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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음악 (Andy Warhol and Music)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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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음악 (Andy Warhol and Music) [2LP]

Ryuichi Sakamoto 작곡/Nico, Blondie, Ike & Tina Turner, Bobby Vee 노래 외 1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 Music / Masterworks | 2019년 10월 30일 리뷰 총점9.0 정보 더 보기/감추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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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음악 (Andy Warhol and Music)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0월 30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A1 Sunday Morning - The Velvet Underground
  • A2 Venus in Furs - The Velvet Underground
  • A3 These Days - Nico
  • A4 Heart of Glass - Blondie
  • B1 Sweet and Low - Debbie Harry
  • B2 Drive - The Cars
  • B3 Walk on the Wild Side - Lou Reed
  • B4 Sister Morphine - The Rolling Stones
Disc2
  • C1 Open House - Lou Reed & John Cale
  • C2 Tribute to NJP - Ryuichi Sakamoto
  • C3 River Deep Mountain High - Ike & Tina Turner
  • C4 Take Good Care of My Baby - Bobby Vee
  • C5 Nowhere To Run - Martha & The Vandellas
  • D1 I Saw Linda Yesterday - Dickey Lee
  • D2 Mass in C Major, K.317 "Kronungsmesse": VI Sanctus - Igor Markevitch
  • D3 La Traviata, Act III: Addio del passato - Maria Callas
  • D4 Quatuor pour la fin du Temps: V. Louange a l'eternite de Jesus - Christoph Poppen / Manuel Fischer-Dieskau / Wolfgang Meyer

아티스트 소개 (19명)

작곡 : Ryuichi Sakamoto (사카모토 류이치,さかもとりゅういち,坂本 龍一)
음악가. 1952년 출생. 78년 [Thousand knives]로 데뷔. 같은 해 YMO에 참가. YMO 해산 후, 다수의 영화음악을 만들어 작곡가로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평가를 얻으며 늘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해 왔다. 1999년 제작의 오페라 [LIFE] 이후, 환경, 평화, 사회문제에 언급하는 일도 많아서, 9.11 동시 다발 테러를 계기로, 논고집 [비전非?]을 감수. 자연 에너지 이용... 음악가. 1952년 출생.
78년 [Thousand knives]로 데뷔. 같은 해 YMO에 참가. YMO 해산 후, 다수의 영화음악을 만들어 작곡가로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평가를 얻으며 늘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해 왔다. 1999년 제작의 오페라 [LIFE] 이후, 환경, 평화, 사회문제에 언급하는 일도 많아서, 9.11 동시 다발 테러를 계기로, 논고집 [비전非?]을 감수. 자연 에너지 이용 촉진을 제창하는 아티스트 단체 ‘artists’ power’를 창시했다. 2006년 여섯 지역의 핵연료 재처리설비 가동 반대를 표명하고 ‘stop-rokkasho.org’의 활동을 개시, 2007년 7월에는 유한책임 중간법인 ‘more trees’의 설립을 발표하고, 온난화 방지에 대한 계몽과 식수 사업 등 다기에 걸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06년 새로운 음악 커뮤니티의 창출을 목표로 ‘commmons’를 설립. 2009년에는 음악 활동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환경에 대한 배려에 힘써 온 것에 대해, UN 환경계획이 세계 환경의 날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ECHO Festival에서 ‘Echo Award’를 수상했고, 같은 해 7월에는 프랑스 문부성으로부터 예술문화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했다. 2010년, 문화청으로부터 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여 받는 등, 활동 전반에 있어서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1990년부터 미국, 뉴욕 주에 거주.
노래 : Nico (니코 (크리스타 패프겐),Christa Paffgen)
영화배우, 가수 영화배우, 가수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식의 팝 만들기’는 근래 당시 뉴 웨이브 음악계의 커다란 팽창을 가져왔다. 이들의 역사적인 시작은 1974년 뉴욕에서였다. 당시 유명 클럽 맥스 캔서스 시티(Max Cansas City)의 웨이트리스이자 플레이보이 모델이기도 했던 데비 해리(본명은 데보라 해리)는 윈드 인 더 윌로스(Wind in the Willows)라는 포크 록밴드에서 활동하던 중 스틸레토(The Stilettos) 출신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스타인(Chris Stein)을 만나면서 새로운 밴드를 만들 결심을 굳히게 된다. 베이스 프레드 스미스(Fred Smith)와 드럼 빌리 오코너(Billy O’Connor)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라인업을 완성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블론디라는 그룹 이름은 트럭운전사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데비를 향해 소리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75년은 유난히도 라인업의 변화가 많았다. 특히 프레드 스미스가 펑크 밴드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이적한 후엔 밴드가 와해될 위기에 처할 정도로 상당한 침체기를 맞는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드러머 클렘 버크(Clem Burke)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열정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고, 이후에 베이스 개리 발렌타인(Gary Valentine)과 키보드 지미 데스트리(Jimmy Destri)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블론디는 1976년 프라이비트(Private) 레코드사를 통해 첫 싱글 ‘X-offender’를 발표한 뒤 이어서 대망의 첫 앨범 < Blondie >를 발표한다. 그룹은 이기 팝과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의 오프닝에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소규모 투어를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프라이비트 레코드사에서 이적하여 메이저 레이블인 크리살리스(Chrysalis)와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게 된다. 