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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우드스탁 스페셜 에디션 (Woodstock PA Mono Version) [3LP]

2019년 RSD 한정반

[ 모서리 눌린 부분이 있어서 할인 판매합니다. ]
Richie Havens, Arlo Guthrie, Country Joe Mcdonald, Joan Baez, Crosby, Stills & Nash 노래 외 1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Warner Music / Atlantic Records | 2019년 05월 0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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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탁 스페셜 에디션 (Woodstock PA Mono Version) [3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5월 08일
제조국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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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이벤트 (1개)

음반소개

디스크

LP1
  • A1 John Sebastian - I Had A Dream 2:35
  • A2 Canned Heat - Going Up The Country 3:20
  • A3 Richie Havens - Freedom 4:36
  • A4 Country Joe And The Fish - Rock & Soul Music 2:08
  • A5 Arlo Guthrie - Coming Into Los Angeles 2:07
  • A6 Sha-na-na - At The Hop 2:00
  • B1 Country Joe McDonald - The "Fish" Cheer/I-Feel-Like-I’m-Fixin’-To-Die Rag 3:15
  • B2 Joan Baez, Jeffrey Shurtleff - Drug Store Truck Drivin’ Man 2:07
  • B3 Joan Baez - Joe Hill 2:40
  • B4 Crosby, Stills & Nash - Suite: Judy Blue Eyes 8:11
  • B5 Crosby, Stills, Nash & Young - Sea Of Madness 3:24
LP2
  • C1 Crosby, Stills, Nash & Young - Wooden Ships 5:27
  • C2 The Who - We're Not Gonna Take It (from "Tommy") 4:25
  • C3 Joe Cocker -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7:40
  • D1 Santana - Soul Sacrifice 8:06
  • D2 Ten Years After - I’m Going Home 9:20
LP3
  • E1 Jefferson Airplane - Volunteers 2:44
  • E2 Sly & The Family Stone - Dance To The Music 2:10
  • E3 Sly & The Family Stone - Music Lover 6:59
  • E4 Sly & The Family Stone - I Want To Take You Higher 4:07
  • E5 John Sebastian - Rainbows All Over Your Blues 2:10
  • F1 The Paul Butterfield Blues Band - Love March 7:45
  • F2 Jimi Hendrix - Star Spangled Banner/Purple Haze & Instrumental Solo 12:45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16명)

노래 : Arlo Guthrie (알로 거스리,Arlo Davy Guthrie)
노래 : Joan Baez (조안 바에즈 ,Joan Chandos Baez)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것도 두 사람의 공이었다. 남자는 밥 딜런이요, 여자는 존 바에즈였다. 존 바에즈는 포크 프로테스트 시대에 딜런의 여성 대응자(對應者)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처럼 딜런과 ‘평등’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딜런보다 더 오래 간직했다. 딜런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정치성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바에즈는 끝까지 시대의 변화에 타협하지 않고 현실적 테마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노선조정 이후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딜런과 달리 그의 여성 파트너는 레코드 회사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등 제도권의 박해공작에 시달렸다. 또 하나 바에즈가 ‘비교 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포크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바에즈가 딜런보다 시간상 한 발 앞섰다는 사실이다. 딜런이 1959년 미네소타 대학 주변의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있을 때 바에즈는 제1회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 1만 3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했다. 딜런이 첫 앨범을 발표하여 신고식을 마친 1962년에 바에즈는 이미 스타로 떠올라 < 타임 >지의 커버스토리에까지 등장했다. 따라서 ‘포크 대중화의 선두주자’는 딜런이 아니라 엄연히 존 바에즈였다. 이를테면 그가 딜런의 선배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를 ‘딜런의 여성 대응자’라 일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딜런 우월주의(?) 혹은 습관적인 성차별이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존 바에즈는 실로 약자(弱者)를 위한 여교사와 같았다. 그는 늘 힘없는 사람과 상처받는 사람 편에 서서 노래했다. 세상살이에 뒤쳐지고 외롭고 망가진 사람들을 위해 통기타를 울렸고 미국내의 약자 가운데 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이주민의 정서를 노래에 자주 실었다. 모든 ‘어둠의 자식들’이 존 바에즈의 진정한 벗이었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존 바에즈의 올타임 리퀘스트들인 ‘세상의 가련한 길손’, ‘도나도나’, ‘솔밭 사이에 강물은 흐르고’ 등이 깊은 애조를 띠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약자의 편에서 노래를 하니 그 가락이 슬플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바에즈는 그들을 달랜 것만이 아니라 잊혀진 자유, 잃어버린 권리를 쟁취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시장으로 가는 짐차 위의 슬픈 눈망울의 송아지 한 마리, 그 위로 제비 한 마리가 날고 있네... 농부가 말했지. 불평일랑 하지 마. 누가 멍에를 쓰라고 했니. 넌 왜 제비처럼 자랑스레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날개가 없니... 송아지는 쉽게 갇혀 도살되지. 이유도 모른 채.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제비처럼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지’ ‘도나 도나(Donna Donna)’ 존 바에즈는 나아가 이런 소외받는 계층 위에 군림하는 미국 정부, 그러면서도 전쟁만을 밝히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너무 이상한 꿈(Strangest dream)’과 같은 반전가요를 잇따라 발표했고 심지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듯한 과격한 노래까지 불러 주위를 깜짝 놀라게도 했다. 정치색이 짙은 노래를 지향한 맹렬 여성의 이미지는 이미 출생 순간부터 고리가 맺어진 운명이었다. 존 바에즈는 1941년 멕시코가 모국인 아버지, 스코틀랜드와 아이랜드 피가 섞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피부는 검었다. 백인 지배의 세상이었으니 어렸을 적부터 인종차별에 직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인구 8백 명인 뉴욕의 조그만 클레어렌스센터 마을에서 본낸 소녀시절에 대한 짧은 술회는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 우리는 니그로였다.” 그의 부친은 핵물리학자였다. 그래서 방위산업체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곤 했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을 알고 있는지라 번번히 거절했다고 하다. 존 바에즈의 아버지는 뼈대있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보다는 인류애’를 선택하는 이러한 줏대는 고스란히 딸에게 대물림한다. 딸은 민중적, 반(反)상업적 성격을 특질로 하는 포크 음악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집에서 들은 음악은 바하, 비발디, 모차르트였고, 여고시절에는 교내합창단(캘리포니아 팔로 알토 소재의 학교)에서 노래를 불러 다분히 ‘클래식적인’ 분위기였지만 마음은 통기타에 끌렸다. 졸업 직전 주머니를 털어 시어즈 로벅 기타를 구입한 그는 모친의 영향으로 보스톤 대학의 연극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학업에는 뜻이 없었고 포크의 전당인 하바드 스퀘어 주변의 다방을 드나들곤 했다. 그는 한때 1년 공연 개런티로 10만 달러 이상을 주겠다는 프로모터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바 있다. 그는 “포크 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 뮤직으로 말할 수 없다”며 거부 이유를 밝혔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존 바에즈는 이 세상이 부자와 빈자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초기 노랫말을 보면 약자의 교사답게 ‘가난’이라는 어휘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난 가난한 소녀야. 