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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Legrand (미셸 르그랑) - Legrand Jazz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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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Michel Legrand (미셸 르그랑) - Legrand Jazz [2LP]

[ 180g / 3000장 넘버링 한정반 / 부클릿 수록 / 게이트폴드 ]
Michel Legrand 작곡/Eddie Costa, Don Elliott, Miles Davis, Ernie Royal 연주 외 2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Impex Records / Impex Records | 2019년 06월 2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68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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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Legrand (미셸 르그랑) - Legrand Jazz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6월 28일
제조국 미국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The Jitterbug Waltz (Fats Waller)
  • 02 Nuages (Django Reinhardt)
  • 03 Night In Tunisia (Dizzy Gillespie)
  • 04 Blue And Sentimental (Count Basie)
  • 05 Stompin' At The Savoy (Benny Goodman)
  • 06 Django (John Lewis)
  • 07 Wild Man Blues (Jelly Roll Morton)
  • 08 Rosetta (Earl Hines)
  • 09 'Round Midnight (Thelonious Monk)
  • 10 Don't Get Around Much Anymore (Duke Ellington)
  • 11 In A Mist (Bix Beiderbecke)

아티스트 소개 (27명)

작곡가, 재즈와 클래식 피아니스트 작곡가, 재즈와 클래식 피아니스트
연주 : Eddie Costa (에디 코스타 )
재즈 피아노, 비브라폰 연주자 재즈 피아노, 비브라폰 연주자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연주 :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에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낸 ‘스타일리스트’이다. 194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일스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가는 창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쿨, 모드,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리드해 갔다.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 Birth Of Cool >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 Round Midnight >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Relaxin > < Cookin’ > < Workin > 그리고 < Steamin’ >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 Round Midnight >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 Birth Of Cool >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 Miles Ahead >와 이듬해 < Porgy & Bess > 그리고 1960년의 < Sketches of Spain >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 섹스텟으로 새로 출발하여 < Milestone >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섹스텟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 Kind of Blue >(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그의 섹스텟 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섹스텟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 Kind Of Blue >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섹스텟을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 Live At Carnegie Hall >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섹스텟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 Kind Of Blue >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 E.S.P >를 시작으로 < Miles Smiles >(1966), < Sorcerer >(1967), < Nefertiti >(1967), < Miles