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 처능, 가혹한 불교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다
조선 초인 태종 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불교 탄압 정책은 조선 중기로 오면서 더욱 심해진다. 세조의 돈독한 신심과 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노력이 있기는 했지만, 세조의 죽음 이후 불교를 탄압하려는 시도는 더욱 격렬해진다. 당시 유생들의 상소에 실려 있는 표현 그대로 불교의 뿌리를 뽑기 위해 온갖 행태가 자행된다. 그 결과 연산군·중종 대에 이르면 그나마 남아 있던 선종과 교종 두 종파마저 모두 없어지고, 조선 초기 이래로 실시해오던 승과고시 제도마저 철폐된다. 이로써 승려가 될 수 있는 길은 차단되고, 승려의 신분을 인정하는 제도마저 모두 폐지되는 등 노골적인 폐불 정책이 시행된다. 당시 이미 조선의 승려들은 도성 출입을 금지당하는 등 심한 신분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더 이상 불교의 소생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문정왕후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문정왕후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하고 승과와 도첩제를 실시하여 선종과 교종 양쪽에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과감한 불교 중흥 정책을 전개한다. 또한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으며,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마음으로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 인근인 정릉으로 이장한다. 문정왕후의 노력 덕분에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었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실시한 승과를 통해 대두한 인물들이 청허당 휴정과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등이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격렬히 반발한다.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승과를 폐지하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문정왕후 덕분에 잠시나마 부흥의 빛을 보였던 불교계의 고승들은 유생들의 탄압에 다시금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얼마 뒤 발생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이들은 승병이 되어 나라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선 덕분에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나아졌지만, 위정자 및 유생들의 부당한 핍박과 시달림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주요 산성을 쌓고 지키는 일은 모두 승려에게 맡겼고, 관가와 유생들에게 종이와 기름, 신발 등을 만들어 바치게 했으며, 그 밖에 잡역도 부가되었다. 특히 현종은 즉위(1659년)와 동시에 양민이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했고, 이미 비구나 비구니가 된 사람들도 환속할 것을 명령했다. 또 서울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폐하고, 거기에 모셨던 여러 선왕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렸으며, 사찰 소속의 노비와 밭은 모두 몰수했다.
이와 같은 가혹한 불교 탄압 속에서 정면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던 승려가 바로 백곡 처능이다. 백곡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그에 항의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조선왕조 척불 정책과 배불 사상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 탄원 형식의 상소문이 바로 [간폐석교소]이다. [간폐석교소]는 조선시대 모든 상소문 중 가장 분량이 많은 것으로 현종의 불교 박해를 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은 실로 우둔하여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엿보지 못하겠습니다.”
: 백곡이 [간폐석교소]를 집필한 동기
백곡 처능은 조선시대 가혹했던 배불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기를 촉구했던 유일한 승려로 기록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유문집인 《대각등계집》과 《백곡선사탑명》, 이 탑명을 쓴 최석정의 《명곡집》 등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의 행장을 일부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적 재능이 무척 뛰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걸출한 선배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칭찬을 받았음은 물론, 효종 역시 세자로 있을 때 백곡의 글재주가 높은 경지에 있음을 극찬할 정도로 시에 대한 재주가 탁월했다.
백곡은 많은 사례와 경전 등을 근거로 하여 8,150자에 달하는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지어 당시 가혹했던 배불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줄 것을 간청했다. 백곡은 이 글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는 근거가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조목조목 대응했다. 그러면 백곡이 이와 같은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제출한 동기는 무엇일까?
“삼가 승정원에서 반포한 의결 사항을 보고 엎드려 성지를 받잡건대, 승려를 모두 말살하기 위해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도 역시 없애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옵니다. 신은 실로 우둔하여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엿보지 못하겠습니다.”
그가 절박한 마음으로 붓을 들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 계기가 있다. 우선 현종이 즉위하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비구나 비구니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켜 그것을 어기는 자는 벌을 받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듬해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안에 있던 자수원과 인수원의 혁파를 명령했다는 것도 직접 계기가 되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자수원에 봉안된 여러 성인의 위패를 땅에 묻도록 했다는 사실과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까지도 철폐하여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불교를 무너뜨리려 했던 정황도 백곡을 자극했다. 이와 같은 당시 불교계의 절박한 현실 문제가 상소의 직접 동기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도첩제와 승과제의 폐지 등 가혹한 척불시책에 대한 부당함이 백곡으로 하여금 [간폐석교소]를 쓰게 하였다.
[간폐석교소]의 내용과 의의
1)“무릇 천하에는 불교가 없는 나라가 없다(梵天下未有無佛之國)”
백곡의 [간폐석교소]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불교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분위기가 살기를 드리울 정도로 경색되어 있던 시기에 유학자들의 맹목적인 불교 비판에 맞서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했기 때문이다. 백곡은 먼저 부처님의 탄생과 열반 그리고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널리 알려지게 된 역사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고 나서 본론에 들어가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배척하는 근거를 6개항으로 간결하게 정리한다.
