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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 베스트 앨범 (Luciano Pavarotti - The Greatest H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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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루치아노 파바로티 베스트 앨범 (Luciano Pavarotti - The Greatest Hits)

다큐멘터리 영화 <파바로티> 개봉 기념 발매!

[ 3CD 박스 세트 / 디지팩 ]
Barry White, James Brown, Sting, Leo Nucci, Mirella Freni 노래 외 3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Decca Record | 2019년 07월 2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44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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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 베스트 앨범 (Luciano Pavarotti - The Greatest Hit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7월 26일
시간, 무게, 크기 70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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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36명)

작곡자와 음반 제작자로 그리고 가수로 충만한 재기를 과시한 흑인 송라이터 배리 화이트(Barry White)는 소울과 펑크(funk)를 토대로 삼아 그 위에 1970년대 흑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했던 디스코 감수성을 혼합한 ‘소울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팝 역사의 거장이다. 조금은 부담스런 그의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고집한 노랫말, 그리고 초기 디스... 작곡자와 음반 제작자로 그리고 가수로 충만한 재기를 과시한 흑인 송라이터 배리 화이트(Barry White)는 소울과 펑크(funk)를 토대로 삼아 그 위에 1970년대 흑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했던 디스코 감수성을 혼합한 ‘소울 디스코’ 스타일의 음악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팝 역사의 거장이다. 조금은 부담스런 그의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고집한 노랫말, 그리고 초기 디스코 음악을 트레이드마크로, 혼란스러웠던 1970년대를 부드럽고 흥겨우며 감상적인 풍의 정반대 해법으로 풀어냈다. 컨트리 싱어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지역인 텍사스주의 갈베스톤(Galveston)에서 1944년 9월 12일에 태어난 배리 화이트는 10대 때부터 ’디 업프론츠(The Upfronts)’라는 그룹에서 프로 음악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더 버서타일스(The Versatiles)’란 그룹에 잠시동안 몸담았으며 그가 밴드를 떠난 후 그룹은 이름을 ’더 피프스 디멘션(The Fifth Dimension)’으로 개명해 엄청난 성공의 신화를 일궈 냈다. 이 거구의 흑인 뮤지션은 애초부터 가수보다는 작곡자나 제작자 같은 음반 실무자가 되길 원해 1960년대에는 다른 가수들을 위해 곡을 만들거나 프로듀싱을 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의 표현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바로 그 일환으로 1969년에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를 창설했고 자신의 음반 제작 프로덕션을 설립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이 지나자 배리 화이트는 솔로 가수 활동과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의 리더 역할을 병행하면서 7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두 곡의 차트 넘버원 싱글과 10여 곡의 톱40 히트곡들을 쏟아 냈다. 1974년에 배리 화이트가 솔로로서 1위를 정복한 ’Can’t get enough of your love, Baby’는 1992년 백인 여가수 테일러 데인(Taylor Dayne)이 리메이크 해 소울 디스코의 고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나온 싱글 ’Love’s theme’는 연주 음악으로는 드물게 차트 1위를 밟았다. 시원한 여름의 해변가를 연상시키는 이 트랙은 1980년대 초반 임국희가 진행했던 팝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30대 이상의 국내 팝 팬들에게는 매우 귀에 익은 멜로디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의 2001년 새 음반에 수록된 ’Pacific coast party’의 도입부에도 이 연주곡의 첫 부분이 샘플링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내에서 꾸준한 애청된 ’You’re the first, the last, my everything(2위)’과 ’Walking in the rain(with the one I love/14위)’를 비롯해 ’I’ll do for you anything, you want to me(40위)’, ’It may be winter outside(but in my heart it’s spring/83위)’, ’I’ve got so much to give(32위)’, ’Baby we better try to get it(92위)’, ’What am I gonna do with you(9위)’, ’Let the music play(32위)’, ’I’m gonna love you just little more baby(3위)’, ’It’s ecstasy when you lay down next to me(4위)’, ’Your sweetness is my weakness(60위)’, ’I belong to you(31위)’, 그리고 1997년 영국의 백인 R&B 여가수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eld)가 커버해 신세대들에게도 알려진 ’Never never gonna give up(7위)’ 같은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를 무차별 융단 폭격했다. 