베이스 나이겔 해리슨(Nigel Harrison)을 맞이하면서 6인조의 완전한 라인업으로 진화한 블론디는 1977년 두 번째 앨범 < Plastic Letters >를 발표, 첫 싱글 ‘Denis’ 와 ‘(I’m always touched by your) Presence, dear’가 연속으로 영국차트 Top10 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앞으로의 광채를 예고했다. 성공으로 인한 기나긴 투어와 빡빡한 일정으로 지친 가운데서도 1978년, 블론디는 그들의 역사적인 세 번째 앨범 < Parallel Lines >를 발표한다. 당시 디스코 붐을 타고 가장 잘 나가는 프로듀서의 한 사람이 된 마이크 채프먼(Mike Chapman)의 지휘와 함께 디스코 성향으로 거듭난 블론디의 변신은 미국 뉴욕 펑크의 메카인 시비지비(CBGB)클럽 출신의 펑크 록밴드치고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의외의 전향이었지만 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으로 화답, 앨범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의 싱글 ‘Hanging on the telephone’과 ‘Picture This’는 영국 차트에서 각각 5위, 12위를 차지하였고, 공전의 히트곡 ‘Heart Of Glass’는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대서양 양안 정복의 개가를 일궈냈다. 이 곡은 밴드가 CBGB 클럽활동 시절인 1975년에 데비와 크리스가 쓴 곡이었으나 시류에 맞게 디스코로 업데이트했다. 지미 데스트리는 “우린 우리 자신을 패러디했다”며 자신들의 전향(?)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팬들이 블론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 곡에서 비롯되었으며 록 분야의 사람들은 이 곡을 계기로 디스코열풍의 수용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히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 ‘Sunday girl’이 영국차트 1위, 그들이 CBGB 출신임을 고지한 펑크 계열의 곡 ‘One way or another’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데비 해리는 그 도발적 섹슈얼리티로 ‘제2의 마릴린 먼로’라는 수식어를 얻으면서 록 음악계의 넘버 원 ‘핀 업 걸’로 떠올랐다. 1979년에 발표한 4집 앨범 < Eat To The Beat >는 싱글 ‘Dreaming’ ‘Union City Blue’를 영국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았고 이어 ‘Atomic’이 세 번째로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등 성공행진은 계속되었다. 이후 영화 <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에 삽입된 곡 ‘Call me’가 다시 한번 영국과 미국 차트 정상을 호령하여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곧이어 발표한 다섯 번째 앨범 < Autoamerican >에서는 레게리듬을 도입한 차트1위 곡 ‘The tide is high’과 ‘Rapture’가 말해주듯 각각 레게 그리고 랩을 시도하여 밴드의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정상을 질주하던 블론디에게 갑자기 여러 불운이 겹치기 시작하였다. 기타리스트 프랭크 인팬트(Frank Infante)가 그룹내의 음악적인 위치에 불만을 품고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데비가 쿠 쿠(Koo Koo)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멤버들의 에너지 분산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발표된 6집 앨범 < The Hunter >는 ’Island of lost souls’가 영국차트 톱40 에 오르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결정적으로 그룹의 축인 크리스 스테인이 심각한 유전병에 걸리게 되면서 1982년에 결국 그룹은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데비는 필생의 연인인 크리스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보살피면서 그 사이 영화와 연극에 출연, 솔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앨범은 참패를 거듭했고 지미 데스트리는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병이 회복된 크리스는 뉴욕의 밴드들을 프로듀싱하며 음악활동을 재개했고 클렘 버크는 레코딩 작업을 꾸준히 하며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다. 근래 들어 평단에서 뉴 웨이브와 1980년대 팝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더불어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슬리퍼(Sleeper)의 ’Atomic’ 이 블론디 오리지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갔다(이 곡은 1998년 국내 모 음료CF에 삽입되기도 했다). 그룹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의 성숙에 맞춰 마침내 1998년 말 멤버들은 15년 만에 재결합을 선언하고 일곱 번째가 된 앨범 < No Exit >을 선보였고 첫 싱글 ’Maria’가 발표되자마자 영국차트 1위에 올라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노래 : Maria Callas (마리아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으로 14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향하게 되고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뚱뚱한 몸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던 칼라스는 무대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갖추기 위해 감량을 시도, 카리스마를 갖춘 오페라 프리마돈나로 거듭나게 된다. 메조소프라노와 소프라노의 음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칼라스는 성악의 기교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청...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으로 14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향하게 되고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뚱뚱한 몸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던 칼라스는 무대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갖추기 위해 감량을 시도, 카리스마를 갖춘 오페라 프리마돈나로 거듭나게 된다. 메조소프라노와 소프라노의 음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칼라스는 성악의 기교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청중의 공감을 얻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20살 연상의 남편 Giovanni Battista Meneghini와의 결혼 생활 중 선박 재벌 Aristotle Onassis와 불륜에 빠지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칼라스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오나시스는 결국 재클린 케네디에게 떠나고, 오나시스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칼라스는 사랑의 상처를 안은 채 고독한 말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삶이 노래에 투영되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청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3년부터 유럽과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공연하였고, 1974년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조인트 리사이틀을 였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가수로서의 마지막 무대가 된다.