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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LP+보너스 7인치 싱글 Vinyl / 미니 포스터 삽입 / 게이트폴드 ]
Howard Jones, Madonna, "Weird Al" Yankovic, Wham, REO Speedwagon 노래 외 1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 Music / Legacy | 2019년 08월 0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9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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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시즌 3 드라마음악 (Stranger Things Season 3 OST) [3LP]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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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9년 08월 08일
제조국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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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

Disc1
  • A1 Baba O'Riley (Confidentialmx Remix) - the Who
  • A2 Things Can Only Get Better - Howard Jones
  • A3 Material Girl - Madonna
  • A4 Cold As Ice - Foreigner
  • A5 She's Got You - Patsy Cline
  • B1 R.O.C.K. in the U.S.A. (A Salute to 60's Rock) - John Mellencamp
  • B2 Neutron Dance - the Pointer Sisters
  • B3 Can't Fight This Feeling - Reo Speedwagon
  • B4 Wake Me Up Before You Go-Go - Wham!
  • B5 My Bologna - "Weird Al" Yankovic
Disc2
  • C1 Moving in Stereo - the Cars
  • C2 Never Surrender - Corey Hart
  • C3 Lovergirl - Teena Marie
  • C4 Workin' for a Livin' - Huey Lewis & the News
  • C5 We'll Meet Again - Vera Lynn
Bonus 7" Single
  • D1 Never Ending Story - Gaten Matarazzo and Gabriella Pizzolo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17명)

1980년대는 뉴웨이브와 신스팝 시대였다. 신시사이저와 키보드로 음악을 찍어내던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는 뉴웨이브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한 중흥기였다. 수많은 아티스트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악기들을 팽개치고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를 부여잡고 오선지의 미학을 그려냈다. 1984년 데뷔곡 ‘New song’으로 조용하게 등장한 하워드 존스는 1980년대 전자 음악을 정의하는데 공식처럼 들어맞는 뮤지... 1980년대는 뉴웨이브와 신스팝 시대였다. 신시사이저와 키보드로 음악을 찍어내던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는 뉴웨이브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한 중흥기였다. 수많은 아티스트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악기들을 팽개치고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를 부여잡고 오선지의 미학을 그려냈다. 1984년 데뷔곡 ‘New song’으로 조용하게 등장한 하워드 존스는 1980년대 전자 음악을 정의하는데 공식처럼 들어맞는 뮤지션이자 가수이다. 1955년 영국에서 태어난 하워드 존스(Howard Jones)는 유년 시절부터 건반 악기를 배우면서 음악적 비범함을 과시하면서 왕실 음악 학교를 입학했지만 그에겐 고전 음악보다 대중 음악이 생래적으로 훨씬 진했다. 용감무쌍하게 학교를 중퇴한 그가 선택한 길은 지방의 재즈와 펑크(f) 밴드에서 건반 연주였지만 또 한번의 방랑벽은 그를 영국 국영 TV 방송국 BBC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세션 활동을 했다. 이런 다양한 실전 경험은 이 영국 아티스트의 솔로 활동에 풀뿌리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처 클럽(Culture Club), 유리드믹스(Eurythmics), 네이키드 아이스(Naked Eyes), 휴먼 리그(Human League), 톰슨 트윈스(Thompson Twins) 같은 고향 출신 뮤지션들의 미국내 활동은 실로 엄청났다. 미국인들은 이것을 ‘제2의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라 불렀다. 이 같은 충분 조건 하에서 하워드 존스는 별 어려움 없이 미국 진출이 가능했지만 동료 아티스트들과 차별되는 음악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가 택한 방향은 보다 밝고 은은한 선율과 정감 어리면서 독특한 가사로 어필하는 것이었다. 그의 1집 < Human''s Lib >에서 싱글 ‘What is love?(33위)''와 ’New song(28위)‘이 탑 40에 랭크되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시작했다. ‘Things can only get better(5위)’, ‘Life in one day(19위)’, ‘No one is to blame(4위)’, ‘Like to get to know you well(49위)’처럼 멜로디 훅과 록 감성이 두드러진 싱글들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면서 엄청난 성공을 이끌어 냈다. 3년의 기다림 후에 발표된 < Cross That Line >은 조금 혼란스런 음반이다. 36개월 동안 자신의 음악 노선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컴퓨터 메아리는 여전하지만 간헐적으로 쓰인 어쿠스틱 피아노와의 조화는 어설프게 다가왔다. 그의 마지막 히트곡 ‘Everlasting love(12위)’와 ‘The Prisoner(30위)’도 빛이 바랬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하워드 존스는 1990년대에 들어서 현재까지 아이러니컬하게도 소규모 어쿠스틱 라이브를 즐기고 있다.
노래 : Madonna (마돈나,Madonna Louise Ciccone)
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 새 천년의 화제는 아직도(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인 것 같다. 그들의 베스트 앨범 은 전세계에서 판매 1위를 점령했고, 여기저기서 ‘비틀스 다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해체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과연 ‘팹 포(The Fab Four)’의 힘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어떨까? 2000년 9월 그녀는 새 앨범(베스트가 아니다) 을 발표했다. 이미 그 전에 발매되었던 싱글 ‘Music’은 4주만에 1위를 기록했으며, 그 ‘일렉트로니카’ 앨범도 가뿐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물론 예전의 마돈나로서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10대 여가수들과 보이밴드들이 휘어잡고(?) 있는 현 팝 음악계를 고려한다면 그녀도 상당히 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사실 폴 사이먼이나 유투 같은 거장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3년에 공식 데뷔했으니 18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중들의 주요 관심대상이다. 비틀스에 필적할 만한 여가수를 꼽는다면 단연 마돈나 아닐까? 최소한 그녀만큼 열심히 음악활동을 지속해오는 여가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최근 그녀에게 지가 붙인 ‘The Music Woman’이란 호칭은 아주 적절하다. 그렇다면 ‘마돈나 다시 세우기’는 아닐지라도 ‘마돈나 바로 세우기’(?) 정도는 있어야 할 듯 싶다. 그녀는 우리에게 뭘 선사했을까 그리고 과연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 내지는 의심을 가지고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글을 시작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런데 마돈나와 동시대에 활약하던 그 많던 여가수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 1. Like A Virgin ‘영화계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감독한 데뷔작 (1992)의 첫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8명의 등장인물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카페에 모여 앉아있다. 이들은 모두 다이아몬드 강도를 위해 모인 건달들이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길고도(무려 12분간 이어진다) 지루한(?) 잡담을 하기 시작한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바로 그 화제. 가장 방정맞은 캐릭터인 미스터 핑크가 먼저 운을 띄운다. "‘Like a virgin’은 말이야.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자와 관계를 갖는 여자에 대한 노래야. 곡 전체가 ‘크기’에 관한 은유인 셈이지." 좀더 나이 든 악당 미스터 블루가 이에 대해 반박한다. "그렇지 않아. 그것은 아주 상처받기 쉬운 여자에 관한 거야. 그리곤 정말로 섬세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 이후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마돈나(또는 그녀의 노래)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진다. "난 마돈나가 싫어", "‘True blue’란 곡이 뭐지?", "난 그녀의 초기작이 좋아. ‘Lucky star’, ‘Borderline’ 같은 거 말야. 하지만 ‘Papa don`t preach’ 시절은 별로야." 동시에 음담패설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잡담이 논쟁으로 과열되어 자못 심각해진다. 