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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B] 7080이 사랑한 팝송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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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관련

[USB] 7080이 사랑한 팝송베스트

본 상품은 CD가 아니며, USB 입니다.

Virginia Wynette Pugh, Carry & Ron, Carpenters, ABBA, Chicago 노래 외 4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서울미디어 (음반) / 서울미디어 (음반) | 2019년 10월 10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69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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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B] 7080이 사랑한 팝송베스트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0월 10일
시간, 무게, 크기 220g

관련분류

디스크

USB
  • 01 Stand By Your Man - 태미 와이넷
  • 02 Imagine - 존 레논
  • 03 I.O.U - 케리 엔 론
  • 04 Let It Be - 비틀즈
  • 05 Yesterday Once More - 카펜터스
  • 06 Desperado - 이글스
  • 07 I Have A Dream - 아바
  • 08 Hard To Say I'm Sorry - 시카고
  • 09 My Heart Will Go On - 셀린 디온
  • 10 Hotel california - 이글스
  • 11 You Light Up My Life - 데비 분
  • 12 Casablanca - 버티 히긴스
  • 13 Evergreen - 수잔잭슨
  • 14 Yesterday - 비틀즈
  • 15 I Will Always Love You - 휘트니 휴스턴
  • 16 Hey Jude - 비틀즈
  • 17 One way ticket - 닐 세다카
  • 18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 스티비 원더
  • 19 Greatest Love Of All - 휘트니 휴스턴
  • 20 Knife - 락웰
  • 21 When I Dream - 캐롤 키드
  • 22 Love Me Tender - 엘비스 프레슬리
  • 23 Sexy Music - 놀란스
  • 24 Honesty - 빌리 조엘
  • 25 Tennessee Waltz - 패티 페이지
  • 26 My Way - 프랭크 시나트라
  • 27 Sunny - 보니엠
  • 28 Just When I Needed You Most - 랜디 반워머
  • 29 A Little Peace - 니콜레 플리그
  • 30 Dust In The Wind - 캔자스
  • 31 Ben - 마이클 잭슨
  • 32 She - 엘비스 코스텔로
  • 33 Midnight Blue - 루이스 터커
  • 34 All By Myself - 에릭 카르멘
  • 35 Take My Breath Away - 베를린
  • 36 Besame Mucho - 세자리아 에보라
  • 37 You needed me - 앤 머레이
  • 38 Perhaps Love - 존 덴버
  • 39 The End Of The World - 스키터 데이비스
  • 40 Feelings - 모리스 앨버트
  • 41 The Rose - 베트 미들러
  • 42 More Than I Can Say - 리오 세이어
  • 43 Stand By Me - 벤이킹
  • 44 Tears In Heaven - 에릭 클랩튼
  • 45 Woman In Love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46 Take Me Home Country Roads - 존 덴버
  • 47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 B. J. 토머스
  • 48 Try To Remember - 브라더즈 포
  • 49 Memory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50 Rhythm Of The Rain - 캐스케이드
  • 51 Scarborough Fair - 사이먼 & 가펑클
  • 52 Moon River - 오드리 헵번
  • 53 Sealed With A Kiss - 브라이언 하일랜드
  • 54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 토니 올란도 와 던
  • 55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 로베타 플랙
  • 56 We Are The Champions - 퀸
  • 57 Fly Me To The Moon - 프랭크 시나트라
  • 58 Top Of The World - 카펜터스
  • 59 Sailing - 로드스튜어트
  • 60 Say You Say Me - 라이오넬 리치

아티스트 소개 (50명)

노래 : Carry & Ron (캐리 앤드 론)
멤버 : 캐리 크레우셀(Carry Kreusel, 보컬), 론 트래웁(Ron Traub, 기타) 멤버 : 캐리 크레우셀(Carry Kreusel, 보컬), 론 트래웁(Ron Traub, 기타)
멤버 : Richard Carpenter, Karen Carpenter 안정희구의 베이비 붐 세대를 위한 윙크 최근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이 카펜터스의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한 음반 < 내가 카펜터라면(If I Were A Carpenter) >을 냈을 때 록기고가 로저 캐틀린은 이렇게 썼다. “카펜터스에 대한 그들의 인사는 얼핏 70년대의 값싼 것(schlock)에 대한 희화화이며 또다른 비아냥조의 윙크인 ... 멤버 : Richard Carpenter, Karen Carpenter

