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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Sheryl Crow (셰릴 크로우) - 11집 Threads [2LP]

[ 게이트폴드 ]
Sheryl Crow, Vince Gill, James Taylor, Emmylou Harris, St. Vincent 노래 외 2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Big Machine | 2019년 10월 0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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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yl Crow (셰릴 크로우) - 11집 Threads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0월 04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A1 Prove You Wrong (ft. Stevie Nicks & Maren Morris)
  • A2 Live Wire (ft. Bonnie Raitt & Mavis Staples)
  • A3 Tell Me When It's Over (ft. Chris Stapleton)
  • A4 Story Of Everything (ft. Chuck D, Andra Day & Gary Clark Jr.)
  • B1 Beware Of Darkness (ft. Eric Clapton, Sting & Brandi Carlile)
  • B2 Redemption Day (& Johnny Cash)
  • B3 Cross Creek Road (ft. Lukas Nelson & Neil Young)
  • B4 Everything Is Broken (ft. Jason Isbell)
  • B5 The Worst (ft. Keith Richards)
Disc2
  • C1 Lonely Alone (ft. Willie Nelson)
  • C2 Border Lord (ft. Kris Kristofferson)
  • C3 Still The Good Old Days (ft. Joe Walsh)
  • C4 Wouldn't Want To Be Like You (ft. St. Vincent)
  • D1 Don't (ft. Lucius)
  • D2 Nobody's Perfect (ft. Emmylou Harris)
  • D3 Flying Blind (ft. James Taylor)
  • D4 For The Sake Of Love (ft. Vince Gill)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25명)

1993년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데뷔한 여성 로커 셰릴 크로우는 미국의 정통 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국내에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는- ‘루츠(roots) 록’ 계열의 음악을 한다. 복고적인 음악에다 경쾌한 록 사운드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감성이 합쳐져서 듣기 좋은 셰릴 크로우의 음악이 된다. 백업 싱어 출신인 그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노래한다. 발랄... 1993년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데뷔한 여성 로커 셰릴 크로우는 미국의 정통 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이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국내에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없는- ‘루츠(roots) 록’ 계열의 음악을 한다. 복고적인 음악에다 경쾌한 록 사운드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감성이 합쳐져서 듣기 좋은 셰릴 크로우의 음악이 된다. 백업 싱어 출신인 그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노래한다. 발랄한 귀염성이 느껴지는 음색에서는 선배 여가수 리키 리 존스(Rickie Lee Jones)의 영향이 느껴진다. 미국적인 루츠 록을 반기지 않는 정서 탓에 국내에서는 그 지명도가 낮은 편이지만 본고장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나오는 앨범마다 격찬을 받았고 대형 팝 스타들이 자청해서 그녀를 돕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수다. 뒤늦게 빛을 본 ‘늦깎이 신인’의 전형인 셰릴 크로우는 1996년 이후 그래미상을 4년 연속 수상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녀는 특히 남성중심의 록음악계에서 여성 뮤지션의 활동영역을 확장시킨 주역이다. 여성 싱어 송 라이터의 붐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사라 맥라클란과 함께 여성 뮤지션들의 축제인 를 주도하기도 했다. 1963년 2월 11일 태어난 셰릴 크로우는 아마추어 빅 밴드에서 활동했던 부모 덕에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해졌다. 6살 때 이미 피아노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고, 13살 때 처음으로 작곡을 하며 음악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 학위를 땄던 그녀는 잠시 음악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곧 작곡과 노래에 전념한다. 1987년부터는 백업 가수로서의 화려한 경력이 시작된다. 셰릴 크로우는 그 해 8월부터 18개월 간 마이클 잭슨의 월드투어에 백업 보컬로 따라 나섰다. 이후 돈 헨리, 로드 스튜어트, 조 카커, 조지 해리슨 등 쟁쟁한 슈퍼스타들의 공연에 참여하며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키워갔다. 다양한 세션 활동으로 주가를 올린 셰릴 크로우는 1991년 < A&M > 레코드와 솔로 앨범을 내기로 계약한다. 이후 ‘튜스데이 나이트 뮤직 클럽(Tuesday Night Music Club)’이라는 이름으로 밴드생활을 하던 그녀는 1993년 밴드의 동료들이 작곡, 세션에 대거 참여한 데뷔앨범 을 발표했다. 그 앨범은 발표 당시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대단한 저력을 발휘하며 7백만 장이라는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역시 밀리언셀러가 된 싱글 ‘All I wanna do’는 13주간 정상을 지켰던 보이즈 투 멘의 ‘I make love to you’에 이어 차트 2위에 올랐다. 그 곡으로 셰릴 크로우는 199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최우수 신인’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음악 전문지 이 1994년 선정한 ‘차세대 록의 주역’으로 뽑히기도 했다. ‘Leaving Las Vegas’, ‘Strong enough’ 등이 연속히트하며 성공적 솔로 가수가 된 그녀는 더 이상 백업 보컬이 아니었다. 밥 딜런, 롤링 스톤스, 이글스 같은 거장들의 공연에 오프닝 가수로서 당당히 노래를 불렀다. 1996년 10월에는 셀프타이틀의 두 번째 앨범이 발표되었다. 그녀 자신의 역할이 훨씬 커진 2집은 전작과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차트 상위권에 올랐던 ‘If it makes you happy’, ‘Everyday is a winding road’ 같은 곡은 그녀의 훌륭한 작곡능력을 재확인시켰다. 1997년 8월 그녀는 사라 맥라클란, 숀 콜빈(Shawn Calvin), 주얼(Jewel) 등과 연계해서 를 주최했다. 이 여성들만의 축전은 ‘남성과 경쟁하는 여성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서 수많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1998년 9월 그녀는 세 번째 앨범 를 출시해서 ‘My favorite mistake’를 히트시켰다. 1998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렸던 공연실황은 음반 에 담겨 출시되었다. 이 앨범은 에릭 클랩튼,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드, 프리텐더스의 크리시 하인드, 플릿우드 맥의 스티브 닉스, 사라 맥라클란 등 쟁쟁한 진용이 참여해 그녀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했다. 건스 앤 로지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해 영화 에 삽입되었던 ‘Sweet child o` mine’는 그녀의 곡으로는 드물게 국내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셰릴 크로우의 음악은 뒤늦게 꽃피운 그녀의 인생과도 상통한다. 폭발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묘한 힘이 있다. 담배연기 자욱한 클럽에 홀로 앉아서 일상적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조적 자세가 그녀에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미덥다. 자극적인 첫맛보다는 은은한 뒷맛이 깊게 남는 가수다.