운명이 변변치 못하지. 날 항상 쫓아다니는 짐마차꾼의 아이가 있지. 그 앤 밤낮으로 날 유혹하지... 우리 부모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가난하기 때문이래. 따를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그 돈은 자기 것인데.’ ‘짐마차꾼 아이(Wagoner`s Lad)’ ‘삶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아마 부자는 살고 가난한 자는 죽어야 할거야. 신이여, 나의 시련을 끝내주소서.’ ‘나의 시련(All My Trials)’ 미리 지적했듯 존 바에즈는 1950년대 말 보스톤으로 이사와 하바드 스퀘어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수면위 급부상의 기틀을 다진다. 이윽고 1959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포크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는데 얼마전 이를 담은 음반이 국내에 소개되었다)에 출연, 1만3천 명 청중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당시 < 뉴욕 타임즈 > 기자 로버트 셀톤이 그 관객들 가운데 끼어 있었고 그는 바에즈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스타가 탄생했다’는 기사를 썼다. 셀튼 기자는 그녀를 ‘전율을 자아내는 풍부한 비브라토와 열정적이고 잘 통제된 전달능력을 소지한 젊은 소프라노’라고 극찬했다. 1962년 < 타임 >지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존 바에즈는 현 포크진영의 신인 가운데 가장 재능있는 가수’라고 언급했다. 그 해 그녀는 3장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포크 무대에서 자신의 ‘남성 대응자’인 밥 딜런과 조우하여 함께 뉴 포트 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등 콤비플레이를 전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존 바에즈는 관념적 지성을 배격하고 실천적 가치를 최고로 삼고 사고를 행동에 직결시키려는 자세로 살아갔다. 단호하고 대담하기만 했던 그의 행적을 약식으로 정리해 본다. *1963년 8월 : 흑백 차별 폐지와 인종평등을 기치로 내건 워싱턴 대행진에 참여 *1964년 4월 : 자신에게 부과된 1963년 소득세의 60%에 대해서는 납세를 거부한다고 국세청에 통보(그 60%가 국방비로 지출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1964년 11월 : 국세청은 1963년 소득세의 납부 거부에 대해 5만1백82달러의 벌금을 부과(1965년 12월에는 1964년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은 데 대해 3만7천달러의 벌금을 부과했고 1966년 12월에도 전년도 소득세를 내지 않아 세액이 75%증가했다고 통보. 2년 연속 그의 납세거부 이유는 ‘월남전 분위기 고조’였다) *1965년 4월 : 백악관 정문에서 반전 시위 *1966년 12월 : 1964년 데스로 죄수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감형을 촉구하는 크리스마스 기도회에 참석 *1967년 9월 : 징병거부자를 대상으로 입대영장 반송 운동을 조직화하는데 가담(5백명이 실행) *1967년 10월 :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육군 검사대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연좌 농성. 해산하지 않고 도로를 점령, 통행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3명 모두 10일간 수감(집안 전체가 운동권이다!) *1968년 3월 : 징병거부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연대, 여학생들에게 ‘No라고 말하는 남학생들한테 Yes’할 것을 촉구 반전과 인종평등을 위한 것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연좌 농성, 프리덤 라이드, 데모, 시가행진 등 모든 형식의 ‘저항’에 적극 참여했으며, 그런 것들이 순회공연을 대신했고 또 그런 것들이 순회공연 내용이기도 했다. 심지어 1965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카멜 밸리에 있던 교사(校舍)를 개조해 ‘비폭력 연구사무소’(그 모토는 비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이긴다)를 개설하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은 『간디와 핵시대』와 같은 평화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평화에 대한 세미나와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물론 존 바에즈! 그런데 카벨 밸리의 일부 주민들은 연구소 회원과 수강생들이 ‘아름다운’ 자기네 영토에 침투,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즉각 연구소 활동을 중지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 눈에는 이들이 히피, 그리고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위험 인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클레임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연구소는 상당 기간활동을 지속했다. 마을주민뿐 아니라 미국 정부도 존 바에즈를 ‘통기타치는 파괴분자’쯤으로 간주했고 ‘페스트’같은 존재로 치부했다. 그가 대학생들에게는 ‘명성’일지 몰라도 정부에게는 ‘악명’이었다. 여러 차례 정부 관계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해왔지만, 그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현장을 뛴 동지이자 운동권의 지휘자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다. 개혁과 투쟁을 결혼생활에 까지 이어간 이런 여성이 어찌 제도권의 협박에 흔들렸으랴. 우리에게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로맨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녀는 딜런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딜런도 그를 모델로 한 ‘조안나의 비전(Vision of Johanna)’ 등의 곡을 써 간접적으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이 부분은 입장의 동일함(기간이 짧았지만)에 의한 동지애로 평가해야 할 줄로 여긴다.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면 밥 딜런은 포크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등 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으로 추대되는 반면 막상 존 바에즈는 음악적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록 평론가들 중에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꼽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그가 직접 곡을 쓰지 못했다는 실력 폄하와 포크는 했지만 너무나 고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거부감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딜런도 언젠가 “존 바에즈의 목소리는 포크하기에 너무 아름다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실상 음반 판매면에서는 딜런을 앞서나갔고, 특히 포크의 프로테스트적 성격을 오래 견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비평계가 조금은 잔인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1970년대 이후 존 바에즈에게 정치색은 즐어들고 대신 사회사업가적 면모가 나타난다. 음악에도 변화가 일어나 전속 레코드사가 뱅가드에서 A&M으로 바뀌면서 통기타의 자연음으로부터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로 탈바꿈, 딜런의 전철을 밟는다. 이렇듯 변화가 깃들고 존 바에즈라는 이름 자체가 갖는 신비력이 떨어지고 있던 1971년에 이르러서야 ‘올드 딕스를 내몰았던 밤(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라는 곡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0위권에 진입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1980년대에 그는 팝 음악의 공식 무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메이저 레코드사들의 기피 때문이다) 간간이 군비축소, 인종 차별 폐지, 자연보호 등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비록 반전가요나 이념송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입장선회로 빠지지 않았으며 50대인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지향하는 상업가요를 배격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실로 ‘1960년대의 존 바에즈’는 기념비적이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현실 반영과 저항의 올곧은 태도로 무대 또는 장외활동에 임했던 여가수는 그 외에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1963년 존 바에즈는 잡지 < 룩 >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는 행위, 인종차별로 정신을 말살시키는 행위 등과 같은 실제사건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다. 난 노래하길 좋아하고 신소리를 하자면 사람들은 내 노래 듣기를 좋아한다. 난 이 두 가지 측면을 결코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것들이 나의 모든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노래에 대한 애정도 계속되고 있다. 두 부분 아니 그의 모든 부분은 그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을 것이다. 1992년 말 존 바에즈는 버진 레코드사에서 앨범 < 나를 되돌려주오(Play Me Backwards) >를 발표했다. 그의 28번째 음반이었다.
