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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훅가는 최애 명곡 쿨 재즈 (All Time Favorite Coolest Ja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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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시간 훅가는 최애 명곡 쿨 재즈 (All Time Favorite Coolest Jazz)

[ 2CD / 디지팩 ]
Nat King Cole, Ella Fitzgerald, Julie London, Billie Holiday, June Christy 노래 외 3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Warner Music / Atlantic | 2019년 08월 1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00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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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훅가는 최애 명곡 쿨 재즈 (All Time Favorite Coolest Jazz)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8월 19일
시간, 무게, 크기 5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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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37명)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냇 킹 콜만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1930-40년대에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냇 킹 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던 1930년대 말-1940년 대 초까지 그는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해 발표했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독특한 재즈 트리오 양식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비밥 재즈의 봉인 버드 파웰이 드럼-베이스-피아노로 이뤄진 트리오 양식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이 편성이 굳혀지긴 했지만, 재즈 트리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 얻은 사람은 바로 냇 킹 콜이었다. ‘Route 66’(1943) 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한 냇 킹 콜 트리오는 한결 부드럽고 팝 적인 색채의 재즈 연주로 주목받으며 이후 1950년대 명성을 얻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출현을 예견케 했다. 1945년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수많은 히트곡을 팝 차트에 올리는 가수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17년 생으로 어린 시절을 시카고에서 보낸 그는, 12살 때 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형제가 모두 재즈 음악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유복했던 그는 1936년 재즈 베이스주자 에디 콜(Eddie Cole)의 밴드에서 잠시 몸을 담지만, 얼마 후 자신의 무대를 찾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이런저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에 몰두한 끝에 기타리스트 오스카 무어(Oscar Moore), 베이시스트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ce)를 만나며 ‘냇 킹 콜 트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출범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순수 연주곡 중심이었으나, 1940년 데카(Decca)레코드와 계약하면서 ‘Sweet Lorraine’(1940)을 그의 노래로 녹음했고, 이내 대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는 트리오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병행하게 되었다. 냇 킹 콜 트리오는 1940년대 초반 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Route 66’, ’Straighten up and flying right‘(1943)와 같은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40-50년대 명성을 구가했던 아마드 자말 트리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아트 테이텀 트리오는 모두 냇 킹 콜 트리오(피아노/베이스/기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The christmas song’(1947) , ’Nature boy’(1947)와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한 냇 킹 콜 트리오활동은 194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다 1950년, 그의 트리오가 오케스트라 세션을 넣어 발표한 ‘Mona risa’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하며 냇 킹 콜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인기 정상에 가수로 탈바꿈한다. 그의 노래는 어느덧 재즈뿐만 아니라 팝 청취자들의 애청 곡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대중들은 차츰 그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Unforgettable’, ’Ramblin’ rose’(1962)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차트에 올려놓으며 발라드 가수로서만 활동하게 된다. TV가 미국 대중들의 안방에 자리하면서 그는 쇼에 출연하며 50-60년대 내내 인기가수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6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음악엔 더 이상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띄게 된다. 트리오 양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재즈의 선구자’라는 호평에 반해 발라드 가수로서 백인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재즈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는 비난 역시 감수해야 했다. 재즈의 선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마일즈 데이비스, 조지 벤슨과 같은 거물급 재즈 스타가 겪은 이 대중성과 음악성과의 숙명과도 같은 패러독스는 냇 킹 콜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대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추앙 받는 뮤지션이다. 초기의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연주의 백미라 할 트리오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그의 바리톤 보컬은 샘 쿡, 마빈 게이, 루더 밴드로스로 이어지는 소울 팝 가수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보컬 연주의 교과서’로 자리 메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룩했던 위업을 지금껏 꾸준히 이어나가는 그의 딸이자 재즈 보컬 나탈리 콜(Natalie Cole)과 함께 한 ‘Unforgettable’(1994)로 탈바꿈 해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첨단 디지털 기술은 그 만의 독창적인 보컬 스타일은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후배 보컬리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재즈, 팝 가수 재즈, 팝 가수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Billy Eckstine (빌리 엑스타인,William Clarence Eckstine)
팝/재즈 가수, 트럼펫/트롬본/기타 연주자 팝/재즈 가수, 트럼펫/트롬본/기타 연주자
노래 : Anita O'Day (애니타 오데이,Anita Belle Colton)
재즈 가수 재즈 가수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들고 나온 쿨(Cool)이라는 재즈의 새로운 경향은 50년대가 들면서 미국 웨스트 코스트(L.A./켈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뻗어갔다. ‘쿨’의 씨앗은 마일즈가 뿌렸지만, 애석하게 그는 마약으로 인해 긴 슬럼프를 겪어야 했고, 이 틈을 타 마일즈의 데뷔작< Birth of Cool >(1949)에 참여했던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 리 코니츠(Le...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들고 나온 쿨(Cool)이라는 재즈의 새로운 경향은 50년대가 들면서 미국 웨스트 코스트(L.A./켈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뻗어갔다. ‘쿨’의 씨앗은 마일즈가 뿌렸지만, 애석하게 그는 마약으로 인해 긴 슬럼프를 겪어야 했고, 이 틈을 타 마일즈의 데뷔작< Birth of Cool >(1949)에 참여했던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 리 코니츠(Lee Konitz)등과 같은 백인 뮤지션들이 그 독점적 수혜자가 된다. 하지만 ‘쿨’이 동부의 하드 밥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된 데에는 50년대 들어 소위 ‘스타’의 등장에 힘입은 바 크다. 스탄 게츠, 데이브 브루벡, 제리 멀리건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에서의 격렬한 하드 밥과는 다른 관조하듯 차분하고 지적인, 때로는 우울한 멜로디가 우러나는 ‘쿨’의 정체성을 정립시켰고, ‘쿨=백인 재즈’식의 공식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노래로 따라 부르기 힘든 비밥의 난해성을 쿨은 보컬이 첨가되며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여기서 다시 한번 재즈 역시 흑인은 팔리고 백인을 판다는 속설이 입증된다.) 쳇 베이커의 등장은 그래서 주목받을 만했다. ‘My funny valentine’(1953)을 차트에 진입시키며 연주자보다는 재즈 보컬로 알려졌지만, 애처로운 듯 폐부를 찌르는 그의 트럼펫 소리는 또한 당시로선 새로웠다. 잘 훈련된 크루닝(crooning)을 구사한 그는 하지만 이런 대중 영합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평론가들에겐 처음엔 마일즈 데이비스의 아류정도로 취급되는 수모를 겪는다. 창백하리만큼 뽀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래서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용모를 지닌 그는 수많은 도시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모성심리를 자극했지만, 실제 그의 삶은 마약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1929년 오클라호마주 태생인 그는 기타리스트인 아버지 덕에 일찍 음악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어린시절 교회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일선물인 트럼본으로 처음 재즈를 접하게 된다.(얼마 후 이 악기는 트럼펫으로 바뀐다.) 예술 고등학교를 진학해 음악수업을 받았지만, 일찍 프로로 진출하고 싶은 마음에 16살 되던 1945년 학교를 자퇴한다. 육군에 입대해 군악대에서 연주를 연마한 그는, 제대 후인 1948년 잠시 음악 대학에서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웠고, 다시 대학을 2년 만에 자퇴, 군악대에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1950년 두 번째 제대를 하고 본격적으로 클럽 가에 진출해 프로로 나선다. 23살이 되던 1952년, 그는 테너 색스폰 연주인 스탄 게츠(Stan Getz)와 만나며 그해 3월 스탄 게츠와 함께 비도 무소(Viddo Musso) 쿼텟 일원으로 첫 레코딩을 한다. 그리고 그해 3월 29일,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메카 티파니 하우스(Tiffany House)에서 공식적인 데뷔 공연을 연다. 얼마 후 제리 멀리건으로부터 자신의 밴드에 가입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리 멀리건 쿼텟’의 일원으로 헤이그(Haig) 나이트 클럽에 전속 출연하며 서부지역에서 그는 줏가를 올리기 시작한다. 파시픽(Pacific)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하며 그는 제리 멀리건 쿼텟의 멤버 자격으로 모두 10장의 음반을 녹음하다.(그 유명한 “My funny valentine”은 이 때의 작품이다) ‘My funny valentine’으로 소위 ’스타덤‘을 맛본 그는 얼마 후 상습적인 마약 복용협의로 구속되었고, 제리 멀리건과의 창조적인 연주는 채 1년이 못 되 끝나고 만다.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1953년 솔로로 나서며 러스 프리먼(피아노), 레드 미첼(베이스), 바비 화이트(드럼)과 자신의 쿼텟을 결성한다. 1953년 7월, 파시픽에서 그의 첫 리더 작을 발표하고, 평론가와 팬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는다.