안정희구의 베이비 붐 세대를 위한 윙크 최근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이 카펜터스의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한 음반 < 내가 카펜터라면(If I Were A Carpenter) >을 냈을 때 록기고가 로저 캐틀린은 이렇게 썼다. “카펜터스에 대한 그들의 인사는 얼핏 70년대의 값싼 것(schlock)에 대한 희화화이며 또다른 비아냥조의 윙크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어 후배 록 뮤지션들이 듬뿍 경의를 표한 카펜터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카펜터스를 해석하는 데 있어 후배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유’를 그 음반의 실질적인 성과로 기록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놀라운 것은 얼터너티브 록의 자유 정신이 아니라 카펜터스에 대한 본고장 비평계의 냉랭한 시각이다. 그들을 단칼에 ‘값싼 것’으로 후려치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그 시절 우리 팝송 팬들뿐 아니라 전세계 음악 청취자들의 가슴을 그토록 촉촉이 적셔준 슈퍼스타에 대한 대접치고는 잔인하기 짝이 없다. 팝 음악 관련 자료를 들추어 봐도 카펜터스에 대한 언급은 매우 간단하다. 70년대의 상업화된 팝 음악 시장을 대변한 인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 롤링 스톤 >지는 그들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end),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오스몬즈(Osmonds) 등과 함께 ‘눈물샘 솟게 하는’ ‘MOR(Middle Of the Road) 팝’ 록의 굶주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존재 정도로 규정하고 있다. 더러 등장하는, 아바(Abba)의 미국판이라는 해석은 그나마 호의적인 듯하지만 그 속에도 빈정거림은 묻어 있기는 매한가지다. 이러한 비평계의 홀대 뒤에는 이윤 동기와 스타 시스템이 지배하는 70년대 팝 시장(언제나 그렇긴 하지만)에 대한 비판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 때문에 단지 ‘귀에 솔솔 들어오는’ 단순하고 편안한 노래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러한 비평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평론가들 일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또한 바로 그 카펜터스 음악의 성격이다. 그들은 카펜터스의 음악이 너무 유순하고(bland) 건전하며(woholesome) 깨끗하다(clean-cut)는 점을 싫어한다. 그에 따라 그 음악은 기껏해야 오락일 수밖에 없으며 정신은 온데간데없다는 주장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얘기라고나 할까. 카펜터스는 그들이 소속한 레코드 회사 A&M에 어느 아티스트보다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었다. 뒤에 경쟁자로 떠오른 캡틴 앤드 테닐(Captain And Tennile)도 그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측은 음악과 관련한 외부의 줄기찬 비판이 찜찜했던지 사무실에 리처드와 카렌 카펜터 남매의 포스터조차 걸기를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말 펑크(Punk)의 폭풍이 휘몰아칠 때 카펜터스에 대한 비판은 극에 달했다. 물론 엘튼 존(Elton Joh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퀸(Queen)을 위시해 펑크 집단의 난도질을 비껴 간 스타들은 없지만 카펜터스 또한 펑크 그룹들의 만만한 표적이었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클래시(Clash), 라몬즈(Ramones) 등 펑크 그룹들은 일제히 ‘고민 많고 일자리 없는 분노와 우리 젊은 세대에게 사랑 이별 타령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며 카펜터스 등의 팝스타들을 향해 아우성을 쳤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1970년대 데뷔이래 순풍에 돛단 듯 거침없는 히트 항해를 해온 카펜터스가 신기하게도 그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밀리언 셀러 싱글 퍼레이드는 1975년부터 뚝 멈추었고 1977년과 1978년에 발표된 곡들인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랑 노래(All you get from love is a love song)’ ‘콜링 오큐펜츠 오브 인터플래니터리 크래프트(Calling occupants of interplanetary craft)’ ‘달콤한 미소(Sweet sweet smile)’-모두 한 앨범 < 패시지스(Passage) >의 수록곡-은 우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인기 차트 성적은 예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부진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카펜터스가 보여준 히트 행진은 가히 경탄할 만했다. 1970년대부터 1975년까지 차트 10위권에 진입한 싱글이 12곡이나 되었고 그중 10곡이 3위 안에 들었다. 넘버 원 싱글은 ‘네게 가까이(Close to you)’ ‘세상의 꼭대기(Top of the world)’ ‘안녕 우체부 아저씨(Please Mr. Postman)’ 등 셋이었다. 3위권 이내의 곡은 또 모조리 밀리언 셀러 싱글이기도 했다. 사실 이같은 성공의 부분이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아무리 비평가의 호된 질책이 따랐을 지라도 그러한 폭발적 인기는 당시 대중들의 압도적인 협조가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중의 반응을 먹고사는 팝가수라는 점뿐 아니라 슈퍼스타란 때로 긍정적인 발자취를 남긴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높이 사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선율적 감수성’은 최고급이었다. ‘내게 가까이’ ‘우린 막 시작했어요(We’ve only just begun)’ ‘슈퍼스타(Superstar)’ ‘솔리테어(Solitaire)’와 같은 곡은 지금 들어도 격조 있는 멜로디의 흥취가 살아 숨쉰다. 물론 리처드 카펜터가 모두 쓴 곡은 아니지만 그가 만든 ‘세상의 꼭대기’ ‘사랑이여 안녕(Goodbye to love)’ ‘어제여 다시 한번(Yesterday once more)’도 수준이 처지지 않는다. 많은 비판을 받았던 카렌 카펜터의 보컬도 ‘옛 곡 해설’에 관한 한 알아줄 만한 실력이었다. 레온 러셀(Leon Rusell)의 ‘슈퍼스타’, 비틀스의 ‘승차권(Ticket to ride)’, 루비 앤 더 로맨틱스(Ruby And The Romantics)의 ‘서로 상처를 주며(Hurting each other)’, 마블리츠(Maveletts)의 ‘안녕 우체부 아저씨’ ‘비치우드(Beachwood 4-5789)’ 등은 그녀의 탁월한 목소리의 소화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비평가들도 이 점만은 인정했다. ‘안녕 우체부 아저씨’를 리메이크해 부른 것도 실상 “카렌의 보이스가 ‘커버버전’에 능수 능란한 만큼 지나간 곡을 다시 부르는 방식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는 몇몇 비평가들의 충고에 따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적지 않은 뮤지션들과 음악 관계자들도 카펜터스를 존경했다. 그들은 카펜터스가 거물 기타리스트인 토니 펠루소(Tony Peluso)를 ‘사이드맨’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해 여러 부분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참된 자세를 보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례로 펑크 록 그룹 소닉 유스(Sonic Youth)는 카펜터스를 존경한 나머지 1990년 발표 앨범 < 구(Goo) >에 ‘카렌을 위한 노래 튜닉(Tunic-song for Karen)’이란 카펜터스에게 바치는 곡을 수록했으며 < 내가 카펜터라면 > 앨범에서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유별나게 ‘슈퍼스타’를 불렀다(이 곡은 앨범에 참여한 록 그룹들이 서로 부르려고 다투어 로비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또한 ‘시간이 좀 걸릴 거야(It’s going to take some time)’을 커버한 밴드 베티 세버트(Bettie Seveert)의 멤버 베렌드 더브는 심지어 자신의 침실에 카렌 카펜터 사당(祠堂)을 설치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앨범은 결코 카펜터스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직,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후배 뮤지션들의 선배에 대한 예우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네티컷 주의 뉴 헤이븐에서 태어났으나 로스엔젤리스 교외의 다우니 구역에서 뿌리내리며 활동을 계속해 < 롤링 스톤 >지로부터 다우니 듀오(Downey Duo)라는 별칭을 얻은 카펜터 남매의 결코 순탄치 않았던 인생 역정을 살펴보자. 1945년생 리처드 카펜터는 12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가족 전체가 다우니로 이사온 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에 다니면서 대중 음악 이론을 전공했다. 5살 연하인 여동생 카렌 역시 고교 시절 피아노와 노래에 열중했지만 동시에 드럼에 매혹되어 스틱을 잡고 드럼 주자를 꿈꾸기도 했다. 1965년 카렌의 나이 15살 때 카펜터 남매는 친구 웨스 제이콥스를 끌어들여 재즈 트리오를 결성, 할리우드에서 개최된 밴드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해 RCA레코드사 직원인 닐리 플럼브의 눈에 띄었고 곧바로 그 회사와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싱글 두 장을 녹음했으나 회사측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그 곡들은 발표되지 않았고 아티스트 명부에서도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제이콥스가 줄리어드에서 공부하기 위해 그룹을 떠나게 되자 리처드 카펜터는 다시 6인조 그룹 스펙트럼(Spectrum)을 조직하여 레코드 제작을 위한 ‘데모 테이프’를 만들지만 그것은 번번이 거절당했고 그룹도 해산될 위기에 처한다. 비운은 계속되었지만 리처드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고, 다시 만든 데모 테이프를 거절한 A&M레코드사로부터 비록 스펙트럼은 퇴짜맞았지만 두 남매만은 구제되는 행운을 얻는다. 이때 그들을 픽업한 인물이 ‘이 녀석이 너와 사랑에 빠졌어(This guy’s in love with you)’ ‘상승(Rise)’ 등의 빅 히트곡을 낸, 그 유명한 트럼펫 주자이며 제리 모스와 함께 A&M의 공동 소유주인 허브 앨퍼트(Herb Alpert)였다. 이리하여 ‘다우니 듀오’는 첫 앨범 < 선사(Offerings) >와 싱글 ‘승차권’을 냈지만 만족할 만한 실적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물 작곡가인 버트 바카라(Burt Bacharach)가 제리 모스를 찾아와 라디오에서 누군가의 ‘승차권’을 들었는데 무척 좋다고 얘기했고 그에 따라 리처드는 버트의 요청으로 오래 전 팝송을 재편곡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서 찾아낸 곡이 대형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레코딩했으나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 ‘내게 가까이(They long to be-close to you)’였다. 이 곡은 카렌의 목소리에 실려 전미 싱글 차트 1위를 거머쥐었고 이후 발표한 싱글마다 차트 상위권으로 치솟는 ‘히트 제조기’로서 화려한 다우니 듀오 시대가 펼쳐진다. 1971년 < 카펜터스(Carpenters) > 1972년 < 너를 위한 노래(A Song For You) > 1973년 < 때때로(Now And Then) > 1975년 < 경계선(Horizon) > 등의 앨범은 보통 서너 곡씩 히트 싱글이 터져 나왔고 1974년에 내놓은 싱글 모음집 < The Singles 1969-74 >의 경우는 지금까지 9백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역사상 가장 잘 팔린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들 노래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솟아 ‘세상의 꼭대기’는 여러 가수가 서로 번안 가요로 내놓았으며 카렌의 목소리를 닮은 국내 가수 이성애가 인기 가수로 각광받기도 했다. 본고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잠발라야(Jambalaya)’, ‘가장무도회(This masquerade)’가 국내에서는 열렬히 애청될 정도였다. 호사다마라고, 성공적인 질주 속에 카렌 카펜터는 과도한 식이요법에 따른 신경성 식욕부전증을 앓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남성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던 그녀는 그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먹어야 했고 한때는 85kg까지 체중이 불어 이후 먹기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이어트에 열중한 나머지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 부족으로 심한 경우 목숨마저 앗아가는 일종의 노이로제성 질환인 식욕부전증은 그녀의 불우한 사생활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카렌은 1980년 부동산업자인 토마스 배리스와 결혼했지만 2년만에 이혼하고 말았다(불행한 결혼 생활을 예고라고 하듯 카펜터스 시절 그녀가 부른 노래는 대다수가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결혼 실패와 더불어 1970년대 말 기습적으로 찾아든 인기 퇴조는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었다. 일반적으로 보아 그녀는 결코 살찐 체질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먹기 거부를 지속했다. 비평가들이 더러 그녀의 식욕부전증을 중산층병으로 내리 깎으며 ‘중산층의 고통’, ‘자기 중심의 사고가 팽배한 긴장과 갈등의 1970년대 정서가 낳은 대표적 희생자’로 이들에 대해 결론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81년, 4년 만에 카펜터스는 앨범 <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를 내놓고 재기에 나서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카렌은 1983년 2월 4일 자택에서 식욕부전증에 대한 거식증으로 급작스레 사망했다. 그것으로 카펜터스의 ‘어제여 다시 한번’ 노력도 끝을 맺었고 다우니 듀오 스토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카렌의 죽음은 노출시키고 신중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고와 행위를 자기 세계에 가둠으로써 잉태시킨, 뜻있는 죽음이 못 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1989년 신시아 깁이 주연한 TV 영화 < 카렌 카펜터 스토리 >도 만들어지고 히트곡집 앨범 < 어제 뿐(Only Yesterday) >이 발매되는 등 카펜터스의 부활은 계속되어 있다.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에 의한 < 내가 카펜터라면 >으로 그들은 또다시 재평가의 기회를 잡은 상태다. 그러나 찬사가 카펜터스가 아닌 그 앨범에 참여한 후배 록 그룹에 돌아가는 기미가 보여주듯 비평계의 시각은 쉽게 호전될 것 같지는 않다.
멤버 : 아그네사 팰트스코그(Agnetha Faltskog),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멤버 : 아그네사 팰트스코그(Agnetha Faltskog), 애니프리드 린스태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비요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출전 티켓을 따기 위한 스웨덴 본선 당일이었다. 팀 동료 베니(Benny Anderson)의 약혼녀 안니 프리드(Anni-Frid)가 부랴부랴 그녀의 노래 파트까지 연습해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출산이 늦어져 무사히 아그네사는 무대에 올라 ‘링링(Ring ring)’을 부를 수 있었다. 이 네 사람의 그룹 아바()는 이날 3위에 그쳐 스웨덴 대표가 되지 못하는 고배를 마시지만 온전히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그 같은 길조는 당장 이듬해에 현실로 나타났다. 마침내 ‘워터루(Waterloo)’라는 노래로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 32개국 5억 TV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2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워터루’는 순식간에 영국 및 유럽에서 밀리언 셀링 싱글이 되었다. 이후 아바는 마치 천운을 타고난 그룹인 듯 쾌속 항진을 거듭했다. 영국 출신이 아니면 설령 유로비전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더라도 곧 잊혀지고 마는 관례마저 운 좋게 비껴 가는 ‘위대한 예외’를 창조했다. 발표하는 싱글마다 차트 상위권으로 치솟아 영국 차트에서는 18주 연속 톱 10싱글을 기록했고 그중 9곡이 1위에 등극하는 눈부신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이 ‘9곡의 넘버원’ 기록은 역사상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셋만이 장식한 대 기록이었으며 이로써 아바는 ‘1970년대에 가장 레코드를 많이 판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안게 됐다. 1978년까지 4년간 아바의 레코드 판매량은 세계적으로 무려 5천3백만 장에 달했다. 1977년 연간 소득이 110억원을 기록, 스웨덴의 자랑인 볼보 자동차 회사의 총판매고 90억원을 제치고 1위 기업으로 부상할 정도였다. 그들의 인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넘어 지구촌을 덮었다. 터키, 이스라엘에서도 음반 판매량 1위였고, 호주 사람 4명 가운데 하나가 1976년 앨범인 < 아바 히트곡집 >< Abba Greatest Hits >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소련의 암시장에서도 그들의 LP가 130달러의 고가(당시 LP 한 장 가격은 8달러)로 거래되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 인기는 막강해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 앨범에서 보통 4곡 이상이 방송과 다운타운가를 뒤덮었다. 1978년 < 앨범(The Album) >의 미국 히트 싱글은 ‘게임의 이름(The name of the game)’ ‘내게 승산을 걸어보라(Take a chance on me)’ 두 곡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독수리(Eagle)’ ‘무브 온(Move on)’ ‘음악을 감사해요(Thank you for the music)’도 덩달아 팝송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바는 그러나 결코 운으로 먹고 산 팀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들의 환호를 독점할 만한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아바의 모든 곡들은 출중한 작곡 실력을 보유한 남성 멤버 비욘과 베니가 당시 매니저이자 폴라(Polar)레코드사 사장인 스틱 앤더슨(Stig Anderson)과 함께 썼다. 그들의 음악이 이윤의 지상 명령에 따라 팝 시장을 요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음악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 했다. 베니와 비욘이 제조해 낸 아바의 경쾌한 ‘버블 검(Bubble gum) 음악’은 당시로 볼 때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했다. 신시사이저와 ‘스트링’의 풍요로운 사운드와 종소리 같은 여성 보컬은 유서 깊은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사운드의 벽’(Wall Of Sound) 방식을 따른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명랑한 리듬의 사운드 구조에 더구나 쉬운 멜로디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줄 아는 비범한 능력을 뽐냈다. 그리하여 누구나 듣기에도 좋고 춤추기에도 안성맞춤인 곡들을 뽑아내 1970년대 초중반에 세력을 떨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단순한 음악을 바라는 수요층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1978년 < 뉴스 위크 >지는 “아바의 부패되지 않은(antiseptic) ‘이지 리스닝’ 사운드는 틴에이저에서부터 할머니까지 포괄하는 전 수요층에 어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물론 그들도 비판으로부터 완전 해방되지는 못했다. 팻 분(Pat Boone)의 ‘모래 위에 쓴 사랑의 편지(Love letters in the sand)’에 기초해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I do, I do, I do, I do)’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 영미의 고전적인 팝 스타일에 편승, 기술 제휴함으로써 그들의 구미에 맞추고 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와 함께 음악 외적인 요소가 본질을 압도한다는 문제도 제기돼 한 스웨덴 음악 평론가는 “마케팅, 스테이지 조명 그리고 사운드 기술자를 빼고 나면 그들도 단지 그저 그런 그룹”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록 음악 진영은 < 롤링 스톤 >지 아닌 < 비즈니스 월드 >지를 읽으며 여가를 보내는 상업성 지향의 그들에게 애초부터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곡을 써서, 세대와 계층을 포괄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고 또한 외로이 스칸디나비아 출신 뮤지션들의 미국 상륙(Scandinavian Invasion)을 주도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사실 비(非) 영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영미 팝의 본고장을 정복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 때문인지 예외 없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비슷한 계열의 버블검 그룹들 오스몬즈(Osmonds), 카펜터스(Carpenters)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시달렸다. 아바가 인기를 얻는 데는 여성 멤버인 안니 프리드와 아그네사의 리드미컬한 보컬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끄럽게 곡조를 타면서도 강렬했고, 또 듣기 좋은 하모니를 일궈냈다. 이와 함께 북유럽형의 늘씬한 신체와 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창출의 밑거름이었다. 국내에도 개봉된 78년 다큐멘터리 영화 < 아바(Abba-The movie) >의 재미는 순전 두 여인의 ‘환상적인 엉덩이’로 초점이 맞춰질 지경이었다. ‘오디오+비디오’의 AV시스템을 일찍이 구현한 아바의 네 구성원은 하나로 뭉치기 전부터 본국 스웨덴에서는 알아주는 스타들이기도 했다. 기타를 친 비욘(1945년생)은 포크밴드 웨스트 베이 싱어스(West Bay Singers)를 거쳐 후테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의 멤버였고, 같은 1945년생인 베니는 ‘스웨덴의 비틀스’로 불린 그룹 헵 스타스(Hep Stars)의 베이스 주자로 활약했다. 1966년 우연히 어느 파티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간헐적으로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9년 각각 아그네사와 안니 프리드를 만나게 되면서 공동 전선을 펴기에 이른다. 유일하게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2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해 온 안니 프리드(1945년생)는 13살 때 이미 댄스 그룹의 리드 싱어로 나서 장래의 남편인 베니를 만나기 전까지 일본, 베네수엘라 등 국제 무대에 출전, 명성을 쌓았다. 탁월한 각선미의 아그네사(1950년생)는 스웨덴판 록 오페라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역을 맡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불러 주목받은 인기 가수였다. 그녀와 비욘은 스타들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으며 경찰이 하객을 통제하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1971년 7월 결혼식을 올렸고, 안니 프리드와 베니도 비슷한 시기에 약혼해 동거에 들어갔다. 배우자들로 짜여진 팀이라는 점은 독신주의가 팽배한 1970년대의 ‘감정 중독’ 경향과 견줄 때 신선한 자극이었고 그룹 내부의 갈등 요소를 감소시켜 주는 순기능을 발휘했다. 눈에 띄는 불협화음없이 순탄하게 1970년대 중반을 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그들도 베이비 붐 세대의 자유분방한 가치와 결별한 별종의 연예 스타는 못 되었다.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던 비욘과 아그네사가 1978년 12월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 동거 끝에 배니와 안니 프리드가 1978년 10월 웨딩마치를 올린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터진 일이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까, 베니 부부마저 2년 반만인 1981년 2월 갈라서고 말았다. 이혼과 그에 따른 팀 결속력 와해로 아바는 1981년 이후 급속히 인기 차트로부터 멀어져 갔고 1982년 안니 프리드(이 때부터 프리다), 1983년 아바 아그네사가 솔로 싱글을 내놓으면서부터 공식 해산, 뿔뿔이 흩어졌다. 베니와 비욘은 1984년 팀 라이스(Time Rice)와 연대해 뮤지컬 < 체스(Chess) >레퍼토리를 써 그중 머레이 헤드(Muray Head)의 ‘방콕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bangkok)’을 히트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전성기에 아바는 미국에서 4장의 톱 10싱글과 5장의 톱 40앨범을 기록했다. 물론 두드러진 성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멤버들은 미국을 유일한 ‘실패 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럽만큼 미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 팝 시장 진출의 교두보 확보’라는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들로 인해 훗날 많은 북유럽 출신 가수들이 미국 상륙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노르웨이 그룹 아하(A-ha)가 ‘아바 이후 최대의 스칸디나비아 사절단’으로서 미국 정복에 성공했고, 스웨덴의 록시트(Roxette),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가 아바의 후광을 업고 1990년대 미 팝계를 석권, 스웨덴 열풍을 일으켰다. 특히 혼성 4인조라는 라인업까지 계승(?)한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아바 신화의 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그들을 능가할 만큼의 기세를 떨쳤다. 이제 아바의 이름은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섰지만 이러한 후배들의 잇단 등장은 여전히 아바가 ‘채권자’로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 가수들 뿐 아니라 영미 댄스 음악 지향의 가수들도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아바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마돈나, 팻 숍 보이즈(Pet Shop Boys) 등 영국과 미국 댄스 가수들이 곧 아바에게 바치는 앨범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같은 사실 또한 아바가 팝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 그룹임을 암시하는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시카고(Chicago)는 1960년대를 보내며 다양한 장르로의 분화를 시작한 록이 잉태시킨 장르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재즈 록’의 선두그룹이다. 동시대 활약한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And Tears)와 더불어 재즈 록의 대중화를 주도한 그룹으로서 30여 년 동안 12장의 톱10 앨범과 3곡의 1위 곡을 기록, 미국 팝을 대표하는 밴드로 역사를 장식한다. 1967년 클래식, 록, 재... 시카고(Chicago)는 1960년대를 보내며 다양한 장르로의 분화를 시작한 록이 잉태시킨 장르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재즈 록’의 선두그룹이다. 동시대 활약한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And Tears)와 더불어 재즈 록의 대중화를 주도한 그룹으로서 30여 년 동안 12장의 톱10 앨범과 3곡의 1위 곡을 기록, 미국 팝을 대표하는 밴드로 역사를 장식한다. 1967년 클래식, 록, 재즈 등 서로 다른 음악적 배경을 가진 테리 캐스(Terry Kath, 기타 보컬), 피터 세테라(Peter Cetera, 베이스 보컬), 로버트 램(Robert Lamm, 키보드 보컬), 월터 패러자이더(Walter Parazaider, 색소폰), 다니엘 세러핀(Daniel Seraphine, 드럼), 제임스 팬커(James Pankow, 트롬본), 리 러프네인(Lee Loughnane, 트럼펫) 등 7인조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출발 당시 그룹의 이름은 시카고 트랜시트 오소리티(Chicago Transit Authority)였으며, 같은 시기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의 프로듀서를 동시에 맡았던 제임스 구에르치오(James Guercio)에 의해 결성되었다. 긴 이름을 쳐내고 시카고를 개명한 이들은 69년 데뷔앨범 < Chicago Transit Authority >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큰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1970년 발표한 2집 < II >(이들은 1978년 전까지 앨범제목을 모두 숫자로 했다)에서 ‘Make me smile(9위)’, ‘25 or 6 to 4(4위)’ 그리고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7위)’가 연이어 히트하면서 스타그룹으로 비상한다. 특히 싱글히트행진을 점화시킨 ‘Make me smile’의 뒷면 곡이었다가 1971년 ‘Beginnings(7위)’와 양면 싱글을 이룬 ‘Colour my world’는 이후 올타임 리퀘스트로 사랑 받았으며 이어 골드를 획득한 1972년의 ’Saturday in the park(3위)’과 이듬해 10위에 오른 ‘Feelin’ stronger everyday’와 4위를 차지한 ‘Just you’n’ me’로 최고의 재즈 록 밴드로서 위상을 굳힌다. 하지만 1974년 ‘Wishin’ you were here’, 1976년 그룹 최초로 차트 정상을 밟은 ‘If you leave me now’와 같은 피터 세테라의 보컬이 강조된 곡들이 히트하면서 그룹의 음악은 변화를 예고했다. 1977년 4위에 오른 ‘Baby, what a big surprise’를 끝으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이어가던 이들은 프로듀서로서 10년여를 함께 한 제임스 구에르치오와 결별하고 새 프로듀서를 맞이한다. 바로 현재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는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였다. 그는 그룹의 16번째 정규앨범을 맡아 과감한 변신을 시도, 피터 세테라의 보컬 즉 감성적인 선율을 부각했으며 기타와 키보드 위주로 사운드의 틀을 변형했다. 재즈와 록의 균형에서 록의 비중을 높인 셈이었고 이후 시카고는 완연한 팝 그룹으로 재탄생한다. 1982년 넘버 원의 영광을 안겨준 16집 수록곡 ’Hard to say I’m sorry’로 발진된 인기 퍼레이드는 1984년 17집의 ’Stay the night’ 16위, ’Hard habit to break’ 3위, ’You’re the inspiration’ 3위, ’Along comes a woman’ 14위의 연쇄 히트를 낳았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카고는 1985년 그룹의 간판 보컬이던 피터 세테라가 솔로로 독립하면서 중대 위기를 맞는 듯 했다. 붕괴설까지 나돌았지만 시카고는 새로 맞아들인 보컬 제이슨 셰프(Jason Scheff)과 함께 안정을 찾아 1986년 ’Will you still love me’ 3위, 1988년 ’Look away’ 1위, 1989년 ‘You’re not alone’ 10위, 1990년 ‘What kind of man would I be?’ 5위로 히트행진을 계속해갔다. 1990년 20번째 앨범을 발라드 모음집으로 꾸민 이들은 이듬해 21집을 발표한 이래 긴 공백기를 가지며 히트선상에서 퇴각한다. 투어 위주의 활동을 벌이던 이들은 1997년과 1998년 결성 30주년을 기념하는 두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며,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 레니 크레비츠(Lenny Kravitz),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 등 쟁쟁한 후배뮤지션들과 작업한 신곡들을 선보였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 등과 함께 1990년대 중 후반의 팝 시장을 천하 삼분했던 셀린 디온(Celine Dion)은 디바(diva)의 정점을 대표하는 여가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머라이어 캐리에게 밀려 만년 2등 가수의 한을 삭였던 그녀는 영화 < 타이타닉 >의 테마송인 ‘My heart will go on’을 통해 단숨에 넘버원 팝 싱어의 반열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의 작은 집에서 1968년 첫 울음보를 터트린 셀린 디온. 그녀는 합계가 무려 16명인 대식구의 막내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또한 부모님 모두 노동자 출신이었기에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부모님의 우산 아래 셀린 디온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을 맘껏 틔웠다. 5살 때부터 부모님의 피아노 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2살 때에는 ‘It was only a dream’이라는 최초의 자작곡을 썼다는 등의 후일담들이 잘 증명해준다. 오빠와 어머니의 전폭적 지원 하에 상기한 곡을 테이프화(化)했던 셀린 디온. 그녀는 그것을 매니저인 르네 앤젤릴(Rene Angelil)에게 보낸 뒤, 답변을 기다렸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허나 독촉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셀린 디온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르네 앤젤릴은 그 날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녀는 정식 데뷔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셀린 디온의 노래를 직접 들은 순간, 르네 앤젤릴은 그녀가 곧 인터내셔널 슈퍼 스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983년 15살의 나이에 발표했던 음반 < D’Amour Ou D’Amite >을 통해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고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야마하 작곡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이후 셀린 디온의 행보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녀는 그 즈음 조우했던 베테랑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의 인연 덕에 걸프 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기획 앨범 < Voices That Care >에 참여, 수많은 팝 필드의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좁은 문’뿐인 듯 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우선 음악 외적인 면에서 파격적 변신을 단행했다. 팝 계의 별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만큼이나 이미지 메이킹 또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 동시에 셀린 디온은 영국의 랭귀지 스쿨에서 언어 교육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틴에이저에서 성숙미를 내뿜는 여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드백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90년에 발매했던 처녀작 < Unison >(74위)이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35위와 4위를 기록한 ‘If there was (any other way)’와 ‘Why does my heart beat now’의 선전에 힘입어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 허나 정작 그녀를 꼭지점으로 견인했던 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였던 ‘Beauty and the beast’였다. 차트 1위를 단박에 꿰찬 곡은 그녀에게 1992년 그래미의 팝 듀오/그룹 부문 트로피를 안겨주며 이후의 성공 시대를 예감케 했다. 또한 2집 앨범인 < Celine Dion >(1992)에도 수록되어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부수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곡 외에 다이안 워렌(Diane Warren) 작곡의 ‘If you asked me to’(4위), ‘Nothing broken but my heart’(29위), ‘Love can move mountains’(36위) 등이 팬들의 애정 공세를 한 몸에 받았다. 같은 해에 내놓았던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의 주제곡인 ‘When I fall in love’(23위) 역시 대박이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셀린 디온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매니저였던 르네 앤젤릴과의 결혼이 바로 그것. 1988년부터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둘은 6년 뒤인 1994년에야 그 사실을 발표하고 몬트리올의 노틀담 성당에서 결혼, 세간을 놀라움 속에 빠뜨렸다. 정확이 배가 되는 나이차도 화제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셀린 디온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 간, 무려 6장의 앨범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주는 양적 포만감부터가 남달랐다. 1993년의 < Colour of My Love >(4위)가 첫 테이프를 끊으며 제니퍼 러시(Jennifer Rush)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power of love’(4주간 1위), 그리고 ‘Misled’(23위) 등의 히트 넘버들을 배출했다. 1994년과 1995년에 셀린 디온은 두 장의 불어 LP를 내놓으며 음악적 본령을 되새김질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팝 클래식인 ‘Calling you’를 수록한 < Live A L’olympia >와 장자크 골드만이 프로듀스해준 < D’eux >이었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 800만장을 세일즈, 가장 많이 팔린 샹송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은 단연코 1996년의 팝 마스터피스 < Falling Into You >였다.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집계된 판매량이 1100만장인 작품은 그 해 그래미에서 ‘팝 앨범’과 ‘올해의 앨범’, 두 개 부문을 석권하며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의 테마송이자 다이안 워렌이 써 준 ‘Because you loved me’(1위)를 위시로 팝 고전을 다시 부른 ‘All by myself’(4위), ‘It’s all coming back to me mow’(2위) 등이 차트에 핵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같은 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한 블록버스터 무비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14주 연속 1위)은 더했다. 또 다시 그래미 두 개상을 차지하는 등, ‘셀린 디온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곡이 수록된 1997년의 앨범 < Let’s Talk About Love >(1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두 음반의 합산 판매고가 무려 6000만장을 상회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녀는 실로 당대에 무적, 팝 계 최고의 디바 자리에 우뚝 섰다. 그간 참여했던 뮤지션들을 포함해 새로 가세한 조지 마틴(George Martin), 비지스(The Bee Gees), 캐롤 킹(Carole King),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등, 후자에 참여한 초특급 아티스트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당시 그녀의 입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셀린 디온은 크리스마스 스페셜 반인 < These Are Special Times >(1998, 2위)와 샹송 앨범 < S’il Suffisatt D’aimer >(1998)를 선보이고 베스트 컬렉션인 <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1999, 1위)을 내놓는 등,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남편의 후두암 투병이라는 절망적 사건이 발발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비극이 종결되고 셀린 디온에게 행복이 찾아왔던 때는 2001년이었다. 체외 수정에 성공하며 그토록 소망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편의 증세도 나날이 호전되는 등, 셀린 디온이 가정에서 본업으로 컴백할 기운이 날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2002년, 무려 5년 만에 출시했던 정규작 < A New Day Has Come >은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초로 발매 첫 주에 정상에 등극하며 변함없는 팬 베이스를 과시했다. 허나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전성기 시절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현재 셀린 디온은 1년 만에 신작 < One Heart >를 내놓으며 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3/04 배순탁(greattak@izm.co.kr) 오이뮤직 머라이어 캐리가 있고 휘트니 휴스턴이 있지만 이들 못지 않게 지난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수가 셀린 디온(Celine Dion)이다. 흔히들 이들을 오페라의 주역가수에서 나온 말로 최고 인기의 여가수를 의미하는 어휘인 디바(diva)로 일컫는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가 팝 음악계의 디바 시대를 이끌었다면 셀린 디온은 디바 시대의 정점에 선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셀린 디온은 같은 음반회사 소니 뮤직에 소속된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90년대 중반까지 만년 2등 가수였다. 하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나의 마음은 영원할 거예요(My heart will go on)’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명실상부한 공동 1위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 모두 셀린 디온의 밑으로 내려앉고 말았으며 급기야 ‘셀린 디온 격파’를 외치며 함께 듀엣 곡을 내놓는 공동 대항전선을 펴기도 했다. 근래 셀린 디온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이보다 잘 말해주는 단서도 없을 것이다. 1998년 연말호에서 영국의 잡지 ‘Q’는 소니 뮤직의 통계를 빌어 “지난 30개월 동안 셀린 디온은 매 1.2초마다 한 장의 앨범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96년 발표한 앨범 < 너에게 빠져 (Falling into you) >가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2500만장, 97년 말에 나온 후속 앨범 < 사랑을 얘기합시다(Let`s talk about love) >가 2400만장이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수립한 것을 두고 시간당 수치를 계산한 것이다. ‘1초당 한 장’의 파죽지세는 이후에도 변함없어 현재 두 앨범은 모두 30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어서 프랑스어 앨범과 히트곡 모음집도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셀린 디온이 이처럼 가공할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참 단순한 설명이지만 가장 확실한 분석이다. 일례로 셀린 디온의 히트송 ‘이제 모두 나한테 되돌아오네요(It`s all coming back to me now)’를 들어보면 왜 때로 ‘질릴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지 알게 된다. 셀린 디온은 엄청난 보컬의 파괴력이 주무기이다. 쉬지도 않고 20곡을 내리 한결같이 높은 음으로 질러대는 놀라운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가창력이 뛰어난 다른 여가수들과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무대는 정적이고 우아한데 반해서 셀린 디온의 공연은 열띠고 힘이 넘친다. 공연장은 그래서 어떤 헤비메탈 그룹의 무대 못지 않은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감상하더라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이런 에너지와 파워 말고도 그녀를 당대 톱 가수로 부상시켜준 또 하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사 해석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결코 억지로 질러대지 않는다.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미리 짜놓은 적은 없다. 노래 부르기란 기본적으로 첫 키스나 첫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키스나 포옹할 때 미리 리허설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치르는가?” 마치 실제처럼 가사의 감정을 충분히 살리되 정해진 공식대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셀린 디온은 철저히 백인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도 딴 가수와 차별화된다. 머라이어나 휘트니를 비롯해서 근래 디바들 노래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음악 즉 리듬 앤 블루스의 느낌이 녹아있다. 하지만 셀린 디온은 그러한 공통분모를 배격하고 철저히 백인 스탠더드 팝을 구사한다. 여전히 흑인음악이 친근감이 덜 한 유럽의 기성세대 음악팬들이 이 때문에 셀린 디온에게 열광한다. 캐나다 퀘벡 태생인 그녀는 캐나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가수이기도 하다. 캐나다 음반산업협회는 올해 초 셀린 디온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국내와 국외에서 가장 음반을 많이 판 캐나다가수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9년 말 캐나다의 음반판매고는 9백만장으로 어떤 캐나다가수보다 많았으며 해외에서는 1억1천장을 넘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근래 최고인 샤니아 트웨인과 브라이언 아담스도 그녀에게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물론 특히 퀘벡과 같은 문화권인 프랑스도 셀린 디온을 ‘국민가수’ 또는 ‘국보급 가수’로 떠받든다. 프랑스 팬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이미 두 차례나 받았다. 셀린 디온도 이를 의식해 정기적으로 불어음반을 발표하고 있다. 셀린 디온의 지난 94년 말 결혼은 특급화제였다. 1968년 생으로 스물 여섯이던 그 해 그녀는 정확히 나이가 배인 52세의 매니저 레니 안젤리와 몬트리올 노틀담 성당에서 웨딩 마치를 거행했다. 어렵던 시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셀린의 음반작업을 주선한 매니저와 결혼하자 사람들은 사랑의 결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요즘 가수치고는 드물게 ‘의리형’ 인물이라고 셀린 디온을 높이 평가했다. 너무도 바쁜 스케줄로 가정생활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아직 레니와의 사이에 자식 소식은 없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 탓인지 더욱이 사람들은 언제 그녀가 아기를 가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전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녈 인콰이어러’는 “셀린이 체외수정을 통해 현재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보도했지만 셀린 디온 측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며 그 신문에 대해 2천만달러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셀린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임을 웅변하는 에피소드들이다. 지난 91년 ‘지금 내 심장이 어디서 두근거리나요(Where does my heart beat now)’를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은 이래 무수한 히트퍼레이드를 펼치며 그녀는 ‘90년대의 가수’로 영광의 나날들을 보냈다. 휴식 후 내후년에 신보가 나오게 되면 다시 광풍을 몰아칠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진형형이라 실감은 나지 않지만 분명 셀린 디온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노래 : Debby Boone (데비 분,Deborah Anne Boone / Debby Boone Ferrer)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은 1980, 1990년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던 메탈의 포화를 뚫고 스탠다드 팝 시장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디바’ 뮤지션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알앤비 가수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친척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대형 가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며 그 실력을 뽐냈다.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휘트니는 10대의 나이에 이미 모델, 배우, 가수의 세 가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샤카 칸(Chaka Khan) 등의 백업보컬로 또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2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폴 자바라(Paul Zabara)의 ’Eternal love’라는 곡에 보조 보컬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정식 음반 녹음에 참여한다. 이듬해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레코드사는 데뷔 앨범에 27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85년 데뷔앨범 < Whitney Houston >은 흑인 디바 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며 솔로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 중 가장 오랜 기간 1위에 머무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2,3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앨범 판매를 이루어내며 데뷔 앨범 하나로 팝계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하게 된다. 앨범 내에서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조지 벤슨의 곡 리메이크)의 세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에 오르고, 앨범의 경이적인 성공으로 86년 그래미와, 86,8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차지한다. 1987년 그녀는 두 번째 앨범 < Whitney >를 통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간다. 전작보다 비트감을 더한 이 앨범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일구어 낸다. 발매 첫 주에 미국과 영국차트에서 동시에 1위에 오르는데 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한 기록이었다. 앨범은 차트 정상에 11주간 머물렀으며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갔다. 싱글들의 인기도 대단해서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loves me)’,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네 곡이 연속해서 차트 정상을 밟으며 이전 앨범부터 7개의 싱글이 연속해서 정상을 밟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으로 또다시 1988년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역시 88년, 89년의 아메리칸 뮤직어워드를 수상한다.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정통 소울 아티스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이지만 1,2집에서 보여준 음악은 대중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흑, 백의 사운드가 뒤섞인 음악이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1990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 I’m Your Baby Tonight >에서는 대중성을 신경 쓰지 않고 정통 소울 음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루떠 반데로스(Luther Vandross)등과 함께 작업하는 등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던 이 앨범은 역시 이전 앨범들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I’m your baby tonight’, ’All the man that I need’가 1위에 올랐고, 앨범은 전 세계 1,200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그 인기는 대단했다. 세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세 장의 사운드 트랙을 연속 발표한다. 시작은 < 보디가드 >였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보디가드’의 사운드 트랙에서 6곡을 노래했고, 이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첫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돌리 파튼의 곡을 리메이크)는 차트 정상에 14주간 머물렀으며, 앨범은 20주간 1위를 지켰고, 세계적으로 3,5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4년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래미를 거머쥐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8개 부문 수상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휘트니 휴스턴은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자신이 주연한 < Waiting for Exhale >의 사운드 트랙에 3곡을 수록하면서 영화와 앨범의 성공에 기여한다. 이 앨범은 노장 흑인 여가수들과 신예 흑인 여가수들이 총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이비페이스(Babyface)는 그래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영화 < The Preacher’s Wife >에서 주연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14곡을 자신이 직접 맡은 이 앨범은 가스펠 위주의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대중성보다는 종교적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앨범판매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만 전념해왔던 그녀는 98년 8년 만에 정규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한다.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에 충실함을 기했던 이 앨범은 1,0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며 그녀의 앨범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앨범 내에는 영화 ’이집트의 왕자’ 주제곡인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듀엣 곡 ’When you believe’가 수록되어 있다. 2000년 그녀는 자신의 15년 음악생활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 The Greatest Hits >를 발표한다. 조지 마이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듀엣 곡 등 네 곡의 신곡도 포함하고 있는 이 앨범은 발라드 곡들만을 모은 < Cool Down >과 댄스곡 및 댄스 리믹스 곡들을 모은 < Throw Down > 두 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 그리고 ‘One way ticket’으로 국내 팝 음악의 수용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닐 세다카(Neil Sedaka)는 한 번도 어려운 전성 시대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첫 번째 전성기는‘Oh! Carol(16위)’과 ‘You mean everything to me(17위)’, ‘Calendar girl(4위)’, ‘Little devil(11위)’, ‘Bad girl(33위)’, ‘Breaking up is hard to do(1위)’, ‘Stairway to heaven(9위-레드 제플린의 노래와는 동명이곡)’, ‘Happy birthday, sweet sixteen(6위)’, ‘Next door to an angel(5위)’처럼 청소년기의 감수성을 읊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였고, 두 번째 융성기는 엘튼 존(Elton John)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도움으로 ‘Laughter in the rain(1위)’, ‘Bad blood(1위)’, 그리고 캡틴 & 테닐(Captain & Tennile)이 커버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는 물론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 트로피를 거머쥐게 한 ‘Love will keep us together’같은 성인 취향의 팝록으로 재기에 성공한 1970년대 중반이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인 것처럼 영국 뮤지션들이 미국을 침공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 대중 음악의 황금기를 일군 심장부도 뉴욕에 위치한 브릴 빌딩가(街)였다. 바로 이곳에서 일류 작곡가들이 만든 명곡들이 가지를 뻗고 이파리를 피워 1960년대 음악을 꽃피게 했다. 캐롤 킹(Carole King),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 레이버 & 스톨러(Leiber & Stoller), 베리 만 & 신시아 웨일(Barry Mann & Cynthia Weil), 닐 세다카 등은 당시 프리미엄급 작곡가였고, 이 중에서 캐롤 킹과 닐 세다카는 가수로 전업해 팝음악 계에 지워지지 않는 업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다루며 음악적인 능력을 키워 온 닐 세다카는 1939년 3월 13일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고 모든 음악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줄리아드 음악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천재성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작곡가의 첫 번째 작품은 카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의 ‘Stupid Cupid(17위)’였다. 이 곡의 히트로 각 음반사들이 눈독을 들인 닐은 1950년대 후반 RCA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수로서의 캐리어도 쌓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였던 캐롤 킹에게 바치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는 특히 우리 나라에서 국가 대표 급 팝송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1962년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실감했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 뮤지션들의 융단 폭격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위축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천재 아티스트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I’m not in love’로 알려진 10CC의 멤버 그래함 굴드만(Graham Gouldman - 1980년대 앤드루 골드와 함께 Wax 결성)이나 엘튼 존(Elton John) 등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Laughter in the rain’, ‘Bad blood’, ‘Love will keep us together’는 정상을 호령했고, 14년 전에 1위의 고지를 차지했던 ‘Breaking up is hard to do’는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받아 9위를 차지함으로서 다시 한번 팝음악의 고전임을 공인 받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국내에서는 현재 자동차 CF의 배경 음악으로 쓰여 TV 방송을 타고 있는 ‘Oh! Carol’과 ‘You mean everything to me’그리고 1980년대 초반 유로 디스코 밴드 이럽션(Eruption)이 재해석한 ‘One way ticket’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음반 작업보다는 예전의 히트곡들을 컴필레이션으로 짜집기하거나 자신의 곡들을 새로운 스타일로 재해석한 커버 버전 형식의 음반을 발매함으로서 예전의 영광을 답습하고 있지만 그가 여전히 위대한 가수 겸 작곡가라는 이 ’평가 불변의 법칙’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多才)를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1950년 5월 13일 스티브 랜드 모리슨(Steveland Morrison)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미조리주 출신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의 과잉 산소 공급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을 드러내 10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2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이끄는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다.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아름으로 발표한 그의 첫 싱글인 라이브 버전 ’Fingerprints-part 2’(1963)가 발표 즉시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한다. 1965년부터 이후 6년 간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9),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그는 명실상부한 모타운 대표 인기스타로 떠오른다. 21살이 되던 1971년 모타운 측과 재계약을 앞두고는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까지 철저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모타운 사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웠던 요구를 그는 끝내 관철시키며 셀프 프로듀싱으로 제작한 첫 앨범 < When I’m Coming From >(1971)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2년 < Music of my Mind: 앨범 차트 21위 >를 시작으로 같은 해 가을 발표된 명반 < Talking Book:앨범 차트 3위 >(1972)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앨범 모든 수록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해낸다. 또한 이 앨범은 A면의 첫 곡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와 B면의 첫 곡 ’Superstition’을 모두 싱글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다. 1972년 같은 해 발표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는 기존 3분대의 모타운 식 히트 곡의 틀을 벗어나 ’Super woman’, ’Maybe your baby’와 같은 6-7분대의 대곡을 과감히 수록했고, 재 계약을 통해 받은 계약금으로 클라비넷, OBX, ARP, 폴리포닉, 무그와 같은 다양한 신시사이저 장비들을 도입, 사운드의 혁신을 일궈낸다. 이듬해 발표한 < Innervisions >(1973)는 그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명반으로 흑인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Living in the city’와 재즈적인 접근을 강하게 드러낸 ’Too High’, ’Superstition’에 버금가는 펑키한 넘버 ’Higher Ground’, 절대자인 신에게 헌정하는 가스펠 곡 ’He’s Misstra know it all’을 담은 수작이었다. 전작에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 Innervisions >는 이듬해인 1974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 부문을 비롯,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올린다. 1974년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하며 잠시 활동의 위기를 맞은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 Fulfillingness’ First Finale >(1974)를 발표하며 ’You Haven’t done nothing’, ’Boogie on Reggae woman’을 각각 팝 차트와 R&B 차트 1위에 올리며 앨범은 1975년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 5개 부문을 석권한다.(올해의 앨범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건 스티비 원더가 처음이었다.) 1975년 모타운 사와 1천 3백만 불의 재계약을 한(당시 팝 음악계에선 최고의 액수)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더블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을 발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히트곡이 쏟아진 앨범에서 ’Sir Duke’, ’I Wish’가 팝 차트 1위에 오르고,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1998년에 리메이크 하기도 한 7분이 넘는 대곡 ’As’(36위)와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코러스와 재즈 플롯주자 바비 험프리(Bobby Humphrey)가 참여한 라틴 팝 ’Another star’(32위)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다. < Songs on the key of life >는 이듬해 1977년 다시 그에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다 준다. 70년대 말, 스티비 원더는 흑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음악 외에도 흑인의 권익신장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4년여의 공백 끝에 발표한 < Hotter than July >(1980)의 수록곡 ’Happy Birthday’를 통해 이런 그의 노력을 전 세계에 알린다.(결국 198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국경일로 지정된다) 앨범에선 이 외에 레게의 시인 밥 말리(Bob marley)에게 헌정하는 레게 넘버 ’Master Blaster(jammin’)’와 지금껏 애청되는 그의 러브 발라드 ’Lately’를 차트에 진입시키는(각각 5위, 64위) 성과를 거둔다. 영화 음악 작곡에도 열심이었던 스티비 원더는 <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 >(1979)를 시작으로, 그에게 오스카 주제가 상을 안겨준 영화 < Woman in Red >(1984)의 테마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팝 차트 1위에 올리며 전 세계를 스티비 원더 열풍 속으로 다시 한번 몰아넣는다. 그의 영화 음악 작업은 < Jungle Fever >(1991), < The adventure of Pinocchio >로 계속된다. 1983년엔 폴 메카트니와 함께 한 듀엣 곡 ’Ebony & Ivory’로, 1985년 ’Part time Lover’로 다시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 Character >(1987)이후 8년이라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 그는 < Conversation Peace >(1995)로 다시 팝 무대에 복귀한다. 90년대 활동은 비록 예전만큼의 날카로운 창조력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수많은 팝 음악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는 그 누구도 재현 못할 ’팝 음악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린다.
그 유명한 모타운 레코드사의 창립주이자 사장인 베리 고디(Berry Gordy)를 아버지로 둔 덕에 타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 록웰(Rockwell)은 자신의 가수생활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화려해지는걸 원하지 않았기에 본명인 케네디 고디(Kennedy Gordy)대신 자신의 고등학교 밴드의 이름을 따서 록웰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디트로이트 태생의 록웰은 아버지를 따라 L.A로 이주, 그곳에서... 그 유명한 모타운 레코드사의 창립주이자 사장인 베리 고디(Berry Gordy)를 아버지로 둔 덕에 타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 록웰(Rockwell)은 자신의 가수생활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화려해지는걸 원하지 않았기에 본명인 케네디 고디(Kennedy Gordy)대신 자신의 고등학교 밴드의 이름을 따서 록웰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디트로이트 태생의 록웰은 아버지를 따라 L.A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자연스레 유명 아티스트들과 친분을 나누었고 완벽한 음악적 환경 속에서 자란 탓에 가수가 되는 것은 그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20세가 되던 해인 84년 데뷔앨범 < Somebody’s Watching Me >가 발표된다. 앨범 전체의 색깔이 마이클 잭슨의 마이다스 앨범 < Thriller >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데, 타이틀곡은 마이클 잭슨과 저메인 잭슨이 백보컬로 참여하여 차트 2위까지 오르는 선전을 펼쳤고 국내에선 감미로운 슬픈 발라드 ’Knife’가 아직까지도 애청되는 레파토리로 남아있다. 특히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직접 쓰면서 프로듀싱까지 해내는 그의 비상한 능력을 맘껏 발휘하면서 자신의 주가를 급상승시켰다. 이듬해 발매한 2집 앨범 < Captured >는 스티비 원더가 세션맨으로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고, 록웰 자신도 거의 원 맨 밴드에 가까운 악기연주를 선보였다. 호소력 짙은 첫 싱글 ’He’s a cobra’를 비롯하여 아버지가 제작한 영화 < 마지막 드래곤 >(The Last Dragons)에 삽입된 ’Peeping tom’, 데뷔앨범의 ’Knife’를 연상시키는 ’Dont if make you cry’등이 주목을 끌었으나 전작에 미치지는 못했고 1986년 앨범 < The Genie >를 끝으로 현재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혜성같이 등장하여 단 3년만에 메이저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으나 그 시점만은 ’준비된 가수’로서 나름의 실력을 과시했다. 쉽게 식상해버린 점이 무척 아쉬운 대목이지만 여전히 그의 감상적인 발라드 ’Knife’는 듣는 이를 무드에 젖게 한다.
노래 : Carol Kidd (캐롤 키드 (재즈 보컬))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Sexy music’’의 멜로디를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 선율은 몰라도 그 관능적이다 못해 불경하기까지 했던 노래 제목을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놀란스의 ’’Sexy music’’은 메이드 인 잉글랜드의 가족 그룹 둘리스(Dooleys)의 ’’Wanted’’, 독일산(産) 3인조 여성 보컬 트리오 아라베스크(Arabesque)의 ’’Hello, Mr. Monkey’’와 ... 198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Sexy music’’의 멜로디를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 선율은 몰라도 그 관능적이다 못해 불경하기까지 했던 노래 제목을 몰랐던 사람이 있었을까? 놀란스의 ’’Sexy music’’은 메이드 인 잉글랜드의 가족 그룹 둘리스(Dooleys)의 ’’Wanted’’, 독일산(産) 3인조 여성 보컬 트리오 아라베스크(Arabesque)의 ’’Hello, Mr. Monkey’’와 함께 소위 ’’한국의 3대 디스코 음악’’으로 198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디스코의 전형이었다.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놀란(Nolan) 가(家)의 5자매로 구성되었지만 곧 큰언니가 결혼과 함께 밴드에서 출가하면서 4인조로 굳어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나름의 지명도를 갖고 있던 일본의 동경 가요제에 ’’Sexy music’’으로 출전한 자매들이 그랑프리를 차지하자 그 인기는 현해탄을 건너와 국내에서는 스폰지가 물을 먹듯 급격히 퍼져 갔다. 아름다운 용모와 제목처럼 ’’섹시한’’ 율동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의 애간장을 태운 이들은 우리나라에서만 스타였던 둘리스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영국 출신, 가족 중심의 그룹, 동경 가요제 대상 수상, 그리고 영국이나 일본에서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하늘만큼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는 점 등이다. 이들의 인기 상승은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의 관심을 이러한 유흥이나 스포츠에 돌리기 위해 오락 문화에 대해 빗장을 풀어 준 영향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놀란스, 둘리스, 아라베스크 모두 미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팀들이었다. 이때부터 국내 팝 청취자들은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나라들의 대중 음악에도 본격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FR 데이비드(FR David), 가제보(Gazebo), 런던 보이스(London Boys), 조이(Joy) 등은 이러한 선배들이 일군 금단의 열매를 맛본 것이다. ’’Sexy music’’ 이후 발표된 일련의 싱글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일정 수준의 인기 가도를 달렸다. 초기 로큰롤 시절 두왑 밴드의 코러스를 살린 ’’I’’m in the mood for dancing’’, 가장 멋진 하모니를 들려준 ’’Who’’s gonna rock you’’, 그리고 펑키(funky)한 ’’Don’’t love me too hard’’ 등 그들이 발표하는 싱글 모두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래를 직접 빚어내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국내의 록과 아트록 매니아들은 그러한 이유로 이 놀란 가문의 자매들에게 돌팔매를 가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아티스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모진 생명력을 과시한다. 1999년 ’’Sexy music’’이 수록된 팝 모음집 음반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1982년 내한 공연 때 놀란스를 환영했던 것처럼 이 앨범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수련해 온 한 소년은 어느 날 에드 셜리번 쇼에 나온 비틀즈의 모습에 감명 받아 뮤지션으로서 삶을 영위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만큼이나 좋아했던 권투 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한 우물만 파기로 한 뒤 로컬 밴드에 몸담으며 내공을 연마해나갔다. 당시 20살이 채 안된 어린애가 장차 거물급 싱어 송라이터 명단에 세세토록 이름을 남길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건 당연지사.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 했던 그 아이, 바로 영원한 피아노맨 빌리 조엘(Billy Joel)이다. 빌리 조엘은 1965년부터 에코스(The Echoes), 해슬스(The Hassles), 아틸라(Attila) 등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팝 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허나 당시 하드록, 사이키델릭이 주를 이뤘던 음 세계는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사장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해 저널에 비평을 기고하고 음악적 실패로 인해 마약 센터에 들락거리며 자살을 기도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그를 엄습한 시기였다. 1971년에 빌리 조엘은 솔로 데뷔작 < Cold Spring Harbor >를 내놓으며 복귀식을 치렀다. 발표 직후 가졌던 공연 릴레이는 호평 받았지만 지지부진한 판매고는 여전했다. 결국 빌리 조엘은 L.A.에 새 둥지를 틀었고, 빌 마틴(Bill Martin)이란 가명으로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재기를 꿈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비슷한 시기에 겹경사가 일어났다. 1973년 엘리자베스 웨버와 결혼하며 안정을 찾았고 ’Captin Jack’의 라이브 버전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을 간파한 콜롬비아(Columbia)가 구애의 손길을 보낸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같은 해에 2집 < Piano Man >이 등장했다. ’피아노맨’이라는 별명의 진원지이기도 한 앨범은 빌보드 차트 27위까지 올랐고 타이틀 트랙 역시 싱글 차트 40위권에 안착하며 그에게 처음으로 성공의 단 열매를 맺어주었다. 제이 가일스 밴드(The J. Geils Band), 두비 브라더스(The Doobie Brothers)의 오프닝을 맡아 투어를 돈 뒤, 1974년 말에 내놓은 3집 < Streetlife Serenade >(1974)은 차트 35위를 기록하며 탄탄대로를 열어주는 듯 했다. 허나 4집 < Turnstiles >(1976)는 명곡 ’New York State of Mind’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 차트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제작 전에 프로듀서인 궈시오(Guercio)를 해고하고 아내를 매니저로 기용하는 등, 잡음이 많았던 점이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1977년의 < The Stranger >는 오늘날의 빌리 조엘이 있게 한 명반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미국에서 각광받았던 시티 뮤직을 대폭 수용한 작품은 차트 2위까지 상승하며 단숨에 플래티넘을 따냈고 ’Just the way you are’(3위), ’Monin’ out’(17위), ’Only the good die young’(24위), ’She’s always a woman’(17위)등, 네 곡의 히트작을 쏟아냈다. ’Just the way you are’는 그래미에서 ’Record of the Year’와 ’Song of the Year’, 두 개 부문을 수상하며 비평적 찬사를 안겼다. 6집 < 52nd Street >(1978)도 맹렬한 기세를 이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능가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8주간 1위를 고수하며 한달 만에 200만장을 세일즈했고 ’My life’(3위), ’Big shot’(14위) ’Honesty’(24위)등이 수시로 울려 퍼졌다. 마침내 그는 그토록 소망했던 그래미 ’올해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펑크와 뉴 웨이브의 세상 속으로 과감히 돌진한 < Glass Houses >(1980)에서도 한번 불붙은 열기는 식지 않았다. 급격한 음악적 변화에도 기존 팬들은 쌍수 들어 그를 환영했다. 앨범 차트 6주간 1위, 4곡의 히트송 배출, 그래미 ’Best Rock Vocal Performance, Male’ 부문 수상이 마치 자연스런 수순처럼 보일 정도였다. 1년 뒤, 초기곡들의 라이브 콜렉션인 < Songs in the Attic >(1981)을 발표한 뒤, 빌리 조엘은 이혼과 오토바이 사고를 겪으며 위기의 남자가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삶에 대해 컨셉트 앨범으로 꾸민 야심작 < The Nylon Curtain >(1982)마저 낮은 판매량에 허덕이며 전성 시대가 지난 것 아니냐는 추측성 발언을 낳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과거 사운드로 회귀한 < An Innocent Man >(1983)을 내놓으며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 차트 1위에 오른 ’Tell her about it’을 비롯해, ’Uptown girl’, ’An innocent man’, ’Keeping the faith’ 등이 바톤 터치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MTV 시대를 맞이하며 비디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만난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결혼에 골인했다. 1985년에 중간 결산 차원에서 피아노 맨은 히트곡 모음집 < Greatest Hits, VolumeⅠand VolumeⅡ >을 내놓으며 미국에서만 무려 2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판매량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자 미국인들이 그의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 The Bridge >를 발표하여 성공을 이어나간 빌리 조엘은 1987년, 소련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의 실황을 담은 더블 앨범 < Kohuept(Live In Leningrad) >(1987)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장 결석과 법정 소송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 Storm Front >(1989)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을 선물한 작품이었다.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싱글 ’We didn’t start the fire’가 세계 역사를 훌륭히 그려냈다는 이유로 미국 전역의 고교에 악보가 배포되는 등 화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베스트 앨범에서 숫자로 드러난 미국인들의 애정이 공적으로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퀸시 존스, 자니 캐쉬, 아레사 프랭클린과 함께 1990년부터 1년 간 가졌던 월드 투어로 ’Grammy Living Legend’상을 수상한 빌리 조엘은 1993년 나온 < River of Dreams >(1위)로 순항을 거듭했다. 1996년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이혼한 후, 이 위대한 싱어 송라이터는 20세기 마지막 날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에서 가졌던 공연 결과물 <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 >를 발매하며 새 출발을 암시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히트송 콜렉션인 < The Essential Billy Joel >(2001)로 팝 아티스트로서의 화려했던 시절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빌리 조엘은 클래식 크로스오버 작품인 < Fantasies & Delusions >을 소개하며 클래식 작곡가로서의 야심한 행보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노래 : Patti Page (패티 페이지)
노래 : Frank Sinatra (프랭크 시나트라,Francis Albert Sinatra)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그 주인공은 40년대의 빅 스타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셈이다. 40년대를 통해 그는 여성팬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42년 그가 ‘타미 도시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싱어로 활약하면서 뉴욕의 파라마운트 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수많은 여고생들이 입장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당시는 ‘빅 밴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지만 소녀들은 빅 밴드의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밴드의 젊고 깡마른 가수를 보려고 벌떼처럼 몰려든 것이었다. 그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서의 십대 소녀들은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고 급기야 복도에서 졸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때 졸도한 소녀들 가운데는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져 ‘흠집’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현대의 ‘팝 히스테리’가 탄생된 순간이었다. 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명의 틴에이저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나중에는 단축되어 ‘목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젊음의 음악인 록 뮤직이 아닌 당시의 팝, 그것도 ‘어른적인’ 스탠다드 팝을 가지고 소녀 관객의 흥분을 자극했다는 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그만큼 그는 충분한 매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전시(戰時)였고 젊은 남자들이 징병으로 끌려가 없고 여성들 가슴에 고독이 엄습해 왔을 때 ‘이웃집 청년’같은 그는 알맞은 해소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15년 뉴 저지주 호보큰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부르는 재질이 뛰어나 고교 때는 교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면 졸업 후에는 신문을 나르는 트럭 운전사, 스포츠 기고가로 활약했다. 36년 빙 크로스비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듬해 팝계에 데뷔했다. 그 후 그는 십대 소녀의 우상이 되었고 팝계뿐 아니라 영화계도 섭렵, 전천후 스타로 명성을 휘날렸다. 80세를 목전에 둔 지금도 활약을 계속하여 ‘팝 뮤직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음악팬들에게 ‘품위있는 노신사’, ‘노래하는 예술가’ 등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대중음악계 ‘보수 진영의 원로’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 비판적 시각의 젊은이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비난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청년 세대의 우상으로 무대생활이 펼쳐졌지만 그의 시대 이후 등장한 젊은 감각의 노래에는 등을 돌렸다. 그는 4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와 ‘중산층의’ 대중음악인 스탠다드 팝만을 고수했다. 그가 선 무대는 늘 그런 음악에 걸맞는 고급 사교홀이나 서민층은 접근하기 어려운 대극장이었다. 편안하게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는 50년대 중반 일대 위기를 맞았다. 대중음악계에 록 뮤직이 침투한 것이었다. 그는 뉴 뮤직인 록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다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자, 즉각 위기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여 록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사십대에 들어서 리듬이 강한 록 음악을 그가 수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시각은 너무도 강경했다. 그는 58년 의회의 연단에 등장, 록 음악의 폐해를 증언했다. 여기서 그는 록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다. 또 록큰롤 하는 가수들은 저능한 되풀이와 교활하고 저속한, 단순하게 말하면 더러운 노랫말로 십대를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쁘다는 어휘는 총동원시킨 듯한 이런 규탄도 부족했던지 시나트라는 “그런 빗나간 방식으로 록 음악은 지구상의 모든 구렛나룻 십대 범죄자들의 군대 음악이 되려 하고 있다”거 쏘아붙였다(구렛나룻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상징이었다). 스탠다드 팝의 위기라는 판단에서 록을 공박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록 뮤직의 이념적 특질이라고 할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도전적 가치를 혐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기 세대의 음악 스탠다드 팝에 평생 수절(?)한 만큼, 50년대 이후 록 음악과포크 음악이 내세운 ‘저항’의 기조에는 쌍심지를 켜고 반발했던 것이다. 저항을 이념으로 했던 70년대 말의 펑크를 비난한 것이나 90년대 미국 국가의 연주를 거부해 물의를 빚은 시네드 오코너의 행각에 크게 분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록 음악 불가론’을 제창했던 그는 록의 위용이 의외로 거세다고 판단, 곧 입장을 수정했고 60년 TV 프로그램에서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무대의 황제’라는 칭송과 함께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기도 했다. 그는 데뷔이래 부와 명성에 엄청난 집착을 보여온 인물로 유명하다. 한 예가 그의 대표작이 된 53년도 영화 <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와 관련된 에피소드. 40년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는 50년대 초반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갑작스런 슬럼프에 직면했다. 가수에게 중요한 목 상태가 악화되었고 두 번째 아내 에바 가드너와의 파경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것이 주원인이었다. 레코드 판매는 뚝 떨어졌고 영화 출연 제의가 끊겼으며 목에서는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재기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 지상에서 영원으로 >의 돋보이는 마지오 배역을 따내야 했다.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으며 배당금을 취소로 정하는 수모도 감내했다. 이를 악물고 덤벼든 결과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위기관리의 천재다운 면모였다. 그는 소속 레코드사인 캐피톨을 떠나 61년 리프라이즈 레코드사를 차려 사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2년 뒤인 63년 회사를 대기업인 워너브라더스에 팔아넘겼다. 리프라이즈의 매매는 그에게 엄청난 돈을 안겨주었고, 그는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엔터테이너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그에게 최고가치는 언제나 달러였고 그는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 그는 사업운영에 있어서 간혹 정계와 손을 대기도 해 논란을 빚었으며 72년에는 경마장의 부정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의회의 범죄색출위원회에 출두, 신문의 톱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같은 스캔들은 80년대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마피아와 밀월관계에 있었으며, 마피아를 등에 업고 연예활동을 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86년에는 시나트라와 마피아의 관계를 폭로한 그의 전기 『그의 길』(His Way)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가장 비난이 집중되었던 사건은 보츠와나 공화국의 ‘선 시티’ 공연 부분이었다. 81년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만든 초호화판 휴양지인 이 공연장의 개막식에 리자 미넬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특별무대를 가졌다. 그는 9일간 여기에 출연하는 대가로 1백 6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그의 선 시티 출연은 폭압적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 남아공의 체제유지에 기여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의식 있는 팝 가수 진영으로부터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 85년 리틀 스티븐(스티븐 밴 잰트)의 발의로 결성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아티스트연합’은 ‘반(反)선 시티’를 주장하면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한 일부 팝 가수들의 비양심을 맹공했다. 선 시티 출연으로 평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되어온 그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본래의 보수성을 그럭저럭 잘 감추어온 그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준 ‘오점’이 되었다. 그는 정당과 관련하여 애초 40년대에는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개혁지향적인 민주당 쪽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진보파인 민주당후보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지지했으며 루즈벨트를 존경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따 자기 아들의 이름을 프랭클린 웨인 시나트라로 짓기도 했다. 47년에는 쿠바를 방문해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할 정도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의 고수는 정치에 대한 관심과 반비례했다. 그는 74년 미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안드레오티 수상을 환영하기 위해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베푼 백악관의 만찬석상에 출연,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속뜻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입지를 변화시킨 ‘철새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히트송 레퍼터리는 나열이 벅찰 정도로 무수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나의 길(My Way)’일 것이다. 원래는 프랑스 샹송으로, 라스베가스에 함께 출연하고 있던 폴 앵카가 은퇴를 앞둔 시나트라를 위해 영어 가사를 붙여 개작해준 곡이다. 시나트라의 인생이 그려진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그다지 크게 히트하지 못했으나, 영국에서는 40위권내에 무려 122주간 랭크되는 전무후무한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인생의 종반부가 다가와 난 종막을 맞이하고 있네. 여러 벗들에게 나만이 확실히 알고 있는 인생 기록을 말하겠노라. 난 인생의 항로를 고루 밟아가며 꽉찬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후회도 얼마간 있었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었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해내었지. 항상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전세 낸 인생 코스를 계획했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물론 감당하지 못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 의혹의 순간도 있었다오, 그러나 난 그것을 나 혼자 씹어 삼키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 당당히 일어섰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그것이 나의 길이었소.’ 이 노래로 인생을 정리한 그는 70년 은퇴를 공식 선언했으며, 71년에는 화려한 고별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과 2년 후인 73년 그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팝계에 복귀해 노래와 연기를 계속했다. 그러한 것이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길이었다.
지난 1993년 김건모의 ‘핑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앞 아닌 뒤 박에 악센트가 있는 독특한 리듬의 ‘레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음악 팬들이 레게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로, 문제의 곡은 1978년에 전국적 히트를 기록한 그룹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었다. 그때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관심이 되질 못해... 지난 1993년 김건모의 ‘핑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앞 아닌 뒤 박에 악센트가 있는 독특한 리듬의 ‘레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음악 팬들이 레게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로, 문제의 곡은 1978년에 전국적 히트를 기록한 그룹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었다. 그때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관심이 되질 못해, 그것이 레게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많은 국내 음악 대중들에게 레게음악의 정체를 알려준 노래는 ‘Rivers of Babylon’이었고 가수는 보니 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디스코’ 유행이 지구촌을 석권하던 1970년대 말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인기를 누렸다. 그러니까 ‘Rivers of Babylon’은 디스코와 레게의 퓨전이었던 셈이다. 그들 음악은 신시사이저에 의한 사운드와 마치 로봇과도 같은 드럼 리듬을 내세운 경쾌한 ‘유로디스코(Eurodisco)’로 당대를 풍미했다. 여성 멤버들의 적정한 수준의 섹시 비주얼 이미지가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조금은 키치적인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디스코 리듬에 실린 그들의 신나는 음악은 심각한 것을 싫어한 당대 사람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압도적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들의 인기는 막강했다. ‘Rivers of Babylon’은 지겨울 정도로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으며 ‘Brown girl in the ring’ ‘Daddy cool’ ‘Rasputin’ ‘Sunny’ 등이 줄줄이 애청되었다. 1985년에는 김병조 진행의 최고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곡 ‘Happy song’으로 또 한번 기염을 토했다. 그들의 앨범은 비록 미국시장의 외면으로(그들이 80년대 해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그와 무관하게, 어떤 유명한 미국 디스코 가수 노래보다 더 호응을 만끽했다. 그것은 디스코의 경우도 한국 사람은 미국의 것보다는 유로디스코 즉 유럽의 취향에 가깝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보니 엠은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Fly, robin, fly’와 ‘Get up and boogie(that’s right)’로 크게 성공한 그룹 실버 컨벤션(Silver Convention)의 성공에 고무되고 자극받은 독일의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프랭크 파리안(Frank Farian)의 기획 작품이었다. 1989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래미상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나중 립싱크 사기로 몰락한 그 유명한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를 만들어낸 바로 그였다. 당시 파리안은 실버 컨벤션처럼 유로디스코를 내걸면 글로벌 인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야심을 불태웠다. 먼저 그는 1976년 보니 엠이라는 가명으로 ‘Baby do you wanna lump’란 곡을 발표해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자 그 곡을 무대에서 재현해줄 실제 그룹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클럽 디스크자키, 뮤지컬 가수, 세션 가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던 서인도제도 출신 여자 셋과 남자 하나로 구성된 혼성 4인조 보니 엠이 꾸려진다. 결성한 이듬해인 1977년에만 그들은 ‘Daddy cool’를 시작으로 바비 헵(Bobby Hebb)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Sunny’, ‘Ma baker’, ‘Belfast’ 등 무려 네 곡을 영국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1978년은 그들의 전성기였다. ‘Rivers of Babylon’과 ‘Mary’s boy child’가 폭발적인 판매고를 거듭하면서 영국 차트 1위를 점령했고 ‘Rasputin’도 톱10에 올랐다. ‘Rivers of Babylon’은 그때까지 영국 차트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을 기록했고, ‘Mary’s boy child’는 다섯 번째에 랭크되었다. ‘Rivers of Babylon’은 그해 미국 빌보드에서 30위에 올라 체면은 차렸지만 파장은 짧았다. 1979년에도 영국에선 ‘Painter man’과 ‘Hooray! hooray!’와 같은 히트 곡들이 나왔다. 이 3년간 팔린 싱글과 앨범 판매고가 5000만장에 달했다. 앨범은 78년 < Nightflight To Venus >, 1979년 < Oceans Of Fantasy >이 유명했다. 마지막 히트넘버는 1981년의 ‘We kill the world’. 열거한 노래제목이 말해주듯 그들은 널리 알려진 구미의 히트송들을 레퍼토리로 삼았고, 자메이카 등 카리브해 국가들의 노래도 메뉴화했다. 이 또한 프랑크 파리안의 영민한 구상이다. ‘Mary’s boy child’는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에 의해 레코딩되어 기성세대가 숙지한 곡이며, ‘Rivers of Babylon’도 자메이카 레게 그룹 멜로디안스의 오리지널이었다. 익숙한 노래를 파리안 특유의 유로 디스코 재가공해 ‘복고와 최신’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해산한 뒤 다시 1989년 재결합했고 이후에는 카바레를 토대로 유럽에서 다시 인기를 쌓았다. 1992년에는 자신의 히트곡을 리믹스한 ‘Boney M megamix’으로 영국차트 톱10에 올라 건재를 확인했다. 전성기에도 국내를 찾은 바 있던 그들은 활동30년을 맞아 2005년 7월16일 경기 과천 시민회관에서, 7월22일과 7월23일 올림픽공원에서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노래 : Nicole Flieg (니콜레 플리그)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주지하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5)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너무나도 빼어났던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이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은 1969년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뛰어들었다.

