서의 [대서울Greater Seoul] 개념을 구분한다. [서울시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력이 주변 도시들로 확산되고 서울시와 주변 도시들이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서, 서울의 범위를 서울시의 행정구역으로 한정해서는 서울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서울 답사기가 아니다. 부평과 부천, 1·2기 신도시와 서울시로 출퇴근하는 주민의 수가 많은 경기도 도시들까지 답사 범위를 아우르는 [대서울 답사기]다. 또한 저자는 고고학자가 절벽의 단면을 통해 지층을 탐구하듯, 대서울이 성장하고 변화해 온 시층(時層)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을지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기, 20세기 후기, 21세기 초에 만들어진 건물이 한 공간에 뒤섞여 있다. 일종의 [삼문화 광장]이다. 이런 광경은 유서 깊은 대도시에서는 흔하며, 그 자체로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증언해 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이런 시층을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건물의 건축 양식, 길의 형태, 머릿돌과 비석, 간판, 팸플릿·벽보·플래카드, 점집 깃발 등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저자는 이것들을 [도시 화석]이라고 부른다. 머릿돌을 통해 한 거리의 변화 과정을 추적할 수도 있고(서울대입구역과 낙성대역 부근의 1970~80년대 빌딩 머릿돌), 가게 간판을 통해 그 지역의 상권 변화를 추적할 수도 있으며([단국대 개골목]의 철물점 간판), 벽보와 낙서를 통해 당대의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심리를 추적할 수도 있다.이런 방법론과 문제의식을 무장한 채 저자는 현 거주지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대서울을 차근차근 기록해 나간다. 총 20개의 답사 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묶을 수 있다. 서울시를 중심으로 북쪽의 파주부터 남쪽의 시흥까지 서부를 훑는 [경인 메갈로폴리스의 축]이 하나, 종로구와 중구와 용산구를 깊게 들여다보는 [대서울의 한가운데] 답사가 두 번째, 북쪽의 의정부부터 남쪽의 용인까지 서울 동쪽을 아우르는 것이 세 번째다. 20개 답사 코스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대서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적인 즐거움 역시 무시할 수 없다.문헌학자의 [불온한] 도시 걷기이 책은 1995년 서총련이 청와대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른 당시 대학생이던 저자를 다짜고짜 경찰버스에 싣고 끌고 갔던 일화로 시작한다. 20년 뒤 저자는 한 문헌에서 16세기 일본의 패권자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젊은 귀족에게 내린 지시를 읽게 된다. [특별한 용건 없이 마을과 골목길을 배회하는 것을 엄히 금한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힘 있는 자들은 대체로 시민들이 자신의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산책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맨 밑바닥을 바라보게 하고, 그로써 인간을 정치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모범적이고 청결한 답사 코스를 벗어나서 무작정 대서울을 걷다 보면,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지난 백 수십 년간 시민들이 갈등하며 살아가고 또 죽어 간 이야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빈민촌이 해체되면서 도시 곳곳에 숨어든 빈민들을 발견하고, 공장과 성매매 집결지와 한센인 정착촌이 고층 아파트 단지에 떠밀려 대서울의 외곽으로 쫓겨나고 (…) 식민지 시대 공간과 달동네를 밀어 내고는 박물관 안에 그 공간을 어설프게 재현해 놓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을 답사하고 나면, 더 이상 예전처럼 정치적으로 순진무구하게 대서울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 본문 7~8면위대한 조선 왕조를 찬양하는 건축이나, 일제 강점기의 아픈 유산을 돌아보는 답사도 좋지만, 그것이 서울의 전부일 리는 없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구조물만이 서울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도 아니다. 재개발 동네의 벽보, 이재민과 실향민의 마을 비석, 부군당과 미군 위안부 수용 시설에도 시민의 역사와 스토리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의 맨 밑바닥]을 산책하는 이 책은 [불온]하다. 하지만 이런 답사기야말로 표백된 서울이 아니라 진짜 서울의 역사를 만나는 시간이다.저자의 마음은 조급하다. 특정한 공간들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책을 쓰는 동안, 대서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나머지 공간은 거의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재개발·재건축되어 사라지고 있다. 대치동 구마을, 마천?거여, 부평, 의주로 등은 이미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대서울은 오늘도 공사 중이고, 지금 보는 것을 다음 달에는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신발 끈을 조인다. [아주 잠시 동안만 대서울의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미처 보지 못한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무수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저자의 발걸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그의 답사 프로젝트가 멈추지 않도록 독자들이 새 힘을 불어넣어 주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