비록 싱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1984년 영화 < 고스트버스터스 >의 주제곡을 불러 유명한 기타리스트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와 공동으로 작곡한 ’You see the trouble with me’와 ’What am I gonna with you’, ’Baby we better try to get it’, ’Let the music play’, ’Don’t make me wait too long’ 등은 1970년대 후반을 달구었던 디스코의 전형을 이미 1970년대 초 중반에 제시했던 곡들이다. 그러나 배리 화이트의 음악을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비트 위주의 댄스뮤직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의 음악적인 뿌리는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나 아이작 헤이스(Isaac Hayes)처럼 흑인들의 자긍심을 외치는 진한 소울과 펑크(funk)였다. 그는 흑인을 위해 곡을 썼고, 흑인 형제자매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부드러운 음악연대’를 추구했다. 디스코가 무대 저편으로 사라진 1980년대 이후에도 음반제작을 지속했지만 전성기만큼의 성과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1989년에는 흑인음악의 대부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구상한 회심의 음반 < Back On The Block >에 참여, ’Secret garden’을 불러 다시 한번 그 전염성 강한 저음 보컬을 들려주었다. 1993년 댄스 그룹 ’쿼드 시티 디제이스(Quad City DJ’s)’의 유일한 히트곡 ’C’mon N’ Ride(2위)’를 공동으로 작곡해 여전한 작곡능력을 과시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본인도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흑인음악의 힙합진영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음악적 자양분이라 할 펑크와 소울을 빛낸 인물 가운데 배리 화이트를 빼놓을 수 없다고 판단, 갑작스레 재조명의 분위기가 조성된 때문이었다.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taying Power >는 평단의 갈채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받으면서 제42회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흑인 남성 보컬 부문과 정통 리듬 앤 블루스 보컬 부문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발표한 그의 명곡들은 < 파리의 늑대 인간 >이나 < 머니 턱스 > 같은 영화에 자주 삽입되면서 신세대들에게도 그의 음악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미 본토에서의 이러한 호평과는 달리 국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전성기인 1970년대 당시 백인음악보다 흑인음악을 푸대접하는(먹통음악!)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음악적으로는 곡 길이가 6분 이상의 긴 노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맑은 느낌의 팝 컨트리나 성인 취향의 팝 보컬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70년대에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아무래도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흑인음악에 정서적 유착이 강한 신세대들의 귀에는 덜 이질적인 탓에 근래 들어선 재래의 홀대도 차츰 가시고있다. 얼마 전 화장품 광고에 그의 히트곡 ’Never never gonna give you up’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이 그 증좌일 것이다. 배리 화이트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백인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쫓지 않고 지금까지 인종적 뿌리를 지켜 왔다. 21세기인 현재까지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면서 흑인음악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을 표현하고있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레오 누치는 1942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1967년 스폴레토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이를 계기로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로 데뷔하였다. 1973년에는 베르첼리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같은 해 처음 리골레토로 호평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400회 이상의 공연을 통해 현존 최고의 리골레토로 극찬을 받아왔다. 또한 2004년 7월에는 조수미와 더불어 세종문화회관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하기도 하였다. 레오 누치는 1942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1967년 스폴레토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이를 계기로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로 데뷔하였다. 1973년에는 베르첼리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같은 해 처음 리골레토로 호평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400회 이상의 공연을 통해 현존 최고의 리골레토로 극찬을 받아왔다. 또한 2004년 7월에는 조수미와 더불어 세종문화회관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하기도 하였다.
