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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50주년 기념 소니 클래식 전설의 레코딩 (Beethoven - Legendary Recor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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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베토벤 250주년 기념 소니 클래식 전설의 레코딩 (Beethoven - Legendary Recordings)

[ 25CD 박스 세트 /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한정반 ]
Ludwig van Beethoven 작곡/Jussi Bjorling 노래/Jascha Heifetz, Isaac Stern, Glenn Gould 연주 외 3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 Classical / Sony Classical | 2019년 11월 12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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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50주년 기념 소니 클래식 전설의 레코딩 (Beethoven - Legendary Recording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1월 12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 Symphonie Nr. 1 (Columbia Symphony Orchestra, Bruno Walter / 1959); Symphonie Nr. 3 "Eroica" (New York Philharmonic, Leonard Bernstein /1964)
Disc2
  • - Symphonien Nr. 2 & 3 (Cleveland Orchestra, George Szell / 1964 / 1963)
Disc3
  • - Symphonien Nr. 5 & 7 (Chicago Symphony Orchestra, Fritz Reiner / 1959 / 1955)
Disc4
  • - Symphonie Nr. 6 (Cleveland Orchestra, George Szell / 1962); Symphonie Nr. 8 (New York Philharmonic, Leonard Bernstein / 1963)
Disc5
  • - Symphonie Nr. 9 (Boston Symphony Orchestra, Charles Munch / 1958)
Disc6
  • - Violinkonzert op. 61 (Jascha Heifetz, Boston Symphony Orchestra, Charles Munch / 1955); Romanzen Nr. 1 & 2 fur Violine & Orchester (Isaac Stern, Boston Symphony Orchestra, Seiji Ozawa / 1980)
Disc7
  • - Klavierkonzert Nr. 1 (Glenn Gould, Columbia Symphony Orchestra, Vladimir Golschmann / 1958); Klavierkonzert Nr. 2 (Glenn Gould, Columbia Symphony Orchestra, Leonard Bernstein / 1957)
Disc8
  • - Klavierkonzerte Nr. 3 & 4 (Leon Fleisher, Cleveland Orchestra, George Szell / 1961 / 1959)
Disc9
  • - Klavierkonzert Nr. 5 (Artur Rubinstein, Boston Symphony Orchestra, Erich Leinsdorf / 1963); Chorfantasie op. 80 (Emmanuel Ax, New York Philharmonic, Zubin Mehta / 1983)
Disc10
  • - Tripelkonzert op. 56 (Isaac Stern, Leonard Rose, Eugene Istomin, Philadelphia Orchestra, Eugene Ormandy / 1964); Klaviertrio Nr. 7 "Erzherzog" (Isaac Stern, Leonard Rose, Eugene Istomin / 1965)
Disc11
  • - Leonore-Ouverturen Nr. 1-3; Fidelio-Ouverture op. 72; Coriolan-Ouverture op. 62 (Boston Symphony Orchestra, Charles Munch / 1955 / 1956)
Disc12
  • - Klaviertrios Nr. 5 & 6 (Isaac Stern, Leonard Rose, Eugene Istomin / 1969)
Disc13
  • - Violinsonaten Nr. 1, 5, 9 (Zino Francescatti, Robert Casadesus / 1958 / 1961)
Disc14
  • - Cellosonaten Nr. 3 & 5 (Yo-Yo Ma, Emanuel Ax / 1983)
Disc15
  • - Klaviersonaten Nr. 8, 14, 23 (Rudolf Serkin / 1962)
Disc16
  • - Klaviersonate Nr. 3 (Murray Perahia / 1990); Klaviersonate Nr. 21 (Vladimir Horowitz / 1972); Klaviersonate Nr. 26 (Murray Perahia / 1984); Bagatelle WoO 59 "Fur Elise" (Murray Perahia / 1994)
Disc17
  • - Klaviersonate Nr. 26 (Svjatoslav Richter / 1960); Klaviersonate Nr. 29 "Hammerklavier" (Charles Rosen / 1964)
Disc18
  • - Klaviersonaten Nr. 30-32 (Rudolf Serkin / 1967-1976)
Disc19
  • - Diabelli-Variationen op. 120 (Igor Levit / 2015)
Disc20
  • - Streichquartette Nr. 1, 4, 6 (Tokyo String Quartet / 1991 / 1992)
Disc21
  • - Streichquartette Nr. 7 & 9 (Juilliard String Quartet / 1964)
Disc22
  • - Streichquartette Nr. 12 & 14 (Budapest String Quartet / 1952 / 1961)
Disc23
  • - Streichtrios Nr. 2 & 4 (Jascha Heifetz, William Primrose, Gregor Piatigorsky / 1960); Klaviertrio Nr, 1 (Jascha Heifetz, William Primrose, Jakob Lateiner / 1964)
Disc24
  • - Ah! Perfido op. 65 (New York Philharmonic, Thomas Schippers /1965); Christus am Olberge op. 85 (Philadelphia Orchestra, Eugene Ormandy / 1963); Adelaide op. 46 (Jussi Bjorling, Frederick Schauwecker / 1955)
Disc25
  • - Missa solemnis op. 123 (New York Philharmonic, Leonard Bernstein / 1960)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38명)

