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10월 전사이벤트
10월 혜택 모음
네네
싱가포르
킷캣
모바일 리뉴얼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케팅 텍스트 배너

웹진채널예스


록앤롤 TV 광고 음악 모음집 (Songs You Heard On The Telly)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수입
CD

록앤롤 TV 광고 음악 모음집 (Songs You Heard On The Telly)

[ 3CD ]
Quincy Jones, David Rose, Perez Prado 작곡/Eddie Cochran, Etta James 노래 외 38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Not Now / Not Now | 2019년 06월 21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21,400원
할인가 17,300 (19%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카드혜택
결제혜택
카드할인 정보
카카오페이 카카오페이 3천원 즉시할인 (5만원 이상 결제시, 1회) 자세히 보기
 모바일팝 모바일 4% 즉시할인 (모바일 결제시) 자세히 보기
네이버페이 네이버페이 1% 적립 (전체결제) 자세히 보기
페이코 페이코 포인트결제 2% 적립 (신규고객 4,500원 할인) 자세히 보기
할인/적립 카드 더보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판매중| 한정판매

수량
배송비 : 2,000원 해당 상품과 도서 포함하여 만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배송비 안내
  • 국내배송만 가능
1/4
광고 AD

록앤롤 TV 광고 음악 모음집 (Songs You Heard On The Telly)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6월 21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C'Mon Everybody - Eddie Cochran
  • 02 At Last - Etta James
  • 03 Rawhide - Frankie Laine
  • 04 Misirlou Twist - Dick Dale
  • 05 Stand By Me - Ben E. King
  • 06 Fallin' - Connie Francis
  • 07 Memories Are Made Of This - Dean Martin
  • 08 Wondrous Place - Billy Fury
  • 09 Oops - Doris Day
  • 10 Wake Up Little Susie - The Everly Brothers
  • 11 Soul Bossa Nova - Quincy Jones
  • 12 On The Rebound - Floyd Cramer
  • 13 Money (That's What I Want) - Barrett Strong
  • 14 Here Comes Summer - Jerry Keller
  • 15 La Mer (Beyond The Sea) - Bobby Darin
  • 16 Cocktails For Two - Spike Jones
  • 17 Wonderful World - Sam Cooke
  • 18 Oh Marie - Louis Prima
  • 19 Love Me Tender - Elvis Presley
  • 20 The Stripper - David Rose
Disc2
  • 01 Non, Je Ne Regrette Rien - Edith Piaf
  • 02 Little Bitty Pretty One - Thurston Harris
  • 03 Take Five - Dave Brubeck
  • 04 Everyday - Buddy Holly
  • 05 It Don't Mean A Thing - Louis Armstrong
  • 06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 - Etta James
  • 07 The Wanderer - Dion
  • 08 Lollipop - The Chordettes
  • 09 I'm Sorry - Brenda Lee
  • 10 Comin' Home Baby - Mel Torme
  • 11 Guaglione - Perez Prado
  • 12 Sway - Dean Martin
  • 13 Mess Around - Ray Charles
  • 14 A Swingin' Safari - Bert Kaempfert
  • 15 The Great Pretender - The Platters
  • 16 You Always Hurt The One You Love - Mills Brothers
  • 17 What's That Smells Like Fish - Blind Boy Fuller
  • 18 Don't Fence Me In - Bing Crosby
  • 19 Don't You Just Know It - Huey 'Piano' Smith & The Clowns
  • 20 You Send Me - Sam Cooke
Disc3
  • 01 Welcome To My World - Jim Reeves
  • 02 Volare - Dean Martin
  • 03 Boum! - Charles Trenet
  • 04 Do You Love Me - The Contours
  • 05 Green Onions - Booker T. & The M.G.s
  • 06 Tutti Frutti - Little Richard
  • 07 Apache - The Shadows
  • 08 Spring Cleaning - Fats Waller
  • 09 The Ugly Duckling - Danny Kaye
  • 10 Chicken Fat - Robert Preston
  • 11 Unsquare Dance - Dave Brubeck
  • 12 Happy Go Lucky Me - George Formby
  • 13 Someone To Watch Over Me - Ella Fitzgerald
  • 14 Manish Boy - Muddy Waters
  • 15 The Hole In The Ground - Bernard Cribbins
  • 16 Car Song - Woody Guthrie
  • 17 Whoopin' The Blues - Sonny Terry
  • 18 Make Yourself Comfortable - Sarah Vaughan
  • 19 Boom Boom - John Lee Hooker
  • 20 When You're Smiling - Louis Armstrong

아티스트 소개 (43명)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20세기를 빛낸 ’팝 흥행사’라 칭송될 앨범 프로듀서이자 빅 밴드 마스터이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의 황금 콤비로 활약한 그는 마이클 잭슨의 성인 데뷔작 < Off the wall >(1979), 흑, 백 음악의 완벽한 크로스 오버로 전 세계 4천 2백 만장 판매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 Thriller >(1982), 한층 그 볼륨을 높이...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20세기를 빛낸 ’팝 흥행사’라 칭송될 앨범 프로듀서이자 빅 밴드 마스터이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의 황금 콤비로 활약한 그는 마이클 잭슨의 성인 데뷔작 < Off the wall >(1979), 흑, 백 음악의 완벽한 크로스 오버로 전 세계 4천 2백 만장 판매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 Thriller >(1982), 한층 그 볼륨을 높이며 그가 ’팝의 지존’임을 다시 한번 천하에 증명한 < Bad >(1987)의 프로듀서로서 참여하며 1980년대 ’팝 천하’를 일궈낸 대가이다. 마이클 잭슨을 위시해 그는 패티 오스틴, 조지 벤슨, 엘라 핏 제랄드,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사라 본 등 수많은 R&B, 재즈 가수들을 비롯, 90년대 갱스터 랩퍼 갱스타(Gang starr)의 < Hard to run >(1994)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로 참여, ’흑인 대중 음악의 산파자’로서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다. 