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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음악 (Andy Warhol and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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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앤디 워홀과 음악 (Andy Warhol and Music)

[ 2CD ]
Ryuichi Sakamoto 작곡/Nico, Blondie, Debbie Harry, Bob Dylan 노래 외 1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Music / Sony Masterworks | 2019년 10월 1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5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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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음악 (Andy Warhol and Music)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0월 11일
시간, 무게, 크기 6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FRIENDS OF THE 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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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2 [THE PLAYLIST OF THE 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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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River Deep Mountain High - Ike & Tina Turner 선택듣기
  • 02 Sunshine Superman - Donovan 선택듣기
  • 03 Take Good Care of My Baby - Bobby Vee 선택듣기
  • 04 Nowhere To Run (Single Version) - Martha & The Vandellas 선택듣기
  • 05 Shout (Parts 1 & 2) - The Isley Brothers 선택듣기
  • 06 I Saw Linda Yesterday - Dickey Lee 선택듣기
  • 07 Petrushka: Tableau IV - Fete populaire de la semaine grasse 선택듣기
  • 08 Mass in C Major, K.317 "Kronungsmesse": VI Sanctus - Mozart 선택듣기
  • 09 La Traviata, Act III: Addio del passato - Verdi 선택듣기
  • 10 Die Zauberflote, K. 620, Act II: Der Ho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 Mozart 선택듣기
  • 11 Quatuor pour la fin du Temps: V. Louange a l'eternite de Jesus - Messiaen 선택듣기

아티스트 소개 (19명)

작곡 : Ryuichi Sakamoto (사카모토 류이치,さかもとりゅういち,坂本 龍一)
음악가. 1952년 출생. 78년 [Thousand knives]로 데뷔. 같은 해 YMO에 참가. YMO 해산 후, 다수의 영화음악을 만들어 작곡가로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평가를 얻으며 늘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해 왔다. 1999년 제작의 오페라 [LIFE] 이후, 환경, 평화, 사회문제에 언급하는 일도 많아서, 9.11 동시 다발 테러를 계기로, 논고집 [비전非?]을 감수. 자연 에너지 이용... 음악가. 1952년 출생.
78년 [Thousand knives]로 데뷔. 같은 해 YMO에 참가. YMO 해산 후, 다수의 영화음악을 만들어 작곡가로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평가를 얻으며 늘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해 왔다. 1999년 제작의 오페라 [LIFE] 이후, 환경, 평화, 사회문제에 언급하는 일도 많아서, 9.11 동시 다발 테러를 계기로, 논고집 [비전非?]을 감수. 자연 에너지 이용 촉진을 제창하는 아티스트 단체 ‘artists’ power’를 창시했다. 2006년 여섯 지역의 핵연료 재처리설비 가동 반대를 표명하고 ‘stop-rokkasho.org’의 활동을 개시, 2007년 7월에는 유한책임 중간법인 ‘more trees’의 설립을 발표하고, 온난화 방지에 대한 계몽과 식수 사업 등 다기에 걸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06년 새로운 음악 커뮤니티의 창출을 목표로 ‘commmons’를 설립. 2009년에는 음악 활동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환경에 대한 배려에 힘써 온 것에 대해, UN 환경계획이 세계 환경의 날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ECHO Festival에서 ‘Echo Award’를 수상했고, 같은 해 7월에는 프랑스 문부성으로부터 예술문화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했다. 2010년, 문화청으로부터 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여 받는 등, 활동 전반에 있어서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1990년부터 미국, 뉴욕 주에 거주.
노래 : Nico (니코 (크리스타 패프겐),Christa Paffgen)
영화배우, 가수 영화배우, 가수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식의 팝 만들기’는 근래 당시 뉴 웨이브 음악계의 커다란 팽창을 가져왔다. 이들의 역사적인 시작은 1974년 뉴욕에서였다. 당시 유명 클럽 맥스 캔서스 시티(Max Cansas City)의 웨이트리스이자 플레이보이 모델이기도 했던 데비 해리(본명은 데보라 해리)는 윈드 인 더 윌로스(Wind in the Willows)라는 포크 록밴드에서 활동하던 중 스틸레토(The Stilettos) 출신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스타인(Chris Stein)을 만나면서 새로운 밴드를 만들 결심을 굳히게 된다. 베이스 프레드 스미스(Fred Smith)와 드럼 빌리 오코너(Billy O’Connor)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라인업을 완성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블론디라는 그룹 이름은 트럭운전사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데비를 향해 소리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75년은 유난히도 라인업의 변화가 많았다. 특히 프레드 스미스가 펑크 밴드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이적한 후엔 밴드가 와해될 위기에 처할 정도로 상당한 침체기를 맞는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드러머 클렘 버크(Clem Burke)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열정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고, 이후에 베이스 개리 발렌타인(Gary Valentine)과 키보드 지미 데스트리(Jimmy Destri)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블론디는 1976년 프라이비트(Private) 레코드사를 통해 첫 싱글 ‘X-offender’를 발표한 뒤 이어서 대망의 첫 앨범 < Blondie >를 발표한다. 그룹은 이기 팝과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의 오프닝에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소규모 투어를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프라이비트 레코드사에서 이적하여 메이저 레이블인 크리살리스(Chrysalis)와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게 된다. 베이스 나이겔 해리슨(Nigel Harrison)을 맞이하면서 6인조의 완전한 라인업으로 진화한 블론디는 1977년 두 번째 앨범 < Plastic Letters >를 발표, 첫 싱글 ‘Denis’ 와 ‘(I’m always touched by your) Presence, dear’가 연속으로 영국차트 Top10 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앞으로의 광채를 예고했다. 