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 곡은 그가 이끌던 1960년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부른 노래다. 발표된 지 자그마치 30년만에 비로소 팬들의 귀에 ‘접속’된 셈이다. 솔로로 독립해 내놓은 곡 ’완벽한 날’도 출반 시점은 1972년. 잔잔한 반주나 힘을 빼고 읊조리듯 부르는 것도 매력적이고 특히 곡의 무드가 만점이다. 그러면 왜 과거 팝팬들은 이 곡의 진가를 몰랐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봐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각 시대의 정서 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인기곡과 1990년대 히트곡은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올드 팝팬들은 밝고 약간은 건조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루 리드의 음악은 다분히 어둡고 습한 분위기였다. 느낌부터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늘 따라붙었던 수식어가 이른바 ‘아방가르드(전위)’ 였다. 이 말은 역으로 다수의 음악대중들과는 크게 유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루 리드의 음악은 역사적 기록과 록평론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 그가 그룹과 솔로 시절에 발표한 1960, 1970년대 앨범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장은 어김없이 록역사의 명반 리스트에 오른다. 록음악 잡지 < 롤링스톤 >은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를 비롯한 뉴욕 펑커들, 카스, 크리시 하인드, 뉴 오더, U2, REM 그리고 소닉 유스 등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점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들’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래의 모던 록에 심취한 팬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는 ‘모던 록의 시조’로까지 추앙된다. 강산이 두세번 바뀌고서야 인정받을 때까지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깨지고 나서는 레코드사의 외면으로 음반조차 내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평소 루 리드의 팬이었다는 데이비드 보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앨범이 ’완벽한 날’이 수록된 걸작 < 트랜스포머(Transformer) >. ’완벽한 날’은 지난해 엘튼 존, 보노 등 30명의 록스타들이 부른 새 노래로 재탄생했다. 음반의 수익금은 세계의 영세가정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이 곡을 동료들과 취입하던 날 루 리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완벽한 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서 좋은 음악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연주 : Manuel Fischer-Dieskau (마누엘 피셔-디스카우)
첼로 연주자 첼로 연주자
클라리넷 연주자 클라리넷 연주자
밴드 : 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다 건너 있는 미국의 도시 뉴욕 - 미국에서 가장 언더그라운드 적이면서도 가장 전위적인 모든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변태적인 공격성과 시적인 낭만이 공존했던 온갖 변종들의 도시 - 이었다.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 있었고, 그와 함께 시작한 밴드, 그 안에 펑크와 뉴 웨이브의 응어리를 내포하고 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있었다. 그 오리지널 멤버 중에 단 한 명의 허튼 멤버도 없었던 (이제는 거의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미미한 음반 판매량과 전혀 무관한 그 컬트적인 명성과 록 음악사에서의 확고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밴드다. (이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벨벳으로 약칭) 1960년대 중반은 록에 있어서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의 기간이었다. 미국의 서부에서는 평화의 사랑의 물결이 넘실대며 파도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록이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을 하고 있던 때가 바로 1960년대 중반이다. 그리고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점철되어 있던 벨벳의 음악은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록 르네상스에 대한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의 화답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대중적인 스타의 길을 달리던 (사랑과 평화, 애시드를 주창하던) 캘리포니아의 많은 밴드들과 달리 벨벳은 사후에 그 음악적 영향은 인정받았지만 결코 스타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벨벳은 록의 에너지와 전위적인 사운드를 뒤섞은 혁신적인 음악과, 그들의 음악 속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사회 리얼리즘의 새로운 단계를 소개했다. 그들의 시대에 벨벳은 컬트적인 청중들과 몇몇 평론가들에게 거대한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의 없었으며 많은 대중들은 그들의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경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기에 벨벳의 음악은 많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벨벳이 서거한 후에 점점 늘어나는 그들의 숭배자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명성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벨벳은 1960년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중요한 밴드로 알려졌다. 벨벳의 음악이 가지는 거대한 의미는 부진했던 그들의 음반 판매량으로는 측정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들을 펑크와 이어지는 뉴 웨이브에 끼진 그들의 거대한 영향력으로 그들을 극찬하고 있으며 사실 벨벳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열쇠의 역할을 했다.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는 음악이라... 