노래 : Mirella Freni (미렐라 프레니)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Luciano Pavarotti (루치아노 파바로티 )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 세계적으로 루 리드만큼 불우시대를 오랫동안 겪은 록가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된 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이 없었다면 팝 음악팬들이라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계기로 갑작스레 루 리드의 음악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히트한 우리 영화 < 접속 >에 ’창백한 푸른 눈동자(Pale blue eyes)’라는 곡이 깔리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 곡은 그가 이끌던 1960년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부른 노래다. 발표된 지 자그마치 30년만에 비로소 팬들의 귀에 ‘접속’된 셈이다. 솔로로 독립해 내놓은 곡 ’완벽한 날’도 출반 시점은 1972년. 잔잔한 반주나 힘을 빼고 읊조리듯 부르는 것도 매력적이고 특히 곡의 무드가 만점이다. 그러면 왜 과거 팝팬들은 이 곡의 진가를 몰랐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봐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각 시대의 정서 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편차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인기곡과 1990년대 히트곡은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다. 올드 팝팬들은 밝고 약간은 건조한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루 리드의 음악은 다분히 어둡고 습한 분위기였다. 느낌부터 너무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늘 따라붙었던 수식어가 이른바 ‘아방가르드(전위)’ 였다. 이 말은 역으로 다수의 음악대중들과는 크게 유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루 리드의 음악은 역사적 기록과 록평론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 그가 그룹과 솔로 시절에 발표한 1960, 1970년대 앨범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장은 어김없이 록역사의 명반 리스트에 오른다. 록음악 잡지 < 롤링스톤 >은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를 비롯한 뉴욕 펑커들, 카스, 크리시 하인드, 뉴 오더, U2, REM 그리고 소닉 유스 등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점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들’이라고 했다. 모두가 근래의 모던 록에 심취한 팬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는 ‘모던 록의 시조’로까지 추앙된다. 강산이 두세번 바뀌고서야 인정받을 때까지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깨지고 나서는 레코드사의 외면으로 음반조차 내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평소 루 리드의 팬이었다는 데이비드 보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앨범이 ’완벽한 날’이 수록된 걸작 < 트랜스포머(Transformer) >. ’완벽한 날’은 지난해 엘튼 존, 보노 등 30명의 록스타들이 부른 새 노래로 재탄생했다. 음반의 수익금은 세계의 영세가정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이 곡을 동료들과 취입하던 날 루 리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마 ‘완벽한 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서 좋은 음악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lsara)는 로저, 브라이언과 함께 새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그의 이름을 머큐리(Mercury)로, 밴드의 이름을 퀸(Queen)으로 바꾸었다. 세 명의 베이스주자가 퀸을 거쳐 갔고, 1971년 2월, 존 디콘(John Deacon)은 퀸의 네 번째 멤버가 되었다. 1972년에는 트라이던트(Trident)와 계약을 맺었고, 낮은 수당만을 받으며 스튜디오가 비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녹음한 첫 앨범을 1973년 7월 발매하였다. 퀸의 첫 메이저 투어는 모트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서포트 밴드 자격으로 1973년 11월 영국 리즈(Leeds)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4년 3월, 재킷의 인쇄 문제를 수정하라는 밴드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예정보다 늦게 2집 < Queen II >가 발매되었다. 1974년 3월, 밴드는 자신들이 주인공인 첫 번째 영국 투어에 착수했고, 4월에는 ‘모트 더 후플’의 서포트 밴드로서 첫 미국 투어에 들어갔다. 5월에 간염으로 쓰러졌던 브라이언이 휴식과 녹음을 병행하며 참여해 만들어낸 세번째 앨범 < Sheer Heart Attack >이 발매된 것은 그 해 11월이었다. 앨범은 유럽과 북미 양쪽에서 엄청나게 히트했고, 사람들은 퀸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싱글로 발표된 ‘Killer Queen’은 영국차트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듬해에는 미국 팝 차트에도 진출, 12위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1975년 1월, 퀸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국 투어에 나서, 1일2회 공연해도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4월에는 최초로 일본 방문길에 올랐으며, 공항에는 3천명의 팬이 몰려 나와 열광적으로 그들을 환영해 밴드를 놀라게 했다. 6월에는 새 앨범 < A Night At The Opera >의 작업에 착수, 불공정한 트라이던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존 레이드(John Reid)와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사람들은 신곡 ‘Bohemian rhapsody’는 너무 길어 히트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곡에 매료된 디제이 케니 에버릿(Kenny Everett)이 프레디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홍보용 싱글을 이틀 동안 열네 번 방송에 내보냈다. 