In The Sky >(1968), < Fills De Kilimanjaro >(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 Miles Smiles >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 Miles In The Sky >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 Filles De Kilimanjaro >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 In A Silent Way >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 Bitches Brew >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 Miles Davis In Filmore East >(1970), < Live-Evil >(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 Tribute to Jack Johnson >(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 On the Corner >(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 The Man With The Horn >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 Star People >(1982), < Decoy >(1983), < You’re Under Arrest >(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 TuTu >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 Siesta >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 Sketches Of Spain >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 Doo-Bop >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연주 : Donald Byrd (도널드 버드,Donaldson Toussaint L'Ouverture Byrd II)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연주 : Art Farmer (아트 파머 ,Arthur Stewart "Art" Farmer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연주 : Jimmy Cleveland (지미 클리브랜드)
재즈 트롬본 연주자 재즈 트롬본 연주자
재즈 트롬본 연주자 재즈 트롬본 연주자
연주 : Eddie Bert (에디 버트 ,Edward Joseph Bertolatus)
비밥 재즈 트롬본 연주자 비밥 재즈 트롬본 연주자
100년이 조금 넘는 재즈 역사 속엔 ‘연주의 감동’을 창조한 대가들이 존재한다. 재즈 즉흥 연주를 창조한 루이 암스트롱, 스윙을 통해 재즈를 일약 미국 주류 대중음악 반열에 올려놓은 듀크 엘링턴, 비밥으로 재즈를 예술적인 경지로 부상시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쿨에서 출발해 모드를 거쳐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시킨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들이다. 앞에 언급된 대가들에 이어 다시 한번 재즈사... 100년이 조금 넘는 재즈 역사 속엔 ‘연주의 감동’을 창조한 대가들이 존재한다. 재즈 즉흥 연주를 창조한 루이 암스트롱, 스윙을 통해 재즈를 일약 미국 주류 대중음악 반열에 올려놓은 듀크 엘링턴, 비밥으로 재즈를 예술적인 경지로 부상시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쿨에서 출발해 모드를 거쳐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시킨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들이다. 앞에 언급된 대가들에 이어 다시 한번 재즈사에 한 획을 그은 연주자가 있다. 바로 색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이다. 1955년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멤버로 활동하며 주류 재즈계에 등장한 그는 1967년 세상을 떠날기까지 10여년이란 짧은 기간동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주의 경지를 제시했다. 대표작 < Giant Step >(1959)을 통해 존은 ‘쉬트 오브 사운드’ 즉, ‘음의 덩어리’란 연주 방법을 창안해 재즈계를 경악케 했다. 순간적으로 4옥타브를 넘나드는 엄청난 기복의 연주와 16분음, 32분음과 같은 미분음을 연속해서 내는 ‘쉬트 오브 사운드’는 기존 비밥 즉흥 연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 기타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록 오케스트라를 창조한 지미 헨드릭스처럼 존 콜트레인은 색소폰을 통해 재즈가 펼칠 수 있는 연주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 놓은 셈이다. 하지만 ‘파괴의 정서’로 대변되는 이런 그의 연주가 이토록 지금까지 추앙받는 데엔 혁신적인 연주 그 이상의 무엇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시대의 산물이란 말이 있듯, 존의 연주는 그가 한창 활동했던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의 혼란했던 미국 사회, 그리고 흑인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음악이 흑인 민권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날려보내는 듯한 가슴 후련한 연주는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아우성을 연상시켰다. 