작곡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결국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가 위임한 초상화는 그의 음악적 유산의 부적으로 그의 손자의 방에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에게는 같은 음악 기관에서 테너로 일하면서 그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와 바이올린 레슨을 한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베토벤은 현재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의 그의 세례 기록은 존속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12월 16일이라는 합의(베토벤 자신이 동의 한 바 있음)가 있지만, 이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번째 음악 교사는 그의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되는데, 이는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인식하고 베토벤에 대한 음악 교육을 같은 궁정의 동료들을 포함한 다른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양도했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건반 수업을 한 가족의 후원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그의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수업료는 5년차에 시작되었다. 체제는 엄하고 철두철미해서 종종 그는 눈물을 흘렸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의 개입으로 젊은 베토벤이 침대에서 건반으로 끌려가는 비정기적인 심야 세션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나이에 분명했다. 요한은 이 지역에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성공을 알고(아들 볼프강, 딸 나넬과 함께)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베토벤이 여섯 살(그는 일곱 살이었다)이라고 주장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선전하려고 했다. 여하튼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등장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급(1782년)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궁정 예배당의 유급(1784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o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Kurfurst ("선제후")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83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인정받았는데,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 같은 해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인쇄된 언급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을 위해 돈을 지불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폰 브로우닝von Breuning 가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우닝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우정을 제공받았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폰 브로우닝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를 만났다. 폰 브로이닝의 가족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가정 생활에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Joseph Johann Baptist Wolfl, 1773-1812)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Barry Cooper, 1949?)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Charles Neate, 1806-1879)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

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

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우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 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훔멜, 체르니, 그릴파르처, 마이세더, 슈판치히, 카스텔리, 베른하르트, 피링거, 하슬링거, 뵘, 슈트라이허, 슈타이너, 홀츠, 볼프마이어, 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연주 : Jascha Heifetz (야사 하이페츠)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연주 : Glenn Gould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글렌 허버트 굴드(영어: Glenn Herbert Gould, 1932년 9월 25일~1982년 10월 4일)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피아노 연주자이다.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로서 유명하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놀라운 기술적 능숙함과 함께... 글렌 허버트 굴드(영어: Glenn Herbert Gould, 1932년 9월 25일~1982년 10월 4일)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피아노 연주자이다.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로서 유명하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놀라운 기술적 능숙함과 함께 바흐 음악의 대위법적 텍스쳐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굴드는 대부분의 낭만주의 피아노를 거부했으며 사춘기 이후 리스트, 슈만, 쇼팽을 피했다. 그의 녹음 음반은 대부분 바흐로 채워져 있기는 했었지만,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브람스, 전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얀 피에테르존 스벨링크, 20세기 작곡가인 파울 힌데미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포함하여 가지각색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굴드는 갖가지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비정통적인 음악 해석법, 악기를 연주할 때의 버릇에서부터 삶의 양상, 개인적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기인적인 면모를 보였다.

1964년, 그의 나이 31세 때 라이브 공연을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녹음과 다른 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가, 작곡자, 지휘자, 방송인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 잡지에 음악 이론을 논하며 그의 음악 철학을 나타내는 수많은 기고를 했다. 작곡자로서의 면모는 눈에 덜 띄는 편인데, 수는 적었고 많은 작품들이 미완성인 채 남겨졌다. 그의 나이 50이 넘었을 때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지휘와 다른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방송인으로서 굴드는 스튜디오 연주에 대한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에서부터 라디오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글렌 굴드는 1932년 토론토 동쪽 변두리, 나무가 우거진 평화로운 동네의 견실한 중간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글렌의 아버지 버트는 모피상으로, 젊은 시절에 바이올린을 연주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 플로렌스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사였다. 또 두 사람 모두 노래를 잘했다.