곡은 어마어마한 히트를 했고, 퀸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곡의 홍보를 위한 뮤직비디오는, 이후 뮤직비디오 대유행의 효시로 간주되었다. 싱글은 9주 동안이나 영국차트 1위에 머물렀다. < A Night At The Opera >의 제작비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고, 1975년 11월에 발매가 되자 큰 히트를 기록하여 퀸에게 최초의 플래티넘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표지에는 프레디가 첫 앨범을 위해 만들었던 퀸 로고를 재 작업하여 사용하였다. 이 앨범에선 미국 차트 9위에 오른 ‘Bohemian Rhapsody’에 이어 존 디콘이 쓴 ‘You’re my best friend’(영국 7위, 미국 16위)가 히트했고 국내에서는 두 곡 외에도 프레디 머큐리가 쓴 아름다운 발라드 ‘Love of my life’가 폭발적으로 애청되었으며 브라이언 메이 작품인 ‘39’도 줄기차게 전파를 탔다. ‘Love of my life’가 퀸의 한국 최고 레퍼토리가 된 데는 ‘Bohemian rhapsody’가 공륜으로부터 허무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받아 라이선스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덕(?)도 작용했다. 1976년 1월, 프레디는 ‘Bohemian Rhapsody’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상을 ‘Killer Queen’에 이어 다시 한번 수상했다. 또한 밴드는 세 번째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3월에 끝내고 향일(向日), 다시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당시 넉 장의 퀸 앨범 모두가 영국차트 20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일본 투어를 끝내고 호주로 가서 < Down Under(호주) >라는 제목의 순회공연을 벌였다. 다음 앨범인 < A Day At The Races >의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녹음을 중단하고 짧은 영국 투어에 착수했다. 1976년 9월18일, 퀸은 팬들을 향한 감사의 뜻으로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파크에서 대규모 무료공연을 열었다. 청중은 15만-20만 명 사이로 추산되어 현재까지도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공연의 최다 관객동원기록으로 남아 있다. 밴드는 9월부터 새 앨범작업에 열성적으로 임해, < A Day At The Races >는 12월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홍보를 위해서 특별 경마가 열리기도 하였다. 발매되기 닷새 전에 < A Day At The Races >의 예약주문은 50만장을 넘어섰고, 그것은 당시 EMI 음반사 초유의 쾌거였다. 이 앨범의 싱글은 ‘Somebody to love’(영국 2위, 미국 13위), ‘Tie your mother down’(영국 31위, 미국 49위) 그리고 첫 EP의 리드트랙이었던 ‘An old-fashioned lover boy’(영국 17위) 등이었지만 국내에서는 ‘Bo rap’을 연상시키는 ‘Millionaire waltz’를 비롯해 ‘You take my breath away’, ‘You and I’도 애청되었다. 1977년 초반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투어를 했다. 그 즈음에 로저는 자비로 솔로 싱글을 녹음하기로 결심하고 ‘I wanna testify’를 8월에 발매하였다. 그해 5월에는 대규모 유럽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날아갔다. 런던 얼스 코트(Earls Court)에서의 콘서트에는 초대형 왕관모양의 조명이 등장했다. 폭 54피트, 높이 26피트, 무게 5천 파운드로 제작비는 무려 5만 파운드였다. 그해 10월, 팬클럽 멤버들은 처음으로 퀸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We are the champions’의 촬영이 끝난 후, 출연해준 팬들을 위해 즉흥 공연을 벌였다. 같은 달인 10월, ’Bohemian Rhapsody’로 52년부터 77년까지 발표된 영국 싱글 가운데 최우수 싱글에 주어지는 브리태니어 상(Britannia Award)을 ‘A whiter shade of pale’의 프로콜 하럼(Procol Harum)과 공동 수상했다. 그달 28일 ‘We are the champions’가 수록된 신보 < News Of The World >가 나왔다. 로저는 한 과학소설 삽화가의 작품을 앨범 표지로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았고, 작가는 흔쾌히 승낙하고 수정까지 해주었다. 재정상태가 좋아져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해서 그해의 두 번째 투어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12주 동안 프랑스 차트 1위를 점령한 ‘We are the champions’에 이어 ‘We will rock you’가 1위 행진을 시작했다. ‘We are the champions’는 영국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We will rock you’와 함께 더블 A면 싱글로 발표되어 밴드 최초의 플래티넘(100만장판매) 영광을 안으며 4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에서 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해 앨범 < News Of The World >에서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s’ 외에 ‘Spread your wings’ ‘All dead all dead’ ‘Who needs you’ ‘My melancholy blues’ 등 다수 트랙이 음악다방을 완전히 잠식할 정도였다. 1978년 2월, 퀸은 그들 스스로의 매니지먼트 체계를 갖추기로 결정하고 존 레이드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퀸의 기준에서 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유럽 투어가 1978년 4월에, 이번에도 스톡홀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7월에는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는데, 처음으로 영국이 아닌 스위스 몬트뢰(Montreux)와 프랑스에서 작업하였다. 