기타, 보컬 기타, 보컬
노래 : James Taylor (제임스 테일러)
1960년대 히피시대의 잔재인 베이비붐 세대의 감정적 고통을 대변했던 1970년대 이른바 ’싱어송라이터’ 붐의 기폭제가 된 인물이다. 잔잔하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격동의 1960년대를 보내고 섬세하면서도 다분히 내적 성향으로 변화한 기성화 세대의 감성을 대변하면서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Fire and rain’ ’Handy man’ 그리고 첫 번째 아내이자 동료 싱어송라이터인 칼리 사이먼(Ca... 1960년대 히피시대의 잔재인 베이비붐 세대의 감정적 고통을 대변했던 1970년대 이른바 ’싱어송라이터’ 붐의 기폭제가 된 인물이다. 잔잔하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격동의 1960년대를 보내고 섬세하면서도 다분히 내적 성향으로 변화한 기성화 세대의 감성을 대변하면서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Fire and rain’ ’Handy man’ 그리고 첫 번째 아내이자 동료 싱어송라이터인 칼리 사이먼(Carly Simon)과 함께 부른 ’Devoted to you’ 등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 팝송의 시대인 1970년대를 화려히 장식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전성기가 지났지만 근래 내놓은 앨범과 곡으로 거푸 그래미상을 획득, 베테랑의 진가를 발휘하며 다시 이름을 팝 무대 중앙에 올려놓고 있다. 얼마 전 마이클 베커(Michael Becker)가 낸 앨범 < Nearness Of You: The Ballad Book >에 자신의 오래 전 히트곡인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로 참여, 이 노래로 그래미상 ’남성 팝 보컬’ 부문을 수상했다. 제임스 테일러는 1948년 미국 보스톤의 종합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에게는 형 알렉스(Alex), 동생 리빙스턴(Livinston) 휴(Hugh) 그리고 여동생 케이트(Kate)가 있어 모두 뮤지션으로 활약하면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아버지 아이삭이 노스 캐롤라이나 의과대학 학장으로 임명되면서 노스 캐롤라이너로 이주했고, 그의 이러한 중산층 가정 환경은 나중 그로 하여금 쉽게 히피사조에 물들게 했다. 1965년 여름 소련으로 갔다가 그 해 가을 돌아와 매사추세츠 소재 맥클린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는데, 원인은 약의 남용에 의한 노이로제 증세였다. 이듬해 여름 병원에서 나와 친구이자 나중 프로듀서로 유명해진 대니 코치마(Danny Kortchmar)와 포크 듀오 제임스 앤 쿠치(James And Kootch)를 결성했고, 이 듀오는 곧 플라잉 머신(Flying Machine)으로 발전, 포크의 진원지라 할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소재의 커피하우스에서 나잇 오울(Night Owl)이란 이름으로 출연해 연주활동을 했다. 이 무렵 그는 히피즘에 완전히 빠져 정치적 진보주의의 사고와 약물을 가까이 했고 그가 1968년 영국으로 건너가 비틀스 소유의 애플 레코드사에서 첫 앨범을 냈을 시점에는 헤로인 중독의 후유증을 앓고있을 때였다.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앨범이 차트에조차 오르지 못하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70년에는 마침내 광채의 기회를 잡았다. 이 무렵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해 강한 인상을 심어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였던 피터 애셔(Peter Asher)의 소개로 워너브라더스와 음반계약을 체결한 그는 그 해 스스로 1960년대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내용의 기념비적인 앨범 < Sweet Baby James >를 녹음했다. 이 앨범은 차트 3위에 올라 순식간에 200만장이 팔렸으며 1년 반이나 차트에 머물렀다. 