첫 넘버 원 싱글 ‘I want you back’에 이어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2년 간 그룹활동에 전념하던 마이클 잭슨은 1971년 12월 탐라-모타운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했다. 1971년 데뷔곡 ‘Got to be there’를 발표해 싱글차트 4위에 랭크시킨 후 ‘Rockin’ Robin’, ‘Ain’t no sunshine’, ‘Ben’, ‘I wanna be where you are’,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솔로와 그룹활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했다.

마이클 잭슨이 변성기가 지나고 성인으로 접어들자 잭슨 파이브도 점점 퇴색해갔고, 1979년 마이클은 드디어 성인으로서 첫 음반 을 발표했다. 1977년 흑인판 <오즈의 마법사>였던 뮤지컬 영화 <더 위즈(The Wiz)> 사운드트랙을 통해 만났던 퀸시 존스가 앨범의 프로듀서로 동참해 마이클 잭슨의 ‘성인신고작’을 한결 윤택하게 빛냈다.

활기 넘치는 리듬의 펑크(funk)와 디스코, 소울, 그리고 록과 팝, 발라드가 퓨전된 그 음반에는 마이클 잭슨이 작곡한 2곡의 업 템포 댄스넘버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최근 영화 <러시아워2>에 삽입되었음)와 ‘Working day and night’와 로드 템퍼튼 작곡의 깔끔한 팝 넘버 ‘Rock with you’, 절제된 보컬의 발라드 ‘She’s out of my life’ 같은 히트곡이 실려있었다. 수록곡 중 ‘Girlfriend’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가 작곡해 준 곡으로 향후 둘 간의 파트너십을 예고했다.

이 마이클 잭슨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앨범이라면 1982년 12월에 발표된 는 ‘팝의 황제’라는 마이클 잭슨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킨 회심작이었다.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의 공동 프로듀스작인 그 앨범은 37주간이나 앨범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2천6백만장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전례가 없는 무려 7곡이 싱글 발매되어 모두 차트 10위 내에 올랐고 그 중 2곡이 정상을 차지했다. 그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역대최다인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2000년 산타나와 타이 기록).

‘문워크(Moonwalk)’라는 독창적인 댄스를 유행시킨 ‘Billie Jean’과 에디 밴 헤일런의 기타 속주가 흐르는 ‘Beat it’이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첫 싱글로서 폴 매카트니와의 듀엣 곡이었던 ‘The girl is mine’(2위), ‘Wanna be startin’ somethin’(5위), ‘Human nature’(7위), ‘P.Y.T.’(10위), 마지막 싱글 ‘Thriller’(4위) 등이 연속해서 히트했다. 백인 최고스타 폴 매카트니와 록 기타의 거장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크로스오버는 물론, 더 많은 수요층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음악적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백인 록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만을 방영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틀었던 역사적인 첫 흑인 뮤직비디오였다. 한편 1984년 4월에는 폴카 음악과 ‘패러디의 대가’인 얀코빅(‘Weird Al’ Yankovic)이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을 발표해 싱글차트 12위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난민구호 자선 프로젝트였던 밴드 에이드(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성공에 자극 받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는 막강한 스타들을 규합, 유에스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를 조직해 1985년 1월 그 미국 버전인 ‘We are the world’를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 해 8월에는 그간 음악동지였던 폴 매카트니와의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마이클 잭슨이 ‘레논/매카트니’ 크레딧으로 된 250곡이 넘는 비틀스 곡들의 판권을 4천7백5십만 달러에 사버렸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협력관계가 깨졌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그 둘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갱스터 영화의 대부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17분짜리 뮤직비디오 ‘Bad’가 1987년 2월에 선보였고, 8월에는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으며 록적인 느낌이 강화된 새 앨범 가 발매되었다. 퀸시 존스가 세 번째로 프로듀스를 맡은 이 앨범은 전작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8백만장 이상 팔려나가는 성공을 거둔다. 특히 무려 5곡이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해 2곡이 1위에 오른 전작을 능가했다.

여성 보컬 시다 가렛과 호흡을 맞춘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시작으로 타이틀곡 ‘Bad’, 흥겨운 핑거 스냅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The way you make me feel’, 시다 가렛과 글렌 발라드가 공동 작곡한 발라드 넘버 ‘Man in the mirror’, 음산한 분위기가 압권인 ‘Dirty Diana’ 등 모두 5곡이 차례로 정상에 등극했다. 그 외에도 ‘Smooth criminal’, ‘Leave me alone’ 등 수록곡 전반이 주목받았다. 1988년 12월에는 마이클 잭슨과 존 레논의 아들 숀 레논 등이 출연한 영화 <문워커(Moonwalker)>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보다 자신 고유의 음악을 찾기 위해 퀸시 존스와 헤어진 마이클 잭슨은 1991년 홀로서기를 시도한 첫 작품 를 발표한다. 젊은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를 메인 프로듀서로 받아들여 만든 이 음반은 마이클 특유의 사운드에 최신식 힙 합과 랩, 메탈 음악 등이 합쳐졌다. 작곡과 제작에 있어 마이클 잭슨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인 음반이었지만 너바나 같은 그룹의 얼터너티브 록 태풍에 휘말려 전작들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emember the time’, ‘Jam’, ‘In the closet’ 등 테디 라일리가 솜씨를 발휘한 곡들과 영화 <프리 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Will you be there’ 같은 곡들은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동시에 큰사랑을 받았다. 또한 ‘Black or white’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모핑’ 기법 같은 놀라운 기법들은 향후 영상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에서부터 구현된 환상적인 스튜디오 기술로 다시 한번 녹음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 만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마이클 잭슨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 해 8월 바로 어린이 성추행 사건이 터진 것. 이 사건은 그간 깨끗한 이미지를 이어가던 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한동안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에 시달렸다. 그러다 얼마 후 갑작스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고, 이에 매스컴은 ‘여론 무마용’이라며 그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매체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마이클 잭슨의 분노도 정비례했다. 그에 대한 분노는 1995년에 발표한 더블앨범 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 장은 히트곡들로, 다른 한 장은 신곡들로 구성된 이 음반은 ‘역사’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얘기들을 많이 담고있었다. 특히 그를 괴롭혀온 매스컴과 어린이 성추행 소송인에 대한 원한과 경멸, 냉소 등이 짙게 깔려있었으며, 그 때문에 음악도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거친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다.

알 켈리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댈러스 오스틴 등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에서는 여동생 재닛 잭슨과 듀엣을 이룬 ‘Scream’과 ‘They don’t care about us’, ‘D.S.’, ‘Money’, ‘2 Bad’ 같은 곡을 통해 쇼비즈니스와 세상의 폭력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You are not alone’, ‘Smile’ 등 따뜻한 노래들도 있었지만 다른 차가운 곡들 탓에 듣기가 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였는지 ’주라기음반’에 걸맞지 않게 흥행도 부진했다. 1997년에는 리믹스 앨범 을 발매하기도 했다.

4년이 흘러 2001년 그는 솔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3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얻었으며, 9월에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비롯해 엔 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스티니스 차일드, 어셔 등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출연한 가운데 그의 솔로 3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30일, 마이클 잭슨은 6년만의 정규 앨범 을 발표하며 다시 팬들 앞에 섰다. R&B 최고의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가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음반은 전작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특유의 활기 넘치는 리듬도 회복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등 여러 좋은 일이 겹쳐서인지 밝은 분위기의 내용물들이 담겼다.

