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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록 모음집 (Where The Action Is! Los Angeles Nuggets 1965-1968)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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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록 모음집 (Where The Action Is! Los Angeles Nuggets 1965-1968) [2LP]

2019년 RSD 한정반

[ 전 세계 5500개 한정반 / 최초 발매곡 수록 ]
Sonny & Cher, Monkees, Lee Hazlewood, Tim Buckley, Randy Newman 노래 외 8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Warner Music / Rhino Records | 2019년 05월 0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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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록 모음집 (Where The Action Is! Los Angeles Nuggets 1965-1968)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5월 08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2개)

음반소개

디스크

LP1
  • A1 Love - You I'll Be Following
  • A2 The Leaves - Dr. Stone
  • A3 Buffalo Springfield - Go And Say Goodbye
  • A4 Iron Butterfly - Gentile As It May Seem
  • A5 The West Coast Pop Art Experimental Band - If You Want This Love
  • A6 The Bobby Fuller Four - Baby My Heart
  • B1 Sonny & Cher - Its Gonna Rain
  • B2 The Guilloteens - For My Own
  • B3 The Association - One Too Many Mornings
  • B4 The Doors - Take It As It Comes
  • B5 The Electric Prunes - Hideaway
  • B6 Opus 1 - Back Seat '38 Dodge
  • B7 Things To Come - Come Alive
LP2
  • C1 Dino, Desi & Billy - The Rebel Kind
  • C2 Jan & Dean - Fan Tan
  • C3 The Common Cold - Come Down
  • C4 The Monkees - Daily Nightly
  • C5 Lee Hazlewood - Rainbow Woman
  • C6 The Ballroom - Baby, Please Dont Go
  • C7 The Rose Garden - Here's Today
  • D1 Nino Tempo & April Stevens - I Love How You Love Me
  • D2 Tim Buckley - Once Upon A Time
  • D3 Randy Newman - Last Night I Had A Dream
  • D4 Noel Harrison - Life Is A Dream 2:00
  • D5 Love - You Set The Scene

아티스트 소개 (13명)

노래 : Monkees (몽키즈 (팝/락 밴드))
1964년의 비틀스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스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스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 1964년의 비틀스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스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스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들을 젖히고 무대를 완전 장악, 미국인들의 기를 죽였다. 언론은 그것을 ‘영국의 침공’이라고 했다. 미국은 남의 잔치에 땅을 빌려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자존심 회복이 요구되었다. 이윽고 두 명의 미국인이 비틀스에 맞서는 미국 그룹을 만들어 긍지를 되찾고 그들처럼 막대한 부를 창출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프로듀서 밥 라펠슨과 버트 슈나이더였고 그들의 기획포인트는 ‘조립식 비틀스의 창조’였다. 그 기획하에 그룹 몽키즈가 탄생되었다. 당시 콜롬비아 영화사 사장 아들인 버트 슈나이더와 재능있는 제작자 밥 라펠슨은 리차드레스터가 만든 비틀스 영화(A Hard Day’s Night)의 대성공을 주시하고 거기서 ‘비틀스 같은 4인조 그룹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구체화했다. 그들은 65년 레이버트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먼저 주요 헐리우드 업계지에 구인광고를 냈다. “텔리비전 새 시리즈에 출연할 17~21세의 네 익살꾼을 찾습니다.” 슈나이더와 라펠슨은 한 달간 4백 37명의 응모자를 오디션했다. 