하지만 그는 명 프로듀서이기 전에 1950년대부터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재즈의 대가들과 연주 활동을 함께 한 트럼펫 주자이자 빅 밴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나이로 빅 밴드 마스터로 무대에 섰던 그는 다수의 리더작을 발표하며 편곡과 프로듀싱에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고, 이러한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70년대부턴 팝 가수들의 앨범 프로듀싱과 자신이 설립한 레이블 퀘스트 레코드(Qwest Record)의 기획자로서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1933년 시카고 태생인 그는 청소년기에 트럼펫과 피아노로 재즈의 기본을 쌓아갔고, 1951년 비브라폰 주자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의 오케스트라에서 2년 간 트럼펫 주자와 편곡자로 활동하며 재즈 계에 투신한다. 햄프튼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무렵, 비운의 하드밥(Hard-Bop) 대가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과 쿨(Cool) 트럼펫터 아트 파머(Art Farmer)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로 그는 출중한 트럼펫 연주 실력을 보유하게 된다. 얼마 후 프리랜서 음악인으로 활동하며 카운트 베이시, 캐논볼 애덜리, 토미 도시, 디나 워싱턴등 쟁쟁한 재즈 음악인들의 편곡과 세션을 담당했고 1956년엔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투어활동을 하며 그는 차츰 뉴욕 52번가에서 명성을 쌓아간다. 약관의 나이를 조금 넘긴 1956년, 블루스 보이 비비 킹(B. B. King)이 소속되어 있던 ABC 레코드사와 계약, 앨범 < This is how I feel Jazz >에서 그는 밴드마스터로 데뷔한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등지에서 활발한 투어 활동을 전개하며 스탠더드 팝 작곡가 해롤드 알렌(Harold Arlen)이 배경 음악을 맡은 쇼(Show) ’Free & Easy’(1959)의 편곡 작업에도 참여한다. 솔로 활동과 병행해 그는 1957년, 성이 ’Jones’인 음악인들과 함께 한 이색적인 프로젝트 재즈 섹스텟(Sextet) ’The Jones Brothers’결성 , 타드 존스(Thad Jones), 지미 존스(Jimmy Jones), 조 존스(Joe Jones)와 같은 재즈 뮤지션들과 잠깐 활동한다. 60년대 초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머큐리(Mercury)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발표하며 회사 내 부사장과 A&R맨(Artist & Repertoire)으로도 활동한다. 솔로 활동과 더불어 그는 이후 TV와 영화 음악에도 관여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2차 대전 나찌의 만행을 고발한 영화 < The Pawnbroker >(1964)를 시작으로 오스카 상 4개 부문을 휩쓴 미스테리 극 < In the heart of night >(1967), 워렌 비티(Warren Beaty)와 골디 혼(Goldie Hawn)이 등장한 코미디< The Dollars >(1971),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주연한 액션물 < The Getaway >(1972), TV 미니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며 전 세계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작 < The Root >(1977), 남부출신 흑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담은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 The Color Purple >(1985)등에서 영화 음악 작곡과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다방면에서 그의 재능을 펼쳐 보인다. 1969년, 그는 CTI 레코드 설립자인 명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가 소속되어있던 A&M 레코드와 의기투합, 같은 해 프레디 허바드(트럼펫), 휴버트 로우즈(플룻)를 비롯한 크리드 테일러 사단에 이름을 걸고 있는 명 연주자들이 함께 한 그의 중기 걸작 < Walking in space >(1969)를 시작으로 1981년까지 A&M 레코드에서 활동하게 된다. 1974년을 기점으로 그는 평소 해오던 밴드 마스터로서의 활동을 접고 A&M 소속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서 활동에 집중한다. 1980년,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Qwest) 레코드를 설립, 자신의 프로듀서 하에 수많은 팝의 명작들을 양산해낸다. R&B 보컬 패티 오스틴(Patti Austin), 신스 팝의 신기원을 제시한 뉴 오더(New Order), 하드 밥 색스폰 주자 어니 왓츠(Ernie Watts), 여성 싱어송 라이터 칼리 사이몬(Carly Simon), 브라질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도리 캐이미(Dori Caymmi)의 앨범을 기획했고, 기타리스트 겸 팝 보컬리스트 조지 벤슨의 < Give me the night >(1980), 마이클 잭슨의 히트 작들을 비롯, 80년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디오피아 난민 돕기 자선 앨범 < We are the world >(1984)에서도 프로듀서로 맹위를 떨친다. 20세기가 차츰 저물어가던 시점인 1989년, 그는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본령인 흑인 대중 음악을 자신의 기획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사라 본, 엘라 핏 제랄드와 같은 노장 재즈 맨 들을 비롯, 블루스에서 힙합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중인 흑인 음악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미증유의 대작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 Back on the block >(1989)이다.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에서 내놓는 그의 야심작이기도 했던 앨범은 이듬해인 1990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상이라는 대어를 낚게 된다. 90년대 들어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생전 공식적인 마지막 녹음인 < Montreux Jazz festival >(1991)의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았고, 쿨리오(Coolio), 알 켈리(R. Kelly), 미스터 엑스(Mr. X) 등이 참여하며 당시 유행하던 재즈-힙합(Jazz-Hip hop)의 면모를 한껏 보여준 < Q’s jook joint >(1994)를 기획 및 프로듀싱한다. 재즈 밴드 마스터로 음악계에 발을 들어 놓았지만 이후 창작보다는 프로듀싱으로 명성을 쌓으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으로 대변되는 아티스트의 숙명대신 뮤직 비즈니스계의 실력자를 택한 그는 분명 순전한 의미의 재즈 음악인이라고 칭송되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대중 음악의 절반 이상을 규정한 흑인 대중 음악의 우수성을 흑인 스스로의 힘으로 만방에 알리는데 공헌한 인물로 그는 60년대 모타운의 전설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와 70년대 필리 소울(Philly Soul) 콤비 케니 갬블 & 레온 허프 (Kenny Gamble & Leon Huff)와 함께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흑인 대중음악계의 산 증인이다.