3마디의 독특한 리듬이 중독성을 발휘하는 첫 트랙 ‘Unbreakable’, 춤추기에 좋은 부드러운 댄스리듬 그리고 약간은 복고적 사운드가 듣기 편한 첫 싱글 ‘You rock my world’, 변화가 심한 비트가 인상적인 ‘Heartbreaker’ 등이 비트감 느껴지는 곡들. 라틴 풍의 기타 연주가 잔잔한 ‘Whatever happens’에서는 산타나의 무게감 있는 연주도 들을 수 있으며, ‘Speechless’, ‘The lost children’, ‘Break of dawn’ 같은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발라드 곡들이다.
노래 : Elvis Costello (엘비스 코스텔로)
변화무쌍한 음악은 절대로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 파일이 그렇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소리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했고, 해마다 허물을 벗었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며, 차려진 밥상을 거부했다. 항상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꾸부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리더로 브리티시 펑크... 변화무쌍한 음악은 절대로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 파일이 그렇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소리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했고, 해마다 허물을 벗었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며, 차려진 밥상을 거부했다. 항상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꾸부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리더로 브리티시 펑크 록을 이끌었고((1997년)), 신나는 레게 리듬과 애조 띤 켈틱 선율에 올라타며 제3세계 음악에 흠뻑 젖었다(스페셜스(Specials)의 (1978년)과 포구스(The Pogues)의 (1985년). 그리고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을 하얗게 바꾸었고((1980년)), 내시빌로 들어가 컨트리를 끄집어내기도 했다((1981년). 또한 그는 챔버 밴드 브로드스키 쿼텟(Brodsky Quartet) 등과 클래식에도 발을 담갔고, 위대한 팝의 전설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크루너(Crooner)로 나서기도 했다. 코스텔로의 이런 종횡무진 행보는 단순히 변신을 위한 인위적인 선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부한 음악 공력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이끌림이다. 아마 지금도 그의 곳간에는 평생 일용하고도 남을 음악 양식이 가득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1954년 8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열 다섯 살 무렵부터 기타를 치고 노래를 작곡하며 뮤지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그는 낮에는 런던의 한 공장에서 컴퓨터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갔고, 밤에는 클럽에서 연주하며 음악 내공을 쌓아갔다. 아티스트로써 첫 이름을 등록한 결과물은 1977년 싱글 ’Less than zero’. 이 노래는 파시스트 단체의 리더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코스텔로의 의식 세계가 일반적인 곧은 길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첫 싱글을 발표한 후 그는 5년 동안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키보디스트 스티브 니브(Steve Nieve), 베이시스트 브루스 토마스(Bruce Thomas), 그리고 드러머 피트 토마스(Pete Thomas) 등을 규합하여 자신의 백밴드 어트랙션스(The Attractions)를 결성하고 프로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후 어트랙션스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우정 - 불화 - 재결합 과정 등을 거치며 오랜 기간 함께 한다. 코스텔로는 영국의 퍼브 록(Pun Rock)과 펑크 록을 완벽하게 구현한 전형적인 ’브리티시 로큰롤’ 음반인 1977년 데뷔작 (영국 14위, 미국 32위)와 1978년 2집 (영국 4위, 미국 30위) 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일약 대영제국 최고의 로커로 떠올랐다. 이어 내놓은 1979년의 (영국 2위, 미국 10위), 1980년의 (영국 2위, 미국 11위), 1981년의 (영국 9위, 미국 28위), 1982년의 (영국 6위, 미국 30위) 등도 영국 록 히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 음반으로 대접받을 정도로 엘비스 코스텔로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궈놓은 음악 스케이프는 소리 하나 하나가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Watching the detectives’(영국 15위), ’Pump it up’(영국 24위), ’Radio radio’(영국 29위), ’Oliver’s army’(영국 2위), ’Accidents will happen’(영국 28위), ’I Can’t Stand Up For Falling Down’(영국 4위) 등의 히트곡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앨범들의 수록곡이 스무 트랙을 넘으면서도 곡 당 타임이 채 3분을 넘지 않는 전형적인 로큰롤과 펑크의 형식미를 취하고 있지만 깊이가 있고 다양한 움직임과 명암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코스텔로만이 할 수 있는 비법일 것이다. 코스텔로의 이런 월드와이드 동선이 가능하게끔 된 데는 뒤에서 막후 조정 역할을 한 닉 로우(Nick Lowe)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상기한 작품들 중에서 를 제외하고는 모든 음반들의 프로듀싱을 도맡음으로써 코스텔로와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이후에도 닉 로우는 코스텔로 대부분의 앨범들을 프로듀스하며 환상적인 사운드를 연출해냈다. 코스텔로의 전성시대가 펑크와 뉴 웨이브의 정점기였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시기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현재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해오며 별다른 기복 없이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와 블루스뿐만 아니라 컨트리, 아이리시 음악 등 다양한 음악적 뿌리 등을 탐구한 1986년의 (영국 11위, 미국 39위), 하드록의 강렬함을 드러낸 같은 해의 (영국 16위, 미국 84위) 등이 1980년대 후반기를 빛낸 대표적인 앨범들이다. 1990년대 초반에도 의욕적으로 음악 작업을 했지만, 눈에 띄는 평가를 받지 못한 코스텔로는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전성기 때 못지 않은 인기를 회복했다. 그는 1998년 전설적인 작곡가 버트 바카라크와 함께 한 음반 (영국 32위, 미국 78위)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1년 뒤인 1999년에는 영화 [노팅 힐]의 주제가 ’She’를 부르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끌어내는 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그리고 올해에는 17번째 스튜디오 앨범 을 발표하며 음악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드러냈다.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에릭 카멘(Eric Carmen)은 부모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도편달 속에서 소시 적부터 정식의 음악교육(클래식)을 받고 자라났다. 그러던 그에게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의 출현은 단지 자신의 곡을 쓰고자 했던 클래식 매니아에서 한층 더 나아가 직접 밴드를 결성, 로큰롤 음악을 부르는 대중가수로 전향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서로 다른 밴드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4명의 청년들이 모...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에릭 카멘(Eric Carmen)은 부모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도편달 속에서 소시 적부터 정식의 음악교육(클래식)을 받고 자라났다. 그러던 그에게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의 출현은 단지 자신의 곡을 쓰고자 했던 클래식 매니아에서 한층 더 나아가 직접 밴드를 결성, 로큰롤 음악을 부르는 대중가수로 전향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서로 다른 밴드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4명의 청년들이 모여 새로운 록그룹 래스베리스(Raspberries)를 결성했고 1971년 캐피탈 레코드사와 정식계약을 맺은 후 1974년까지 총 4장의 앨범을 발매하여 전미차트 4위의 히트곡 ’Go all the way’까지 내놓았다. 에릭이 당시 미국의 클리블랜드를 1960년대의 리버풀이라 호평할 정도로 래스베리스의 사운드는 다분히 영국적인 요소(비틀스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다. 평소 그의 탁월한 보컬 솜씨에 매료되었던 아리스타 레코드사는 래스베리스의 해산과 동시에 그와 계약을 체결했고 에릭은 75년 솔로 데뷔앨범 < Eric Carmen >을 발표하게 된다. 데뷔앨범은 3곡의 Top 40 히트곡을 내면서 레코드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특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멜로디를 따온 슬픈 발라드 ’All by myself’는 2위까지 오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지금도 에릭을 대표하는 최고의 히트곡으로 남아있다. 또한 클래식과 팝의 만남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곡은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1996년에는 팝의 디바 셀린 디온(Celine Dion)이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다시 불러 4위에 올려놓은 바 있다. 이듬해엔 역시 같은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11위)으로 다시 한번 인기몰이를 하게 되는데, 이 곡 또한 1991년에 토미 페이지(Tommy Page)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데뷔앨범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선보인 에릭은 1977년 두번째 앨범 < Boats Against The Current >을 발매하지만 결과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앨범 타이틀곡(싱글차트 88위)은 에릭이 지금까지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고 있다. 78년엔 3집 < Change Of Heart >을 발매, 타이틀곡이 19위에 진입하여 어느 정도의 명예회복을 했고, 1980년 원색적인 앨범커버로 화제가 된 4집 앨범 < Tonight You’re Mine >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이 시기에 본국에서보다도 유독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오히려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져 숀 캐시디(Shaun Cassidy)의 톱10 히트곡 ’Hey deanie’와 1984년 영화 < 풋 루즈 > 사운드트랙의 사랑의 테마 ’Almost paradise’(러버보이의 마이크 레노와 하트의 앤 윌슨이 호흡을 맞춰 역시 Top10에 올랐음) 등을 써냈다. 작곡가가 아닌 가수로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려 7년의 세월이 흐른 87년 영화 < 더티 댄싱 >의 사운드트랙을 통해서였다. 수록곡 중 ’Hungry eyes’를 불러 4위까지 오르며 일선에 화려하게 재기했다. 1988년에는 베스트 앨범 < The Best Of Eric Carmen >를 내놓고 그간의 활동을 정리했다. 이후로 그는 여러 가수들의 앨범에 프로듀서, 작곡가, 세션맨으로 참여하며 10년여의 세월을 보냈고 2000년에는 새 앨범 < I Was Born To Love You >로 어덜트 컨템포러리 계열의 멋진 발라드들을 선보였다. 동시에 비틀스의 드러머 링고 스타(Ringo Starr)와 함께 투어 활동을 하면서 건재함을 보였다. 30년이 넘는 음악생활을 화려하진 않았지만 묵묵히 소신을 가지고 해온 에릭의 모습을 동료 뮤지션들이 인정하는 것은 물론, 후배 가수들이 존경심을 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노래 : Cesaria Evora (세자리아 에보라)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아마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대서양의 섬나라, 까보 베르데(Cabo Verde). 하지만, 이 생경한 나라의 대중음악 ‘모나(Morna)’는 월드뮤직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쎄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는 특유의 무게 있고 서러운 목소리를 통해, 모나와 까보 베르데를 상징하는 여가수로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세...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아마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대서양의 섬나라, 까보 베르데(Cabo Verde). 하지만, 이 생경한 나라의 대중음악 ‘모나(Morna)’는 월드뮤직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쎄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는 특유의 무게 있고 서러운 목소리를 통해, 모나와 까보 베르데를 상징하는 여가수로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1941년 8월, 민델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모두 직업 음악인인 음악 가정 출신이지만, 열 살이 되던 해애 큰 아버지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그녀의 삶은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기 시작한다. 이미 열두 살에 첫 번째 결혼을 시작으로 총 세 번의 결혼을 하였지만, 모든 남자로부터 버림받았으며, 그녀 스스로 “사는 동안 다시는 한 지붕 안에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그녀가 노래를 하기 시작한 것은 열여섯 살 때의 일로, 세계무대로 이름이 알려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까보 베르데 내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미 이름난 가수였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질곡 많은 남성사와 가정사로 인해 극도의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려야 했고, 폭음과 폭연, 폭식에 의지해 겨우 삶을 이어나갔다. 결국 1970년대 중반에는 노래하는 것을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음악보다 경제적으로도 그나마 나은 어부(해녀)로서의 삶에 충실했다. 이런 그녀의 이름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1985년에 포르투갈로 건너가 까포 베르데의 가수들에 대한 앤솔로지 앨범에 참여하게 되는데,당시 유럽은 때마침 프랑스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미지의 가수들에 대한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동향 출신으로 프랑스에 자리 잡고 있던 프로듀서 겸 기타리스트 주제 다 실바(Jose Da Silva)가 그녀를 집중적으로 설득했고,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88년 그녀의 나이 마흔 일곱에 데뷔 앨범 < La Diva Aux Pieds Nus(맨 발의 디바) >를 발표한다. 초기의 인기는 모국에서만 관심을 받는 정도였지만, 1991년에 발표된 3집 < Mar Azul >과 네 번째 앨범 < Miss Perfumado >을 통해 그녀는 전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 Cesaria >(1995)와 < Cavo Berde >(1997)로 연거푸 그래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했으며, 그녀의 노래의 힘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에까지 전파되었고, 그녀는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리나라에 그녀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영화 [Great Expectation](1998)의 중요 부분에 삽입된 고전 ‘Besame mucho’를 다시 부른 것이 그 도화선이 되었다. 그 때부터 1998년에 나온 베스트 앨범을 필두로 그녀의 귀한 음악들이 하나둘씩 라이센스로 출시되기 시작했고, 결국 2002년에는 내한 공연도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번외활동도 활발하여. 에이즈 퇴치 기금 조성 앨범 시리즈인 < Red Hot >의 브라질 음악 프로젝트 < Red Hot Rio >(1994)에서는 브라질의 거장 까에따노 벨로수(Caetano Veloso)와 함께 노래했으며, 고란 브레코비치(Goran Brekovic)도 그녀를 에밀 쿠스타리차(Emir Kusturica)의 1996년작 [Underground]의 OST에 손수 초대했다. 앞서 얘기한 ‘Besame mucho’도 영화를 위해 특별히 다시 녹음한 것으로, 워낙 유명하고 리메이크도 많이 된 곡이지만 그 어떤 버전보다도 멋들어지고 스산한 기운을 담아냈다. 그녀의 음성에는 오로지 그녀많이 알고 표현할 수 있을 질곡 많은 삶의 흔적과 씻을 수 없는 앙금같은 잔해들이 진득하게 배어있다. 별다른 기교도 부리지 않고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탁한 목소리에 담긴 진심과 가슴속 깊이에서 여과 없이 끌어올린 진성의 깊이는, 처음 듣는 사람이라도 금세 빠져들 수밖에 없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음성엔 그녀의 고통스런 삶과 아픈 기억들이 생채기 채로 녹아있다. 그녀는 노래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다."내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눈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흑인 할머니의 모습에 가깝다. 그녀는 가수로 활동하지 않을 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부로서의 일상을 만끽한다고 한다. 그녀의 음악의 바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서는 자신의 지나온 삶과 일상, 고향과 모국에 대한 깊은 애정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그녀의 삶에 깊은 상처만을 남겨주었다고 해도.....
앤 머레이(Anne Murray)는 달콤하고 유려한 컨트리 성향의 팝 음악으로 197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여가수다. 당시 그녀가 부른 ‘You needed me’ ‘I just fall in love again’ ‘Shadows in the moonlight’ ‘Broken hearted me’ 등은 국내에서도 라디오전파를 잠식, 올드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1945년 캐나다의 노바 스코샤(Nova ... 앤 머레이(Anne Murray)는 달콤하고 유려한 컨트리 성향의 팝 음악으로 197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여가수다. 당시 그녀가 부른 ‘You needed me’ ‘I just fall in love again’ ‘Shadows in the moonlight’ ‘Broken hearted me’ 등은 국내에서도 라디오전파를 잠식, 올드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1945년 캐나다의 노바 스코샤(Nova Scotia)의 조그만 광산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 1950년대 미국 로큰롤을 들으면서 가수라는 직업을 동경했고 부모님과 5명이나 되는 형제들 또한 언제나 입에 노래를 달고 살았고 그녀 역시 생활 속에서 노래를 익혔다.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버디 할리(Buddy Holly), 바비 다린(Bobby Darin)의 노래를 즐겨 따라 했으며 로큰롤은 물론 클래식 컨트리 가스펠 포크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읊조리듯 노래하는 패티 페이지(Patti Page), 빙 크로스비(Bing Crosby), 로즈메리 클루니(Rosemary Clooney)의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고 훗날 자신의 크루닝(crooning) 창법은 바로 이들로부터 힌트를 얻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6년 동안의 피아노 교육에 이어 15살 때부터 클래식 성악 레슨을 꾸준히 받았지만 가수로서 정면돌파를 하지 못한 채 평범하게 학교 공부를 계속,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한다. 허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친구의 권유로 CBS TV 프로그램인 < 싱얼롱 주빌리 >(Singalong Jubilee)의 오디션을 보게 되지만 잠시였을 뿐 곧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택하고 만다. 결국 3년 후 그 오디션을 보았던 것이 연이 되어 다시 프로그램으로 돌아와 10대 대상의 TV프로 ‘렛츠 고’(Let’s Go)에 출연한다. 이 때 비로소 그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가수를 자신의 직업으로 확정하게 된다. < 싱얼롱 주빌리 >의 방송 내용이 앨범으로 발매되는 행운과 함께 1968년 캐나다의 아크(Arc) 레이블을 통해 데뷔 앨범 < What about Me >를 발매하면서 그녀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평범한 학교 선생님으로 일생을 지낼 뻔했던 삶이 화려하게 바뀌는 순간. 첫 앨범에 눈독을 들인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가 그녀와 계약을 맺었고, 1969년 두 번째 앨범인 < This Way Is My Way >를 인터내셔널 레이블을 통해 발매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앤 머레이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 1970년 싱글로 발매된 ‘Snowbird’가 라디오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빌보드 팝 차트 7위에 오르며 골드 싱글이 된 것이었다. 그 무렵 캐나다 여성 가수가 미국 시장에서 골드를 따내기는 어려웠다. 이 첫 국제적 히트곡은 그녀가 세계를 무대로 무수한 히트곡과 수많은 상을 따내도록 하는 시발점이 됐다. 가정이 항상 음악과 함께 해왔던 탓에 음악은 항상 따스함이 묻어나는 것들이었고 편안한 알토 톤의 보컬은 그런 온후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에 최적의 목소리였다. 물론 그녀의 삶은 이후에도 늘 가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부모와 형제들 뿐 아니라 남편과 자식들까지도 노래와 삶을 하나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내내 아이들을 위한 앨범이나 캐롤 앨범을 유난히 많이 발표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973년 < Talk It over in the Morning >을 발표,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가 작곡해 준 ‘Danny’s song’이 차트 7위에 올라 성공 행진을 이어갔고 이듬해의 앨범 < Love Song >에서는 동명 타이틀곡인 ‘Love song’(12위)과 비틀즈의 것을 리메이크한 ‘You won’t see me’(8위)가 연이어 차트를 장식한다. 이 곡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한 이후 앤 머레이는 그래미상은 물론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캐나다의 주노 뮤직어워드 등 한 차례 수상하는 것도 영광인 상들을 거의 매해 수상하는 정상급 가수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1975년에는 빌 랭스트롯(Bill Langstroth)과 결혼하고 이듬해 첫 아들 윌리엄(William)을 낳았지만 1976년에는 바비 달린의 곡을 리메이크 한 ‘Things’로 고삐를 다시 죈 뒤 1978년 기념비적인 ‘You needed me’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곡은 처음에는 느리게 상승하다가 막판에 불이 붙은 끝에 차트 1위를 점령했으며 동시에 골드를 쾌척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의 처음이자 유일한 차트 넘버 원 곡인 이 노래는 얼마 전 국내 모 CF에 고향을 찾아가는 진돗개와 함께 사용되어 다시금 친숙해졌다. 물론 이 CF가 나오기 전부터 라디오를 통해 꾸준히 사랑 받아온 곡이다. 앤 머레이는 이 곡의 슈퍼히트에 힘입어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여성 보컬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후 1979년 겨울까지 낸 일련의 싱글 ‘I just fall in love again’(12위) ‘Shadows in the moonlight’(25위) ‘Broken hearted me’(12위) 그리고 몽키스(Monkees)의 곡을 리메이크한 ‘Daydream believer’(12위)는 폭발적으로 애청되면서 그녀를 대표하는 곡들로 기록된다. 1980년대에 들어 ‘Lucky me’가 42위에 그치는 등 갑자기 차트플레이가 부진의 늪에 빠진 뒤 서서히 잊혀져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 머레이는 음악과 사회활동 등 다방면에서 꾸준한 움직임을 보였다. 가정의 소중함을 항상 강조해온 만큼 유아용 앨범으로 얻은 수익들을 전부 아이들을 위해 내놓았으며, 자선 프로그램인 캐나다의 ‘세이브 더 칠드런 펀드’(Save The Children Fund)를 만들어 사회와 가정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또한 앤 머레이 센터(Anne Murray Centre)를 설립, 자신의 음악활동과 관련한 자료는 물론이고 팝 음악계에서 활약하고있는 캐나다 뮤지션들의 관련자료들도 대중에게 제공하고있다. 여전히 크리스마스 앨범이나 모음집 등을 내놓고 여러 유수의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고 있는 그녀는 1997년 라이브 앨범인 < What a Wonderful World >를 내놓으며 오랜만에 대중들 곁에 돌아왔다. 여기에는 자신의 딸인 던(Dawn)과 함께 부른 ‘Let there be love’가 수록되어 관심을 끌었다. 달콤한 노래들을 전해주는 팝 가수로서 앤 머레이가 가지는 음악적 가치를 과대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따뜻함과 가족의 사랑과 같은 주제를 노래하고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녀의 휴머니즘은 팝 스타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제를 던지는 것도 사실이다.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 1970년대 복고적인 ‘미국의 소리’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 뉴스 위크 >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놈’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색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워싱턴 정가는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렸고 국론은 ‘고도의 민주주의 나라’라는 위상을 무색케 할만큼 완전 분열되었다. 미국인들은 허탈했고 피곤했으며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건강한 미국’을 얘기해 주고 공허한 그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어야 했다. 그가 가수라면 좋았고 나아가 ‘쉽고 깨끗한’ 노래를 들려준다면 더 좋았다. 거기에 존 덴버는 딱 알맞은 구세주와 같은 인물이었다. 명반 < 궤적의 피(Blood On The Tracks) >를 내놓은 밥 딜런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을 달래 주기란 힘들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격동의 1960년대가 떠오르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존 덴버는 편했다. 그에게 근심거리란 없어 보였고, 다시 세상은 살 만한 곳인 듯 했다. 그 자신도 1970년대 중반의 상황이 자신을 수면 위로 부상 시켜준 원천임을 알았다. 그는 < 세븐틴 >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여, 내가 세상이 왜 행복한 곳인가를 노래할 때 내게 그대의 귀를 주오”라고 말했다. “난 미국에 대해, 가족에 대해, 삶의 축복에 대해 노래한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노래부른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노래 제목만 들어도 즐거워했다. ‘내 어깨 위의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해(Sunshine on my shoulder)’ ‘나를 고향으로, 시골길로 보내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의 달콤한 여인(My sweet lady)’ ‘내가 촌놈인 것을 신께 감사드려요(Thank god I’m a country boy)’ 등.. 참으로 낙천적이고 전원적이며 명랑했다. 이 곡들은 모두 싱글 차트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차라리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I’d rather be a cowboy)’고 하고 ‘집에 다시 돌아온(Back home again)’ 것을 찬양하고 산과 바다, 시골이 무대인 그의 노래가 거부감을 줄 리 없었다. 그는 실제로 산을 사랑한 컨트리 보이였다. 공군 조종사의 아들로(1943년생) 존 헨리 듀센도르프가 본명인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산이 많은 도시 덴버의 이름을 따 개명했다. 또 유랑과 속세의 삶을 살다가 27세에 로키산에 올라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년 시간을 내 콜로라도의 전원에 있는 아스펜 집에 묵곤 했다. 그는 ‘콜로라도의 정신’이었다. 주지사 존 밴더후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계관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닉슨과 포드 대통령 교체 이후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가치를 대변했다. 해맑은 컨트리 음악을 들고 나온 그가 환영받은 것은 당시의 보수 바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이었고 미국의 정서를 견인한 주역이었기에 1974년과 1975년에 그의 인기는 경쟁자인 영국 로커 엘튼 존을 추월했다. 팝적인 컨트리 록은 강렬한 하드 록과 복잡한 프로그레시브 록이 대세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망으로 시끄럽고 혼잡스런 사람들에게 이러한 음악들은 귀에 들려 오지 않았다. 존 덴버는 정반대의 ‘컨트리 팝’으로 록의 퇴각을 강제했다. 록 진영은 갑작스런 그의 인기 행진에 놀랐다. 록 비평가들이 볼 때 덴버 노래의 낙천적 분위기는 건강한 정서의 반영이 아니라 단순한 ‘도피적 심리’에 불과했다. 혼탁한 세상을 잊고 편하게 살자는 심산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를 악평하는 사람들은 때문에 그를 ‘팝음악의 극단적 낙천주의자’라고 일컫는가 하면 ‘록의 미키 마우스’라고 내리깔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래가 대중들을 사로잡은 ‘어처구니없는’ 실상에 록 언론의 주도층은 궁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었다. 1974년 여름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애니의 노래(Annie’s song)’만 해도 그렇다. 삶의 축복을 노래하는 그의 지향을 축약한 이 노래는 이후 수년간 결혼식 때 축가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 4년 뒤에는 아일랜드 플루트 주자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가 연주곡으로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켰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그가 캠퍼스 커플로 1967년 결혼한 아내 앤 마텔(Ann Martell)을 위해 쓴 곡이었다. 스키 리프트에서 10분만에 썼다는 이 곡은 노랫말 가운데 애니(앤의 애칭)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노래가 애송되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 곡은 < 피플 >지로부터 그가 쓴 가장 훌륭한 러브 발라드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0년대 들어서 존 덴버는 이 축복의 찬가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아내 앤 마텔과의 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에 이미 궤도를 이탈했다. 잉꼬나 다름없던 둘은 덴버의 엄청난 성공에 불안과 위기를 느낀 앤이 남편과 ‘의사 소통이 중단됨을 느끼면서’ 악화되었다. 이혼 수속을 밟은 두 사람은 마침내 1983년 갈라서고 말았다. 존은 이 무렵을 이렇게 회고한다. “애니와의 이혼은 내 생애 가장 뼈아픈 순간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16년간 부부였다.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우리는 조용히 앉아 ‘우리 잘 안되고 있어’라고 얘기했다. 난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난 당신에게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다른데 눈을 돌리는게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혼을 맞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슬쩍 입장을 내비쳤다. “난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난 너무도 바빠 한 여인을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없다. 내 마음속의 마지막 일은 관계를 지속할 여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하여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성에 대해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당시 언론은 잉꼬 부부였던 존과 애니의 이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결같이 ‘아니 존 덴버가 이혼이라니...’라는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가 ‘애니의 노래’만 부르지 않았어도 충격은 훨씬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욱 커다란 쇼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1988년 8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수 없다’는 말과 달리 호주 출신의 늘씬한 가수 겸 배우인 카산드라 델라니(Cassandra Delaney)와 재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28살인 델라니는 45세였던 존 덴버보다 무려 17살 연하였다. 그는 지난 1990년 한국을 찾아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콘서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니의 노래’의 주인공인 애니와 왜 헤어지게 됐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람은 좋아질 때도 싫어질 때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휴식도 없이 내리 10곡 이상을 부르는 등 환상적인 호흡과 성량을 자랑한 이 내한 무대에서 그는 끝내 최고의 레퍼토리인 ‘애니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인 델라니와의 부부 생활도 순탄하진 못했다. 4년간의 짧은 인연을 끝내고 두 사람은 1992년 이혼 법정에 들어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 그는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환경운동가’ 또 ‘마음씨 좋은 컨트리 보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구속된 것이었다. 1993년 8월의 일이었다. 그는 델라니와 이혼을 확정짓고 난 뒤 축하하는 뜻에서(아니 이런!) 과음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50만 달러의 벌금과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라는 징계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이미지에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일이 안되다 보니 그가 1976년에 설립한 윈드스타 파운데이션(Windstar Foundation)도 갈수록 재정이 악화돼 규모와 인원을 줄이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존의 고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음주 운전 사건 1년 뒤인 1994년 8월 21일 자정, 다시 만취상태에서 1963년형 포르셰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날 사고도 델라니와 이혼 별거 수당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잘 안 풀려’ 그만 홧김에 음주한 것 때문이었다. 존 덴버는 ‘캐시(카산드라)가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음주 운전 사고 재범으로 그는 유죄판결이 날 경우 2년 간 옥살이를 하게 될 위기에 몰렸지만 명성에 힘입어 다행히 그 같은 화는 면했다. 하지만 이는 ‘만능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제기를 불능으로 만드는 치명타 역할을 했다. 환경 운동에 나서고 기아 문제와 복지 부문, 그리고 반전 활동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모든 찬란한 순간이 빛을 잃어 가는 순간이었다. 1976년 이후 그가 인기 차트 톱 10에 랭크시킨 곡은 없었다. 1982년 플라시도 도밍고와 ‘아마도 사랑은(Perhaps love)’을 함께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주류에서는 이미 떨어져 있었다. 그는 1984년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의 테니스 헌트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난 요즘 젊은이들이 살 레코드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가수로서의 시대는 소실점을 향했고 4년 연속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본 엔터테이너로서의 시대도 거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 상황이 불러낸 가수일 뿐이었다. 사회기류가 바뀌면서 그에 대한 ‘효용가치’는 뚝 떨어졌다. 그가 가수보다 ‘예능인’에 비중을 둔 것도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위에 나열한 곡 외에도 ‘오늘(Today)’ ‘정크(Junk)’를 비롯해 무수한 곡들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1970년대 팝송 청취가 압도적으로 ‘백인 팝(White Pop)’에 젖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 ‘내가 낙천적인 이유는 내가 할 때마다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래 : Skeeter Davis (스키터 데이비스)
노래 : Morris Albert (모리스 앨버트)
팝계에 대표적인 여장부로 칭하는 입지적인 인물 2명을 꼽으라면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와 베트 미들러(Bette Midler)가 될 것이다. 먼저 두 여인 사이엔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도 둘의 외모는 미인이라는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볼 때 성에 차지 않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수,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를 꿰찼다. 이는 선천적 재능도 ... 팝계에 대표적인 여장부로 칭하는 입지적인 인물 2명을 꼽으라면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와 베트 미들러(Bette Midler)가 될 것이다. 먼저 두 여인 사이엔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도 둘의 외모는 미인이라는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볼 때 성에 차지 않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수,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를 꿰찼다. 이는 선천적 재능도 재능이거니와 동시에 피나는 노력과 성실한 활동의 후천적 결과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42년생인 바브라와 1945년생인 베트 둘 다 유태계 출신이라는 점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후배 가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점도 역시 닮은꼴이다. 굳이 차이점이라면 바브라의 경우 귀족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반면에 베트의 경우는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몫은 언제나 바브라의 차지였다. 뉴저지의 패터슨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성장한 베트 미들러는 자신의 꿈인 배우가 되기 위해 대학서 드라마를 전공하였고, 1965년 영화 < 하와이 >의 단역배우로 시작하여 1966년부터 3년 동안 뉴욕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합창단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엔 카바레 원맨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그녀의 음악적인 조우자 배리 메닐로(Barry Manilow)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리 매닐로는 베트의 초기 2장의 앨범에서 피아니스트 겸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인지도를 쌓아간 인물이었다. 1972년 TV에 정기적인 출연으로 얼굴 알리기에 나선 그녀는 메이저레이블인 어틀랜틱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가수로 데뷔한다. 데뷔앨범 < The Divine Miss M >에선 ‘Boogie woogie bugle boy(8위)’, ‘Do you want to dance?(17위)’, ‘Friends(40위)’ 등을 히트됐으며 이듬해 그녀는 그래미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스케일이 컸던 데뷔 시절이 무색하게 1973년부터 1979년까지 내놓은 5장의 음반은 빅히트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약물과용으로 요절한 여성 록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 더 로즈 >의 주인공으로 분하면서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이 영화에서 혼신을 다한 열연으로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 수상과 더불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배우로서의 성공과 ’When a man loves a woman’(35위), ’The Rose’(3위) 등이 포함된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두번째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히트를 견인한 타이틀곡 ‘The rose’는 지금까지도 국내 올드 팬들에게 향수를 자아내는 명곡으로 남아있다. 재니스 조플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결코 쉽지 않은 배역이었음에도 훌륭히 소화해낸 베트 미들러는 세상을 떠난 가수의 재조명을 통해 새로운 스타탄생을 얻는 이라는 역사의 교차 한복판에 서게 되는 영광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녀의 활동은 영화 쪽으로 흘렀다. 영화 < 하와이 >에서 단역을 시작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 더 로즈 >의 주연으로 확고한 눈 도장을 찍은 뒤로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에미상, 토니상, 골든 글러브상 등 화려한 수상실적을 쌓았다. 1980년 < 디바인 매드니스 >는 콘서트 영화였고, 1982년 < 징크스드 >에선 겜블러의 여자 친구로, 사운드 트랙 앨범이 3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1988년 작품 < 비치스 >에선 진한 우정을 나누는 중년의 여인으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 포 더 보이즈 >에서는 위문공연을 다니는 가수로 분하며 스크린을 누볐다. 그러나 약 20편에 달하는 출연작중 사운드트랙 수록곡 전곡을 혼자서 부른 영화만도 5편에 이르는 것을 보면 가수로서의 임무도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 비치스 >의 사운드트랙 수록곡 ‘Wind beneath my wings’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전미 차트 정상의 자리에 올려 주었으며 통산 세번째 그래미상 트로피를 안겨다 주었다. 이 때가 베트 미들러의 전성기였다. 데뷔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때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토한 기염은 각별했다. < Beaches > 이후 1990년 앨범 < Some Peoples Lives >은 사운드트랙이 아닌 정규앨범으론 최초로 판매고 200만장을 돌파했고 여기서 발표한 싱글 ‘From a distance(2위)’는 걸프전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을 휩쓸었다. 이 무렵 안정되고 굵은 그녀의 보이스 색깔과 부피는 경력의 완숙미를 드러내고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매하는 앨범마다 골드나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음반판매고는 1400여만장.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머라이어 캐리와 셀린 디온과 같은 대형 여가수들이 출현하면서 기세가 하락, 막강 여가수의 바통을 신진 디바들에게 넘기고 만다.
‘70년대 이후 호소력 짙은 독특한 창법과 멜로딕한 사운드로 블루아이드 소울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70년대 이후 호소력 짙은 독특한 창법과 멜로딕한 사운드로 블루아이드 소울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노래 : Barbra Streisand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는 40여 년의 시간 동안 가수와 배우의 길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를 지켜 낸 이른 바 ’미국의 연인’이다. 1942년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태어난 바브라 스트라이잰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인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 학교인 에라스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는 40여 년의 시간 동안 가수와 배우의 길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를 지켜 낸 이른 바 ’미국의 연인’이다. 1942년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태어난 바브라 스트라이잰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인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 학교인 에라스무스-홀 고등학교(Erasmus-hall high-school)에 입학한다. 연극 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대 초반 뉴욕에서 무명 배우와 클럽 가수생활을 병행했는데 1961년 아마추어 가수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1962년 브로드웨이(Brodway)에 입성하여 뮤지컬 배우로서의 화려한 삶을 시작한다. 1962년 ’Can get it for you wholesale’이 뮤지컬 첫 작품이었는데 이 뮤지컬에 쓰였던 곡들은 그녀의 스튜디오 앨범으로 다시 레코딩되어 공식적인 그녀의 첫 앨범 < Pins And Needles >가 만들어진다. 1963년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후 가수로서의 삶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정규 첫 앨범인 < The Barbra Streisand Album >은 탑10진입과 동시에 골드 레코드 획득의 큰 성공을 거둔다. 1964년 < The Second Barbra Streisand Album >, < The Third Album >을 성공시키며 가수로서의 길을 확고히 다졌지만 바브라는 다시 브로드웨이로 돌아간다. 1964년 가수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당시 브로드웨이 최고의 걸작 < Funny Girl >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그녀는 곧 브로드웨이 대 스타로 성장한다.(이 뮤지컬은 4년 후 영화화되었으며 이 영화로 196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뮤지컬 배우로 각광 받는 동안에도 가수로서의 활동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1964년 싱글로 내놓은 ’People’이 탑10에 올랐으며 동명 앨범 < People >은 그녀에게 차트 첫 정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1965년 TV 프로그램 < My Name Is Barbra >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바브라는 5개의 에미상을 수상했고, 이후 1968년 ’Funny girl’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 시기 그녀는 영화 배우로서 더 두각을 나타내었다. 1969년 < Hello Dolly >에 출연했으며, 같은 해 작품인 < On A Clear Day You Can See Forever >, 1971년 코메디 영화 < The Owl And The Pussycat >, 1973년 < Up The Sandbox > 등이 성공을 거두었다. 가수로서의 성공이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면 영화의 성공은 사운드트랙을 통한 가수로서의 재 성공을 이끌었다. 1973년작 < The Way We Were >, 1977년 < A Star Is Born >은 영화와 사운드트랙이 동시에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The way we were’는 첫 싱글 1위 곡이 되었으며 < A Star Is Born >의 러브테마 ’Evergreen’ 역시 두 번째 싱글 1위 곡이 되어 1970년대 그녀를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규정짓는다. < A Star Is Born >로 바브라는 그래미를 거머쥐었다. 바브라 스트라이잰드는 여러 듀엣 곡으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와의 듀엣곡 ’You don’t bring me flowers’으로 정상을 밟았고, 도나 섬머(Donna Summer)와 함께 ’No more tears (Enough is enough)’를 불러 인기를 얻었다. 듀엣 곡은 80년 작 < Guilty >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비지스(Bee Gees)와 함께 작업한 이 앨범은 현재까지 바브라 스트라이잰드 최고의 히트 앨범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비지스 멤버들과 그들의 작업 멤버들이 모두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비지스의 맏형 배리 깁(Barry Gibb)과 그녀의 듀엣 곡 ’Guilty’가 정상을 밟으며 그래미를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Woman in love’ 역시 정상에 올랐다. 1980년대 영화에서 또 음악에서 그녀의 성공은 꾸준히 이어졌다. 영화 < Memories > 역시 영화와 음악이 모두 인기를 누렸으며(수록곡인 ’Memory’가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곡은 뮤지컬 ’Cats’의 러브송이기도 한다.), 1983년에는 영화 감독으로도 데뷔하여 영화 < Yentl >을 만들었고, 사운드트랙 앨범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이어진 1985년 작 < The Broadway Album > 역시 차트 정상에 오르며 명성을 이었다. 80년대 후반 이후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가수로서의 정규 앨범을 자주 내어놓지 않았던 바브라 스트라이잰드... 영화 감독과 배우로서의 바쁜 활동이 겹치면서 이러한 모습은 더 심화되었지만 간간이 선보이는 가수로서의 모습, 가수로서의 위상은 변함 없다. 1996년에는 자신이 감독, 주연한 영화 < The Mirror Has Two Faces >의 주제곡 ’I finally found someone’을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와 함께 불러 인기를 얻었으며 1997년에는 셀린 디욘(Celine Dion)과의 듀엣 곡 ’Tell him’으로 차트 정상을 밟으며 < Higher Ground >를 히트시켰다. 1999년 < A Love Like Ours >를 선뵈며 40년의 긴 인기행진을 이어가고 훀지만 영화 감독으로서의 활동에 심취해있는 그녀는 최근 ’앞으로 대형 콘서트를 열지 않겠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등 가수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노래 : B. J. Thomas (B. J. 토마스,Billy Joe Thomas)