신곡 ‘Bicycle race’의 홍보를 위해 밴드는 윔블던 스타디움(Wimbledon Stadium)을 빌렸고, 50명의 나체 여성이 자전거 경주를 벌였다. 싱글의 오리지널 커버에는 경주에 나온 한 여성의 뒷모습이 나와 있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사람들의 항의로 말미암아 팬티를 그려 넣어야 했다. 그해 11월 신보 < Jazz >를 발매했다(영국 2위). 재킷에는 나체 자전거경주 포스터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반대에 부딪혀서, 신청서를 대신 넣어 우편으로 포스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밴드는 앨범 발매 축하파티에 EMI와 일렉트라(Electra) 두 음반회사의 중역들을 동시에 초대했는데, 양측은 서로 세를 과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파티는 진흙탕 레슬러, 난장이, 반라의 웨이트레스가 등장하는 기괴한 스타일이었다. 이 앨범에선 더블 A 싱글 ‘Bicycle race/ Fat bottomed girls’(영국 11위, 미국 24위)와 지금도 라디오전파를 수놓는 ‘Don’t stop me’(영국 9위, 미국 86위)가 크게 히트했다. 12월 북미 투어가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간 퀸은 이듬해 첫 달부터 유럽 투어에 들어갔고 이를 끝마치자마자 라이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부틀렉이 유통되는 등 대중적인 수요 때문에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79년 6월 마침내 첫 라이브 앨범 < Live Killers >가 발매되었다. 일본 투어와 영국 투어를 끝낸 그들은 그 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밤 캄보디아를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를 하였다. 1980년 6월 퀸 최초로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 The Game >이 발매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로커빌리 싱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가 최초로 빌보드 정상을 점령했다. 이어 펑키한 리듬이 특징적인 두 번째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도 빌보드 차트의 팝을 위시해 소울, 디스코, 록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하며 앨범의 세계적 폭풍을 이끌었다. 12월에는 영화 사운드트랙인 < Flash Gordon >이 발매되었고, 그 해까지 퀸이 전세계에 판매한 앨범 수는 4천 5백만 장으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는 남미 투어를 감행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8일 동안 다섯 차례나 거대한 스타디움 공연을 매진시켰고, 이어 브라질에서는 하룻밤에 13만 명, 이틀 동안 25만 명이 넘는 유료관객을 동원했다. 이것은 단독밴드로서는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투어 내내 아르헨티나 차트에는 퀸의 모든 앨범이 10위권에 들어 있었다. 퀸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남미에서의 스타디움 투어를 처음으로 해내자, 이후 딴 밴드들의 남미 순회공연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한편, 로저는 첫 솔로 앨범 < Fun In Space >를 발매하였다. 세계 최초의 프로모션 비디오 모음집인 < Greatest Flix >와 사진집 < Greatest Pix >, 히트곡 모음 앨범 < Greatest Hits >가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 Greatest Hits >는 발매 이래 영국 차트 밖으로 밀려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1982년에는 유럽 투어 도중에 12번째 앨범 < Hot Space >를 발매했고, 이 무렵 일본에서는 스마일의 < Gettin’ Smile >이라는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12월에는 가장 급료가 높은 경영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1983년 1월, 프레디와 로저는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솔로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브라이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비롯한 친구들과 모여 잼 세션을 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 Star Fleet Project >라는 미니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8월부터는 다음 앨범 녹음작업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하였는데, 미국에서 녹음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1984년 2월, 13번째 앨범인 < The Works >를 발매하였고 첫 싱글 ‘Radio ga ga’는 19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영국 2위, 미국 16위). 뮤직 비디오에 팬클럽 회원들이 출연하였고 여기서 보여준 박수치는 동작은 각국의 퀸 공연에서 재연되었다. 두 번째 싱글 ‘I want to break free’의 뮤직 비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드라마를 패러디했는데, 멤버 모두가 우스꽝스런 여장을 하고 등장했다. 곡은 영국 3위, 미국 45위를 기록했다. 