그것만큼 음악의 역사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의미론적인 시각으로만 벨벳을 바라보는 것은 벨벳 이야기의 작은 한 부분이고 자칫하면 벨벳의 음악적인 매력을 놓칠 수도 있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벨벳은 그들의 음악과 가사에 있어서 결코 그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세대 음악 작업의 영감을 된 거칠고 황량한 침울함과 단순하고 미니멀한 원시주의를 지지하고 신봉했다. 벨벳의 음악에는 컬러풀하고 귀를 사로잡는 음악적 파노라마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잘 짜여진 노래들은 보다 인간적인 느낌도 놓치지 않았다. 벨벳의 멤버들 중에서 이러한 음악적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기타리스트이자 송 라이터였던 루 리드였다. 시니컬한 듯 따뜻하며 락킹하면서 읊조리는 보컬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 가사들을 쏟아내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벨벳의 요소들을 그의 솔로 작업 속에서 이어가고 있는. # 노란색 바나나가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벨벳의 서거 이후 꾸준한 솔로 작업으로 어둠의 왕자(Prince Of Darkness)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던 루 리드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많은 음악적 변화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과 창조적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닐 영과 그리고 팝 계의 카멜레온 데이빗 보위와 함께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개성 있는 뮤지션이다. 데이빗 보위와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지만 결코 메이저에 몸을 맡기지 않는 은둔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루 리드는 1942년 3월 12일 중산층 가정에서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유태인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록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롱아일랜드의 10대 소년이었던 1950년대 말에는 쉐이즈(The Shades)라는 밴드에서 두 왑 스타일의 싱글을 녹음하기도 했다. 뉴욕의 시라큐즈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픽 윅(Pick Wick) 레코드 회사에 취직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한다. 비트닉 문화와 델모어 슈와츠(Delmore Schwartz)의 시, 재즈 음악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픽 윅 레코드에서의 일에 싫증을 느낀 루 리드는 1964년 그가 썼던 ‘The ostrich’라는 곡을 계기로 만나게 된 존 케일과 함께 벨벳으로 발전할 전위 부대를 만든다. 이 두 명의 남자가 만든 전위 부대의 멤버들은 루 리드(보컬, 기타), 존 케일(기타, 비올라, 키보드), 스털링 모리슨(베이스), 앤거스 맥라이스(Angus Maclise, 드럼)였다. 이 중 주로 봉고를 연주하던 퍼커션 주자였던 드러머 앤거스는 공연의 리허설에 나타나지 않는 등의 태도로 밴드의 신뢰를 잃어 스털링 모리슨의 친구 여동생이던 모린 터커(Maureen Tucker)로 교체된다. 이렇게 짧았던 생애를 함께 할 멤버들이 모이게 됐고, 존 케일과 루 리드는 토니 콘라드(Tony Conrad)가 쓴 < Velvet Underground >의 카피본을 발견하고 그 느낌과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이것을 팀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음악적 통찰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루 리드와 음악적인 역량이 뛰어났던 존 케일의 탄탄한 음악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혁신적인 음악을 가지고 벨벳은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다양한 클럽들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이 당시에 한 클럽에서는 ‘Black angels death song’을 연주한 후에 쫓겨나는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벨벳은 당시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클럽이던 맥스 캔사스 시티 (Max`s Cansas City) -후에 이 곳에서의 그들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에 데뷔를 한다. 맥스 캔사스 시티는 많은 뉴욕 아방가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명사들이 붐비는 사교의 장이었는데, 맥스에서의 데뷔 후 벨벳은 바로 이 곳의 단골이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세기의 만남을 하게 된다. 앤디 워홀은 곧 벨벳의 음악에 주목을 하며, 이들의 후원자이자 매니저가 되기를 자청하며 자신이 알고 있던 아름다운 독일의 모델이자 배우였던 니코를 벨벳에 참여시켰고, 1966년 자신의 멀티 미디어 사이키델릭 쇼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Media’에 벨벳을 출연시키기도 하는데, 이 전위적인 쇼에서 벨벳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소음이 뒤섞인 무대를 만들었다. 또한 벨벳의 재정적 후원을 맡은 앤디 워홀은 곧 자신의 프로듀스로 당시엔 그저 찬밥 신세였고, 후대에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될 벨벳의 1집 < Velvet Underground & Nico >를 제작한다. 존 케일과 루 리드는 벨벳 이후 자신의 솔로 작업을 꾸준히 하며 각각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그 음악적 입지를 굳혀갔다. 벨벳 당시 맛보지 못했던 어느 정도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그 자신의 아티스트적인 색깔을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쳐나간 존 케일과는 달리 루 리드는 벨벳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솔로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초창기의 벨벳 디바 니코는 루 리드, 존 케일, 브라이언 이노 등의 도움으로 < Chelsea Girl > -니코는 벨벳에 합류하기 이전 앤디 워홀의 동명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등의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1988년 사고로 사망했다. 평론가들과 대중들의 벨벳을 재조명하며 뒤늦게 그 업적을 치하하며, 1980년대 이후의 수많은 밴드들이 그들의 음악의 빚을 벨벳에게 돌리는 분위기 속에서 1993년, ‘덕 율을 제외한’ 오리지널 멤버들이 모두의 상상을 뒤엎는 재결성을 하면서 투어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벨벳이 마지막 공연을 했을 당시 태어났을까 말까한 어린 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존 케일과 루 리드 사이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돋기 시작했고, 이후 1996년 벨벳이 록 앤 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 위해 모인 것 외에 더 이상의 벨벳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스털링 모리슨은 이 감격스러운 일은 몇 달 앞두고 사망했다.