미스터 핑크의 일관된 주장은 계속된다. "그녀는 존 홈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보내지. 거기서 그녀는 그 크기에 고통을 느끼는 거야. 그걸 바로 ‘처음처럼, 처녀처럼’이라고 한 거야." 그러나 결국 그와 다른 이들의 상반된 견해는 화해되지 못한 채 그 에피소드는 끝난다. 이것은 픽션인 영화의 한 장면이고, 그것도 1992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마돈나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가수와 노래는 분명 실재하는 것이고, 그들의 코멘트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 에피소드는 그녀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마돈나의 중요한 일면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때까지 마돈나의 음악적인 면보다는 섹슈얼리티 측면이 더욱 부각되고 또 소비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가 댄스 팝의 디바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뒷골목의 성적인 농담거리로 소통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가, 라는 문제는 좀더 다양한 또는 심층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듯 하다. 아무튼 세속적인 건달들의 세계를 그리는 데에 마돈나가 쓰였다는 것은 한 번 곰곰이 되새겨 볼만하다. 2. Material Girl 마돈나라는 가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음악보다는 이미지다. 성(性)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그녀에 관한 한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가장 우위에 있다. 대중들이 모두 위의 건달들처럼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녀는 바로 ‘스테레오타입’이 돼버린 것이다. 마돈나라는 한 인물이 섹시한 ‘가상의 이미지’로 전이되어, 우리는 그것에 우선 반응한다. 가령 밥 딜런 하면 포크 음악이 생각나지만 마돈나 하면 도발적인 몸짓이 떠오른다(물론 음악도 생각난다). 일종의 편견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같은 이미지로 인해 어쩌면 뒷전으로 물러난 그녀의 음악적 미덕이 어느 정도 손해봤을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돈나의 성적(性的) 이미지는 지금껏 그녀가 음악계에서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존재이유’가 된다. 또한 그것은 마돈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엔 여러 복잡한 커넥션이 얽혀있다. 그녀의 찬란한 섹슈얼리티는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검은 시대정신(?)과 이에 상응하는 마돈나의 고도의 전략 등이 맞물려서 탄생된 것이다. 그녀가 데뷔했던 1983년 당시 미국은 보수와 극우의 시대였다. 레이건 정부는 보수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물질만능주의라는 변질된 아메리칸 드림만을 장려했다. ‘물질적인 소녀’ 마돈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고향을 등지고 뉴욕에 홀로 올라와 가진 건 ‘몸뚱이’ 하나와 음악적 재능뿐이었던 마돈나에게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절대적인 기회였다. 이미 그녀는 몇 년간 파트 타임 누드모델과 밴드의 백 보컬 등으로 힘겨운 뉴욕 생활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녀에게 어느 정도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성을 거리낌없이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섹슈얼리티로 중무장한 채 내놓은 데뷔앨범 (1983)는 이후 마돈나가 끊임없이 던지는 충격파 중 첫 번째가 되었다. 감각적이고 달콤한 댄스 팝 음악이 훌륭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단연 마돈나의 육감적인 외모였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탄탄한 몸매 중 일부를 스스럼없이 내보였다. 앨범 재킷 뒷면에서도 쉽게 확인되듯, 그녀는 그 충격적이던- 그러나 지금은 일반화되다 못해 촌스런 지경까지 이른- 배꼽티를 입고 흥겹게 ‘Holiday’, ‘Borderline’을 노래했다. 아마도 이 ‘불량한’ 모습은 순진하던 국내의 20·30대 음악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하루아침에 ‘Lucky Star’가 된 그녀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것 외에 마돈나는 ‘보이 토이’(Boy Toy)로 대변되는 그녀만의 패션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배꼽티는 물론 헤어밴드, 검은 고무 팔찌, 보이 토이 벨트 등을 전세계로 유행시키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전파했다. 그 같은 마돈나의 이미지가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던 것은 뮤직비디오 즉, MTV의 영향이었다. 앨범만으로는 그녀의 이미지를 그렇게 효과적으로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돈나의 모습을 우리가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MTV 덕분이다. 마이클 잭슨과 마찬가지로 마돈나도 MTV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마돈나만 이득을 본 건 아니다. MTV는 자신들을 홍보할만한 이미지 메이커, 즉 스타가 필요했고, 마돈나의 섹슈얼리티는 이들의 조건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녀가 선택된 것뿐이고, 그녀 역시 그런 MTV를 자신의 스타성을 배출할 일종의 통로로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때부터 마돈나가 자신은 물론 외부의 것까지 통제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끌어올릴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외부의 관심까지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따라서 그녀의 성공 요인이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라고 한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성적인 매력 하나만 가지고 10여 년을 버틸 만큼 마돈나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상당히 똑똑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각인된 그녀의 성적 이미지는 더욱 위력을 더해간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지만 마돈나 전체의 이미지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된다. 아직 마돈나의 진면목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3. Express Yourself 데뷔작 에서는 ‘Holiday’, ‘Borderline’, ‘Lucky star’가 연이어 히트를 기록하며 상쾌한 출발을 보였다. 이듬해인 1984년 마돈나는 수잔 사이델먼(Susan Seidelman)감독의 영화 (Desperately Seeking Susan)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가수를 넘어서 배우로서, 또한 ‘멀티 플레이어’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이후 그녀는 , 를 포함 16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의 주역을 도맡았던 마돈나에게 이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어서 그녀는 ‘문제의’ 앨범 (1984)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미국차트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했고, 2년이 넘도록 차트에 머무는 등 그녀의 최대성공작이 되었다. 타이틀곡 ‘Like a virgin’은 그녀 최초의 넘버원 송으로 기록되었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 외에 다른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작에서 외면상의 섹스 어필에 머물렀던 마돈나가 한 걸음 나아가 본격적으로 ‘성의 해방’을 외친 것이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여전히 화제성 있는 댄스 가수였지만 마돈나는 여기서부터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지금까지 맛보기로 보여준 그녀의 성적 매력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Like a virgin’이나 ‘Material girl’에서 도발적인 발언은 수줍은 듯한 살랑댐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의 적극적인 표현, 즉 성 해방의 의지천명이다. 이 곡들에 대해 ‘보수파’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또 다른 수식어 ‘혁명전사’의 이미지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녀의 탁월한 ‘이미지 제조’ 능력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Material girl’의 뮤직비디오는 명백히 마릴린 먼로를 훔친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먼로의 이미지만 차용한 것이 아니다. 먼로 향수(鄕愁)에 젖어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마저 먼로에게서 앗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현재까지 지속된다. 마돈나의 위대한 점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녀는 창조자가 아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혹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평범함을 찾아내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은 아주 독창적인 무언가가 된다. 즉, 마돈나만의 스타일이 된다. 이것은 그녀의 음악, 이미지, 기질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돈나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된다. 