음악 구조와 형식 이외의 외재적 요소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태도가 강하다. 예를 들어, 음색에 관심이 없고 색채감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을 경시하였고, 자신의 피아노 연주도 색채감을 연출하지 않았다.
악기의 특성과 음질에는 관심이 낮고, 오히려 구조적인 악곡은 악기를 가리지 않는 발상을 선전하고 특히 바흐의 건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이유를 논거로 들었다. 악곡의 가사와 표제성에도 무관심하고, 그들을 연주 해석 문제에서 고려 대상에 넣지 않았다.

명인기(名人技)는 음악의 구조와는 무관한 것으로, 그것을 피력하고 발휘하는 음악과 행위 자체를 싫어하였다.
연대기에 대한 반발이 있다. 즉, 예술 작품의 가치를 그 성립 연대에서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견해와 작곡가의 창작 활동에 시대 구분을 실시하고 각 작품의 평가와 해석을 정하는 태도이다.

광범위하지만 매우 선택적 레퍼토리는 튜더 시대의 버지널 음악가들에서부터 생존하는 캐나다인까지이고 바흐와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초기 낭만주의 음악은 부족하였다. 소수만 즐기고 지적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음악 표현 양식을 옹호하였으며 조르주 비제, 에드바르 그리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및 장 시벨리우스와 같은 작곡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지지하였다. 또한 편곡판으로 그 당시에는 드물었던 관현악과 오페라 곡 연주를 좋아하였다. 특히 바흐 공연에 20세기 중반의 '전성기 현대주의자' 접근 방식인 역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예를 제시하였다.

독창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때로는 충격적인 음악 해석을 냈는데, 종종 극단적인 빠르기, 이상한 강약법에 더 묘한 악구도 썼다. 그는 피아노와 음악 해석에 대한 관습적인 발상을 무시함으로써 평생 논란에 휩싸였다. 아마도 선율의 음을 연결하지 않고 연주하는 분리된 분절법에 대한 선호가 그 예가 된다. 양식은 간결하고 정교하고 율동적으로 역동적이고 구조적으로 명백하고 집요하게 대위법적인 특징이 낭만적이라기보다 현대적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여전히 서정적이고 심오한 표현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해석자로서 궁극의 낭만주의자이었던 만큼 연주 기법에 때로는 음표까지 자주 손을 댔다. 극한의 템포, 기발한 표현과 장식, 그리고 다른 해석적인 실험을 통하여 작품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독창성에 대한 칭찬과 기행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작곡가가 쓴 소리를 완전히 다 듣는다는 행위는 축음기와 레코드를 거치지 않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음악의 세세한 부분까지 들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것이고 그것을 청중에게도 요구하였음을 뜻한다. 즉 음악을 분석하여 정밀하게 해부하고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레코드와 그 기술의 진보가 담당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진정한 녹음 철학을 가진 고전 음악 연주자 중 굴지의 주창자가 되어 기사와 방송에서 열정적으로 변호하였고 컬럼비아/CBS에서 수십 개의 앨범을 연습하여 녹음 기술에 대한 실천적인 전문성을 개발하였다. 마이크 배치, 스플라이싱, 오버 더빙, 리버브 등의 기술 자체가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많은 최종 해석 결정을 후반 제작 과정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작곡가, 연주자 및 청취자의 전통적인 관계를 바꾸었다. 이미 가능한 기존 해석에서 완전히 일탈하지 않고, 예를 들어, 황제 협주곡의 또 다른 녹음을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실험적인 해석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하였다.

기사, 연주회 프로그램 내용, 그의 음반 20장 이상에 대한 속지 해설, 강연, 평론,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및 유머와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수십 가지의 주제를 발표하였다. '힌데미트 : 피아노 소나타' 음반에 작성한 속지 해설로 1973년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최우수 해설상을 수상하였다. 녹음과 대중 매체, 종종 친구인 마셜 매클루언과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의 견해에 대하여 다작하였다. 전자 매체에 대한 저술은 관련성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예지력이 있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및 영화 제작을 위하여 작성한 대본에서 판단할 때, 그 결과로 인상 깊은 내용은 고르지 않고 자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음악 및 기술 정보에 정통하고 대단히 독창적이며 도발적인 사상가로서 명성을 얻은 점이다.