성공으로 인한 기나긴 투어와 빡빡한 일정으로 지친 가운데서도 1978년, 블론디는 그들의 역사적인 세 번째 앨범 < Parallel Lines >를 발표한다. 당시 디스코 붐을 타고 가장 잘 나가는 프로듀서의 한 사람이 된 마이크 채프먼(Mike Chapman)의 지휘와 함께 디스코 성향으로 거듭난 블론디의 변신은 미국 뉴욕 펑크의 메카인 시비지비(CBGB)클럽 출신의 펑크 록밴드치고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의외의 전향이었지만 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으로 화답, 앨범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의 싱글 ‘Hanging on the telephone’과 ‘Picture This’는 영국 차트에서 각각 5위, 12위를 차지하였고, 공전의 히트곡 ‘Heart Of Glass’는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대서양 양안 정복의 개가를 일궈냈다. 이 곡은 밴드가 CBGB 클럽활동 시절인 1975년에 데비와 크리스가 쓴 곡이었으나 시류에 맞게 디스코로 업데이트했다. 지미 데스트리는 “우린 우리 자신을 패러디했다”며 자신들의 전향(?)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팬들이 블론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 곡에서 비롯되었으며 록 분야의 사람들은 이 곡을 계기로 디스코열풍의 수용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히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 ‘Sunday girl’이 영국차트 1위, 그들이 CBGB 출신임을 고지한 펑크 계열의 곡 ‘One way or another’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데비 해리는 그 도발적 섹슈얼리티로 ‘제2의 마릴린 먼로’라는 수식어를 얻으면서 록 음악계의 넘버 원 ‘핀 업 걸’로 떠올랐다. 1979년에 발표한 4집 앨범 < Eat To The Beat >는 싱글 ‘Dreaming’ ‘Union City Blue’를 영국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았고 이어 ‘Atomic’이 세 번째로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등 성공행진은 계속되었다. 이후 영화 <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에 삽입된 곡 ‘Call me’가 다시 한번 영국과 미국 차트 정상을 호령하여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곧이어 발표한 다섯 번째 앨범 < Autoamerican >에서는 레게리듬을 도입한 차트1위 곡 ‘The tide is high’과 ‘Rapture’가 말해주듯 각각 레게 그리고 랩을 시도하여 밴드의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정상을 질주하던 블론디에게 갑자기 여러 불운이 겹치기 시작하였다. 기타리스트 프랭크 인팬트(Frank Infante)가 그룹내의 음악적인 위치에 불만을 품고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데비가 쿠 쿠(Koo Koo)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멤버들의 에너지 분산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발표된 6집 앨범 < The Hunter >는 ’Island of lost souls’가 영국차트 톱40 에 오르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결정적으로 그룹의 축인 크리스 스테인이 심각한 유전병에 걸리게 되면서 1982년에 결국 그룹은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데비는 필생의 연인인 크리스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보살피면서 그 사이 영화와 연극에 출연, 솔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앨범은 참패를 거듭했고 지미 데스트리는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병이 회복된 크리스는 뉴욕의 밴드들을 프로듀싱하며 음악활동을 재개했고 클렘 버크는 레코딩 작업을 꾸준히 하며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다. 근래 들어 평단에서 뉴 웨이브와 1980년대 팝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더불어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슬리퍼(Sleeper)의 ’Atomic’ 이 블론디 오리지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갔다(이 곡은 1998년 국내 모 음료CF에 삽입되기도 했다). 그룹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의 성숙에 맞춰 마침내 1998년 말 멤버들은 15년 만에 재결합을 선언하고 일곱 번째가 된 앨범 < No Exit >을 선보였고 첫 싱글 ’Maria’가 발표되자마자 영국차트 1위에 올라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금발의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데보라 해리는 영화배우로서보다는 70-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블론디" 리드 보컬로서 더 유명하다. 데보라는 생후 3개월에 입양되었고 해리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다. 1973년에 그녀는 후에 애인이 된 크리스 스타인을 만나는데, 그와 다음 해에 "블론디"를 결성하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가장 유명한 밴드 중의 하나가 된다. 블론디는 1983년에 해산하고,... 금발의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데보라 해리는 영화배우로서보다는 70-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블론디" 리드 보컬로서 더 유명하다. 데보라는 생후 3개월에 입양되었고 해리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다. 1973년에 그녀는 후에 애인이 된 크리스 스타인을 만나는데, 그와 다음 해에 "블론디"를 결성하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가장 유명한 밴드 중의 하나가 된다. 블론디는 1983년에 해산하고, 그 후 데보라는 5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고, 몇 편의 영화와 TV에 출현하였다. 또한 그녀는 AIDS자선 기금을 지원하기 위한 공연도 하였다. 1995년에는 재즈 패신저스와 엘비스 코스텔로와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 공연했으며, 리브 타일러와 <헤비스, Heavy>(95)라는 영화를, 아담 앤트와 <드랍 데드 록>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필모그래피]

어둠속의 외침(1990)|주연배우
전화로만 끝내 주세요(1991)|주연배우
나 없는 내 인생(2003)|주연배우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노래 : Donovan (도노반 ,Donovan Philips Leitch)
포크 락 보컬, 기타 포크 락 보컬, 기타