[간폐석교소]의 핵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폐불의 이유로 추정되는 6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이고 둘째는 불교 무용론에 대한 반박이다. 전자나 후자 모두 6가지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폐불의 이유로 거론되는 것에 대한 백곡의 반박이 핵심을 이룬다. 즉 백곡은 ‘불교가 인도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윤회를 주장한다는 점’‘농사를 짓지 않으며 재물을 소모한다’는 등 여섯 가지 이유 때문에 왕이 불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펴고 있음에 주목하고, 많은 사례와 경전 등에 근거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부당함을 폭넓은 사례와 해박한 지식을 예로 들어 논리정연하게 역설하여 위정자들의 시정을 촉구한다.
대체로 이들 여섯 가지 이유는 불교의 철학적 교리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백곡은 숭불과 억불에 대한 중국의 사례를 들어 불교를 배척하는 위정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가 하면,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 불교를 중시했던 삼국과 고려의 정책이 국가 통치에 유해하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그뿐 아니라 태조 이래 조선의 역대 왕이 실질적으로는 불교를 숭상하였음을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당시 국왕 현종에게 거듭 불교의 무해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이로움을 강력히 천명한다. 특히 풍수지리설을 믿던 당시에 땅의 기운이 약해질 때 산천의 중요한 곳에 사탑을 세워 약해진 기운을 보완한다는 도선의 ‘비보사탑설’을 호소력 있게 강조함으로써 거듭 불교의 이점을 강조한다. 또한 상소의 궁극적 목적인 자수원과 인수원을 복구하고 봉은사와 봉선사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폐불훼석廢佛毁釋(불교와 관련된 것들을 훼손하는 행위)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2)“정명도程明道는 불상을 배척하지 않았고, 주희朱熹는 불서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불교가 국가적으로 무용하다는 비판은 비교적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되고 그 세력이 팽창하면서,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한 배불론자들은 불교 무용론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 이유도 다양하지만, 주된 이유는 불교의 윤리관과 풍속 등이 중국 전통의 유교와는 너무 다르다는 점 때문이었다.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을 뿐 아니라, 특히 성리학이 주도했던 조선 초기와 중기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는 배불론이 상당히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백곡은 불교 무용론에 대한 반론을 전체적으로는 크게 여섯 항목으로 제기한다. 첫째 불교를 믿은 군신의 사례와 그 과보, 둘째 폐불과 관련된 군신의 사례와 그 과보, 셋째 유학자들의 척불과 숭불 사례, 넷째 무불설에 대한 반박, 다섯째 불교 유해론에 대한 반박,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숭불 사례가 그것이다. 또 중국의 유학자들이 불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불서佛書 읽기를 좋아했다는 예를 들어 보이기도 한다.
“유교를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만 한 현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명도程明道는 불상을 배척하지 않았고, 주희朱熹는 불서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불교를 공격하는 유학자들의 논리 핵심에는 여전히 중화중심주의와 유교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보편적이고 상대적인 가치관을 인정하지 못했던 배불론자들의 시각이 편협하고 포용성이 부족한 반면에, 호불론자들은 불교적인 보편적이고 상대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컨대 백곡은 배불론자들의 논리 전개에 대응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전개하며, 궁극적으로는 유교적 시각에서 벗어나 포용 정책을 펼 것을 현종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이처럼 [간폐석교소]에서 백곡은 유교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유교의 융합과 조화를 시도함으로써 배불 논리에 대응하고자 했다. 백곡의 이 같은 주장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필연적이면서도 과감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간폐석교소], 그 후
백곡이 상소를 올린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후 몇 가지 조치와 추이 과정을 통해 짐작해볼 뿐이다. 서울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과 인수원의 양원은 이미 철폐되었지만, 봉은사와 봉선사는 끝까지 존속되었다. 또 현종이 만년에 봉국사奉國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믿은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현종 15년에 백곡이 남한산성도총섭에 임명되었다는 점 등은 백곡 처능의 상소가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백곡 처능(1617∼1680)
백곡은 광해군 8년인 1616년 인도 스님에게 구슬 2개를 받아 삼키는 태몽 속에 잉태되어, 이듬해인 5월 3일 아버지 전씨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탄생했다. 이후 12세에 벽암 각성의 제자인 의현에게 출가하고, 17세부터 20세까지는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에게 승려의 신분으로 유학과 시문을 수학한다. 이는 백곡이 유학과 역사 및 시문에 능한 배경이 되는데, 이로 인해 문장가로서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다.
이후 20여 년간 사법 스승인 벽암 각성을 모시며, 전란 과정에서 파괴된 사찰과 민중을 추스르는 실천행을 한다. 그러다 45세가 되던 1661년 현종과 유교 대신들이 불교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목숨을 내놓고 불교 탄압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간폐석교소〉를 올린다. 이로 인해 폐사의 위기에 직면했던 봉은사와 봉선사가 존치될 수 있게 된다. 50세에 백곡은 정부로부터 남한산성 승통僧統에 제수되며, 54세에는 남한산성 도총섭에 오른다. 그러나 중생구제를 더 중시한 백곡은 오래지 않아 사임하고, 교화와 수행에 매진한다. 1680년 64세의 고령으로 모악산 금산사에서 5일간의 대법회를 주관하고, 6월 20일 가벼운 병증이 나타나 7월 1일 금산사에서 평온한 입적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