"예술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바는 예술은 사람들 마음 속에 타오르는 내적 연소이며, 그것을 천박하게 드러내어 공공연하게 과시하는 일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의 목적은, 신경을 흥분시키는 아드레날린을 순간적으로 분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일생 동안 설레는 놀라움과 차분한 평온의 심적 상태를 구축하여 나가는 것이다."
연주 : Leon Fleisher (레온 플라이셔)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 1928년생 미국인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는 10세 때 아르투르 슈나벨 (Artur Schnable) 에게 인정되어, 그의 밑에서 1938년부터 1939년에 걸쳐 슈나벨의 자택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았다. 1943년 피에르 몽퇴 지휘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에서 데뷔하여 ‘젊은 라흐마니노프’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처음 실시된 피아노 부문에...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

1928년생 미국인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는 10세 때 아르투르 슈나벨 (Artur Schnable) 에게 인정되어, 그의 밑에서 1938년부터 1939년에 걸쳐 슈나벨의 자택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았다. 1943년 피에르 몽퇴 지휘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에서 데뷔하여 ‘젊은 라흐마니노프’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처음 실시된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수상하였고, 1960년대 전반까지는 조지 셀 (George Szell) 지휘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함께 많은 레코딩을 남겼다. 1965년 오른손에 근육긴장이상증 질환이 생기면서 35년간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지만, 그 후로 왼손을 위한 작품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그 밖에 1968년 워싱턴의 시어터 쳄버 플레이어즈의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1959년 이래 피바디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기적적으로 그의 오른손이 감각을 되찾았다.
연주 : Arthur Rubinstein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레너드 로즈는 미국의 유명한 첼리스트이자 '린 해럴'과 '요요 마'를 길러낸 교육자로도 유명하다. 레너드 로즈는 미국의 유명한 첼리스트이자 '린 해럴'과 '요요 마'를 길러낸 교육자로도 유명하다.
연주 : Eugene Istomin (유진 이스토민)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Zino Francescatti (지노 프란체스카티)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연주 : Robert Casadesus (로베르 카자드쉬)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연주 : Yo-Yo Ma (요요 마,馬友友 ,Ma Youyou )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아버지 마샤오쥔(馬孝駿)과 성악가인 어머니 마리나 루(盧雅文)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요 마는 바이올린, 그 다음엔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배웠다. 요요 마가 일곱살 때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아이...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아버지 마샤오쥔(馬孝駿)과 성악가인 어머니 마리나 루(盧雅文)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요 마는 바이올린, 그 다음엔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배웠다. 요요 마가 일곱살 때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아이작 스턴과 카네기 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72년부터 말보로 음악제, 아스펜음악제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1977년부터는 유럽으로도 연주 활동의 폭을 넓혔다.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등 최고의 악단과 협연한 그는 1978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루체른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워낙 어린시절부터 연주해 왔기에 그의 연주 활동 경력도 40년이 가까워진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음반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첼리스트 중의 한사람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솔리스트로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며 실내악 연주도 활발히 하였다. 김영욱, 엠마누엘 액스와의 트리오 활동부터 아이작 스턴, 제이미 라레도, 초량린, 리처드 스톨츠만 등과 파트너십을 이루며 실내악 활동을 하였다. 2012년 폴라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줄리어드 스쿨 음악학교
- 하버드 대학교 인문학 졸업
연주 : Emanuel Ax (엠마누엘 엑스)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Rudolf Serkin (루돌프 제르킨)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Murray Perahia (머레이 페라이어)
피아니스트, 지휘자 피아니스트, 지휘자
연주 : Vladimir Horowitz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연주 : Charles Rosen (찰스 로젠,Charles Welles Rosen)
1927년 미국 뉴욕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모리츠 로젠탈을 사사했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 공부와 피아노 연주 활동을 병행하다가 뒤늦게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바흐와 스카를라티, 베토벤, 그리고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카터, 불레즈 등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을 녹음했다. 저술 활동은 한참 뒤에 시작하여... 1927년 미국 뉴욕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모리츠 로젠탈을 사사했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 공부와 피아노 연주 활동을 병행하다가 뒤늦게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바흐와 스카를라티, 베토벤, 그리고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카터, 불레즈 등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을 녹음했다.