미국 작곡가 미국 작곡가
작곡 : Perez Prado (다마소 페레즈 프라도 ,Damaso Perez Prado)
다마소 페레스 프라도(Damaso Perez Prado)는 1916년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쿠바의 마탄자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피아노 공부를 했으며, 학교를 졸업 할 때쯤에는 클럽이나 극장에서 오르간을 직업적으로 연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인기 오케스트라 '카지노 드 라 플라야'의 편곡작업을 맡다가 리드보컬 카스타리타의 눈에 띄어서 ... 다마소 페레스 프라도(Damaso Perez Prado)는 1916년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쿠바의 마탄자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피아노 공부를 했으며, 학교를 졸업 할 때쯤에는 클럽이나 극장에서 오르간을 직업적으로 연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인기 오케스트라 '카지노 드 라 플라야'의 편곡작업을 맡다가 리드보컬 카스타리타의 눈에 띄어서 정식으로 편곡자겸 피아니스트로 합류했다. 프라도는 작업을 맡다가 리드보컬 카스타리타의 눈에 띄어서 정식으로 편곡자겸 피아니스트로 합류했다. 프라도는 이곳에서 편곡 스타일을 정립했으며, 퇴근 후 아바나 시내에서 벌어지는 잼 세션을 통해 더욱 실력을 넓힐 수 있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손(son)과 룸바(rumba)리듬에 미국의 재즈 스윙을 도입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특히 세련된 화성의 스타일은 그가 몸담았던 스탄 켄튼(Stan Kenton) 빅밴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쉽게 말해 아프로-쿠반(Afro-cuban)의 손 리듬에 재즈의 화성이 어우러진 또 다른 형태의 음악인 맘보가 생겨났다.

찌르는 듯한 고음의 트럼펫, 부드러운 선율의 색소폰, 분위기 있는 오르간, 재즈에서 빌려온 화성이 맘보의 특징이다. 타이트한 퍼커션 편곡은 즉흥연주의 여지를 별로 남겨주지 않지만 밀도 있고 초점이 뚜렷하기 때문에 밑에 깔려 있는 당김음 박자를 쫓아가기가 쉽다. 프라도는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관객의 흥을 돋우는 역할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뛰고, 차고, 춤추고, 추임새를 넣기도 하면서 밴드에게서 다이내믹한 존재감을 이끌어냈다. 프라도는 맘보를 팝 음악계의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렸으며, 수많은 모방 아티스트들을 낳았고 빌보드 차트 1위에 두 번이나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50년대 서방세계의 대부분에서 스타로 군림하였으며 라틴 아메리카, 특히 보수적인 쿠바 음악계를 떠나 정착한 멕시코에서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무엇보다 프라도는 맘보, 차차, 살사 등 라틴음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하였으며, 1989년 72세의 일기로 멕시코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노래 : Eddie Cochran (에디 코크란,Ray Edward Cochran)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잇 The Girl Can't Help It》(1956), 《언테임드 유스 Untamed Youth》(1957), 《고 자니 고 Go Johnny Go》(1959)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첫 히트곡인 《시틴 인 더 발코니 Sittin' in the Balcony》(1957)에 이어 힘찬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담은 《서머타임 블루스 Summertime Blues》(1958)와 《크몬 에버리바디 C'mon Everybody》(1958)는 초기 록의 완벽한 본보기로 꼽힌다.

인기가 절정이던 1960년 영국 순회공연 도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유일한 앨범인 《싱인 투 마이 베이비 Singin' to My Baby》는 그가 죽기 몇달 전에 녹음한 것으로 그 속에 수록된 《스리 스텝스 투 헤븐 Three Steps to Heaven》은 그가 죽은 뒤 영국에서 인기순위 1위에 올랐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노래 : Etta James (에타 제임스)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노래 : Connie Francis (코니 프랜시스)
노래 : Doris Day (도리스 데이)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노래 : Floyd Cramer (플로이드 크래머)
미국 싱어송라이터 미국 싱어송라이터
노래 : Sam Cooke (샘 쿡 ,Dale Cook)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당시 흑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공민권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그는 노래를 통해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한 그의 의욕적 활동에 흑인들 모두 지지를 보냈다. 사회활동가로서의 지지도는 장차 그에게 돌아올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다름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기성과 청춘의 세대적 통합자로서 그의 호소력은 당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었다. 1931년 1월에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합창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카고로 이주한 후 삼형제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대중음악의 흐름 또한 놓치지 않았다. 틴 하이웨이 큐씨스(Teen Hightway QCs)라는 성가대의 멤버였던 그는 1950년, 전국적 가스펠그룹 소울 스터러스(Soul Stirrers)에 합류했다. 6년여의 활동기간 중 ‘그의 옷자락을 만질 수만 있다면’(Touch the hem of his garment), ’당신에게 더 가까이‘(Nearer to thee), ’내겐 천국 이었어’(That’s heaven to me)와 같은 노래를 통해 흑인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와 흑인계를 넘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 소울 스터러스와 결별한 그는 1956년, 싱글 ‘사랑스러운’(Lovable)을 발표하며 진정한 자아 정체성 탐구를 위한 새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195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팝과 알앤비 차트 정상을 차지한 ’You send me’는 2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가스펠과 팝 R&B 요소가 응집력 있게 혼합된 노래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소울 음반이었다. 