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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쿨 크리스마스 (A Very Cool Christmas) [그린 & 레드 컬러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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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베리 쿨 크리스마스 (A Very Cool Christmas) [그린 & 레드 컬러 2LP]

루이 암스트롱, 잭슨 파이브, 마빈 게이, 브라이언 아담스 외 작품 수록

[ 180g / 1500장 넘버링 한정반 / 인서트 ]
Gavin Bryars 작곡/B.B. King, The Darkness, Billy Squier, Tom Waits 노래 외 2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Music on Vinyl / Music on Vinyl | 2019년 10월 2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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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쿨 크리스마스 (A Very Cool Christmas) [그린 & 레드 컬러 2LP]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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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9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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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이벤트 (1개)

음반소개

<컬러 디스크 LP를 구매하실 때 아래 사항을 참고해 주세요>

디스크

Disc1
  • A1 The Darkness - Christmas Time (Don’t Let The Bells End)
  • A2 Billy Squier - Christmas Is The Time To Say “I Love You”
  • A3 The Lovers - Christmas Tree
  • A4 Leon Russell - Christmas In Chicago
  • A5 Brian Setzer Orchestra - Santa Drives A Hot Rod
  • A6 Gavin Bryars & Tom Waits - Jesus’ Blood Never Failed Me Yet
  • A7 Nathaniel Rateliff & The Night Sweats - Santa Baby
  • B1 Wizzard - I Wish It Could Be Christmas Every Day
  • B2 Bryan Adams - Reggae Christmas
  • B3 The Kinks - Father Christmas
  • B4 Tangarine - Don’t Turn Off The Lights (It’s Christmas)
  • B5 Nicole Atkins - Blue Christmas
  • B6 Alain Johannes - Silent Night
Disc2
  • C1 Darlene Love - All Alone On Christmas
  • C2 The Jackson 5 -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
  • C3 Carla Thomas - Gee Whiz, It’s Christmas
  • C4 Clarence Carter - Back Door Santa
  • C5 Louis Armstrong - Christmas Night In Harlem
  • C6 Marvin Gaye - Purple Snowflakes
  • C7 James Brown - Let’s Make Christmas Mean Something This Year
  • D1 Rufus Thomas - I’ll Be Your Santa Baby
  • D2 Vintage Trouble - Soul Noel
  • D3 B.B. King - Christmas Celebration
  • D4 The Temptations -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
  • D5 Booker T & The MG’s - Jingle Bells
  • D6 Otis Redding - White Christmas
  • D7 Forest Hairston & Marvin Gaye - I Want To Come Home For Christmas
  • D8 Bob Rivers - Walkin’ ‘Round In Women’s Underwear

아티스트 소개 (25명)