(그해 그는 재즈 팬들이 선정한 인기투표에서도 1위로 뽑힌다.) 재즈 연주인으로서 수절하기를 거부하고 대중적으로 영합했다는 비난을 받은 루이 암스트롱처럼 그도 차츰 대중스타로서의 이미지를 갖기 시작했다. 이듬해 1954년 < Chet Baker Sings >을 발표하며 그의 인기는 치솟았고 연주자보다는 가수로서 대중들은 그를 인식하게 된다. 어느덧 특유의 창백한 트럼펫 톤보다 감미로운 발라드 노래를 원하게 된 팬들은 이 미남 재즈 뮤지션을 추종하고, 수많은 여성팬을 거느린 몇 안되는(?) 재즈 뮤지션으로 등극한다. 얼마 후 헐리우드의 러브 콜을 받으며 영화 < Hell’s Horizon >(1956)에서 주역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적인 면에서 그는 평론가들의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대중 스타가 되버린 그의 음악성은 날로 퇴보하고 있다는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다. 이에 심기일전 해 한층 연주에 무게를 실은 밥(Bop)스타일의 퀸텟 연주로 꾸민 < Chet Baker & Crew >(1956)로 본연의 재즈 연주자로서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50년대 말까지 퀸텟 연주활동으로 전세계 투어로 바쁜 나날을 보낸 뒤 쿨의 전성이 끝나가려던 무렵인 1959년, 자신의 창조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그는 미국을 떠나 이태리로 향한다. 자신의 음악성을 평소 높이 사던 유럽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그는 죽을 때까지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야말로 방랑인과 같은 삶을 이어간다. 60년대 내내 파리에 거주하면서 프레스티지 레코드사를 통해 음악활동을 하지만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헤로인 중독은 향후 몇 년간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갔다. 1960년 마약 소지 혐의로 이태리에서 체포되 근 1년을 감옥에서 생활한 그는 이후에도 마약으로 감옥을 집 드나들듯이 해야 했다. < Lonely Star >(1965)를 제외하고 이렇다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이 시기동안 그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화된 건강으로 말미암아 70년대 초엔 완전히 연주생활에서 멀어졌다. 마약으로 끝장날 것 같던 그의 음악 인생은, 하지만 옛 동료인 제리 멀리건이 그와 다시 만나며 1973년 카네기 홀 콘서트를 통해 극적인 재기에 성공한다. 크리드 테일러가 이끄는 CTI 레이블에서 간간이 세션을 하던 그는 하지만 다시 미국을 떠나 유럽 각지를 돌며 떠돌이 연주생활을 이어나간다. 클럽에서 세션이나 하며 마약 살 돈을 벌던 중 그는 198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방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외롭게 객사한다. 말년의 그의 모습은 과거 수줍은 소년을 연상시키는 뽀얀 얼굴의 쳇 베이커가 아닌 인생의 풍파에 찌든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쓸쓸히 죽어간 그는 하지만 차츰 후대의 재평가를 받는다. 그 발원지는 다름 아닌 록음악 씬이었는데, 펑크의 작가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는 그에게 헌정하는 곡 ‘Almost blue’(1982)를 앨범 < Imperial Bedromm >에 수록하며 ’처절하리 외롭고 슬픈‘ 정감이 서린 그의 음악성에 경의를 표했고, 이듬해 그의 앨범 < Punch the Clock >(1983)에서 그를 초청해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곡 ’Shipbuilding’에서 트럼펫 세션을 부탁하기도 한다.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 브루스 웨버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1987년에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돌입한다. < Let’s get lost >라는 쳇 베이커의 기록 영화는 이듬해인 1988년 아카데미 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죽기 전까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그의 음악 세계는 그의 사후 루이 암스트롱의 뒤를 잇는 ‘최고의 즉흥 연주자’라는 훈장을 얻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수많은 미발표 음원들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되고 있다. (추천 앨범: 쳇 베이커를 처음 접하시려는 분들은 작년에 EMI를 통해 나온 < Deep in a Dream: The Ultimate Chet Baker >(2002)를 먼저 접해보시기 바랍니다.)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1955년 3월12일, 뉴욕의 어느 조그만 아파트에서 한 흑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관계자들은 시신을 살펴본 뒤 조사내용을 서류에 기입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심장마비, 인종은 흑인, 나이는 약 65세. 당시 현장의 경찰 관계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시신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밥의 혁명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이하 버드)의 죽음은 이토록 비참했다. 1920년 생이니까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5살, 하지만 술과 마약에 찌든 그의 몸은 망가져 있었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65살 노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그의 건강이 얼마나 절체 절명의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배우이자 제작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감독한 영화 < Bird >(1988)는 이 비운의 버드의 생애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1945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Minton’s Play House)에서 동료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한 성공적인 데뷔를 시작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재즈계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창안한 비밥이란 문법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는 이유로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뇌리 속엔 ‘자신은 흑인’이라는 운명이 자리잡고있었다. 공연 때마다 그를 보러오는 백인 여성들은 그를 유혹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는 이들과 성의 향연(?)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흑인이었기에, 그의 천재성은 백인이 패권을 지고 있던 미국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타협이라곤 모르는 그의 성격은 그를 차츰 고립의 늪으로 치닫게 했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20년 넘게 해온 마약과 술은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디지가 작곡해 준 ‘Groovin’ high’를 그의 색스폰으로 우렁차게 울린 그 날, 재즈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다. 비밥(Bebop)이라는 재즈의 신종 문법은 1940년대 주류 대중음악인 스윙의 대세를 벗어나 20대 초의 젊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음악적 실험‘을 끝에 비밥은 빛을 본다. 바야흐로 모던 재즈 시대를 활짝 열어놓은 이들 젊은 뮤지션들은 중 단연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바로 버드였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 캔사스 씨티 출신인 그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 같은 스윙 스타를 배출한 캔사스 씨티 음악 씬의 중심부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바리톤 색스폰을 독학으로 익힌 그는 14세가 되던 1934년, 학교를 그만두고 그 지역 밴드들을 따라다니며 색스폰 연주를 익혀나간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잼(Jam) 세션을 벌인 그는 얼마 후 그는 그 지역의 스타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함께 했던 기억은 버드에게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만다. 그의 어설픈(?) 솔로가 진행되던 도중, 당시 드럼을 연주하던 조 존스는 갑자기 연주하던 심발을 풀어 그를 향해 내던졌다. 순간 그가 대중들의 웃음거리로 전략하고 만 이 일화는 물론 16세라는 나이를 감안할 때 아직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의 열악한 연주실력을 반증해주는 사례였지만, 스윙시대를 주름잡은 그의 선배들이 그의 독창적인 솔로 전개를 매우 거북스러워했음을 또한 증명해 준다. 스윙이 대세였던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새로운 재즈의 물결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ng)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는 다시 몇 년의 치열한 내공을 쌓은 후인 1940년, 뉴욕 52번가에 자리한 클럽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의 매니저 테디 힐(Teddy Hill)의 주선으로 뉴욕에 입성하며 ‘무서운 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케니 클라트, 델로니우스 몽크, 닉 팬톤, 하워드 맥기, 조 가이, 그리고 그의 비밥 혁명을 가능케 해준 동반자 디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밥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재즈의 흐름을 모색해 간다. 당시 재즈 평론가 제임스 콜리어가 옮겨 전하고 있는 케니 클라크의 말은 버드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이미 내가 드럼으로 연주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들려주었죠. 래스터 영보다 두 배는 빠르게 연주했고, 영이 다루지 못한 음들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43년, 최초의 비밥 보컬리스트 사라 본(Sarah Vaughan)의 백업 밴드를 맡고 있던 드러머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 합류해 그의 첫 레코딩을 하게 되고, 1944년 말 디지와 듀오를 결성, 버드 파웰(피아노), 막스 로치(드럼), 찰스 밍거스(베이스)으로 구성된 퀸텟을 결성한다. 이듬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룬 그는, 자신의 애칭인 ‘새’(Bird)를 자신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대신한다. 1945-1947년 디지와 함께 하며 미국 L.A. 지역 클럽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어를 펼치던 이 시기에 ‘Groovin’ high’, ’Salt peanuts’, ’Shaw’ nuff’, ’Hot house’, ’Donna lee’, ’Ko ko’등 그의 음악성을 대표하는 명곡들을 발표한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1947-1949년 동안 자신의 새로운 퀸텟을 이끌며 듀크 조던, 토미 포터, 막스 로취, 그리고 줄리어드 음대를 다니다 그의 문하생이 된 신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를 영입한다. 1950년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인 그의 퀸텟은 사보이(Savoy)레이블에서 활발한 레코딩 작업과 유럽 투어를 펼치며 연주경력의 절정을 맞이한다. 같은 해 버브(Verve)레이블과 계약, 디지와 다시 함께 한 앨범 < Bird & Diz >(1950)을 발표한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의 음악은 대중들로부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생계를 유지해 준 뉴욕의 클럽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R&B와 로큰롤이 서서히 고개를 들며 대중들은 점점 재즈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생활 문제까지 겹친 그는 헤로인과 술로 시름을 달래려 했고, 이로 인해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1953년 그의 생애 마지막 녹음이 된 명반 < Jazz at Massey Hall >을 데뷔 시절 한솥밥을 먹은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찰스 밍거스, 막스 로치와 함께 녹음한다. 악화된 건강은 결국 심장마비를 불러왔고 35세란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집에서 객사한다. 50년대 말 그의 영향을 고스란히 계승한 존 콜트레인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재즈계 내에서 차츰 부각되기 시작, 후대 재즈 학자들은 그를 기점으로 ‘아티스트의 주도’하에 이뤄진 찬란한 모던 재즈(Mordern Jazz) 시대가 개화했다고 칭송해마지 않는다.