그는 또한 로맨틱한 발라드와 틴 팝 싱글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다. ‘감상적 이유 때문에’(For sentimental reasons), ’모두 차 차 차를 좋아해‘(Everybody loves to cha cha cha), ’겨우 16세‘(Only sixt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를 비롯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yday)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Tribute to the Lady >에 실린 노래들까지 당대를 대표할만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소속사인 킨 레이블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메이저 레이블로의 이적을 계획, 콜롬비아(Columbia), 데카(Decca)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레이블 중 하나인 RCA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음반뿐 아니라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해 왔던 그는 출판사 칵스 뮤직(Kags Music)과 레코드레이블 SAR을 설립해 뮤직비즈니스에 본격 착수했다. RCA에 둥지를 튼 쿡은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싱글 ’한 사슬에 묶인 옥외 노동죄수들‘(Chain gang, 1960년 싱글2위)로 팝과 소울에 새 지평을 열었으며 블루스적인 로맨틱 ‘슬픈 분위기(Sad mood, 1960년 싱글29위), 목가적 로맨틱 소울 ’큐피드‘(Cupid, 1960년 싱글17위), 보통의 댄스넘버 ‘밤새도록 트위스트를 춰요’(Twistin’ the night away, 1962년 싱글9위), ’나의 집으로 그걸 가져오세요‘(Bring it on home to me, 1962년 싱글13위)’와 같이 다채로운 음악요소와 사회적 인식을 한데 엮어낸 곡들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곡들을 포함, 무려 13곡의 히트넘버가 2년간 차트를 장식했다. 틴에이저와 기성세대 그리고 흑인 전 세대에 걸쳐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그는 특히 백인 청취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흑인뮤지션에게 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1957년 초 뉴욕 코파(Copa)에서 연주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했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왔다. 경험미숙이 문제였다. 1964년 그는 그러나 당당하게 클럽으로 컴백해 라이브실황을 녹음했고 그해 가장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수확을 올렸다. 중년과 백인중산층만을 위한 무대가 됐다는 주위의 냉정한 평가가 뒤따르긴 했지만. 1963년 중반 쿡은 마이애미의 할렘 스퀘어 클럽에서의 공연과 실황을 담은 음반으로 자신의 진가를 확증했다. 흑인청취자들과 함께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열창하며 황홀한 연주무대를 통해 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소울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라이브 레퍼토리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라이브의 황제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63년 중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한 것. 쿡은 그해 말까지 깊은 시름에 잠겨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매니저 앨런 클라인(Allen Klein)과 함께 재정적으로 그리고 음악활동을 위한 독립의 발판을 견고히 다졌다. 1963년 11월 초 마침내 그의 레코드들에 대한 최종 소유권을 확보했고 지휘감독권도 성취했다. 그가 다시 음반작업에 들어갈 즈음은 1960년대 초의 저항음악적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쿡은 흑인들을 포함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치료제와 같이 작용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 크게 감화되었다. 피터, 폴&메리도 그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커다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식있는 아티스트들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에 그도 두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변화(의 시기)는 올 겁니다’(A change is gonna come)가 이때 나왔다. 공민권투쟁의 산물로 나온 가장 위대한 노래중 하나. 가스펠부터 팝까지 다양한 음악성향 안에서 탄생한 이 곡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도 우아한 예술적 찬양가였다. 이 시기동안 그는 또한 싱글 ’Shake’ 를 통해 더 진보한 댄스 본위의 소울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두 노래는 쿡의 음악여정에 새로운 가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알리는 장이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꿈과 희망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64년 11월 11일 이른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저급한 모텔에서 쿡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언쟁에 휘말려 모텔매니저의 총탄을 맞고 싸늘히 식어갔다.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미궁으로 남았다. 쿡의 죽음으로 흑인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5년에 발매된 싱글 ‘A change is gonna come‘과 < Sam Cooke At The Copa > 앨범이 그랬듯 싱글 ‘Shake’는 유작으로 사후 탑 텐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Edith Piaf (에디뜨 피아프 )
< 작은 체구 큰 노래 -세기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 > 지금은 미국이나 영국의 음악에 밀려 유럽 가수들의 노래는 거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샹송이나 이탈리아 칸소네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내의 당시 팝 팬들도 영미가수들 못지 않게 이브 몽탕, 줄리엣 그레코, 밀바 등 유럽가수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 중에서도 40년대와 50년대를 석권한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 < 작은 체구 큰 노래 -세기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 > 지금은 미국이나 영국의 음악에 밀려 유럽 가수들의 노래는 거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샹송이나 이탈리아 칸소네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내의 당시 팝 팬들도 영미가수들 못지 않게 이브 몽탕, 줄리엣 그레코, 밀바 등 유럽가수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 중에서도 40년대와 50년대를 석권한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는 전세계에 걸쳐 지명도를 확립한 금세기 톱 가수로 남아 있다. 시사주간지「뉴스위크」는 얼마 전 ‘20세기 100년의 스타들’ 특집을 마련하면서 에디트 피아프를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하고 별도의 지면을 할애했다. 그녀가 이처럼 지난 세기의 위대한 음악유산으로 기록되는 것은 단지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서 또 혼을 토해내며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파괴력이 탑재된 그 막강한 소리가 왜소한 체구의 여성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나면 더욱 경이롭다. 피아프는 참새라는 뜻의 파리 속어로 그를 스타로 키워준 카바레 주인 루이 레플레가 그의 작은 체구를 두고 붙여준 별명이다(카바레는 지금 성인오락장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작은 뮤직 홀이었다). 1915년에 태어나 2차 대전 때인 1939년에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작은 거인’ 피아프의 인생은 비참했다. 