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동안에,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언제 마칠지 모르는 이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동안에,
사랑하는 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다독여주자.
우리 서로 언제 헤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는 간호 현장의 체험을 독특한 정서와 통찰력으로 엮은 글입니다. 곁에서 이야기하듯 소곤소곤 풀어내는 언어의 매력이 놀랍습니다. 소박함과 세련미로 글 속 정경을 그림처럼 묘사하여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 과실수에서 딴 잘 익은 과일처럼 깊은 맛이 있고, 아주 오래된 포도주처럼 향기롭습니다. 수술방 회복실 Full Time 간호사로 on-call까지 하는 와중에 부단히 글을 써서 힐링 에세이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를 펴내는 하정아 수필가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냅니다.
하정아 간호사를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남가주한인간호사협회 회장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여 간호사 면허를 취득한 회원이었는데 삶의 깊이가 남달랐습니다. 맑은 영성과 담백한 인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글을 읽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글이 많은 분들에게 읽히기를, 그래서 그들의 마음 한 자락도 저처럼 따뜻해지기를 기원합니다.
― 캐서린 영초 김 (전 남가주한인간호사협회 회장)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는 좋은 에세이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격조 높은 제목과 ‘은혜’에 바탕을 둔 이미지는 병동을 부활의 공간으로 바꾼다. 간호라는 제재로써 생명의 서사를 풀어내는 작가의 삶은 원시 자연까지 뻗친다. 무엇보다 집필자 하정아와 인간 하정아가 일체가 된 존재성은 “우리는 누구이어야 하는가”라는 간호사들의 질문에 깊이 있는 해답을 준다. 이런 조건들은 간호 에세이 전범의 조건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작가의 감성적인 시선은 인간의 상처와 고통과 좌절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그 필체는 우아하고 고결하여 차라리 아플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삶이란 죽음에 저항하는 것, 생명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그 영성의 오디세이를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에서 지켜볼 수 있다.
― 박양근 (에세이스트, 문학평론가)
우리 모두는 언젠가 환자였고 언젠가 또다시 환자가 될 것이다. 간호사도 예외가 아니다. 아픈 나를 돌보아줄 간호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원할까. 나 자신조차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내면의 상처와 갈망을 읽어내어 주는 심안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우리 모두가 그런 간호사 정신을 발휘하여 서로를 감싸고 보듬어준다면 지구촌은 좀 더 따뜻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동료 간호사들에게, 건강한 사람들에게, 몸과 맘이 아픈 사람들에게 우리 함께 걷자고 손을 내미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는 글, 생명이 되는 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힐링 간호 에세이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를 펴낸다.
― 저자의 말 중에서
하정아의 회복실 오디세이, 생명 사랑 영성의 하모니
하정아는 간호사 이전에 에세이스트이다. 이민 온 후 사막의 도시 LA에 살면서 삼십 년 넘게 오직 수필만을 쓴다. 「나는 이렇게 간호사가 되었다」에서 밝힌 것처럼 미국 간호사 면허를 획득하고 14년째 종합병원에서 근무한다. 한글과 영어로 칼럼을 쓰고 수필을 가르치는 이중 언어 작가이기도 하다. 사회적 신분보다 그녀의 신원을 더 잘 그려내는 것은 남달리 큰손과 깊은 눈매와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귀와 몇 밤을 지새워도 지치지 않은 정신력이다. 이런 자질도 겸손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더욱 품격을 높인다. 살기 위해 글을 쓰는 그녀는 환자에게 ‘살아라’하고 외치지만 진즉 자신은 외로움을 운명처럼 즐긴다.
하정아를 지켜볼수록 경탄스러운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자이고 간호사이고 작가이기에 앞서 존재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육신이 사라지더라도 남아 있을 투명한 실체. 그것은 ‘천상 작가’와 ‘천상 간호사’의 합일이다. 그 존재성은 사랑과 생명과 영성이라는 본질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부동의 인내심과 해박한 독서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풀어낸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는 어둡고 차갑게 기술되기 쉬운 병동 이야기를 우아함 고결함 순결함을 지닌 서사로 끌려 올렸다.