재즈 피아니스트 재즈 피아니스트
연주 : Thelonious Monk (델로니어스 몽크)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듣고 연주해봐야 하는 스탠다드 ‘Round midnight’(1944)를 작곡자인 셀로니어스 몽크(이하 몽크)의 연주는 독특하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전위적인 건반 터치는 감상용 음악과 차원을 달리하며 피아노 연주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 몽크의 연주는 투박하고 거칠다.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하고 기분 좋은 선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피아노 주법은 청중들을 당혹스럽게까지...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듣고 연주해봐야 하는 스탠다드 ‘Round midnight’(1944)를 작곡자인 셀로니어스 몽크(이하 몽크)의 연주는 독특하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전위적인 건반 터치는 감상용 음악과 차원을 달리하며 피아노 연주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 몽크의 연주는 투박하고 거칠다.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하고 기분 좋은 선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피아노 주법은 청중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한다. 버드와 디지가 40년대 소개한 그 전위적이고 난해하다고 소문난 비밥이지만, 몽크가 제시한 그 난해함엔 비할 바가 못된다. 그만큼 몽크의 음악 세계는 비밥에서도 변방에 위치했다. 몽크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의 연주엔 자지러질 만한 고난이의 테크닉으로 점철된 연주가 아닌, 자기 나름의 공식에 기반해 한가지 연주 주제를 다양한 리듬 패턴과 화성으로 조합해내는 펼쳐내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독특한 음악성 때문에 대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몰라주던 당시 연주인들에게까지 그는 냉대를 당한다. 버드나 디지가 선보였던 화려한 기교와 초스피드로 무장한 비밥 연주에 흥분했던 청중들은 몽크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난수표처럼 얽힌 그의 연주는 얼른 들어서 감이 오지 않지만,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그의 음악성은 비밥의 또 다른 모델이다. 1947년 30세 나이에 발표한 < Genius Of Modern Music Vol.1,2 >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제시한 몽크는 향후 25년 동안 데뷔 때 보여준 스타일을 견지하며 재즈 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연주 패턴’을 지닌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절모가 잘 어울리는 몽크는 1917년 태어나 5살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뉴욕에서 보낸 유년시절동안, 20년대 할렘 스트라이드(Harlem Stride) 주법의 일인자 제임스 P. 존슨(James P. Johnson)의 음악을 늘 끼고 살며(제임스 P. Johnson은 그의 이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주법을 확립해간다. 1940-1943년 비밥의 고향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연주의 내공을 다짐과 동시에 1942년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며 피아니스트로 활동한다. 평소 작곡에 재능 있던 그는 “Epistropy"(1942), 그리고 ” ‘Round midnight"(1944)를 밴드 멤버 자격으로 처음 녹음한다. 1945-54년까지 몽크에겐 ‘시련의 시간’이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알게 된 동료 버드와 디지와 함께 연주활동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특이한 그의 피아노 주법에 다들 그를 ‘엉터리 피아니스트’로 여겼다. 비밥의 주역들에게까지 소위 ‘왕따’를 당한 그였지만 ‘끝내 이기리라’는 신념으로 블루노트와 프레스티지 레코드사를 통해 수많은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화려한 프레이징 구사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던 동료 버드 파웰(Bud Powell)과는 달리 그의 처음 10년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군분투 그 자체였다.(아이러니컬하게도 버드와 그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55년 리버사이드 레코드와 계약한 몽크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듀크 엘링턴의 스탠다드를 연주한 < Plays Duke Ellington >을 시작으로 인지도를 모았고, 그 여세를 몰아 몽킅는 중기 걸작 < Brillant Corners >(1956)를 테너섹소폰에 소니 롤린스,드럼에 막스 로치가 참여해 발표한다. 이듬해 1957년 몽크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방출된 테너 섹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몽크에게 ‘제2의 음악인생’을 열게 해준 둘의 만남은 비록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찰떡궁합으로 비견되는 둘의 독창적인 음악성은 그제서야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1957년 한 해 동안 몽크는 존과 함께 < John Coltrane& Thelonious Monk >, < Monk’s Mood >, < Thelonious Himself >와 같은 모던 재즈의 걸작들을 녹음한다. < Monk’s Mddd >의 수록곡 ’Monk’s mood’는 몽크를 음지에서의 재즈계의 주요 인사로 부상시켜줬고 존 콜트레인 역시 몽크와의 만남을 계기로 마약을 끊고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개발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1962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메이저로 진출, 1962-1968년 동안 자신의 쿼텟을 이끌며 재즈계의 유명인사로 군림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일군다. 70년대 초엔 디지 길레스피가 조직한 프로젝트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의 멤버로도 활동하지만 1973년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1982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철저히 은둔생활을 한다. ‘Round midnight’, ‘52nd street theme’, ‘Ruby my dear’ 등 그가 작곡한 수많은 재즈 스탠다드들은 지금까지도 젊은 재즈뮤지션들의 단골 연주 레퍼토리이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이렇다할 슬럼프 없었던 올곧은 그의 음악여정은 후대에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데뷔 초기에는 비록 버드나 디지, 파웰이 누린 주목을 얻진 못했지만, ‘혁신과 실험’으로 대변되는 ‘비밥의 정신’에 그 만큼 부합되는 인물은 없을지도 모른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자 재즈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자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소프라노 클라리넷, 색소폰 연주자 소프라노 클라리넷, 색소폰 연주자
연주 : Oscar Peterson (오스카 피터슨)
재즈 연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무엇일까?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달콤한 멜로디의 주인공 색스폰, 다른 악기의 보조를 맞추며 특유의 화성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스 , 박진감 넘치며 복잡한 리듬감을 구사하는 드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악기는 다름아닌 피아노이다. 리듬, 화성 ,멜로디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악기는 그래서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 재즈 연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악기는 무엇일까?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달콤한 멜로디의 주인공 색스폰, 다른 악기의 보조를 맞추며 특유의 화성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스 , 박진감 넘치며 복잡한 리듬감을 구사하는 드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악기는 다름아닌 피아노이다. 리듬, 화성 ,멜로디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악기는 그래서 모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연주해봐야 하는 연주의 전공필수와 같은 위상을 지녔다. 재즈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위상 또한 남달랐다. 스윙의 선구자로 추앙 받던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모두 클래식으로 숙련된 피아니스트였고, 밴드에서 편곡과 리더를 맡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다른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한 연주의 세계를 피아노는 창조할 수 있었고, 이런 강점을 발판으로 재즈사를 통해 거론되는 피아니스트들은 또한 재즈의 진보를 일궜다. 영화 ‘스팅’의 주제가에서 목격 했던 스콧 조플린의 흥겨운 랙 타임, 랙 타임 리듬에 멜로디의 고난이 즉흥성이 가미된 할렘 스트라이드 주법의 팻츠 월러, 최초의 비밥 피아니스트로 평가 받는 아트 테이텀, 대중성을 바탕으로 범접할 수 없는 연주 세계를 창조한 피아노 예술가 에롤 가너… 한 때 리듬 악기로만 국한 되었던 피아노는 이들의 창조력으로 어느덧 풍부한 화성과 운치 있는 멜로디라는 두 날개를 달며 재즈 연주에선 없어선 안 될 악기로 부상했다. 오스카 피터슨은 위에 언급한 재즈 피아니스트 중 시기적으로 가장 나중에 위치한 사람이다. 1925년생이니까 동년배의 다른 아티스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비밥, 하드 밥의 대가쯤으로 알려져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줄기차게 ‘스윙 ’연주만을 고집한 피아니스트다. ‘재즈’는 곧 ‘스윙’이라 할 정도로 그는 이 매력적인 장르를 지금껏 생명력 있게 이어줄 수 있게 한 동인이다. 팝 가수 빌리 조엘(Billy Joel)은 자신의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부분의 바로 ‘재즈’이며 (가령 ‘New york state of mind’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 재즈 연주자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오스카 피터슨으로 꼽았을 정도로 팝 가수, 특히 피아노 연주를 하는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 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동시대 ‘비밥’ 연주처럼 난해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지만 탁월한 리듬감과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구성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49년 당시 신생 레이블 버브(verve) 사의 사장 노먼 그란쯔의 주선으로 본격적으로 재즈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이후 1965년까지 버브 레이블을 통해 ‘피아노 트리오’ 편성(베이스에 레이 브라운, 기타에 허브 엘리스 또는 바니 케슬)으로 기억될 수많은 재즈 연주를 남겼다. 우리에겐 가수로 더 잘 알려진 냇 킹 콜(Nat King Cole)이 1940년대 초 보여준 피아노 트리오 양식을 계승해 그는 ‘드럼’이 없이 베이스와 기타로 구성된 트리오를 계승해 보다 리드미컬하고 다양한 화성과 노트를 사용해 스윙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트리오 연주 스타일을 창조했다. 피아노 트리오를 고안한 건 냇 킹 콜이었지만 그가 가수로 나선 뒤 생긴 공백을 오스카 피터슨이 매우며 보다 다채롭게 발전시킨 셈이다. 1925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오스카 피터슨은 6살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다. 청년시절, 냇 킹 콜의 트리오 연주를 통해 스윙에 마력에 푹 빠지고 만 그는 피아노 역주에 보다 역동성을 가미시키며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하려 고군분투한다. 이런 노력 끝에 1949년 버브사의 사장 노먼 그란쯔에 의해 눈에 띄어, 같은 해 ‘Jazz at Philharmonic’ 공연에 초청되었고, 이내 미국에서 유명한 재즈 뮤지션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 Jazz at Philharmonic > 공연에 그는 1966년까지 단골 연주자로 참석한다. 사실 미국에서의 그의 첫 밴드는 트리오가 아닌 듀오였다. 데뷔 시절부터 그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어 준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은 이후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핵심이었는데 오스카와 듀엣으로 활동하며 데뷔작 < Tenderly >(1950)을 발표하며 상업적, 비평적인 성공을 거둔다. 50년대 초엔 기타를 추가하며 명실상부 피아노 트리오의 위용을 갖춘다. 오스카 피터슨-레이 브라운-허브 엘리스(바니 케슬)로 구성된 3인조는 < Keyboard >(1950), < An Evening with Oscar Peterson >(1950), < Nostalgic Memories >(1951)등 발표되는 앨범마다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향후 10년간 연주 경력에 상승곡선을 그린다. 스윙을 바탕으로 빈틈없고 깔끔한 트리오 연주는 이내 입 소문으로 퍼져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 제랄드,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재즈 보컬의 세션을 맡기도 했고, 카운트 베이시 빅 밴드, 레스터 영, 베니 카터, 로이 엘드리지, 벤 웹스터 등 스윙시대 최고의 솔리스트들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스윙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고전의 재해석’에서도 남달랐는데, 콜 포터, 어빙 벌린, 조지 거쉰, 제롬 컨, 리처드 로저스으로 구성된 1세대 틴 팬 엘리 작품을 집대성한 송 북(Songbook)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그의 트리오도 기타리스트 허브 엘리스의 탈퇴로 잠시 동안 그 견고함이 흔들리게 된다. 이에 기존 피아노-베이스-기타에서 기타를 빼고 드럼을 에드 씨그펜(드럼)을 가입시키며 ‘제 2기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출범시킨다. 