노래 : Isley Brothers (아이슬리 브라더스)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 흑인 소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힘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음악여정을 걸어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보컬 팀워크와 하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로맨틱한 R&B 발라드와 가스펠, 소울, 펑크(Funk)에 이르는 흑인 장르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데 가장 중심에 섰던 형제그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원래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드 싱어인 로날드 아이슬리(Ronald Isley)를 중심으로 루돌프(Rudolph), 오켈리(O’Kelly), 베론(Vernon)의 가스펠 쿼텟(quartet)으로 구성된 보컬 밴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55년 자전거 사고로 베론이 사망하자 아이슬리 형제는 트리오 라인업으로 팝 계의 첫 출발을 내디뎠다. 데뷔 초기 고향을 등지고 뉴욕으로 이주해 두-왑(doo-wop) 레코드를 녹음하며 활동에 포문을 연 그룹은 1959년 가스펠 송 ‘Shout’가 팝 차트에서 톱 40의 놀랄만한 성과를 올리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62년 R&B싱글 차트 2위를 기록한 ‘Twist and shout’(비틀즈가 커버한 곡), 1966년 스매시 히트 싱글 ‘This old heart of mine (Is weak for you)’(팝 차트 12위, 이듬해 영국차트 3위) 등이 성공가도의 대표적인 열쇠였다. 이후 그룹은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하면서 소울과 R&B뿐만 아니라 펑크와 록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바로 그룹의 혁명을 이끈 시기였다. 그 출발선상에 자리한 1969년 작품 < It’s Our Thing >(R&B앨범 차트 2위)부터 그룹은 줄 곳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결국 1970년에 발표한 < Get Into Something >에서 R&B차트 톱 30에 랭크된 곡을 무려 여섯 곡이나 배출해내는 저력을 과시했고, 1971년 < Givin’ It Back >을 발표해 밥 딜런(Bob Dylan),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스페판 스틸스(Stephen Stills), 빌 위더스(Bill Withers), 닐영(Neil Young)의 곡들을 리메이크하며 주류 음악시장의 성공 궤도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아이슬리 형제가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한 1973년작 < 3 + 3 >(팝 앨범 차트 8위)은 제 2세대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형성한 시기였다. 지미 헨드릭스로부터 영향 받은 기타리스트 어니 아이슬리(Ernie Isley)와 베이스, 퍼커션 주자 마빈 아이슬리(Marvin Isley), 사촌 형제인 크리스 자스퍼(Chris Jasper)가 이 앨범부터 그룹에 새롭게 가입. 이때부터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6인 체제로 전성기가 끝날 무렵까지 10년 동안 멤버교체 없이 ‘가문의 영광’을 지속해나갔다. 결국 이들은 발표하는 앨범마다 골드와 플래티넘을 달성하며 장기간 대중들과 함께 호흡했다. 그룹의 진가가 발휘된 1975년 걸작 < The Heat Is On >는 아이슬리에게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라는 영광을 수여한 금자탑이었다. 더불어 1978년작 < Showdown >(팝 앨범 차트 4위)에 수록되어 R&B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Take me to the next phase (Part 1)’의 빅 히트로 1970년대에 접어들어 그룹은 가장 화려한 시기를 맞이한다. 1976년 < Harvest for the World >(9위), 1977년 < Go for Your Guns >(6위), 1978년 < Showdown >(4위) 등의 발표하는 음반마다 그룹은 매번 R&B앨범 차트 정상을 점령했고, 여러 싱글 히트곡들로 R&B차트를 힘차게 꿰찼다. 흑인음악계의 많은 후배들이 아이슬리 브라더스를 존경하게된 결정적 배경이 바로 이 당시 축적되었다. 10여 년 간 지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린 그룹은 1983년 < Between the Sheets > 이후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며 침체기를 맞이한다. 어스 윈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같은 펑키(Funky) 사운드가 조금씩 무기력해질 시점에서 로맨틱 발라드 곡조로 일대 사운드의 변화를 꽤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전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심장마비로 오켈리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흑인 여성아티스트 안젤라 윈부시(Angela Winbush)를 작업 동료로 맞이해 그룹 재건에 나섰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팀을 떠났던 마빈, 어니와 재결합한 그룹은 그간 30년이 넘는 꾸준한 음악활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2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4년 뒤 1996년 < Mission to Please >(R&B앨범 차트 2위)는 R&B 크루너 키스 스웨트(Keith Sweat), 알 켈리(R. Kelly) 같은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해 젊은 감각으로 앨범의 빛을 더해주었다. 현재 그룹은 로날드와 어니의 듀오 체제를 구축해 기나긴 음악여정을 꾸준히 이어오며 2001년 < Eternal >(3위)을 발표해 다시금 팝 팬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그룹은 2003년 발매 첫 주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한 < Body Kiss >로 거의 30년 만에 차트 1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동시대 여러 아티스트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달리하거나 팀의 해체를 맛보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흑인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노장의 투혼을 아직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지나간 세월이 대가를 인정하는 법이다.
노래 : Maria Callas (마리아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으로 14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향하게 되고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뚱뚱한 몸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던 칼라스는 무대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갖추기 위해 감량을 시도, 카리스마를 갖춘 오페라 프리마돈나로 거듭나게 된다. 메조소프라노와 소프라노의 음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칼라스는 성악의 기교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청...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으로 14살 때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향하게 되고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뚱뚱한 몸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던 칼라스는 무대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갖추기 위해 감량을 시도, 카리스마를 갖춘 오페라 프리마돈나로 거듭나게 된다. 메조소프라노와 소프라노의 음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칼라스는 성악의 기교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청중의 공감을 얻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20살 연상의 남편 Giovanni Battista Meneghini와의 결혼 생활 중 선박 재벌 Aristotle Onassis와 불륜에 빠지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칼라스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오나시스는 결국 재클린 케네디에게 떠나고, 오나시스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칼라스는 사랑의 상처를 안은 채 고독한 말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삶이 노래에 투영되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청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3년부터 유럽과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공연하였고, 1974년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조인트 리사이틀을 였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가수로서의 마지막 무대가 된다.