노래 : Crosby, Stills & Nash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Stephen Stills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Stephen Stills
백인을 뜻하는 푸른 눈(블루 아이)과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소울이란 단어가 합해져 생성된 신조어 블루 아이드 소울(Blue eyed soul)은 말 그대로 백인이 흑인의 창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1944년 생인 조 카커(Joe Cocker)는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중에서도 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는 영국 셰필드 출신의 가수이다. 그가 발효시킨 영혼의 울림은 이 분야의 원조 격인 남성 듀엣 라이처스 ... 백인을 뜻하는 푸른 눈(블루 아이)과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소울이란 단어가 합해져 생성된 신조어 블루 아이드 소울(Blue eyed soul)은 말 그대로 백인이 흑인의 창법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1944년 생인 조 카커(Joe Cocker)는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중에서도 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는 영국 셰필드 출신의 가수이다. 그가 발효시킨 영혼의 울림은 이 분야의 원조 격인 남성 듀엣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와 대등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후에 등장하는 홀 & 오츠(Hall & Oates), 폴 영(Paul Young),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 폴 캐릭(Paul Carrack) 심플리 레드(Simply Red),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과 같은 푸른 눈의 백인 소울 싱어들에게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조 카커는 1969년에 열린 전설적인 콘서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외화 시리즈 < 케빈은 12살 >의 주제가로 쓰였던 비틀스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68위)’를 오징어 구워지듯 온 몸을 비비꼬는 무대 매너로 열창해 수많은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이 신인 소울 싱어와 ‘Soul sacrifice’를 연주한 역시 신인 산타나(Santana)는 이 페스티발에서의 멋진 공연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조 카커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만 3년 동안 3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것 외에도 다른 가수의 노래들을 많이 커버했다. 데이브 메이슨(Dave Mason)의 ‘Feelin’ alright(69위)’, 밥 딜런(Bob Dylan)의 ‘Just like a woman’과 ‘Dear Landlord’,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Bird on a wire’,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30위)’, 포크 록 그룹 러빙 스푼풀(Lovin’ Spoonful)의 ‘Darling be home soon’, 박스 탑스(Box Tops)의 ‘Letter(7위)’ 등의 트랙들을 재해석해 여러 장르의 음악들을 멋진 소울 음악으로 통일시켰고 록 감각의 ‘High time we went(22위)’로 당시 백인 소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음주 문제 때문에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그의 음악 활동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의 양 날개를 받쳐 준 사람은 비틀스와 각별한 사이였던 흑인 건반 연주자 겸 싱어 송라이터 빌리 프레스톤(Billy Preston)이었으며 그 결과물이 그의 대표작이 된 1975년의 ‘You are so beautiful(5위)’이었다. 임재범도 리메이크해 국내 신세대 가요팬들에게도 알려진 이 발라드로 조 카커는 다시 한번 화려한 비상을 했고, 1982년에는 영화 < 사관과 신사 >의 주제가 ‘Up where we belong’을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와 듀엣으로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은 물론,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반 국내의 나이트 클럽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신나는 소울 곡 ‘Unchain my heart’는 1987년에 발표한 음반의 타이틀곡으로 ‘Up where we belong’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노래이다. 하지만 이 곡은 본고장에서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숨은 보석이었다. 이 블루 아이드 싱어의 마지막 히트 곡은 1989년 말에 발표한 ‘When the night comes’로 싱글 차트 20위 권 진입에 성공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히트 차트에서 멀어져갔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일군 조 카커의 성공은 당시 제대로 조명 받기 시작한 흑인음악을 백인이 잘 소화한다는 희소성에 초점이 맞추어 졌고, 그를 비롯한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밴 모리슨(Van Morrison), 라이처스 브라더스 같은 선지자들이 뿌리내린 토양 위에서 후배들은 흑과 백의 자연스런 크로스 오버를 시도해 대대적인 성공을 일궈내고 있다. 공식적으로 데뷔한지 30년이 넘었지만 뉴 밀레니엄을 맞아 신보 < No Ordinary World >을 공개하면서 차트 경쟁과는 무관하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과시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가수는 ‘독창적 음색’이 생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음악이 꾸준히 매니아들을 창출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래 : Ten Years After (텐 이어즈 애프터)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시대를 수놓은 일렉트릭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곧바로 이어진 하드록 사운드로 연결된 시점에 활약했던 그룹이다. 흑인 블루스 광(狂)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앨빈 리(Alvin Lee)가 그룹의 핵심 인물이자 간판이며 국내에서는 1971년 싱글차트에도 등장했던 그들의 꿈꾸는 듯한 느낌의 감성적인 하드록 발라드 ’I’d love to change the world’가 오랫동안 애청되었다. ...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시대를 수놓은 일렉트릭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곧바로 이어진 하드록 사운드로 연결된 시점에 활약했던 그룹이다. 흑인 블루스 광(狂)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앨빈 리(Alvin Lee)가 그룹의 핵심 인물이자 간판이며 국내에서는 1971년 싱글차트에도 등장했던 그들의 꿈꾸는 듯한 느낌의 감성적인 하드록 발라드 ’I’d love to change the world’가 오랫동안 애청되었다. 영국의 노팅햄에서 1944년 태어난 앨빈 리(Alvin Lee)는 13살 때 처음으로 기타를 잡아 팝에 열광했고 이듬해인 14살 때 집을 나와 런던으로 갔다. 여기서 리오 라이온스(Leo Lyons)와 만났고 둘은 끼니를 굶는 고생 끝에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앨빈은 블루스 명인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런던 마키 클럽 공연에서 백업 연주를 했고 리오는 윈저(Winsor)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1965년 올간을 연주하던 칙 처칠(Chick Churchill)을 만나 셋은 블루스를 지향하는 밴드 제이버즈(Jaybirds)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솔로가수들의 백업 공연 차 영국 국내를 다니고 나이트클럽에 나가 스탠더드 넘버를 연주하던 이들은 언젠가는 파괴력이 넘치는 본격 밴드를 만들 꿈을 키웠다. 1967년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3사람 앞에 드럼주자인 릭 리(Rick Lee, 앨빈과는 전혀 무관)가 나타나 곧장 목표하던 그룹을 결성, "10년 후를 목표로 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텐 이어즈 애프터(Ten Years After)로 붙였다. 그 해 5월 롤링 스톤스, 더 후 등이 출연했던 클럽에서 스테이지 데뷔했고 바로 드림 레코드와 계약을 해 첫 앨범 < Ten Years After >를 발표했다. 이 앨범 커버는 밴드 사진이나 디자인이 사이키델릭 아트를 취해, 사이키델릭 블루스를 내건 그룹임을 드러냈고 실제 앨범은 초기 블루스 거물인 소니 보이 윌리암슨(Sonny Boy Williamson)의 ’Help me’와 윌리 딕슨(Willie Dixon)의 ’Spoonful’에 대한 해석을 담아냈다. 블루스를 연주했으나 영국 팬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하자 이듬해인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의 콘서트에서 호평을 받아, 에릭 클랩튼의 크림(Cream)처럼 영국보다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2번째 앨범인 < Undead >가 발표되어 영국에서도 착실하게 인기를 다지기 시작, 1969년 앨버트 홀에서 열린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같은 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존 메이올, 레드 제플린, 제쓰로 툴 등 영국의 신(新)영웅들과 출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그들의 인기는 본격 궤도에 올랐다. 특히 전설적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I’m going home’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내리 발표한 일렉트릭 블루스 경향의 하드록 앨범들 < Ssssh >(1969년) < Cricklewood Green >(1970년) < Watt >(1970년)는 모두 앨범 차트 20위권에 진입하는 히트를 기록, 록그룹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1971년 크리살리스(Chrysalis)로 레이블을 옮겨 발표한 < A Space In Time >에서는 그들에게 가장 유명한 곡이 된 싱글 ’I’d love to change the world’를 발표해 미국(40위)과 영국에서 모두 준(準)히트를 기록했다. 1974년 앨빈 리가 새로 9인조 밴드를 조직하면서 텐 이어즈 애프터의 위상을 크게 흔들렸고 이 새로운 밴드가 발표한 앨범 < Positive Vibrations >는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됐다. 그룹 매니저의 부인 속에서도 해산설이 나돌던 1975년 마침내 앨빈 리는 활동중단을 피력했지만 오랫동안 공식적 해산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앨빈 리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그룹을 이끌고 활동을 계속, 텐 이어즈 애프터와 앨빈 리 밴드(Alvin Lee Band)란 이름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9년에는 텐 이어즈 애프터란 이름으로 15년만에 신보 < About Time > 앨범을 내놓아 차트에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도 이들은 그룹명을 보유한 채 오리지널 멤버들이 모여 때때로 공연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래 : Sly & The Family Stone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을 불렀다. ‘Don’t call me nigger, Whitey(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을 불렀다. ‘Don’t call me nigger, Whitey(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무쌍한 폴리리듬이었다. 때문에 펑크(funk)의 원조로 항상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함께 언급되며 나중의 디스코에도 길을 열어준 ‘리듬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재즈의 거성 마일스 데이비드(Miles David)도 펑크(funk)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이들의 음반을 열심히 들었을 정도. 흑인가수의 경우 단일 곡이 팔릴 뿐 앨범판매는 저조한 관행에도 이 그룹의 앨범은 잘 팔렸다. 1970년 히트곡 모음집은 판매고 500만장을 상회했다. 하지만 슬라이 스톤은 마약에 찌들어 1970년대 중반부터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빠졌다. 천재는 기인임을 말해주는 사례. 대표곡으로는 ‘Dance to the music’, ‘Everyday people’, ‘Hot fun in the summertime’ 등이 있다.