작곡 : Gavin Bryars (개빈 브라이어스)
노래 : B.B. King (비비 킹 ,Riley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탓에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티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Riley B. King)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19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T. Bone Walker)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19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1952년 ‘Three o’clock blues’, 19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리듬 앤 블루스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19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1969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19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었다.
하드 록, 글램 메탈 밴드 하드 록, 글램 메탈 밴드
톰 웨이츠는 아메리칸 스윗하트가 아니다. 그의 음악 세계는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평면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가래 낀 듯한 목소리는 웬만해선 듣기 거북하고, 재즈와 블루스, 로큰롤, 그리고 익스페리멘탈 록 등을 종횡무진 하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낯설고 부담스럽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비트(Beat)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 지경이니 음반이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톰 웨이츠는 아메리칸 스윗하트가 아니다. 그의 음악 세계는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평면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가래 낀 듯한 목소리는 웬만해선 듣기 거북하고, 재즈와 블루스, 로큰롤, 그리고 익스페리멘탈 록 등을 종횡무진 하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낯설고 부담스럽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비트(Beat)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 지경이니 음반이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점 때문에 톰 웨이츠는 평론가들과 뮤지션에게 미국의 연인 못지 않은 위대한 페르소나로 대접을 받는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적인 싱어 송 라이터, 최고의 음유 시인, 진정한 아티스트 등등. 반골의 음악에 넋을 잃고, 공사판 노동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매료된다. 절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고 오로지 ‘마이 웨이’를 걸었던 웨이츠의 일관성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언더그라운드를 외롭게 지켜낸 것에 대한 훈장이다. 1949년 12월 7일 캘리포니아 파모나(Pamona)의 택시 안에서 태어난 톰 웨이츠는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하여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곳 저 곳을 떠돌아 다녔으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이런 방랑벽은 그가 가수 데뷔 이후에도 모텔을 옮겨다니며 생활하게끔 만든 주원인이었다. 십대 후반부터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그는 1971년 프랭크 자파(Frank Zappa)의 매니저였넌 허브 코헨(Herb Cohen)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데이빗 게펜(David Geffen)이 운영하던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3년 그는 1970년대 싱어 송 라이터 시대를 화려하게 빛낸 수작이라고 평가받는 데뷔작 을 발표했다.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등 매우 간결한 악기 편성으로 녹음된 음반은 이글스(Eagles)가 1974년 작품 에서 리메이크하여 히트시킨 ‘Ol’ 55’와, 톰 웨이츠의 진솔한 목소리가 압권인 ‘I hope that I don’t fall in love with you가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 톰 웨이츠는 1974년 소포모어 앨범 부터 프로듀서 본스 하우(Bones Howe)와 팀을 이뤄 작업을 했는데, 이로 인해 재즈, 블루스, 포크 등이 적절히 섞인 가운데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 풍성함을 강조하는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가사 역시 잭 크로악(Jack Kerouac)과 찰스 버코우스키(Charles Bukowski) 등의 비트 작가 등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쓰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서 나이트 클럽 분위기를 연출한 1975년 더블 라이브 앨범 , 재즈 블루스 명곡 ‘Bad liver and a broken heart’가 담겨있는 1976년 , 베트 미들러(Bette Midler)와 듀엣으로 부른 ‘I never talk to strangers’가 실려 있는 1977년 등 1970년대 발표한 앨범 대부분이 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톰 웨이츠는 자신을 지탱해오던 음악 네트워크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일대 변화를 시도했다. 매니저도 바꾸고, 프로듀서 본스 하우와도 헤어졌다. 또한 오랜 기간 동반자로 지내왔던 을 떠나 레코드사로 이적하였다. 1983년 내놓은 는 웨이츠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앨범이었다. 본스 하우와 함께 한 이전 작품들에서 나타나던 현악 사운드는 거의 사라지고, 퍼커션과 베이스 등이 중심이 되어 거칠고 강한 실험적인 소리들이 들어섰다. 1985년 , 1987년 등의 후속 작품들도 그러했다. 한편 톰 웨이츠는 음악 활동과 병행하여 영화 배우와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도 지평을 넓혀나갔는데, 1979년 실베스터 스텔론이 감독한 영화 에 카메오로 출연하고 음악을 맡은 계기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1982), (1983), (1984) 등에서 영화 배우와 사운드트랙 작곡가로서 맹활약을 했다. 또한 1986년에는 컬트 무비 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아 영화팬들에게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90년대에도 톰 웨이츠의 음악적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992년 발표한 으로 웨이츠는 이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얼터너티브 음악’상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를, 그리고 6년 뒤인 1999년에는 를 공개하며 오늘날까지 언더그라운드의 표상으로 남아있다.