여기선 ’Fire and rain(3위)’, ’Country road(37위)’가 싱글로 나와 호응을 얻었다. 1971년 앨범 < Mud Slide Slim And The Blue Horizon >도 승승장구를 거듭, 차트 2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가 됐으며 동료 캐롤 킹(Carole King)이 만들어주고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 보컬을 백업한 곡 ’You’ve got a friend’가 차트 정상을 차지, 그의 노래 가운데 유일하게 차트 1위 곡이 됐다. 이어 1972년 겨울에 발표한 앨범 < One Man Dog >은 전 같지는 않았지만 차트 4위의 양호한 실적을 거두었고 싱글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도 반응이 좋았다. 이 시기의 노래들은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고있던 실연 이혼 독신 등을 주제로 내세워 그러한 정서를 어루만지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연상의 여인인 칼리 사이몬과 결혼, 다정한 부부의 음악교류를 보이면서 음악의 기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네즈 앤 찰리 폭스의 1963년 히트곡에 민속 포크 노랫말을 덧입혀 리메이크한 ’Mocking bird’는 아내 칼리와 호흡을 맞춘 가운데, 훨씬 밝아진 느낌을 주며 차트5위에 올랐다. 이어 마빈 게이(Marvin Gaye)의 것을 리메이크하여 역시 5위를 기록한 ’How sweet it is (to be loved by you)’ ’Mexico(49위)’ ’Shower the people(22위)’ 등 히트행진이 지속되었다. 당시 제임스 테일러의 음악이 베이비붐 세대의 팬들에게 차지하는 위상은 그때까지 발표한 싱글들을 모은 히트곡 앨범 < Greatest Hits >가 현재까지 무려 1100만장이 팔려나간 것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1977년에는 워너브라더스를 떠나 콜롬비아 레이블로 이적, 자신 이름의 이니셜을 타이틀로 한 앨범 < JT >를 내놓고 지미 제임스(Jimmy James)의 1959년 히트송을 리메이크하여 국내에서도 라디오 전파를 강타한 ’Handy man’으로 차트 상위권에 다시 명함을 내밀었다. 이 노래는 앨범 200만장의 판매고를 주도하며 그에게 그래미상 남자 팝 보컬 부문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2번째 싱글 ’Your smiling face’도 20위에 올랐다. 1978년에는 다시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것을 리메이크한 ’Devoted to you’는 비록 차트36위의 평범한 성적이었지만 청취자의 지속적인 리퀘스트를 받았다. 이 곡은 국내에서도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후 1980년대까지 제임스 테일러는 ’리메이크 싱글’의 친화력을 내세워 빅히트를 치지 못했음에도 앨범 판매량은 모조리 플래티넘을 넘어서는 중견의 잠재력을 과시했다. 1979년 < Flag >, 1981년 < Dad Loves His work >, 1985년 < That’s Why I’m Here >, 1988년 < Never Die Young > 그리고 1991년 < New Moon Shine >은 뚜렷한 히트싱글 없이도 모두 100만장 이상이 팔렸다. 싱어송라이터라는 호칭이 무색할 만큼 창작곡이 없었던 이 무렵에 자신의 오리지널이라곤 제이 디 사우더(J. D. Souther)와 함께 만들고 불러 1981년 싱글차트 11위에 오른 ’Her town too’뿐이었다. 1983년에는 평생 동반자일 듯했던 칼리와 이혼, 가정사(事)에 굴곡이 생겼지만 1985년 겨울에 캐스린 워커(Kathryn Walker)와 재혼해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도 10년이 지난 1996년 파경을 맞았다. 1990년대 그는 국내 및 해외 공연에서 파괴력을 보여 콘서트는 항상 매진을 기록했다. 1993년에 나온 라이브 앨범 < Live >는 200만장이 판매됐다. 4년의 공백을 뚫고 1997년에 발표한 신보 < Hourglass >는 노장의 진가를 발휘한 역작으로 평단의 격찬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이듬해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팝 앨범’ 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재즈 뮤지션 마이클 베커 앨범에 참여, 과거 히트송 ’Don’t let me be lonely tonight’로 다시 그래미상 ’남성 팝 보컬’ 상의 영예를 안으며 팝 거목의 시들지 않은 위상을 과시했다.