1963년 9월 15일 미국 알라바마 버밍험에 소재한 교회 내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흑인 소녀 4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들의 장례식엔 음울한 장송곡 대신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와 샘 쿡의 ‘A change is gonna come’,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Alabama’가 그의 색소폰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 예술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증거이다. ‘Alabama’는 존 콜트레인이 당시 흑인들을 울분을 대변하는 의식 있는 아티스트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신께 헌정하는 앨범 < Love Supureme >(1964)으로 존은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아티스트’ 반열에 오르며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 대통령 후보자로까지 거론된다. 존 콜트레인은 음악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진 않았지만 재즈를 연주하는 모든 흑인,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무의식 속엔 ‘재즈는 곧 흑인의 자부심’이란 가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드밥에서 시작해 프리 재즈로 뿌리내린 짧고 굵었던 음악 인생동안 그는 흑인만이 할 수 있는 연주의 영역을 부단히 개척했고 그 중심엔 가스펠, 다시 말해 흑인의 영혼인 블루스(Blues)가 멤돌고 있었다. 60년대 흑인들이 소울과 더불어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애착을 갖는 건 블랙,즉 검은것의 자존심을 드높였다는 데에 있다. 1926년 9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 햄릿에서 태어난 존 콜트레인은 음악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청소년시절 밴드부 클라리넷 연주를 배우며 당시 인기 상종가를 누리던 빅 밴드 리더 아티 쇼의 연주를 카피하며 재즈에 눈을 뜬다. 프로 뮤지션이 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존은 1943년 지역 스윙 밴드 단원으로 일하며 프로 세계에 진출한다. 오른스타인 음악학교에 입학해 정규 음악교육을 받게 된 존은 1945년 해군에 징집돼 군복무중 해병대 군악대 ‘멜로디 마스터’에 배치되었고 군을 재대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존은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그라노프 스튜디오에서 현대 클래식 작곡가들의 수준 높은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된다. 1947년 군 재대 후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비밥 열풍에 동참하고 싶었던 존은 이때부터 테너 색소폰을 손에 쥐게 된다. 훗날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49년 9월, 존은 비밥의 명인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주류 무대에 도약할 기회를 얻은 그는 다른 명연주자의 스타일을 습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특히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는 그야말로 산 교과서였다. 존은 버드의 연주에 완전히 흡수돼 그처럼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였던 셈이다. 50년대 들어 경기는 호황이었지만 비밥 연주를 하는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대중들은 캡 칼로우 웨이나 빅 조 터너의 알 앤 비 사운드나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의 스탠다드 팝에 경도돼 흑인 비밥 뮤지션들이 설 자리를 빼앗아 갔다. 비밥을 연주할 공간을 찾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재즈의 명인들이 헤로인으로 하나 둘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찰리 파커는 이미 마약 중독이 위험수위에 올랐고 ‘쿨의 탄생’으로 비밥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도 기대 이하의 씁쓸한 반응을 삼키며 헤로인에 빠져 들고 있었다. 당시 인기를 누리던 알 앤 비 밴드였던 조니 호지스 밴드 투어에 합류해 비교적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존 콜트레인도 결국 얼마 못가 헤로인에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색소폰을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게 된 존 콜트레인은 결국 1952년 조니 호지스 밴드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다시 3여년의 긴 내공 끝에 존 콜트레인에게 재기의 기회를 가져다 준건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였다. 8년 전의 인연으로 존은 마일스가 조직한 퀸텟의 테너 색소폰 주자로 발탁돼 1955년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첫 앨범 < ’Round Midnight > 녹음에 참여한다. 