밴드 : The Cars (더 카스 (뉴웨이브 밴드))
독일에 있는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가도를 질주한 미국 보스톤 출신의 5인조 뉴웨이브 팝록 밴드 카스(Cars)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었던 미국의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장르를 북미 지역에서도 만발시킨 1세대 그룹이다. 몇 안 되는 ‘미국산(産) 뉴 웨이브’라는 호칭이 최적이다. 아메리칸 펑크의 원류가 되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개라... 독일에 있는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가도를 질주한 미국 보스톤 출신의 5인조 뉴웨이브 팝록 밴드 카스(Cars)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었던 미국의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장르를 북미 지역에서도 만발시킨 1세대 그룹이다. 몇 안 되는 ‘미국산(産) 뉴 웨이브’라는 호칭이 최적이다. 아메리칸 펑크의 원류가 되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개라지 록(Garage rock) 뿐만 아니라 소음에서도 음원의 미학을 발견했던 펑크의 대부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재즈에서 가지를 친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한 록시 뮤직(Roxy Music) 같은 선배들에 영향 받은 카스는 이처럼 덜 대중 친화적인 음악 장르들을 팝 사운드에 버무려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커다란 상업적인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인기를 좇아 영국 스트레이트 펑크의 정신과 이념을 거세한 채 형식만을 차용, 팝과 단순 교배한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랜 지기(知己)인 릭 오케이섹(Ric Ocasek/보컬, 기타)과 벤자민 오어(Benjamin Orr/보컬, 베이스)가 그레그 호크스(Greg Hawkes/키보드)와 함께 1970년대 중반에 결성한 캡 앤 스윙(Cap ’N Swing)이 새로운 멤버 엘리엇 이스튼(Elliot Easton/리드 기타)과 데이브 로빈슨(Dave Robinson/드럼)을 규합해 카스(Cars)로 1976년 이름을 바꾸면서 분위기를 쇄신했다. 2년 간 공력을 다진 이들은 음악 트렌드가 펑크에서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로 바통 터치된 1978년에 자신들의 이름을 타이틀로 한 데뷔 앨범 < Cars >를 공개하면서 화려한 시동을 걸었다. 초기 뉴 웨이브의 명곡으로 자리한 ‘Just what I needed(27위)’, ‘Good times roll(41위)’, 그리고 1990년대 중반 국내의 음료 광고에 사용된 ‘My best friend’s girl(35위)’이 수록된 처녀작 발표 이후 1981년까지 매년 1장씩 모두 3장의 정규 음반을 공개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데뷔앨범은 차트18위에 그쳤지만 2년 가까이(139주) 빌보드 앨범차트를 머물면서 강한 구매욕을 자극,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70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했다. ‘Let’s go(14위)’, ‘It’s all I can do(41위)’, ‘Touch and go(37위)’, ‘Shake it up(4위)’, ‘Since you’re gone(41위)’ 같은 넘버들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면서 1984년에 대표작 < Heartbeat City >를 내놓았다. 이 5집 앨범은 그들을 견고한 스타 밴드의 고지로 올려놓았다. 초기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You might think(7위)’의 뮤직비디오는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격찬 받았으며, ‘Magic(12위)’, ‘Hello again(20위)’, ‘Why can’t I have you(33위)’, 그리고 지금까지도 국내의 라디오를 지배하고 있는 발라드 ‘Drive(3위-R.E.M.과 인큐버스의 노래와는 다른 곡)’ 등의 히트 싱글들이 무더기로 배출되었다. 기타 위주의 뉴 웨이브 팝이었던 전작들보다 신시사이저를 두텁게 사용해 선율이 확충되고 한층 매끄러워진 것이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앨범은 3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릭 오케이섹과 벤자민 오어의 독립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보스톤의 자동차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985년에 나온 베스트 모음집에 수록된 새로운 싱글 ‘Tonight she comes(7위)’와 ‘I’m not the one(32위)’이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기세는 눈에 띄게 기울어갔다. 1986년에는 릭 오케이섹의 솔로 싱글곡 ‘Emotion in motion(15위)’과 벤자민 오어의 솔로 히트곡 ‘Stay the night(24위)’이 나란히 발표되어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둘 모두 홀로서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7년 ‘You are the girl(17위)’, ‘Strap me in(85위)’, ‘Coming up you(74위)’가 수록된 < Door To Door >를 마지막으로 카스는 1988년 공식적인 자동분해 과정에 들어갔다. 1990년대 들어서 릭 오케이섹은 위저(Weezer), 배드 릴리전(Bad Religion), 노 다웃(No Doubt), 홀(Hole), 워너디스(Wannadies)를 비롯해 영화 < 스피드 >와 < 크로우 2 > 등의 음반을 제작하면서 뮤지션보다는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다졌다. 하지만 벤자민 오어는 불행히도 2000년 10월 3일 투병 중인 암으로 사망했다.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젖어든 우리 60~70년대 사람들에게 롤링 스톤스의 곡들이 환영받을 리 만무했다. 무수한 곡들이 애청된 비틀스에 비해 그들의 인기곡은 고작 ‘눈물이 지나갈 때(As tears go by)’ ‘루비 튜즈데이(Ruby Thesday)’ ‘엔지(Angie)’ 정도에 불과했다. ‘검게 칠하라(Paint it black)’가 어필한 것도 80년대 말 국내 방영된 TV외화 < 머나먼 정글 >에 이 곡이 ‘시그널 송’으로 삽입되고 나서였다. 