어머니는 피아프를 낳자마자 도망쳤고 아버지 역시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녀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90년대의 여가수 리앙 폴리는 말한다. “피아프는 안락과 돈이란 조금도 없이 시작해 길거리에서 노래했다. 지금의 흑인 랩 가수들과 다를 게 없다. 진실로 사랑의 이야기와 세상의 곤궁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혁명적이었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프랭크 시내트라와 빙 크로스비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번 연예인이 됐지만 그랬어도 그녀의 생은 언제나 불행했다. 헤비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이브 몽탕, 자크 필스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내내 술과 진통제에 의존해 살아갔다. 최근 영화 「노팅 힐」에서 엘비스 코스텔로가 불러 히트한 곡 ‘그녀(She)''의 오리지널 가수 겸 작곡자이며 ‘샹송의 대부’로 추앙되는 샤를르 아즈나부르는 이렇게 술회한다. “피아프는 복서 마르셀 세르당을 사랑했지요. 그는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 있었고 피아프는 베르샤이유에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당은 피아프와 같이 있기 위해 일찍 떠났고 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지요. 그녀는 이틀 아니면 사흘 자기 방에 꼭 박혀 있더니 삭발하고 나타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불렀습니다. 방에서 그 곡의 가사를 완성하여 죽은 세르당을 위해 노래한 것입니다.” 피아프의 또 다른 고전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도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이 빚어낸 곡이다. 이처럼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이 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가 우리에게 감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피아프는 음악과 예술에 헌신한 사람이다. 결코 인기나 영예를 노리고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죽기 전 무대에서 노래부르다 쓰러져 스탭이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고 했으나 그가 피아노 레그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노래를 끝까지 마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파니 핑크」에 사용되어 재조명된 후반기의 절창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위시한 그의 무수한 노래를 듣고 있으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가공할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스캔들, 비극, 알코올중독을 먼저 기억하고, 실상 그것들이 피아프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상승시킨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기적 열창의 절대 파워가 빚어내는 미학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어떤 평자가 묘사한 것처럼 신성한 광기(Divine madness)라고 할까. 하지만 그녀는 노래의 터뜨릴 때를 알았던 것처럼 속삭일 때를 알았고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놓을 때를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노래에는 폭발과 절제가 절묘하게 동거한다. 간혹 전문가들은 그녀가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녀의 노래에 투영된 진실성과 불굴의 에너지만으로도 피아프가 ‘세기 최고의 여가수’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여가수를 집대성한 저서「시 밥」을 쓴 루시 오브리엔은 그녀를 ‘잔다르크와 동등한 팝 히로인’으로 표현했다. 1963년 48살의 길지 않은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녀가 역사에 남긴 자취는 거대하다. 그녀야말로 지금 여가수의 텃밭이 된 ‘팝 발라드’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여가수는 노래를 이렇게 해야 감동을 부른다’는 패턴을 시범한 것이다. 샹송이 프랑스를 넘어 ‘국제 음악언어’로 승격된 것도 다름 아닌 피아프의 공헌이다. 그녀는 또한 54년 미국을 방문해 피아프 열풍을 일으키면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미국판 피아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주디 갈란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명백히 그녀의 영향을 흡수하여 스타덤에 오른 인물들이다. 에디트 피아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가수는 목숨을 걸고 노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노래로 승부하지 않고 요란한 의상과 차림이나 섹시한 자태 등 음악외적인 측면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요즘 여가수들이 바로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인기와 명성에만 중독이 되어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 이런 무대에 대한 천착이 있을 리 만무다. 그러니 그들의 노래에서 어찌 그녀와 같은 카리스마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사망한지 어느덧 35년 이상이 흘렀어도 아직도 에디트 피아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Listen To Me : 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와 빅 바퍼 리차드슨 주니어 (The Big Bopper Richardson Jr)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천재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영원한 별이 된 그날을 일컬어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음악이 숨을 거둔 날(The Day Music Has Died)"라고 말했다. 수많은 로큰롤의 별들이... Listen To Me : 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와 빅 바퍼 리차드슨 주니어 (The Big Bopper Richardson Jr)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천재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영원한 별이 된 그날을 일컬어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음악이 숨을 거둔 날(The Day Music Has Died)"라고 말했다. 수많은 로큰롤의 별들이 명멸해 갔지만 버디 홀리가 숨을 거둔 그날 음악도 죽었다라고 일컬을 만큼 버디 홀리가 남겨준 유산은 그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2011년 9월 7일 그의 75회 생일을 맞아 발매된 이 앨범은 일주일 간격으로 Rave On(Fantasy/Concord)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또 한 장의 트리뷰트 앨범과 함께 그가 뿌려준 음악적 세례에 대한 수혜자들의 즐거운 음악적 고백들이다. 특히 이 앨범을 제작한 피터 애셔(Peter Asher)는 그의 영국판 카피캣이었던 피터 & 고든 (Peter & Gordon)의 바로 그 인물이란 점에서 그가 평생 동안 가져왔던 그의 음악적인 멘토였던 버디 홀리에 대한 뒤늦은 감사의 표시이다.