마일스는 차분하고 부유하는 듯한 자신의 트럼펫 소리와 충돌해 긴장감을 조성해 줄 색소폰 연주를 찾았고 마침 활화산 같이 폭발적인 솔로를 구사하는 존 콜트레인 색소폰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56년 한 해 동안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멤버 자격으로 존 콜트레인은 < Workin’ >, < Steamin’ >, < Cookin’ >, < Relaxin’ > 과 같은 하드 밥 명반들을 프레스티지(Prestige)를 통해 연이어 발표한다. 마일스와 만나기 전까진 재즈계에서 무명이었던 존 콜트레인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멤버로 활동하며 명실상부 주류 음악 무대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성공에 반해 헤로인 중독은 여전히 먹구름처럼 그를 괴롭혔다. 거기다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과 툭하면 연주 시간에 늦는 그의 불규칙한 생활로 퀸텟의 팀웍에 금이 가기 일쑤였다. 결국 리더인 마일스와의 심한 다툼 끝에 1956년 말, 존은 퀸텟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존은 그러나 평소 그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해오던 기인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의 선처에 힘입어 그의 밴드 멤버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존은 몽크와의 협연으로 리버사이드 레이블을 통해 총 4장의 앨범을 발표하는데, < Thelonious Monk with John Coltrane >, < Thelonious himself >, < Monks Mood >, < Live at the five spot >이 그것들이다. 절제되고 명료한 톤의 연주를 선호했던 마일스와 달리 현란하고 다소 정돈되지 않은 듯한 스타일의 연주를 즐긴 몽크는 그야말로 존 콜트레인과 찰떡궁합이었다. 마일스와 존의 연주는 상극의 연주라면 몽크와 존의 연주는 상생하는 연주였던 셈이다. 몽크의 권유로 한번에 2-3개 음을 동시에 내는 연주기법도 이 때 등장한다. 둘의 협연은 6개월로 그쳤지만 몽크 덕분에 마일스는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재기의 의욕을 다진 존은 헤로인을 끊고 밴드를 결성해 독집 앨범을 준비해간다. 솔로 데뷔작인 < Coltrane >(1957)과 < Soul Trane >(1957)을 거쳐 초기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 Blue Train >(1957)을 발표하며 존은 ‘하드밥의 새로운 거목’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강한 느낌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성공적인 솔로 데뷔에 있은 지 얼마 후 존은 다시 마일스로부터 밴드에 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존이 마일스에게 돌아왔을 땐 퀸텟이 아닌 섹스텟이 되어있었는데 알토 색소폰 주자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y)가 함께 연주한다. 존이 섹스텟 멤버로 발표한 < Milestone >(1958)은 모달 재즈(Modal)의 원형을 제시하며 코드 중심의 연주가 아닌 스케일 중심의 연주, 다시 말해 화음이 중심이 아닌 선율이 중심이 되는 패턴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의 작품이었다. 전 재즈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59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이었다. 지금까지도 모던 재즈의 대표작으로 칭송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 Kind of Blue >와 존 콜트레인의 < Giant Step >이 탄생됐기 때문이다. < Kind of Blue >의 녹음의 참여한 존은 ‘So What’과 ’All Blues’에서 역사상 가장 빛나는 테너 색소폰 연주를 남긴다. < Kind of Blue >의 녹음이 끝난 직후 존은 어틀랜틱 레코드사에서 < Giant Step >을 녹음한다. 폴 체임버스, 토미 플라나간, 윈튼 켈리, 지미 콥, 아트 테일러가 참여한 앨범은 ‘소리의 신기원’을 제시했다. 테너 색소폰만 하나만으로 존은 한번에 여러 개의 음계를 넘나드는 초절기교를 선보인다. 당시 재즈 평론가 이안 기틀러는 이런 콜트레인의 사운드를 일컬어 ‘음의 덩어리’(Sheet of Sound)라 명명했다. 몽크와의 협연을 계기로 오랜 실험 끝에 빛을 본 존의 이 혁신적인 연주스타일은 재즈의 표현 영역을 한층 넓혔다는 평가와 함께 이후 등장할 많은 색소폰 연주자들이 넘어서야만 하는 절망(?)스런 과제를 남기게 된다. 이듬해 발표된 < My Favorite Thing >(1960)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코어를 담당하게 될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왈츠곡 ‘My favorite thing’을 비롯해 조지 거쉰의 ’summertime’등 좀더 대중적인 배려가 돋보인 앨범이다. 또한 존은 이때부터 묵직한 테너 색소폰 대신 부드러운 선율을 만드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사용한다. 