1965년까지 이어진 트리오 라인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앨범 < The Trio >(1961)을 시작으로 West Side Story >(1962), < Night Train >(1962), < Canadian Suite >(1964), < We get Request >(1964), 트럼펫 주자 클락 테리가 참가한 중반기 걸작 < The Oscar peterson Trio+ one >(1964)와 같은 명연을 남기며 제 2의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1965년을 정점으로 그의 트리오는 차츰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동반자 레이 브라운 마저 탈퇴한 상황에서 잦은 멤버 교체로 그가 쌓아 온 명색도 차츰 퇴색되기 시작했다. 재즈 퓨전이 창궐한 1970년대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그는 20여년 넘게 그의 동반자가 되준 버브 레이블을 떠나 파블로 레이블을 통해 활동을 지속했고 ‘기타 비르투조 조 파스와 함께 한 후반기 명반 < The trio >(1973)을 비롯, 엘라 핏 제랄드,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 사라 본, 로이 엘드리지, 주트 심스 등 백전노장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에 노력했다. 80년대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1990년대 들어 그는 왕년의 트리오 멤버 레이 브라운과 허브 엘리스를 다시 불러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한시적으로 다시 구성해 앨범 < Oscar Peterson trio Live at Blue Note >(1990)를 발표한다. 단 이틀간의 재결합이었지만 그 해 재즈 뉴스 중 단연 화제였던 이들의 재결성 이벤트는 그의 올드 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현재 여든을 앞둔 고령인 그는 지난 1993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팬들을 긴장하게 했지만 2년여의 치료 끝에 1995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왼쪽 손이 약해져 현재로는 왕년의 다이내믹한 피아노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나의 건강상태가 아니다, 다만 팬들 앞에서 완벽한 연주를 들려줄 수 없다는 게 아쉽다”라는 그의 말에서 무대를 향한 열정을 짐작케 한다. 영원한 ‘피아노 맨’으로 기억될 오스카 피터슨은 지금까지 재즈 연주 중 가장 매력적인 연주 스타일인 트리오 연주의 명맥을 지금껏 존재케 해준 선구자로 평가된다.
연주 : Erroll Garner (에롤 가너 ,Erroll Louis Garner)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에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낸 ‘스타일리스트’이다. 194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일스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가는 창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쿨, 모드,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리드해 갔다.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 Birth Of Cool >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 Round Midnight >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Relaxin > < Cookin’ > < Workin > 그리고 < Steamin’ >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 Round Midnight >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 Birth Of Cool >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 Miles Ahead >와 이듬해 < Porgy & Bess > 그리고 1960년의 < Sketches of Spain >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 섹스텟으로 새로 출발하여 < Milestone >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섹스텟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 Kind of Blue >(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그의 섹스텟 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섹스텟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 Kind Of Blue >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섹스텟을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 Live At Carnegie Hall >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섹스텟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 Kind Of Blue >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 E.S.P >를 시작으로 < Miles Smiles >(1966), < Sorcerer >(1967), < Nefertiti >(1967), < Miles In The Sky >(1968), < Fills De Kilimanjaro >(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 Miles Smiles >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 Miles In The Sky >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 Filles De Kilimanjaro >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 In A Silent Way >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 Bitches Brew >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 Miles Davis In Filmore East >(1970), < Live-Evil >(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 Tribute to Jack Johnson >(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 On the Corner >(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 The Man With The Horn >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 Star People >(1982), < Decoy >(1983), < You’re Under Arrest >(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 TuTu >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 Siesta >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 Sketches Of Spain >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 Doo-Bop >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 비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이하 버드)와 디지 길레스피(이하 디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엄청난 스피드의 솔로와 한번에 2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찰리 파커의 연주 재능은 비밥의 혁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찰리 파커의 이런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였다. 디지는 항상 버드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항상 ‘버드 다음’이라는 식으로 ‘2인자’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버드의 음악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은 디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도 바로 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새로운 재즈 음악 ‘비밥’의 명칭 역시 디지가 고안했다.) 실제로 디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찰리 파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버드에게 선사한 디지의 공헌은 막대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물론 중간에 뛰쳐나온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찰리 파커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떠돌이 음악인 신세였고, 디지는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아 1937년부터 테디 힐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였다. 하지만 1941년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의 이들 둘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디지는 버드가 지닌 천재성에 매료 되 그와 의기투합한다. 버드가 연주해서 유명해진 ‘Groovin’ high’, ’Salt peanuts’, ’Hot house’, ’Shaw ’nuff’등은 모두 디지가 작곡했다. 1945년부터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를 무대로 활동한 이들 콤비는 버드가 곡의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디지가 그것을 흡수해 곡을 쓰는 방식이었다. 독보적인 음악성을 지닌 찰리 파커의 악상은 이렇듯 디지의 체계적인 음악지식에 의해 악보로 재현되었기에 우리가 지금 버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셈이다.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공헌은 버드와의 콤비 플레이 이상이다. 1947년 버드와 함께 한 퀸텟 활동을 접고 초유의 비밥 빅밴드(Bebop Big Band)를 결성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가 고안한 ‘쿠밥’(Cubop)이라는 장르인데,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 대가 차노 포조(Chano Pozo)를 초청해 비밥과 아프로 큐반 리듬의 온전한 결합을 시도하며 재즈 내에서 본격적인 ’퓨전‘을 실험한 최초의 인물로 디지는 기억되다. 재즈의 명 스탠다드로 자리 매김 한 대표 곡 ’A night in tunisia’, Cubana bop’과 같은 곡은 아프로 큐반 재즈의 원형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밀트 잭슨, 제임스 무디, 유셉 라티프, J.J 존스과 같은 50-60년대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이란 이름으로 모인 걸출한 뮤지션들을 배출했고,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후 팻츠 나바로,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영향을 끼치며 비밥이 한층 그 흑인성을 더하며 하드 밥 (Hard Bop)으로 진화 해 가는데 기여한다. 1917년 노스 캘롤라이나 주 출신인 디지는 12세때부터 트럼펫을 손에 잡고 이후 대학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만, 뮤지션이 되기 위해 자퇴한다. 30년대 스윙시대를 빛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37년 테디 힐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프로로 데뷔한다. 이후 1939-1941년까지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빅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리더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이윽고 해고된다. 이윽고 그의 첫 음악동지 테디 힐이 세운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버드를 비롯한 비밥의 명인들과 음악적 교분을 나누며 1941-1943년까지 엘라 핏 제럴드, 베니 카터, 콜맨 홉킨스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며 비밥의 혁명을 준비한다. 1942년 얼 하인즈 빅밴드에 합류하며 디지는 버드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되었고 이때 밴드의 보컬주자 빌 엑스타인의 보컬로 그의 대표작 ‘A night in tunisia’(1943)을 발표한다. 1945-1947년까지 버드와 함께 퀸텟을 조직, 비밥을 세상에 알렸고, 1947년부터 자신의 비밥 빅밴드를 이끌면서 아프로 큐반 음악을 재즈에 소개한다. 1950년엔 버드와 다시 만나며 < Bird & Diz >를 버브 레이블에서 공개했고, 이후 1950년대 내내 버브사를 통해 자신의 연주에 큰 영향을 준 로이 엘드리지와 함께 한< Dizzy Gillespie & Roy Eldridge >(1954), 10년 동안의 빅 밴드 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라이브 명반 < At Newport >(1957)을 발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버드와는 달리 디지는 이후 6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소규모 밴드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레오 라이트(Leo Wright), 라로 쉬프린(Lalo Schifrin), 제임스 무디(James Moody), 케니 바론(Kenny Barron)과 같은 60년대 스타급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했고, 70년대 초엔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라는 프로잭트 밴드를 결성, 델로니우스 몽크 ,소니 스티츠, 아트 블래이키와 같은 40-50년대 비밥 명인들과 재결합을 시도한다. 이후 재즈 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 들어갔지만, 후배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80년대까지 그와 함께 연주를 같이 한다. 그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리빙 하바나’를 통해 소개된 아르투로 산도발(트럼펫)과 파키토 리베라(색스폰)와 같은 쿠바 출신의 뮤지션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죽기 1년 전인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디지는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뤘던 버드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운명’에 자신을 파괴했던 버드와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낄 줄 알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드와 함께 ‘비밥의 산파자’라는 영예와 더불어 많은 후배 뮤지션들을 키워내며 재즈 사에서 버드에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기억된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연주 : Lionel Hampton (라이오넬 햄튼 (재즈 비브라폰))
재즈 클라리넷, 색소폰 연주자, 빅 밴드 리더. 재즈 클라리넷, 색소폰 연주자, 빅 밴드 리더.