자신의 첫 순회공연이 있었던 1985년, 그녀는 약간의 위기상황을 맞이한다. 그해 7월, 성인잡지 와 가 무명시절(1977년)에 찍어뒀던 마돈나의 누드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가 오르자 이를 노린 잡지사들의 추악한 폭로사건이었다(이젠 이런 것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돈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같은 달 열린 난민구호 자선공연 에 당당히 출연 ‘Into the groove’, ‘Holiday’를 열창했다. 결국 그 사건은 공짜로 그녀를 홍보해준 것이 되었다. 그녀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으니 말이다. 한편 그녀는 26번째 생일인 8월 16일 배우 숀 펜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마돈나는 세 번째 정규앨범 (1996), 사운드트랙 (1987), 댄스 리믹스 앨범 (1987)를 잇달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대중들은 결코 비슷한 세기의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돈나는 역시 똑똑하다. 반복요법은 쓰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자기표현들을 이어나간다. 4. Justify My Love 1989년은 마돈나에게 있어 가장 논란이 되었던 한 해였다. 그 해 4월 그녀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린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만했다. 음반이 발매되기 직전 마돈나는 펩시콜라와 5백만 달러의 TV 광고 계약을 맺었다. 바로 얼마 후 ‘Like a prayer’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 곡은 가스펠 분위기로 진행되는데, 엽기적이게도 그 뮤직비디오는 마돈나가 흑인성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술 더 떠서 불타는 십자가 앞에서 춤추기까지 했다. 이것은 미국내의 종교적 논란을 넘어서서 전세계 미디어들의 기사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바티칸 교황청에 의해 금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똥은 엉뚱한 곳에 튀었다. 마돈나와 광고계약을 맺은 펩시콜라 측은 그 덕에 소비자들의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결국 펩시는 그 광고를 제대로 방영도 못한 채 접어야 했다. 마돈나가 5백만 달러를 고스란히 챙긴 것은 물론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듬해 발생한다. 마돈나의 베스트 (1990)에 수록된 신곡 ‘Justify my love’가 말썽이었다. 천재 록 뮤지션 레니 크라비츠가 작곡·제작을 맡은 그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돈나의 에로틱한 목소리와 암시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정도만으로 범상치 않은 곡인데 그 뮤직비디오는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에 MTV가 그 곡의 방영을 금지했다(따라서 국내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조처는 그간 마돈나에게 호의적이었던 MTV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마돈나에 의하면, 그러한 모든 행위는 ‘예술적 풍자’일 뿐이다. 최고의 자유국가라 자처하는 미국이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오히려 MTV측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정말 대단하다. 논란을 일으키는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것을 종식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 정도 되면 ‘여성 운동가’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마돈나는 이제 그저 얼굴만 예쁘장한 얼치기 여가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외모만 믿고 성을 상품으로만 팔 줄 알았던 그녀의 데뷔 때 모습을 생각하면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마돈나의 모습 하나 하나가 현재의 수많은 여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굳이 따져보자면, 앨러니스 모리셋, 스파이스 걸스가 직계후배일 듯. 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있다). 그후에도 마돈나의 도발적인 모습은 화보집 와 앨범 (1992)로 이어지지만 1994년 드디어 그녀의 극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소녀적 감성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단계를 지나 성숙한 여인으로. 그리고 종착역인 음악으로. 5. Truth Or Dare 쉬어 가는 의미로 여기서 잠깐 마돈나의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마돈나는 1990년 다큐멘터리 필름 (Madonna: Truth Or Dare / In Bed With Madonna)에 출연했다. MTV에서 많은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던 알렉 커시시언(Alek Keshishian)이 감독한 이 기록영화는 별다른 주관적 개입 없이 마돈나의 일상을 그려냈다. 마돈나의 세계 순회공연 장면과 무대 뒤의 사생활 장면이 여과 없이 포착되어있다. 전자와 후자를 각각 컬러와 흑백 톤, 다른 터치로 표현해낸 것이 신선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나 ‘셀프 카메라’ 정도일텐데, 적어도 그런 것보다는 훨씬 진실하게 만들어졌다. 일단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캐나다 토론토 공연장이다. 공연 전부터 경찰들이 몰려와서 매니저들에게 반 협박을 한다. 마돈나가 손을 하복부 아래로 내리는 이상한(?) 행위를 하면 체포하겠다고. 이 소식을 접한 그녀는 당황한다. 퍼포먼스를 수정하느니 아예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쇼 타임이 임박하고 약간 불안해진 마돈나는 댄서들과 기도를 한다. "오늘은 파쇼적인 토론토의 마지막날입니다. 저에게 이것을 이겨낼 힘을 주세요." 댄서들과 마돈나는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을 합창하며 무대에 올라선다. 그녀는 두 명의 남자 무희가 호위하고 있는 빨간 침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 곡을 아주 느리게 부르며(여기의 ‘Like a virgin’ 버전은 최고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래는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그녀는 ‘문제의’ 손동작을 감행한다. 마돈나는 승리했다. 다음은 그녀의 고향인 디트로이트 공연장이다. 그녀는 공연 전 언제나 댄서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노래할 목소리를 허락해주세요. 내 인생의 진실을 보여줄 힘을 주세요." 이 날은 공연 중에 그녀의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다.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무대에 나온 아버지를 향해 마돈나는 절까지 하며 2만 여명의 관객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공연 후 그녀는 내뱉는다.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두 달이나 이걸 해야하다니. 너무 피곤해." 이런 장면도 있다. 스페인 공연 전 침울해진 마돈나는 매니저에게 푸념한다. "내겐 공연 뿐이야. 지겨워." 그런 그녀에게 매니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묻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 안토니오 반데라스." 결국 스페인 공연에서 안토니오를 만나지만 그는 마돈나를 거절한다. 1주일간 그를 만난다는 기대에 차 있었던 그녀는 욕실로 뛰쳐나간다. "욕실에 가서 내 슬픔을 식혀야겠어. 안토니오 나쁜 자식. 날 버렸어." 그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공연 도중 일련의 공연이 취소된다. 교황청의 요청으로 금지된 것이다. 이에 마돈나는 담담히 기자회견을 한다. "나는 예술가고 내 공연은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내 공연은 빛과 어둠 같은 양면성을 보여준다. 판단은 청중이 한다. 이것이 언론 표현 사고의 자유다." 이 다큐멘터리에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가 지금껏 마돈나에게 품고 있던 편견들을 해소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성의 상품화’라든지 ‘섹스의 화신’ 따위의 말들은 어느새 잊혀진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마돈나를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관객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프로 가수이며, 동료 댄서들의 따뜻한 어머니다. 그녀의 팬이든 팬이 아니든 이 영화를 보는 누구나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이다(비디오 출시되어 있는 국내판은 아쉽게도 30여분이 잘려나간 반쪽 짜리다. 하지만 그녀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6. Who`s That Girl 마돈나는 재능 있는 가수다, 라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티스트다, 라는 말에는 다소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히 단언하건대 그녀는 진정한 아티스트다. 그것은 지난 18년간을 지켜온 그녀의 음반이 증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음반을 내고, 무대에 서서 팬들 앞에서 노래하는 마돈나의 모습이 증명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있듯 마돈나는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서있다. 마돈나가 변신에 가장 능한 연예인으로 꼽히는 데는 그 이미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음악 역시 변신을 거듭해왔다. 1977년 마돈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향인 미시건을 떠나 뉴욕에 올라왔다. 그녀의 원래 꿈은 발레리나였다. 