한편, 3월에 로저와 존은 관광차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에 퀸 팬클럽이 결성되어 수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6월에는 로저의 두 번째 솔로앨범 < Strange Frontier >가 발매되었고, 길드 기타(Guild Guitars)가 브라이언의 기타인 레드 스페셜을 카피한 기타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8월에는 벨기에에서부터 투어를 시작하는데, 10월 보츠와나 공화국의 남아공 백인정부가 건설한 선 시티(Sun City) 공연에 출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밴드는 자신들은 비정치적 밴드이며 단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러 간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에 대한 세계적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선 시티에 갔다는 맹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9월에는 1981년 몬트리올 공연을 촬영한 비디오 < We Will Rock You >가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 탑 200에 아홉 개의 앨범을 올려두어 여전한 퀸의 인기를 증명했다. 1985년에는 록 인 리오(Rock In Rio)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출연한 모든 밴드의 공연이 방송을 위해 녹화되었으나, 퀸만이 실황 비디오를 발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프레디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 Mr. Bad Guy >가 호주 투어 중에 발매되었고, 이어진 일본 투어 중 한 공연이 촬영되어 일본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7월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는 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퀸은 주어진 20분간 완벽한 쇼를 선보였고, 언론과 관객은 전체 공연을 ‘훔친’(stole) 밴드로 퀸을 꼽았다. 밴드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이 때 얻은 영감으로 영화 < 아이언 이글 >(Iron Eagle)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곡 ‘One vision’(영국 7위)을 녹음하여 출시하였다. 1986년 3월, 존 디콘은 이모털즈(The Immortals)를 결성하여 영화 < 비글즈 >(Biggles)를 위한 곡 ‘No turning back’을 녹음, 발매한다. 6월에는 불사의 종족에 대한 판타지영화 < 하이랜더 >(Highlander)의 음악을 맡아, 몇 곡을 추가하고 재편곡을 거쳐 < A Kind Of Magic >이라는 제목으로 열네 번째 앨범을 발매하여 영국차트 정상을 밟았다. 6월부터는 유럽투어에 돌입하여 런던의 웸블리(Wembley) 스타디움에서 이틀간 매진을 기록하며 절정의 열기를 과시했다. 촬영된 둘째 날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훗날 영국 전역에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동시에 방송되었다. 7월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은 동구권 최초의 메이저 록 밴드 공연이었고, 역시 전석 매진되었다. 헝가리 전역의 35mm 카메라를 징발해 촬영된 공연은, 12월에 부다페스트에서 영화로 상영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유럽 전역에서 백만 명, 영국에서만 40만 명이 관람한 유럽 투어는 12만 명이 운집한 네브워스 파크(Knebworth Park)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에는, 퀸의 전 앨범이 동시에 시디로 발매되었는데, 이 역시 초유의 일이었다. 12월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 < Live Magic >은 영국 차트 3위에 올랐다. 1986년 그해 1년간 퀸이 영국에서 판매한 앨범은 총 1,774,991장이었다. 1987년 2월, 프레디 머큐리는 플래터스(Platters)의 명곡 ‘The great pretender’를 리메이크해 영국차트 4위에 올려놓았다. 3월에 그는 평소 흠모했던 오페라 디바 몽세라 까바예(Montserrat Caballe)를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앨범을 녹음하기로 한다. 9월에 발매된 싱글 ’Barcelona’는 스페인에서 3시간 만에 10000장이 팔려나갔다. 로저는 8월, 퀸의 휴식기에 함께 활동하기 위한 새 밴드 크로스(The Cross)의 멤버를 구하기 위한 광고를 냈다. 12월에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 The Magic Years >가 발매되어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1988년 1월이 되자 퀸은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였고, 한편으로 크로스는 데뷔 앨범 < Shove It >을 발매하였다. 10월 8일 프레디와 몽세라 까바예는, 스페인의 왕과 왕비가 참석한 올림픽 행사에서 이틀 후에 나올 앨범에서 고른 세 곡을 협연하였다. 12월 4일, 크로스는 팬클럽 파티에서 브라이언, 존과 함께 공연을 했다. 1989년 5월 22일에는 < The Miracle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다. 앨범에 앞선 싱글 ‘I want it all’은 영국차트 3위(미국 50위)에 올랐고 연이어 ‘Breakthru’(영국 7위) ‘The invisible man’(영국 12위) ‘Scandal’(영국 25위)이 차트를 장식했다. 수년간 하지 않았던 합동 인터뷰를 위해 라디오에 출연하는가 하면, ‘인디펜던트 텔레비전’의 시청자 투표에 의해 ‘80년대 최고 밴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11월에는 < The Miracle >의 대성공에 고무된 멤버들이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1990년 2월18일에는 영국 음향 산업(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BPI)으로부터 ‘영국 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BPI상을 받았다. 크로스는 3월26일 2집 < Mad: Bad: And Dangerous To Know >를 발매하고 독일에서 공연을 가졌다. 브라이언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제작했으며 11월에는 할리우드 레코드사와 계약하여 북미에서 전 앨범을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하기로 했다. 12월7일에 크로스는 퀸 팬클럽 파티에서 연주하였는데 앙코르무대에서 브라이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1991년 1월 14일에는 ‘Innuendo’를 싱글로 발매하여 데뷔와 동시에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명의 앨범이 2월 4일 발매되어 역시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미국에서는 30위).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 show must go on’ 등 이어진 싱글들도 영국에서 각각 22위, 14위, 16위에 오르며 분전했다. 3월에는 크로스가 세 번째 앨범작업에 들어갔고 브라이언은 솔로 앨범 제작을 위해 7월에 몬트뢰로 날아갔다. 