존은 자신의 연주가 좀더 덜 서구적인 것으로 비쳐지길 원했고 아랍이나 동양권의 관악기(가령 우리나라의 태평소)와 흡사한 소리를 내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적극 연주에 포함시킨다. 1961년 마일스 데이비스 섹스텟을 나온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정규 쿼텟을 조직한다. 이름하여 ‘존 콜트레인 클래식 쿼텟’으로 활동하게 되는 맥코이 타이너(피아노), 엘빈 존슨(드럼), 스티브 데이비스(베이스)는 이후 4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며 신생레이블이었던 임펄스!(Impulse!)를 통해 명연들을 남긴다. 콜트레인 쿼텟은 재즈에만 음악적 관심을 한정시키지 않고, 아프리카, 중동 등 3세계권 음악을 자신의 영향권에 뒀다. < Africa/brass >(1961)같은 앨범이 대표적인 예인데, 존은 당시 부상하고 있던 플릇/색소폰 연주자 에릭 돌피를 비롯해 11개의 브라스가 참여해 아프리카 토속리듬과 인도의 라가를 적극 도입했다. 이런 실험성 짙은 대작에 부담스러워 한 음반사는 존에게 좀 더 대중적인 재즈 연주 앨범을 만들어보길 권했고,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Ballad >(1962)와 < Duke Ellington and John Coltrane >(1962)이다. < Ballad >에선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로 유명한 ‘Nancy’가 < Duke Ellington with John Coltrane >에선 ‘In a sentimental mood’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혀를 내 두르게 하는 격정적인 색소폰 연주는 아니었지만 < Ballad >와 < Duke Ellington with John Coltrane >은 존 콜트레인의 다른 어떤 음반보다 인기를 얻었다. 당시 흑인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킹 목사가 주도한 흑인 민권운동은 1963년 극에 달했다. ‘버밍험의 전투’라고까지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그해 8월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가 나온 워싱턴 행진으로 이어졌다. 억압 속에 자유를 호소하는 노래였던 가스펠은 민권운동을 통해 감정 표현을 넘어서 흑인들의 유일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침 이슬과 6월 항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소울은 흑인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 수단 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흑인 가수들이 목소리 높여 소울을 들고 나왔다. 존은 신께 경배하는 연주로 흑인 민중의 민심을 반영했다. < Love Supreme >(1964)은 존 콜트레인이 주류 재즈 뮤지션으론 처음 신께 헌정하는 연주였다. 총 4부의 구성으로 진행되는 연주는 흡사 흑인교회 대중 집회를 연상시키는 고양감으로 넘실거린다. 그의 정규 쿼텟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 Love Supreme >은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며 소리 소문 없이 발매 1년 만에 50만장이란 판매고를 기록한다.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존의 자유의지는 결국 프리 재즈로 향한다. 오넷 콜먼이란 젊은 색소폰 주자가 들고 나온 이 무형식의 전위 재즈는 재즈계 내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존 콜트레인도 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미 존 콜트레인은 오넷 콜먼과 함께 연주했던 트럼펫주자 돈 체리와 함께 앨범 < The Avant Garde >를 1959년에 녹음했지만 당시 존의 소속사였던 어틀랜틱 레코드사가 1966년이 돼서 발표하는 바람에 1년 앞선 < Ascension >(1965) 그의 첫 프리 신고식이 됐다. 무한자유로의 질주는 결국 프리 재즈의 광기로 이어졌다.소음과 흡사한 음을 한번도 쉬지 않고 40분 이상 해내는 연주자는 당시까진 존이 유일했다. < Giant Step >과 < Love Supreme >의 연주를 원했던 팬들은 이미 괴물이 돼 버린 존의 음악성에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난해한 연주기교와 멜로디의 부재는 대중성을 외면한 결과가 된 셈이다. 이 당시 수시로 복통을 호소했던 존은 급기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더욱 창작에 열을 올렸고 1966년 녹음된 < Interstellar space >를 끝으로 존은 말기 간암판정을 받게 되고 급기야 1967년 7월 17일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은 재즈계에 예기치 않은 공백을 가져온다. 모든 에너지를 연주에 쏟아 넣었던 탓에 그를 능가할 재즈 뮤지션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더 이상 도전적인 연주가 없다 생각한 재즈계는 심지어 존 콜트레인 사후 ‘재즈는 죽었다’ 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의 공백은 재즈계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이렇게 갈피를 못 잡던 재즈계는 한창 부상하던 록 음악 열풍에 밀려 자꾸만 청중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에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와 록의 이종교배로 탄생된‘재즈 록 퓨전(Jazz Rock Fusion)’ 을 들고 나와 잃었던 대중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재즈계는 존 콜트레인을 종점으로 하는 ‘메인스트림’과 마일스 데이비스를 선두로 하는 ‘퓨젼’으로 나뉜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Barry Galbraith (배리 갤브레이스)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기타 연주자