응모자들 가운데는 스티븐 스틸스와 나중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킨 찰스 맨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스틸즈가 오디션을 통과했더라면, 록계는 수준높은 음악을 선보인 ‘버팔로 스프링필드’나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를 배출하지 못하게 됐으리라. 정말 스틸스에게는 불합격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사진 잘 받고 활달하며 연예계 활동 경력이 일천한 네 명의 소년이 엄선되었다. 아마추어 가수 마이크 네스미스, 그리니치 빌리지의 포크 싱어 피터 토크, 아역배우 출신의 미키 돌렌즈, 그리고 탁월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 데이비드 존스가 행운의 면면들이었다. 그들이 그룹 몽키스가 되었다. 그런데 몽키스 멤버들 중 둘은 가수, 둘은 배우였다. 온전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기에 이미 성분상 몽키스는 ‘절반의 실패’를 안고 들어갔다.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두 제작자는 몽키스라는 ‘상품’을 팔리게 하기 위해 그것의 포장 및 품질관리 작업을 했다. 윌리암 프러울리라는 언더그라운드 영화 감독을 고용하여 몽키스에게 스파르타식 연기 수업을 지도케 했다. “처음에 그들은 당황했고, 몸이 굳어 있었으며, 약간은 촌스러웠다. 때때로 마룻바닥을 굴렸으며, 동물처럼 되라고 요구했다. ‘넌 개야. 기린이 하는 식으로 말하라구. 코끼리하구 놀라구. 마치 찻잔이 얘기하는 듯이 말해야 해.’ 그건 그들을 외적으로 개조해 육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프러울리의 말이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창조되어가고 있었다. 포장은 그럴 듯해졌으나 이제 품질이 문제였다. 몽키즈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라펠슨-슈나이더팀은 그 유명한 돈 커시너에게 접근했다. 돈 커시너는 60년대 초반 ‘크리스탈즈’나 ‘로네츠’같은 여성 보컬그룹 유행을 몰고 온 음악제작업의 대부(代父)로, 그의 영향 아래 닐 세다카-하위 그린필드, 제리 고핀-캐롤 킹 등 명작곡 콤비들이 탄생했다. 커시너는 당시 ‘스크린 젬스 콜롬비아 뮤직’사 대표였는데, 그 때 막 콜젬스 레코드사를 신설했다. 그는 박력있고 흥이 넘치는 사운드를 몽키스에게 기대했지만, ‘함량 미달’이라는 것만을 확인했고, 이들을 훈련시켜 한 앨범에 22곡을 수록하고 다섯 개 TV쇼에 출연시키기엔 시간이 없었다. ‘출고 시점’을 맞춘 생산이 요구되었던 까닭이었다. 할 수 없이 돈 커시너는 그가 거느린 작곡 부대를 활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고핀-킹, 세다카-그린필드, 토큰즈, 닐 다이아먼드 등 프로 작곡가들이 몽키스 긴급 수혈을 위해 동원되었다. 연주 또한 자체로 해결할 수 없어 ‘캔디 스토어 프로페츠’라고 불린 팀이 맡았다. 몽키스는 딴 사람이 써서 연주해준 곡에 입을 벌리고 몸만 놀리면 되었다. 그들은 밴드가 아니라 서커스 원숭이들이었다. 그룹명도 몽키스이지 않았던가. 품질과 포장이 완성된 그들은 드디어 출고 시점인 1966년 6월 NBC TV의 카메라 앞에 섰다. 팬들의 반응은 라펠슨과 슈나이더의 기대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들이 출연한 < 몽키스 위클리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그 해 겨울 몽키스 프로는 회당 1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지켜보았다. 하루에 날아든 팬레터는 무려 5천통에 달했다. 비록 ‘모조된 비틀스’였지만, 몽키스는 오리지널 비틀스만큼 잘 팔렸다. 그들의 노래는 데뷔작 ‘클락스빌로 가는 마지막 열차(The Last Train to Clarksville)’가 차트 1위로 치솟은 것을 비롯, 당시 차트는 그들의 것이었다. 4장의 앨범이 연속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셔츠, 코트, 카드, 인형, 도시락 등 몽키스 기획상품은 2천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몽키스 현상’이었다. 그룹 멤버 미키 돌렌즈는 “우리가 상품을 팔고 있다. 우린 몽키스를 팔고 있다"고 자랑스레 외치기도 했다. 그들의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 영국의 데이비드 존스라는 이름의 가수가 막 데뷔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멤버 중 데이비드 존스가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데이비드 보위로 바꾸었다. 70년대 대중음악에 획을 그은 슈퍼스타 보위도 몽키스로 인하여 본명을 잃어버렸던 셈이었다. 몽키스는 너무 했다 싶을 정도로 비틀스의 성공 패턴을 본떴다. 데뷔음반을 발매하기 직전 ‘몽키스가 오고 있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수천 장 개첨한 것을 포함, 광고 캠페인에 10만 달러를 썼으며 방송국의 디스크쟈키들에게 일제히 홍보판을 살포했다. 이와 같은 홍보 전략은 비틀스의 전설적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이미 활용했던 방식이었다. 그룹 이름도 비틀스처럼 고의적으로 스펠을 틀리게 했다(딱정벌레는 Beetles인데 Beatles라 한 것과 같이 Monkeys를 Monkees로 썼다.) 레이버트 프로덕션의 한 간부 스스로가 몽키스를 ‘미국판 비틀스’라고 언급할 지경이었다. < 뉴스위크 >지는 그들을 ‘외형적인 비틀스의 직계후손’이라고 표현했고, < 타임 >지는 1967년 “교활한 프로모터 한 팀이 제록스 기계로 비틀스를 복사해 몽키스를 내놓았다”고 코멘트했다. 