노래 : Rita Streich (리타 스트라이히)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 곡은 그가 이끌던 1960년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부른 노래다. 발표된 지 자그마치 30년만에 비로소 팬들의 귀에 ‘접속’된 셈이다. 솔로로 독립해 내놓은 곡 ’완벽한 날’도 출반 시점은 1972년. 잔잔한 반주나 힘을 빼고 읊조리듯 부르는 것도 매력적이고 특히 곡의 무드가 만점이다. 그러면 왜 과거 팝팬들은 이 곡의 진가를 몰랐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봐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각 시대의 정서 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인기곡과 1990년대 히트곡은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올드 팝팬들은 밝고 약간은 건조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루 리드의 음악은 다분히 어둡고 습한 분위기였다. 느낌부터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늘 따라붙었던 수식어가 이른바 ‘아방가르드(전위)’ 였다. 이 말은 역으로 다수의 음악대중들과는 크게 유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루 리드의 음악은 역사적 기록과 록평론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 그가 그룹과 솔로 시절에 발표한 1960, 1970년대 앨범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장은 어김없이 록역사의 명반 리스트에 오른다. 록음악 잡지 < 롤링스톤 >은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를 비롯한 뉴욕 펑커들, 카스, 크리시 하인드, 뉴 오더, U2, REM 그리고 소닉 유스 등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점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들’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래의 모던 록에 심취한 팬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는 ‘모던 록의 시조’로까지 추앙된다. 강산이 두세번 바뀌고서야 인정받을 때까지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깨지고 나서는 레코드사의 외면으로 음반조차 내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평소 루 리드의 팬이었다는 데이비드 보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앨범이 ’완벽한 날’이 수록된 걸작 < 트랜스포머(Transformer) >. ’완벽한 날’은 지난해 엘튼 존, 보노 등 30명의 록스타들이 부른 새 노래로 재탄생했다. 음반의 수익금은 세계의 영세가정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이 곡을 동료들과 취입하던 날 루 리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완벽한 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서 좋은 음악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밴드 : 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다 건너 있는 미국의 도시 뉴욕 - 미국에서 가장 언더그라운드 적이면서도 가장 전위적인 모든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변태적인 공격성과 시적인 낭만이 공존했던 온갖 변종들의 도시 - 이었다.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 있었고, 그와 함께 시작한 밴드, 그 안에 펑크와 뉴 웨이브의 응어리를 내포하고 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있었다. 그 오리지널 멤버 중에 단 한 명의 허튼 멤버도 없었던 (이제는 거의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미미한 음반 판매량과 전혀 무관한 그 컬트적인 명성과 록 음악사에서의 확고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밴드다. (이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벨벳으로 약칭) 1960년대 중반은 록에 있어서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의 기간이었다. 미국의 서부에서는 평화의 사랑의 물결이 넘실대며 파도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록이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을 하고 있던 때가 바로 1960년대 중반이다. 그리고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점철되어 있던 벨벳의 음악은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록 르네상스에 대한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의 화답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대중적인 스타의 길을 달리던 (사랑과 평화, 애시드를 주창하던) 캘리포니아의 많은 밴드들과 달리 벨벳은 사후에 그 음악적 영향은 인정받았지만 결코 스타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벨벳은 록의 에너지와 전위적인 사운드를 뒤섞은 혁신적인 음악과, 그들의 음악 속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사회 리얼리즘의 새로운 단계를 소개했다. 그들의 시대에 벨벳은 컬트적인 청중들과 몇몇 평론가들에게 거대한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의 없었으며 많은 대중들은 그들의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경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기에 벨벳의 음악은 많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벨벳이 서거한 후에 점점 늘어나는 그들의 숭배자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명성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벨벳은 1960년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중요한 밴드로 알려졌다. 벨벳의 음악이 가지는 거대한 의미는 부진했던 그들의 음반 판매량으로는 측정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들을 펑크와 이어지는 뉴 웨이브에 끼진 그들의 거대한 영향력으로 그들을 극찬하고 있으며 사실 벨벳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열쇠의 역할을 했다.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는 음악이라... 그것만큼 음악의 역사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의미론적인 시각으로만 벨벳을 바라보는 것은 벨벳 이야기의 작은 한 부분이고 자칫하면 벨벳의 음악적인 매력을 놓칠 수도 있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벨벳은 그들의 음악과 가사에 있어서 결코 그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세대 음악 작업의 영감을 된 거칠고 황량한 침울함과 단순하고 미니멀한 원시주의를 지지하고 신봉했다. 