재즈 알토 색소폰 재즈 알토 색소폰
1920년대 미국 초기 재즈 시대에 최초의 백인 코넷주자로 활동한 빅스 바이더백은 동시대 흑인 코넷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 쌍벽을 이루며 ‘재즈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리드미컬하고 감흥에 찬 트럼펫 솔로를 창시했던 루이 암스트롱과 달리 빅스 바이더벡은 섬세하고 여린 감성이 우러나는 백인 특유의 ‘절제된’ 솔로 연주를 창조해냈다. 재즈 음악가로서 꿈을 채 펼치기도 전인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루이 암스트롱과... 1920년대 미국 초기 재즈 시대에 최초의 백인 코넷주자로 활동한 빅스 바이더백은 동시대 흑인 코넷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 쌍벽을 이루며 ‘재즈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리드미컬하고 감흥에 찬 트럼펫 솔로를 창시했던 루이 암스트롱과 달리 빅스 바이더벡은 섬세하고 여린 감성이 우러나는 백인 특유의 ‘절제된’ 솔로 연주를 창조해냈다. 재즈 음악가로서 꿈을 채 펼치기도 전인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재즈의 핵인 ‘즉흥 솔로 연주’의 전형을 확립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된다. 빅스 바이더벡은 1903년 3월 10일 아이오와주의 데분포트에서 부유한 석탄상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접하며 음악을 배운 빅스는 최초의 재즈 레코딩이었던 1917년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and)’의 음반을 접하면서 차츰 재즈음악에 매료되어 결국 코넷을 독학으로 배운다. 그러나 빅스의 부모는 아들이 재즈 음악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시카고 북부에 소제한 ‘레이크 포리스트 아카데미’로 전학시킨다. 그러나 당시 많은 흑인 재즈 음악인들이 뉴올리언즈에서 시카고로 이주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빅스의 부모는 이로 인해 빅스가 더욱 재즈에 매료당할 것이라는 예측을 못한다.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레이크 포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오래있지 못하고 빅스는 결국 1922년 퇴학을 당한다. 1924년 아마추어 밴드 ‘울브린스’(Wolverines)를 결성해 활동하다 같은 해 2월 재즈 독립 레이블 게넷(Genett)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이후 시카고의 클럽 가에서 활동하던 백인 색스폰 주자 프랭키 트럼바우어(Frankie Trumbauer) 밴드에 코넷 주자로 가입하면서 정식 프로 음악인으로서 발을 내딛는다. 차츰 그의 연주실력이 시카고 전역에 알려졌고, 그는 어느덧 백인 재즈 연주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한다. 시카고에서 프랭키 트럼바우어와 함께 했던 연주는 지금까지도 빅스 바이더벡의 명곡들로 남아있다. 특히 ‘Singin’ the Blues’(1927)와 ’Riverboat shuffle’(1927)등은 빅스의 코넷 솔로 연주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귀 기울일만한 곡들이다. 1927년에는 시카고와 뉴욕을 활동 거점으로 하는 폴 화이트맨(Paul Whiteman) 밴드에 가입, 어느덧 인기 있는 코넷주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폴 화이트맨 밴드의 음악은 인기 있었지만 빅스는 그 지극히 상업적인 연주에 만족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는 실망감을 술로 해소하려 했고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만다. 여기에 그의 음악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의 마찰은 그를 더욱 술에 빠지게 한다. 빅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아들이 재즈음악을 한다는 걸 수치로 여긴 부모는 심지어 빅스가 레코딩한 음반을 한번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재즈는 ‘흑인들의 저급한 음악’이라는 인상이 백인 주류사회에 팽배해 있었고, 보수적인 빅스의 부모 역시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29년, 폴 화이트맨 밴드를 떠나 1930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또는 프랭키 트럼바우어(Frankie Trumbauer)를 통해 레코딩 작업을 한다. 이때 함께 한 연주자로 스윙 폭발의 주역 클라리넷 주자 베니 굿맨(Benny Goodman)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술로 인한 건강 악화로 요양소에 들어가 술을 끊었지만 신경쇠약에 걸린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1931년 뉴욕 퀸스의 써니 사이드에 있는 한 하숙집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루이 암스트롱만큼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한 빅스 바이더벡이었지만 그는 재즈 연주에 커다란 획을 그어 놓았다. 루이 암스트롱은 빅스 바이더벡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그와 나를 비교했습니다. 둘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고 떠들어댔지요. 그와 내가 협연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솔로 연주를 하려 했던 것이지요.”
래리 애들러는 1914년 2월10일 미국 볼티모어 매릴랜드에서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피아노와 함께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배웠고, 13세이던 1927년 "볼티모어 선"이라는 신문사에서 개최한 하모니카 콩쿠르에 참가, 베토벤의 미뉴에트를 연주, 우승을 차지하여 유명하게 된다. 그리고 14세가 되던 해부터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진가를 인정받은 그는 루스 에팅(Ruth Etting... 래리 애들러는 1914년 2월10일 미국 볼티모어 매릴랜드에서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피아노와 함께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배웠고, 13세이던 1927년 "볼티모어 선"이라는 신문사에서 개최한 하모니카 콩쿠르에 참가, 베토벤의 미뉴에트를 연주, 우승을 차지하여 유명하게 된다. 그리고 14세가 되던 해부터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진가를 인정받은 그는 루스 에팅(Ruth Etting)과 함께 레코딩을 가지게 되며 분주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래리 에들러는 하모니카만을 위해 작곡된 곡을 최초로 연주했던 뮤지션 중 하나이며 진 버거(Jean Berger)의 "Harmonica & Orchestra", 시릴 스콧(Cyril Scott)의 "Serenade(harmonica and piano)",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의 1951년도 작품 "Romance in D(harmonica and string orchestra: premiered New York)"과 같은 곡들은 그를 위해서 쓰여졌다. 그는 바흐(Bach)와 비발디(Vivaldi)의 곡을 비롯하여 바르톡(Bartok), 베토벤(Beethoven), 드뷔시(Debussy), 거쉰((Gershwin), 모차르트(Mozart), 라벨(Ravel) 등과 같은 클래식 작곡가들의 곡을 편곡하여 하모니카로 연주, 이 작은 악기가 지닌 가능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1940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작곡가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살던 에른스트 톱포의 문하에서 음악을 더욱 폭 넓게 배우기 위해 수학했다. 그리고 1940년대 들어 래리 에들러는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보적인 댄서 폴 드레이퍼(Paul Draper)와 함께 대중적인 활동을 선보이며 미국은 물론 국제적인 투어를 통해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게 가져갔다. 1949년 자신이 살아갈 곳은 영국이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서 정착하게 된다. 1952년에는 로열 앨버트 홀(the Royal Albert Hall)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ondon Symphony Orchestra) 와 협연을 하는 영예를 누렸다.