재즈 플룻의 거장 허비 만(Herbie Mann)은 재즈와 다양한 음악 장르간의 교합을 시도하며 대중적인 재즈 연주의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다. 5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에 그는 아프리카 ,아프로 큐반, 브라질 음악, 소울/펑키 등 50-60년대 미국 대중 음악계에서 각광받은 첨단 음악 사조를 재즈 플룻 연주로 소개해왔다. 일반적인 재즈 뮤지션답지 않게 히트곡을 다수(?) 보유한 허비만은 국내 음악 애호가들,... 재즈 플룻의 거장 허비 만(Herbie Mann)은 재즈와 다양한 음악 장르간의 교합을 시도하며 대중적인 재즈 연주의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다. 5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에 그는 아프리카 ,아프로 큐반, 브라질 음악, 소울/펑키 등 50-60년대 미국 대중 음악계에서 각광받은 첨단 음악 사조를 재즈 플룻 연주로 소개해왔다. 일반적인 재즈 뮤지션답지 않게 히트곡을 다수(?) 보유한 허비만은 국내 음악 애호가들,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하는 뮤지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70-80년대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나이트 클럽에선 허비 만의 ‘Memphis Underground’. ’Hi Jack’, ’Comin’ home baby’가 울려 퍼졌다. 연주한다는 사람치고 허비 만의 연주 1곡 정도는 누구나 알 정도로 현장에서 종사하는 뮤지션들에게 허비 만의 연주는 늘 동경과 카피의 대상이었다. 이렇듯 굳이 ‘재즈’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허비 만의 플룻 연주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성을 띄고 있었다. 한편으론 시류에 영합해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했던 그였지만 재즈 솔로악기 중에서도 변방에 자리했던 플룻 연주의 가능성을 주류 재즈계에 한껏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아야 할 재목이다. 1930년 미국 뉴욕 블루클린 출생이 허비 만은 9살 때 접했던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의 스윙 연주를 통해 재즈의 충격을 접한다. 이후 베니 굿맨처럼 클라리넷 주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이내 클라리넷 연주에 두각을 나타냈고 13살이 되던 해엔 프로 세션 연주인으로 나섰다. 세션 맨으로 활동하려면 멀티 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로 이때부터 허비만은 색소폰과 플룻 같은 리드 악기를 하나씩 섭렵해간다. 찰리 파커로 대변되는 비밥의 열풍을 앞둔 상황에서 허비 만은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의 초절 즉흥연주에 매료됐고 관심은 자연히 색소폰으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시원한 느낌의 즉흥 솔로를 구사한 테너 색소폰주자 레스터 영에게 깊은 영향을 받는다. 재즈 맨이 되기로 결심한 허비 만은 1948년, 군에 자원입대해 4년간 이태리에 소재한 미군 부대 군악대에서 테너 색소폰주자로 일한다. 1952년 군에서 재대한 허비만이 먼저 찾아 간 곳은 재즈의 본령 뉴욕이었다. 이미 스탄 게츠, 알 콘, 주트 심스와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뉴욕을 점령한 상태인지라 허비 만은 선택의 여지없이 재즈 밴드에 합류해 내공을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1953년 맷 매튜 퀸텟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허비 만은 필 우즈, 찰스 루즈, 샘 모스트등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톤을 개발해간다. 테너 색소폰 주자로 커리어가 굳혀지는가했던 허비만은 보컬 주자 카멘 맥레(Carmen Mcrae)의 세션에서 사정상 녹음일정에 참여 못한 플룻 주자를 대신해 플룻 세션을 담당한다. 이를 계기로 허비 만은 다른 재즈 뮤지션들로부터 플룻 연주 요청을 받게 되었고 특히 보컬 사라 본의 1954년 작 < Sahra Vaughan with Clifford Brown > 에서 플룻 주자로 참여하며 명성을 얻는다. 이듬해인 1955년, 허비 만은 플룻 주자로 버브 레이블과 계약하며 밴드 리더로 나서게 된다. 당시까지 플룻이 자주 쓰이는 연주는 정통 재즈쪽보다 맘보-차차차를 연주한 아프로 큐반 밴드에서였고 자연히 그의 음악성 역시 라틴 재즈쪽으로 향한다. 