저술 활동은 한참 뒤에 시작하여 1970년부터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1971년에 그의 출세작인 『고전적 양식』이 출간되었고 이듬해에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그가 남긴 저술로 『소나타 형식』(1980, 1988), 『낭만주의 세대』(1995), 『피아노 연주에 관한 7가지 테마』(2002)(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다) 등이 있다. 하버드 대학, 시카고 대학, 스토니브룩 대학,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1년 인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백악관에서 ‘국가 인문학 훈장’을 받았다.
연주 : Sviatoslav Richter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연주 : Igor Levit (이고르 레비트)
연주 : William Primrose (윌리엄 프림로즈)
비올라 연주자 비올라 연주자
연주 : Gregor Piatigorsky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첼리스트 첼리스트
지휘 : Bruno Walter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Schlesinger)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지휘자 상을 확립한 가장 존경받는 20세기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클렘퍼러, 클라이버와 함께 ‘빅5’로 불렸다.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의 중산층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8세에 슈테른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뒤 1893년 9월 1일부터 쾰른에서 지휘자 생활을 시작해 ...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지휘자 상을 확립한 가장 존경받는 20세기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클렘퍼러, 클라이버와 함께 ‘빅5’로 불렸다.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의 중산층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8세에 슈테른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뒤 1893년 9월 1일부터 쾰른에서 지휘자 생활을 시작해 17세에 처음 오페라 공연을 지휘했다. 이후 함부르크(이곳에서 구스타프 말러를 처음 만난다), 브레슬라우, 프레스부르크, 리가, 베를린 왕립 오페라에서 활동했다. 1901년에 말러의 부름을 받고 빈 궁정 오페라에서 함께 작업하며 평생 자이자 친구로 우정을 쌓았다. 말러의 〈대지의 노래〉(1911), 9번 교향곡(1912) 등 초연을 담당했고, 1912∼1922년까지 뮌헨 왕립오페라에서 총 음악감독으로 재직한 뒤 베를린 시립 오페라, 베를린 필하모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지휘했다. 1936년부터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될 때까지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지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 필하모닉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지휘했으며 종전 후 열렬히 환영받으며 유럽 무대에도 복귀했다. 만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하며 컬럼비아 심포니를 이끌고 명반들을 남겼다. 1962년 2월 17일 베벌리힐스에서 타계했다.
지휘 : 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l)로 부터 예술을 이해하고 음악을 표현하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그의 졸업논문은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썼다.

졸업 후에는 F.라이너, S.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톰프슨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3년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이었던 아서 로진스키(Arthur rodzinski)의 인정을 받아 뉴욕필하모닉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그의 대신 뉴욕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고 CBS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번스타인은 이 한번의 기회로 유명세를 탔고 이름을 떨치게되었다. 1944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자신의 첫 교향곡 《예레미야 심포니 Jeremiah Symphony》을 연주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2차세계대전은 러시아로 확전되었고 히틀러가 저지런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 전해졌다. 부모가 러시아 출신인 번스타인은 러시아 난민을 돕자는 자선행사에 자주 초대되어 나갔으며 카네기홀 등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었다. 번스타인은 음악뿐만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진보적 단체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로 분류되었다. 그는 CBS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음악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번스타인은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의 유력지인 라이프 지에 50명의 대표적인 좌파 블랙리스트로 번스타인이 소개되었고 뉴욕필하모니 지위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국무부는 번스타인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였고 항상 FBI의 감시를 받으며 고립되었다가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 그해 8월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음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미국인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컬럼비아 영화사의 승인을 얻어내 《워터프론트 Waterfront》(1954)라는 영화음악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그후 포드 자동차의 의뢰를 받아 연주회를 열었고 C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번스타인은 다시 뉴욕 필하모니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뉴욕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이듬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회는 최대의 흥행을 보증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의 창작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보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국내 민권투쟁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4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에 가담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와 함께 앨라바마에서 열린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닉슨 행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종전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의 사회사상을 표현한 교향곡《카디시 Kaddish》(1963)와《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수파인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내 진보세력의 몰락을 우려하였고 보수파가 추진하는 핵무기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다르게 변모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으로 번스타인은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들었다. 20세기 미국을 표현하는 오페라를 구상하였으나 끝내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5년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영국, 일본, 그리스, 헝가리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유럽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다. 1990년 10월 14일 사망했다.
지휘 : Seiji Ozawa (세이지 오자와)
지휘 : Vladimir Golschmann (블라디미르 골쉬만)
지휘 : Erich Leinsdorf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오케스트라 : Columbia Symphony Orchestra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New York Philharmonic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Philharmonic-Symphony Society of New York, 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New York Philharmonic-Symphony Orchestra / Philharmonic Symphony Orchestra o)
오케스트라 : Cleveland Orchestr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Chicago Symphony Orchestra (시카고 교향악단,CSO)
오케스트라 : Boston Symphony Orchestra (보스턴 교향악단,BSO)
오케스트라 : Philadelphia Orchestra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실내악 : Tokyo String Quartet (도쿄 현악 사중주단)
실내악 : Budapest Quartet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Budapest String Quar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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