뒤이어 1953년도에 영화 'Genevieve'의 사운드 트랙이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이후 다수의 영화 사운드 트랙 작업을 담당하며 작지만 진한 감동을 주는 하모니카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해 보였다. 한편 1965년 에딘버러 국제 음악 음악제에서 독주회를 열어 인기를 넓혔고, 이런 애들러에게 '하모니카의 제왕(Harmonica King)'과 '하모니카 비르투오조(Harmonica Virtuoso)'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제왕이란 수식어는 화려한 기교를 바탕으로 대중 음악과 순수 음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폭넓은 음악성의 소유자 애들러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이후 다양한 활동을 펼친 그는 80세가 되던 1994년 조지 마틴(George Martin)과 함께 조지 거쉰의 곡들을 연주한 'The Glory of Gerswin' 앨범을 발표, 피아노와 하모니카를 혼자서 연주하며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이 앨범은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 쉐어(Cher), 케이트 부쉬(Kate Bush),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코트니 파인(Courtney Pine) 등 올스타 라인업과 함께 레코딩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2001년 87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대부로 통하는 아트 페퍼(Art Pepper)는 편안하고 따스한 감성의 음악으로 재즈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백인 색소폰 연주자이자 클라리넷 주자이다. 위대한 음악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시름하며 힘겹게 살아야 했던 그는 30여 년의 지독한 약물과의 투쟁에서도 음악을 향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5년 9월 1일 캘리포니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트 페퍼(본명: Arthur ...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대부로 통하는 아트 페퍼(Art Pepper)는 편안하고 따스한 감성의 음악으로 재즈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백인 색소폰 연주자이자 클라리넷 주자이다. 위대한 음악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시름하며 힘겹게 살아야 했던 그는 30여 년의 지독한 약물과의 투쟁에서도 음악을 향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5년 9월 1일 캘리포니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트 페퍼(본명: Arthur Edward Pepper Jr.)는 9살의 나이에 클라리넷을 접했다. 클라리넷 수업을 통해 재즈에 취한 그는 13세에 알토 색소폰을 들고 풀타임 뮤지션의 길을 택했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 밴드인 거스 앤하임(Gus Anheim)의 멤버로 프로 뮤지션 생활을 시작한 이 젊은 연주자는 LA에서 흑인들과 함께 연주 폭을 넓혔으며 베니 카터(Benny Carter), 스탄 켄톤(Stan Kenton)의 빅밴드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약하면서 주류 뮤지션으로 올라섰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 군 복무 이후, 스탄 켄톤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아트 페퍼는 순회공연을 통해 출중한 실력을 마음껏 펼치며 정상의 색소폰 연주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쾌속항진 이면에서는 아트 페퍼 삶의 고통이 시작되고 있기도 했다. 스탄 켄톤 밴드와 함께하며 마약을 상용하던 페퍼는(이름이 마약을 연상시키는 것도 재밌는 점이다) 데뷔 앨범의 성공을 뒤로 한 채 마약 덕분에 1950년대 초반 두 차례 감옥 신세를 져야 했으며, 전성기를 구가해야 할 시기에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은 삐걱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아트 페퍼의 삶은 재활과 재기의 연속이었다. 50년대 후반 재기에 성공하여 쳇 베이커(Chet Baker)와 함께한 < The Route >, < The Playboys >, 그의 대표작들로 기록되어진 < The Artistry of Pepper >, < Meets the Rhythm Section > 등으로 역량을 뽐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마약으로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되었고, 1960년 다시 공백을 메우며 < Gettin’ Together >와 같은 히트 앨범을 만들어 내었다. 1960년대 하워드 럼지(Howard Rumsey)의 악단에서 활약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던 아트 페퍼는 1960년대 중반 존 콜트레인(John Coltrain)의 영향을 받아 테너 색소폰을 들고 프리재즈에 다가서는 등 음악적 깊이를 더해 나갔지만 깊어지는 마약 중독 때문에 다시 한 번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1960년대 후반 버디 리치(Buddy Rich) 악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점점 심각해지는 헤로인 중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1969년에서 1971년까지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음악 활동은 정지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트 페퍼는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부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재활에 성공하여 1975년 공연을 통해 컴백을 했다.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음악으로 다시 수준 높은 앨범들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특유한 부드러움과 아늑함을 보존하면서 비밥 이후의 퓨전 스타일을 시도한 < Among Friends > 같은 주목할만한 앨범들이 이때 나왔다. 1970년대 말, 제2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를 괴롭히던 마약 중독은 1982년 6월 1일 그의 생을 앗아가고 말았다. 굴곡 많았던 재즈 대가 아트 페퍼의 삶은 자서전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음악엔 그만의 음색이 느껴진다. 여기에 그는 재즈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화성 전개를 고안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곡(suite) 형식의 대곡을 재즈로 소화해낸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유산은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 많은 음악 학자들이 “듀크 엘링턴은 세계 대중음악을 20년 이상 앞당겼다”고 평했을 만큼 그는 재즈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899년 4월29일,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접한다. 아버지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집사였고 당시 흑인들 중에선 드물게 중산층에 속했던 덕에 가정교사를 통해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Soda fountain rag’와 ’What you gonna do when the bed breaks down’를 처음으로 작곡했고, 18세 때에는 워싱턴 지역의 유명한 밴드 리더로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1923년 재즈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 진출한 그는 자신의 밴드 ‘더 워싱턴스’(The Washingtons)를 결성한다. 이 때 자신의 이름에 영예로운 공작(Duke) 칭호를 부여하며 듀크 엘링턴으로 개칭한다. 1927년에 이르러 밴드는 뉴욕 지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인정을 받았고, 얼마 후 백인 전용클럽이었던 코튼 클럽(Cotton Club)에 입성한다. 그가 악장으로 일하게 된 코튼 클럽은 미국의 상류층들이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이후 재즈의 상징어가 된다. 뉴 올리언즈의 스토리 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음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바야흐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첫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1927)가 발표된다. ’와우-와우‘하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당시까지의 재즈 연주가 대부분 장조였던 것과 달리 구슬픈 멜로디가 들리는 단조 풍의 연주곡이었다. 독특한 악기 음색과 치밀한 계산이 돋보이는 연주 편곡은 당시 28세를 갓 넘은 청년 듀크 엘링턴을 일약 재즈의 비범한 뮤지션으로 상승시킨다. 1931년까지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경제 한파는 코튼 클럽에 사람들의 발길을 주춤케 했고 그는 잠시 유럽으로 진출, 이후에 있을 전성기를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미국 사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여기에 NBC, CBS, 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기면서 재즈 음악인들은 금주(禁酒)령으로 묶인 그들의 창작 혼을 다시금 살려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맞이한다. 듀크 엘링턴은 이 절호의 찬스를 통해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며 1930-40년대를 그의 음악 경력 상 최고의 절정기로 기록되게 한다. 경제 공황이라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1930년대 미국 시민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필요로 했고, 1935년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의 폭발은 뉴욕 시내의 무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코튼 클럽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은 듀크 엘링턴은 이 시기에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1932),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에 발표한 ’Dimuniendo in blue’는 재즈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7분이 넘는 대곡이다. ‘Dimuniendo in blue’가 탄생하기까지엔 웃지 못할 애피소드가 있다. 1930년대 당시 SP(78회전)음반 한 면에는 대략 3분 정도의 음악 밖에 수록할 수 없었다. 이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앞뒷면을 전부 사용해서 녹음을 했고, 결국 7분이 넘는 연주 테입은 SP 음반에 앞뒷면으로 나뉘어져 실린다. ‘3분 짜리 춤곡’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스윙 음악 스타일에 그는 자신의 음악성을 한정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윙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그는 스윙이라는 음악을 단순한 ’춤곡‘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던 플런저(Plunger; 트럼펫 앞을 막았다 닫았다 하며 음색을 조절하는 기구, 우리말로 소음기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트럼펫의 독특한 울림은 여전히 연주 전체에 ’약방의 감초‘처럼 짜릿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연출하는 세련된 편곡은 스윙 연주 편곡의 전형을 제시했다. 