하정아의 간호 에세이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는 쓰인 것이 아니라 탄생되었다. 8부로 구성된 54편의 에세이는 사랑과 생명과 영성의 조화를 보여준다. 1부는 생명예찬을, 2부는 원시적 자연과의 교감을, 3부는 간호사의 적격성을, 4부는 병동의 웃음과 눈물을, 5부는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사례를, 6부는 작가의 내적 고백을, 7부는 명상의 울림을, 그리고 8부는 자신에게 멘토가 된 간호사와 닥터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작품 하나하나는 간호사 생활에 대한 영적 고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유하면 바닷가 일몰은 태양이 바다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양에 안기는 변신과 같다고나 할까.
세계문학사에서 인간의 삶을 모험 양식으로 담아낸 첫 작품은 호머의 『오디세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전쟁과 사랑, 항해와 귀환을 남성중심의 화술로 엮어내었다. 하정아의 간호 에세이도 서사성을 갖추고 있다. 흰빛 회복실은 지중해에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공간으로서 영적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14년을 간호사로 보낸 회복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공간이다. 나아가 진실하고 충격적인 갖가지 사건이 펼쳐지는 심리적 배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환자들은 삶의 전쟁터에서 상처받은 병사들이며 수술실 의사들은 죽음의 신과 결투를 벌이는 사랑의 전사들로 등장한다. 알코올 중독자로부터 휴먼 닥터까지, 백인 인텔리부터 홈리스 미혼모까지 모두 영혼과 육신의 투쟁에 휩쓸리고 있다. 호머의 작품이 죽음을 그린다면 하정아의 오디세이는 죽음을 벗어나는 부활을 주로 묘사한다. 기록자이자 화자로서 작가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고 듣고 말하면서 현대사회의 고독과 내적 갈등을 함께 체험한다. 현대적 스토리텔링을 완성했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에세이는 생명과 사랑을 중심 테제로 삼고 있다. 간호사로서는 인간의 육체를, 작가로서는 인간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으므로 파란만장한 인간사는 부드럽고 생생한 육성으로 전달되고 ‘살아라 웃어라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구현된다. 그 생명의 종을 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독자라면 그녀에게 생명 사랑의 사제라는 이름을 기꺼이 붙여줄 것이다.
회복실은 수술환자가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는 곳이다.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처럼 환자가 생명을 되찾을 때 그를 처음 맞이해주는 사람이 간호사이다. 그들의 마마와 같다. 더군다나 수술실은 긴장, 죽음, 위험이 도사린 곳이지만 회복실은 생명 사랑 미래 희망 용기라는 언어들이 풍성한 곳이 아닌가. 이 모든 요소를 하정아가 주관하고 있다.
서사는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은혜로 그려질 때 진정한 인문학적 위상을 갖춘다. 이 구조를 폐부로 체득한 작가는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라는 영감이 넘치는 화술을 펼쳐낸다. 병실에서 피어나는 삶의 꽃, 작품집도 모든 환자를 위한 진실의 대화록으로서 독자를 만난다.
하정아는 간호사를 전인적 인격체로 표현한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와 간호사뿐이며 간호사가 세 명만 있으면 세상을 움직인다”라고까지 말한다. 여러 작품 중에서 「간호사의 조건」은 간호사란 자기관리를 통해 소위 ‘-3D 직종’을 ‘+3D 직분’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치를 밝힌 대표 에세이이다.
간호사는 여러 자질이 필요하다. 문제해결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 이성적 사고로 판단하되 큰 그림 안에 적용하는 능력, 효과적인 소통 능력, 현재에 집중하는 능력은 필수다. 사명감, 친절, 여유, 온유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중 간호 현장에서 자기관리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장치는 자제력이다.