멤버 : Bob Flick, Dick Foley, John Paine (2), Mark Pearson, Mike Kirkland 멤버 : Bob Flick, Dick Foley, John Paine (2), Mark Pearson, Mike Kirkland
노래 : kaskade (캐스케이드)
노래 : Simon &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멤버 : 폴 사이먼(Paul Simon, 보컬),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기타, 보컬)
노래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일랜드)
노래 : Tony Orlando & Dawn (토니 올란도 앤드 던)
멤버 : 토니 올란도(Tony Orlando), 텔마 홉킨스(Telma Hopkins), 조이스 빈센트 윌슨(Joyce Vincent Wilson) 멤버 : 토니 올란도(Tony Orlando), 텔마 홉킨스(Telma Hopkins), 조이스 빈센트 윌슨(Joyce Vincent Wilson)
1970년대를 대표하는 흑인 여성 싱어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이 1990년대의 음악 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힙합 트리오 더 퓨지스(The Fugee)의 공헌이 컸다. 이들의 걸작 < Score >에는 로버타 플랙의 대표곡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댄서블하게 재해석한 ’Killing me softly’가 수록되어 있어 이 곡을 통해 젊은 신세대들은 로버타 플랙과 ... 1970년대를 대표하는 흑인 여성 싱어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이 1990년대의 음악 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힙합 트리오 더 퓨지스(The Fugee)의 공헌이 컸다. 이들의 걸작 < Score >에는 로버타 플랙의 대표곡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댄서블하게 재해석한 ’Killing me softly’가 수록되어 있어 이 곡을 통해 젊은 신세대들은 로버타 플랙과 상견례를 가졌다. ’American pie’와 ’Vincent’로 유명한 포크 싱어 송라이터 돈 맥클레인(Don McLean)의 노래하는 모습에 감동한 작곡가 찰스 폭스(Charles Fox)와 노만 김벨(Norman Gimbel)이 만든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은 1988년 ’Nite & day(7위)’라는 히특곡을 낸 흑인 남성 싱어 알 비 슈어(Al B. Sure)가 퓨지스와 같은 제목인 ’Killing me softly(80위)’로 1989년에 반짝 인기를 얻은바 있었다. 이 노래로 1970년대 초반 당시 로버타 플랙의 명성은 높아졌고 그녀의 인기는 한지에 먹물 퍼지듯 전 세계에 급속히 번져나갔다. 1939년 2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플랙은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의 생활을 접고 서른의 나이에 본격적인 풀타임 뮤지션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1969년의 처녀작 < First Take >는 리듬 앤 블루스와 재즈적인 감각이 몸에 벤 명 프로듀서 조엘 돈(Joel Dorn)의 도움으로 공개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리듬 앤 블루스이지만 재즈의 감성이 두드러진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과 함께 그녀의 명곡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는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는 느긋하고 나른한 재즈의 숨결을 담아낸 리듬 앤 블루스의 고전이다. 재즈 매니아로 알려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제작비를 절감한 1971년도 영화 < 어둠 속의 벨이 울릴 때 >에 이 곡을 삽입했다는 것은 위의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는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72년에 6주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켰고, 그녀의 대학 동창인 도니 해더웨이(Donny Hathaway)와 함께 취입한 ’Where is the love?’도 같은 해에 5위를 기록하면서 1973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와 올해의 듀오나 그룹(Where is the love)을 수상하게 된다. 프로 데뷔 4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1973년에는 5주 동안 차트 정상을 지킨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으로 2년 연속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했고 최우수 여자 가수 부문도 수상했다. 이렇듯 197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는 로버타 플랙의 전성기였고 이러한 그녀의 히트 퍼레이드는 198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At seventeen’의 주인공인 포크 싱어 송라이터 재니스 이안(Janis Ian)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Jesse(30위)’는 국내 라디오에서 꾸준한 신청 엽서를 받았으며, 세 번째 1위곡 ’Feel like makin’ love’, 도니와 다시 호흡을 맞춘 아름다운 발라드 ’The closer I get to you(2위)’, ’If ever I see you again(24위)’, 그녀의 음악 중에서 가장 펑키(funky)한 ’Back together again(56위)’, ’Making love(13위)’, 그리고 1983년 국내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은 피보 브라이슨(Peabo Bryson)과의 듀엣곡 ’Tonight I celebrate my love(16위)’ 등이 그녀의 인기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로버타 플랙의 활동은 극히 미진했다. 1979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음악 동지 도니 해더웨이와 두 번째 단짝 피보 브라이슨에 이어 선택한 그녀의 세 번째 파트너는 1990년 ’Close to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경험한 영국 출신의 레게 뮤지션 맥시 프리스트(Maxi Priest)였다. 그들은 스타쉽(Starship)이 1987년에 발표한 앨범 < No Protection >에 수록된 숨겨진 보석 ’Set the night to music’을 선택했다. 현재 몸값이 가장 비싼 작곡가중 한 명인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이 곡이 1991년 6위에 랭크되면서 로버타 플랙은 다시 부활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93년 12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차분한 내한 공연을 가져 그녀의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흑인 민권 운동과 소울 음악으로 흑인들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1960년대 후반에 정식으로 데뷔한 로버타 플랙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음악 소재는 항상 ’사랑’이었기에 급진적이고 예민한 정치, 사회적인 가사는 그녀의 노래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 로버타 플랙은 백인들에게도 환영받았고 제도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를 2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 음악 평론가들은 로버타 플랙의 음악을 흑인의 정신, 즉 소울이 없이 예쁘게만 포장된 음악이라며 평가절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믿음인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아무 편견과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결국 그녀는 증오와 갈등이 흑인과 백인의 마음을 지배하던 혼란과 불신의 시대에 믿음과 사랑의 씨앗을 심은 ’수호천사’였다.
노래 : Rod Stewart (로드 스튜어트)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는 탁월한 보컬 실력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40년 가까이 팝 음악계를 휘저어온 록의 슈퍼스타다. 한편으론 화려한 여성 편력과 시류에 영합한 잦은 노선 변경으로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안타까운 팝 가수이기도 하다. ‘브리티시 록의 대명사’란 기분 좋은 찬사 외에도 ‘금발 사냥꾼’, ‘변신의 귀재’, ‘리메이크의 달인’과 같은 준엄한 평가가 늘 동행한다. 수십 년 세월을 이겨온...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는 탁월한 보컬 실력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40년 가까이 팝 음악계를 휘저어온 록의 슈퍼스타다. 한편으론 화려한 여성 편력과 시류에 영합한 잦은 노선 변경으로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안타까운 팝 가수이기도 하다. ‘브리티시 록의 대명사’란 기분 좋은 찬사 외에도 ‘금발 사냥꾼’, ‘변신의 귀재’, ‘리메이크의 달인’과 같은 준엄한 평가가 늘 동행한다. 수십 년 세월을 이겨온 거장의 풍모와 부끄러운 록 엘리트의 단면을 함께 보여준 역전의 베테랑 뮤지션이 바로 로드 스튜어트다. 194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로드 스튜어트의 처음은 참담했다. 어려웠던 집안 형편 탓에 각종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축구 클럽에서 고참 선수의 구두도 닦았으며, 유럽을 떠돌다 스페인에서 ‘부랑죄’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로커의 자질을 연마해 갔던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1963년 지미 파웰 앤 더 파이브 디멘션스(Jimmy Powell & The Five Dimensions)의 보컬리스트로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스타트했다. 그는 곧 롱 존 보드리(Long John Baldry)가 이끄는 후치 쿠키 멘(Hootchie Coochie Men), 블루스 록 그룹 샷건 익스프레스(Shotgun Express), 당대의 기타리스트가 결성한 제프 벡 그룹(Jeff Beck Group)을 차례로 거치며 최고 보컬리스트로서의 지명도를 계속 쌓아나갔다. 1969년에는 해체된 제프 벡 그룹을 뒤로하고 팀 동지였던 론 우드(Ron Wood)와 함께 스몰 페이시스(Small Faces)에 가입했다. 그는 이름을 짧게 고친 페이시스(Faces)의 간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첫 솔로 앨범인 〈An Old Raincoat Won’t Let You Down〉(미국에서는 〈Rod Stewart Album〉(139위)이란 제목으로 발표됐다)을 발표하며 블루스와 포크, 그리고 로큰롤이 결합된 뛰어난 음악성을 선보였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로드 스튜어트는 본격적인 성공의 문을 열어 젖혔다. 1970년 발표한 두 번째 음반 〈Gasoline Alley〉(27위)로 평단의 지지와 팬들의 호응을 동시에 끌어낸 그는 이듬해 명작으로 손꼽히는 3집 〈Every Picture Tells A Story〉와 자작곡 ‘Maggie May’를 동시에 차트 정상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1973년 발표한 〈Never A Dull Moment〉(2위)와 1975년 내놓은 〈Smiler〉(13위)로도 전작들에 뒤지지 않는 흡족한 양수겸장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바로 이 때부터 ‘바람 바람 바람’과 ‘노골적인 스타덤 뒤쫓기’가 시작됐다. 1975년 금발의 여배우 브릿 에클런드(Britt Ekland)를 필두로 ‘황금빛 로맨스’를 잇달아 터뜨렸고, 무거운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안착했다. 이와 함께 발표한 〈Atlantic Crossing〉(9위)은 오늘날 그의 대표곡으로 각인된 서덜랜드 브라더스(Sutherland Brothers)의 ‘Sailing’(58위)을 담고 있었지만, 초기의 참신함을 버리고 팝 적으로만 나아간다는 따가운 지적을 당했다. 결국 로드 스튜어트는 그 해 말 페이시스를 떠나 완전한 솔로 팝 스타로서의 본색을 드러냈다. 음악적 색깔도 변화시킨 그는 1976년 8주간 차트 1위를 차지한 빅 히트 싱글 ‘Tonight’s the night’을 담은 〈A Night On The Town〉(2위)로 본격적인 인기 사냥에 나섰다. 뒤이은 1977년의 〈Foot Loose & Fancy Free〉(2위)로 여세를 몰아간 후, 마침내 의미심장한(?) 제목의 〈Blonde Have More Fun〉(1979)으로 다시금 차트 1위를 정복했다. 당시의 대세였던 디스코를 수용한 싱글 ’Da ya think I’m sexy?’ 역시 4주간 정상의 황홀경을 체험했다. 이에 성난 펑크 그룹들은 그를 ‘썩은 록 스타’로 규정하고, 사치스런 여성 행각과 실망스러운 인기 영합주의에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마치 시위라도 하듯 최신 조류인 뉴 웨이브/신스 팝을 버무린 〈Foolish Behaviour〉(12위)와 〈Tonight I’m Yours〉(11위)를 1980년과 1981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Passion’(5위)과 ’Young turks’(5위)를 각각 히트시키며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빙글빙글 돌리는 요지부동의 여유까지 부렸다. 그러나 타락(?)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던지 1983년의 〈Body Wishes〉(30위)와 〈Camouflage〉(18위)는 플래티넘조차 따내지 못하는 쓰라림을 맛봤다. 뼈아픈 슬럼프를 경험한 그는 듀란 듀란(Duran Duran)의 존 테일러(Andy Taylor), 쉭(Chic)의 버나드 에드워즈(Bernard Edwards)와 함께 한 1988년의 〈Out Of Order〉(20위)로 재기의 의지를 다졌다. 1989년에는 톰 웨이츠(Tom Waits)의 ‘Downtown train’(3위)을 타고 다시 한번 전진했다. 1991년에도 〈Vegabond Heart〉(10위)를 톱 텐에 올리며 조금씩 스타 회생의 기미를 엿보이게 했다.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근사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1990년대 초반 불어닥친 언플러그드 열풍이었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극적인 재기에 고무된 그는 1993년 론 우드와 함께 감동의 MTV 언플러그드 무대를 연출하는데 성공했다. 곧바로 라이브 앨범 〈Unplugged... and Seated〉(2위)를 발표하고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의 명곡 ‘Have I told you lately’(5위)로 예전의 기력을 거뜬히 회복했다. 같은 해 그는 비슷한 허스키 보이스 후배들인 스팅(Sting), 브라이언 아담스(Brian Adams)와 함께 영화 〈Three Musketeers〉의 주제가 ’All for love’(1위)를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로드 스튜어트는 이듬해인 1994년, 마침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 1995년 톰 페티(Tom Petty)의 ‘Leave Virginia alone’(52위)을 담은 〈Spanner In The Works〉(35위)를 내놓은 그는 이듬해에도 신곡을 포함한 발라드 베스트 앨범 〈If We Fall In Love Tonight〉(19위)로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1998년에는 오아시스(Oasis)나 스컹크 애넌지(Skunk Anansie)같은 새카만 후배들의 곡을 대거 리메이크한 의외의 앨범 〈When We Were The New Boys〉(44위)로 변치 않는 젊음을 자랑하기도 했다. 2001년 그는 R&B 색채로 무장한 신보 〈Human〉(50위)으로 새로운 세기에도 녹슬지 않은 예리한 시대감각을 과시했다. 2003년에는 1930, 40년대의 스탠더드 재즈 송만을 모아 놓은 〈It Had To Be You... The Great American Song Book〉(4위)을 발표하며 숙성된 거장의 깊은 맛을 전달했다. 2003년 현재, 그는 새로운 싱글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로 세월을 잊은 슈퍼스타의 위용을 또 한번 떨치려 하고 있다.
노래 : Lionel Richie (라이오넬 리치)
1980년대에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흑인 남자가수로 이미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 소울 펑키 그룹 코모도스(Commodores)의 리드보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룹만으로서 음악생활을 국한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으로 1980년대 팝 음악계를 석권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Hello’ ‘Stuck on you’ ‘Sa you say me’ 등 그가 만든 탁월한 선율의 노... 1980년대에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흑인 남자가수로 이미 19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 소울 펑키 그룹 코모도스(Commodores)의 리드보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룹만으로서 음악생활을 국한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으로 1980년대 팝 음악계를 석권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Hello’ ‘Stuck on you’ ‘Sa you say me’ 등 그가 만든 탁월한 선율의 노래들이 꾸준히 애청되고있다. 미국 앨러바마의 터스카기 출신인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는 같은 대학 동창생들이 모여서 결성된 그룹 코모도스의 음악지휘자로 그룹의 대다수의 히트곡을 직접 쓰고 불렀다. 그룹과 직결되는 곡들인 `Easy , `Three Times A Lady , `Still’ 등 이지 리스닝 계열의 발라드들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또 1980년에는 컨트리 팝의 거성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의 최대 히트곡 ‘Lady’를 작곡해 주었고 이듬해엔 앨범 프로듀서를 담당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영화 ‘Endless Love’의 주제가를 직접 제작하여 당대 최고의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와 듀엣으로 불러서 싱글차트 정상에 9주간 점령, 최고도에 오른 인기를 과시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82년에 솔로 데뷔앨범 < Lionel Richie >를 내놓고 본격적인 솔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앨범의 첫 싱글 `Truly’ 가 손쉽게 차트 정상에 올랐고, (이 곡은 Commodores식의 발라드를 답습한 결과로 그에게 첫번째 Grammy 트로피를 안겨준 곡이 되었다.) 계속해서 `You are`, `My love’ 등이 차트 상위권을 공략했다. 1983년에는 그를 월드 슈퍼스타로 부상시킨 앨범 < Can’t Slow Down >이 발매되어 미국에서만 판매고가 1000만장을 넘어섰고 세계적으론 20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 LP는 3년 동안 앨범차트에 머무르면서 앨범차트 정상 등극은 물론, 이듬해 그래미상에서는 ‘올해의 앨범’ ‘올해의 프로듀서’부문 상을 수상했다. 수록곡 중 5곡이 싱글로 발매되어 모두 차트 톱10에 오르는 연쇄 히트를 기록했다. 업 템포의 댄스 넘버 `All night long(All night) 이 4주간 정상에 오르며 솔로로서 3번째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고,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차트 정상에 오른 감성적인 발라드 `Hello‘ 는 국내에서도 아직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밝고 통통 튀는 리듬이 인상적인 곡 ‘Running with the night’, 감미로운 리듬의 극치 ‘Penny lover’, 복고풍의 편안함이 압권인 ‘Stuck on you’가 바로 그 곡들이었다. 그 무렵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폐막식의 피날레공연을 맡기도 했다. 1985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기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를 위한 기금모금 행사의 일환으로 앨범 < We Are The World >의 타이틀곡을 제작하여 400만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고, 이어서 또 한차례 영화음악으로 대박을 터트렸으니 바로 영화 < 백야 >(White Nights)의 주제곡인 ‘Say you say me’였다. 역시 골드가 이 곡은 차트 정상을 4주간 점령했고 이듬해 그에게 오스카상을 안겼다. 이 곡이 수록된 솔로 3집 앨범 < Dancing On The Ceiling >은 1986년에 발매되어 전작의 성공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른 ‘Dancing on the ceiling’을 비롯하여 서정적인 발라드들인 `Ballerina girl(7위)’과 ‘Love will conquer all(9위)’, 레게리듬의 경쾌한 멜로디가 흥겨움을 더하는 `Se la(20위)’, 그리고 당시 최고의 컨트리 그룹 앨러바마(Alabama)가 함께 불러준 곡 `Deep river woman(71위)’ 등 싱글이 무더기로 발표되었다. 이후로 새 앨범이 발매될 때까지 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애초 20년 가까이 계속해온 음악생활을 잠시 접어두고자 한 휴지기였지만 그런 선택은 대중의 기억 속에 차츰 잊혀져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2년 모타운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 < Back To Front >는 신곡 셋 외에 모두 기존의 히트곡들로 채워져 창작력에 제동이 걸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부인의 이혼소송에 따른 위자료 문제로 앨범 발매를 늦추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시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4번째 정규앨범 < Louder Than Words >로 모처럼 복귀, 10년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이 대가(大家)다운 도시화되고 세련된 R&B 음악을 선보였으나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1998년 < Time >과 2001년 < Renaissance > 등 계속해서 선보인 신작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마이클 잭슨, 프린스와 더불어 1980년대를 주름잡던 흑인음악의 삼성(三星) 중의 하나는 쇠퇴해 가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매년 자신이 만든 곡을 싱글차트 정상에 올린 진기록, 4개의 그래미상, 9개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상,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이라는 풍부한 수상경력이 주는 가치 그리고 백인들도 거부할 수 없는 그만의 ‘크로스오버 러브 R&B 발라드’의 흡수력은 아직도 천연히 빛을 발한다.
연주 : John Lennon (존 레논 (비틀즈))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 1964년 2월 이들이 처음 미국에 상륙했을 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 이상의 틴에이저들이 운집했고,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의 시청률은 70%를 상회했다. 그 시간대의 뉴욕시의 소년 범죄는 드물게도 제로를 기록했다 ... 짤막한 비틀스 스토리다. 비틀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창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전설의 4인’(Fab Four)은 1960년대 내내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를 주도하면서 시대를 대변했다. 1960년대는 그들의 것이었다. 1970년 그룹은 해산되었고 비틀스라는 이름은 무대에서 사라져 갔지만 멤버 모두가 빛나는 솔로 활동을 펼쳐 재결합설은 끊임없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룹 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레논이 1980년 괴한의 흉탄에 피살되면서 사실상 비틀스 스토리는 끝이 났다. 존 레논은 비틀스의 리더였다. 그의 이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을 이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그가 사망했을 때 시사주간지 < 타임 >과 < 뉴스위크 >는 동시에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던가(권위를 자랑하는 이 양대 주간지가 문화 예술인을 발행일이 같은 날에 표지인물로 취급하기는 존 레논이 최초였으며, 지금까지 그밖에 없다). 그는 우리에게도 유명하다. 비틀스의 리더라는 사실은 차라리 상식이고,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폴 매카트니와의 다툼으로도 유명하다. 아내가 일본 여인 요코라는 점도 유명하다. 특히 우리 팝 팬들에게 ‘이매진’, ‘러브’, ‘오 마이 러브’ 등 아름다운 팝송을 남긴 ‘부드러운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970년 비틀스 해체 전후로 정치, 사회적 제반 문제를 강도 높은 톤으로 노래하고 한때 일선 투쟁에까지 가담한 ‘투사’였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존 레논이라는 어찌보면 한 사람의 대중 스타의 존재에 시사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무게를 실어준 이 중요한 사실이 우리 대부분의 팝 팬들 기억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틀스 시절이 1960년대 후반 존 레논에게 대중음악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인기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꿰뚫고 그 인식을 전달하는 미디어로 파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3인칭 대중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사회적 사고를 전달하는 1인칭 다큐멘터리를 쓰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1968년 그는 ‘혁명(Revolution)’이란 제목의 노래를 싱글로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레논의 사실주의적, 정치적인 노래쓰기의 신호탄을 올렸다. ‘혁명을 원한다고들 하지. 그래,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지... 그러나 당신들이 파괴에 관하여 얘기할 때 나를 제외시키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요... 헌법을 개정할 거라고들 하죠. 예, 우리는 머리를 변화시키길 바라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들 하죠. 대신 정신 상태를 해방시켜야 할 거예요. 모택동의 사진을 들고 나선다면 여하튼 누구와도 성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 미국과 영국 전역에 민주화 투재, 반정 운동으로 시위와 집회가 들끓기 시작하던 그 당시 존은 과격한 행동주의 노선에 앞서 ‘정신 개조’와 ‘의식혁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금의 풍조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의식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그 무렵 존은 자신이 양친 없이 이모 밑에서 자란 불우한 유년기를 비롯, 자신이 겪게 된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자각한 상태였다. 이러한 존재 규명을 토대로 그는 비틀스 해산 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971년도 음반 <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의 수록곡 ‘어머니(Mother)’에서 존은 ‘어머니 가지 말아요, 아버지 돌아오세요’라고 광기서린 듯 절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토해 내고는 곧바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란 곡에서는 전투 의지를 다지는 현재의 변모된 자신을 펼쳐 보인다.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하지.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하지. 그래서 당신은 돌아 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지.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거야... 그들은 당신을 종교와 섹스와 TV로 중독시키지.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현명하고 계급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여기는 거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여전히 형편없는 농부나 다름없다구.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하지... 영웅이 되려거든 자 나를 따르라구!’ 존은 무차별로 법, 종교, 도덕 등 자본주의의 이념적 베일을 들추어 그 실체를 통렬히 고발하면서 개량과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을 부르짖는다. 의식 혁명의 단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실천과 투쟁의 시점으로 진입해야함을 느낀다. 노래로써 그가 내세운 테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로 포장되었다. < 플라스틱 오노 밴드 >와 곧이어 공개된 < 이매진(Imagine) > 음반의 수록곡을 비롯해 해산 직후에 싱글로 발표한 노래를 살펴보자.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올 거야. 네 머리를 두드릴 거야. 자신과 만나야 할거야. 곧 당신은 죽게 될 터인데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사랑 앞에서 비웃으면서 말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당신에게 달려 있어... 인스탄트 카르마가 네게 찾아올 거야. 당신의 발을 움직이게 할 거야. 네 주위의 형제들을 인식하라구. 네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야... 우린 빛날 수 있어. 달과 별과 해처럼. 어서와, 만나자구.’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 카르마는 인연 또는 만남을 가리키는 말로, 존은 이 곡을 통해 미디어를 포함한 현대적이고도 ‘즉각적인 만남’을 역설하고 있다. 발표 당시 영미(英美)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상품 광고배경으로 이용돼 다시금 주목받았다.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라지. 똑바로 두발을 세워 거리로 나서야 해...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를 못받고 노동하고 있어.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줘요.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야.’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법관이 되고 싶지 않아. 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난 성직자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울고 싶지 않아.’ ‘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bed a Soldier)’ 직설적이고 과격한 메시지 일색이다. 마지막 곡에서 그 일단이 엿보이고 있지만, 특히 종교는 그의 독설을 피하지 못한다. ‘신은 우리가 고통을 재는 척도로서의 관념일 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신은 관념이야, 그것으로 우린 고통을 측정하는 거지... 난 마법을 믿지 않아. 성경을 믿지 않아. 히틀러를 믿지 않아. 예수를 믿지 않아. 케네디를 믿지 않아. 석가를 믿지 않아. 엘비스 프레슬리를 믿지 않아. 밥 딜런을 믿지 않아. 비틀스를 믿지 않아. 난 나만을 믿어. 요코와 나를. 그것이 현실이야. 꿈은 끝났어. 어제까지 난 꿈을 쫓고 있었지만 이제 난 다시 태어났어.’ ‘신(God)’이라는 노래다. 여기서 신은 종교적인 신 외에 현실적 우상으로서의 신을 포함하고 있는데 존은 모두를 깡그리 거부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극단을 노출하는 곡으로 비틀스 때인 1966년 “비틀스는 예수보다 유명하다”(Beatles is More Popular than Jesus)라는 발언으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전력을 면면히 이어나간 것이다. 그의 역사관, 사회관은 1971년의 명곡 ‘이매진(Imagine)’으로 완결된다. 존은 이곳에서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고는 말미에 가서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유도하고 있다.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리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이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게나.’ 루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기초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원리로 파악된 사유재산제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초반 영화 < 킬링 필드 >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 사운드 트랙의 백미라고 칭송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존의 생활권인 영미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부정이 테마인 만큼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영화에 이 곡이 삽입된 것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어느덧 가수의 위치에서 크게 일탈, 노래 운동가이자 행위주체로 변해 있었다. 평화를 주제로 한 정치색 짙은 일련의 이벤트에 적극 나섰으며 1960년대 말 대학가의 시위를 주도한 제리 루빈이나 애비 호프먼 등 신좌익 활동가와 친교를 긴밀히 한다. 활동 거점은 미국의 뉴욕. ‘정치 가수’로서의 존 레논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1960년대 말 불길처럼 퍼져나간 공민권 투쟁, 반전 운동은 1968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월남전의 격화를 계기로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갔다. 대학가의 징병 거부 시위는 무장 투쟁의 단계로까지 진입했고 평화를 주창한 비폭력 노선의 히피들 간에도 과격집단 이른바 ‘이피’(Yippie)가 등장했다. 이피들은 흑인 무장 투쟁 그룹인 ‘블랙 팬더’와 제휴, 폭력 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는데, 이 이피들의 리더적 존재가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만이었다. 비틀스 말기부터 이피의 입장에 공감을 가졌던 존은 이들에 동조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해 정치색을 노골화한다. 1969년 5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베드인’ 행사, 같은 해 9월 캐나다 터론터에서의 ‘라이브 피스’ 공연을 가진 데 이어 1970년에는 미국으로 파고들어가 11월 뉴욕 아폴로극장에서의 ‘애티카 자선 콘서트’, 12월 미시건주 앤아버의 미시건대학에서의 ‘존 싱클레어 자선 콘서트’(제리 루빈도 참석) 등에 잇따라 출연하여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 및 모순을 규탄한다. 애비 호프만과 제리 루빈과 같은 신좌익(New Left)과 손잡고 일선 투쟁에까지 나섰으니 일련의 사회운동을 체제에 대한 도발로 간주했던 미국정부가 어찌 가만히 있었겠는가. 존의 행동은 백악관의 닉슨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닉슨 정권은 ‘위험 인물’인 존의 미국 추방을 궁리하게 됐던 것이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존은 강도높게 미공화당 정부의 사기성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 닉슨의 미움을 샀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었던 닉슨 정권은 존 레논이 급기야 그 무렵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미국땅에서 내쫓아야 했다. 닉슨 정부가 두려워했던 인물은 무장투사보다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특히 효과적인 존 레논 부류의 ‘문화적 게릴라’인 까닭이었다. 이때부터 FBI가 존과 요코의 생활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존은 정부 차원의 ‘외압’이 자신에게 가해져오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외쳤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든 또한 어디에 있게되든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할 참이다.” 1972년 2월로 기한이 끝나게 된 그의 미국 체류 비자 연장 신청은 기각되고 말았다. 표면상의 기각 사유는 1968년 그의 체포까지 몰고왔던 영국에서의 마리화나 소지죄였다(궁색하지 그지없다). 이후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는, 존의 미국 정부 당국을 대상으로 한 길고도 치열한 법정 투쟁이 전개되었다. 비자 연장 신청 기각으로 가시화된 닉슨 정부의 국외추방기도에 분기탱천한 그는 1972년 6월 가장 과격한 메시지를 담은 2장짜리 음반 < 뉴욕에서의 한때(Sometime in New York) >를 출반하여 미정부에 응답한다. 그때까지 나온 대중 가요 음반을 통틀어도 가장 급진적이라 할 만한 이 작품에서 존은 19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반민주적 사태를 성토하고 있고, 영국정부에도 핏발을 세워 당시 격화일로를 걷고 있던 북아일랜드 식민 정책에 대해서도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그는 영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경한 자세를 보여 1969년 11월 영국군이 월남과 나이지리아 전쟁에 참전한 데 항의, 비틀스 시절 받았던 국가공로훈장 MBE를 반환해버렸다). ‘죄수를 쏘다니. 43명의 가련한 여인들을. 언론은 죄수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죄수들은 서로 죽이지 않았어. 록펠러가 방아쇠를 당겼지! 그게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거야.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 ‘애티카(Attica State)’ ‘앵글로 잭슨 돼지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북부(아일랜드) 식민지화를 위해 보내졌지. 피에 젖은 유니언 잭을 흔들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찌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감히 억류한단 말인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게 맡기고 영국군은 바다로 되돌아가라!’ ‘일요일, 피에 젖는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고 역시 북아일랜드 식민화 정책을 비판한 노래 ‘아일랜드인의 운명(The Luck of the Irish)’과 함께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은 매상의 이익금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게릴라 단체인 북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부되었다. 이 곡은 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80년대 팝계를 강타한 그룹 유투(U2)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투는 곡은 존의 것과 다르지만 ‘일요일, 피에 젖은 일요일’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이 앨범에는 또 ‘안젤라(Angela)’라는 노래가 들어 있는데, 흑인 여성운동가인 안젤라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탄압을 고발하고 있다. ‘안젤라, 그들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죠. 당신의 배우자를 총살했구요. 정말, 당신은 세계의 무수한 정치적 죄수 중 한 사람이죠... 안젤라. 세계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가요? 세상은 당신을 주시하고 있어요. 당신은 곧 세계의 누이 형제들에게 돌아가게 될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민중의 교사지요.’ 그런데 과연 안젤라를 탄압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고 나중 8년간 미국 대통령에 재임한 로널드 레이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레이건은 1970년 말 카터를 꺾고 대권을 쥐었고, 레논은 그때 피살되었으니 운명의 엇갈림치고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 뉴욕에서의 한때 >음반의 꽃은 ‘여성은 세계의 노예(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라는 곡이었다. ‘우리 여성더러 가정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하지. 그리곤 그녀가 친구가 되기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녀가 하인이 아니면 우릴 사랑하게 아니라고 하거든.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야.’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기둥인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노래는 대중 가요 최초로 우먼리브(Woman lib), 즉 여성해방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곡이라는 게 정설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우먼리브 물결이 솟구쳐 1969년 뉴욕에서 제1회 페미니스트회의가 개최되어 남녀의 완전 평등이 주창되었고 1972년에는 미국 최초의 여성월간지 < 미즈 >가 창간되었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대한 공식적 항의가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는 우먼리브운동에 열정적이었던 아내 요코의 사고방식이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우먼리브를 매우 적절하게 소화해냈다고 평가받았다. 존은 노래만 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념을 적극 실행에 옮겨 요코와 숫제 남녀 역할을 교체해버린다. 요코와 잠시 헤어졌다가 필생의 반려자임을 재확인하고 1975년 재결합한 이후 내내 집안에 들어앉아 아들 숀의 육아에 전념하는 등 안살림에 치중,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불렀듯 ‘하우스 허스번드’(House Husband : 主婦 아닌 主夫가 되는 셈이다)로 변신하여 모든 바깥일은 요코에게 일임한다. 요코가 존의 사후에 사업가의 면모를 견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 덕분(?)이다. ‘여성은 세계의 노예’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이 곡이 발표됐을 때 니거(Nigger)가 차별 용어에 해당된다고 해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차별을 고발한 노래인데 용어가 차별적이라고 금지되다니 우습기만 하다. 존의 노래는 그 이념성, 급진성, 그리고 묘사의 대담성으로 인해 방송 금지라는 억압이 유달리 자주 가해졌다. 심지어 ‘어머니’ 같은 곡은 너무 광기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발표 당시 일부 방송국에서 금지 지정을 받기도 했다(이유치고는 너무 인색하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존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고 만다. 이 무렵 내놓은 음반 < 마인드 게임즈(Mind Games) >나 < 벽과 다리(Walls and Bridges) >에서 나타나듯 투사적 대열에서 극단적 퇴각을 시사, 민주화 투쟁에 지친 모습을 군데군데 노출시키고 음악적 주장은 자취를 감춘 채 공허한 사랑타령을 해대기도 한다. 물론 이 두 앨범은 요코와 별거중일 때 출반되어 절망과 공허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급진성에 매료된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주 오래 전 그것은 꿈속에서였을까? 단지 꿈이었을까? 알아, 난 알아. 그것은 너무 현실 같았어. 거리를 산책했고 열기 속으로 속삭이는 나무들. 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 두 개의 정신이 이상하게 춤을 추고 있었지...’ ‘9번째 꿈(#9 Dream)’ 빅히트한 노래였지만 그의 작품으로서는 너무 무게가 제거되어버렸다. 불과 2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같은 외형상의 사상 전향(?) 때문인지 미국 정부는 마침내 1975년 10월 존에게 미국영주권을 발급해주었다. 더구나 그는 이후 음악 생활을 단절한 채 작품 출반은 물론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꺼렸다. 한편 1987년 전기작가 앨버트 골드만은 존의 전기문인 『존 레논의 삶』을 내놓고 그 무렵 그가 깊이 마약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 일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뉴스위크 >지는 이와 관련한 갑론을박을 커버스토리로 취급했다). 5년간 동면하고 난 후인 1980년 그는 앨범 < 이중환상(Double Fantasy) >을 들고 화려히 컴백하여 새출발의 의지를 팬들에게 알렸다. 그렇지만 그 새출발의 정체란 일반인이 상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매일 우린 사랑을 나누곤 했지. 왜 우리 둘은 멋지고 편하게 사랑을 나누지 못할까. 이제 우리들의 날개를 펴고 휠훨 날아가야 할 때야. 또 하루가 우리 사랑을 비껴가지 않도록. 마치 새출발하는 것처럼 말이야.’ ‘새출발 하듯(Just Like Starting Over)’ 그의 새 모습은 ‘바퀴를 바라보며(Watching the Wheels)’라는 곡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난 그저 여기 앉아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을 응시할 테야. 난 정말 그것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을 테야.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거야.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내게 질문하지. 난 문제는 전연 없고 해결만이 있다고 말하지. 그러면 그들은 마치 내가 이성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젓지. 난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지. 난 단지 여기 앉아 시간을 즐길 뿐이야.’ 참으로 많이 변질된 상태다. 과연 존은 훼절한 것인가. 엄청난 부와 안락에 취해 투쟁 의지를 저버린 것인가. 이런저런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앨범 발표 몇 개월만인 1980년 12월 8일 그는 팬이라고 자처하고 순순히 다가온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체불명의 청년이 쏜 총에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얼마 전 미국 CIA의 조종으로 마크 채프먼이 존을 살해했다는 미확인 외신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존의 사망과 함께 미국은 레이건의 보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존의 후반기 삶을 집중 조명한 사람들은 “그도 별 수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1970년대 초반의 거침없는 돌진과 견주었을 때 이같은 단정이 무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성급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방법론에 변화가 있었을 뿐 최후의 앨범에까지(아무리 냉정하게 따져도) 그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과 평화’는 결코 그의 두뇌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다만 가정이 큰 관심사로 부각되었을 따름이었다. 그의 유작 < 이중 환상 >에는 과잉이라고 여겨지리만치 요코에 대한 헌신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전편을 흐르고 있다. 그에게서 가정이란 의미는 개인에게 가치뿐만 아니라 ‘변화의 밑거름’인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의 살아있는 세포’로 간주되었다. 그간의 현실 투쟁에서 이제 가족을 단위로 한 길고 긴 ‘역사투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존 레논의 전설은 신비와 혼돈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그가 보여준 인생의 드라마틱한 굴곡이 그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방체제의 제반 가치를 통렬히 고발한 투사로서의 존의 모습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진 지 10년이 훨씬 흘렀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서방의 순종파 가수들’과 달리 현실 개혁과 직접 투쟁으로 일생을 숨가쁘게 달려간 그는 여전히 많은 가수들에게 ‘노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서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 퀸의 브라이언 메이, ELO의 제프 린, 유투 그리고 조지 마이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스타들이 그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레논이 사망했을 때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폴 매카트니는 이러한 추모사를 남겼다.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세와 조화를 향한 열정,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자연적 ‘감성’에 무게가 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음악은 감성이 지성을 만든다. 비틀스가 그런 그룹이다. 비틀스는 바로 피와 땀으로 세계정복의 열매와 천재라는 칭송을 획득했다. 그들의 성공은 천재성 아닌 가혹한 고행의 결과물이다. 천재성도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하늘이 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존 레논과 폴이 만난 게 1957년이고 존이 ‘Hey little girl’을 쓴 게 1958년이며 가장 멋진 밴드명인 비틀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1960년이다.