벨벳의 음악에는 컬러풀하고 귀를 사로잡는 음악적 파노라마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잘 짜여진 노래들은 보다 인간적인 느낌도 놓치지 않았다. 벨벳의 멤버들 중에서 이러한 음악적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기타리스트이자 송 라이터였던 루 리드였다. 시니컬한 듯 따뜻하며 락킹하면서 읊조리는 보컬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 가사들을 쏟아내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벨벳의 요소들을 그의 솔로 작업 속에서 이어가고 있는. # 노란색 바나나가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벨벳의 서거 이후 꾸준한 솔로 작업으로 어둠의 왕자(Prince Of Darkness)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던 루 리드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많은 음악적 변화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과 창조적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닐 영과 그리고 팝 계의 카멜레온 데이빗 보위와 함께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개성 있는 뮤지션이다. 데이빗 보위와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지만 결코 메이저에 몸을 맡기지 않는 은둔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루 리드는 1942년 3월 12일 중산층 가정에서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유태인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록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롱아일랜드의 10대 소년이었던 1950년대 말에는 쉐이즈(The Shades)라는 밴드에서 두 왑 스타일의 싱글을 녹음하기도 했다. 뉴욕의 시라큐즈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픽 윅(Pick Wick) 레코드 회사에 취직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한다. 비트닉 문화와 델모어 슈와츠(Delmore Schwartz)의 시, 재즈 음악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픽 윅 레코드에서의 일에 싫증을 느낀 루 리드는 1964년 그가 썼던 ‘The ostrich’라는 곡을 계기로 만나게 된 존 케일과 함께 벨벳으로 발전할 전위 부대를 만든다. 이 두 명의 남자가 만든 전위 부대의 멤버들은 루 리드(보컬, 기타), 존 케일(기타, 비올라, 키보드), 스털링 모리슨(베이스), 앤거스 맥라이스(Angus Maclise, 드럼)였다. 이 중 주로 봉고를 연주하던 퍼커션 주자였던 드러머 앤거스는 공연의 리허설에 나타나지 않는 등의 태도로 밴드의 신뢰를 잃어 스털링 모리슨의 친구 여동생이던 모린 터커(Maureen Tucker)로 교체된다. 이렇게 짧았던 생애를 함께 할 멤버들이 모이게 됐고, 존 케일과 루 리드는 토니 콘라드(Tony Conrad)가 쓴 < Velvet Underground >의 카피본을 발견하고 그 느낌과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이것을 팀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음악적 통찰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루 리드와 음악적인 역량이 뛰어났던 존 케일의 탄탄한 음악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혁신적인 음악을 가지고 벨벳은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다양한 클럽들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이 당시에 한 클럽에서는 ‘Black angels death song’을 연주한 후에 쫓겨나는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벨벳은 당시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클럽이던 맥스 캔사스 시티 (Max`s Cansas City) -후에 이 곳에서의 그들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에 데뷔를 한다. 맥스 캔사스 시티는 많은 뉴욕 아방가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명사들이 붐비는 사교의 장이었는데, 맥스에서의 데뷔 후 벨벳은 바로 이 곳의 단골이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세기의 만남을 하게 된다. 앤디 워홀은 곧 벨벳의 음악에 주목을 하며, 이들의 후원자이자 매니저가 되기를 자청하며 자신이 알고 있던 아름다운 독일의 모델이자 배우였던 니코를 벨벳에 참여시켰고, 1966년 자신의 멀티 미디어 사이키델릭 쇼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Media’에 벨벳을 출연시키기도 하는데, 이 전위적인 쇼에서 벨벳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소음이 뒤섞인 무대를 만들었다. 또한 벨벳의 재정적 후원을 맡은 앤디 워홀은 곧 자신의 프로듀스로 당시엔 그저 찬밥 신세였고, 후대에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될 벨벳의 1집 < Velvet Underground & Nico >를 제작한다. 존 케일과 루 리드는 벨벳 이후 자신의 솔로 작업을 꾸준히 하며 각각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그 음악적 입지를 굳혀갔다. 벨벳 당시 맛보지 못했던 어느 정도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그 자신의 아티스트적인 색깔을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쳐나간 존 케일과는 달리 루 리드는 벨벳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솔로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초창기의 벨벳 디바 니코는 루 리드, 존 케일, 브라이언 이노 등의 도움으로 < Chelsea Girl > -니코는 벨벳에 합류하기 이전 앤디 워홀의 동명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등의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1988년 사고로 사망했다. 평론가들과 대중들의 벨벳을 재조명하며 뒤늦게 그 업적을 치하하며, 1980년대 이후의 수많은 밴드들이 그들의 음악의 빚을 벨벳에게 돌리는 분위기 속에서 1993년, ‘덕 율을 제외한’ 오리지널 멤버들이 모두의 상상을 뒤엎는 재결성을 하면서 투어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벨벳이 마지막 공연을 했을 당시 태어났을까 말까한 어린 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존 케일과 루 리드 사이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돋기 시작했고, 이후 1996년 벨벳이 록 앤 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 위해 모인 것 외에 더 이상의 벨벳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스털링 모리슨은 이 감격스러운 일은 몇 달 앞두고 사망했다.