단조와 장조를 교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이용한 원활한 감정 처리,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빠르기 조절과 다양한 악기 음색을 실험하며 그는 정통 재즈(mainstream)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자신의 음악에 모두 담아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재즈의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의 선풍에 아랑곳없이 듀크 엘링턴은 여전히 자신의 빅 밴드를 지속시키며 스윙을 고집했고, 주변의 많은 밴드들을 위해 수많은 곡을 써 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유지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그는 작곡 구조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조곡’(suite)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갖고 여러 소품들을 만들어 전체가 하나의 큰 대곡 형식을 갖추는 조곡을 재즈에 도입해 그는 다시 한번 재즈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곡 콤비로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작곡가 빌리 스트레이혼(Biily Strayhorn)과 공동으로 작, 편곡하여 1957년 발표한 < Such Sweet Thunder >같은 앨범은 조곡 스타일의 재즈 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세익스피어(Shakespear)의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재즈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56년 뉴욕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듀크 엘링턴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의 활동은 비록 1930년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빅 밴드를 이끌며 세계 투어를 비롯하여, 활발한 음반 발표와 곡 작업을 지속한다. 이 당시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Tourist point of view’(1966)같은 곡에선 말년에 아랑곳없이 기세 등등한 멤버들의 연주실력과 그의 변함 없는 음악성이 느껴진다. 빅 밴드 단원들은 기복 없는 안정적인 연주를 했는데, 이는 1930년대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한 단원들이 함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리톤 색스폰 주자 해리 카네이(Harry Carney)는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데뷔한 1927년 때부터 무려 47년 동안 그가 그의 밴드 멤버로서 활동한다. 후반기 명작으로 거론되는 재즈 조곡 < Latin American Suite >(1970)를 발표하고 끊임없는 투어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듀크 엘링턴은 결국 1974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끊임없이 재즈 음악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자기개발에 부단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놓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재즈 맨’ 듀크 엘링턴은 그의 밴드와 자신의 곡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국보인 재즈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클래식 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지금까지도 초연 되지 않은 그의 곡들을 연구하며 지금도 그의 놀라운 음악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재즈, 팝 피아노 연주자 재즈, 팝 피아노 연주자
연주 : Count Basie (카운트 베이시)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 1930-40년대 스윙 열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과 함께 스윙(Swing)의 대중화에 공헌한 재즈음악계의 위인이다. 그가 이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는 그의 사후인 지금까지도 남아서 그가 남긴 스윙의 유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베니 굿맨과 같은 탁월한 솔리스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빅 밴드만의 차별점을 제시했다. 그는 멤버들 각자의 탁월한 연주 기량에 더해 솔로와 리듬연주간의 긴밀한 조화를 일궈내며 재즈 연주에서 앙상블(Ensemble)의 매력을 만끽케 한다. 그는 1920년대 스트라이드(랙타임에서 발전된 피아노 연주법)의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의 피아노 주법을 계승하며 부기우기(Boogie Woogie)라는 독특한 리듬 패턴을 제시한다. 12마디 블루스 형식의 부기우기(셔플 리듬이라고도 함)는 일반적인 스윙 연주가 1박과 3박에 강세가 오는(츄우 추 취- 츄우 추 취-)리듬패턴이었던 것과는 달리 2박과 4박에 비트가 가해지는(칙 둥- 칙 둥-)식의 리듬을 창조해내며 향후 재즈에서 비트(Beat)가 중요해 질 것을 예견케 했다. 카운트 베이시가 제시한 이 ’리듬의 혁명’은 당시까지 밴드 안에서 그 역할이 미비했던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기타의 리듬 연주를 강화하며 재즈 쪽에서 1940년대 비밥(Bebop)의 전야(前夜)를 수놓았고, 블루스 쪽에선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와 같은 점프 블루스(Jump Blues) 스타의 출현을 가져오게 한다. 1904년 미국 뉴저지주 생으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음악 레슨을 받았고, 1920대에 이르러 할렘 스트라이드 피아노 주자 팻츠 월러로부터 사사한다. 1927년 미국 중소도시를 도는 유랑극단인 보드빌(vaudeville) 무대에서 처음 직업 음악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28년 곤젤 화이트의 빅 재즈 잼보리(Gonzelle White’s Big Jazz Jamboree)의 멤버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순회하다 뉴 올리언즈에 버금가는 재즈의 고장 캔사스(Kansas City)에 도착해 밴드의 해산을 맞았지만 곧바로 캔사스에 정착한다. 뉴욕은 대공황으로 실업자들이 들 끌고 금주령으로 클럽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지만 정치적인 보스였던 톰 팬더개스트의 지배 아래 캔사스 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불법적인 음주와 도박이 벌어지던 수많은 클럽이 도시 안에 성행했고, 거의 모든 클럽에서 재즈 라이브가 열렸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일자리를 찾아 캔사스 시티로 몰려들어 1930년대 스윙 시대에 만개할 ’리듬의 향연’을 준비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 캔사스 시티 >(1995)를 보면 1930년대 그곳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캔사스 지역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한 월터 페이지(Walter Page)가 이끄는 블루 데빌스(Blue Devils)의 멤버로 가입, 여기서 훗날 그의 페르소나(Persona)로 남게 된 가수 지미 러싱(Jimmy Rushing)과 테너 색스폰 주자 레스터 영(Lester Young)을 만난다. 이듬해엔 캔사스 시티 출신인 밴드 리더 베니 모튼(Bennie Morton)을 만나며 모튼의 빅 밴드에 가입한다. 모튼의 밴드에서 편곡을 맡았던 그는 1935년 모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밴드의 리더로 나서게 되고, 이때 블루 데빌스 시절에 만났던 동료들을 규합해 1936년 자신의 밴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이때 자신의 본명 윌리엄 베이시(William Basie) 대신 ’백작(Count)’의 작위를 수여하며 ’카운트 베이시’로 개칭한다. 1936년, 그의 음악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접했던 세기의 명 프로듀서 존 해몬드(John Hammond)의 주선으로 그와 그의 밴드는 캔사스를 떠나 뉴욕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1937년 1월, 데카(Decca)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수많은 밴드의 명곡들을 녹음하게 된다. ’One o’clock jump’(1937)를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Boogie woogie’(1937), 지미 러싱의 보컬로 더 유명한 ’Stop beatin’ round the Mulberry Bush’(1938), ’Cherokee’(1939)등을 모두 차트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의 창작력의 정점이었던 이 당시 그의 대표 곡들은 3장 짜리 CD 박스세트 < Count Basie-The Complete Decca Recordings >를 통해 만날 수 있다. 1940년대 들어 그의 밴드는 전 세계를 투어하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42-1944년까지 그와 밴드는 미국 서부에 머물며 5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I didn’t know about you’(1945), ’Red bank blues’(1945), ’Rusty dusty blues’(1945) ’Jimmy’s blues’(1945), ’Blue skies’(1946)등을 팝, R&B 차트에 진입시키면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모던 재즈 창궐과 함께 스윙음악이 점차 그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도 몇 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인 1952년에서야 다시 그의 밴드를 부활시켜 활동에 들어간다. 버브 (Verve) 레이블을 통해 활동한 1950년대는 그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시기다. 지미 러싱에 이은 재즈 보컬리스트 조 윌리엄스(Joe Willliams)를 밴드에 영입해 만든 < Count Basie Swings, Joe Williams Sings >(1955), < April In Paris >(1955)를 각각 앨범차트 톱40와, R&B 차트 톱10에 진입시키며 성공적인 재기를 거둔다. 특히 1957년 발표한 < Count Basie At New Port >는 레스터 영(Lester Young), 지미 러싱(Jimmy Ryshing),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 프레디 그린(Freddie Green)등 과거 1930년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밴드 멤버들을 다시 불러들여 만든 연주라는 점에서도 가치 있는 스윙 명반이다. 1960년대 들어 그는 주로 보컬 연주의 대가들과 함께 음반을 발표한다.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와 함께 한< Ella And Basie! >(1963),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한 < Sinatra Again >(1964- 수록곡 ’It might as well be swing’이 팝 차트 톱20에 오름),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한 < Our Shining Hour >(1965), 밀스 브라더즈와 함께 한 < The Board Of Directors >(1968), 그리고 소울 가수 재키 윌슨과 함께 한 < Manufacturers Of Soul >(1968)등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지병인 심장병으로 예전처럼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 그는 계속 세계 투어를 통해 연주활동을 지속했고, 파블로(Pablo)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말년 작들은 그래미 상 재즈 부문에 다수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얻으며 변함 없는 노익장을 드러냈다. 리드 악기 주자 주트 심스(Zoot Sims)와 발표한< Basie & Zoot >(1975), 그의 빅 밴드 작품 < Prime Time >(1976), 혼 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한 < The Gifted Ones >(1978)은 모두 그래미 상 재즈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다. 1981년 건강 악화로 결국 무대를 떠나 병원 생활을 하던 카운트 베이시는 암으로 1984년 향년 79세에 ’찬란한 스윙 백작’의 일대기를 접는다.