발레수업을 받던 1979년 그녀는 디스코 가수 패트릭 헤르난데즈(Patrick Hernadez)의 백 보컬 겸 댄서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팝 댄스 그룹 브랙퍼스트 클럽(Breakfast Club)의 보컬을 거쳐, 1983년 꿈에 그리던 솔로앨범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녀의 초기작들의 음악이 디스코나 댄스 팝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Holiday’, ‘Material girl’, ‘Like a virgin’, ‘Papa don`t preach’로 대표되는 발랄한 댄스 경향은 , 시기까지 계속된다. 그 댄스 넘버들에서 그녀의 모습은 때론 수줍은 듯, 때론 대담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아직은 앳된 소녀적 감성이 더 많이 풍긴다. 1989년부터 마돈나의 음악적 성향이 서서히 바뀌어 간다. 그해 발표된 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마돈나의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좀더 풍부해졌다고 할까. 댄스 지향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가스펠나 소울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록적인 접근이 두드러졌다. 똑같이 흥겹지만 거기엔 록 비트와 연주가 강화되었다. ‘Keep it together’ 같은 곡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외적으로는 앞서 말한 뮤직비디오 ‘Like a prayer’에서 보듯, 요부의 이미지로 자신을 한껏 드러냈다. 이제 예전의 마돈나와는 작별한 것이다. 더 이상 수줍음은 사라지고 충만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말하자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그녀는 음악적으로나 애티튜드(attitude)로나 아티스트로서의 본격적인 시동을 건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출연한 영화 에 쓰인 곡과 그로부터 영감 받은 몇 곡들을 모은 (1990)를 통해 뮤지컬 스타일의 또 다른 창법을 들려줬다. 1994년 작 와 이듬해 발표된 에서 마돈나는 완연한 여인의 향기를 내뿜었다. 멜로디는 한결 풍부해졌고, 곡의 진행은 부드럽고 여유 있어졌다. ‘Take a bow’ 같은 곡에서의 노래실력은 어느 발라드 가수에도 뒤지지 않는다. 마치 ‘이래도 내가 아직 율동만 하는 창부로 보이니?’ 라고 항변하는 듯 하다. 또한 1996년에는 뮤지컬영화 (Evita)에 출연하여 ‘진지한’ 역할을 소화해냈다. 비록 ‘율동 없는 그녀는 볼 게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등 혹평도 있었지만, 뛰어난 가창력과 영혼이 깃들은 열연으로 그녀에 대한 일반 인식을 바꿔놓았다. ‘섹스 중독증 환자’에서 ‘성녀’(聖女) 그리고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물론 그녀가 나이든 탓도 있겠지만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부단히 투쟁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의 투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알을 깨지 못한 것인가? 7. Music 마돈나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클럽 문화 속에서 가수의 꿈을 키워왔다. 물론 디스코, 댄스 클럽이었다. 그 자양분은 그녀의 초기 앨범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98년, 여전히 클럽 문화는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클럽의 분위기나 음악은 많이 바뀌었다. 클럽에는 약물이 넘쳐흐르고, 이에 맞춰 어지러운 테크노, 일렉트로니카가 꿈틀댄다. ‘클럽 키드’ 마돈나는 바로 이것을 취했다. 어쩌면 그녀는 70년대 말의 클럽 시절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의 클럽 시절을 회고하면서 현재의 클럽 심장부로 입성한 것이다. 의미심장한 귀환이다. 그해 발표된 는 마돈나의 그와 같은 음악적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 윌리엄 오비트(William Orbit)가 영입된 이 앨범의 화두는 클럽 문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매개물인 약물과 테크노 음악이다(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서로를 보충해주는 일종의 상호보완물이다). 앨범 발표 후 마돈나는 패션잡지 (Elle)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의 약물관련성을 언급했다. "‘Ray of light’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적 모호함과 마약으로 인한 환각 체험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의 체험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앨범은 정통 테크노 뮤지션이 아닌 테크노 앨범으로선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대다수의 록 잡지에서 호평을 얻었고, 그때까지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그래미상도 4개나 획득하며 그간 그래미에 맺혔던 한을 풀었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것을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마돈나의 미덕이 빛을 발한다. 확실히 마돈나의 그 ‘옛날 음악’은 시원한 매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2000년에 발표된 이다. 이 음반을 녹음할 당시 마돈나는 임신 중이었다. 나이도 벌써 우리나이로 마흔 셋이나 되었다. 국내로 따지면 아줌마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줌마 중의 아줌마인 것이다. 국내가 아닌 미국이라도 썩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게다가 팝 음악계도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나빠져 있었다. ‘아이들 음악’이 음악판을 싹쓸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의 노장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돈나가 분연히 일어섰다.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서. 그리곤 아주 심플한 제목을 달고 앨범을 냈다. 그 단순한 제목은 그러나 지금껏 마돈나가 걸어온 모든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음악 외적인 것에 치중했더라도 자신의 중심은 늘 음악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돈나가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낸 그 음반은 전작 와 비슷한 음악성향을 담고 있다. 차이라면, 일렉트로니카 성향과 함께 좀더 ‘애시드 록’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작이 차갑고 직선적이었다면 은 차갑지만 왠지 부드럽고 곡선적이다. 그리고 좀더 복고적이 되었다. ‘Music’의 가사 중 ‘음악은 사람들 모두를 모이게 한다’라는 부분은 가장 상투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문구다. 비틀스의 ‘Come together’를 연상시키는 그 가사는 가장 진실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음악생활 20년만에 마돈나가 한 말이라 더욱 그렇다. 8. Something To Remember 마돈나는 1958년 6월 15일 미국의 미시건 주 베이 시티에서 태어났다. 1983년에 데뷔했으며, 2001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현역가수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이슈를 만들어내는 힘 또한 유효하다. 지난 9월 의 발매와 함께 록 잡지 은 그녀를 커버인물로 다루었다. 이로써 그녀는 10번째로 지 커버를 장식했으며, 이는 전무(前無)한 기록이다. 성(城)에서 올린 그녀의 결혼식은 또 어떠했는가. 그녀가 썼던 다이아몬드 박힌 머리장식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것이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바로 폴 매카트니의 딸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언론이나 대중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실 마돈나가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마돈나 데뷔 당시 라이벌은 신디 로퍼였다. 그때는 마돈나보다는 신디 로퍼에 대한 평가가 훨씬 좋았고(그녀는 그래미 신인상도 차지했다), 신디 로퍼가 더 장수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마돈나의 절대적 승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마돈나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의 결과다. 음악과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 셋의 완벽한 조화가 바로 마돈나 파워의 본질이다. 그녀는 현재 10년 연하의 남편 가이 리치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다. ‘영국의 타란티노’라고 불리는 영화감독 가이 리치와는 1999년부터 사귀었으며, 지난 12월 22일 스코틀랜드의 스키노 성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이제 그녀는 두 아이를 가진 자비로운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사랑스런 아내이다. 요즘 그녀의 관심은 자식들 밖에 없는 것 같다. 마돈나는 딸에 대해 "그 애는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애는 나예요. 나."라며 더없이 흐뭇해한다. 그녀의 생애 중에서 처음으로 안정을 찾은 듯 보인다.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이번엔 어머니란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Material Girl, 섹스 중독증 환자, 혁명전사, 헐리우드 디바, 테크노 퀸, 클럽 키드, 살아있는 록의 전설. 지금까지 그녀에게 따라 붙었던 수식어들이다. 