1957년 데뷔해서 1959년 2월 사망하기까지 불과 18개월 동안 세 장의 앨범과 남겨 놓은 명곡들은 그의 음악적 인생을 반추해 보기엔 너무나 작은 숫자이지만, 그가 남겨준 음악적 영향력은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너무도 명백해 보인다. 음악적으로 두 대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밴드의 전형을 제시한 그는 외향적으로도 결코 록큰롤이 반항의 음악만이 아니었음을 그의 스타일로 입증했다. 엘튼 존에서 존 레논에 이르기까지 그의 외모가 결코 록스타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보여주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심지어 비틀즈의 이름 역시 그의 밴드 크리켓츠(귀뚜라미들)에서 따왔으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첫 레코딩 역시 버디 홀리의 That'll Be The Day 였으며, 롤링 스톤즈의 최초의 히트곡도 Not Fade Away 였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비트와 모드세대 전반을 걸쳐 록큰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Words of Love)에서 롤링 스톤즈(Not Fade Away)에 이르는 브리티쉬 인베이젼에서부터, 제임스 테일러(Everyday)에서 돈 맥클린(Mayby Baby) 등의 싱어송라이터뿐 아니라. 험블 파이 (Heartbeat), 이레이져 (True Love Ways). 그레이트풀 데드 (Not Fade Away), 블론디 (I'm Gonna Love You Too), 블라인드 페이스 (Well All Right), 모터헤드(Love's Made a Fool of You) 등 다양한 장르의 록밴드들의 음악적 자양분의 근간에 그의 음악이 있었던 점은 지난 오십년 간의 역사를 넘어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이 앨범에 참여한 폭넓은 스펙트럼의 아티스트들 링고 스타와 브라이언 윌슨과 같은 동시대의 뮤지션에서부터, 록의 다양성을 펼쳐낸 스티비 닉스(Fleetwood Mac), 잭슨 브라운, 제프 린(E.L.O), 린다 론스태트를 거쳐 크리스 아이작, 나탈리 머천트(10000 Maniacs), 팻 모나한(Train), 더 프레이, 패트릭 스텀프(Fall Out Boy), 주이 데샤넬, 이멜다 메이에 이르기 까지 그의 음악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오며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한 장의 음반에서 감동적으로 만나 볼 수 있다.

특히, 이 앨범이 참여한 거의 모든 아티스트에 그래이엄 내쉬, 폴 앵카, 키쓰 리차드와 보즈 스캑스 등의 슈퍼스타가 모두 모여 그의 75주년 생일이었던 2011년 9월 7일 헐리우드의 뮤직 박스 씨어터에서 성대한 축하공연이 열려 더욱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속에 녹아든 그의 음악의 다양한 일면들은 그의 음악이 그의 사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한 생명력으로 이 시대의 팝음악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 시켜준다.

그리고 잭슨 브라운은 돈 맥클린의 말에 대해 이렇게 화답했다.
"그날은 음악이 죽은 날이 아니다. 바로 음악이 불멸의 날이 된 날이다."
노래 : Dion (디온,Dion DiMucci)
멤버 : 낸시 오버튼(Nancy Overton), 캐롤 부시만(Carol Bushman), 린 에반스(Lynn Evans), 지니 오스본(Jinny Osborn) 멤버 : 낸시 오버튼(Nancy Overton), 캐롤 부시만(Carol Bushman), 린 에반스(Lynn Evans), 지니 오스본(Jinny Osborn)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노래 : Bert Kaempfert (베르트 켐페르트)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멤버 : 존 밀스 주니어(John Mills Jr., 바소, 기타), 허버트 밀스(Herbert Mills, 테너), 해리 밀스(Harry Mills, 바리톤), 도날드 밀스(Donald Mills, 리드테너) 멤버 : 존 밀스 주니어(John Mills Jr., 바소, 기타), 허버트 밀스(Herbert Mills, 테너), 해리 밀스(Harry Mills, 바리톤), 도날드 밀스(Donald Mills, 리드테너)
리브스(Jim Reeves)는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50~60년대를 주름 잡았던 스탠더드 팝과 내쉬빌 사운드의 대가로 컨트리와 팝의 크로스오버인 ‘컨트리 팝’ 음악계에서 특히 빛을 발했던 가수이다. 신사적인 풍모로 '젠틀맨(Gentleman)’으로도 불리던 그는 1924년 8월 20일 텍사스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교시절에 투수로서 명성을 날려 장학금을 받고서 ‘42년에 텍사스 주립대에 입학... 리브스(Jim Reeves)는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50~60년대를 주름 잡았던 스탠더드 팝과 내쉬빌 사운드의 대가로 컨트리와 팝의 크로스오버인 ‘컨트리 팝’ 음악계에서 특히 빛을 발했던 가수이다. 신사적인 풍모로 '젠틀맨(Gentleman)’으로도 불리던 그는 1924년 8월 20일 텍사스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교시절에 투수로서 명성을 날려 장학금을 받고서 ‘42년에 텍사스 주립대에 입학을 했다. 대학에서 일급투수로 활약하다가 센트루이스의 프로야구팀 카디날스의 스카우트에게 발탁되어 마이너 리그에서 3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나 연습도중 발목부상으로 인해 야구를 그만두게 된 후, 루이지애나 주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겸 DJ로 재출발하게 된다. ‘40년대 후반에 서부 스윙(Western swing) 밴드인 문 물리컨(Moon Mullican)의 멤버가 되었으며, 물리컨 스타일의 “Each Beat of my Heart” 등의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가수로서의 전기는 ‘52년에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Hayride) 쇼’의 진행자로 일하던 중에 유명가수 슬리피 라비프(Sleepy LaBeef)가 펑크를 내자 땜빵 가수로 무대에 서게 되면서 기회를 얻게 된다. ‘49년도에 첫 레코드를 취입하고 ‘52년에 애보트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그 돌파구가 된 것은 ‘53년에 "Mexican Joe" 를 싱글로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초기에 그의 목소리는 전형적인 컨트리 웨스턴 가수처럼 고음으로 노래를 했다. 이후 쳇 애킨스(Chet Atkins)를 만나게 되면서 도움을 받아 창법을 바꾸어 ‘57년에 "Four Walls"을 발표한다. 그리고 ‘59년에 발표한 “He'll Have To Go”가 ‘60년에 엄청난 히트를 하면서 정상에 올랐고 ‘50~60년대를 화려하게 주름잡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41 번째 생일을 20여일 앞둔 ‘64년 7월 31일, 자신이 직접 단발 경비행기를 조종하여 테네시주 내시빌로 돌아가던 도중, 폭풍우에 의한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하였다. 불행하게도 인기절정의 시기에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노래 : Charles Trenet (샤를르 트레네)