밴드 : The Cars (더 카스 (뉴웨이브 밴드))
독일에 있는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가도를 질주한 미국 보스톤 출신의 5인조 뉴웨이브 팝록 밴드 카스(Cars)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었던 미국의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장르를 북미 지역에서도 만발시킨 1세대 그룹이다. 몇 안 되는 ‘미국산(産) 뉴 웨이브’라는 호칭이 최적이다. 아메리칸 펑크의 원류가 되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개라... 독일에 있는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가도를 질주한 미국 보스톤 출신의 5인조 뉴웨이브 팝록 밴드 카스(Cars)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었던 미국의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장르를 북미 지역에서도 만발시킨 1세대 그룹이다. 몇 안 되는 ‘미국산(産) 뉴 웨이브’라는 호칭이 최적이다. 아메리칸 펑크의 원류가 되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개라지 록(Garage rock) 뿐만 아니라 소음에서도 음원의 미학을 발견했던 펑크의 대부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재즈에서 가지를 친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한 록시 뮤직(Roxy Music) 같은 선배들에 영향 받은 카스는 이처럼 덜 대중 친화적인 음악 장르들을 팝 사운드에 버무려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커다란 상업적인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인기를 좇아 영국 스트레이트 펑크의 정신과 이념을 거세한 채 형식만을 차용, 팝과 단순 교배한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랜 지기(知己)인 릭 오케이섹(Ric Ocasek/보컬, 기타)과 벤자민 오어(Benjamin Orr/보컬, 베이스)가 그레그 호크스(Greg Hawkes/키보드)와 함께 1970년대 중반에 결성한 캡 앤 스윙(Cap ’N Swing)이 새로운 멤버 엘리엇 이스튼(Elliot Easton/리드 기타)과 데이브 로빈슨(Dave Robinson/드럼)을 규합해 카스(Cars)로 1976년 이름을 바꾸면서 분위기를 쇄신했다. 2년 간 공력을 다진 이들은 음악 트렌드가 펑크에서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로 바통 터치된 1978년에 자신들의 이름을 타이틀로 한 데뷔 앨범 < Cars >를 공개하면서 화려한 시동을 걸었다. 초기 뉴 웨이브의 명곡으로 자리한 ‘Just what I needed(27위)’, ‘Good times roll(41위)’, 그리고 1990년대 중반 국내의 음료 광고에 사용된 ‘My best friend’s girl(35위)’이 수록된 처녀작 발표 이후 1981년까지 매년 1장씩 모두 3장의 정규 음반을 공개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데뷔앨범은 차트18위에 그쳤지만 2년 가까이(139주) 빌보드 앨범차트를 머물면서 강한 구매욕을 자극,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70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했다. ‘Let’s go(14위)’, ‘It’s all I can do(41위)’, ‘Touch and go(37위)’, ‘Shake it up(4위)’, ‘Since you’re gone(41위)’ 같은 넘버들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면서 1984년에 대표작 < Heartbeat City >를 내놓았다. 이 5집 앨범은 그들을 견고한 스타 밴드의 고지로 올려놓았다. 초기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You might think(7위)’의 뮤직비디오는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격찬 받았으며, ‘Magic(12위)’, ‘Hello again(20위)’, ‘Why can’t I have you(33위)’, 그리고 지금까지도 국내의 라디오를 지배하고 있는 발라드 ‘Drive(3위-R.E.M.과 인큐버스의 노래와는 다른 곡)’ 등의 히트 싱글들이 무더기로 배출되었다. 기타 위주의 뉴 웨이브 팝이었던 전작들보다 신시사이저를 두텁게 사용해 선율이 확충되고 한층 매끄러워진 것이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앨범은 3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릭 오케이섹과 벤자민 오어의 독립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보스톤의 자동차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985년에 나온 베스트 모음집에 수록된 새로운 싱글 ‘Tonight she comes(7위)’와 ‘I’m not the one(32위)’이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기세는 눈에 띄게 기울어갔다. 1986년에는 릭 오케이섹의 솔로 싱글곡 ‘Emotion in motion(15위)’과 벤자민 오어의 솔로 히트곡 ‘Stay the night(24위)’이 나란히 발표되어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둘 모두 홀로서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7년 ‘You are the girl(17위)’, ‘Strap me in(85위)’, ‘Coming up you(74위)’가 수록된 < Door To Door >를 마지막으로 카스는 1988년 공식적인 자동분해 과정에 들어갔다. 1990년대 들어서 릭 오케이섹은 위저(Weezer), 배드 릴리전(Bad Religion), 노 다웃(No Doubt), 홀(Hole), 워너디스(Wannadies)를 비롯해 영화 < 스피드 >와 < 크로우 2 > 등의 음반을 제작하면서 뮤지션보다는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다졌다. 하지만 벤자민 오어는 불행히도 2000년 10월 3일 투병 중인 암으로 사망했다.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젖어든 우리 60~70년대 사람들에게 롤링 스톤스의 곡들이 환영받을 리 만무했다. 무수한 곡들이 애청된 비틀스에 비해 그들의 인기곡은 고작 ‘눈물이 지나갈 때(As tears go by)’ ‘루비 튜즈데이(Ruby Thesday)’ ‘엔지(Angie)’ 정도에 불과했다. ‘검게 칠하라(Paint it black)’가 어필한 것도 80년대 말 국내 방영된 TV외화 < 머나먼 정글 >에 이 곡이 ‘시그널 송’으로 삽입되고 나서였다. 팝의 본고장에서의 휘황찬란한 히트 행진에 견주었을 때 롤링 스톤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로 보잘 것이 없었다. 비틀스가 ‘산소 같은 음악’을 했다면 그들은 고집스럽게 ‘탄소 같은 음악’을 구사했다. 바로 그 탄소라는 요소로 인해 그들은 ‘4인의 전설’이 된 비틀스처럼 결코 ‘5인의 전설’이라는 명예 작위를 하사 받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꼬리표는 ‘5인의 악동들’이었다. 사실 악동은 출신 성분상 비틀스에 어울리는 용어였다. 그들은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로커’들이었다. 존 레논의 경우 여지없이 그 어휘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톤스 멤버들은 비틀스처럼 가난하거나 못 배운 청년들이 아니었다. 