그들은 1964년 세계를 휘몰아치기 전 최소 4-5년 밑바닥생활을 했다. 이 점에서 비틀스는 그들이 꽃을 피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호시절을 타고 졸속으로 결성된 다른 그룹들과는 종이 달랐다. 그들은 그동안 무수한 오디션 실패와 해외 투어로 연주력을 다졌으며 오로지 세계정복이란 목표를 위해 눈물과 배고픔을 삼켰다. 정말 그들 말대로 손이 아프도록 기타를 쳤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리버풀 캐번과 저 멀리 독일 함부르크 클럽을 왕래하며 연주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구촌 석권을 위한 숨가쁜 열정이자 가혹한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리버풀에서 길러졌지만 함부르크에서 성장했다”는 존의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 < 백비트 >에 잘 묘사되었듯 그들은 이곳 클럽무대에서 댄서들 뒤에서 반주를 했고 비좁은 단칸방에서 집단 기식했다. 그들은 그러면서 당시 서구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열심히도 챙겼다.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블루스와 로커빌리, 모타운 R&B, 틴 팬 앨리 팝, 라틴 음악 등 갖가지 계열의 곡들을 골라 커버 연주했다. 아이슬리 브라더스 ‘Twist and shout’, 스모키 로빈슨 ‘You really got a hold on me’, 캐롤 킹 ‘Chains’, 리틀 리처드 ‘Long tall Sally’, 척 베리 ‘Rock and roll music’ 등이 그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로 빚어낼 줄 알았다. 거기서 ‘Love me do’가 ‘From me to you’가 ‘A hard day’s night’가 ‘I feel fine’’이 나왔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 길러낸 창조성, 이를테면 노력에 의해 축적된 내공의 폭발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남들 곡의 템포와 볼륨을 업그레이드했고 그 작업을 통해 이후 그들만의 코드 진행감각 즉 독자적 화성을 찾아낸 것이었다.