노래 : Emmylou Harris (에밀루 해리스 )
노래 : St. Vincent (세인트 빈세트)
노래 : Kris Kristofferson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노래 : Willie Nelson (윌리 넬슨,Willie Hugh Nelson)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컨트리, 락 기타 연주자, 싱어송 라이터
노래 : Jason Isbell (제이슨 이스벨)
닐 영이 1992년 < Harvest Moon >앨범을 발표했을 때 록 전문지 ‘복스(Vox)’의 평(물론 그가 신보를 공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누리는 ‘특전’이 미디어 호평 가운데 하나다.). "음악은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것 중 ‘최우수’일 것이지만 그러나, 모른다. 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닐 영을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짚어낸 표현이다. 그는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묘사대로 ‘... 닐 영이 1992년 < Harvest Moon >앨범을 발표했을 때 록 전문지 ‘복스(Vox)’의 평(물론 그가 신보를 공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누리는 ‘특전’이 미디어 호평 가운데 하나다.). "음악은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것 중 ‘최우수’일 것이지만 그러나, 모른다. 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닐 영을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짚어낸 표현이다. 그는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묘사대로 ‘예측불허라는 점만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 뮤지션들의 경우, 음악에 있어서나 장외의 행위에 있어서나 어느 정도 이렇다 할 ‘계산’이 선다. 이런저런 실험과 시도로써 수용자들에게 ‘다양성’을 내비치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판단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닐 영은 쉽게 재단이 되지 않는다. 감동어린 미디어의 찬사를 한 번 더 들어보자. 1993년 7월의 영국 공연에 대한 단행본 ‘버진 이어북(Virgin Yearbook)’의 리뷰다. 이것도 아주 적확하다. "닐 영은 정말 희귀한 상품이다. 나이먹은 록스타로서 그에 대한 불멸의 존경심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컴백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닐 영은 항상 거기에, 어디엔가에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1945년 11월12일 출생했으므로 지금 나이 56세. 20살이 갓 지난 66년부터 공식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솔로 이전에 몸담았던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나 솔로 활동과 병행했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 Nash & Young) 시절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만 해도 40장이 훨씬 넘는다. 일년에 한 장 이상을 낸 셈이다. 어찌 보면 다산(多産)이란 말이 기웃거릴 듯하지만 성실이란 표현 - 항상 거기에, 어디엔가에 있는 - 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장구한 역사의 축적 속에서도 닐 영은 딱히 전성기를 가진 적이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1972년의 ‘Heart of gold’를 들이대며 반박할 테지만 그건 전성기가 아니라 엄연히 ‘반짝기’였을 뿐이다. 그가 70년대 내내 보여준 행적은 ‘Heart of gold’의 넘버 원 타이틀이 은연중에 강제한 ‘상업적 속성’의 인상을 말소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전성기를 ‘거부’했다. 그럼 도대체 닐 영에게 음악은 무엇인가. 기타를 치고 앨범을 내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은 그에게 최초의 그리고 가장 커다란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앨범 발매가 정례화되고 대중과 평단의 눈길이 쏠리게 되면 어느덧 음악은 ‘원죄’가 되고 만다. 축복이라는 양(陽)과 원죄라는 음(陰)의 배반을 주도하고 조화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 된다. 인간은 ‘인위’와 직결되곤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만은 ‘자연’이다. 자연은 일정하면서도 끊임없는 불가지를 드러내곤 한다. 그렇지만 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인간이면서 뮤지션)이다. 닐 영의 음악이 예측불허이며 자연스럽다함은 바로 음악이 인간의 행위일 뿐이라는 그의 인식에 기초한다. 이를테면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이기에 그의 음악이 인위적 규정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뮤지션이 음악을 가지고 대중들을 바꾸려고 하고, 영달을 바라고, 때로 무슨 이유 때문에 음악을 포기해버리거나 할 턱이 없다. 닐 영은 정말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서 그냥 음악을 하는 인물이다. 과연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또, 예측할 수 없게 음악을 해왔는지를 보자. ‘스핀 얼터너티브 레코드 가이드(Spin Alternative Record Guide)’는 닐 영의 음악을 ‘일관되게 몇몇 기본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4가지 기본 영역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작곡가겸 가수로서의 어쿠스틱 음악이며, 다음은‘Free bird’와 ‘Marquee moon’학파로서의 일렉트릭 노병의 음악. 사운드의 성질로 볼 때는 상반되는 것들이 그의 음악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는 60년대에 형성된 자유주의적 도덕주의자의 지향(카우보이를 떠올리면 된다)과 어지러운 딜런(Bob Dylan)식 장르의 언어들이라고 했다. ‘스핀’은 그러면서 "마지막 카테고리의 느슨함과 나머지 셋의 확실성을 결합했을 때 닐 영이 ‘최상’을 보이며, 그것에 대한 신뢰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록 전통의 온힘을 휘두른다"고 묘사하고 있다. 