노래 : Jimi Hendrix (지미 헨드릭스)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라는 이름은 하나의 신주단지와도 같다.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 말이었고 1970년대가 열리자마자 이 세상을 떠나 이미 오래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간 인물이지만 그는 지금도 불멸의 기타 천재로 많은 뮤지션들의 추앙을 받는다. 누구 말마따나 ‘아직까지도 일렉트릭 기타 음악이 위대한가 아닌가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아마 그의 위대함...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라는 이름은 하나의 신주단지와도 같다.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 말이었고 1970년대가 열리자마자 이 세상을 떠나 이미 오래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간 인물이지만 그는 지금도 불멸의 기타 천재로 많은 뮤지션들의 추앙을 받는다. 누구 말마따나 ‘아직까지도 일렉트릭 기타 음악이 위대한가 아닌가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아마 그의 위대함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동시대의 그룹이었던 도어스(The Doors)의 건반주자 레이 만자렉(Ray Manzarek)의 말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천재로 추켜세우는 이유는 그가 진짜로 천재였기 때문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이처럼 먼저 뮤지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록 뮤지션들은 한결같이 그가 창조해낸 폭발적인 기타 연주에 넋을 잃었다. 마이크 블룸필드(Mike Bloomfield)라는 기타연주자는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놀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 연주음은 마치 수소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고 유도미사일이 날아다니는 듯 했다. 난 그 앞에서 내 기타조차 꺼내들 수가 없었다.” 당시 큰 소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룹 더 후(The Who)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와 기타의 신(神)이라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등 초일류 연주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피트 타운센드는 그 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자 경쟁심이고 뭐고 다 떠나서 지미 헨드릭스의 기념비적인 미국 몬터리 팝 페스티벌(Montery Pop Festival) 데뷔를 주선했으며 에릭 클랩튼은 지미가 죽었을 때 하루종일 슬피 울었다고 한다. 스스로 최고라 뻐기고 있던 그를 긴장시킨 천재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터뜨린 두 가지 혁명적 대사건이 있다. 하나는 상기한 1967년 몬터리 팝 페스티벌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전설적인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에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몬터리 공연에서 그는 < Wild thing >을 연주하고 나서 뜻밖에 기타 앞에 무릎을 꿇더니 거기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버렸고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그 기타의 화염을 애무(?)했다. 객석은 순식간에 절정의 도가니로 변했다. 필름과 사진으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은 격동의 1960년대를 주도한 ‘성난 젊은이’의 포효로서, 록의 혈통에 면면히 흐르는 항거와 도발의 전형적 의식(儀式)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의 음악전문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ew Musical Express)는 록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의 하나로 꼽으면서 ‘바로 이 순간 록의 전설이 탄생했다’고 했다. 2년 뒤 우드스탁 축제에서의 사건 또한 너무도 유명하다. 공연 마지막 순서에 나와 일절 딴 악기 없이 오로지 기타만을 가지고, 그것도 다른 곡도 아닌 신성한 미국의 국가 < Star spangled banner >를 ‘린치하듯’ 연주해낸 것이었다(지미는 영국에서 먼저 이름이 났지만 미국 흑인이다). 거기에는 구사된 갖가지 파열음과 소음을 들은 사람들은 즉각 그것이 총격과 포화의 전쟁터를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 연주는 곧 ‘미국은 현재 전쟁(월남전)중’이라는 암시였고 동시에 기성의 미국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을 축약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백인 보수적 중산층에게 그는 하나의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1968년 민주세력의 염원과 달리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젊은이들의 ‘반(反)문화’를 파악하기 위해 지미 헨드릭스와 만남을 시도했었다는 일화를 남긴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리하여 대중음악의 예술성외에 ‘시대성’을 소유한 역사상 드문 인물이다. 그에게는 반드시 기존체제와 질서의 해체를 부르짖었던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의 카운터 정서를 연주로 대변한 뮤지션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것이 다른 기타영웅들인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Jimmy Page), 제프 벡(Jeff Beck), 리치 블랙모어(Richie Blackmore) 등과 뚜렷하게 차별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서태지가 그렇듯 하나의 음악가인 동시에 ‘사회적 인사’로서 의미를 지녔던 셈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말을 들어본다. “젊은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크고 거칠고 폭력에 가까운 어떤 것을 찾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록 공연장에 가지 않는다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가 시대와 음악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기타 오케스트레이션’을 창조해낸 데는 전문적인 용어로 ‘피드백’(feedback)과 ‘와우와우’(wah-wah) 주법의 힘이 컸다. 피드백은 기타와 앰프 사이에서 나는 불협화음인 하울링(howling)을 화음의 소리로 들리게 하는 지점을 찾아 사운드를 이어가는 방식을 가리킨다. 와우와우 역시 효과음페달로서 마치 어린아이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이 이펙터(effector)를 지미 헨드릭스만큼 유효하게 또 인상적으로 다룬 연주자가 없다는 게 정설로 되어있다. 그는 피드백과 와우와우를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심정을 관통하는, 마치 고통으로 흐느끼고 울부짖는 기타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신음하는 기타, 말하는 기타였다. 더욱이 그의 음악은 슬픈 블루스였고 그 블루스는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록의 기반과 뿌리임이 낱낱이 증명되었다. 그를 ‘블루스의 혁명아’로 일컫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앨범은 1967년의 < Are you experienced > < Axis! bold as love >, 1968년의 < Electric ladyland > 등 3장 밖에 없다. 하지만 연주자나 팬들 그리고 록과 록 기타를 연구하는 사람들한테는 생필품과 같은 작품들로서 모조리 록의 명반으로 꼽힌다. 곡으로는 ‘Hey Joe’ ‘Purple haze’ ‘All along the watchtower’ 그리고 ‘Voodoo child’가 애청된다. 1970년 9월 27살에 요절했지만 그의 천둥 연주는 지금도 쇼크이며, 지금도 아름답고, 지금도 록 무대 특유의 성적 쇼맨십과 오만의 절정을 이룬다. 지금도 그는 많은 기타지망생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지만 ‘예술성과 시대정신’이 공존하는 그 산을 넘은 사람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밴드 : Canned Heat (캔드 히트 (블루스 락 밴드))
멤버 : 배리 레벤슨(Barry Levenson), 그렉 케이지(Greg Kage),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피토 데 라 파라(Fito de la Parra) 멤버 : 배리 레벤슨(Barry Levenson), 그렉 케이지(Greg Kage),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피토 데 라 파라(Fito de la Parra)
밴드 : Country Joe And The Fish (컨트리 조 & 더 피쉬)