영화배우, 팝 가수 영화배우, 팝 가수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블루스의 큰 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를 손꼽는다. 즉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블루스 신을 개척한 인물로, 남부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슬라이드 기타 주법과 그가 토해내는 한풀이 식의 노래는 당시 혁명을 불러왔다. 수면 도중 심장마비 증세로 1983년 4월 30일,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누구보다 블루스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시킨 ‘블루스 거목’으로 기억된다. 그에게 영향 받은 이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머디 워터스는 훗날 후배 블루스맨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머디 워터스의 초기 레코딩에서 밴드의 이름을 따온 롤링 스톤스 뿐만 아니라 척 베리,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존 메이올, 버디 가이, 에릭 클랩튼, 피터 그린, 자니 윈터 등은 머디의 계승자들. 일례로 머디 워터스의 골든 레퍼토리를 장식하는 ‘Standing around crying’, ‘Rollin’ and tumblin’, ‘Hoochie coochie man’, ‘Honey bee’ 등은 당대 걸출한 뮤지션들을 블루스의 세계로 인도했다. 때문에 블루스 역사는 그를 두고 ‘일렉트릭 블루스의 왕(The King of Electric Blues)’이라 칭송한다. 1915년 4월, 매킨리 모건필드(McKinley Morganfield)라는 본명으로 남부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머디 워터스의 이름은 정작 별명에서 유래되었다. 어릴 적부터 진흙탕에서 기타 치며 뛰어 놀길 좋아하던 그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그의 얼굴 생김새만 봐도 금새 진흙이 연상될 정도. 일찌감치 ‘델타 블루스의 거성’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과 선 하우스(Son House)의 레코딩에서 자극 받아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구축한 그는 1943년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연주 여행을 떠난다. 1948년 곡 ‘I can’t be satisfied’, ‘I feel like going home’을 시작으로 1951년과 1956년 사이에 머디는 ‘Hoochie coochie man’, ‘Just make love to me’, ‘Still a fool’ 등 14개의 히트 송을 배출하게 된다. 머디 워터스를 논할 때 그의 음악을 빛내준 < 체스 > 레코드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가 무려 30년 간 < 체스 >와 파트너십을 지속시켰고, 그곳에서 다수 앨범을 내고 연주 인생을 꽃피우기 때문이다. 로큰롤 명인 척 베리(Chuck Berry)와 보 디들리(Bo Diddley) 등도 거기 출신. 그 후 < 콜롬비아 >에서 발표한 1977년 앨범 < Hard Again >은 후반기 대표작이다. 머디의 음악 생애는 사후 4년 뒤인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적되면서 전설로 남았다. 모던 블루스의 왕좌에 오른 비비 킹(B. B. King) 마저도 그를 존경했고, 에릭 클랩튼은 1994년 음반 < From The Cradle >을 그에게 헌사했다. 2004년 3월 < 롤링스톤 >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명인 50인’ 순위에는 17위로 랭크돼 그 존재 가치를 더했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딴 블루스 가게마저 생길 정도로 머디 워터스의 존재는 20세기 대중음악 역사를 빛낸 ‘블루스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비탄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왜냐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전설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가 지난 2001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는 거칠고 투박한 보컬과...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비탄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왜냐면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전설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가 지난 2001년 6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그는 거칠고 투박한 보컬과 대쪽같이 올곧은 기타로 대변되는 블루스의 원형을 1948년 첫 싱글 ‘Boogie chillen’부터 시작하여 한차례의 변화도 없이 반세기 넘게 줄곧 지켜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트를 자유자재로 세분화하여 만들어 내는 독창적인 부기 그루브는 그를 ‘부기의 왕(King Of The Boogie)’의 지위에 올려놓았고, 슬프고 애절한 델타 목화밭의 노동요는 그를 ‘진정한 블루스맨’으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생전에 그가 남긴 100장이 넘는 방대한 디스코그라피와 ‘Boogie chillen’, ‘Boom boom’, ‘I’m in the mood’, ‘Crawling king snake’ 등의 불멸의 고전 등에서 쉽게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그만큼 그에게 블루스는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고달팠던 삶의 궤적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항상 어루만지면 위안을 주던 유일한 친구였다. 존 리 후커는 1917년 8월 22일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클라크스데일(Clarksdale)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십대 시절 양아버지인 윌 무어(Will Moore)에게 기타를 배우며 흑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노예나 다름없었던 비참한 소작농 삶을 벗어나고자 열 네 살 되던 해에 군대에 입영한 것을 시작으로,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의 극장 안내원,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서의 공장 노동자, 그리고 모타운 디트로이트에서의 자동차 공장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을 횡단하며 갖은 고생을 겪었다. 물론 그 시기에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델타 블루스의 명맥을 이어갔는데, 점차 대도시로 이동해가면서 기타를 낡고 허름한 어쿠스틱에서 세련되고 큰 소리를 내는 일렉트릭 블루스로 바꿨다. 기타를 교체한 이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큰 도시의 생활을 음악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고출력의 앰프로 무장한 전기 기타가 필수였다. 이런 후커의 이동 경로와 음악적 변화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미시시피 지역의 블루스 뮤지션들과 흑인들에게 이미 이뤄졌던 사항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델타 지역의 목화밭에 목화를 해치는 병충해가 강타하면서 많은 흑인들이 일자리를 잃어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였던 것이다. 