보컬리스트 믹 재거(Mick Jagger)는 런던 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며 기타주자 키스 리차즈(Keith Richards) 역시 중산층 자손이었으며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는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베이스 담당 빌 와이먼(Bill Wyman)과 드럼 찰리 와츠(Charlie Watts)가 노동계급 출신이지만 스톤스에 가입할 무렵에는 엄연한 ‘직장인’이었다. 신분으로 보자면 그들은 결코 록을 해선 안될 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악동 노릇을 자처했다. 그것은 노동계급 청춘에 의한 하위문화라는 ‘록의 헌법’을 거스르는 위헌 사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그러한 ‘자격 미달’을 의식해서인지 비틀스보다 훨씬 강도 높게 록의 규율을 준수했다. 롤링 스톤스는 기꺼이 악동이 되기를 희망했다. 말쑥한 헤어스타일과 정장 차림으로 비틀스와 겨룬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은 격이었다. 데뷔 당시 비틀스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드햄(Andrew Loog Oldham)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그들은 비틀스에 이어 1965년 마침내 대망의 미국 정복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정서’가 되었다. 그들은 ‘게으른 불량 저능아들’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는 곳마다 소란과 골칫거리를 야기시켰다. 기성 세대와 제도권의 ‘계급 공포’는 예고된 것이었다. 영국의 < 뉴스 오브 더 월드 >지는 ‘당신의 딸이 롤링 스톤스 멤버와 놀러 나가는 것을 허락하겠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 뉴스 위크 >지는 그들을 ‘포르노 같은 가사에 젖어 있는 심술궂은 무리들’이라고 규정했다. 노심초사한 한 여인은 < 타임 >지에 “왜 디스크자키들은 스톤스 같은 쓰레기 노래들을 틀어 대느냐”고 따지는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양복 전문지 < 더 테일러 앤드 커터 >는 넥타이 매출이 형편없다고 스톤스에게 제발 넥타이를 매달라고 통사정했다. 클리블랜드 시장 랄프 로커는 스톤스 공연을 보던 17세 소년이 다치자 “그러한 그룹은 우리 공동체의 문화와 오락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며 그들의 콘서트를 불허하는 ‘비민주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비틀스에게는 인기폭발의 계기가 된 CBS TV 에드 설리번 쇼의 사례도 유명하다. 객석의 예기치 않은 소요와 그들의 불량스러운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에드 설리번은 상기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들을 다시는 출연시키지 않겠다! 이 쇼를 구축하는데 자그마치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단 몇 주만에 쇼를 망치게 할 수는 없다” 에드 설리번은 물론 이 선언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지만 2년 뒤인 1967년 섭외 때도 그들의 노래 ‘밤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의 제목을 ‘시간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some time together)’로 고쳐 부르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탄이 있으면 그에 비례하여 응원군도 출현하는 법이다. 어느 록밴드보다 흑인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뛰어나게 소화했기 때문에 ‘소울의 왕’ 오티스 레딩은 가장 좋아하는 그룹으로 롤링 스톤스를 지목했으며 그들의 레퍼토리를 리메이크해 음반에 담기도 했다. 1965년 미국 콜로라도 존 A 러브 주지사는 성공적으로 공연에 감사하는 뜻으로 ‘롤링 스톤스의 날’(11월 29일)을 공식 선포했다. 믹 재거가 1964년 난폭 운전으로 면허 취소의 위기에 몰렸을 때 사무 변호사 데일 파킨슨의 간청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면허가 취소되면 믹 재거와 그의 그룹이 움직이는데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영국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달러를 필요로 하며 그들은 어느 수출업체보다도 많은 달러를 번다.” 재거는 16파운드의 벌금을 내고 다시 차를 몰 수 있었다(좌우지간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 1967년 재거와 리차즈가 마약 불법 소지 사건으로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고 이어 브라이언 존스도 런던 아파트에서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언론이 도왔다. 보수신문으로 정평 나있는 < 더 타임스 >지가 놀랍게도 ‘누가 바퀴로 나비를 찢어 죽이나?(Who breaks a butterfly on a wheel?)’라는 제목의 비호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롤링 스톤스에 대한 대중의 집단 히스테리를 알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는 당시 기성 가치에 거스르는 ‘히피 보헤미안’들의 정서를 반영했다. 그들의 곡에는 의도했든 안했든 히피 세대의 분노와 불만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60년대 록정신의 한복판에 ‘구르는 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 그 양반이 나오더군, 점점 더 쓸데없는 정보만 늘어놓는 거야. 내 상상을 불태우려는 듯 말야. 노력해 도 노력해도 난 도무지 만족할 수 없어’-‘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no satisfaction)’중에서 이 노래는 세 번째 구절의 ‘여성 생리’ 관련 가사로도 어필한 것이 사실이지만 청년 대중들이 주로 멜로디 부분에 맞춰 “현실 상황에 절대 만족할 수 없음”을 목청 높여 부른 것에 힘입어 빅히트했다(그들의 최초 미국 차트 1위곡). 믹 재거 스스로도 “이 곡은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욕구 불만을 담았다. 그것은 꾸밈없는 10대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히피 세대들은 정말 스톤스의 말을 따라 순종을 거부했고 도전했고 싸웠으며 싸돌아다녔다. 스톤스 또한 확고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그들에 대한 ‘자극’을 즐겼다. ‘그녀가 왜 자유로워지려는지 묻지마. 그녀는 그게 유일한 낙이라고 말할 거야. 그녀는 삶에 묶여 있지 않아. 그런 대가를 치러 봤자 인생은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루비 튜스데이’ ‘난 자유를 갖고 있지만 많은 시간은 없다. 신념은 무너졌고 눈물은 쏟아야만 해. 우리가 죽고 난 뒤 어떠한 생을 얻읍시다. 야생마는 날 질질 끌고 다니지 않지. 어느 날 우리는 야생마를 타게 될 거야’-‘야생마(Wild horses)’ 1960년대 그들의 음악은 라이벌 밴드 비틀스에 끌려 다닌 측면이 없지 않았다. 1966년 작 < 여파(Aftermath) >는 재거와 리차즈가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콤비 자작곡인 < 러버 소울(Rubber soul) >에 충격 받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 것이며, 1967년 사이키델릭 음반 < 악마 폐하의 요청(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만 해도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2등이었다. 결코 비틀스로부터 왕관의 소유권을 이전 받지는 못했다. 