― 「간호사의 조건」 일부
하정아가 삶의 둥지를 튼 로스 앤젤레스가 천사의 도시라는 어원을 갖는 것도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갖는다. 각종 타락증후군을 앓는 일명 ‘로스트 앤젤레스’가 되어버린 도시를 다시 부활시키는 주역이 간호사라고 말한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덕분에 많은 간호사들이 그레이스 자질을 갖추고 실천한다면 밀턴의 『복락원』처럼 ‘리게인드 앤젤레스 Regained Angeles’가 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제목이 그 취지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그레이스라는 단어가 지닌 우리말 뜻은 우아, 은혜, 은총, 미덕, 매력 등이지만 병원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는 출퇴근 때 적용하는 유예 시간을 지칭한다. 피어리어드에는 시작과 끝은 있으나 미리 정해진 기간은 없다. 30여 년도, 단 5분도 그것이 될 수 있다. 작가는 이 체험을 여러 경우에 적용한다. 버렸던 반쪽 장갑을 되찾기 위해 돌아선 5분, 어머니가 아이들을 부를 때 헤아리지 않는 ‘열’이라는 숫자, 출퇴근 펀치가 허락해주는 6분, 코드블루 발동으로 되찾는 생명…… 그녀는 이런 사례들을 삶에 접목시켜 신이 내린 은혜의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수술에서 회복한 환자가 새롭게 자각하는 여생이 그것이고 모든 삶 또한 여생이다. 그러니 모두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아한 여생’을 수호해야 한다.
우리는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를 산다. 여생을 산다. 여생, 얼마나 달콤하고 눈물겨운가. 살아 있는 한 사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 신나게 살아야 한다. 그 유예기간이 종을 칠 때까지, 마지막 숨을 맞이할 때까지, 살아서 살아야 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때까지, 죽음이 두려워할 만큼,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일부
삶에 대한 절대 개념이 구현되는 곳이 회복실이고 회복실은 삶에 대한 불꽃을 피우는 곳이다. 죽음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삶은 죽음에 대한 저항 자체이다. 하정아는 그 상관성을 진실이라고 천명한다. 생명과 사랑에 진실한 것, 그 진실을 영성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 그 생명의 등대지기가 간호사라고 믿는다.
하정아의 생명의식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생명이 감동이다”, “지금 살아 있어서 고마운 것이다”, “곡선은 생명이고 직선은 죽음이다”, “아침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시간이다”, “인생이란 통증을 잠시 잊고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등의 어구는 생명의식을 엮어내는 언어망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무지가 때로는 인간의 삶을 더 아름답고 더 은혜롭게 만든다고 하정아는 말한다. 이러한 긍정의 담론들이 모인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는 간호 명상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하정아의 생명주의는 범애론에 연결된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나이팅게일의 선서를 한 의료진들은 각종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의 생명을 구하려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사랑은 고귀하고 신성하다. 경기장과 달리 수술대에서는 오직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지므로 ‘다음에’라는 유예는 불가하다. 그 과정을 간호사로서 목격하고 작가로서 글을 쓴다. 그녀의 모든 세포는 순간순간의 상황에 예민하고 따뜻하게 반응한다. 그녀의 간호 아래 놓이면 누구든 그 섬세한 인간애에 감화될 수밖에 없다. ‘천상 간호사’, 이 말은 체질적으로 간호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대리인으로서 천상 간호사라고 풀이하고 싶어진다.
그녀의 사랑은 분명 현실적이면서 신성하기까지 하다. 언제 스러질지 모르므로 “서로 잘 대해줘야 한다”고 조언하고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모두 연약하므로 공평하게 대해주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눈물보다 아름다운” 부탁에 익숙해질 때면 그녀의 사랑이 경배의 차원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십여 년 전, 간호사 배지를 달고 병동에 처음 섰을 때, 나는 세 가지 간호철학을 실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첫째, 환자의 몸에 손을 댈 때마다 하늘을 만진다는 심정으로 대한다. 둘째,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환자들의 인격을 존중한다. 셋째, 간호사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는다. 오! 순수했던 과거여, 스스로 정한 약속을 얼마나 이행했을까.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 「역지사지」 일부
하정아가 실천하는 ‘살고 사랑하라’의 명제는 신앙고백과 같다.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숱한 선지자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도 이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랑을 먹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 다수의 작품에서 감성적인 문장으로 소개된다. 오하카 원주민을 대했을 때는 원초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숨기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만든다는 마음으로 아프리카의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다. 소녀가 업은 아기를 안아주지 못한 참회를 통곡하며 서로의 아픈 상처를 나누는 「두 여자의 대화」는 힐링의 향기를 퍼뜨린다.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하루씩만 사는 법”을 배우라는 잔잔한 목소리는 “내면의 음성”을 들으라는 하정아의 눈빛과 어울린다. 이런 풍경과 인상은 “인생은 사랑을 저축하는 시간”이라는 하정아의 사랑 철학을 완성해나간다.