팝의 본고장에서의 휘황찬란한 히트 행진에 견주었을 때 롤링 스톤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로 보잘 것이 없었다. 비틀스가 ‘산소 같은 음악’을 했다면 그들은 고집스럽게 ‘탄소 같은 음악’을 구사했다. 바로 그 탄소라는 요소로 인해 그들은 ‘4인의 전설’이 된 비틀스처럼 결코 ‘5인의 전설’이라는 명예 작위를 하사 받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꼬리표는 ‘5인의 악동들’이었다. 사실 악동은 출신 성분상 비틀스에 어울리는 용어였다. 그들은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로커’들이었다. 존 레논의 경우 여지없이 그 어휘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톤스 멤버들은 비틀스처럼 가난하거나 못 배운 청년들이 아니었다. 보컬리스트 믹 재거(Mick Jagger)는 런던 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며 기타주자 키스 리차즈(Keith Richards) 역시 중산층 자손이었으며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는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베이스 담당 빌 와이먼(Bill Wyman)과 드럼 찰리 와츠(Charlie Watts)가 노동계급 출신이지만 스톤스에 가입할 무렵에는 엄연한 ‘직장인’이었다. 신분으로 보자면 그들은 결코 록을 해선 안될 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악동 노릇을 자처했다. 그것은 노동계급 청춘에 의한 하위문화라는 ‘록의 헌법’을 거스르는 위헌 사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그러한 ‘자격 미달’을 의식해서인지 비틀스보다 훨씬 강도 높게 록의 규율을 준수했다. 롤링 스톤스는 기꺼이 악동이 되기를 희망했다. 말쑥한 헤어스타일과 정장 차림으로 비틀스와 겨룬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은 격이었다. 데뷔 당시 비틀스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드햄(Andrew Loog Oldham)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그들은 비틀스에 이어 1965년 마침내 대망의 미국 정복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정서’가 되었다. 그들은 ‘게으른 불량 저능아들’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는 곳마다 소란과 골칫거리를 야기시켰다. 기성 세대와 제도권의 ‘계급 공포’는 예고된 것이었다. 영국의 < 뉴스 오브 더 월드 >지는 ‘당신의 딸이 롤링 스톤스 멤버와 놀러 나가는 것을 허락하겠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 뉴스 위크 >지는 그들을 ‘포르노 같은 가사에 젖어 있는 심술궂은 무리들’이라고 규정했다. 노심초사한 한 여인은 < 타임 >지에 “왜 디스크자키들은 스톤스 같은 쓰레기 노래들을 틀어 대느냐”고 따지는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양복 전문지 < 더 테일러 앤드 커터 >는 넥타이 매출이 형편없다고 스톤스에게 제발 넥타이를 매달라고 통사정했다. 클리블랜드 시장 랄프 로커는 스톤스 공연을 보던 17세 소년이 다치자 “그러한 그룹은 우리 공동체의 문화와 오락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며 그들의 콘서트를 불허하는 ‘비민주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비틀스에게는 인기폭발의 계기가 된 CBS TV 에드 설리번 쇼의 사례도 유명하다. 객석의 예기치 않은 소요와 그들의 불량스러운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에드 설리번은 상기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들을 다시는 출연시키지 않겠다! 이 쇼를 구축하는데 자그마치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단 몇 주만에 쇼를 망치게 할 수는 없다” 에드 설리번은 물론 이 선언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지만 2년 뒤인 1967년 섭외 때도 그들의 노래 ‘밤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의 제목을 ‘시간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some time together)’로 고쳐 부르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탄이 있으면 그에 비례하여 응원군도 출현하는 법이다. 어느 록밴드보다 흑인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뛰어나게 소화했기 때문에 ‘소울의 왕’ 오티스 레딩은 가장 좋아하는 그룹으로 롤링 스톤스를 지목했으며 그들의 레퍼토리를 리메이크해 음반에 담기도 했다. 1965년 미국 콜로라도 존 A 러브 주지사는 성공적으로 공연에 감사하는 뜻으로 ‘롤링 스톤스의 날’(11월 29일)을 공식 선포했다. 믹 재거가 1964년 난폭 운전으로 면허 취소의 위기에 몰렸을 때 사무 변호사 데일 파킨슨의 간청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면허가 취소되면 믹 재거와 그의 그룹이 움직이는데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영국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달러를 필요로 하며 그들은 어느 수출업체보다도 많은 달러를 번다.” 재거는 16파운드의 벌금을 내고 다시 차를 몰 수 있었다(좌우지간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 1967년 재거와 리차즈가 마약 불법 소지 사건으로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고 이어 브라이언 존스도 런던 아파트에서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언론이 도왔다. 보수신문으로 정평 나있는 < 더 타임스 >지가 놀랍게도 ‘누가 바퀴로 나비를 찢어 죽이나?(Who breaks a butterfly on a wheel?)’라는 제목의 비호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롤링 스톤스에 대한 대중의 집단 히스테리를 알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는 당시 기성 가치에 거스르는 ‘히피 보헤미안’들의 정서를 반영했다. 그들의 곡에는 의도했든 안했든 히피 세대의 분노와 불만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60년대 록정신의 한복판에 ‘구르는 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 그 양반이 나오더군, 점점 더 쓸데없는 정보만 늘어놓는 거야. 