비틀스는 록밴드에서 ‘전천후 팝 밴드’로 승천하면서 어느 세대에도, 어느 계층에도 적(敵)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 서전트 >의 시점부터 음악의 축을 로큰롤의 흥분에서 팝 예술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롤링 스톤스는 적이 많았다. 기성 세대들은 록의 부랑아인 그들을 꺼렸으며 록이란 또 애초부터 전 세대를 포괄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음악이었다. 결국 비틀스는 록을 버려 ‘국민그룹’이 된 것이다. 만약 비틀스에게 약점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록과의 작별’일 것이었다. 이 비틀스의 허점이 롤링 스톤스에게는 강점을 의미했다. 롤링 스톤스는 록을 배신한 비틀스에게 실망한, 그리하여 멀어져 간 ‘록 충절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그 팬들에게 ‘우리가 진정한 로큰롤 밴드’임을 열심히 음악으로 웅변했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1966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어른들이 비틀스가 훌륭하고 비틀스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해졌다. 기성 세대들은 우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히피’ 아이들은 또는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는 애들은 우리를 떠나 버렸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스톤스의 팬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는 롤링 스톤스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밖에 몰랐다. 그것도 기타와 드럼 베이스가 물려 빚어내는, 단순하고 경쾌한 원시 로큰롤로 일관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가서는 데뷔 시절에 더러 다루곤 했던 느린 리듬 앤드 블루스나 발라드의 비율마저 낮추어 버렸다. 1960년대 후반기에 발표한 3장의 앨범 < 단추 사이에(Between The Buttons) >, < 거지의 향연(Beggar’s Banquet) >, < 렛 잇 블리드(Let It Bleed) >가 뚜렷한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록비평가들이 일제히 걸작 음반으로 꼽는 것도 이 앨범들이 철저히 록음악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거지의 향연 >에 수록된 곡 ‘거리의 싸움꾼(Street fighting man)’에 내비친 그들의 ‘로큰롤 신념’을 들어보자. ‘내 이름은 소란이라고 하지. 난 외치고 울부짖을 거야. 난 왕을 죽이고 그의 종복들을 박살낼테야. 가난한 아이가 로큰롤 밴드에서 노래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나. 졸린 런던 타운에서 거리의 싸움꾼을 위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지!’ 그들의 록에 대한 헌신은 < 타임 >지로부터 ‘피에 굶주린 로큰롤 앨범’이라는 칭찬을 받은 기념작 < 스티키 핑거스(Sticky Fingers) >와 이듬해의 음반 < 대로의 추방자(Exile On Main Street) >로 절정에 달했다. 록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는 “적어도 펑크가 도래할 때까지 아무도 그들처럼 몰아(沒我)의 에너지로 철저히 록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롤링 스톤스는 록에 온몸을 내던진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성을 창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록의 ‘낙오자 정서’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록이 제도권의 스타가 아닌 거리의 청년들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입증한 펑크 밴드들에게 공격 타깃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와 관련하여 섹스 피스톨스 자니 로튼이 “롤링 스톤스와 후는 비위에 거슬린다. 그들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제시할 것이 없다”고 성토한 것은 유명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록의 공룡’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말의 ‘반성’도 없었다.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1978년 당시의 인기 음악인 디스코를 채용한 ‘네가 그리워(Miss you)’를 노래하며 제도권 한복판에서 유유자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록의 공격성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펑크 록은 펑크 세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에 터득한 ‘그들만의’ 원시적인 로큰롤을 했다. 록의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원형 록을 보존하며 그 ‘충실성’을 옹호한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도 그들은 그렇게 록을 했고 끊임없이 해체설이 떠도는 가운데에서도 1989년 < 강철바퀴(Steel Wheels) >를 통해서 원형 록으로 재기했다. 1994년에 발표한 < 부두 라운지(Voodoo Lounge) >나 1995년 말에 내놓은 < 스트립드(Stripped) >도 거친 로큰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변한 것이라곤 1969년 브라이언 존스가 사망하자 믹 테일러(Mick Taylor)가 그 자리를 메꾸고, 1974년 다시 그 자리에 그룹 페이시스의 전 멤버 론 우드(Ron Wood)가 들어온 것, 또한 1994년 빌 와이먼이 탈퇴한 것뿐이었다. 이제 멤버들 대부분의 나이 50세를 넘어섰다. 롤링 스톤스는 오랫동안 록이 가지는 열정과 흥분에 몸바치면서 쌓은 금자탑에 또 하나의 글귀, ‘록은 늙어서도 할 수 있다’를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펑크 진영의 지탄도, 얼터너티브 록의 대공세도 거뜬히 극복했다. 믹 재거는 1988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로큰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배우나 작가,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로큰롤이 나를 휘어잡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것이다” 그의 롤링 스톤스는 < 스트립드 > 앨범에서 밥 딜런의 고전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불렀다. 이 한 곡이 아마도 이 앨범이 말하려는 바와 그들의 음악과 역사를 축약하는 노래일 것이다.
밴드 : Martha & The Vandellas (마사 앤 더 반델라스)
멤버 :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 로잘린드 애쉬포드(Rosalind Ashford), 베티 켈리(Betty Kelly) 멤버 :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 로잘린드 애쉬포드(Rosalind Ashford), 베티 켈리(Betty Kelly)
지휘 : Ernest Ansermet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 Igor Markevitch (이고르 마르케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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