이중 진정한 마돈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허상일 수도,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 바로 삶이고, 삶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그녀에게 다름 아닌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음악인’ 마돈나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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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 조지 마이클이라는 걸출한 팝 스타를 배출한 팝 듀오 왬(Wham!)은 80년대 팝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그룹이다. 소울 음악과 결합된 즐겁고 흥겨운 팝 댄스를 들려줬던 이들은 80년대 특유의 ‘가벼움’을 관통함으로써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수많은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 9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친 보이밴드의 효시였다. 잘 생긴 외모와 수준급 가창력, 거기에 경쾌한 댄스 팝과 매혹적인 발라드 등 현 보이밴드의 전형이랄 수 있는 특질을 이미 80년대 초반에 확립해,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 이너비전 >(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 탑 오브 더 팝스 >(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 Fantastic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 Make It Big >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 Faith >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 Son Of Albert >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노래 : REO Speedwagon (알이오 스피드웨건)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꾸준함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끈기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 소박하고도 당연한 불변의 진리는 대중 음악계에서도 변함 없이 적용된다. 상업적인 성공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미쳐 초지일관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인 동시에 자신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0년 이상의 무명 생활을 그루터기처럼 꿋꿋하게 감내해 낸 알이오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은 밴드 결성 12년만인 1980년 아홉 번째 정규 앨범 < High Infidelity >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한 대기만성형인 성인 취향의 팝록 그룹이다. 팝음악 계에서는 변방으로 꼽히는 미국 일리노이즈 주에서 건반 주자 닐 도티(Neal Doughty)와 드러머 알란 그랫처(Alan Gratzer)라는 두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개리 리치라스(Gary Richrath/기타), 그레그 필빈(Gregg Philbin/베이스), 마이크 머피(Mike Murphy/보컬)가 의기투합한 팀이 1968년에 결성된 알이오 스피드왜건이다. 팀의 목소리는 곧 전직 포크 싱어였던 케빈 크로닌(Kevin Cronin)으로 바통터치 되어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들의 성공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당시 이 5인조 밴드는 그 타개책으로 ’질보다 양’의 물량 공세 전략을 택했다. 이들은 1971년부터 거의 매년 발표한 앨범과 이 음반들을 지원 사격하기 위해 1년에 250일 이상 강행군된 공연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고자 했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인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고난도의 연주 테크닉과 파워를 바탕으로 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쾌락의 정점을 보여준 디스코, 그리고 그 정반대의 대칭점에 위치한 소프트 록에 근거한 발라드, 그 어느 쪽에도 명쾌하게 포함되지 못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1980년 < High Infidelity >를 발판으로 삼아 메이저리거로 올라서기 전까지 ’Ridin’ the storm out(94위)’, ’Roll with the changes(58위)’, ’Time for me to fly(77위)’ 같은 극히 미미한 히트 싱글만을 배출한 마이너리거였다. 이 무명 밴드는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라디오와 싱글에 초점을 맞춘 감각적인 멜로디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국내 주류 광고에도 사용되었던 불후의 넘버원 발라드 ’Keep on loving you’를 시발점으로 ’Take it on the run(5위)’, ’Don’t let him go(24위)’, 그리고 우리나라 팝팬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In your letter(20위)’가 수록된 < High Infidelity >는 현재까지 900만장 이상이 팔려 다이아몬드 레코드(천만장 이상)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1982년에 발표한 차기 작품 < Good Trouble >에서는 싱글 ’Keep the fire burnin’’을 7위까지 올려놓았지만 이러한 성공적인 결과와는 달리 음악 평론가들은 이들의 노래가 팬들의 유행 감각에 쉽게 좌우되는 상업 음악의 정점이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Keep on loving you’와 함께 자신들의 발라드 대표곡으로 투 톱을 이루는 ’Can’t fight this feeling(1985년 3주간 1위)’과 ’One lonely night(19위)’, ’Live every moment(34위)’로 다시 한번 인기몰이에 성공한 알이오 스피드왜건은 결성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간 록트랙 ’That ain’t love(16위)’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In my dreams(19위)’ 등으로 1980년대 말까지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이후 음악 토양이 완벽하게 바뀐 1990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싱글 차트에서는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이들은 같은 성향의 동료 밴드들인 스틱스(Styx), 포리너(Foreigner), 저니(Journey),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 등과 함께 전 미국을 순회하는 공연에 동참하고 있다.
노래 : John Mellencamp (존 멜렌캠프,Johnny Cougar / John Cougar / John Cougar Mellenc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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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구미에서도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정은 비슷하다. 국내에서는 과거 라이선스 시절 후의 앨범 출발은 앞선 두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집 음반은 소개되었지만 후는 그나마 그것도 없었다(하기야 히트 곡이 거의 없긴 했지만). 설사 판을 찍어 봤자 잘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우리 정서가 원하는 선율이 없었다. 따라서 후의 곡이 팝의 일상성을 획득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는 달리 그들이 평자를 비롯한 록관계자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편애라 해도 별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1965년 데뷔작 < 후가 나의 세대를 노래한다(The Who Sings My Generation) >에서부터 1975년 < 후 바이 넘버스(The Who By Numbers) >에까지 그 사이에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들이 수작으로 거론될 정도다. 특히 1969년 < 토미(Tommy) >와 1971년작인 < 후의 다음(Who’s Next) >은 예외 없이 비평가 선정 명반으로 뽑히고 있다. 후가 록역사에서 전설의 자리를 틀어쥐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사실이 바로 비평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며 음악 팬들이 기억해야 할 상식이기도 하다. 첫째 후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과격한 청춘문화 이른바 모드(Mod)와 함께 등장했고 그것을 강도 높게 반영했다. 모드는 본래 패션 운동으로 저임금의 단조롭고 지루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영국 중산층 이하의 젊은 노동자들이 TV와 고급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서 유혹적으로 선전되는 값비싼 것들을 향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독특한 복장에 의한 욕구불만의 발산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었다. 오토바이와 로큰롤을 가까이 한 ‘로커(rocker)’와 함께 청춘문화를 주도했으나(비틀스는 로커에 속한다) 모드는 하층민적인 로커와 달리 잘 입고, 정규 직업을 유지하고, ‘스쿠터’를 타며 약물을 즐기는 도시적 패턴을 취했다. 후의 멤버들은 1964년 프리랜서 피트 미든(Pete Meadon)의 권유에 따라 ‘하이 넘버스’(The High Numbers)라는 이름 아래 모드의 세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한 모드 정서는 분노와 청춘 세대의 공격성이었고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었다. 후의 기둥인 기타 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영국의 모드 운동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운동이었고 히피 무브먼트보다 규모가 컸다. 그것은 군대, 강력하고 거친 틴에이저들의 군대였다. 