연주 : Art Blakey (아트 블래키)
일평생 하드밥(Hard Bop)만을 고집한 재즈 드럼의 전설 가열찬 두드림으로 재즈의 혼을 전한 연주인 아트 블레이키는 영원한 하드밥 메신저였다. 아트 블레이키는 재즈에서 리듬 섹션의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즈는 곧 리듬’임을 만방에 알렸다. 다양한 실험과 변신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계에서 아트 블레이키처럼 오로지 하드밥, 한 가지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집한 뮤지션도 드물다. 1954년 그의 퀸텟이 버드 ... 일평생 하드밥(Hard Bop)만을 고집한 재즈 드럼의 전설 가열찬 두드림으로 재즈의 혼을 전한 연주인 아트 블레이키는 영원한 하드밥 메신저였다. 아트 블레이키는 재즈에서 리듬 섹션의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즈는 곧 리듬’임을 만방에 알렸다. 다양한 실험과 변신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계에서 아트 블레이키처럼 오로지 하드밥, 한 가지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집한 뮤지션도 드물다. 1954년 그의 퀸텟이 버드 랜드 클럽에서 녹음한 라이브 실황 앨범 < A night at birdland > 를 시작으로 1990년 사망 할 때까지 무려 36년 동안 재즈 메신저스의 수장자리를 지켜왔다. 찰리 파커가 들고 나온 비밥이 한층 다양한 리듬 패턴과 악기 편성으로 풍요롭게 발전된 하드 밥은 아트 블레이키의 남다른 뚝심에 힘입어 1950-60년대 화려하게 꽃 필수 있었다. 아트 블레이키에게 스윙은 재즈의 혼이고 그 스윙 리듬을 먹고 자라난 하드밥은 자신과 같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자존심이었다. 비슷한 시기 자웅을 겨루었던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과 함께 아트 블레이키는 자신의 밴드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활동시기 내내 걸출한 하드밥뮤지션들을 배출해왔다. 피아노의 호레이스 실버와 키스 자렛, 트럼펫에 클리포드 브라운, 리 모건, 프레디 허바드, 색소폰에 베니 골슨, 행크 모블리, 웨인 쇼터, 그리고 현재까지도 최고의 재즈 뮤지션으로 각광받는 윈튼 마살리스, 브랜포드 마살리스, 척 맨지오니가 재즈 메신저스를 거쳐갔다. 그의 재즈 메신저스는 그야말로 재즈의 사관학교였던 셈이다. 1919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아트 블레이키는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지역 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 클럽 사장의 압박(?)으로 드럼으로 자신의 파트가 바뀌게 된다. 그가 연주 초년병 시절이던 1930-40년대, 스윙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만인의 주목을 받았던 밴드 리더가 피아니스트나 클라리넷 주자였던 것에 비해 드럼은 비인기 파트 중 하나였다. 1943년 플레처 헨더슨 악단, 1944년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서 스윙 리듬을 연주한 아트는 엘라 핏 제럴드, 사라 본,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와 같은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한다. 그리고 얼마 후 비밥이라는 신종 문법은 그에게 미지의 신대륙처럼 다가온다. 빌리 엑스타인 밴드가 해산되자 아트는 1946년, 17인조 리허설 밴드를 창단한다. 이듬해 밴드는 8인조의 그룹으로 재편되는데, 그의 밴드 이름인 ‘메신저스’는 바로 이때부터 사용된다. 해산과 재편을 거듭한 그의 밴드는 이렇다할 성과 없이 정체됐고 이내 이슬람교를 통해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 했던 아트는 이슬람 문화를 배우기 위해 1년간 아프리카엘 가게 되고 이름도 이슬람식 이름인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로 개명한다. 비밥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고 있던 아트 블레이키에게 전환점이 온건 1950년대 초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를 만나면서였다. 펑키 리듬과 가스펠 음악에 관심있던 호레이스 실버는 평소 아트 블레이키가 찾던 리듬에 강한 연주인이었다. 둘은 이내 의기투합하며 루 도날드슨의 알토 색소폰, 클리포드 블라운의 트럼펫, 컬리 러셀의 베이스가 참여하며 아트 블레이키 첫 정규 퀸텟으로 출범된다. 블루 노트레이블에서 발표된 앨범 < A night at birdland > (1954)는 이내 재즈계의 촉각을 건드렸다. 재즈의 명소 버드랜드에서 녹음된 앨범에선 오랫동안 다져온 아트 블레이키의 역동적인 드럼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몸을 들썩이는 펑키 리듬과 블루스의 기운이 감지되는 호레이스 실버 피아노 연주, 강렬한 울림을 선사하며 다크호스로 떠오른 트럼펫터 클리포드 브라운의 연주는 신선했고 앨범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비밥, 이름 하여 하드 밥의 효시 작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같은 해 아트 블레이키 퀸텟은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의 블루노트 첫 리더작 < Horace Silver & Jazz Messenger > 로 다시 모인다. Doodlin’ 이라는 명연을 담고 있는 지금까지도 호레이스 실버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확고한 입지를 확보해준다. 자신감을 얻은 호레이스 실버는 색소폰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터 케니 도햄을 만나 자신의 밴드를 결성을 논의했고 결국 호레이스는 아트 블레이키를 떠나 자신의 퀸텟을 결성한다. 다만 호레이스가 사용했던 재즈 메신저스란 팀 이름은 아트 블레이키에게 넘겨졌다. 다소의 혼선을 겪은 그는 ‘아트 블레이키 & 재즈 메신저스’ 로 새 출발하며 팀을 재정비한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안타까운 요절로 그를 대신할 18살의 천재 트럼펫터 리 모건과, 테너 색소폰주자 베니 골슨, 바비 티몬스의 피아노, 지미 메리트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2기 퀸텟이 출범한다. 이전 1기 때처럼 창창한 신인 뮤지션들로 구성된 그의 메신저스는 여러 레이블은 전전하던 끝에 1958년, 자신의 첫 출사표를 내준 블루 노트에서 또 한번의 명연을 들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재즈사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기록되는 < Moanin’ > 이다. 피아노와 혼 섹션의 경쾌한 콜 앤 리스펀스가 인상적인 타이틀 곡 ‘Moanin’은 흑인의 원초적 가락인 블루스와 재즈 본연의 리듬인 ‘스윙’이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된 명연이다. 앨범은 퀸텟 멤버인 베니 골슨의 뛰어난 작곡 실력을 선보이는 ‘Are you real’ , 아트 블레이키의 폭발하는 드러밍이 솔로를 만끽할 수 있는 ’Blues march’ 등 하드밥연주의 진수를 담아내고 있다. 아트 블레이키와 그의 밴드는 < Moanin’ > 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모달,프리 재즈의 격변에 아랑곳없이 아트 블레이키는 1960년-70년대 내내 하드밥의 지존으로 군림하며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수많은 신인 스타들을 양산해 낸다. < A night at Tunisia > (1960)에 참여했던 테너 색소폰의 웨인 쇼터, 하드밥트럼펫 연주에 새 전기를 마련한 프레디 허바드가 참여한 < Mosaic >(1961), < Indestructibale > (1964)에서 여전히 기세등등한 연주를 들려줬다. 70-80년대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는 푸르겔 혼의 척 맨지오니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 역시 60년대 후반 재즈 메신저스의 멤버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사안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재즈 메신저스의 열기는 하지만 1970년대 접어들며 재즈 록의 위세에 떠밀려 차츰 식어가고 있었다. 실력 있는 젊은 뮤지션은 재즈 록과 퓨전 재즈 쪽으로 흘러갔고 아트 블레이키는 팀 운영에 난항을 겪는다.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그의 하드밥 열정은 이런 재즈계의 분위기에선 유지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1980년대가 왔고, 존폐위기에 몰린 그의 재즈 메신저스는 다시 한번 세계가 주목한 천재 트럼펫터를 맞이한다. 정통 재즈의 부활을 외치며 신정통주의의 기수로 떠오른 19살의 윈튼 마살리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한살 위인 그의 형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색소폰까지 들어오며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는 1981년 < Straight Ahead > 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마살리스 형제는 1983년까지 재즈 메신저스에 몸담았고, 이듬해 1984년 신예 트럼펫터 테렌스 블랜차드가 참여한 < New York Scene > 으로 이어지며 재즈 메신저스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5년엔 블루 노트 레이블 재건기념 수퍼 콘서트 < A night with Blue Note > 에 참여했고 이후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무대에서 줄기차게 하드밥의 열기를 이어갔다. 죽기 바로 1달 전 개최된 도쿄 돔에서의 라이브 실황을 끝나자마자 아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1990년 10월 16일 하드밥 메신저의 옹골찬 연주 인생은 막을 내린다. 하드밥과 결혼한, 아니 하드밥에 인생을 건 아트 블레이키는 그가 연주했던 드럼 솔로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인물이다. 수많은 분파가 생기고 다양한 실험과 변화가 진행되는 현 재즈계에서 어느 순간 2%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필요한 건 바로 블루스와 스윙이 황금 비율로 만나 만개한 하드밥의 충격요법이다. 시류에 아랑곳없이 하드밥 외고집으로 완성된 아트 블레이키의 유산은 지금도 재즈가 연주되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밴드 : Modern Jazz Quartet (모던 재즈 쿼텟 ,MJQ)
Milt Jackson (비브라폰), John Lewis (피아노), Percy Heath (베이스), Kenny Clarke (드럼) 으로 구성된 재즈 쿼텟 Milt Jackson (비브라폰), John Lewis (피아노), Percy Heath (베이스), Kenny Clarke (드럼) 으로 구성된 재즈 쿼텟
밴드 : Oscar Peterson Trio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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