같은 달에 크로스의 앨범 < Blue Rock >도 완성되어 9월 초에 독일에서만 발매되었다. 퀸은 4월에 런던으로 돌아가 다시 다음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5월30일에는 프레디는 마지막 출연작이 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였다. 10월에 브라이언은 세빌 기타 레전드(Seville Guitar Legends) 페스티벌에서 누노 베텐코트, 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등과 공연(共演)했다. 같은 달에 < Greatest Hits II >가 발매되었다. 이번에도 비디오 모음집과 사진집을 함께 발매하였다. 앨범과 비디오 모음집은 여지없이 1위에 올랐다. 1991년 11월23일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갑작스럽게 세상에 알렸고, 그 다음날 친구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충격에 빠지고 각국의 팬들이 애도의 꽃과 카드를 보냈으며 프레디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부모의 뜻에 따라, 프레디의 장례식은 세상을 떠난 지 3일 후에 조용히 화장으로 치러졌다. 4월에는 브라이언이 포드 자동차를 위한 광고음악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Driven by you’를 써서 11월25일에 싱글로 발매, 영국차트 6위를 기록했다. 프레디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에이즈와의 투쟁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싱글 ‘Bohemian rhapsody/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가 발매되어 5주간 영국차트 1위에 올라 10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2월에는 퀸의 앨범 10장이 영국 차트 100위권에 랭크되었다. 1992년 2월, 브릿 어워드(BRIT awards)에서는 ‘영국 음악에 크게 공헌’한 바를 인정하는 특별상을 수여하였고,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를 ‘1991년 베스트 싱글’로 선정하였다. 수상식에서 로저와 브라이언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프레디의 삶을 기리기 위한 콘서트를 할 것임을 알렸다. 공연에 누가 나오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다음날 표가 판매되기 시작하였고, 72,000장의 표는 단 6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4월20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프레디를 추모했다. 스타디움은 꽉 찼고, 수십억의 사람들이 시청했다. 여름에는 이 공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The Mercury Phoenix Trust)가 설립되었다.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의 비디오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발매되었다. 4월에는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브라이언의 솔로 앨범 < Back To The Light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6위에 오르고 판매량에서 더블 골드를 기록했다. 브라이언은 11월의 남미 투어를 시작으로 북미와 유럽, 일본 등 월드투어를 이듬해까지 지속했다. 1993년에는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한 프레디의 ’Living on my own’이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브라이언 메이 밴드가 브릭스톤 아카데미(Brixton Academy)에서의 실황을 라이브 앨범으로 내놓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로저가 세 번째 솔로 앨범인 < Happiness? >를 선보였다. 1995년에는 브라이언, 로저, 존이 퀸의 마지막 정규앨범 < Made In Heaven >을 완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 3월, 국내 PC통신 나우누리에 퀸 팬클럽 ‘퀸사모’가 개설되었다. 한국에 개설된 최초의 온라인 퀸 팬클럽이었고, 80년대의 퀸 팬클럽이 1987년 초에 마지막 공식 컨벤션을 개최한 이래 9년만의 일이었다. 1997년에 퀸은 ‘Too much love will kill you’로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프레디에 대한 세 멤버의 추모곡 ’No one but you’가 수록된 편집 앨범 < Queen Rocks >가 발매되었다.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퀸 전문 커버밴드 ‘영부인’(0vueen)이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 1998년에는 브라이언과 로저가 각각 솔로 앨범 < Another World >, < Electric Fire >를 발매했고 1999년에는 < Greatest Hits III >가 발매되었다. 2000년에는 10장의 CD와 2장의 DVD로 제작된 프레디 머큐리 박스세트가 발매되었다. 2002년에는 퀸 뮤지컬 < We Will Rock You >가 선보였고, 높은 인기로 유럽 각국에서 2004년 현재까지도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뮤지컬 개막을 축하하는 깜짝 공연이 브라이언과 로저에 의해 네덜란드에서 열려 큰 화제를 모았다. 또한 브라이언과 로저는 뮤지컬 출연진과 함께 영국여왕 즉위 50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하여 ‘God save the Queen’을 비롯한 여러 곡들을 연주하여 열띤 호응을 받았다. 한편, 퀸의 곡들을 테마로 작곡된 교향곡이 톨가 카쉬프(Tolga Kashif)의 지휘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기도 했다. 또한 ’Bohemian Rhapsody’가 기네스북이 주관하여 영국인 310,000명이 참여한 ‘시대를 초월하는 최고 싱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4년 현재 존 디콘은 은퇴하여 언론매체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고, 브라이언과 로저는 함께 공연하거나, 퀸 관련 디브이디를 제작하는 등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본 내용은 영국의 공식 퀸 팬클럽에서 만든 공식 전기 < As It Began > 축약본을 다시 축약해 내용을 일부 추가한 것입니다.