네 카테고리가 서로 얽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영역이 넷이나 된다는 건 좀 너무하다. 그만큼 그의 음악 스타일이 종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1969년의 기념비작 <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 >와 바로 이어진 걸작 < After The Gold Rush >의 관계를 보라. 앞의 것은 일렉트릭 사운드 기조의 하드 록이며 전체적으로 ‘전압’이 높다. 그런데 뒤의 것은 무게를 벗긴 채 대체로 어쿠스틱이며 장르로 치자면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캐롤 킹(Carole King) 류의 소프트 포크에 해당한다. 극단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작 뒤집기’는 닐 영의 음악 역사에서 무수히도 반복된다. 1985년의 < Old Ways >와 1986년의 < Landing On Water >, 그리고 2년 후의 < This One’s For You >와 89년에 발표한 명반 < Freedom >의 관계도 그렇다. 가깝게는 화제작 < Sleep With Angels >와 이듬해인 1995년의 앨범 < Mirror Ball >의 편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수시 교차’와 평행선 유지는 심지어 한 앨범에서까지 기승을 부린다. 일례로 그 유명한 < Rust Never Sleeps >의 경우 LP의 앞면은 어쿠스틱, 뒷면은 일렉트릭으로 되어 있다. 왜 그런지 알 길은 없지만, 그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나니까 그렇지’라고 퉁명스럽게 답할 것이다. 닐 영의 음악은 이런 기조로 볼 때 ‘컨트리와 포크의 벽리’(이른바 루츠Roots라는 것)와 그것의 대척점이라 해도 무방한 ‘피드백의 분노’로 양분이 가능해진다. 컨트리나 포크의 분위기는 ‘Heart of gold’의 빅 히트로 대중 일반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미지이지만, 피드백의 하이 볼륨 지향은 많은 앨범에 비해서는 꽤 낯설다. 하지만 이 일렉트릭의 하드 사운드 추구가 적어도 록 평단으로부터 인정을 획득하게 만든 밑거름이라고 생각된다. ‘닐 영=로커’라는 등식이 누구라도 저항함이 없이 구축된 것이다. 또한 닐 영의 록은 사운드의 질감으로 단번에 알 수 있듯 헤비 메탈의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다. 명기타리스트의 목록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 있질 않다. 굳이 ‘그만의 맛깔’이라고 두둔할 수도 있겠으나, 소위 ‘잘치는 기타’로 말하기는 어렵다. 둔탁하고 때로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런 스트레이트한 측면이 라이브 앨범에선 여실히 나타난다. 공연에서 닐 영은 긴머리를 휘날리고 이리저리 허리를 구부리며 격렬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한마디로 ‘요동’을 친다. 그런데도 나오는 소리가 겨우 그 정도라면 가련한 느낌마저 든다. 결국 닐 영의 음악은 테크닉과 예술적 우수성이 아닌 ‘록의 자세’로 봐야 한다. 펑크, 개러지, 그런지와의 유관이 여기서 맺어진다. 자세를 살피기 전에 사운드만 들어도 닐 영의 하드 록은 헤비 메탈보다는 ‘지향이 앞서는’ 펑크에 가깝다. 평론가 돈 맥콜리스는 "닐 영의 동료들이 70년대말 펑크의 융기에 위협을 받았던 반면에 < Time Fades Away >와 같은 그의 음악은 이미 펑크의 무모함과 즉발성을 예고했었다"고 지적한다. 스스로 펑크 앨범이라 했던 < Rust Never Sleeps >의 ‘My my hey hey’에서는 기성 로커 최초의 펑크 뮤지션에 대한 우호적 언급이 나온다. 물론 충고조로 ‘서서히 사라지느니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자니 로튼(Johnny Rotten, 섹스 피스톨스)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동시대 로커들이 철저히 펑크 키드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 때 한가롭게 경의와 조언을 표하는 여유는 명백히 ‘자기과시’ 또는 ‘대열 구분’이다. 그는 정말 팝스타가 되어 거드름을 피우는 당시의 록 엘리트들과는 달랐다. 스스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대열이 다른 선배’임을 후배가 또 역사가 입증해 주었다.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서 지친 심경을 토로하고 ‘서서히 사라지느니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는 그의 가사로 끝을 맺었다. 닐 영이 엽총 자살이란걸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런지 록의 후배들이 그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세와 정신이었다. ‘My my hey hey’에 반복되는 ‘로큰롤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신뢰한다. 진작부터 닐 영은 ‘그런지의 대부’로 숭배의 대상이 되게 돼있었다. 그와 까마득한 후배 에디 베더(Eddie Vedder, 펄 잼)는 록이 기능적 우월이 아닌 자세와 정신의 산물이라는 인식에서 일치했다. 따라서 그는 명기타리스트 명부에는 명함도 못내밀지만 록 역사에서는 계보의 중심 인물로 천연히 빛을 발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실수를 저질러선 안된다. 그를 ‘펑크 스피릿(Punk Spirit)’이란 반항의 이데올로기에 서있는 아티스트로 단정하는 것 말이다. 그랬다가는 닐 영의 행위 궤적이 맞질 않아서 진땀을 흘리게 된다. ‘종잡을 수 없음’이 또 도진다. 그는 이념에 얽매인 뮤지션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자신을 편하게 조정하는 ‘편의주의적 기질’을 소유하고 있다. 조금은 ‘제멋대로’이다(이것을 ‘D.I.Y. -Do It Yourself’로 보지 말기를!). 닐 영의 사고를 제공하는 버팀목은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앞서 지적한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가 얼마나 감정적인가를 보자. 1982년 리프라이즈(Reprise)에서 게펜(Geffen)으로 이적한 그는< Trans >앨범을 통해 뜻밖에 컴퓨터와 신서사이저의 전자 음악을 선보인다. 좋게 말해서 ‘음악적 정체성의 위기’였고 나쁘게 말해선 ‘록에 대한 훼절’이요 ‘기회주의적 시대부응’이었다. 게펜 시절의 음반들에는 도에 지나질 만큼 감정을 따른, 어쩌면 마구 만들어낸 음악들이 많다. 