내 상상을 불태우려는 듯 말야. 노력해 도 노력해도 난 도무지 만족할 수 없어’-‘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no satisfaction)’중에서 이 노래는 세 번째 구절의 ‘여성 생리’ 관련 가사로도 어필한 것이 사실이지만 청년 대중들이 주로 멜로디 부분에 맞춰 “현실 상황에 절대 만족할 수 없음”을 목청 높여 부른 것에 힘입어 빅히트했다(그들의 최초 미국 차트 1위곡). 믹 재거 스스로도 “이 곡은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욕구 불만을 담았다. 그것은 꾸밈없는 10대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히피 세대들은 정말 스톤스의 말을 따라 순종을 거부했고 도전했고 싸웠으며 싸돌아다녔다. 스톤스 또한 확고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그들에 대한 ‘자극’을 즐겼다. ‘그녀가 왜 자유로워지려는지 묻지마. 그녀는 그게 유일한 낙이라고 말할 거야. 그녀는 삶에 묶여 있지 않아. 그런 대가를 치러 봤자 인생은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루비 튜스데이’ ‘난 자유를 갖고 있지만 많은 시간은 없다. 신념은 무너졌고 눈물은 쏟아야만 해. 우리가 죽고 난 뒤 어떠한 생을 얻읍시다. 야생마는 날 질질 끌고 다니지 않지. 어느 날 우리는 야생마를 타게 될 거야’-‘야생마(Wild horses)’ 1960년대 그들의 음악은 라이벌 밴드 비틀스에 끌려 다닌 측면이 없지 않았다. 1966년 작 < 여파(Aftermath) >는 재거와 리차즈가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콤비 자작곡인 < 러버 소울(Rubber soul) >에 충격 받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 것이며, 1967년 사이키델릭 음반 < 악마 폐하의 요청(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만 해도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2등이었다. 결코 비틀스로부터 왕관의 소유권을 이전 받지는 못했다. 비틀스는 록밴드에서 ‘전천후 팝 밴드’로 승천하면서 어느 세대에도, 어느 계층에도 적(敵)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 서전트 >의 시점부터 음악의 축을 로큰롤의 흥분에서 팝 예술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롤링 스톤스는 적이 많았다. 기성 세대들은 록의 부랑아인 그들을 꺼렸으며 록이란 또 애초부터 전 세대를 포괄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음악이었다. 결국 비틀스는 록을 버려 ‘국민그룹’이 된 것이다. 만약 비틀스에게 약점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록과의 작별’일 것이었다. 이 비틀스의 허점이 롤링 스톤스에게는 강점을 의미했다. 롤링 스톤스는 록을 배신한 비틀스에게 실망한, 그리하여 멀어져 간 ‘록 충절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그 팬들에게 ‘우리가 진정한 로큰롤 밴드’임을 열심히 음악으로 웅변했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1966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어른들이 비틀스가 훌륭하고 비틀스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해졌다. 기성 세대들은 우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히피’ 아이들은 또는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는 애들은 우리를 떠나 버렸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스톤스의 팬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는 롤링 스톤스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밖에 몰랐다. 그것도 기타와 드럼 베이스가 물려 빚어내는, 단순하고 경쾌한 원시 로큰롤로 일관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가서는 데뷔 시절에 더러 다루곤 했던 느린 리듬 앤드 블루스나 발라드의 비율마저 낮추어 버렸다. 1960년대 후반기에 발표한 3장의 앨범 < 단추 사이에(Between The Buttons) >, < 거지의 향연(Beggar’s Banquet) >, < 렛 잇 블리드(Let It Bleed) >가 뚜렷한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록비평가들이 일제히 걸작 음반으로 꼽는 것도 이 앨범들이 철저히 록음악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거지의 향연 >에 수록된 곡 ‘거리의 싸움꾼(Street fighting man)’에 내비친 그들의 ‘로큰롤 신념’을 들어보자. ‘내 이름은 소란이라고 하지. 난 외치고 울부짖을 거야. 난 왕을 죽이고 그의 종복들을 박살낼테야. 가난한 아이가 로큰롤 밴드에서 노래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나. 졸린 런던 타운에서 거리의 싸움꾼을 위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지!’ 그들의 록에 대한 헌신은 < 타임 >지로부터 ‘피에 굶주린 로큰롤 앨범’이라는 칭찬을 받은 기념작 < 스티키 핑거스(Sticky Fingers) >와 이듬해의 음반 < 대로의 추방자(Exile On Main Street) >로 절정에 달했다. 록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는 “적어도 펑크가 도래할 때까지 아무도 그들처럼 몰아(沒我)의 에너지로 철저히 록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롤링 스톤스는 록에 온몸을 내던진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성을 창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록의 ‘낙오자 정서’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록이 제도권의 스타가 아닌 거리의 청년들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입증한 펑크 밴드들에게 공격 타깃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와 관련하여 섹스 피스톨스 자니 로튼이 “롤링 스톤스와 후는 비위에 거슬린다. 그들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제시할 것이 없다”고 성토한 것은 유명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록의 공룡’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말의 ‘반성’도 없었다.