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문사 성섭과 『필원산어』
그리고 조선후기 정치 지형도
성섭은 누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와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의 후예였으나 누차 과거에 낙방한 끝에 산수 유람과 저술에 몰두하며 여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통상 3기로 나뉘는데, 1기는 과문(科文)으로 명성을 떨치던 젊은 시절, 2기는 불우한 처지로 시작(詩作)과 유람에 몰두한 중년, 3기는 성리학에 잠심한 만년이다. 현전하는 성섭의 저술은 대부분 2기와 3기에 지은 것으로, 노년에 그는 대개의 영남 문인처럼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나, 젊은 시절부터 축적한 문학적 역량은 저술들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가 활동한 18세기 중반, 영남 남인의 고립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중앙 진출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었지만, 무엇보다 영남 남인에게는 선진 문물을 접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영남 남인은 퇴계의 학설이나 고수하며 더욱 보수화되는 면모를 보인다. 더구나 정치적 박해로 인해 그들의 저술 또한 전하지 않는 것이 많은 탓에, 독자적인 학문적ㆍ문학적 전통을 지녔던 남인 문단의 실상은 여태껏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문학적 성취는 소홀히 취급되기 일쑤였거니와 당대 문학사가 노론 위주로 서술되어온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학사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문헌이 남인 문인들에 의해 편찬된 시화서이다. 이극성(李克誠, 1721~1779)의 『형설기문(螢雪記聞)』과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삼명시화(三溟詩話)』가 근기 남인의 시화라면, 이경유(李敬儒, 1750~1821)의 『창해시안(滄海詩眼)』과 이 책 『필원산어』는 영남 남인의 시화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영남 남인들의 시와 일화는 다른 문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많아 자료적 가치를 더한다.
『필원산어』의 구성과 의의
『필원산어』는 ?상편 1? 156칙, ?상편 2? 88칙, ?하편 1? 82칙 등, 총 326칙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가 부족한 시화의 특성상 각 부의 성격을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상편 1?은 대부분 기존 문헌을 전재한 것이다. 40여 칙은 『동인시화』에서 초록한 것이며, 이를 포함하여 전체의 2/3 정도는 조선 중기까지의 인물과 사건을 다루었다. 이 부분은 기존의 문헌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상편 1?의 후반부와 ?상편 2?는 저자의 견문이 주를 이루며, 저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 주로 등장한다. ?하편 1?은 중국 문인의 일화와 기이담(奇異談)이 주를 이룬다.
1. 폭넓은 독서에 바탕을 둔 초록
성섭의 독서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그가 폭넓은 독서에 힘입어 박식하였다는 점에는 제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남인 선배들의 저술을 자주 인용했지만, 그의 독서 범위는 당색을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필원산어』가 조선시대 문학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하는 것도 이와 같은 저자의 폭넓은 독서 덕택이다. 성섭은 주자학의 도입과 명나라 문장의 수용을 조선 산문사의 변곡점으로 인식한 뒤, 조선시대 주요 문장가를 두루 평론하고, 사부(辭賦), 과문(科文), 척독(尺牘) 등 문체별로 대표 작가를 선발했으며, 나아가 산문사를 새롭게 구성했다. 특히 ‘우리나라 문장의 흐름’에서 서술한 조선시대 산문사는 당색과 시대를 넘나드는 성섭만의 폭넓은 독서 결과다.
2. 신빙성 있는 견문에 의거한 서술
『필원산어』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은 저자가 직접 견문한 내용이다. 당시 현지에서 직접 견문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영남 문인들의 일화가 풍부하다. 우선 저자의 선조들에 대한 일화가 자세하다. 12대조 성사홍(成士弘)의 시 2수 및 다른 문인들의 차운시를 수록하고, 5대조 성안의(成安義)가 어릴 적 시를 지은 일화 및 생애를 소개했다. 고조 성이성(成以性)의 암행어사 시절 일화는 『춘향전』과 유사하여 이미 주목을 받았다. 저자의 선조 이외에 장인 이세황(李世璜) 등 주변 인물들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였다. 이중광(李重光), 신돈항(愼敦恒), 권득중(權得中), 김강한(金江漢), 김낙행(金樂行), 강해(姜楷), 이현중(李顯中), 김창문(金昌文), 손덕승(孫德升) 등이다. 덧붙여 저자가 직접 만난 경험을 서술하거나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문인을 발굴ㆍ소개하여 조선후기 영남 문단의 실상을 전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물론 성섭이 기록한 견문 중에는 사실로 보기 어려운 것도 많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자연현상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김인후가 저승의 재상이 되었다거나 김시민이 괴물과 싸웠다는 일화, 상주 공갈못 설화 등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당대 널리 전승되던 구전 설화를 문헌으로 정착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3. 영남 남인으로서의 정체성 피력
시화는 문학비평서의 성격과 함께 당론서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조선시대 시화 가운데 당색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원산어』 역시 저자의 당색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서술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청나라에 비교적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던 것도 송시열이 주도한 대명의리론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성섭의 당파적 입장은 이황을 위시하여 유성룡(柳成龍), 정경세(鄭經世), 정구(鄭逑) 등 영남 유현들의 일화를 자주 거론하고, 그들에게 꼬박꼬박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점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필원산어』의 가치
하지만 이렇게 남다른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필원산어』는 아쉽게도 지금까지 좀처럼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성이성의 암행어사 시절 일화가 『춘향전』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거론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이 책이 전하는 풍부한 정보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필원산어』는 문재(文才) 넘쳤던 한 남인 문사의 견문을 바탕으로 서술된 영남 문학사이자, 영남 문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야말로 영남 지역 문화 연구의 보고(寶庫)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간 조선후기 시화는 대체로 기존의 시화를 전재하는 데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 독창적인 견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 성섭의 폭넓은 견문과 독서에 바탕을 둔, 독특한 시각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필원산어』가 단순히 영남 문단의 실상을 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조선시대 문학사와 문화사 연구 전반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