노래 : Nathaniel Rateliff (나다니엘 레이트리프)
노래 : The Night Sweats (더 나이트 스웨츠)
노래 : Bryan Adams (브라이언 아담스)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활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 캐나다 출신의 로큰롤 싱어 송라이터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는 팝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출중한 외모도, 잘빠진 몸매(?)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한 노래와 ‘이웃집 형’ 같은 친근한 이미지는 짧은 기간에 그를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수 로큰...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활동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둔 캐나다 출신의 로큰롤 싱어 송라이터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는 팝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출중한 외모도, 잘빠진 몸매(?)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한 노래와 ‘이웃집 형’ 같은 친근한 이미지는 짧은 기간에 그를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순수 로큰롤의 영웅으로 끌어올렸다. 음악 자체보다는 화려한 뮤직 비디오와 요란한 의상처럼 음악 외적인 요소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1980년대, 브라이언 아담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뉴 웨이브와 MTV 유행으로 일반 가수들이 신시사이저가 찍어내는 인공적인 음악과 화려한 비주얼로 팬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킬 때 그는 요란한 치장을 배제하고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로큰롤을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으면서 의상비를 절약(?)한 그가 자신만의 수수한 패션 스타일을 고집한 것은 당시 음악 외적인 것에 쏠려 가는 음악계의 트렌드에 대한 반발이었다. 1959년 11월5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州) 킹스턴에서 태어나 요즈음 빌보드 싱글차트를 강타하고 있는 니클벡(Nickelback)의 고향인 서부 해안 도시 벤쿠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 개구쟁이 소년은 바로 그곳 벤쿠버에서 미래 로큰롤의 파수꾼으로 성장하는 꿈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작곡가 짐 발란스(JimVallance)와 파트너십을 형성, 같은 국적의 러버보이(Loverboy)에게 ‘Jump’나 미국 하드록의 거물급 밴드 키스(Kiss)의 ‘Down on your knees’와 ‘Rock and Roll Hell’ 등을 제공하면서 나름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1980년과 1981년, 연이어 처녀작과 소포모어 앨범을 공개했지만 팬들로부터 주목받는데 실패하고 만다. 두 번째 앨범에서 커트된 ‘Lonely nights’는 84위를 기록하곤 2주만에 차트 밖으로 밀려나는 참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1983년에 발표된 3집 < Cuts Like A Knife >에서부터 마침내 그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히트곡이 된 허스키 록 보컬의 발라드 ‘Straight from the heart(10위)’는 같은 해에 여성 로커 보니 타일러(Bonnie Tyler)에 의해 웅장한 스케일로 커버되었고, 팬들은 이 앨범의 ‘Cuts like a knife(15위)’와 ‘This time(24위)’도 애청했다. 특히 음반 타이틀곡 ‘Cuts like a knife’의 그 유명한 후반부 코러스는 이 곡을 로큰롤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성공의 만족감을 채 누릴 수 없을 정도로 1984년 연말에 발표된 4집 < Reckless >는 그에게 더 큰 성공을 안겼다. 그의 음반들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으로 브라이언 아담스는 북미 지역을 훌쩍 뛰어넘어 월드 슈퍼스타로 솟아올랐다. < Cuts Like A Knife >가 성공의 씨앗이었다면 < Reckless >는 성공의 열매였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Heaven’으로 그는 최초로 차트1위에 올랐으며 ‘Run to you(6위)’,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조직했던 경험을 노래한 ‘Summer of 69(5위)’, ‘Somebody(11위)’, ‘One night love affair(13위)’, 그리고 1984년에 인상적으로 재기한 흑인 여성싱어 티나 터너(Tina Turner)와 함께 로큰롤의 열기를 발산한 ‘It’s only love(15위)’ 등이 줄줄이 히트차트를 도배했다. 여섯 싱글 모두 Top20을 기록한 대수확이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은 물론, 수록곡들은 기타주자 키스 스코트(Keith Scott)가 이끄는 백업 밴드의 견고한 연주로 사운드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오픈 코드를 구사한 ‘Summer of 69’는 기타지망생들의 연습교본이 되었다. 싱글들 덕에 앨범 역시 1985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했고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항상 미국의 그림자에 눌려 있던 캐나다가 조니 미첼, 닐 영 등에 이은 또 하나의 팝 거목을 배출하는 순간이었다. < Reckless >의 성공으로 브라이언 아담스는 바빠졌다. 1985년에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돕기 위한 음반 < We Are The World >에서 캐나다 아티스트들이 모여 부른 ‘Tears are not enough’를 작곡하는 것은 물론 ‘라이브 에이드’에도 기꺼이 동참하면서 뜨거운 인간애를 나누었다. 이렇게 타이트한 스케줄을 뒤로하고 1987년에 공개한 < Into The Fire >로부터는 싱글 ‘Heat of the night(6위)’과 ‘Hearts on fire(26위)’, ‘Victim of love(32위)’가 나왔지만 전작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다음 앨범 < Waking Up The Neighbours >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다시 4년의 시간이 흐른 1991년이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영화 < 로빈후드 >의 주제가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는 팝 싱글차트 정상을 7주간이나 호령했고, 아름다운 선율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국내 음악 팬들에게도 크게 어필했다. 