밴드 : Crosby, Stills, Nash & Young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 Nash, CSN, CSN&Y)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Neil Young, Stephen Stills 멤버 : David Crosby, Graham Nash, Neil Young, Stephen Stills
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구미에서도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정은 비슷하다. 국내에서는 과거 라이선스 시절 후의 앨범 출발은 앞선 두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집 음반은 소개되었지만 후는 그나마 그것도 없었다(하기야 히트 곡이 거의 없긴 했지만). 설사 판을 찍어 봤자 잘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우리 정서가 원하는 선율이 없었다. 따라서 후의 곡이 팝의 일상성을 획득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는 달리 그들이 평자를 비롯한 록관계자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편애라 해도 별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1965년 데뷔작 < 후가 나의 세대를 노래한다(The Who Sings My Generation) >에서부터 1975년 < 후 바이 넘버스(The Who By Numbers) >에까지 그 사이에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들이 수작으로 거론될 정도다. 특히 1969년 < 토미(Tommy) >와 1971년작인 < 후의 다음(Who’s Next) >은 예외 없이 비평가 선정 명반으로 뽑히고 있다. 후가 록역사에서 전설의 자리를 틀어쥐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사실이 바로 비평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며 음악 팬들이 기억해야 할 상식이기도 하다. 첫째 후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과격한 청춘문화 이른바 모드(Mod)와 함께 등장했고 그것을 강도 높게 반영했다. 모드는 본래 패션 운동으로 저임금의 단조롭고 지루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영국 중산층 이하의 젊은 노동자들이 TV와 고급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서 유혹적으로 선전되는 값비싼 것들을 향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독특한 복장에 의한 욕구불만의 발산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었다. 오토바이와 로큰롤을 가까이 한 ‘로커(rocker)’와 함께 청춘문화를 주도했으나(비틀스는 로커에 속한다) 모드는 하층민적인 로커와 달리 잘 입고, 정규 직업을 유지하고, ‘스쿠터’를 타며 약물을 즐기는 도시적 패턴을 취했다. 후의 멤버들은 1964년 프리랜서 피트 미든(Pete Meadon)의 권유에 따라 ‘하이 넘버스’(The High Numbers)라는 이름 아래 모드의 세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한 모드 정서는 분노와 청춘 세대의 공격성이었고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었다. 후의 기둥인 기타 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영국의 모드 운동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운동이었고 히피 무브먼트보다 규모가 컸다. 그것은 군대, 강력하고 거친 틴에이저들의 군대였다. 모드가 되기 위해서는 짧은 머리에 스마트한 복장, 좋은 구두와 셔츠를 살 돈이 있어야 했고 미친놈처럼 춤출 수 있어야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있어야 하고 램프로 뒤덮인 스쿠터를 가져야 했다.” 후로 그룹명을 바꾼 그들은 1965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현실을 신랄히 비난하는 모드족의 성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나의 세대(My generation)’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억누르려 한다. 단지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몹시 추워 보이는 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늙기 전에 죽고 싶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Hope I die before I get old). 이 한마디가 초창기 후의 이미지 전부를 말해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록역사상 최초로 과격한 어조를 동원해 청춘과 기성 세대와의 분리를 획책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 충격적 선언은 한편으로 ‘늙기 전에 죽지 못한’ 그들을 막판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데뷔시 그들이 펼친 모드 운동은 그들을 단숨에 살찌울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역시 모드 세대의 찬가인 ‘어쨌든 어찌해서든 어디에서든(Anyway anyhow anywhere)’도 타운센드에 따르면 ‘반 중년, 반 상층 계급 그리고 젊어서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의미의 노래’였다. ‘애들이 옳다(The kids are alright)’ ‘난 설명할 수 없어(I can’t explain)’과 함께 이러한 노래들은 어느 노래보다 먼저 ‘청춘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록의 규범을 확립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연주나 무대 제스처에 있어서도 록의 규범을 제시했다. 이것이 후가 갖는 두 번째 의미이다. 공연장에서 후는 영락없는 네 명의 ‘폭도’들이었다.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은 부수어대듯 드럼을 쳤고(후 사운드의 상징이다) 피트 타운센드는 펄쩍펄쩍 뛰면서 풍차를 돌리듯 팔을 휘두르며 기타 스트링을 가로질렀으며 싱어 로저 달트리(Roger Daltry)는 마음껏 외치며 청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베이스 주자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성 세대나 엘리트의 품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멤버들의 외모도 ‘불량 서클’ 아이들을 무색케했다. 피트 타운센드는 한 마리 독수리였고 키스 문은 무정부주의자 같았으며 로저 달트리는 테러리스트의 인상 그것이었다. 언제나 비(非)스페셜리스트였던 존 엔트위슬도 잘해 봤자 폭도의 ‘보급계’같았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도무지 폴 매카트니의 세련된 매너와 믹 재거의 섹스 어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록의 ‘하위문화’적 특질과 정확히 맞물리는 요소였다. 그들은 록이었기에 도리어 ‘특혜’를 받았고 그에 따른 모범생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또 록의 슬로건인 ‘제한된 공간에서의 파괴’를 증명한 존재들이었다. 무심결에 야간업소 공연에서 낮은 천장으로 인해 기타 목을 부러뜨린 것에 착안, 그들은 이후 콘서트 때마다 악기를 부수어 버리는 파괴 연출을 일상화했다. 실상 영화제작자로 나중 후의 관리자가 된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크리스 스탬프(Chris Stamp)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행위는 모드와 더불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의 멤버들은 공연 뒤 머문 호텔마다 그 시설물을 부수는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음악이 조용할 리 없다. 후의 사운드는 소음으로 정의되며 애초부터 발라드와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앰프 사용을 극대화했다. 일례로 밥 딜런과 함께 공연한 와이트 섬(Isle of Wight) 페스티벌에서는 그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사운드 시스템을 동원해 사상 최고의 출력을 내뿜었다. 그때 스피커 중 하나는 청중들에게 “15야드 안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딱지가 붙어 있었다. 1976년 5월에 있었던 미국 찰튼 애드레틱 풋볼 클럽 콘서트는 록 그룹에 의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무려 1백 20데시벨!)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들은 소음 발산을 통해 하드 록 생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드 록 또는 헤비메탈 계보도의 맨 위에는 후가 있다. 역시 메탈의 산파 역할을 한 지미 헨드릭스도 타운센드가 나서서 공식무대 데뷔를 주선했고 지미의 죽음과 실연 때문에 좌절한 에릭 클랩튼의 재기를 도와준 사람도 타운센드였다. 그의 그룹 후는 또 하나의 공적인 록과 팝의 역사에 깊이 새겼다. 그들을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록사상 최초로 ‘록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1969년에 만들어 낸 < 토미 >는 타운센드의 탁월한 음악 감각과 정신적 동경이 합쳐진 것이었고 모험적 시도를 넘어 음악 예술의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작품이었다. 그것은 무대와 음반 세계에 갇혀진 록의 ‘비상’을 뜻하는 신기원이기도 했다. 