그는 70년대초 반(反)닉슨주의자로, 그리고 반기성세대적 인물로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그가 유달리 진보적인 베이비 붐 세대의 팬(대부분 닐 영의 동시대 음악팬들)이 많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1980년 ‘카터와 레이건의 대선전(大選戰)’에 내놓은, 제목부터 야릇한 < Hawks And Cloves >앨범으로는 당시 불기 시작한 정치적 보수주의를 내비친 것이었다. 심지어 미-소(美-蘇) 간의 ‘스타 워즈’를 향한 레이건 대통령의 국방증강계획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히피 최후의 카우보이’란 마지노선은 무너졌다. 그러나 보수적 상업적 풍조에 안전착륙하려는 록의 풍토에 반발한 < This Note’s For You >앨범을 기점으로 레이건 공화당에 대한 애정은 작별을 고한다. 1989년의 < Freedom >은 부시의 공화당을 향한 반감이 고개를 든 앨범이었다. 1991년말 시애틀 그런지의 폭발은 그로 하여금 하위 저항의 본령을 지휘하는 ‘베테랑 감독’으로 위치 지워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레이건 옹호주의자가 ‘그런지의 전사’가 될 순 없다. 이러한 ‘곡예’는 무엇의 결과물인가. 닐 영은 그래도 당당하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떳떳하게 ‘인간 감정에 충실히 살아왔다’고 강변한다. "나에게 변명이란 없다. 나는 그때마다 내가 믿는 것을 말할 뿐이다. 4년이 지나면 같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예측불허인가. 그는 결코 하나의 주의(主義)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충성형의 존재가 아니다. ‘변절’이라는 폄하적 규정은 결국 ‘인간의 의사가 이데올로기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대에 불변하는 주의는 있겠지만 시대에 불변하는 인간은 존재치 않는다(또는 그것이 매우 불편하다)고 닐 영은 사고하는 것이다. 닐 영에게 있어 음악은 엄연히 닐 영이라는 인간의 밑에 있다. 음악에 지배당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를 토대로 그의 음악과 지향의 ‘이쪽저쪽과 들쑥날쑥’을 해석해야 옳다. 1983년 게펜사는 그가 ‘닐 영적인 음악’을 만들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기소하면서 3백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 게펜측은 왜 어리석게도 그의 앨범이 ‘닐 영의 음악’이 아니라 ‘닐 영이 하는 음악’이라는 대명제를 몰랐을까? 90년대 중반 이후의 앨범들이 비평적 찬사를 획득하는 것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그 앨범들을 좋아하겠지만 난 ‘정상과 계곡’을 함께 가지려 한다. 딴 레코드를 내면 그들은 그것을 쓰레기라고도 할 것이다. 불가피하다. 올라가면 내려오는 법이고 꼭대기가 반드시 바닥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계속 움직이는 한 말이다." 불규칙 바운드로 일관돼온 듯한 앨범들에 대한 본인의 평. "얼핏 레코드들이 전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30년간 똑같은 노래였다. 다만 그것을 때에 따라 다르게 불렀을 따름이다." 그에 대한 단선적 재단이 얼마나 위험하고 몰이해의 결과인지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례. 그는 < Mirror Ball >의 수록곡 ‘Downtown’에서 레드 제플린을 따뜻하게 언급해 주변인들을 놀라게 했다. 펄 잼의 시각에서 닐 영과 제플린은 ‘적과 동지’의 양극이다. "제플린과 나! 우린 별로 다를 게 없다. 제플린과 맞아 돌아가 그 밴드의 멤버가 될 수도 있다. 단지 시각이 다를 뿐이다." 그는 트렌드나 패션을 좇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따른다. "난 그저 내가 연주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러나 때때로 깨어나 딴 것을 연주하고 싶어진다." 록 뮤지션으로서 그의 유일한 룰은 ‘룰이란 없다(There is No Rules)’이다. 그것을 통해 닐 영은 음악을 지배한다. ‘인간하의 음악’을 믿는다면 닐 영을 이해할 것이고 ‘음악하의 인간’이라는 음악지고주의를 신뢰한다면 그는 닐 영을 택할 이유가 없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공히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 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노래 : Brandi Carlile (브랜디 칼라일)
포크/컨트리 락 싱어송라이터 포크/컨트리 락 싱어송라이터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노래 : Gary Clark Jr. (게리 클락 주니어)
블루스, 락, 소울 기타 연주자, 보컬 블루스, 락, 소울 기타 연주자, 보컬
노래 : Andra Day (안드라 데이 (보컬))
노래 : Chris Stapleton (크리스 스테이플턴 ,Christopher Alvin "Chris" Stapleton)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노래 : Mavis Staples (메이비스 스테이플스)
‘과연 미국 대중음악의 힘과 독점적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이며 선수 층(?)은 얼마나 두터운가?’ 매년 2월이 되면 떠오르게 되는 우문(愚問)들이지만 그래미상은 이 물음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2002년 올해에도 이름도 모르는 인디아 아리(India Arie)라는 신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주요 4개 부문을 포함, 모두 7개 부문의 후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라스(NARAS)... ‘과연 미국 대중음악의 힘과 독점적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이며 선수 층(?)은 얼마나 두터운가?’ 매년 2월이 되면 떠오르게 되는 우문(愚問)들이지만 그래미상은 이 물음에 대해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2002년 올해에도 이름도 모르는 인디아 아리(India Arie)라는 신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주요 4개 부문을 포함, 모두 7개 부문의 후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라스(NARAS) 위원들은 그 어리석은 질문에 친절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는다. 북미 대륙에서조차 지지 기반이 미약한 아티스트일지라도 일단 실력과 가능성이 검증만 되면 미국의 음악관계자들은 그 음지의 무명을 양지로 초대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그들에 대한 커트라인도 없다. 