평론가들은 애초부터 몽키스의 TV쇼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완전한 가수, 완전한 연기자 둘 가운데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틀스처럼 진지하게 대중음악을 추구하는 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악평과 무시를 유발시키기에 적합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예술적 역량이 부족했고 그것을 메울 수 있는 환경에 처하지도 못했다. 물론 몽키스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몽키스 멤버 중 가장 의식있는 마이크 네스미스는 “우리 음악은 하등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서서히 비틀스 흉내와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1967년 말부터 묻혀버린 자기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에 돌입, 악기를 연주하고 곡쓰기를 시도했으며, 순회공연을 통해 새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네스미스는 몽키스가 뮤지션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우리를 ‘제도권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우린 오늘날 ‘우상 타파적’인 청춘의 가장 진실된 표현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이러한 국면전환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간을 노린 기획상품이었기에 그들의 인기는 오래 지속될 리 만무였고 1969년에 이르러서는 시청률이 크게 하락하면서 시리즈는 방영이 중단되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밴드는 엉망이 되어 갔고 피터 포크가 그룹을 탈퇴했으면 몇 개월 후 몽키스는 마침내 공식 해체되었다. 몽키스는 조립식 비틀스 또는 제 2의 비틀스를 표방했지만, 둘간에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비틀스는 영국의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들이 ‘욕구 분출’을 위해, ‘신분 상승’을 위해 음악을 한 ‘자생적’ 그룹이었다. 그들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 제도권에 진입했지만, 주체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용해되거나 도구화되는 위험을 피하고 오히려 제도권을 요리하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었다. 반면 몽키스는 제도권 또는 자본계급이 ‘부의 축적’을 위해 만든 ‘인위적’ 그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키스는 자본가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효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쉽게 ‘폐기 처분’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비틀스는 아래에서 발생하여 위로 올라간 그룹이라면 몽키스는 위에서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낸 그룹이었다. 몽키스는 제도권에 의한, 제도권을 위한, 제도권의 그룹이었고 또한 제도권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록 뮤직이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를 향해 외치는 젊음의 의사표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할 때 몽키스는 정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록 평론가들이 몽키스를 진정한 록 그룹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티스트의 주체성을 배제한 제도권의 대중음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몽키스는 실증했다. 또 그에 의해 고정된 이미지는 쉽게 타파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었다. 몽키스 멤버들은 그룹이 해체된 후 솔로의 길을 모색하면서 고정된 이미지로 인해 일을 찾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도권이 가져다주는 명성과 부의 대가는 그처럼 잔인한 법이다! 피너 토크는 87년 주간지 < 피플 >과의 인터뷰에서 몽키스 시절을 이렇게 평했다. “60년대는 정말 분열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희망과 갈채 그리고 우아함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함이 있었다. 몽키스는 어느 면에서 좋은 쪽의 증류액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극단적인 멋, 극단적인 갈채, 극단적인 무해(無害)의 축소판이었다.” 그 때 몽키스는 20년만에 재결합하여 < 그것은 옛날, 이것은 지금 >(That was Then, This is Now)이란 히트곡을 내어 올드팬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마이크 네스미스는 참여를 거부했다). 아마 몽키즈의 좋은 쪽은 -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다 - 그때의 컴백에서처럼 올드팬의 향수를 달래주고 있다는 사실이리라...