모드가 되기 위해서는 짧은 머리에 스마트한 복장, 좋은 구두와 셔츠를 살 돈이 있어야 했고 미친놈처럼 춤출 수 있어야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있어야 하고 램프로 뒤덮인 스쿠터를 가져야 했다.” 후로 그룹명을 바꾼 그들은 1965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현실을 신랄히 비난하는 모드족의 성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나의 세대(My generation)’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억누르려 한다. 단지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몹시 추워 보이는 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늙기 전에 죽고 싶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Hope I die before I get old). 이 한마디가 초창기 후의 이미지 전부를 말해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록역사상 최초로 과격한 어조를 동원해 청춘과 기성 세대와의 분리를 획책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 충격적 선언은 한편으로 ‘늙기 전에 죽지 못한’ 그들을 막판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데뷔시 그들이 펼친 모드 운동은 그들을 단숨에 살찌울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역시 모드 세대의 찬가인 ‘어쨌든 어찌해서든 어디에서든(Anyway anyhow anywhere)’도 타운센드에 따르면 ‘반 중년, 반 상층 계급 그리고 젊어서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의미의 노래’였다. ‘애들이 옳다(The kids are alright)’ ‘난 설명할 수 없어(I can’t explain)’과 함께 이러한 노래들은 어느 노래보다 먼저 ‘청춘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록의 규범을 확립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연주나 무대 제스처에 있어서도 록의 규범을 제시했다. 이것이 후가 갖는 두 번째 의미이다. 공연장에서 후는 영락없는 네 명의 ‘폭도’들이었다.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은 부수어대듯 드럼을 쳤고(후 사운드의 상징이다) 피트 타운센드는 펄쩍펄쩍 뛰면서 풍차를 돌리듯 팔을 휘두르며 기타 스트링을 가로질렀으며 싱어 로저 달트리(Roger Daltry)는 마음껏 외치며 청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베이스 주자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성 세대나 엘리트의 품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멤버들의 외모도 ‘불량 서클’ 아이들을 무색케했다. 피트 타운센드는 한 마리 독수리였고 키스 문은 무정부주의자 같았으며 로저 달트리는 테러리스트의 인상 그것이었다. 언제나 비(非)스페셜리스트였던 존 엔트위슬도 잘해 봤자 폭도의 ‘보급계’같았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도무지 폴 매카트니의 세련된 매너와 믹 재거의 섹스 어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록의 ‘하위문화’적 특질과 정확히 맞물리는 요소였다. 그들은 록이었기에 도리어 ‘특혜’를 받았고 그에 따른 모범생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또 록의 슬로건인 ‘제한된 공간에서의 파괴’를 증명한 존재들이었다. 무심결에 야간업소 공연에서 낮은 천장으로 인해 기타 목을 부러뜨린 것에 착안, 그들은 이후 콘서트 때마다 악기를 부수어 버리는 파괴 연출을 일상화했다. 실상 영화제작자로 나중 후의 관리자가 된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크리스 스탬프(Chris Stamp)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행위는 모드와 더불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의 멤버들은 공연 뒤 머문 호텔마다 그 시설물을 부수는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음악이 조용할 리 없다. 후의 사운드는 소음으로 정의되며 애초부터 발라드와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앰프 사용을 극대화했다. 일례로 밥 딜런과 함께 공연한 와이트 섬(Isle of Wight) 페스티벌에서는 그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사운드 시스템을 동원해 사상 최고의 출력을 내뿜었다. 그때 스피커 중 하나는 청중들에게 “15야드 안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딱지가 붙어 있었다. 1976년 5월에 있었던 미국 찰튼 애드레틱 풋볼 클럽 콘서트는 록 그룹에 의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무려 1백 20데시벨!)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들은 소음 발산을 통해 하드 록 생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드 록 또는 헤비메탈 계보도의 맨 위에는 후가 있다. 역시 메탈의 산파 역할을 한 지미 헨드릭스도 타운센드가 나서서 공식무대 데뷔를 주선했고 지미의 죽음과 실연 때문에 좌절한 에릭 클랩튼의 재기를 도와준 사람도 타운센드였다. 그의 그룹 후는 또 하나의 공적인 록과 팝의 역사에 깊이 새겼다. 그들을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록사상 최초로 ‘록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1969년에 만들어 낸 < 토미 >는 타운센드의 탁월한 음악 감각과 정신적 동경이 합쳐진 것이었고 모험적 시도를 넘어 음악 예술의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작품이었다. 그것은 무대와 음반 세계에 갇혀진 록의 ‘비상’을 뜻하는 신기원이기도 했다. 이제 록은 못할 것이 없어졌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오페라를 록이 꾸려 냈다는 것은 록의 무한한 잠재력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60년대의 록이 사회성 뿐 아니라 ‘예술성’에도 적극 손짓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토미 >는 실로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밴 모리슨의 < 천체 주간(Astral Weeks) >과 함께 록이 더 이상 순간의 흥분이 아닌, 영구 불변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뽐냈다. 토미는 충격으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말할 줄도 모르는 아이가 된다. 마음속의 장벽 때문에 자아를 찾지 못하는 토미는 핀볼의 마법사가 되어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호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마침내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성공한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인 < 토미 >의 메시지는 ‘독립’과 ‘자유’였다. 거창한 듯 하지만 결국은 후가 추구해 온 모드와 무대 위의 폭발이라는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타운센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10대의 반란이라는 순간에 지속되는 ‘대결’과 ‘도피’ 사이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또한 로큰롤의 주제이기도 하다. 10대 때는 자신을 결코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결하든 도피하든, 클래시(Clash)의 말로 하면 머물든 나아가든 간에(Should I stay or should I go) 틴에이저 시절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당신이 홀로 서 있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 토미 >가 의미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오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록의 찬란한 영광으로 남아있다. 오페라 실연으로, 앨범으로 또 1975년 켄 러셀(Ken Russel)의 영화로, 1979년 웨스트 엔드 연극으로, 이어서 199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다채롭게 해석되면서 하나의 전설로 상승했지만 최후의 영예는 역시 후의 록이었다. < 뉴욕 타임스 >지는 < 토미 >를 두고 “수미상관은 물론 거창한 어휘인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순환 테마를 가지고 있다”면서 “우수한 곡들로 가득차 있고 우아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긴 형태 록(long form rock)의 경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사실 < 토미 >를 최초의 록오페라라고 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미니이긴 하지만 타운센드가 1967년 < 후 셀 아웃(Who Sell Out) >의 ‘라엘(Rael)’로 시도한 바 있고 킹크스(Kinks) 그룹의 송사이클 걸작 앨범 < 아더(Arthur) >도 1969년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록 뮤지컬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도 1969년이라는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최초’라는 타이틀마저 < 토미 >에게 안겨 주었다. < 토미 >의 영광은 엄청난 부담으로 타운센드를 짓누르지만 그는 언제나 보여 온 ‘시대적 추세’와 ‘록 본연의 폭발’의 절충적 감각을 또 한차례 유감없이 발휘해 1972년 걸작 앨범 < 후의 다음 >을 발표, 위세 행진을 계속한다. 1970년대 중후반의 대대적인 공연 성공은 한층 후의 무게를 늘려 놓았다. 롤링 스톤스와 함께 ‘록의 공룡’으로 펑크 진영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이러한 대중적 성공과 ‘젊어서 죽기를 거부한’ 자세는 1978년 < 후 아 유(Who Are You) >의 도도함과 거만으로 나타나기도 했다(이 점에서 록의 가장 큰 적은 나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외부의 펑크 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드러머 키스 문의 돌연사였다. 그의 죽음은 ‘존 보냄의 사망과 레드 제플린의 관계’처럼 그룹의 총체적 위기로 다가왔다. 후의 멤버들은 해산을 선언한 제플린과는 달리 전 페이시스(Faces) 드러머 케니 존스(Kenny Jones)를 영입하여 중단 없는 전진을 다짐하지만 활력의 소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3년 해산하고 만다. 후의 멤버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 1989년 캐나다 토론토 공연차 다시 모이지만 그때 후의 이름은 어느덧 역사가 되어 있었다. 온갖 모순과 교묘한 절충 속에서도 후는 끊임없이 내적 긴장, 진지한 야망, 모험욕을 통해 1960년대 록이 확립한 반란, 파괴 그리고 모험의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후를 해부하는 것은 실로 록의 호흡과 함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베이비 붐 세대의 가슴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록의 부활이 기대되는 근래 우리 대중 음악의 변화 조짐을 감안할 때 ‘록의 위대한 개척자’인 후의 재조명이 한층 요구된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1960년대 서구 록의 뜨거운 피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밴드 : Pointer Sisters (포인터 시스터즈)