지금 막 데뷔한 신인일 수도 있고, 경력은 오래 되었으되 불운으로 빛을 보지 못한 늦깎이 싱어가 대상이 될 수도 있다. 1989년 32회 그래미상 시상식장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보니 레이트(Bonnie Raitt)도 ‘20년 무명’의 긴 잠복기를 깨고 수면 위로 급부상해 비로소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한 대기만성형 블루스 여가수다. 그녀가 불혹의 나이에 < Nick Of Time >으로 그래미 트로피를 품에 안지 못했다면 현재와 같은 대가로서의 명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음반은 당시 ‘그래미효과’ 덕분에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올라 레이트는 음악적 인정과 더불어 상업적 성공이란 전리품도 얻었다. 보니 레이트는 1949년 11월 8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 195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였던 존 레이트(John Raitt)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유전적 형질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내비쳐 12살에 기타의 매력에 도취되었고, 청소년 시절부터는 블루스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델타 블루스, 미시시피 블루스, 시카고 블루스 등 큰 땅덩어리만큼 그 특유의 지방색이 무지개처럼 각양각색인 미국 전역의 블루스를 들으며 감성을 확대시켜 나간 그녀는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 하울링 울프(Howlin’ Wolf)와 여성 블루스 싱어 시피 월레스(Sippie Wallace) 등과 무대에 함께 서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젊은 그녀의 잠재력과 시장성을 발견한 워너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71년에 처녀작 < Bonnie Raitt >를 세상에 띄워 보냈지만 대중들로부터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생의 슬픔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구슬픈 블루스를 소화하기엔 너무나 평탄한 삶을 영위한 그녀와 블루스는 어쩌면 물과 기름처럼 융화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평자들은 젊고 여린 외모의 백인 여자가 직접 기타를 연주하면서 블루스를 구사한다는 사실, 그 희소가치에 주목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보니 레이트에 대한 평단의 호의는 그녀가 슈퍼스타로 등극한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1970년대 동안 거의 매년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지만 월남전의 패배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적인 위기를 잊기 위해 단순한 팝, 디스코 아니면 헤비메탈에 빠진 미국 대중들은 그녀의 청승맞은(?) 블루스를 외면했다. 1970년대에 나온 7장의 앨범 모두가 공개되는 족족 실패했다. ‘평단의 찬사’와 ‘대중의 냉담’이란 대치전선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1990년 < Nick Of Times >으로 대중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기 전, 차트에 명함을 내민 곡이라곤 ‘Runaway(57위)’와 ‘You’re gonna get what’s coming(73위)’ 뿐이다. 그나마 앞 곡은 1950년대 로큰롤 싱어 델 섀넌(Del Shannon)의 원곡이며 후자는 ‘Bad case of loving you’의 주인공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가 작곡해준 것으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였다. 특히 ‘Runaway’가 1977년 본고장 라디오에서 환영을 받으면서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것도 잠시, 1980년대 신시사이저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보니 레이트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우울했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서 발표한 < Nick Of Time >은 레이트의 음악 인생을 180도 바꾼 역작이었다. 팝 록 밴드 워스 낫 워스(Was Not Was)의 멤버인 돈 워스(Don Was)와 본인이 공동으로 프로듀스한 이 작품으로 그녀는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 ‘여성 팝 가수’, ‘여성 록 가수’ 부문 트로피를 품에 안았고, 그녀의 음악적 지주인 블루스의 거장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와 함께 ‘I’m in the mood’를 불러 ‘정통 블루스’ 부문도 수상, 총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또한 오랜 무명과 알코올중독을 극복했다는 점이 대중의 온정을 자극하면서 순식간에 앨범은 500만장이 팔려나갔다. 앨범의 광채는 싱글 ‘Have a heart(49위)’와 ‘Nick of time(92위)’의 저조한 성적과 큰 대조를 이뤘다. 1991년에 공개된 < Luck Of The Draw >에 와선 앨범 아닌 싱글로도 시장을 관통하는데 성공한다. 그녀에게 최초 톱10이란 영광을 안겨준 ‘Something to talk about(5위)’와 음악 전문지 < Mojo > 선정 가장 위대한 노래 100곡 중 당당 8위를 차지한 발라드 명곡 ‘I can’t make you love me(18위)’, 업 템포의 ‘Not the only one(34위)’가 연이어 차트를 누볐다. 앨범 판매량은 자그마치 700만장. 이 음반으로 그녀는 또 다시 ‘록 보컬’, ‘팝 보컬’, ‘록 보컬 그룹’(델버트 맥클린튼과 함께 부른 ‘Good man, Good woman으로 수상)의 3개 부문의 그래미 트로피를 수상했다. 1994년의 CD < Longing In Their Hearts >에서도 ‘Love sneakin’ up on you(19위)’를 배출했고 이 앨범은 ‘그래미 단골’임을 증거하면서 ‘팝 앨범’ 상을 수상했다. 다시 1996년에는 지미 본(Jimmie Vaughan),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버디 가이(Buddy Guy),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 비 비 킹(B. B. King), 닥터 존(Dr. John), 아트 네빌(Art Neville) 같은 대가들과 함께 연주한 ‘SRV Shuffle’로 ‘록 연주’ 부문을 수상했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듯 지난 20여년 동안 고대했던 그래미 트로피를 6, 7년 만에 집중해 싹쓸이한 것이다. 