노래 : Lee Hazlewood (리 헤이즐우드)
1960년대 말 데뷔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1960년대 말 데뷔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블루스를 내건 밴드들이 활개를 치던 1960년대 말에 대한 반대급부로 1970년대 초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작곡가 겸 가수 즉 싱어송라이터들의 시대가 개화했을 때, 그 계열에 속하면서도 예외적인 길을 걸었던 사람이 랜디 뉴먼(Randy Newman)이었다. 그는 다른 싱어송라이터들이 자아성찰에 집중한 반면에 신체부적응자, 부랑아, 남부사람들, 허풍쟁이 등 ‘비이상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세계를 그려내 그가 ... 블루스를 내건 밴드들이 활개를 치던 1960년대 말에 대한 반대급부로 1970년대 초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작곡가 겸 가수 즉 싱어송라이터들의 시대가 개화했을 때, 그 계열에 속하면서도 예외적인 길을 걸었던 사람이 랜디 뉴먼(Randy Newman)이었다. 그는 다른 싱어송라이터들이 자아성찰에 집중한 반면에 신체부적응자, 부랑아, 남부사람들, 허풍쟁이 등 ‘비이상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세계를 그려내 그가 살던 시대의 아집 편견 포장 거짓 이미지를 포착했다. 때로 조롱과 풍자로 가득한 그의 노래들은 당연히 갑론을박을 야기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를 알기 위해 가장 적당한 노래는 1977년 후반에 발표되어 유일하게 그에게 대중적 히트를 선사한 곡 ‘Short people(키 작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노래 가사는 ‘키 작은 사람은 살 이유가 없어. 그들은 손도 작고 눈도 작고 하지만 거짓말은 꽤 세게 해. 그들은 코도 작고 치아도 작고, 발도 더럽고 작아. 난 키 작은 사람을 원치 않아. 키 작은 사람들은 너와 나나 같아. 나 같은 바보지. 모든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형제들 아닌가...’로 되어있다. 일각에선 부당한 사회적 편견과 선입관에 대한 일침이라는 것을 간과한 채 제목과 표면적인 가사만을 받아들여 약자에 대한 야유라고 비판했다. 그 논박 덕분에 이 노래는 차트2위, 골드 싱글, 순회공연 성공이라는 성과를 안겨주었다. 또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소속이었던 탓에 국내 방송에도 더러 소개된 그의 곡 ‘I love LA’도 노랫말이 오해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노래는 후반부 활기찬 코러스(We love it!) 덕분에 LA 시의 찬가로 승격되었지만 실은 공허한 가치 속에 탐욕을 쫒는 1980년대에 대한 조롱의 메시지였다. ‘Short people’과는 반대로 의미가 잘못 수용된 셈이다. 그 외의 노래들 ‘It’s money that I love(내가 사랑하는 건 돈이야)’나 ‘It’s money that matters(중요한 건 돈이야)’ 등이 말해주듯 그는 시대의 이성(理性) 한편에 광기(狂氣)가 있음을 묘사하면서 인간과 사회관계의 속성을 파헤친 사람이었다. 그가 비록 인기가수는 아니지만 팝의 역사 속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러한 차별화된 시점(視點)에서 비롯된다. 곡 또한 분리선이 명확하다. 누구나 단번에 그가 노래하고 쓴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멜로디 패턴과 코드 전개 술은 독특하다. 때로는 쾌활하고 명랑하게, 때로는 음산하고 비장하게 무드를 산출해가면서 그는 식초처럼 신 느낌의 목소리에 멜로디를 실어 나른다. 그의 악기는 말할 것도 없이 피아노다. 하지만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엘튼 존이나 빌리 조엘과 비교하면 그의 오선지가 얼마나 비(非)대중적인가를 알 수 있다. 1944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가정에서 자라난 덕분에 일찍 음악분야에 진출, 17살 나이에 캘리포니아 음악출판회사에 직원 작가로 활동했다. UCLA에서 문학사를 전공했지만 그의 탁이한 음악역량을 알아차린 리버티 레코드사 사장의 아들이자 친구인 레니 와롱커가 워너 브라더스에 소개, 음반계약을 체결하게 된 덕분에 한 학기를 남기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1968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앨범은 자신의 편곡에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역작이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 방식을 견지한 1970년의 < 12 Songs >, 1971년의 연주실황 