지휘 : Piero Gamba (피에로 감바,Pierino Gamba)
지휘 : Kurt Adler (Kurt Herbert Adler)
지휘 : Georg Solti (게오르그 솔티)
게오르그 솔티는 녹음 연주에 능숙한 지휘자로서 1970년대를 풍미하였으며, 오페라 작품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지휘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수많은 오페라 작품을 지휘하였으며, 그는 시카고심포니는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하고 세계정상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게오르그 솔티는 녹음 연주에 능숙한 지휘자로서 1970년대를 풍미하였으며, 오페라 작품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지휘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수많은 오페라 작품을 지휘하였으며, 그는 시카고심포니는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하고 세계정상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지휘 : Oliviero de Fabritiis (올리비에로 데 파브리티스)
지휘 : Edward Downes (에드워드 다운스)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
지휘 : Herbert von Karajan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주빈 메타는 1936년 인도 봄베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메리 메타(Mehli Mehta)는 봄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커티스 현악4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와 아메리카 유스 심포니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원래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지휘자가 될 결심으로 의학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빈 국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1958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개최된 ... 주빈 메타는 1936년 인도 봄베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메리 메타(Mehli Mehta)는 봄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커티스 현악4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와 아메리카 유스 심포니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원래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지휘자가 될 결심으로 의학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빈 국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1958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개최된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961년∼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고, 1962년∼197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당시 수많은 레코드와 연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69년 이스라엘 필하모니는 그를 음악고문으로 지명한 데 이어 1977년엔 음악감독, 1981년에는 상임감독으로 지명하였다. 또한 1978년에는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가 되어 13년간 지휘하였으며 1998년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주빈 메타는 오랫동안 전 세계에 음악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왔으며 2011년 3월에는 미국 L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오케스트라 : Orchestra Filarmonica di Torino (토리노 필아르모니카,OFT)
오케스트라 : Chicago Symphony Orchestra (시카고 교향악단,CSO)
오케스트라 : Philharmonia Orchestra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오케스트라 : New Philharmonia Orchestra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Filarmonica del Teatro Comunale di Bologna (볼로냐 시립 극장 필하모닉 오케스트라,Orchestra del Teatro Comunale di Bologna)
오케스트라 : Symphonieorchester der Wiener Volksoper (빈 폴크스오퍼 심포니 오케스트라,Vienna Volksoper Symphony Orchestra / SOVOP)
오케스트라 : London Symphony Orchestra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
오케스트라 : Royal Opera House Orchestra (코벤트 가든 로얄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Orchestra of the 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 Orchestra)
오케스트라 : English Chamber Orchestra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오케스트라 :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PO)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정상급 단체로,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비첨 경에 의해 1932년에 설립되었다. 그 후 아드리안 불트 경과 버르나르트 하이팅크, 게오르크 숄티 경, 클라우스 텐슈테트, 쿠르트 마주어 등 세계적인 정상급 지휘자들이 거쳐갔으며, 2007년에 젊은 지휘자 유롭스키를 영입하여 새로운 변신에 도전하고 있다. 런던 필하모닉 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정상급 단체로,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비첨 경에 의해 1932년에 설립되었다. 그 후 아드리안 불트 경과 버르나르트 하이팅크, 게오르크 숄티 경, 클라우스 텐슈테트, 쿠르트 마주어 등 세계적인 정상급 지휘자들이 거쳐갔으며, 2007년에 젊은 지휘자 유롭스키를 영입하여 새로운 변신에 도전하고 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에 열광적인 음악팬을 보유하고 있는데, 1956년에 영국의 관현악단으로서 최초로 소련의 무대에서 연주했으며, 1973년에 서양 관현악단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을 방문했다.

최근 2010/11 시즌에서는 핀란드, 독일, 프랑스,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의 유럽을 거쳐 아시아권인 한국에도 방문하여 멋진 공연을 펼쳤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클래식에서 현대음악까지 방대한 음악 레파토리를 자랑하는데,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고 해외 방송투표 역대 최고의 영화음악으로 꼽히기도 했던 영화 '반지의 제왕'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명한 Mission 등 다수의 영화타이틀에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비디오 게임 음악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은 수준높은 오케스트라이다.
합창 : John Alldis Choir (존 올디스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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