그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던 아프리카, 쿠바출신 타악기 주자를 대거 영입했고 밴드 내에 드러머가 4명이나 있을 정도로 리듬을 강조했다. 50년대 말까지 그의 밴드엔 레이 바레토, 윌리 보보, 올란투지, 파타토 발데스와 같은 라틴 출신 타악기 주자들이 거쳐간다. 1960년 어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한 허비만은 아프로-재즈 섹스텟을 조직하며 앨범 < The Common Ground > 를 세상에 내놓는다. 앨범 타이틀처럼 허비 만의 밴드는 ‘대중적인 기반’에서 수용될 수 있는 인기 절정의 라틴 재즈를 메인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리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멜로디와 화성전개를 보강할 의도로 그는 밴드를 재편했고 1961년, 두 대의 베이스가 들어간 허비만 밴드는 < Live at Village Vanguard > 를 녹음해 수록 곡 ’Comin’ home baby’로 골드를 기록한다. 첫 히트로 고무된 허비만의 관심은 차츰 브라질에서 건너온 보사노바로 향하고 있었다. 색소폰 주자 스탄 게츠와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가 함께 발표한 < Jazz Samba > (1962) 가 미국 전역을 강타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허비 만은 직접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로 날라가 보사노바의 명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을 찾아간다. 조빔이 만들어내는 보사노바의 독특한 화성전개와 운치 있는 멜로디와 가사는 허비만을 매료시켰고 조빔의 보컬로 녹음된 ’One note samba’가 수록된 < Do the Bossanova with Herbie Mann > (1963)을 발표한다. 보사노바에 심취한 허비 만은 한편으론 윌리 보보, 칙 코리아, 로이 아이어와 같은 뮤지션들의 음반에서 라틴 재즈를 연주했고 메인스트림 재즈쪽에서 각광받던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트리오와의 협연 작 < Nirvana > (1964)를 통해 클래식 소품을 연상시키는 정통 재즈 연주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를 고민케 할 음악을 찾던 중 허비 만에게 다가온 건 60년대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몰아 온 흑인 소울/펑키 뮤직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어틀랜틱 소속 소울 뮤지션들의 음악이 인기 상종가를 기록하는 걸 목격한 허비 만은 소울의 그루비한 리듬 진행에 흥미를 갖는다. 허비 만은 샘 앤 데이브(Sam & Dave) 와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을 배출한 소울의 본령 멤피스로 향했고 보사노바에 경도됐던 그의 음악성은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는데 그 시작이 바로 그에게 두 번째 히트를 안겨줬던 < Memphis Underground > (1969) 였다. 단숨에 미국 내 댄스 홀을 점령한 ’Memphis Underground’로 허비 만은 R&B 성향의 연주 음악으로 이후 70년대 내내 히트 행진을 이어간다. 비운의 천재 기타리스트 듀언 올맨(Duane Allman)이 참여한 ’Push Push’(1971), 스페인 출신 그룹 바라바의 노래로도 각광받은 디스코 연주 ‘Hi Jack’(1975), 레게 리듬을 차용한 ’Draw your back’(1976)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으로 인해 70년대 그가 선보인 연주는 재즈보다는 당시 인기를 모우던 R&B로 치우쳐지면서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은 퇴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1980년,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줬던 어틀랜틱 레이블을 떠난 허비 만은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10년이 지난 1990년, 밴드 ‘Jasil Brazil’을 이끌고 재즈계에 복귀한다. 토리 카이뮈, 이반 린스와 같이 80년대 부상한 브라질 싱어송 라이터들의 곡을 연주한 앨범 < Caminho De Casa > 로 그가 라틴 재즈의 지존임을 만방에 과시한다. 90년대 들어 허비 만은 정통 재즈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시류에 영합한 재즈 연주인으로 한동안 비난을 받은 그였지만 여전히 허비 만의 플룻 연주는 재즈 본연의 즉흥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1995년 작 < America/Brazil > 은 인기 절정의 플룻 연주자 허비 만이 과거 촉망받던 정통 재즈 연주인으로 복귀되는 순간이었다. 65세 생일 기념 콘서트로 기획된 앨범에선 랜디 브렉커, 파키도 드 리베라와 같은 재즈 명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All Blues’와 ’Summertime’를 재현해 냈다. 재즈 플룻티스트의 표상이었던 허비 만은 지병인 전립선 암으로 2003년 7월 유명을 달리한다. 반세기의 긴 활동기간 동안 허비만은 당대 첨단의 음악을 적극 수용하며 재즈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해왔다. 그가 발표한 모든 연주에 대해 균등한 평가를 내릴 순 없겠지만 대중적인 연주 음악을 선도하며 재즈가 연주자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평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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