앨범 < Live >도 실적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듬해의 < Sail Away >로 약간의 청중을 확보하지만 조롱과 비웃음, 독설, 각진 유머로 질펀한 그의 노래가 폭넓은 관객을 당기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음악계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일련의 아티스트가 그의 앨범에 담긴 곡을 노래하면서 간접적으로 지명도를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페기 리(Peggy Lee)가 ‘Love story’를 불렀고,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I think it’s going to rain today’도 랜디 뉴먼의 곡이었다. 특히 1970년 당시 최고인기를 자랑한 그룹 쓰리 독 나이트(Three Dog Night)는 그의 ‘Mama told me (not to come)’를 노래해 전미차트 1위에 오르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를 주목할 작가로 부상시켜주었다. 결정판은 동료 싱어송라이터인 해리 닐슨(Harry Nilsson)이 수록 곡 전곡을 랜디 뉴먼의 곡으로 채운 앨범을 내놓았다는 사실. 제목은 < Nilsson Sings Newman >이었다. 팬들 사이에선 랜디 뉴먼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이 팽배했다. 적어도 메시지에 관한 한 트러블메이커인 그는 1973년 미국 남부에 대한 컨셉 앨범 < Good Old Boys >로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여기 수록된 곡 ‘Rednecks(남부인들)’(‘우린 남부사람들이야, 우린 땅의 구멍과 엉덩이를 구분하지 않지...)을 놓고 사람들은 과연 랜디 뉴먼이 남부에 대해 호의적인가 반감을 표출한 것인가 자체를 혼돈스러워했다. 대중적 서클에선 아웃사이더에 머물던 그는 1978년 히트차트를 정복한 ‘Short people’ 덕분에 친숙한 이름으로 떠올랐다. 앨범 < little Criminals >도 빌보드 9위에 오른 성공작이었다. 니나 시몬(Nina Simone)은 앨범에 수록된 ‘Baltimore’를 리메이크했다. 1979년에 나온 앨범 < Born Again >은 당대를 주름잡던 그룹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의 팬을 비아냥댄 곡 ‘Story of a rock and roll band’가 말해주듯 독설이 만연한 탓에 찬사와 악평이 엇갈렸다. 상기한 두 앨범에는 이글스(Eagles) 멤버들이 코러스로 참여, 앨범에 친화력을 높였다. 1983년 < Trouble In Paradise >는 1980년대 뚜렷한 지향 없이 탐욕에 이글거리던 여피를 공격한 ‘I love LA’와 폴 사이먼(Paul Simon)과 짝을 이룬 곡 ‘The blues’(팝 차트 51위)가 전파를 타면서 다소간 대중전선에 복귀했다. 5년이 흐른 1988년의 앨범 < Land Of Dreams >는 ‘I love LA’를 개작한 ‘It’s money that matters’(60위)가 싱글로 나왔지만 여운은 짧았으며, 소속사를 바꿔 드림웍스에서 무려 11년 만에 낸 1999년의 독집 < Bad Love >도 모처럼의 신작이라는 작은 화제를 모은데 그쳤다. 가수로선 큰 족적을 그려내지 못한 그가 대우받고 돈을 벌어들인 곳은 오히려 영화음악이었다. 사실상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견고하게 살아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1981년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 Ragtime >의 음악을 맡아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되면서 발진한 영화음악감독 경력은 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했고 2000년 < Meet The Parents >와 2005년의 속편 < Meet The Fockers >(국내엔 < 미트 페어런츠 2 >로 개봉되었다)처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84년 < The Natural >의 영화음악도 빼놓을 수 없으며, 1995년 앨범과 동시에 뮤지컬로도 공연된 < Faust(파우스트박사) >처럼 뮤지컬에도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영화음악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1995년 디즈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 Toy Story >로, 여기의 스코어와 창작곡 ‘You’ve got a friend in me’ ‘I will go sailing no more’ 등은 찬사를 받았다. 1999년의 속편 < Toy Story 2 >의 영화음악도 그의 작품이었다.