이제 록은 못할 것이 없어졌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오페라를 록이 꾸려 냈다는 것은 록의 무한한 잠재력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60년대의 록이 사회성 뿐 아니라 ‘예술성’에도 적극 손짓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토미 >는 실로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밴 모리슨의 < 천체 주간(Astral Weeks) >과 함께 록이 더 이상 순간의 흥분이 아닌, 영구 불변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뽐냈다. 토미는 충격으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말할 줄도 모르는 아이가 된다. 마음속의 장벽 때문에 자아를 찾지 못하는 토미는 핀볼의 마법사가 되어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호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마침내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성공한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인 < 토미 >의 메시지는 ‘독립’과 ‘자유’였다. 거창한 듯 하지만 결국은 후가 추구해 온 모드와 무대 위의 폭발이라는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타운센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10대의 반란이라는 순간에 지속되는 ‘대결’과 ‘도피’ 사이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또한 로큰롤의 주제이기도 하다. 10대 때는 자신을 결코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결하든 도피하든, 클래시(Clash)의 말로 하면 머물든 나아가든 간에(Should I stay or should I go) 틴에이저 시절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당신이 홀로 서 있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 토미 >가 의미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오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록의 찬란한 영광으로 남아있다. 오페라 실연으로, 앨범으로 또 1975년 켄 러셀(Ken Russel)의 영화로, 1979년 웨스트 엔드 연극으로, 이어서 199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다채롭게 해석되면서 하나의 전설로 상승했지만 최후의 영예는 역시 후의 록이었다. < 뉴욕 타임스 >지는 < 토미 >를 두고 “수미상관은 물론 거창한 어휘인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순환 테마를 가지고 있다”면서 “우수한 곡들로 가득차 있고 우아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긴 형태 록(long form rock)의 경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사실 < 토미 >를 최초의 록오페라라고 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미니이긴 하지만 타운센드가 1967년 < 후 셀 아웃(Who Sell Out) >의 ‘라엘(Rael)’로 시도한 바 있고 킹크스(Kinks) 그룹의 송사이클 걸작 앨범 < 아더(Arthur) >도 1969년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록 뮤지컬 <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도 1969년이라는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최초’라는 타이틀마저 < 토미 >에게 안겨 주었다. < 토미 >의 영광은 엄청난 부담으로 타운센드를 짓누르지만 그는 언제나 보여 온 ‘시대적 추세’와 ‘록 본연의 폭발’의 절충적 감각을 또 한차례 유감없이 발휘해 1972년 걸작 앨범 < 후의 다음 >을 발표, 위세 행진을 계속한다. 1970년대 중후반의 대대적인 공연 성공은 한층 후의 무게를 늘려 놓았다. 롤링 스톤스와 함께 ‘록의 공룡’으로 펑크 진영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이러한 대중적 성공과 ‘젊어서 죽기를 거부한’ 자세는 1978년 < 후 아 유(Who Are You) >의 도도함과 거만으로 나타나기도 했다(이 점에서 록의 가장 큰 적은 나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외부의 펑크 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드러머 키스 문의 돌연사였다. 그의 죽음은 ‘존 보냄의 사망과 레드 제플린의 관계’처럼 그룹의 총체적 위기로 다가왔다. 후의 멤버들은 해산을 선언한 제플린과는 달리 전 페이시스(Faces) 드러머 케니 존스(Kenny Jones)를 영입하여 중단 없는 전진을 다짐하지만 활력의 소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3년 해산하고 만다. 후의 멤버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 1989년 캐나다 토론토 공연차 다시 모이지만 그때 후의 이름은 어느덧 역사가 되어 있었다. 온갖 모순과 교묘한 절충 속에서도 후는 끊임없이 내적 긴장, 진지한 야망, 모험욕을 통해 1960년대 록이 확립한 반란, 파괴 그리고 모험의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후를 해부하는 것은 실로 록의 호흡과 함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베이비 붐 세대의 가슴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록의 부활이 기대되는 근래 우리 대중 음악의 변화 조짐을 감안할 때 ‘록의 위대한 개척자’인 후의 재조명이 한층 요구된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1960년대 서구 록의 뜨거운 피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밴드 : Santana (산타나 (라틴 락 밴드))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 20세기 마지막 팝 음악의 유행은 음반산업이 주조했든 아니든 정열의 라틴음악이 장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에 발표된 제42회 그래미상 후보자 명단이 웅변한다. ‘Livin’ la vida loca’의 주인공 리키 마틴(Ricky Martin)을 비롯 제니퍼 로페즈(Jenifer Lopez), 마크 앤소니(Marc Anthony), 루 베가(Lou Bega) 등 지난해 라틴 열풍을 주도했던 신성(新星)들이 그래미상의 주요 부문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름 아닌 ‘라틴 록의 거장’ 카를로스 산타나가 버티고 있어서다. 올해로 52세인 그는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Supernatural >로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 뉴스위크 >는 최신호에서 1998년 밥 딜런에 이어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산타나의 컴백 무대가 될 것이라며 그의 압승을 예견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 Smooth >와 500만장이라는 가공할 음반판매량이 화려한 재기를 견인했다. 음악팬들은 10대 틴 음악의 싹쓸이 판에서 모처럼 대가의 위용을 체험하고 있다. 멕시코 태생의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1966년 히피 문화의 본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나 블루스 밴드’란 이름으로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들려주어 일대 주목을 받았다. 산타나로 그룹명을 바꾼 그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했다. 산타나는 그러나 1970년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을 어지러이 수놓았던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퇴조하자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 록’으로 조정을 꾀했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는 2집 < Abraxas >가 바로 처음 라틴 록의 정체를 천하에 고한 작품이었다. 이 음반의 수록곡 ‘Black magic woman/Gypsy queen’과 ‘맘보의 왕’ 티토 푸엔테(Tito Puente)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며 히트했다. 특히 그가 이 음반 수록곡 ‘Samba pa ti’에서 구사한 애절한 기타연주는 국내에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를 마련했다. 발라드 선호의 우리 정서와 심금을 울리는 그의 라틴기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 같은 어울림은 기타에 멜로디를 집어넣은 카를로스의 연주기법 때문에 가능했다. "나의 음악 키워드는 음(音)으로 이야기하듯 말하는 것이다. 기타를 통해 나는 노래하고 있다" 라틴 록 보석 ‘Europa’가 담겨있는 1976년 앨범 < Amigos >도 앨범차트 10위에 올랐고,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앨범 상을 받았다. 지금도 기타지망생들은 ‘Europa’와 산타나의 이름을 등식화한다. 