우리나라에서는 ‘Waiting for a girl like you’, ‘I want to know what love is’, ‘I don''t want to live without you’와 같은 발라드 넘버들이 유명하기 때문에 국내의 음악 팬들은 포리너(Foreigner)를 발라드 전문 밴드로 한정짓기 쉽지만 원래 이들은 시원시원하고 파워 넘치는 루 그램(Lou Gramm)의 보컬과 호방하고 드라이브감 넘치는 ... 우리나라에서는 ‘Waiting for a girl like you’, ‘I want to know what love is’, ‘I don''t want to live without you’와 같은 발라드 넘버들이 유명하기 때문에 국내의 음악 팬들은 포리너(Foreigner)를 발라드 전문 밴드로 한정짓기 쉽지만 원래 이들은 시원시원하고 파워 넘치는 루 그램(Lou Gramm)의 보컬과 호방하고 드라이브감 넘치는 믹 존스(Mick Jones)의 기타에 의해 주도되는 하드록 밴드다. 1976년, 영국의 하드록 밴드 스푸키 투스(Spooky Tooth)에서 뛰쳐나온 기타리스트 믹 존스(영국 펑크 밴드 클래쉬의 믹 존스와는 동명이인)와 프로그레시브 그룹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주자 이안 맥도날드(Ian McDonald)가 의기투합해 미국인과 영국인의 비율을 3 : 3으로 조율한 6인조 연합 밴드가 훠리너였고 믹 존스와 뉴욕 토박이 루 그램이 작곡 파트너가 되어 대부분의 노래들을 생산했다. ‘Feels like the first time(4위)’, ‘Cold as ice(6위)’, ‘Long long way from home(20위)’ 등의 하드록 넘버가 활약한 1977년의 데뷔 앨범 < Foreigner >는 당시 팝음악의 폭풍이던 펑크와 디스코에 대한 반대 급부로 등장해 높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동시에 호의적인 평가도 거머쥐었다. 처녀작보다 좀 더 화끈한 하드록에 가까웠던 두 번째 작품 < Double Vision >에서는 ‘Double Vision(2위)’, ‘Hot Blooded(3위)’, ‘Blue morning, Blue day(15위)’가 FM 라디오를 장악하면서 전작을 상회하는 성공을 낚았다. 상대적으로 허약한 결과를 거둔 3집 < Head Games >로 1970년대를 마감한 포리너는 1981년 역작 < 4 >를 공개했다. 이들의 4번째 음반이며, 6인조에서 4인조로 멤버를 감축하고 발표한 첫 음반인 동시에 밴드명과 같은 발음으로 시작한다는 3가지 의미를 내포한 < 4 >에서는 신시사이저 연주가 곡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그 유명한 ‘Waiting for a girl like you’와 색소폰 연주를 시도한 ‘Urgent(4위)’, 그리고 ‘Juke box hero(26위)’ 등이 수록되었는데 특히 ‘Waiting for a girl like you’는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의 ‘Physical’의 그림자 밑에서 무려 10주 동안 싱글 차트 2위를 고수한 불운한 노래로 기록되었다. 이 레코드부터 초기의 직선적인 하드록은 많이 거세되고 팝적인 감각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오른 음반들이 가스펠 코러스와 루 그램의 소울풀한 음색으로 넘버원의 한을 풀어 준 ‘I want to know what love is’와 ‘That was yesterday(12위)’가 들어 있는 < Agent Provocateur >와 ‘Say you will(6위)’, ‘I don''t want to live without you(5위)’가 히트 싱글을 기록한 < Inside Information >이다. < Inside Information >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포리너의 마지막 LP가 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 발표한 < Unusual Heat >와 < Mr. Moonlight >은 얼터너티브 그런지와 모던록, 힙합으로 대표되는 흑인 음악의 기세에 뭍혀버렸다. 포리너같은 성인 취향의 아레나록 밴드들의 등장과 성공은 시대성이 크게 좌우했다. 이 6인조 밴드가 1집을 공개한 1977년, 전 세계가 경기 침체와 극심한 불경기로 신음하고 있을 때 대중 음악은 두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 기성 세대와 기존의 가치를 전면 부정한 분노의 펑크와 쾌락과 리듬으로 그 고통을 잊기 위한 디스코였다. 이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펑크와 디스코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중 음악에 충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당시를 호흡했어도 모두가 펑크와 디스코를 들으면서 흥분하거나 몸을 흔든 것은 아니었다. 이 음악들을 좋아했던 사람들 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포리너를 비롯한 저니(Journey), 하트(Heart), 보스톤(Boston), REO 스피드왜건(REO Speedwagon), 후반기의 스틱스(Styx)나 캔사스(Kansas)같은 성인 취향의 록밴드는 그 틈새를 파고들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뉴웨이브 음악이 팝계를 평정했던 1980년대 초중반까지 대중 음악을 지배했다. 하지만 디스코가 사라지고 펑크가 지하로 몸을 숨긴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포리너를 포함한 아레나록 밴드들은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했다. 그들은 펑크와 디스코에 대한 카운터 펀치 역할을 했지만 그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상대가 없어지자 이들은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했고 또한 그들보다 월등했던 성공의 단맛에 도취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그들로서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적과 경쟁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음악의 지향점이 달랐던 펑크, 디스코, 그리고 성인 취향의 아레나록은 공생 관계였다.
밴드 : Huey Lewis And The News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휴이 루이스 & 더 뉴스(Huey Lewis & The News)가 1980년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음악 팬들이 좋아할 보편적인 록 음악의 부재였다. 하얗게 변색된 흑인음악의 득세, 뉴웨이브와 팝으로 점철된 시기에 미국인들이 살갑게 느끼는 친숙하고 대중친화적인 로큰롤로 북미 지역을 평정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그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본국의 명성만큼 전성기를 누리지 못했다. 아니, 전성기가 거... 휴이 루이스 & 더 뉴스(Huey Lewis & The News)가 1980년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음악 팬들이 좋아할 보편적인 록 음악의 부재였다. 하얗게 변색된 흑인음악의 득세, 뉴웨이브와 팝으로 점철된 시기에 미국인들이 살갑게 느끼는 친숙하고 대중친화적인 로큰롤로 북미 지역을 평정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그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본국의 명성만큼 전성기를 누리지 못했다. 아니, 전성기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초반, 휴이 루이스와 키보디스트 숀 하퍼(Sean Hopper)가 결성한 컨트리 록 밴드 클로버(Clover)가 시초인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1980년에 정식으로 음반을 발표할 때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신들의 음악적 프레임을 구상했다. 1970년대 중반 영국에 머물면서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닉 로우(Nick Lowe) 등과 음악 작업에 열중한 휴이 루이스는 1979년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실질적인 밑그림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를 조직했지만 음악 팬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다. 1980년에 기타리스트 크리스 헤이스(Chris Hayse)가 가입하면서 밴드 이름을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로 개명하면서 인기그룹으로 성장하는 가능성의 씨앗을 발아했다. 이들은 1982년에 발표한 소포모어 앨범 < Picture This >에서 커트된 ‘Do you believe in love?(7위)’와 ‘Hope you love me like you say you do(36위)’, ‘Workin’ for a livin’(41위)’이 싱글 차트에 랭크되면서 대중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의 남편이자 명 프로듀서인 존 ‘머트’ 랭(John ’Mutt’ Lange)이 작곡한 ‘Do you believe in love?’는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차트 데뷔곡. 다음 해에 공개한 세 번째 음반 < Sports >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미국 서민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가장 친근한 밴드로 급부상했다. 