비평가 그렉 쇼(Greg Shaw)는 말한다. “비틀스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그리고 첫째가는 로큰롤 팬이었다. 그리고 바로 음악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감성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그 두 가지의 환상적 퓨전! 비틀스의 이 무명시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이번에 나온 앨범 < The Beatles 1 >에서 초기 곡인 ‘Love me do’에서 ‘Help!’까지는 이 출발 이전의 워밍업 시기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실상 비틀스 초기 작품은 이 준비기를 떼어놓고는 논할 수도 없다. 하긴 연습 없이 실전을 잘 치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비틀스는 나중 실전을 연습처럼 해야한다는 진리도 잊지 않았다. 제2부 < 지구촌 전체를 손에 넣다 > 1964년 2월7일 영국의 더벅머리 네 남자가 미국 케네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세계의 음악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비틀매니아’의 시작. 그것은 이후 음악의 중심이 ‘젊은이들’과 ‘대중음악’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른과 고전음악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비틀스가 먼저 1963년 영국을 뒤흔들었을 때 그 광풍은 당시 내각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추문 이른바 ‘프로퓨모 스캔들’도 잠재워버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정치 판에 관심을 깡그리 잊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지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비틀스가 오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전국이 들썩들썩했다. 비틀스는 이처럼 정치 사회적 회오리마저 제압하는 엄청난 팝 폭발(pop explosion)현상이었다. 비틀스 초기 음악은 한마디로 경쾌한 로큰롤이었다. 1950년대 미국 로큰롤에 영국 특유의 셔플 리듬과 보컬 하모니를 덧입힌 스타일로, 강했으되 느낌은 밝았다. 기본 코드를 이용한 로큰롤만의 단순한 진행이었지만 1950년대의 로큰롤보다는 훨씬 템포도 빠르고 볼륨도 컸다. 본격적인 밴드중심 로큰롤의 개막이었다.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들처럼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비틀매니아 시대의 음악은 이처럼 ‘로큰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1963년 ‘From me to you’는 7주간 1위에 오르면서 당시로 볼 때는 경이적인 65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것은 비틀스가 이후 발표한 11장의 싱글이 모두 정상에 오르는 ‘넘버원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다음 싱글 ‘She loves you’는 선(先)주문만도 31만장에 달하면서 영국에서만 160만장이 팔려나갔다. 이 기록은 폴 매카트니의 1977년 ‘Mull of kintyre’에 의해 깨질 때까지 무려 14년 간 ‘영국 최고판매의 싱글’ 타이틀을 지켰다. 같은 해 12월 발표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She loves you’로부터 1위 자리를 승계하며 선주문 94만장에 총 15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들의 꿈이던 미국정복을 이룩해낸 곡도 바로 이 노래였다. 이 곡은 전미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1964년 미국에서 ‘Can’t buy me love’는 판매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주문 170만장에 발매와 동시에 모두 200만장이 팔려나간 것이다(영국에서도 첫 주 122만6천장). 굳이 판매고를 거듭 언급하는 것은 비틀스광풍을 설명하기에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공할 행진은 직접 출연한 영화의 주제곡 ‘A hard day’s night’, ‘I feel fine’, 두 번째 영화에 삽입된 ‘Ticket to ride’ ‘Help!’로 이어진다. 이 때까지 넘버원 싱글 가운데 느린 곡은 하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당시 세대와 호흡하는 로큰롤의 대중성을 신뢰했다. ‘Help!’ 만해도 존 레논은 "원래 느린 곡조로 썼으나 대중의 반응을 고려해 빠르게 불렀다"고 밝혔다. 그 속도감을 갖춘 로큰롤에 소녀들을 미치게 한 곡 중간의 함성 ‘yeah yeah yeah’(비틀스 시대의 상징어가 됐다)으로 그들은 영국의 침공을 견인하며 지구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성공하기 전 그들이 주로 커버했던 곡을 골라 녹음한 폴 매카트니의 1999년 앨범 < Run Devil Run >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I got stung’를 부른 경위에 대한 폴의 설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엘비스 레퍼토리는 아니었으나 인트로가 맘에 들었고 난 엘비스보다 조금은 더 난폭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뜨리고 질러대는 로큰롤을 가지고 그들은 마침내 ‘최강의 로큰롤밴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비틀스는 더 나아가 ‘최강의 팝 밴드’가 되고자 했다. 그 비상을 알리듯 1965년 가을 때마침 현악 반주의 ‘Yesterday’가 나왔다. 제3부 < 거리의 록을 전당의 예술로 >(중기 비틀스) 엄밀히 말해서 로큰롤은 거리의 젊은이들 음악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그것이 등장했을 때 그것은 어른들이 듣는 이전의 스윙 재즈와 스탠더드 팝 발라드와 완전히 ‘분리와 독립’의 선을 그었다.

비틀스도 초기 로큰롤의 영웅들인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할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로큰롤(전에 지적한 듯 좀 더 강하긴 했지만)을 구사했다. 초기에 그들은 기타로 곡을 썼고 그래서 그 때의 곡들은 업 비트의 장조계열 곡들이었다. 그러나 ‘제5의 비틀’이라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그로부터 피아노의 미학을 터득하면서 그들은 느린 단조계열의 발라드 팝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의 록은 완전히 근사한 전당의 예술로 ‘신분상승’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곡이 ‘Yesterday’ ‘Eleanor Rigby’ 그리고 앨범 < Rubber Soul > < Revolver >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였다. 또 하나의 변화는 가사였다. 이전의 그들의 신나는 로큰롤에 담긴 노랫말이라곤 고작 젊은 남녀의 풋사랑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한마디로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내용이 주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포크와 통기타의 영웅 밥 딜런(Bob Dylan)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가사의 중력을 절감했다. 특히 존 레논에게 이 부분의 충격은 절대적이었다. 갑자기 비틀스 노래는 사랑타령에서 ‘사색과 인생’으로 바뀌어갔다. 중기의 대표적인 노래들인 ‘Girl’ ‘In my life’ ‘Eleanor Rigby’는 이전 노래와는 확실히 깊이가 달랐다. 비틀스는 싱글 중심이 아닌 앨범 중심으로 음악작업의 축을 전환했다. 곡도 커버 버전은 완전히 걷어치우고 철저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콤비(더러 조지 해리슨)의 자작으로 앨범을 채우기 시작했다. 평자들이나 대중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비틀스의 최고 명반으로 중기작품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런 저간의 상황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도 우수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영국인들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권위 있는 ‘버진 올 타임 톱 1000 앨범’ 여론조사가 말해준다. 이 리서치에서 < Revolver >가 당당 1위를 차지했으며 < Sgt. Pepper’s.. >는 3위, < Rubber Soul >은 34위에 올랐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미국 문화계 인사들과 히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간 싸이키델릭(psychedelic) 풍향이다. 환각과 약물로 이미지화된 이 흐름은 기존의 지배적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문화적 대안(代案)을 찾고자 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의식확장을 위해 약물 LSD를 실험했고 동양종교를 탐색했고 갖가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항의의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적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평화’였다. 버진 조사에서 1등을 뺏겼지만 여전히 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1967년 앨범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는 바로 싸이키델릭과 히피의 ‘안티’ 성향을 농축해낸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다시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타임에 커버로 두 번 등장한 대중가수는 비틀스밖에 없다). < The Beatles 1 > 앨범은 넘버원 곡들만 수록해 싱글을 내지 않은 이 앨범의 레퍼토리들이 수록되어있지 않지만 대신 ‘Yellow submarine’ ‘All you need is love’로 그 메시지와 분위기를 희미하게 맛볼 수 있다. 중기의 포크와 싸이키델릭 시대를 통해 비틀스는 ‘자기 음악중심’을 확립했다.

단순한 성공공식으로 일관하면서 실험을 배제하는 여타 그룹들과는 달랐다. 초기에 그토록 흔하던 히트싱글 발표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의, 소위 얼터너티브를 찾아 실험하고 탐구했다. 오늘날에도 비틀스가 최강의 그룹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음악혁명’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비틀스의 이러한 성과의 뒷면에는 그룹의 결속력의 약화라는 음지가 존재했다. 4인 각자의 개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서적으로 하나의 그룹 아닌 ‘존 폴 조지 링고’로 흩어지면서 비틀스는 말기를 맞는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반 생산을 게을리 하지는 않지만.. 제4부 < 미래의 기약-4분의 4는 역시 하나! >(말기 비틀스) 1968년 자신들의 음반사 애플(Apple)을 설립했을 때, 그리고 애플의 첫 싱글 ‘Hey Jude’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 때 비틀스의 웅대한 새 출발은 이상하게도 그룹의 결속력 와해로 이어졌다. 비틀스라는 우산 아래 뭉쳤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독자 영역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그룹을 대표하던 존은 비틀스 아닌 필생의 동반자 오노 요코와의 관계에 빠져 들어갔으며, 폴은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넷 가운데 단연 최강자로, 실세로 솟아났다.

존과 폴 간의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헤쳐’ 상황은 비틀스를 ‘존과 폴의 그룹’에서 ‘폴의 그룹’으로 재편했다. 조지 역시 자신의 음악세계에 액센트를 두기 시작했고 곡을 쓰지 못했던 링고도 마침내 ‘Don’t pass me by’나 ‘Octopus’s garden’과 같은 곡을 써내면서 자신감을 획득했다. 애플사에서 낸 첫 앨범 < The Beatles >(일명 화이트 앨범)는 불가피하게 ‘한지붕 네가족’의 앨범이 되어 나왔다. 자신이 쓴 곡을 녹음할 때 다른 멤버들은 그룹동료가 아니라 거의 세션 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틀스의 재정문제를 관장하는 사업고문 발탁을 놓고 존 조지 링고와 폴 간의 입장차이가 불거지면서 멤버들간의 갈등도 노출되었다. 존과 폴은 모든 면에서 가령 예를 들면 결혼날짜와 장소와 같은 문제에서도 사사건건 경쟁적 심리전을 전개했다. 말기에서 비틀스가 차지한 차트 넘버원 곡들은 존의 ‘The ballad of John & Yoko’ ‘Come together’, 조지의 ‘Something’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폴이 주도적으로 쓴 곡이었다. 폴의 작곡 감각은 이후에도 접하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해산 직전에 나온 ‘Let it be’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드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곡들은 비틀스 작품이기보다는 폴의 솔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폴의 천재성은 말기의 앨범 < The White Album > < Abbey Road >에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굳이 싱글이 아니었어도 전자의 ‘Obladi oblada’ ‘Martha my dear’ ‘I will’, 후자에서는 ‘You never give your money’ ‘Golden slumber’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 등 그가 주조한 곡들은 어떤 싱글보다도 사랑을 받았다.

