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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9년 10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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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64쪽 | 480g | 150*195*30mm |
ISBN13 | 9788968571220 |
ISBN10 | 896857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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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들은 남은사람들이 죽은 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석이다. 그런 비석에 글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 아마 죽은 이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혹은 누구인지는 알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가 되었던 그런 백비를 본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우리가 죽은 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그런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일합방부터 광주5.18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이름 없이 희생한 사람들 혹은 그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비석을 세울 수도, 설사 비석을 세운다 해도 무어라 새길 수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는 제주 4.3평화공원 전시관에 누워있는 백비를 보고서 ‘백비가 역사를 머금고 현실 속에 세워질 수 없더라도 내 마음에 세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많이 들어보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총 8장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1장에서 5장까지는 일제강점기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식솔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 이들 모두 서간도에서 독립운동 기지의 중심기관인 경학사와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인재양성소 역할을 한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참여했고, 후일 임시정부에도 관여했지만 이들의 삶에 남은 것은 명예와 부귀영화보다는 희생과 상처의 흔적뿐이다. 1932년 두 분 모두 만주에서 산화했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비석하나 세울 수 없었기에 저자는 마음속에 백비를 세우지 않았나 싶다.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 그리고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삼의사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지만 저자는 그들의 삶 하나하나를 되짚어 나간다.
저자는 특히 상해의 만국공묘에 있는 묘지의 주인공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상해의 만국공묘는 외국인 공동묘지를 뜻했으나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 이곳에 묻히면서 쑹칭링 능원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이 능원의 외국인 묘원에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묘지가 14기 있는데, 이 중 11분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었거나 봉환될 예정에 있다. 남은 묘지 중 두 개는 조상섭과 임계호라는 표석이 남아있으나 묘비도 없이 남겨진 묘 하나는 동농 김가진의 묘로 추정된다고 한다. 3.1운동이후 설립된 최대의 항일조직인 비밀 독립운동단체 조선민족대동단의 총재를 지냈던 동농은 많은 사람들이 체포, 투옥되자 망명길에 오른다. 임시정부의 어른 역할을 했던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한제국의 유일한 대신이었고 그때 나이가 74세였다고 한다.
우리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들 뒤에서 그림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임시정부에도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한 존재들이 많았다. 아버지 김가진을 따라 망명길에 오른 김의한 역시 임시정부의 그림자로 백범을 수행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망명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김의한의 아내 정정화는 스무 살 여인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김의한이 임시정부 27년의 세월을 그림자처럼 뒷받침했다면 정정화는 그림자의 그림자로 살면서 임시정부 안살림을 혼자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런 정정화가 후세들이 반드시 기억해주기를 원했던 사람이 동암 차리석이다. 독립협회에서 처음 도산을 만나 이후 평생을 도산과 함께 한 차리석은,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임시정부의 비서장으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그를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역사를 품고 곳곳에 서 있는 비석들은 그림자와 같다. 드러나지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세워진 자리에서 온갖 풍상을 맞으며 때론 깨어져 나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파묻혀 보이지 않는 비석도 많을 것이다.’(141쪽)라는 저자의 글은 왜 그가 백비를 마음속에서나마 세우려 했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저자가 살펴보는 현대사의 백비는 6장과 7장으로 제주 4.3사건과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비록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있지만 아직까지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1948년 4월3일 막이 오른 4.3사건으로 희생된 사람 수는 2만5천에서 3만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기 전까지의 희생자 수는 대략 1천명미만이었고,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1948년 10월 이후 5개월 동안 집단살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대를 이어가며 고통 받았다. 4.3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지만 ‘역사는 현장에 있던, 현실을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에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이 책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던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에 전시된 백비는 4.3사건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석이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광주 5.18민주화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연한 사실임에도 진영논리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필요할 때 제대로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 역사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시대, 종교조차도 진영논리에 편승해 희망보다는 절망을 조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비석, 지켜야 할 마음’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이름 없이 희생된 이들이 품었던 마음의 뜻인 심비(心碑)이다. 이회영이, 신채호가, 안중근이, 그리고 4.3의 제주도민과 5.18의 광주시민이 한결같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에 새겼던 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심비에 새긴 그들만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을 역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되새기는 것은 과거의 비극과 잘못을 들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라고 역설하는 저자는, 우리도 내 인생의 품은 뜻을 한 문장으로 마음속에 새길 것을 주문한다. 그런 심비가 묘비가 되는 삶이 잘 살아온 인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비가 있다면 마음의 비문을 소리 내어 읽어보고, 아직 백비라면 자기만의 이유를 새기자고 말하는 저자, 그것은 ‘누워있는 백비를 세우는 일은 심비를 품은 의식이 각성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질곡의 우리역사 속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다간 그들, 명예나 이름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그들의 삶을 읽으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 더불어 내가 마음에 품은 뜻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나의 심비는 무엇일까? 내 묘비에 한 문장을 쓰게 된다면 나는 어떤 문장이 새겨지기를 원할까? 두고두고 생각해보게끔 만들 것 같다.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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