이제 어떤 누구도 당대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블루스의 명인으로 보니 레이트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본고장에서는 이처럼 화려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불우하다. 가장 미국적인 컨트리, 포크, 블루스의 감성을 아우른 음악이 대부분 10대와 20대가 팝 음악 수용연령층인 국내시장과 친화되지 못한 탓이다. 1995년에 개봉된 영화 < 보이스 온 더 사이드 >에 수록된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You got it(33위)’을 커버한 것이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보니 레이트의 곡으로 남아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전설적인 밴드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보컬리스트이자 유능한 여성 싱어 송 라이터 스티비 닉스(Stevie Nicks)는 그룹 시절이나 솔로 때나 그 활동상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이다. 깐깐한 음색과 중세 마녀적인 이미지는 그녀를 가장 독특한 여성 록 싱어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김병현의 활약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애리조나에서 1948년 5월 26일에... 전설적인 밴드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보컬리스트이자 유능한 여성 싱어 송 라이터 스티비 닉스(Stevie Nicks)는 그룹 시절이나 솔로 때나 그 활동상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이다. 깐깐한 음색과 중세 마녀적인 이미지는 그녀를 가장 독특한 여성 록 싱어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김병현의 활약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애리조나에서 1948년 5월 26일에 태어난 스티비 닉스는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평생의 음악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과 함께 1975년에 블루스 그룹이었던 플리트우드 맥에 가입해 그들의 음악 채질을 바꾸면서 ’Dreams(1위)’, ’Rhiannon(11위)’, ’Sara(7위)’, ’Seven wonders(19위)’, ’Landslide’, ’Gold dust woman’ 같은 명곡들을 작곡해 엄청난 성공을 이끌어낸 헤로인이다. 그러나 1975년부터 시작된 플리트우드 맥과의 음악 인생이 항상 그녀의 지향점과 합일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린지 버킹햄과의 소원해진 애정전선은 그녀로 하여금 솔로 활동을 부추긴 결정타였다. 그녀는 1981년부터 시작된 독립활동과 밴드 멤버로서의 이중 생활을 통해 그룹 시절과는 다른 창작의 고통과 자유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 금발의 미녀 싱어 송 라이터는 자신의 첫 데뷔 음반 < Bella Donna >를 세상에 공개해 플리트우드 맥의 그늘에서 벗어나 좀 더 록 적인 자신만의 색깔로 음악을 채색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록의 스타 톰 페티(Tom Petty)가 작곡하고 함께 부른 루츠적인 ’Stop draggin’ my heart around’가 싱글 차트 3위, 이글스 출신의 돈 헨리(Don Henley)와 함께 한 포크 스타일의 ’Leather of lace’는 6위, 록적인 ’Edge of seventeen’은 11위, 그리고 ’After the glitter fades’가 32위를 기록하면서 스티비 닉스는 여성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새로운 음악 인생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83년도 작품 < The Wild Heart >에서는 토토(TOTO)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가 연주를 맡아준 댄서블한 록 트랙 ’Stand back(5위)’을 필두로 ’If anyone falls(14위)’, ’Nightbird(33위)’로 전작의 인기와 명성을 지속했고, 1985년 말에는 ’Talk to me(4위)’, 그녀의 곡 중에서 가장 하드한 트랙 ’I can’t wait(16위)’가 히트를 기록한 세 번째 음반 < Rock A Little >을 공개했다. 4년만의 신보 < The Other Side Of Mirror >에서는 ’Rooms of fire(16위)’와 ’Has anyone ever written anything for you(60위)’를 잉태했으며 1991년에는 존 본 조비(Jon Bon Jovi)가 작곡한 싱글 ’Sometimes it’s a bitch(56위)’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와의 친밀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과 같은 전폭적인 지지는 없었고, 1993년에는 플리트우드 맥을 떠나 이중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다섯 번째 솔로 앨범 < Street Angel >을 발표했지만 분노한 후배들의 새로운 록 음악에 밀려 주목 끌기엔 실패했다. 플리트우드 맥의 명반 < Rumors >가 태어난 지 만 20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7년에 다시 모인 다섯 명의 역전의 용사들은 실황 음반 < The Dance >를 공개해 오랜만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서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스티비 닉스는 2001년에도 솔로 앨범 < Trouble In Shangri-La >를 내놓고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음악 열정을 표했다.
멤버 : 제스 울프 (Jess Wolfe, 보컬), 홀리 레시히 (Holly Laessig, 보컬), 댄 몰래드 (Dan Molad, 드럼), 피터 랠리시 (Peter Lalish, 기타), 앤드루 버리 (Andrew Burri, 기타) 멤버 : 제스 울프 (Jess Wolfe, 보컬), 홀리 레시히 (Holly Laessig, 보컬), 댄 몰래드 (Dan Molad, 드럼), 피터 랠리시 (Peter Lalish, 기타), 앤드루 버리 (Andrew Burri, 기타)

음반 속으로

Sheryl 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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