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마지막 9분]
그간 수차례의 전학을 통해 배운 것처럼 잭은 이번에도 남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으로 자신을 꾸며 내기로 한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또래 아이들을 살핀 결과, 이번 학교 아이들의 관심사는 유명 유튜버인 듯하다. 잭은 철저한 검색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반 아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데에도 성공한다. 그렇게 이번 학교에서도 출발이 좋은가 싶었는데 수업 시작 전에 불쑥 등장한 검은 곱슬머리의 그 녀석, 왠지 심상치 않다.
“잭, 우리 반에 온 걸 환영한다. 장담하건대 반 친구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일어나서 네 소개 좀 해 줄래?”
이미 자리에 앉았는데, 이제 와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리비와 이삭에게 선수를 칠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름부터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아, 요즘에는 투덜이 마크의 영상을 좋아합니다.”
내 말에 선생님이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다면 더욱더 잘 어울릴 수 있겠구나. 우리 반에도 투덜이 마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거든.”
리비와 이삭을 힐끗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두 명에게는 좋은 인상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늘 셜록 코드대로 ‘안전한 친구’ 두세 명을 방패막이 삼아 앞에 세워 두고서, 있는 듯 없는 듯 뒤로 물러나 있곤 했다. 그런 면에서 이삭과 리비가 완벽한 아이들이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어떤 남자아이가 불쑥 교실로 들어왔다.
“타일러!”
선생님이 깜짝 놀라는 듯이 반응하며 소리쳤다.
“오, 학교에 와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조금 늦긴 했지만 말이야.”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요.”
타일러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갑작스런 등장만큼이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 p.22~25
[뻔하지 않은 하루]
잭은 쌍둥이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싶다. 하지만 눈치를 주고 밀어내도 자꾸 말을 거는 타일러에게 어느새 휩쓸려 버리게 된다. 문제는 이런 타일러의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다는 것! 잭은 타일러와 어울리며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 가고, 심지어 반드시 지켰던 셜록 코드조차 잊어버리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거 설마, 콘플레이크야?”
타일러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어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땅콩버터랑 마요네즈. 환상적인 조합이지?”
“콘플레이크에 땅콩버터, 마요네즈라고……?”
엄마와의 엽기 음식 경쟁에 선보일 만한 조합이었다.
(중략)
“건강을 좀 생각해야겠다 싶으면 으깬 병아리콩이랑 빨간 피망, 대파, 셀러리 같은 걸 넣기도 해. 크림치즈나 버섯, 시금치를 넣어도 되고.”
처음엔 농담인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까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바삭바삭한 식감이야.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꼭 잘게 부순 과자나 감자 칩처럼 바삭한 뭔가를 더해야 해.”
나는 내가 싸 온 평범한 치즈 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일러의 말처럼 콘플레이크나 감자 칩을 더하면 어떤 맛이 날지 상상해 보았다. 타일러와 함께 있으면 뻔한 도시락조차 새롭게 느껴졌다. --- p.62~67
[아빠를 못 본 지 393일째]
잭과 엄마가 자주 이사를 다니게 된 것은 2년 전, 부모님이 이혼한 다음이다. 아빠는 집을 떠나고도 한동안 주말이 되면 잭을 만나러 왔지만 1년 전부터는 엽서만 보내올 뿐, 찾아오지 않는다. 그 후, 잭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아빠가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만난 마지막 날에 내가 아빠의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까다로운 아이가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헤어지지 않았을까…….
모든 게 달라진 건 아빠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집 여기저기에 책과 종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매일매일 피곤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민해지고 짜증이 늘어서, 엄마가 밤늦게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중략)
결국 아빠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 엄마는 그 사실을 침착하고 차분하게 전하려고 애썼다. 내가 놀라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 쪽은 엄마였다. 맞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걸,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정작 엄마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빠는 집을 떠나고도 1년 동안 주말이 되면 나를 만나러 왔다. 아빠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일요일이었다.
(중략)
아빠는 계속 질문만 해 댔다. ‘학교는 어떻니?’, ‘엄마는 어떻니?’, ‘너는 어떻니?’……. 나도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물론 최대한 진심처럼 말하려고 애썼다. 아빠의 기분이 어서 나아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빠는 점점 더 괴로워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아빠의 기분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아빠는 진짜로 나와 만나고 싶어서 매주 찾아오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런 생활에 이미 질렸는지도 몰라. 진작에 그만두고 싶었을지도 몰라. 하루라도 빨리 새 출발을 하고 싶을지도 몰라…….
결국 나는 아빠한테 몸이 안 좋다고 얘기해 버렸다. 아빠는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로 아빠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 p.100~103
[셜록 코드를 따르라!]
타일러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쌍둥이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잭은 중간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한편, 쌍둥이의 계획을 귀띔해 주지 않았던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고민에 빠진다. 친구 관계에 혼란을 겪는 와중에 잭은 우연히 엄마의 통화를 엿듣게 되고, 엄마가 다시 직장을 그만두려 한다고 오해한다. 그리고 밤새 고민한 끝에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철저히 셜록 코드를 따랐던 그때로.
주말 내내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밤이 되자 가로등 불빛이 흘러 들어와 방 안을 환하게 비췄다. 선반에 기대어 놓은 엽서가 보였다. 아빠는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고 있을까? 곧 떠난다는 말이라도 해 두어야 할까?
책상 위로 날개 달린 바퀴신발의 그림자가 늘어져 일렁였다. 날개 달린 바퀴신발은 이제 제프리 B. 스테이플턴 다음으로 좋아하는 물건이 되었다. 타일러는 저 신발을 만들려고 엄청나게 고생했을 텐데……. 나랑 친구가 되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애써 친해진 애가 고작 몇 달 만에 이사를 가게 되다니. 얼마나 허무할까? 그동안 괜한 노력을 들였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나쁘게만 보였던 상황도 아침이 되면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 왔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생각이 얼추 정리가 되었다. 타일러와 더 가까이 지내면 떠날 때 힘들기만 할 뿐이었다. 되도록 빨리 바뀐 상황에 적응하는 편이 서로를 위한 길이었다. 나는 다시 셜록 코드를 따르기로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등굣길에 타일러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내 가방에는 타일러가 준 날개 달린 바퀴신발이 들어 있었다. 이걸 돌려준 다음, 셜록 코드에 맞춰 행동하면 타일러도 금방 내 뜻을 알아차리리라. --- pp.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