명 작곡 콤비 니키 친(Nicky Chinn)과 마이크 채프만(Mike Chapman)이 작곡해 컨트리 록 그룹 엑사일(Exile)에게 준 ‘Heart & soul’을 리메이크 해 8위에 랭크시켰으며 그 밖에 ‘I want a new drug((6위)’, ‘The heart of rock & roll(6위)’, ‘If this is it(6위)’, ‘Walking on a thin line(18위)’까지 모두 5곡이 싱글 차트에서 비상(飛上)했다. 이들의 노래가 이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뮤직비디오였다. 세련되진 못했지만 미국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부담 없고 코믹한 뮤직비디오는 서민들의 대리만족을 채워주며 쾌감의 폭을 전달한 것이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인기 비결이었다(뮤직비디오를 통해 카메라에 익숙해진 휴이 루이스는 나중에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1984년,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가 부른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주제가가 ‘I want a new drug’을 표절했다고 시끄러웠지만 이 사건은 법정 밖에서 조용히 해결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700만장 이상이 팔린 이 음반의 성공으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1985년에 흥행대박을 터뜨린 < 백 투 더 퓨처 >의 사운드트랙에서 ‘Power of love(1위)’와 ‘Back in time’을 취입해 자신들의 인기가 거품이 아님을 시위했고 휴이 루이스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도 출연했다(마이클 제이 폭스가 학교에서 오디션을 볼 때 커다란 확성기로 “그만”을 외치던 바로 그 선생님!!). 1986년에 공개한 4집 < Fore! >에서도 무려 다섯 곡을 탑 텐 안에 올려놓으며 자신들이 미국 최고의 그룹임을 당당하게 말했다. ‘Stuck with you’와 휴이 루이스의 친구인 브루스 혼스비(Bruce Hornsby)가 작곡해 준 ‘Jacob’s ladder’가 정상을 차지했고 ‘Hip to be square(3위)’, ‘I know what I like(9위)’, ‘Doing it all for my baby(6위)’ 모두 미국인들로부터 재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1988년도 앨범 < Small World >에서는 첫 싱글 ‘Perfect world’만이 3위에 오르는 상대적 실패를 경험했다. 물오른 팝 메탈에 밀려난 < Small World >부터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포물선을 그리며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휴이 루이스는 같은 해에 탐 행크스가 주연한 < 빅 >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도 < Hard At Play >와 < Four Chords & Several Years Ago >를 발표했지만 1980년대와 전혀 다른 음악적 토양을 배양하고 있는 1990년대 음악 씬에서 휴이 루이스 & 더 뉴스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토속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는 룻츠 록이 부각되던 1990년대 중반에도 미국의 정서를 담은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음악은 10년 전처럼 ‘발표하는 대로 히트’라는 공식에서 한참 벗어났다. 그것은 가사 때문이었다. 삐딱함을 정도(正道)로 받아들인 1990년대의 신세대들에게 1980년대 보수적인 가치관을 담았던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노랫말은 일종의 ‘건전 가요’였고 유치한 ‘도덕 교과서’였다. 1993년에는 존경받는 흑인 아티스트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의 트리뷰트 앨범 < People Get Ready >에 ‘It’s alright’으로 참여했으며 휴이 루이스는 1990년대에 들어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 쇼트 컷츠 >와 기네스 팰트로우와 함께 출연한 < 듀엣츠 > 같은 영화에 출연해 멀티 연예인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밴드 : The Cars (더 카스 (뉴웨이브 밴드))
독일에 있는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가도를 질주한 미국 보스톤 출신의 5인조 뉴웨이브 팝록 밴드 카스(Cars)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었던 미국의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장르를 북미 지역에서도 만발시킨 1세대 그룹이다. 몇 안 되는 ‘미국산(産) 뉴 웨이브’라는 호칭이 최적이다. 아메리칸 펑크의 원류가 되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개라... 독일에 있는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인기 가도를 질주한 미국 보스톤 출신의 5인조 뉴웨이브 팝록 밴드 카스(Cars)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었던 미국의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장르를 북미 지역에서도 만발시킨 1세대 그룹이다. 몇 안 되는 ‘미국산(産) 뉴 웨이브’라는 호칭이 최적이다. 아메리칸 펑크의 원류가 되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개라지 록(Garage rock) 뿐만 아니라 소음에서도 음원의 미학을 발견했던 펑크의 대부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재즈에서 가지를 친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한 록시 뮤직(Roxy Music) 같은 선배들에 영향 받은 카스는 이처럼 덜 대중 친화적인 음악 장르들을 팝 사운드에 버무려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커다란 상업적인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인기를 좇아 영국 스트레이트 펑크의 정신과 이념을 거세한 채 형식만을 차용, 팝과 단순 교배한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랜 지기(知己)인 릭 오케이섹(Ric Ocasek/보컬, 기타)과 벤자민 오어(Benjamin Orr/보컬, 베이스)가 그레그 호크스(Greg Hawkes/키보드)와 함께 1970년대 중반에 결성한 캡 앤 스윙(Cap ’N Swing)이 새로운 멤버 엘리엇 이스튼(Elliot Easton/리드 기타)과 데이브 로빈슨(Dave Robinson/드럼)을 규합해 카스(Cars)로 1976년 이름을 바꾸면서 분위기를 쇄신했다. 2년 간 공력을 다진 이들은 음악 트렌드가 펑크에서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로 바통 터치된 1978년에 자신들의 이름을 타이틀로 한 데뷔 앨범 < Cars >를 공개하면서 화려한 시동을 걸었다. 초기 뉴 웨이브의 명곡으로 자리한 ‘Just what I needed(27위)’, ‘Good times roll(41위)’, 그리고 1990년대 중반 국내의 음료 광고에 사용된 ‘My best friend’s girl(35위)’이 수록된 처녀작 발표 이후 1981년까지 매년 1장씩 모두 3장의 정규 음반을 공개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데뷔앨범은 차트18위에 그쳤지만 2년 가까이(139주) 빌보드 앨범차트를 머물면서 강한 구매욕을 자극,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70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했다. ‘Let’s go(14위)’, ‘It’s all I can do(41위)’, ‘Touch and go(37위)’, ‘Shake it up(4위)’, ‘Since you’re gone(41위)’ 같은 넘버들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면서 1984년에 대표작 < Heartbeat City >를 내놓았다. 이 5집 앨범은 그들을 견고한 스타 밴드의 고지로 올려놓았다. 초기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You might think(7위)’의 뮤직비디오는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격찬 받았으며, ‘Magic(12위)’, ‘Hello again(20위)’, ‘Why can’t I have you(33위)’, 그리고 지금까지도 국내의 라디오를 지배하고 있는 발라드 ‘Drive(3위-R.E.M.과 인큐버스의 노래와는 다른 곡)’ 등의 히트 싱글들이 무더기로 배출되었다. 기타 위주의 뉴 웨이브 팝이었던 전작들보다 신시사이저를 두텁게 사용해 선율이 확충되고 한층 매끄러워진 것이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앨범은 300만장이나 팔려나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릭 오케이섹과 벤자민 오어의 독립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보스톤의 자동차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1985년에 나온 베스트 모음집에 수록된 새로운 싱글 ‘Tonight she comes(7위)’와 ‘I’m not the one(32위)’이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기세는 눈에 띄게 기울어갔다. 1986년에는 릭 오케이섹의 솔로 싱글곡 ‘Emotion in motion(15위)’과 벤자민 오어의 솔로 히트곡 ‘Stay the night(24위)’이 나란히 발표되어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둘 모두 홀로서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7년 ‘You are the girl(17위)’, ‘Strap me in(85위)’, ‘Coming up you(74위)’가 수록된 < Door To Door >를 마지막으로 카스는 1988년 공식적인 자동분해 과정에 들어갔다. 1990년대 들어서 릭 오케이섹은 위저(Weezer), 배드 릴리전(Bad Religion), 노 다웃(No Doubt), 홀(Hole), 워너디스(Wannadies)를 비롯해 영화 < 스피드 >와 < 크로우 2 > 등의 음반을 제작하면서 뮤지션보다는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다졌다. 하지만 벤자민 오어는 불행히도 2000년 10월 3일 투병 중인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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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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