이듬해 발표한 작품 < Moonflower >에서도 좀비스(Zombies)의 명곡을 라틴 사운드로 새 단장한 ‘She’s not there’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를로스 산타나의 ‘절충주의’ 음악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맛깔스런 기타 연주는 계속해서 위용을 과시했지만, 순하게 들리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뒷심은 뚝 떨어졌다. 새로운 세대의 변화무쌍한 감성을 파고드는 필살(必殺)의 포인트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분위기에 편승하여 팝 성향이 강화된 1979년 앨범 < Marathon >을 발표한 데 이어 1980년 재즈 록 앨범 < Swing Of Delight >, 1987년 명상 앨범 < Blues For Salvador > 등 장르를 따지지 않는 합종연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록 장기외유였지만 ‘록의 경계선을 허문’ 고유업적이 빛이 바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의 활동도 사실 ‘퓨전’이란 그의 평생 과업의 선상에 있었다. 1998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당당히 들어섰고,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입적되었다. 마침내 그의 ‘장르 뒤섞기’ 실험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타나는 지난해 < Supernatural >로 역사에 안치되기를 거부하고 현실무대로 화려히 컴백했다.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파워 맨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만든 이 앨범에는 데이브 매튜스, 로린 힐, 와이클레프 진 그리고 매치박스 20의 롭 토마스 등 신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산타나는 평소 자신을 존경해온 이들의 도움으로 상기한 신진 라틴스타들에 못지 않은 활기를 내뿜었다. ‘신구세대의 통합’을 목표로 산타나와 데이비스 사장이 제휴하여 치밀히 계획한 전략의 결과였다. 이 작품이 구현한 절충과 타협의 미학은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했다. 올해 그래미상은 그를 위한 잔치가 될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산타나 본인은 성공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앨범 < Supernatural >이 자신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고만 했다. 원대한 포부를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마스터플랜은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완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서 이미 진실함을 읽을 수 있다.
밴드 : Jefferson Airplane (제퍼슨 에어플레인)
우린 기존 가치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67년 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둘러보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목표인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聖) 프란체스코가 의류상이었던 부유한 아버지의 생활방식을 거부했던 것처럼 부모의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있다”며 방문 인상을 밝혔다. 토인비가 말하는 ‘이곳’이란 ... 우린 기존 가치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67년 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둘러보고 거기서 어떤 새로운 흐름이 조성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목표인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聖) 프란체스코가 의류상이었던 부유한 아버지의 생활방식을 거부했던 것처럼 부모의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있다”며 방문 인상을 밝혔다. 토인비가 말하는 ‘이곳’이란 정확하게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시베리 구역이었다. 그곳에는 히피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 조류가 무르익고 있었다. 5만여 명에 달했던 그곳의 히피들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카운터 문화’를 주창했고,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히피들은 노동계급이 아닌 중산층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었고, 백인이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2차대전과 대공황을 겪는 부모 세대와 다르게 상대적 풍요 속에 자라난 그들은 기성 세대가 확립해놓은 가치의 절반을 철저히 거부했다. 히피들은 경쟁보다는 화합을,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적 생활을 강조했으며, 억압되고 있는 성(性)의 자유와 ‘의식의 해방’을 소망했다. 그들은 사랑, 평등, 공생, 자유가 충만한 사회를 ‘대안의 사회’로 여겼고, 그곳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다. 그들의 헤어와 복장은 제멋대로였고, 공공연히 프리섹스를 펼쳤으며, ‘군집’ 생활을 전개해 잇따라 기성 사회와 충돌했지만, 제도권과 부모 세대가 볼 때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의식 해방’과 관련된 것이었다. 의식해방의 수단이 마리화나와 LSD 등 다름아닌 마약이었던 까닭이었다. LSD의 교사로 통했던 전(前)하버드대학 교수 토마스 리어리의 “환각상태에 도달하여(Turn On) 깨달음을 얻고(Tune In) 기존으로부터 빠져나오라(Drop Out)"는 어드바이스는 히피들을 환각의 세계로 내몰았다. 그는 LSD를 복용하게 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악이 춤추는 입자처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이것이 히피의 세계요, 문화였다. 당시 헤이트-애시베리 지역의 1천5백여 록 밴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거의가 히피 그룹이었으며 LSD 밴드이기도 했다. 록 평론가들은 그들의 장르를 환각제와 관련지어 ‘사이키델릭록’ 혹은 ‘애시드록’(Acid Rock)이라고 일컬었다. 무수한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키델릭록 그룹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이었다. 록 역사에 있어서의 위상이나 후대에의 영향을 고려하면 ‘그레이트풀 데드’를 더 높이 평가할 수는 있지만, 지명도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단연 앞섰다. 밥 딜런의 음악을 동경해온 마티 볼란이 주축이 되어 폴 캔트너, 요머 카우코네, 스킵 스펜스 등과 함께 조직한 이 그룹은 1965년 8월 13일 매트릭스라는 클럽에서 첫 비행에 들어갔다. 1년 뒤 ‘그레이트 소사이어티’란 그룹에서 활동하던 여걸 그레이스 슬릭과 드러머 스펜서 드라이덴이 가세, 진용이 확립되었고 이듬해인 1967년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body to Love)’, ‘화이트 래빗(White Rabbit)’ 등 빅 히트곡을 내어 단숨에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의 기수로 부상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음악, 장외 발언, 무대 행위에는 그 시대 ‘히피의 정서’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스며나왔다. 그들은 ‘히피, 샌프란시스코, 헤이트-애시베리, 사랑의 여름, 사이키델릭 사운드, 록 혁명’의 전형이자 리딩 그룹이었다. “우리는 기존 가치들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그것이 그룹을 가입한 후에 그레이스 슬릭의 첫 일성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변화시키려했는가. 첫째는 중산층과 전세대가 강요하는 외설에 대한 인식타파였다. 그들은 육체 표현과 섹스의 자유를 설파했고 ‘사랑’을 제1의 가치로 귀결시켰다. 빼어난 미인 그레이스 슬릭은 공연중 웃옷을 벗어 토플리스를 관객 앞에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룹의 출세작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을 두고 “가사가 무슨 뜻인가는 중요치 않다. ‘자유로워져라. 사랑에 자유롭고 섹스에 자유롭도록 하라.’ 그것이 전부다”라고 설명했다. 그룹의 실세인 마티 볼란은 한술 더 떠 “스테이지는 침대고 관중은 여자다. 우린 공연하는 게 아니다. 우린 섹스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둘째,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부의 축적을 배격하고 ‘분배’를 중시했다. 음악하는 사람이 돈을 배격한다는 것은 우선 기존 레코드 회사로부터 음반 발매를 거부했다는 얘기와 같다. 그룹 초기부터 히피 그룹의 대표로 관심을 모았던 이들에게 메이저 레코드사의 스카웃 제의가 집중되었으나, 이들은 상당기간 ‘제도권’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팬터지 레코드사의 간부인 막스 와이스는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같은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에 대해 “그들은 우수하긴 하지만 좀 미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무 반(反)상업적이다”라며 투덜거렸다. 