밴드 : Love (러브 (록 밴드),Love Revisited)
멤버: Johnny Echols, Mike Randle, David Green, David Chapple 멤버: Johnny Echols, Mike Randle, David Green, David Chapple
밴드 : Buffalo Springfield (버팔로 스프링필드 (락 밴드))
각 멤버마다 뛰어난 기량을 소유했던 5인조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는 1960년대의 포크록 붐을 형성했던 중심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들은 뭉쳐서도 위대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세포분열 한 각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할 정도로 송라이팅 실력과 가창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지를 친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여러 그룹들(포코, 로긴스 & 메시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각 멤버마다 뛰어난 기량을 소유했던 5인조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는 1960년대의 포크록 붐을 형성했던 중심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들은 뭉쳐서도 위대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세포분열 한 각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할 정도로 송라이팅 실력과 가창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지를 친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여러 그룹들(포코, 로긴스 & 메시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도 팝 계의 지형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록을 바탕으로 그 위에 포크와 컨트리를 이식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미국 서부의 맑고 경쾌한 성격을 살린 청명한 음악으로 당대를 풍미한 밴드이다. 어쿠스틱 기타를 맛깔스럽게 연주하는 스테픈 스틸스(Stephen Stills/보컬, 기타)와 리치 퓨레이(Richie Furay/보컬, 기타), 닐 영(Neil Young/보컬, 기타), 브루스 파머(Bruce Palmer/베이스), 그리고 듀이 마틴(Dewey Martin/드럼)으로 역사를 시작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동시대 동료들이나 후배에게 미친 그 파급력은 깊고 둔중하다. 1967년에 탄생한 데뷔앨범 < Buffalo Springfield >에서는 스테픈 스틸스가 작곡해 포크 록의 범주를 넘어 전천후 팝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For what it’s worth (Stop, hey what’s that sound)’가 싱글차트 7위에 안착하며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를 끌어안는 ‘윈윈 전략’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한 < Buffalo Springfield Again >로 다섯 명의 젊은 포크 로커들은 음악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며 음악 평론가들의 훌륭한 ‘지적 파트너’가 되었다. 스테픈 스틸스의 ‘Bluebird(58위)’와 물오른 작곡 솜씨가 드러난 ‘Rock n’ roll woman(44위)’, 그리고 닐 영이 만든 ‘Expecting to fly(98위)’가 순차적으로 대중들의 귀를 잡아끌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했고, 비평가들은 닐 영의 또 다른 걸작 ‘Broken arrow’에 높은 별점을 주었다. 한편 브릿팝 밴드 블루톤스(Bluetones)는 1996년에 발표한 데뷔앨범 타이틀을 < Expexting To Fly >로 정해 버팔로 스프링필드에 대해 헌정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빛나는 음반으로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달성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그러나 베이시스트 브루스 파머 대신 짐 메시나(Jim Messina)로 교체되었다. 팀 내 분위기를 쇄신한 이들이 1968년에 내놓은 세 번째 음반 < Last Time Around >에서는 ‘On the way home’ 만이 82위에 등장했으며, 이것은 앨범 제목처럼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테픈 스틸스, 닐 영, 리치 퓨레이 간에 벌어진 주도권 경쟁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해지자 결국 닐 영이 먼저 버팔로 스프링필드를 떠났다. 이후 결속력은 급격히 와해되어 결국 1968년에 포크 록의 위대한 역사를 작성했던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역사책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스테픈 스틸스와 닐 영은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에서 다시 한번 영광을 재현했고, 리치 퓨레이와 짐 메시나는 나중에 이글스(Eagles)의 멤버가 되는 랜디 마이스너(Randy Meisner) 등과 함께 국내에서 ‘Sea of heartbreak’와 ‘Crazy love’로 많은 사랑을 받은 컨트리 록 그룹 포코를 결성하며 미국적인 음악의 부활을 꿈꾸었다. 한편 짐 메시나는 1970년대 초반에 케니 로긴스와 함께 듀엣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만 2년이라는 단기간 동안 단 세 장의 음반으로 팝 계에 선혈처럼 뚜렷한 여흔을 남긴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커다란 그룹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함은 시간이 흘러도 축소되지 않고 있다.
밴드 : Iron Butterfly (아이언 버터플라이 )
사이키델릭 락 밴드 사이키델릭 락 밴드
밴드 : West Coast Pop Art Experimental Band (웨스트 코스트 팝 아트 익스페리먼탈 밴드)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의 사이키델릭 밴드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의 사이키델릭 밴드
밴드 : Association (어소시에이션)
멤버 : Gary 'Jules' Alexander, Ted Bluechel, Terry Kirkman, Russ Giguere, