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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Black & White Night 30: Live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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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LP 1987년 9월 콘서트 실황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Black & White Night 30: Live [2LP]

발매 30주년 기념반

[ 게이트폴드 / 디지털 다운로드 코드 삽입 / 리마스터링 ]
Roy Orbison, Jennifer Warnes, Tom Waits, Bruce Springsteen, J.D. Souther 노래 외 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Sony Legacy | 2019년 10월 15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6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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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Black & White Night 30: Live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0월 15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Only the Lonely (Live)
  • 02 Leah (Live)
  • 03 In Dreams (Live)
  • 04 Crying (Live)
  • 05 Uptown (Live)
  • 06 The Comedians (Live)
  • 07 Blue Angel (Live)
  • 08 It's Over (Live)
  • 09 Running Scared (Live)
  • 10 Dream Baby (How Long Must I Dream) (Live)
  • 11 Mean Woman Blues (Live)
  • 12 Candy Man (Live)
  • 13 Ooby Dooby (Live)
  • 14 Blue Bayou (Live)
  • 15 Go! Go! Go! (Down the Line) (Live)
  • 16 (All I Can Do Is) Dream You (Live)
  • 17 Claudette (Live)
  • 18 Oh, Pretty Woman ((Live) [Alt Version])
  • 19 Oh, Pretty Woman (Live)

아티스트 소개 (10명)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 청아한 음색과 미인은 아니지만 이지적이고 고결한 모습으로 다른 가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둔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와 < 더티 댄싱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과 '(I've had) The time of my life'로 1980년대에 알려졌지만 음악을 꼼꼼히 찾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이전인 1977년에 전미 차트 6위를 차지한 'Right time of the night'로 이미 익숙해진 여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곡 외에도 1987년에 공개한 'Famous Blue Raincoat'로 다운타운을 점령하며 국내 팬들과의 착상에 다시 한번 성공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3일,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니퍼 원스는 갓 20살이던 1967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해 이듬해에 뮤지컬 < 헤어 >에 주연 급으로 출연하면서 가수로서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뮤지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하던 1968년에 차분한 포크 성향의 데뷔앨범 < I Can Remember Everything >으로 가멸찬 스타트를 했지만 블루스 리바이벌과 사이키델릭이 대세이던 당시의 음악 시장에 삼투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더 후(The Who)의 노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앨범 < See Me, Feel Me, Touch Me, Heal Me >로 기백 있는 두 번째 도전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철저히 가려졌다. 좌절한 제니퍼 원스는 3년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3집 < Jennifer >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좌절을 마음에 안고 캐나다 출신의 거물 싱어 송라이터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백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제니퍼 원스는 레너드 코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공감하고, 느끼게 된다. 결국 레너드 코헨은 제니퍼 원스의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제니퍼는 레너드 코헨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987년에 그의 노래들로만 채워진 명반 < Famous Blue Raincoat >를 내놓아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72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이 타이틀곡만큼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확실히 장악했고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신청이 끊이지 않는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되었다. 제니퍼 원스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7년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4집에서 컨트리 풍의 'Right time of the night'이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부터. 후속 곡 으로 낙점된 발라드 'I'm dreaming'이 50위에 랭크되는 성적을 거둔 그는 1979년에 다섯 번째 음반 < Shot Through The Heart >을 발표해 컨트리 팝 스타일의 'I know a heartache when I see one'이 19위를 차지하며 '원히트원더 가수'라는 꼬리표를 뗐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제니퍼 원스는 정규앨범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제니퍼 원스는 1982년에 리차드 기어와 데보라 윙어가 주연한 영화 < 사관과 신산 >의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을 허스키 보이스로 유명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조 카커(Joe Cocker)와 듀엣으로 불러 그해 가장 큰 히트 곡이 되었다. 이 곡은 3주 동안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그래미 최우수 듀엣 부문과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도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제 제니퍼 원스는 더 이상 '레너드 코헨'의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그 위치가 격상됐다. 하지만 이 노래의 스매시 히트는 그를 옭아맸다. 1983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탐 크루즈가 주연한 미식축구 영화 < All The Rights Moves/뜨거운 가슴으로 내일을 >의 동명 주제곡을 크리스 톰슨(Chris Thompson)과 함께 부르며 'Up where we belong'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영화와 주제곡 모두 참패하자 제니퍼 원스는 다시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었다. 4년 후인 1987년, 이 지적인 여가수는 다시 남성 가수와 함께 영화 주제곡을 취입했다. 바로 'Unchained melody'로 유명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멤버였던 빌 메들리(Bill Medley)와 함께 그 유명한 댄스 무비 < 더티 댄싱 >의 주제가 '(I've had) The time of my life'를 부른 것. 이 곡으로 제니퍼 원스는 'Up where we belong'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싱글차트 1위, 그래미 수상, 아카데미 주제가 부문 수상)을 재현하며 다시 한번 영화 주제가 여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92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앨범 < The Hunter >와 2001년에 공개한 8집 < The Well >은 빌보드 앨범차트 200위에 랭크되지도 못한 채 대중들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지만 < The Well >에 수록된 빌리 조엘(Billy Joel)의 원곡을 재해석한 'And so it goes'는 국내에서 은은한 사랑을 받았다.
톰 웨이츠는 아메리칸 스윗하트가 아니다. 그의 음악 세계는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평면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가래 낀 듯한 목소리는 웬만해선 듣기 거북하고, 재즈와 블루스, 로큰롤, 그리고 익스페리멘탈 록 등을 종횡무진 하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낯설고 부담스럽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비트(Beat)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 지경이니 음반이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톰 웨이츠는 아메리칸 스윗하트가 아니다. 그의 음악 세계는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평면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가래 낀 듯한 목소리는 웬만해선 듣기 거북하고, 재즈와 블루스, 로큰롤, 그리고 익스페리멘탈 록 등을 종횡무진 하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낯설고 부담스럽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비트(Beat)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 지경이니 음반이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점 때문에 톰 웨이츠는 평론가들과 뮤지션에게 미국의 연인 못지 않은 위대한 페르소나로 대접을 받는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적인 싱어 송 라이터, 최고의 음유 시인, 진정한 아티스트 등등. 반골의 음악에 넋을 잃고, 공사판 노동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매료된다. 절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고 오로지 ‘마이 웨이’를 걸었던 웨이츠의 일관성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언더그라운드를 외롭게 지켜낸 것에 대한 훈장이다. 1949년 12월 7일 캘리포니아 파모나(Pamona)의 택시 안에서 태어난 톰 웨이츠는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하여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곳 저 곳을 떠돌아 다녔으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이런 방랑벽은 그가 가수 데뷔 이후에도 모텔을 옮겨다니며 생활하게끔 만든 주원인이었다. 십대 후반부터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그는 1971년 프랭크 자파(Frank Zappa)의 매니저였넌 허브 코헨(Herb Cohen)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데이빗 게펜(David Geffen)이 운영하던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3년 그는 1970년대 싱어 송 라이터 시대를 화려하게 빛낸 수작이라고 평가받는 데뷔작 을 발표했다.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등 매우 간결한 악기 편성으로 녹음된 음반은 이글스(Eagles)가 1974년 작품 에서 리메이크하여 히트시킨 ‘Ol’ 55’와, 톰 웨이츠의 진솔한 목소리가 압권인 ‘I hope that I don’t fall in love with you가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 톰 웨이츠는 1974년 소포모어 앨범 부터 프로듀서 본스 하우(Bones Howe)와 팀을 이뤄 작업을 했는데, 이로 인해 재즈, 블루스, 포크 등이 적절히 섞인 가운데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 풍성함을 강조하는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가사 역시 잭 크로악(Jack Kerouac)과 찰스 버코우스키(Charles Bukowski) 등의 비트 작가 등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쓰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서 나이트 클럽 분위기를 연출한 1975년 더블 라이브 앨범 , 재즈 블루스 명곡 ‘Bad liver and a broken heart’가 담겨있는 1976년 , 베트 미들러(Bette Midler)와 듀엣으로 부른 ‘I never talk to strangers’가 실려 있는 1977년 등 1970년대 발표한 앨범 대부분이 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톰 웨이츠는 자신을 지탱해오던 음악 네트워크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일대 변화를 시도했다. 매니저도 바꾸고, 프로듀서 본스 하우와도 헤어졌다. 또한 오랜 기간 동반자로 지내왔던 을 떠나 레코드사로 이적하였다. 1983년 내놓은 는 웨이츠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앨범이었다. 본스 하우와 함께 한 이전 작품들에서 나타나던 현악 사운드는 거의 사라지고, 퍼커션과 베이스 등이 중심이 되어 거칠고 강한 실험적인 소리들이 들어섰다. 1985년 , 1987년 등의 후속 작품들도 그러했다. 한편 톰 웨이츠는 음악 활동과 병행하여 영화 배우와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도 지평을 넓혀나갔는데, 1979년 실베스터 스텔론이 감독한 영화 에 카메오로 출연하고 음악을 맡은 계기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1982), (1983), (1984) 등에서 영화 배우와 사운드트랙 작곡가로서 맹활약을 했다. 또한 1986년에는 컬트 무비 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아 영화팬들에게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90년대에도 톰 웨이츠의 음악적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992년 발표한 으로 웨이츠는 이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얼터너티브 음악’상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를, 그리고 6년 뒤인 1999년에는 를 공개하며 오늘날까지 언더그라운드의 표상으로 남아있다.
노래 : Bruce Springsteen (브루스 스프링스틴)
미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 미국인에게 조국의 이미지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살기좋은 나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세계 제일의 국가가 미국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인의 그런 자부심은 어쩌면 당연하다. 실로 미국인치고 미국을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냉엄한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마저도 흔하지는 않다. 가수는 더구나 그렇다. 그런데 전형적인 양키이면서 미... 미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 미국인에게 조국의 이미지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살기좋은 나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세계 제일의 국가가 미국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인의 그런 자부심은 어쩌면 당연하다. 실로 미국인치고 미국을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냉엄한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마저도 흔하지는 않다. 가수는 더구나 그렇다. 그런데 전형적인 양키이면서 미국에 내재하는 부정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매우 유별난 가수가 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80년대에 팝 부문은 주지하다시피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가 석권했지만, 록 부문에 관한 한 최고의 영예는 그의 것이었다. < 뉴스위크 >지는 “84년 < 미국에서 태어나(Born in the USA) > 앨범이 발표된 후 스프링스틴은 ‘가장 위대한 미국의 록큰롤러’의 타이틀을 안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된 바 있듯 한동안 그의 인기 열풍은 마이클 잭슨 열풍을 넘어설 만큼 거세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록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그의 별명이 보스(Boss)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지난 70년대 중반 이후 줄곧 이 록계의 두목이 노래를 통하여 그려내고 있는 미국의 상태는 한마디로 ‘빨간 신호등’이다. 거기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를 비롯한 대다수 민중은 일등 국민의 자부심을 지니고 사는 선택받은 국민들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아메리칸 드림을 상실한 채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몸부림치는 가련한 무리들이다. 보스의 작업은 바로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서서 지금의 미국은 살기좋은 나라가 결코 아니며 그들은 ‘총체적 절망 구조’에 빠져 있음을 만방에 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업적이 됐다. 75년에 발표한 그의 걸작 레퍼터리 가운데 하나인 ‘날아나기 위해 태어나(Born to run)’의 노랫말을 보자. ‘낮에 우리는 빗나간 아메리칸 드림의 거리에서 땀을 흘리지. 밤에는 살인기계인 화려한 맨션을 돌아다니고... 이 도시는 당신의 등뼈를 갉아먹는다오. 죽음의 덫이요. 자살 장치라오. 우리는 젊을 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같은 방랑자들은 달아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스프링스틴은 이 곡에 미국 노동자 계급의 절박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그는 73년부터 음반 활동을 개시했지만 이 노래가 타이틀인 음반이 나오면서 일약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으로 급성장한다. 이 앨범이 출반된 다음달인 75년 10월 스프링스틴은 양대 시사주간지 < 타임 >과 < 뉴스위크 >의 커버스토리를 동시에 장식했다(월드판이 아니라 미국판이긴 했지만). < 타임 >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가수를 ‘록의 새로운 센세이션’이라고 추켜세웠다. 바로 한 해 전인 74년 4월에 존 랜도라는 록 평론가가 보스톤주 케임브리지시의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찰리스라는 조금만 술집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을 보고 보스톤의 주간지 < 리얼 페이퍼 >에 “나는 록큰롤의 미래를 보았다. 그의 이름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라며 극찬의 기사를 쓴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존 랜도는 이 공로로 그 이후 스프링스틴의 매니저 겸 공동 프로듀서가 된다. 이 때까지 그의 논조는 답답한 일상생활에서의 탈출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소재는 자동차, 여자, 거리 불량배 등의 관심사가 많이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78년에 발표한 < 마을 가장자리의 어둠(Darkness on the Edge of Town) >에서부터는 이런 감상적 수준을 벗어나 사회 비판으로 시각을 상향 조정한다. ‘이른 아침 공장의 휘슬이 울리면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는다. 노동, 노동, 노동의 삶! 하루가 저물어 공장의 휘슬이 울리면 남자는 그의 죽음을 안고 이 공장문을 걸어나온다. 누군가 오늘밤 아프게 될 거야. 노동, 노동, 노동의 삷일 뿐이야!’ ‘공장(Factory)’ 나이 30세를 넘긴 80년 스프링스틴은 어느 록 평론가에게 “난 이제 다른 사람이다. 30대가 되면 세상은 다르게 마련이다. 적어도 달라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시작됐던 변화가 이같은 의식 강화로 절정으로 향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의 변화가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80년은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고 ‘힘 있는 미국의 재건’이라는 보수적 슬로건이 내걸렸던 해였다. 하지만 실제 민중의 삶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두드러지고 있었다. 일례로 70년대에 미국 정부를 믿고 월남전에서 싸웠던 파병용사들은 패전의 멍에를 걸머진 채 직장도 못구하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스프링스틴은 자동차, 여자의 소재보다는 미국의 경기 후퇴와 부자에게만 이로운 경제 정책으로 고통스럽고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진 미국 시민의 처지를 다루기 시작했다. ‘난 존스타운 회사의 건축 노동자라는 직업을 얻었지. 그런데 최근 경기 침체로 일이 많지 않았지.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던 것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어. 이젠 기억도 안나. ... 과거 메리와 좋았던 시절이 기억나 날 괴롭히고 있지. 마치 저주처럼 기억들이 날 붙어다녀. 실현되지 않는다면 꿈은 거짓말 아닌가. 아니면 악화된 것 아닌가.’ ‘강(The River)’ 80년 말에 내놓은 음반 < 강 >에 수록된 타이틀 송인데 경기 침체라는 외부적 상황 때문에 아내와 직장을 잃은 어느 노동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2년 뒤인 82년에는 그야말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시각 변화를 결산하는 완결편 < 네브라스카(Nebraska) >가 등장한다. 이 음반에서 그가 그려놓은 미국은 거의 절망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말 마와의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아 랄프는 직업을 구하러 다녔지만 헛수고였지. 그는 집에 돌아와 탱거리와 술에 만취했지. 그리곤 총을 구해 야간근무자를 쏘았고 무법자 쟈니 99가 된 거야. 쟈니는 총을 휘둘러 미치광이처럼 날뛰었지. 그러나 비번의 경찰에 잡혀 수갑이 채워졌지. 법정에서는 주먹다툼이 일어나고 그들은 쟈니의 여자를 질질 끌고나갔지. 그의 어머니는 외쳤어. 판사나리, 내 아이를 이렇게 다루지 말아달라고. 난 정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쟈니99(Johney 99)’ ‘와이오밍의 거친 땅을 횡단하며 난 모든 것을 죽였다오. 난 내가 저지른 행위에 유감이라 말하지 않으리. 사실 재미까지 느꼈지. 재판관은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을 선고했지. 심야의 감방에 내 가슴은 가죽끈이 묶여졌지. 그들은 내가 삶을 영위하기에 부적합하고 긴 허공에 내 영혼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선언했지. 그들은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했지. 그거야, 단지 이 세상의 비천함 때문이야.’ ‘네브라스카’ 전자 악기와 테크노 사운드가 범람하던 그 시절에 난데없이 통기타와 하모니카의 반주로 꾸민 이 이색음반은 이같은 처절한 메시지가 황량함, 암울함, 긴박감 등의 분위기가 흐르는 곡조와 뛰어나게 잘 어우러져 그 전달 수준이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미국내의 거의 모든 음악 평론가가 이 작품을 ‘충격적 걸작’으로 꼽았다. 그는 이 앨범과 관련하여 음악 전문지 < 뮤지션 >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70년대는 무엇보다 우선 ‘사기’가 정당화되어버린 시기였다. 워터게이트를 보라. < 달아나기 위해 태어나 >음반이 ‘가치’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면 < 네브라스카 >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상징하는 ‘가치의 붕괴’를 다룬 작품이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존재감을 상실하는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것이다. 이제 그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사회에 연결시킬 의욕을 갖지 못한다. 그는 정부에 소외되어 있고 직장에 소외되고 있고 가정에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84년 6월에 나온 그의 최대 히트작이자 수작으로 평가받는 < 미국에서 태어나 >음반에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전 앨범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묘사도 더욱 생생하다. ‘조그만 고향의 혼잡 속에 있던 내게 그들은 총을 쥐어주었지. 그리곤 외국 땅으로 날 내보냈고 거기의 황인종을 죽이도록 했지. ... 고향으로 돌아와 제련소에 일자리를 얻으러 갔지. 고용자는 나더러 재향군인회에 가보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 하며 ... 교도소의 그늘 아래서, 제철소의 가스 불꽃 옆에서 난 10년간 땅을 치며 살고 있어. 탈출할 곳이 없어 .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어. 난 미국에서 태어났어. 난 미국에서 태어났어!’ 이 음반의 타이틀 곡이다. 미국 태생이라는 어느 월남전 용사의 반복적 외침은 결코 미국인의 긍지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 정부를 겨냥한 순전한 비아냥이다. 스프링스틴은 이 노래에서 월남전 파병용사의 방황이라는 소재를 내걸어 미국 정부의 민중에 대한 정신적 착취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65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내가 다니던 고교에도 흑백간의 싸움이 수도 없이 많았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지. 토요일밤에 헤드라이트를 켠 두 대의 차가 다가왔어. 뒷좌석에는 총이 있었지. 총성이 울렸어. 시련기가 내 고향을 엄습한 거야. ... 이제 한길에는 회색칠한 창문과 텅빈 상점만이 있어 이곳에 오고 싶은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여. 철길 건너의 방직공장은 문을 닫았고 직공은 이 직업이 이제 내리막길이고 그래서 그들은 네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나의 고향(My Hometown)’ 이 곡 또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식의 고향 찬가가 아니다. 공업지대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중부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한 어느 마을이 겪는 황량한 변화를 그린 노래다. 정치와 경제 정책 실패는 사람만 괴롭힌 것이 아니라 이처럼 고향도 철저히 파괴했다고 보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망과 고통을 다룬, 얼핏 보면 ‘피곤한’ 작품이지만, 이 음반은 아주 잘 먹혀들어갔다. 먹혀들어간 대상은 당시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였다. 젊어서 반전을 외치고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던 그 ‘60년대의 주인공들’은 지금은 나이가 들어 기대의 좌절과 가치의 상실을 절감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메시지는 바로 이같은 베이비붐 세대의 공통정서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월드 와이드 히트였다. 미국에서만 1위가 아니라 딴 나라에서도 < 미국에서 태어나 >음반 열풍이 일어나 영국, 서독, 네덜란드 등에서도 차트 정상을 석권했다. 이 앨범에서는 무려 다섯 곡이 싱글 차트 10위권에 진입했고 80년대 말까지 천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처절하리만큼 비판적인 스프링스틴의 시각이 엉뚱하게 ‘신애국주의’의 물결을 야기시킨 촉매제가 된 것이었다. 노래 제목이 그래서이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나’는 마치 팝송 애국가라도 된 듯 애국심 고취용 노래로 널리 불러졌으며 그의 논조도 단단히 왜곡되어 ‘미국은 지금 고통스런 나라’가 아니라 ‘미국은 지금 좋은 나라’로 받아들여졌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졸지에 ‘우익의 우상’이 돼버렸다. “월남전, 워터게이트 사건, 이란의 인질 사태 등 미국은 우리 민중을 제멋대로 이용하고 조종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그리 됐으니 참 딱한 노릇이었다. 보수적인 글을 쓰기로 유명한 컬럼니스트인 조지 윌이 워싱턴시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84년 9월 스프링스틴의 출신주인 뉴 저지에서 선거 유세를 하면서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낼 목적으로 그의 인기를 ‘허락없이’ 이용했다. “미국의 미래는 무수한 꿈에 기초합니다. 그 미래는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존경하는 한 사람의 노래 속에 담겨 있는 희망의 메시지에 기초합니다. 그 사람은 뉴 저지가 낳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입니다.” 희망의 메시지라니. 실상 절망의 메시지인데 어쩜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브루스는 레이건이 그와 같은 코멘트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심야의 불한당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즉각 반격에 나섰다. 유세 발언이 있고 난 다음달인 10월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레이건 대통령의 TV광고를 봐서 알고 있겠지만 그에 따르면 미국은 아침이다. 그러나 피츠버그는 아침이 아니다. 뉴욕의 125번가 상공도 아침이 아니다. 되레 심야다. 사악한 달이 뜨고 이는 심야다”라며 그다운 맹공을 가했다. 87년에 출판된 스프링스틴의 전기 『영광의 시절』(Glory Days, 그의 히트곡 제목을 땄다)을 집필한 유명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는 거기서 “스프링스틴은 미국의 거대 양당에 속해 있지 않은 점만을 보더라도 극좌파적인 인물”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마시 씨는 자신이 자유민주주의 및 정당정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자신은 ‘체제 바깥에 위치하여 무언가 하고 있는 인물’을 좋아한다면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바로 그런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마시 씨도 인정하듯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이념적인 가수는 결코 아니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이다. 또한 그가 미국의 절망을 노래한다고 해서 애국심이 전혀 없는 그런 반미(反美)주의자는 아니다. “내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미국은 배포가 큰 사랑이 가득찬 나라”라는 그의 공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오히려 그의 절망과 좌절에 대한 노래는 너무 애국적이기에 나올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은 분명 유효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한계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 그룹 듀란듀란의 멤버인 존 테일러는 “스프링스틴은 너무 미국적이어서 선은 넘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난 늘 그에게 실망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스프링스틴은 몇 안되는 언행(言行)일치의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노래뿐 아니라 반핵 운동의 일선에 나섰으며 특히 집없는 사람들, 파업 노동자들, 고통받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에게 번 돈을 희사하는 등 적극적인 자선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어떤 록 평론가는 “팬들이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반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는 성인에라도 추대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돈 욕심이 없어 보인다. 85년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 리 아이아코가가 1천2백만 달러(약 95억원)을 줄 테니 자사 광고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록 뮤직의 신화에 허덕이지 않아 여느 록 가수와 달리 마약은 물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였다. 그는 < 미국에서 태어나 >열풍이 한창이던 85년 미녀 수퍼모델 줄리안 필립스와 결혼했다. 예쁜 처녀를 아내로 삼는 게 뭐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 못가서 둘은 이혼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90년에는 자신이 이끄는 E 스트리트 밴드에서 백업 보컬하는 패티 시알파와 염문에 휩사이더니 결국 애까지 낳았다. 뒤에는 패티 시알파가 “애를 낳아주기까지 했는데 그가 정식 결혼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청빈해 보이고, 스캔들 하나 없는 깨끗한 인물로 보이던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행각이었다. 보스 말고 또 하나 그의 별명이기도 한 ‘미스터 USA’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처럼 ’제가(齊家)‘에 문제점을 노출해서인지 ’치국평천하‘도 차질이 생겨 < 미국에서 태어나 > 다음에 나온 89년 음반 < 사랑의 터널(Tunnel of Love) >은 예전의 반응에 전혀 미치지를 못했다. 92년에 발표한 < 인간적 터치(Human Touch) >와 < 운좋은 마을(Lucky Town) >은 동시에 2장의 음반 발매라는 화제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부진, 그의 퇴조를 실감하게 했다. 스프링스틴은 49년 뉴 저지주의 프리홀드에서 택시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 대해 혐오감을 가졌으며 따라서 외로운 시절을 보냈으며, 열세 살 때즘 본인의 고백대로 기타와 음악에 ‘구원’을 받는다. 그의 음악 생활은 좀더 좋은 직업을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에 빗나간 것이어서 때로 부자간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일했지만 대가는 없었고 고통만이 있었죠. 이제 그는 이 텅빈 방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원망할 것을 찾아요.’ ‘아담이 카인을 길렀어요(Adam raised a Cain)’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록 가수가 되기로 한 그는 대학을 포기한 채 여러 그룹을 전전하면서 실력을 함양한 노력으로 카인의 후예에서 미국의 위대한 록큰롤러가 됐다. 그는 음반 작업에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특히 ‘록 뮤직의 현장성’을 강조, 공연 중심의 활동을 펼치며 또 ‘관객을 공동의 경험 수준으로 이끌 줄 아는 유일한 가수’라는 찬사가 말해주듯 혼신의 정열로 콘서트에 임한다.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그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록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다. 덧붙여 음반 활동을 해온 20년간 한번도 일탈 내지 변절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앞으로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가수이다.
노래 : J.D. Souther (John David Souther)
‘과연 미국 대중음악의 힘과 독점적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이며 선수 층(?)은 얼마나 두터운가?’ 매년 2월이 되면 떠오르게 되는 우문(愚問)들이지만 그래미상은 이 물음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2002년 올해에도 이름도 모르는 인디아 아리(India Arie)라는 신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주요 4개 부문을 포함, 모두 7개 부문의 후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라스(NARAS)... ‘과연 미국 대중음악의 힘과 독점적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이며 선수 층(?)은 얼마나 두터운가?’ 매년 2월이 되면 떠오르게 되는 우문(愚問)들이지만 그래미상은 이 물음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2002년 올해에도 이름도 모르는 인디아 아리(India Arie)라는 신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주요 4개 부문을 포함, 모두 7개 부문의 후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라스(NARAS) 위원들은 그 어리석은 질문에 친절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는다. 북미 대륙에서조차 지지 기반이 미약한 아티스트일지라도 일단 실력과 가능성이 검증만 되면 미국의 음악관계자들은 그 음지의 무명을 양지로 초대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그들에 대한 커트라인도 없다. 지금 막 데뷔한 신인일 수도 있고, 경력은 오래 되었으되 불운으로 빛을 보지 못한 늦깎이 싱어가 대상이 될 수도 있다. 1989년 32회 그래미상 시상식장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보니 레이트(Bonnie Raitt)도 ‘20년 무명’의 긴 잠복기를 깨고 수면 위로 급부상해 비로소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한 대기만성형 블루스 여가수다. 그녀가 불혹의 나이에 < Nick Of Time >으로 그래미 트로피를 품에 안지 못했다면 현재와 같은 대가로서의 명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음반은 당시 ‘그래미효과’ 덕분에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올라 레이트는 음악적 인정과 더불어 상업적 성공이란 전리품도 얻었다. 보니 레이트는 1949년 11월 8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 195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였던 존 레이트(John Raitt)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유전적 형질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내비쳐 12살에 기타의 매력에 도취되었고, 청소년 시절부터는 블루스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델타 블루스, 미시시피 블루스, 시카고 블루스 등 큰 땅덩어리만큼 그 특유의 지방색이 무지개처럼 각양각색인 미국 전역의 블루스를 들으며 감성을 확대시켜 나간 그녀는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 하울링 울프(Howlin’ Wolf)와 여성 블루스 싱어 시피 월레스(Sippie Wallace) 등과 무대에 함께 서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젊은 그녀의 잠재력과 시장성을 발견한 워너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71년에 처녀작 < Bonnie Raitt >를 세상에 띄워 보냈지만 대중들로부터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생의 슬픔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구슬픈 블루스를 소화하기엔 너무나 평탄한 삶을 영위한 그녀와 블루스는 어쩌면 물과 기름처럼 융화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평자들은 젊고 여린 외모의 백인 여자가 직접 기타를 연주하면서 블루스를 구사한다는 사실, 그 희소가치에 주목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보니 레이트에 대한 평단의 호의는 그녀가 슈퍼스타로 등극한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1970년대 동안 거의 매년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지만 월남전의 패배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적인 위기를 잊기 위해 단순한 팝, 디스코 아니면 헤비메탈에 빠진 미국 대중들은 그녀의 청승맞은(?) 블루스를 외면했다. 1970년대에 나온 7장의 앨범 모두가 공개되는 족족 실패했다. ‘평단의 찬사’와 ‘대중의 냉담’이란 대치전선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1990년 < Nick Of Times >으로 대중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기 전, 차트에 명함을 내민 곡이라곤 ‘Runaway(57위)’와 ‘You’re gonna get what’s coming(73위)’ 뿐이다. 그나마 앞 곡은 1950년대 로큰롤 싱어 델 섀넌(Del Shannon)의 원곡이며 후자는 ‘Bad case of loving you’의 주인공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가 작곡해준 것으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였다. 특히 ‘Runaway’가 1977년 본고장 라디오에서 환영을 받으면서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것도 잠시, 1980년대 신시사이저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보니 레이트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우울했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서 발표한 < Nick Of Time >은 레이트의 음악 인생을 180도 바꾼 역작이었다. 팝 록 밴드 워스 낫 워스(Was Not Was)의 멤버인 돈 워스(Don Was)와 본인이 공동으로 프로듀스한 이 작품으로 그녀는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 ‘여성 팝 가수’, ‘여성 록 가수’ 부문 트로피를 품에 안았고, 그녀의 음악적 지주인 블루스의 거장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와 함께 ‘I’m in the mood’를 불러 ‘정통 블루스’ 부문도 수상, 총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또한 오랜 무명과 알코올중독을 극복했다는 점이 대중의 온정을 자극하면서 순식간에 앨범은 500만장이 팔려나갔다. 앨범의 광채는 싱글 ‘Have a heart(49위)’와 ‘Nick of time(92위)’의 저조한 성적과 큰 대조를 이뤘다. 1991년에 공개된 < Luck Of The Draw >에 와선 앨범 아닌 싱글로도 시장을 관통하는데 성공한다. 그녀에게 최초 톱10이란 영광을 안겨준 ‘Something to talk about(5위)’와 음악 전문지 < Mojo > 선정 가장 위대한 노래 100곡 중 당당 8위를 차지한 발라드 명곡 ‘I can’t make you love me(18위)’, 업 템포의 ‘Not the only one(34위)’가 연이어 차트를 누볐다. 앨범 판매량은 자그마치 700만장. 이 음반으로 그녀는 또 다시 ‘록 보컬’, ‘팝 보컬’, ‘록 보컬 그룹’(델버트 맥클린튼과 함께 부른 ‘Good man, Good woman으로 수상)의 3개 부문의 그래미 트로피를 수상했다. 1994년의 CD < Longing In Their Hearts >에서도 ‘Love sneakin’ up on you(19위)’를 배출했고 이 앨범은 ‘그래미 단골’임을 증거하면서 ‘팝 앨범’ 상을 수상했다. 다시 1996년에는 지미 본(Jimmie Vaughan),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버디 가이(Buddy Guy),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 비 비 킹(B. B. King), 닥터 존(Dr. John), 아트 네빌(Art Neville) 같은 대가들과 함께 연주한 ‘SRV Shuffle’로 ‘록 연주’ 부문을 수상했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듯 지난 20여년 동안 고대했던 그래미 트로피를 6, 7년 만에 집중해 싹쓸이한 것이다. 이제 어떤 누구도 당대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블루스의 명인으로 보니 레이트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본고장에서는 이처럼 화려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불우하다. 가장 미국적인 컨트리, 포크, 블루스의 감성을 아우른 음악이 대부분 10대와 20대가 팝 음악 수용연령층인 국내시장과 친화되지 못한 탓이다. 1995년에 개봉된 영화 < 보이스 온 더 사이드 >에 수록된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You got it(33위)’을 커버한 것이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보니 레이트의 곡으로 남아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노래 : Elvis Costello (엘비스 코스텔로)
변화무쌍한 음악은 절대로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 파일이 그렇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소리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했고, 해마다 허물을 벗었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며, 차려진 밥상을 거부했다. 항상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꾸부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리더로 브리티시 펑크... 변화무쌍한 음악은 절대로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 파일이 그렇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소리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했고, 해마다 허물을 벗었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며, 차려진 밥상을 거부했다. 항상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꾸부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리더로 브리티시 펑크 록을 이끌었고((1997년)), 신나는 레게 리듬과 애조 띤 켈틱 선율에 올라타며 제3세계 음악에 흠뻑 젖었다(스페셜스(Specials)의 (1978년)과 포구스(The Pogues)의 (1985년). 그리고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을 하얗게 바꾸었고((1980년)), 내시빌로 들어가 컨트리를 끄집어내기도 했다((1981년). 또한 그는 챔버 밴드 브로드스키 쿼텟(Brodsky Quartet) 등과 클래식에도 발을 담갔고, 위대한 팝의 전설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크루너(Crooner)로 나서기도 했다. 코스텔로의 이런 종횡무진 행보는 단순히 변신을 위한 인위적인 선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부한 음악 공력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이끌림이다. 아마 지금도 그의 곳간에는 평생 일용하고도 남을 음악 양식이 가득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1954년 8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열 다섯 살 무렵부터 기타를 치고 노래를 작곡하며 뮤지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그는 낮에는 런던의 한 공장에서 컴퓨터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갔고, 밤에는 클럽에서 연주하며 음악 내공을 쌓아갔다. 아티스트로써 첫 이름을 등록한 결과물은 1977년 싱글 ’Less than zero’. 이 노래는 파시스트 단체의 리더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코스텔로의 의식 세계가 일반적인 곧은 길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첫 싱글을 발표한 후 그는 5년 동안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키보디스트 스티브 니브(Steve Nieve), 베이시스트 브루스 토마스(Bruce Thomas), 그리고 드러머 피트 토마스(Pete Thomas) 등을 규합하여 자신의 백밴드 어트랙션스(The Attractions)를 결성하고 프로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후 어트랙션스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우정 - 불화 - 재결합 과정 등을 거치며 오랜 기간 함께 한다. 코스텔로는 영국의 퍼브 록(Pun Rock)과 펑크 록을 완벽하게 구현한 전형적인 ’브리티시 로큰롤’ 음반인 1977년 데뷔작 (영국 14위, 미국 32위)와 1978년 2집 (영국 4위, 미국 30위) 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일약 대영제국 최고의 로커로 떠올랐다. 이어 내놓은 1979년의 (영국 2위, 미국 10위), 1980년의 (영국 2위, 미국 11위), 1981년의 (영국 9위, 미국 28위), 1982년의 (영국 6위, 미국 30위) 등도 영국 록 히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 음반으로 대접받을 정도로 엘비스 코스텔로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궈놓은 음악 스케이프는 소리 하나 하나가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Watching the detectives’(영국 15위), ’Pump it up’(영국 24위), ’Radio radio’(영국 29위), ’Oliver’s army’(영국 2위), ’Accidents will happen’(영국 28위), ’I Can’t Stand Up For Falling Down’(영국 4위) 등의 히트곡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앨범들의 수록곡이 스무 트랙을 넘으면서도 곡 당 타임이 채 3분을 넘지 않는 전형적인 로큰롤과 펑크의 형식미를 취하고 있지만 깊이가 있고 다양한 움직임과 명암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코스텔로만이 할 수 있는 비법일 것이다. 코스텔로의 이런 월드와이드 동선이 가능하게끔 된 데는 뒤에서 막후 조정 역할을 한 닉 로우(Nick Lowe)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상기한 작품들 중에서 를 제외하고는 모든 음반들의 프로듀싱을 도맡음으로써 코스텔로와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이후에도 닉 로우는 코스텔로 대부분의 앨범들을 프로듀스하며 환상적인 사운드를 연출해냈다. 코스텔로의 전성시대가 펑크와 뉴 웨이브의 정점기였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시기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현재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해오며 별다른 기복 없이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와 블루스뿐만 아니라 컨트리, 아이리시 음악 등 다양한 음악적 뿌리 등을 탐구한 1986년의 (영국 11위, 미국 39위), 하드록의 강렬함을 드러낸 같은 해의 (영국 16위, 미국 84위) 등이 1980년대 후반기를 빛낸 대표적인 앨범들이다. 1990년대 초반에도 의욕적으로 음악 작업을 했지만, 눈에 띄는 평가를 받지 못한 코스텔로는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전성기 때 못지 않은 인기를 회복했다. 그는 1998년 전설적인 작곡가 버트 바카라크와 함께 한 음반 (영국 32위, 미국 78위)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1년 뒤인 1999년에는 영화 [노팅 힐]의 주제가 ’She’를 부르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끌어내는 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그리고 올해에는 17번째 스튜디오 앨범 을 발표하며 음악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드러냈다.
‘음악이 없어진 후에 형벌이 무겁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거짓이 성하게 되었다. 음악을 만들지 않으면 천지의 화기로움을 이룰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산 정약용이 설파한 ‘음악론’이다. 경제위기와 IMF 한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되새길 만한 말이다. 절약과 긴축의 분위기 때문에 ‘없어도 당장은 ... ‘음악이 없어진 후에 형벌이 무겁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음악이 없어진 후에 거짓이 성하게 되었다. 음악을 만들지 않으면 천지의 화기로움을 이룰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산 정약용이 설파한 ‘음악론’이다. 경제위기와 IMF 한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되새길 만한 말이다. 절약과 긴축의 분위기 때문에 ‘없어도 당장은 괜찮을 듯한’ 문화의 분야 전반이 맨 먼저 희생을 당하고 있다. 이 판국에 누가 한가로이 음악을 듣고 있을 터인가. 일리는 있지만 지나친 음악의 위축은 안될 말이다. 요즘의 상황에 들을 만한 팝송 음반을 하나 소개한다. 독일 태생의 미국 가수 잭슨 브라운의 히트곡 모음집 < The Best Of Jackson Browne >이다. 그는 1978년에 발표된 메들리 곡 ‘로드 아웃/스테이(Load-out/Stay)’로 우리의 올드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차분하면서도 깊은 맛을 전달해주는 이 곡은 라이브의 생동감과 함께 진한 피아노 연주, 데이비드 린들리의 가성 보컬로 듣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 노래는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에 더욱 헌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노래가 지닌 매력은 단연 드높은 서정성이다. 이글스,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 JD 사우더 등 미국 서부지역의 낭만적인 컨트리 록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의 음악은 왠지 쾌활함보다는 우울에 가깝다. 실제로 77년 작품 ‘위선자(Pretender)’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감과 고뇌가 짙게 깔려있다. 또한 노래는 당시 디스코의 소란속에서 천연히 피어났다는 점이다. 비지스의 ‘토요일밤의 열기’가 폭발하고 빌리지 피플이 ‘YMCA’로 목청을 높일 때 그 사이를 비집고 차분함을 바라는 수요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보기 드문 ‘서정성의 질주’는 80년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인기 절정기도 없었지만 슬럼프도 겪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노래 ‘누군가의 연인(Somebody`s baby)’, ‘부드러운 밤(Tender is the night)’은 지치고 흔들리는 청취자의 마음을 쓸어주었다. 이 베스트 앨범은 대표곡을 완벽하게 엮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72년부터 지금까지 주요 히트곡을 총망라하고 있다. ‘반역자 예수(Rebel Jesus)’, ‘다음의 목소리(Next voice you hear)’ 등 신곡 2곡도 실었다. 특히 ‘다음의 목소리’는 이 베스트 모음집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내용은 변화의 암시가 아니라 ‘다음의 목소리도 변함이 없다’는 그의 음악신조를 담아 인상적이다. 잭슨 브라운의 진가가 여기에 있다.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반핵운동에 앞장 서오고 있는 ‘행동파’ 음악인이기도 하다. 그의 서정적인 음악이 결코 상업적 계산의 방편이 아님을 일러주는 단서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들은 감상자를 위무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구두끈을 매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어려운 시점에 더 잘 어울릴 것으로 본다. 경제위기와 문화위축의 상황을 맞아 한편으로 그동안 외면했던 스타일의 음악이 자리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연주 : T Bone Burnett (티 본 버넷,Joseph Henry "T Bone" Burnett III)

음반 속으로

ArizonaPublicMedia
RoyOrbisonV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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