기습적인 비틀스 해산 기자회견을 가진 것도 폴이었다. 전설의 4인들은 해산 후에도 각각의 길을 걸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1970년대의 어떤 싱어 송 라이터나 팝 스타들보다 굵직한 행보를 보였다. 네 사람 모두 차트 넘버원 곡을 기록했다. 그룹 출신으로 솔로활동에서 멤버 모두가 1위 곡을 가진 그룹은 비틀스밖에 없고 이는 앞으로도 깨질 수 없는 기록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윙스(Wings)라는 그룹을 만든 폴의 히트행진은 비틀스 업적을 거의 재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존 폴 조지 링고를 아무리 개별적으로 기억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비틀스라는 집합으로 기억한다. 말기 이후가 ‘4분의 4’이었을지언정 대중의 뇌리에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임은 비틀스 재결합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관측을 깨고 1995년 폴 조지 링고가 투합해 존의 노래 ‘Free as a bird’ ‘Real love’를 만들어 내놓았을 때 다시금 입증되었다. 여기서 링고 스타의 비틀스론(論)을 들어보자. "우린 신비로웠고 그것은 텔레파시였다. 우리가 녹음실에서 작업했을 때…그걸 묘사하기란 정말 어렵다. 우린 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였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동시에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비틀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에 묻히지 않고 갈수록 위대성과 가치가 증대한다. 미국 브라질 쿠바 일본 그리고 한국을 가리지 않고 < The Beatles 1 >가 전 세계적으로 판매열풍을 일으키고있다는 사실은 뉴 밀레니엄 첫 스타가 비틀스라는 것을 말해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1960년과 2000년 사이의 40년 세월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비틀스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이글스(Eagles)에 대한 우리 팬들의 무궁한 애정은 이상하다 못해 불가사의까지 하다. 미국적인 사운드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국내의 팝 팬들조차 ‘가장 미국적인’ 음악을 표방했던 이글스만큼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그 이율배반과 모순은 현재도 거듭되고있다. 왜일까? 그들의 음악 색채가 바뀐 1977년으로 되돌아가야 그 이유가 풀린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서 나름대로의 인생을 꾸려 온 돈 헨리(Don Henley/... 이글스(Eagles)에 대한 우리 팬들의 무궁한 애정은 이상하다 못해 불가사의까지 하다. 미국적인 사운드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국내의 팝 팬들조차 ‘가장 미국적인’ 음악을 표방했던 이글스만큼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그 이율배반과 모순은 현재도 거듭되고있다. 왜일까? 그들의 음악 색채가 바뀐 1977년으로 되돌아가야 그 이유가 풀린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서 나름대로의 인생을 꾸려 온 돈 헨리(Don Henley/드럼, 보컬), 글렌 프라이(Glenn Frey/기타, 보컬), 랜디 마이스너(Randy Meisner/베이스), 그리고 버니 리든(Bernie Leadon/기타)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우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각 구성원들은 버즈(Byrds),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 닐 영(Neil Young) 같은 포크 록이나 컨트리 록 계열 선배들의 음악에 심취한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확인하고 손쉽게 결성의 입지를 세운다. 1970년대 초반 여성 팝싱어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의 백 밴드를 맡으면서 프로 뮤지션의 길로 입문한 이들은 밴드 결성 1년 만에 데뷔작을 취입할 정도로 음악적인 능력을 인정받았다. 역사적인 1집 < Eagles >가 공개되면서 독수리들은 드높게 비상(飛上)했다. ‘The road out/ Stay’의 주인공인 포크 록 싱어송라이터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과 글렌 프레이가 공동으로 쓴 컨트리 록 넘버 ‘Take it easy(12위)’, ‘Witchy woman(9위)’ 그리고 ‘Peaceful easy feeling(22위)’ 같은 초기 걸작들이 들어 있는 이 음반은 1960년대 만개했던 컨트리 록이라는 정체성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백인 미국인들 정서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컨트리와 로큰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 음반의 성공은 당연한 결과였다. 처녀작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용기를 얻은 이 4인조 밴드는 1973년에 두 번째 음반이자 서부 시대의 무법자를 컨셉트로 한 < Desperado >을 냈으나 실적은 그러나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전작인 ‘Peaceful easy feeling’과 유사한 컨트리 넘버 ‘Tequila sunrise(64위)’와 ‘Outlaw man(59위)’이 싱글 차트에 등장했다. 반면 이글스의 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앨범 타이틀 트랙 ‘Desperado’는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처럼 싱글로 커트 되지는 않았지만 꾸준하게 애청되면서 팝의 클래식이 됐다. 무수한 그들의 명곡 가운데는 굳이 이 곡을 이글스 베스트로 꼽는 평자도 적지 않다. 이 노래는 몇 년 전 자신들이 연주를 맡아 주었던 린다 론스태드가 리메이크, 둘의 관계를 수평으로 조정시켰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국내의 모 신발제품 CF에 흘러나와 젊은 신세대들의 귀도 파고들었다. 1974년의 < On The Border >에서 커트된 ‘The Best of my love(이모션스의 디스코 넘버와는 제목만 같은 곡)’가 처음으로 팝 싱글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초기 로큰롤 스타일의 ‘James Dean’(77위)과 ‘Already gone’(32위)도 싱글로 발표되었다. 특히 서부 해안 출신 밴드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보컬 하모니가 아름다운 발라드 ‘The Best of my love’는 이들이 웨스트 코스트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음반부터 기타리스트 돈 펠더(Don Felder)가 가세하면서 좀 더 풍성한 기타 사운드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나온 < One Of These Night >은 이 독수리들에게 황금의 날개를 달아 준 음반이었다. 앨범 타이틀곡이 두 번째로 차트 1위를 점령했고, ‘Take it to the limit’(4위)와 이들에게 그래미상 최우수 그룹상을 안겨 준 ‘Lyin’ eyes’(2위)가 연이어 히트차트 상위권을 유린했다. 그 무렵 국내 라디오에서도 이 곡들은 쉴새없이 방송되었다. 평론가 중 더러는 돈 헨리와 글렌 프라이 콤비의 농익은 선율제조 능력이 전편을 관통한 이 앨범을 그룹의 최고 명반으로 꼽기도 한다. 이즈음 버니 리든이 탈퇴하고 블루스 하드록 그룹 제임스 갱(James Gang) 출신의 그 유명한 기타리스트 조 월시(Joe Walsh)가 입당, 그룹 내부 역학과 음악의 변화를 예고했다. 1976년, 전반기 히트곡을 총망라한 베스트 음반 < Eagles :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이 앨범은 지금까지 미국에서 2600만장이 팔려나가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를 누르고 역대 판매량 1위를 지키고있다)와 조 월시의 영입 이후 기대와 우려 속에 발표된 5집 < Hotel California >는 그들 역량을 최고도로 집적하면서 모든 설왕설래를 단숨에 잠재웠다. 당대에 벌써 록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명반으로 거론되었을 정도였다. 멤버들 스스로도 ‘Hotel California’가 명곡임을 즉각 알아차렸고(신이시여, 정말 저희가 이 곡을 만들었나이까!) 그에 대한 경외감으로 이 곡을 싱글로 발표하기를 주저했다는 일화를 남긴다. 조 월시의 가입으로 전체적인 사운드는 성인 취향의 다소간 하드한 팝 록으로 기울어져 이전처럼 컨트리의 자취는 많이 희석되었다. 이때부터 국내에서 이들을 숭배하는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했다. 이를테면 컨트리적 요소의 배제를 기하면서 이글스가 국내의 스탠더드 팬 층을 넘어 록 팬들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소 불편했던 관계였던 조 월시와 돈 펠더가 연주한 ‘Hotel California(1위)’의 후반부 기타 애드리브는 명실공히 최고의 연주라는 찬사를 이끌어냈으며, ‘New kid in town’(1위)과 ‘Life in the fast lane’(11위)도 잊을 수 없는 곡들이다. ‘Hotel California’는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레코드’부분, ‘New kid in town’은 ‘최우수 보컬 편곡 부문’ 트로피를 그룹에게 안겨주었다. 국내에서는 ‘Hotel California’와 함께 음반의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7분에 달하는 서사적 발라드 ‘Last resort(하다코어 그룹 파파로치의 곡과는 다른 노래)’는 팝 매니아들 사이에서 애청됐다. 하지만 연주와 선율감 그리고 대중성의 정점이라는 칭송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일그러진 ‘아메리칸 드림’을 표현했다는 그룹의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음반에 퍼져있는 ‘모호한 메시지’ 때문에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기도 했다. 베이시스트 랜디 마이스너는 이 걸작을 발표하곤 그룹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컨트리 록 그룹 포코(Poco) 출신의 티모시 B. 슈미트(Timothy B. Schmit)를 받아들여 여섯 번째 LP 제작에 들어갔다.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공개한 < The Long Run >에서도 히트 싱글은 어김없이 배출되었다. 그들에게 마지막 1위 곡이 된 ‘Heartache tonight’를 비롯해 타이틀 ‘The long run(8위)’과 티모시가 보컬을 맡은 ‘I can’t tell you why(8위)’가 그것들이었지만 히트곡들 이상으로 국내에서는 유독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감상(感傷)적인 ‘Sad cafe’가 전파를 잠식했다. 데이비드 샌본(David Sanborn)의 구슬픈 색소폰 연주가 애절함을 더 하는 이 노래는 슬프고 애수 어린 곡을 좋아하는 국내 팝 팬들의 성향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1980년엔 두 장 짜리 라이브 앨범을 발표해 신곡 ‘Seven bridges road’(21위)로 차트에 다시 고개를 내밀었고, 이 곡은 16년이 흐른 1996년에 팝 메탈 그룹 파이어하우스(Firehouse)가 커버해 명곡임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이들의 불화설은 공공연하게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1982년 5월 민주당 후원공연을 끝으로 정식 해산을 발표해 각 멤버들은 솔로 비행에 착수했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1990년대 초반,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가 잦은 접촉을 갖는다는 얘기가 돌면서 재결합 소문이 일각에서 흘러나왔고, 마침내 1994년에 재결합이라는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MTV에서 주최한 특별 무대를 통해 생중계된 돈 헨리, 글렌 프레이, 티모시 B. 슈미트, 돈 펠더, 조 월시의 재결합공연은 전 세계 음악팬들을 흥분시켰다. 4곡의 신곡과 이글스의 골든 레퍼토리로 구성된 실황 음반 < Hell Freezes Over >는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다시 한번 그룹의 절대적 파괴력을 과시했다. 이글스만큼 본토와 우리나라에서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그룹은 없을 것이다. 팝송의 시대라는 1970년대에 국내 팝 팬들은 이글스를 들으면서 즐거움과 안식을 얻었다. ‘Desperado’에서는 느릿함을, ‘Take it easy’로는 가슴 설레는 경쾌함을, ‘The best of my love’에서는 아늑함을, ‘Hotel California’을 통해서는 이상에 미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아쉬운 낭만을, ‘Life in the fast lane’로는 답답함을 날려 버리는 통쾌함을 맛보았다. 그래서 그토록 미국적인 음악을 구사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때로 어두운 시대의 등대역할을 했다. 2001년부터 간헐적으로 내한공연 소문이 이어져 조만간 그들을 국내 무대에서 볼 공산이 크다.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lsara)는 로저, 브라이언과 함께 새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그의 이름을 머큐리(Mercury)로, 밴드의 이름을 퀸(Queen)으로 바꾸었다. 세 명의 베이스주자가 퀸을 거쳐 갔고, 1971년 2월, 존 디콘(John Deacon)은 퀸의 네 번째 멤버가 되었다. 1972년에는 트라이던트(Trident)와 계약을 맺었고, 낮은 수당만을 받으며 스튜디오가 비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녹음한 첫 앨범을 1973년 7월 발매하였다. 퀸의 첫 메이저 투어는 모트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서포트 밴드 자격으로 1973년 11월 영국 리즈(Leeds)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4년 3월, 재킷의 인쇄 문제를 수정하라는 밴드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예정보다 늦게 2집 < Queen II >가 발매되었다. 1974년 3월, 밴드는 자신들이 주인공인 첫 번째 영국 투어에 착수했고, 4월에는 ‘모트 더 후플’의 서포트 밴드로서 첫 미국 투어에 들어갔다. 5월에 간염으로 쓰러졌던 브라이언이 휴식과 녹음을 병행하며 참여해 만들어낸 세번째 앨범 < Sheer Heart Attack >이 발매된 것은 그 해 11월이었다. 앨범은 유럽과 북미 양쪽에서 엄청나게 히트했고, 사람들은 퀸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싱글로 발표된 ‘Killer Queen’은 영국차트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듬해에는 미국 팝 차트에도 진출, 12위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1975년 1월, 퀸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국 투어에 나서, 1일2회 공연해도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4월에는 최초로 일본 방문길에 올랐으며, 공항에는 3천명의 팬이 몰려 나와 열광적으로 그들을 환영해 밴드를 놀라게 했다. 6월에는 새 앨범 < A Night At The Opera >의 작업에 착수, 불공정한 트라이던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존 레이드(John Reid)와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사람들은 신곡 ‘Bohemian rhapsody’는 너무 길어 히트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곡에 매료된 디제이 케니 에버릿(Kenny Everett)이 프레디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홍보용 싱글을 이틀 동안 열네 번 방송에 내보냈다. 곡은 어마어마한 히트를 했고, 퀸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곡의 홍보를 위한 뮤직비디오는, 이후 뮤직비디오 대유행의 효시로 간주되었다. 싱글은 9주 동안이나 영국차트 1위에 머물렀다. < A Night At The Opera >의 제작비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고, 1975년 11월에 발매가 되자 큰 히트를 기록하여 퀸에게 최초의 플래티넘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표지에는 프레디가 첫 앨범을 위해 만들었던 퀸 로고를 재 작업하여 사용하였다. 이 앨범에선 미국 차트 9위에 오른 ‘Bohemian Rhapsody’에 이어 존 디콘이 쓴 ‘You’re my best friend’(영국 7위, 미국 16위)가 히트했고 국내에서는 두 곡 외에도 프레디 머큐리가 쓴 아름다운 발라드 ‘Love of my life’가 폭발적으로 애청되었으며 브라이언 메이 작품인 ‘39’도 줄기차게 전파를 탔다. ‘Love of my life’가 퀸의 한국 최고 레퍼토리가 된 데는 ‘Bohemian rhapsody’가 공륜으로부터 허무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받아 라이선스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덕(?)도 작용했다. 1976년 1월, 프레디는 ‘Bohemian Rhapsody’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상을 ‘Killer Queen’에 이어 다시 한번 수상했다. 또한 밴드는 세 번째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3월에 끝내고 향일(向日), 다시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당시 넉 장의 퀸 앨범 모두가 영국차트 20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일본 투어를 끝내고 호주로 가서 < Down Under(호주) >라는 제목의 순회공연을 벌였다. 다음 앨범인 < A Day At The Races >의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녹음을 중단하고 짧은 영국 투어에 착수했다. 1976년 9월18일, 퀸은 팬들을 향한 감사의 뜻으로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파크에서 대규모 무료공연을 열었다. 청중은 15만-20만 명 사이로 추산되어 현재까지도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공연의 최다 관객동원기록으로 남아 있다. 밴드는 9월부터 새 앨범작업에 열성적으로 임해, < A Day At The Races >는 12월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홍보를 위해서 특별 경마가 열리기도 하였다. 발매되기 닷새 전에 < A Day At The Races >의 예약주문은 50만장을 넘어섰고, 그것은 당시 EMI 음반사 초유의 쾌거였다. 이 앨범의 싱글은 ‘Somebody to love’(영국 2위, 미국 13위), ‘Tie your mother down’(영국 31위, 미국 49위) 그리고 첫 EP의 리드트랙이었던 ‘An old-fashioned lover boy’(영국 17위) 등이었지만 국내에서는 ‘Bo rap’을 연상시키는 ‘Millionaire waltz’를 비롯해 ‘You take my breath away’, ‘You and I’도 애청되었다. 1977년 초반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투어를 했다. 그 즈음에 로저는 자비로 솔로 싱글을 녹음하기로 결심하고 ‘I wanna testify’를 8월에 발매하였다. 그해 5월에는 대규모 유럽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날아갔다. 런던 얼스 코트(Earls Court)에서의 콘서트에는 초대형 왕관모양의 조명이 등장했다. 폭 54피트, 높이 26피트, 무게 5천 파운드로 제작비는 무려 5만 파운드였다. 그해 10월, 팬클럽 멤버들은 처음으로 퀸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We are the champions’의 촬영이 끝난 후, 출연해준 팬들을 위해 즉흥 공연을 벌였다. 같은 달인 10월, ’Bohemian Rhapsody’로 52년부터 77년까지 발표된 영국 싱글 가운데 최우수 싱글에 주어지는 브리태니어 상(Britannia Award)을 ‘A whiter shade of pale’의 프로콜 하럼(Procol Harum)과 공동 수상했다. 그달 28일 ‘We are the champions’가 수록된 신보 < News Of The World >가 나왔다. 로저는 한 과학소설 삽화가의 작품을 앨범 표지로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았고, 작가는 흔쾌히 승낙하고 수정까지 해주었다. 재정상태가 좋아져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해서 그해의 두 번째 투어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12주 동안 프랑스 차트 1위를 점령한 ‘We are the champions’에 이어 ‘We will rock you’가 1위 행진을 시작했다. ‘We are the champions’는 영국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We will rock you’와 함께 더블 A면 싱글로 발표되어 밴드 최초의 플래티넘(100만장판매) 영광을 안으며 4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에서 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해 앨범 < News Of The World >에서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s’ 외에 ‘Spread your wings’ ‘All dead all dead’ ‘Who needs you’ ‘My melancholy blues’ 등 다수 트랙이 음악다방을 완전히 잠식할 정도였다. 1978년 2월, 퀸은 그들 스스로의 매니지먼트 체계를 갖추기로 결정하고 존 레이드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퀸의 기준에서 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유럽 투어가 1978년 4월에, 이번에도 스톡홀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7월에는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는데, 처음으로 영국이 아닌 스위스 몬트뢰(Montreux)와 프랑스에서 작업하였다. 신곡 ‘Bicycle race’의 홍보를 위해 밴드는 윔블던 스타디움(Wimbledon Stadium)을 빌렸고, 50명의 나체 여성이 자전거 경주를 벌였다. 싱글의 오리지널 커버에는 경주에 나온 한 여성의 뒷모습이 나와 있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사람들의 항의로 말미암아 팬티를 그려 넣어야 했다. 그해 11월 신보 < Jazz >를 발매했다(영국 2위). 재킷에는 나체 자전거경주 포스터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반대에 부딪혀서, 신청서를 대신 넣어 우편으로 포스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밴드는 앨범 발매 축하파티에 EMI와 일렉트라(Electra) 두 음반회사의 중역들을 동시에 초대했는데, 양측은 서로 세를 과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파티는 진흙탕 레슬러, 난장이, 반라의 웨이트레스가 등장하는 기괴한 스타일이었다. 이 앨범에선 더블 A 싱글 ‘Bicycle race/ Fat bottomed girls’(영국 11위, 미국 24위)와 지금도 라디오전파를 수놓는 ‘Don’t stop me’(영국 9위, 미국 86위)가 크게 히트했다. 12월 북미 투어가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간 퀸은 이듬해 첫 달부터 유럽 투어에 들어갔고 이를 끝마치자마자 라이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부틀렉이 유통되는 등 대중적인 수요 때문에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79년 6월 마침내 첫 라이브 앨범 < Live Killers >가 발매되었다. 일본 투어와 영국 투어를 끝낸 그들은 그 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밤 캄보디아를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를 하였다. 1980년 6월 퀸 최초로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 The Game >이 발매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로커빌리 싱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가 최초로 빌보드 정상을 점령했다. 이어 펑키한 리듬이 특징적인 두 번째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도 빌보드 차트의 팝을 위시해 소울, 디스코, 록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하며 앨범의 세계적 폭풍을 이끌었다. 12월에는 영화 사운드트랙인 < Flash Gordon >이 발매되었고, 그 해까지 퀸이 전세계에 판매한 앨범 수는 4천 5백만 장으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는 남미 투어를 감행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8일 동안 다섯 차례나 거대한 스타디움 공연을 매진시켰고, 이어 브라질에서는 하룻밤에 13만 명, 이틀 동안 25만 명이 넘는 유료관객을 동원했다. 이것은 단독밴드로서는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투어 내내 아르헨티나 차트에는 퀸의 모든 앨범이 10위권에 들어 있었다. 퀸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남미에서의 스타디움 투어를 처음으로 해내자, 이후 딴 밴드들의 남미 순회공연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한편, 로저는 첫 솔로 앨범 < Fun In Space >를 발매하였다. 세계 최초의 프로모션 비디오 모음집인 < Greatest Flix >와 사진집 < Greatest Pix >, 히트곡 모음 앨범 < Greatest Hits >가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 Greatest Hits >는 발매 이래 영국 차트 밖으로 밀려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1982년에는 유럽 투어 도중에 12번째 앨범 < Hot Space >를 발매했고, 이 무렵 일본에서는 스마일의 < Gettin’ Smile >이라는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12월에는 가장 급료가 높은 경영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1983년 1월, 프레디와 로저는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솔로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브라이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비롯한 친구들과 모여 잼 세션을 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 Star Fleet Project >라는 미니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8월부터는 다음 앨범 녹음작업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하였는데, 미국에서 녹음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1984년 2월, 13번째 앨범인 < The Works >를 발매하였고 첫 싱글 ‘Radio ga ga’는 19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영국 2위, 미국 16위). 뮤직 비디오에 팬클럽 회원들이 출연하였고 여기서 보여준 박수치는 동작은 각국의 퀸 공연에서 재연되었다. 두 번째 싱글 ‘I want to break free’의 뮤직 비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드라마를 패러디했는데, 멤버 모두가 우스꽝스런 여장을 하고 등장했다. 곡은 영국 3위, 미국 45위를 기록했다. 한편, 3월에 로저와 존은 관광차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에 퀸 팬클럽이 결성되어 수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6월에는 로저의 두 번째 솔로앨범 < Strange Frontier >가 발매되었고, 길드 기타(Guild Guitars)가 브라이언의 기타인 레드 스페셜을 카피한 기타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8월에는 벨기에에서부터 투어를 시작하는데, 10월 보츠와나 공화국의 남아공 백인정부가 건설한 선 시티(Sun City) 공연에 출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밴드는 자신들은 비정치적 밴드이며 단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러 간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에 대한 세계적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선 시티에 갔다는 맹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9월에는 1981년 몬트리올 공연을 촬영한 비디오 < We Will Rock You >가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 탑 200에 아홉 개의 앨범을 올려두어 여전한 퀸의 인기를 증명했다. 1985년에는 록 인 리오(Rock In Rio)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출연한 모든 밴드의 공연이 방송을 위해 녹화되었으나, 퀸만이 실황 비디오를 발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프레디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 Mr. Bad Guy >가 호주 투어 중에 발매되었고, 이어진 일본 투어 중 한 공연이 촬영되어 일본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7월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는 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퀸은 주어진 20분간 완벽한 쇼를 선보였고, 언론과 관객은 전체 공연을 ‘훔친’(stole) 밴드로 퀸을 꼽았다. 밴드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이 때 얻은 영감으로 영화 < 아이언 이글 >(Iron Eagle)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곡 ‘One vision’(영국 7위)을 녹음하여 출시하였다. 1986년 3월, 존 디콘은 이모털즈(The Immortals)를 결성하여 영화 < 비글즈 >(Biggles)를 위한 곡 ‘No turning back’을 녹음, 발매한다. 6월에는 불사의 종족에 대한 판타지영화 < 하이랜더 >(Highlander)의 음악을 맡아, 몇 곡을 추가하고 재편곡을 거쳐 < A Kind Of Magic >이라는 제목으로 열네 번째 앨범을 발매하여 영국차트 정상을 밟았다. 6월부터는 유럽투어에 돌입하여 런던의 웸블리(Wembley) 스타디움에서 이틀간 매진을 기록하며 절정의 열기를 과시했다. 촬영된 둘째 날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훗날 영국 전역에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동시에 방송되었다. 7월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은 동구권 최초의 메이저 록 밴드 공연이었고, 역시 전석 매진되었다. 헝가리 전역의 35mm 카메라를 징발해 촬영된 공연은, 12월에 부다페스트에서 영화로 상영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유럽 전역에서 백만 명, 영국에서만 40만 명이 관람한 유럽 투어는 12만 명이 운집한 네브워스 파크(Knebworth Park)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에는, 퀸의 전 앨범이 동시에 시디로 발매되었는데, 이 역시 초유의 일이었다. 12월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 < Live Magic >은 영국 차트 3위에 올랐다. 1986년 그해 1년간 퀸이 영국에서 판매한 앨범은 총 1,774,991장이었다. 1987년 2월, 프레디 머큐리는 플래터스(Platters)의 명곡 ‘The great pretender’를 리메이크해 영국차트 4위에 올려놓았다. 3월에 그는 평소 흠모했던 오페라 디바 몽세라 까바예(Montserrat Caballe)를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앨범을 녹음하기로 한다. 9월에 발매된 싱글 ’Barcelona’는 스페인에서 3시간 만에 10000장이 팔려나갔다. 로저는 8월, 퀸의 휴식기에 함께 활동하기 위한 새 밴드 크로스(The Cross)의 멤버를 구하기 위한 광고를 냈다. 12월에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 The Magic Years >가 발매되어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1988년 1월이 되자 퀸은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였고, 한편으로 크로스는 데뷔 앨범 < Shove It >을 발매하였다. 10월 8일 프레디와 몽세라 까바예는, 스페인의 왕과 왕비가 참석한 올림픽 행사에서 이틀 후에 나올 앨범에서 고른 세 곡을 협연하였다. 12월 4일, 크로스는 팬클럽 파티에서 브라이언, 존과 함께 공연을 했다. 1989년 5월 22일에는 < The Miracle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다. 앨범에 앞선 싱글 ‘I want it all’은 영국차트 3위(미국 50위)에 올랐고 연이어 ‘Breakthru’(영국 7위) ‘The invisible man’(영국 12위) ‘Scandal’(영국 25위)이 차트를 장식했다. 수년간 하지 않았던 합동 인터뷰를 위해 라디오에 출연하는가 하면, ‘인디펜던트 텔레비전’의 시청자 투표에 의해 ‘80년대 최고 밴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11월에는 < The Miracle >의 대성공에 고무된 멤버들이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1990년 2월18일에는 영국 음향 산업(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BPI)으로부터 ‘영국 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BPI상을 받았다. 크로스는 3월26일 2집 < Mad: Bad: And Dangerous To Know >를 발매하고 독일에서 공연을 가졌다. 브라이언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제작했으며 11월에는 할리우드 레코드사와 계약하여 북미에서 전 앨범을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하기로 했다. 12월7일에 크로스는 퀸 팬클럽 파티에서 연주하였는데 앙코르무대에서 브라이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1991년 1월 14일에는 ‘Innuendo’를 싱글로 발매하여 데뷔와 동시에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명의 앨범이 2월 4일 발매되어 역시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미국에서는 30위).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 show must go on’ 등 이어진 싱글들도 영국에서 각각 22위, 14위, 16위에 오르며 분전했다. 3월에는 크로스가 세 번째 앨범작업에 들어갔고 브라이언은 솔로 앨범 제작을 위해 7월에 몬트뢰로 날아갔다. 같은 달에 크로스의 앨범 < Blue Rock >도 완성되어 9월 초에 독일에서만 발매되었다. 퀸은 4월에 런던으로 돌아가 다시 다음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5월30일에는 프레디는 마지막 출연작이 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였다. 10월에 브라이언은 세빌 기타 레전드(Seville Guitar Legends) 페스티벌에서 누노 베텐코트, 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등과 공연(共演)했다. 같은 달에 < Greatest Hits II >가 발매되었다. 이번에도 비디오 모음집과 사진집을 함께 발매하였다. 앨범과 비디오 모음집은 여지없이 1위에 올랐다. 1991년 11월23일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갑작스럽게 세상에 알렸고, 그 다음날 친구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충격에 빠지고 각국의 팬들이 애도의 꽃과 카드를 보냈으며 프레디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부모의 뜻에 따라, 프레디의 장례식은 세상을 떠난 지 3일 후에 조용히 화장으로 치러졌다. 4월에는 브라이언이 포드 자동차를 위한 광고음악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Driven by you’를 써서 11월25일에 싱글로 발매, 영국차트 6위를 기록했다. 프레디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에이즈와의 투쟁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싱글 ‘Bohemian rhapsody/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가 발매되어 5주간 영국차트 1위에 올라 10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2월에는 퀸의 앨범 10장이 영국 차트 100위권에 랭크되었다. 1992년 2월, 브릿 어워드(BRIT awards)에서는 ‘영국 음악에 크게 공헌’한 바를 인정하는 특별상을 수여하였고,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를 ‘1991년 베스트 싱글’로 선정하였다. 수상식에서 로저와 브라이언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프레디의 삶을 기리기 위한 콘서트를 할 것임을 알렸다. 공연에 누가 나오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다음날 표가 판매되기 시작하였고, 72,000장의 표는 단 6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4월20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프레디를 추모했다. 스타디움은 꽉 찼고, 수십억의 사람들이 시청했다. 여름에는 이 공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The Mercury Phoenix Trust)가 설립되었다.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의 비디오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발매되었다. 4월에는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브라이언의 솔로 앨범 < Back To The Light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6위에 오르고 판매량에서 더블 골드를 기록했다. 브라이언은 11월의 남미 투어를 시작으로 북미와 유럽, 일본 등 월드투어를 이듬해까지 지속했다. 1993년에는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한 프레디의 ’Living on my own’이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브라이언 메이 밴드가 브릭스톤 아카데미(Brixton Academy)에서의 실황을 라이브 앨범으로 내놓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로저가 세 번째 솔로 앨범인 < Happiness? >를 선보였다. 1995년에는 브라이언, 로저, 존이 퀸의 마지막 정규앨범 < Made In Heaven >을 완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 3월, 국내 PC통신 나우누리에 퀸 팬클럽 ‘퀸사모’가 개설되었다. 한국에 개설된 최초의 온라인 퀸 팬클럽이었고, 80년대의 퀸 팬클럽이 1987년 초에 마지막 공식 컨벤션을 개최한 이래 9년만의 일이었다. 1997년에 퀸은 ‘Too much love will kill you’로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프레디에 대한 세 멤버의 추모곡 ’No one but you’가 수록된 편집 앨범 < Queen Rocks >가 발매되었다.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퀸 전문 커버밴드 ‘영부인’(0vueen)이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 1998년에는 브라이언과 로저가 각각 솔로 앨범 < Another World >, < Electric Fire >를 발매했고 1999년에는 < Greatest Hits III >가 발매되었다. 2000년에는 10장의 CD와 2장의 DVD로 제작된 프레디 머큐리 박스세트가 발매되었다. 2002년에는 퀸 뮤지컬 < We Will Rock You >가 선보였고, 높은 인기로 유럽 각국에서 2004년 현재까지도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뮤지컬 개막을 축하하는 깜짝 공연이 브라이언과 로저에 의해 네덜란드에서 열려 큰 화제를 모았다. 또한 브라이언과 로저는 뮤지컬 출연진과 함께 영국여왕 즉위 50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하여 ‘God save the Queen’을 비롯한 여러 곡들을 연주하여 열띤 호응을 받았다. 한편, 퀸의 곡들을 테마로 작곡된 교향곡이 톨가 카쉬프(Tolga Kashif)의 지휘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기도 했다. 또한 ’Bohemian Rhapsody’가 기네스북이 주관하여 영국인 310,000명이 참여한 ‘시대를 초월하는 최고 싱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4년 현재 존 디콘은 은퇴하여 언론매체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고, 브라이언과 로저는 함께 공연하거나, 퀸 관련 디브이디를 제작하는 등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본 내용은 영국의 공식 퀸 팬클럽에서 만든 공식 전기 < As It Began > 축약본을 다시 축약해 내용을 일부 추가한 것입니다.
- 출 연 1989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 - 햅 역 1976 로빈과 마리안 (Robin and Marian) - 마리안 역 1967 언제나 둘이서 (Two For The Road) 1967 어두워질 때까지 (Wait Until Dark) - 수지 헨드릭스 역 1964 뜨거운 포옹 (Paris - When It Sizzles) - 가브리엘 심슨 역 1964 마이 페어 레이디 (... - 출 연
1989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 - 햅 역
1976 로빈과 마리안 (Robin and Marian) - 마리안 역
1967 언제나 둘이서 (Two For The Road)
1967 어두워질 때까지 (Wait Until Dark) - 수지 헨드릭스 역
1964 뜨거운 포옹 (Paris - When It Sizzles) - 가브리엘 심슨 역
1964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 엘리자 둘리틀 역
1963 샤레이드 (Charade) - 레지 램퍼트 역
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 홀리 역
1959 파계 (Nun's story The)
1957 화니 페이스 (Funny Face) - 조 역
1957 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
1956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 나타샤 로스토프 역
1954 사브리나 (Sabrina) - 사브리나 페어차일드 역
1953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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