이 곡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 트로피를 손에 쥐었고 아카데미 후보에도 오르면서 1990년대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빅히트 곡 외에도 ‘Can’t stop this thing we started(2위)’, ‘There will never be another tonight(31위)’, ‘Though I’d died and gone to heaven(13위)’, ‘Do I have to say the words?(11위)’ 등으로 인기를 이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베스트 음반 < So Far So Good >을 발표했고 여기서 다시 신작 싱글 ‘Please forgive me’를 7위에 올려놓으면서 절정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전형적인 브라이언 아담스표 발라드인 이 곡도 국내에선 오랫동안 애청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브라이언 아담스의 음악은 거친 혈기와 패기 속에서 낭만을 전하는 로큰롤보다는, 멜로디를 내건 성인 취향의 미드템포와 발라드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는 이 때문에 음악 향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Waking Up The Neighbours >는 아담스 특유의 직선적이고 흥겨운 로큰롤 사운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지막 정규 음반이 되었다. 성공 퍼레이드는 여전해 1994년에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스팅(Sting)과 함께 ‘허스키 삼총사’를 이뤄 영화 < 삼총사 >의 주제곡 ‘All for love’로 또 다시 차트 정상을 수복했고, 1995년에는 영화 < 돈주앙 >에 삽입된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으로 빌보드 정상을 5주간이나 접수했다. 이 곡의 인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부분은 팝 연주의 결정판으로 인정받았다. 이듬해에도 여장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와 함께 영화 < 미러 해스 투 페이시스 >의 주제가 ‘I finally found someone(8위)’을 불러 히트 레퍼토리를 추가했다. 나이 30대 중반을 넘어선 시점과 맞물린 1990년대의 두 번째 전성기는 이전의 로큰롤 스타일보다는 영화 주제곡이나 공연실황 음반을 발표하는 등 다소간 정체성을 조정한 듯한 인상이 투영되었지만 상기한 히트곡들은 예외 없이 차분한 발라드로 나타나 여전히 히트가수 이미지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히트곡 모음집 < So Far So Good >은 500만장이 팔려나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의 추억과 낭만이 긷든 로큰롤에서 자신들의 어렸을 적 꿈을 반추하길 원하는 팬들과 나이에 어울리는 음악을 추구하고 싶은 아담스 자신간에 불가피한 괴리가 생겨났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뉴욕 해머스타인 볼룸에서 거행된 1997년의 프로젝트 < MTV Unplugged >는 일렉트릭 기타 위주의 예전 히트곡들을 어쿠스틱 음원으로 재생하는 절충적 방법을 취한 동시에 앞으로 그의 음악이 예전과 달라질 것임을 시사했지만 실적은 저조했다. 여기서 싱글 커트한 ‘Back to you(42위)’는 마지막 싱글 히트곡이 되었다. 1998년에 발표된 다음 앨범 < On A Day Like Today >는 팬들의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1994년 2월 내한 공연을 가져 국내의 팝 팬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준 브라이언 아담스는 관객들 중에서 한 남학생을 무대 위로 초청해 함께 ‘Heaven’을 부르기도 했고, 관중석 중간에 간이 무대를 마련해 뒤쪽에 위치한 팬들과도 거리감을 좁히는 등 수수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실천, 큰 박수를 받았다. 그 이미지는 아직도 캐나다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그를 기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울 & 펑크 가수 소울 & 펑크 가수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노래 : Rufus Thomas (루퍼스 토마스)
멤버 : Ty Taylor, Nalle Colt, Rick Barrio Dill, Richard Danielson 멤버 : Ty Taylor, Nalle Colt, Rick Barrio Dill, Richard Danielson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리메이크하는 등 1960년대 소울과 록이 동반자 사이임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출연진이 백인 뮤지션 일색이었던 1967년 몬터리 페스티벌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조지아주 도손 출신으로 샘 쿡(Sam Cooke)에 영향 받아 가수활동에 입문했다. 전성기였던 1967년 12월에 비행기추돌로 27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1968년 전미차트 정상을 밟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톤을 낮춘 소울 발라드의 수작. 이외에 ‘I’ve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와 ‘Try a little tenderness’도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들이다.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멤버 : 재키 잭슨(Jackie Jackson, 보컬, 탬버린), 티토 잭슨(Tito Jackson, 보컬, 기타),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 보컬, 베이스기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보컬, 퍼커션, 피아노, 기타), 랜디 잭슨(Randy Jackson, 보컬, 봉고, 키보드, 신디사이저, 베이스기타) 멤버 : 재키 잭슨(Jackie Jackson, 보컬, 탬버린), 티토 잭슨(Tito Jackson, 보컬, 기타),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 보컬, 베이스기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보컬, 퍼커션, 피아노, 기타), 랜디 잭슨(Randy Jackson, 보컬, 봉고, 키보드, 신디사이저, 베이스기타)
밴드 : Booker T. & the M.G.'s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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