시카고가 일렉트릭 블루스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3년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여 가스펠 싱어와 블루스 연주자로 경력을 쌓아가던 그는 1948년 주술적인 측면이 강하게 느껴지는 ‘Boogie chillen’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Boogie chillen’은 존 리 후커의 원시적인 보컬과 강한 기타 연주에 힘입어 레이스(Race) 시장(후일 R&B로 바뀜)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미 전역에서 5년 동안 100만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부기의 왕은 이 당시에 비비 킹(B.B King),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이 속해있던 LA의 < 모던 레코드(Modern Records) >와 계약을 체결했다. < 모던 레코드 >는 비하리(Bihari) 형제들이 세운 음반사로 하울링 울프(Howlin’ Wolf), 리틀 월터(Little Walter),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등이 몸담고 있던 시카고의 < 체스 레코드(Chess Records) >와 함께 리듬 앤 블루스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49년부터 1954까지 존 리 후커는 < 모던 레코드 > 산하의 < Acorn Regal >, < Gotham >, < Staff >, < Chart > 등을 포함한 21개의 군소 레이블에서 델타 존(Delta John), 자니 리(Johnny Lee), 자니 윌리엄스(Johnny Williams), 부기 맨(The boogie Man), 존 리 부커(John Lee Booker) 등의 예명으로 70 여장의 싱글을 발표하며 < 모던 레코드 >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도어스(Doors)가 리메이크한 1949년 작품 ‘Crawling king snake’, 1951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를 주름잡은 ‘I’m in the mood 등이 주요 히트곡들이다. 1950대 중반 로큰롤의 탄생과 함께 존 리 후커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59년 < Folk Blues >를 시발점으로, 1960년 < That’s My Story >, < I’m John Lee Hooker >, < Travelin’ >, 1962년 < Burnin’ > 등을 연속해서 발표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 Burnin’ >에 수록된 ‘Boom boom’은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음악 시장이 낙관적인 서핑 뮤직과 스탠더드 팝으로 기울면서 점차 잊혀져 갔다. 그를 포함해서 로큰롤의 광풍에 한 축을 담당했던 흑인 블루스 뮤지션들이 암흑의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고국 미국에서 후커를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을 때, 한편 대서양 건너편의 영국에서는 그의 음악을 연구하고 들으며 새롭게 재창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4년 애니멀스(Animals)가 후커의 ‘Boom boom’과 ‘Dimples’를 재해석한 것이 좋은 증거이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영국에 불어닥친 블루스 리바이벌 붐으로 이어져 존 리 후커를 부활시켰다. 1967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커는 < ABC > 레코드사와 앨범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 It Serves You Right To Suffer >, 1년 뒤인 1968년에는 < Urban Blues >, 그리고 1969년에는 < Simply The Truth > 등을 내놓으며 블루스 거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으로 금의환향하여 1971년 부기록 밴드 캔디드 히트(Canned Heat)와 공동으로 더블 앨범 < Hooker ’N’ Heat >(73위)발표했고, 그해 말에는 밴 모리슨(Van Morrison)이 피처링한 음반 < Never Get Out Of These Blues Alive >(130위)를 공개하는 등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70년대 싱어 송 라이터 시대의 개막은 또 다시 존 리 후커를 지하세계로 몰아 넣었다. 블루스맨은 부정기적으로 앨범을 발표하면서 시름을 달랬고, 1980년 영화 < 블루스 브라더스(The Blues Brothers) >에 카메오로 출연하여 잠깐 대중들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켰을 뿐 20년 가까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불어닥친 2차 블루스 리바이벌 열풍은 존 리 후커를 과거에서 현재로 화려하게 컴백시켰다. 후커는 자신의 음악인생 40주년이 되는 1989년에 발표한 앨범 < The Healer >(미국 62위, 영국 63위)에 수록된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와의 듀엣곡 ‘I’m in the mood’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트래디셔널 블루스 레코딩’ 부분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재기작 < The Healer >는 보니 레이트를 비롯하여 로버트 크레이(Robert Cray),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로스 로보스(Los Lobos) 등 쟁쟁한 후배뮤지션들이 참여하여 부기의 왕에게 힘을 실어줬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때부터 존 리 후커에 대한 음악계의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조 카커(Joe cocker), 알버트 콜린스(Albert Collins), 라이 쿠더(Ry Cooder), 보 디들리(Bo Diddley), 자니 윈터(Johnny Winter) 등이 출연한 1990년 10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존 리 후커 트리뷰트’ 콘서트, 1991년 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헌액 등이 그것이다. 후커 역시 고희가 넘은 고령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 Mr. Lucky >(1990년), < Boom Boom >(1992년), < Chill Out >(1995년), < Don’t Look Back >(1997년) 등을 내놓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존 리 후커는 2001년 6월 21일 세월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영면했다. 그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비비 킹은 “나는 매우 좋은 친구를 잃었고, 세상은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며 슬퍼했고, 유투(U2)의 보노는 “그의 죽음은 비극이라며”말을 잊지 못했다. 흑인의 고통을 대변했던 블루스, 그 고통의 음악을 껴안았던 존 리 후커. 그는 이제 고통이 없는 낙원을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편히 잠드소서.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밴드 : Dick Dale & His Del-Tones (딕 데일 앤 히스 델-톤스)
밴드 : Booker T. & the M.G.'s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멤버 : 행크 마빈(Hank Marvin, 보컬), 브루스 웰치(Bruce Welch, 기타), 브라이언 베네트(Brian Bennett, 드럼) 멤버 : 행크 마빈(Hank Marvin, 보컬), 브루스 웰치(Bruce Welch, 기타), 브라이언 베네트(Brian Bennett, 드럼)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544-7758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