하정아 특유의 사랑론을 정립시키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인간을 존재로서 대하는 그녀의 영성이다. 영적으로 대상과 교감할 수 있는 힘으로 하정아는 신과 대화하듯 환자의 몸을 대한다. 그 영성의 흐름은 그녀가 앞서 발표한 여섯 권의 수필집과 에세이에서 줄곧 이어오고 있다.
회복실은 그녀의 서재이고 집필실이다. 대부분의 하루가 여기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환자복만 걸친 나신의 환자들과 다른 데서는 불가능한 교감을 나눈다.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작가는 생명의 존귀성과 일상의 엄숙함을 새삼 일깨운다.
그녀의 영성과 문학적 감수성은 해외의료봉사를 통해 회복된다. 원시림과 원주민들을 만나 힐링과 러빙과 리빙의 에너지를 정화시키면서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한다. 그녀에게 원시 자연은 영적 회복실이므로 하정아의 영성은 원시적 정기에서 발현한다는 주술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가 문명으로부터 원시로, 물질로부터 정신으로, 인성에서 영성으로 삼투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미 새’ 하정아가 관리하는 회복실은 ‘사랑 생명 영성’이 서로 상생을 발휘하는 소우주이다. 그 작은 시공에서 진실의 목소리로 영적 서사를 풀어내다니. 동서 명상가들이 나름의 영성을 따르며 사유하고 글을 썼듯이 하정아도 자신의 고유한 감성과 지성을 영성으로 끌어올린 에세이를 완성하였다. 이런 성과는 욕심을 내려놓고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뜨거운 심장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 덕분일 것이다. 「작가의 말」은 그 깨침을 “배운다, 명상한다, 다짐한다, 하고 싶다”는 네 개의 행위 동사로 완결한다.
은혜로운 여생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생활이 서사성을 지니고 상처를 주는 감정을 서정미로 순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절망의 막막함조차 사랑의 노래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 점에서 하정아의 간호 에세이는 영성의 방주를 타고 진실을 향해 항해하는 영혼의 오디세이라고 하겠다. 그 항해를 위해 하정아는 오늘도 생명이 충만한 아침 기운을 온몸에 안고 수술분과 회복실 문을 연다.
― 박양근 (에세이스트, 문학평론가)
병동에서 일할 때마다 희로애락의 진정한 얼굴을 만난다.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과 벅찬 감동,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절망과 절체절명의 슬픔을 맛본다. 슬플 때는 모든 기가 막혀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기쁠 때는 인간의 존엄성과 숭고한 정신에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 환자들의 눈물과 웃음이 내 것은 아니지만 그 상황이 매우 생생해서 나도 모르게 몰입된다. 팽창된 세포 하나하나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 메시지로 다가온다. 육신의 질고를 통해 얻은 성찰과 지혜가 보석만큼 찬란하다. 그 빛에 마음이 환해진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눈과 귀를 씻어주어 생명의 소중함과 순수한 가치를 보고 듣게 해준다.
현대 물질문명은 인간에게 냉정과 비정을 부추기지만 인간은 여전히 뜨거운 심장을 가진 존재다. 차디찬 몸에 따뜻한 담요 한 장 덮어주고, 얼굴을 흥건히 적시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 하나가 환자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한 배려가 간호사의 인생을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안다.
수술을 마친 환자가 내게 올 때마다 살짝 긴장한다. 환자들은 다 내 어린 자녀들이다. 잠에 취해 숨 쉬는 것조차 잊은 환자를 부드러운 음성과 터치로 깨울 때마다 모정을 느낀다. 환자가 두 눈을 뜨고 반짝이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방 안이 환하게 빛난다. 별다른 후유증 없이 생체리듬을 회복하고 자신의 병실로 돌아가는 환자를 배웅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몸과 맘이 잘 회복하여 일상에 복귀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된다. 아모르 리커버리 룸. 그렇다. 나는 아모르 리커버리 룸 마마다. 마마 버드다.
간호사가 된 지 14년째다. 간호 현장에서 겪은 체험과 깨달음이 내 정체성과 인생관을 정리 정돈시켜준다. 환자들이 내게 영감과 사색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준다. 인생의 멘토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눈 진실과 사랑의 이야기를 글로 엮어내고 풀어내는 기쁨이 크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