그들은 제도권 진입을 꺼리고, 잇따라 ‘무료 콘서트’를 하고 다녔다. 극단적인 반(反)상업성의 표현이었다. 무료 콘서트와 관련해서는 그들보다 그레이트풀 데드가 더 적극적이었는데, 데드의 매니저 록 스컬리에 따르면 “우리는 제도권이 원하는 것 - 싱글 히트를 내고 공연을 해서 돈을 챙기는 것 -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료 공연을 고집할 수 있었으되 레코드사 소속 거부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많은 대중들에게 우리의 사이키델릭록과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명분상’ 메이저 레코드사라는 제도권 음악계를 뿌리쳐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 도어즈의 매니저 빌 시돈은 그와 같은 난처한 입장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무대에서 그룹들은 혁명적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나 그걸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방식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웃기는 일 아닌가.” 1965년 출범한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결국 2년 후인 1967년 RCA사와 음반 계약을 체결, 메이저레이블에 소속된 최초의 헤이트-애시베리 밴드가 되면서 ‘비제도권에의 수절’은 종말을 고했다. 그것은 분명 샌프란시스코록을 세계 팝계에 널리 알린 분기점이 되기도 했지만, 애초의 그룹취지에는 크게 궤도이탈한 것이어서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셋째는 공동체로의 지향이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등 샌프란시스코지역 그룹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견지했다. 그들은 결코 인기 경쟁을 벌이지 않았고, 화합과 공유를 몸소 실천했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특정인들과 자매 그룹처럼 상호 선린 관계를 구축했다. 서로 지척에 거주하여 자주 왕래했고 하루종일 맞대고 살았으며, 공연을 나가서도 누가 오프닝을 하든, 누가 휘날레를 장식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룹의 파수꾼인 폴 캔트너는 자랑스레 회고한다. “매우 기분좋은 광경이었지요. 그룹들은 서로를 격려해주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우리는 그레이트풀 데드나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아니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든 테입을 얻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라는 의미가 존재했어요.” 그들은 1967년 1월 14일 골든게이트 공연에서 거행된 역사적인 ‘부락집단의 모임’(히피공동체의 상징이 됐다)에서 ‘함께 갑시다(Let`s Get Together)’를 열창했다. 1969년에 발표된 음반 < 지원자들(Volunteers) >의 수록곡 가운데 베스트는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We can be Together)’라는 노래였다. 샌프란시스코 밴드들의 모토는 바로 ‘함께’ 또는 ‘더불어’였다.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는 그룹 최초로 사회혁명을 주창한 노래로서 제퍼슨 곡은 정치성이 약하다는 일반의 인식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그 비행선의 탑승자들 모두가 이러한 카운터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제도권에게 이단자들로 찍혀가고 있었다. 활동 내역보다 약물이 그들을 결정적으로 찍히게 한 빌미가 됐다.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의식 확장의 역할을 했던 마약은 제퍼슨 에어플레인 음악을 특징지웠다. ‘사이키델릭 환각제’, 이를테면 마리화나와 LSD에의 예찬이 노래에 출현했다. ‘알약 하나는 너를 커지게 하고 알약 하나는 또 너를 작게 하지. 어머니가 네게 주는 약은 아무것도 안돼. 앨리스가 10피트일 때 그녀에게 가서 물어봐. 식탁 위의 사람들이 일어나 네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을 때 너는 버섯을 먹으면 마음이 부드럽게 움직이게 되지... 논리와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백의의 기사가 소곤거리고 붉은 빛 여왕이 정신을 잃을 때 쥐가 한말을 기억해. 네 머리를 채우라. 네 머리를 채우라.’ ‘화이트 래빗’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비행연료는 이처럼 LSD였다. 그 연료로 비행선은 앨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로 팬들을 안내했다. 그 연료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고공 비행을 가능케 해주어 한동안 그들의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 비행선은 곧바로 안전벨트가 없고 이륙용 기어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마약 제창이 처음엔 힘으로 작용했지만 후에는 ‘감정 중독’을 초래하는 걸림돌로 변했다. 시나브로 메시지의 신념은 상실되어 갔다. 히피 종식을 벼르고 있던 제도권에게 이 마약 부분은 반격의 미끼를 제공해주어 1970년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상당수의 록 뮤직이 마약 사용을 찬양하고 있다”며 올가미 씌우기를 공식 선언했다(도어스의 짐 모리슨, 컨츄리 조 등이 그 희생자들이었다). 절정기였던 1969년 우드스탁 이후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급격히 팬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히피즘과 샌프란시스코 록도 함게 기력을 잃어갔다. 1970년대 들어서 스펜서 드라이덴, 리더인 마티 볼란, 요머 카우코넨이 잇따라 그룹을 떠났다. 그렇게 히피의 기수 제퍼슨 에어플레인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들은 분명 사회의 거대 자본 폭격기에 대항하는 전투기였다. 그들은 한 나라의 가치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했고, 미국이라는 성곽의 이데올로기장벽을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 자본의 유혹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팬들은 “3장의 골드 레코드가 우리의 영웅을 납치했다”고 불평했고, 일련의 탐탁치 않은 행각을 목격하고 ‘우상의 죽음’에 실망했다. 돈을 번 그들은 7만 5천 달러짜리 호화판 빅토리아식 맨션을 구입, 풍족하게 살았고 캐딜락과 같은 고급승용차를 몰았다. 레코딩세션을 하러가면서 전세 비행기를 이용했다. RCA로부터 자회사인 그런트사를 헌납받아 레코드 회사를 ‘경영’했다. 중산층의 무대인 휘트니 뮤지엄과 왈도프 호텔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 모든 행위를 그룹이 초기에 보여주었던 행태와 비교해보라! 시대는 변했다. 시대의 반영인 대중음악도 바뀌게 마련이고 그래서 그들도 히피 밴드에서 ‘기업’ 밴드로 변질되었다. 그룹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세월의 풍파를 헤쳐가면서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74년 ‘제퍼슨 스타십’으로, 1985년 다시 ‘스타십’으로 이름이 바뀌고 멤버의 몇몇 열굴만 교체되었을 뿐이었다. 생명력을 과시한 정도가 아니라 포스트 에어플레인의 이 그룹들은 에어플레인 시절보다 더욱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나를 믿어요(Count On Me)’, ‘우리가 이 도시를 건설했다(We Built this City)’, ‘사라(Sara)’, ‘아무것도 우릴 멈추게 할 수 없어(Nothings Gonna Stop us now)’ 등 불멸의 히트곡을 남겼다. 세월이 가면 에어플레인은 역사헤 묻히고 제퍼슨 스타십 혹은 스타십이 더욱 기억에 자리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이스 슬릭은 에어플레인 시절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건 낙관적인 관념들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게 되면 불행히도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죠. 아마 자그마한 충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거대함에 자그마한 충격이란 결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내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일 뿐입니다.” 글쎄. 물론 그처럼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무덤에 비석을 꽂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묘비명을 새겨넣으려는 데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밴드 : Paul Butterfield Blues Band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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