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1978년 당시의 인기 음악인 디스코를 채용한 ‘네가 그리워(Miss you)’를 노래하며 제도권 한복판에서 유유자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록의 공격성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펑크 록은 펑크 세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에 터득한 ‘그들만의’ 원시적인 로큰롤을 했다. 록의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원형 록을 보존하며 그 ‘충실성’을 옹호한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도 그들은 그렇게 록을 했고 끊임없이 해체설이 떠도는 가운데에서도 1989년 < 강철바퀴(Steel Wheels) >를 통해서 원형 록으로 재기했다. 1994년에 발표한 < 부두 라운지(Voodoo Lounge) >나 1995년 말에 내놓은 < 스트립드(Stripped) >도 거친 로큰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변한 것이라곤 1969년 브라이언 존스가 사망하자 믹 테일러(Mick Taylor)가 그 자리를 메꾸고, 1974년 다시 그 자리에 그룹 페이시스의 전 멤버 론 우드(Ron Wood)가 들어온 것, 또한 1994년 빌 와이먼이 탈퇴한 것뿐이었다. 이제 멤버들 대부분의 나이 50세를 넘어섰다. 롤링 스톤스는 오랫동안 록이 가지는 열정과 흥분에 몸바치면서 쌓은 금자탑에 또 하나의 글귀, ‘록은 늙어서도 할 수 있다’를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펑크 진영의 지탄도, 얼터너티브 록의 대공세도 거뜬히 극복했다. 믹 재거는 1988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로큰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배우나 작가,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로큰롤이 나를 휘어잡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것이다” 그의 롤링 스톤스는 < 스트립드 > 앨범에서 밥 딜런의 고전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불렀다. 이 한 곡이 아마도 이 앨범이 말하려는 바와 그들의 음악과 역사를 축약하는 노래일 것이다.
밴드 : Martha & The Vandellas (마사 앤 더 반델라스)
멤버 :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 로잘린드 애쉬포드(Rosalind Ashford), 베티 켈리(Betty Kelly) 멤버 :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 로잘린드 애쉬포드(Rosalind Ashford), 베티 켈리(Betty Kelly)
포틀랜드 오레곤에서 댄디 워홀스가 결성되기 전 커트니 테일러(V, G)는 뷰티 스탭 Beauty Srab이라는 글램 록 밴드의 드러머였다. 그런 전적을 가진 그가 도발적인 소녀의 이미지를 사진 지아 맥케이브(K), 피터 홈스트롬(G), 에릭 헤드포드(D)와 1990년 초 결성한 댄디 워홀스는 그런지의 영향이 다분한 브릿 팝 음악으로 엘렉트라픽션 Electrafiction과 러브 앤 라킷츠와 공연하면서 그들의 이름... 포틀랜드 오레곤에서 댄디 워홀스가 결성되기 전 커트니 테일러(V, G)는 뷰티 스탭 Beauty Srab이라는 글램 록 밴드의 드러머였다. 그런 전적을 가진 그가 도발적인 소녀의 이미지를 사진 지아 맥케이브(K), 피터 홈스트롬(G), 에릭 헤드포드(D)와 1990년 초 결성한 댄디 워홀스는 그런지의 영향이 다분한 브릿 팝 음악으로 엘렉트라픽션 Electrafiction과 러브 앤 라킷츠와 공연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음악 씬에 알리기 시작했다. 1995년, < Dandy’s Rule OK? >라는 다소 발칙한 타이틀의 첫 앨범을 발표한 후 다음해인 1996년, 메이저 레이블 캐피탈과 계약하면서 댄디 워홀스는 1997년 여름 많은 관심 속에서 첫 메이저 앨범 < THE DANDY WARHOLS COME DOWN >을 발표했다.
지휘 : Igor Markevitch (이고르 마르케비치)
지휘 : Christoph Poppen (크리스토프 포펜)
금발의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데보라 해리는 영화배우로서보다는 70-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블론디" 리드 보컬로서 더 유명하다. 데보라는 생후 3개월에 입양되었고 해리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다. 1973년에 그녀는 후에 애인이 된 크리스 스타인을 만나는데, 그와 다음 해에 "블론디"를 결성하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가장 유명한 밴드 중의 하나가 된다. 블론디는 1983년에 해산하고,... 금발의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데보라 해리는 영화배우로서보다는 70-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블론디" 리드 보컬로서 더 유명하다. 데보라는 생후 3개월에 입양되었고 해리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다. 1973년에 그녀는 후에 애인이 된 크리스 스타인을 만나는데, 그와 다음 해에 "블론디"를 결성하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가장 유명한 밴드 중의 하나가 된다. 블론디는 1983년에 해산하고, 그 후 데보라는 5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고, 몇 편의 영화와 TV에 출현하였다. 또한 그녀는 AIDS자선 기금을 지원하기 위한 공연도 하였다. 1995년에는 재즈 패신저스와 엘비스 코스텔로와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 공연했으며, 리브 타일러와 <헤비스, Heavy>(95)라는 영화를, 아담 앤트와 <드랍 데드 록>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필모그래피]

어둠속의 외침(1990)|주연배우
전화로만 끝내 주세요(1991)|주연배우
나 없는 내 인생(2003)|주연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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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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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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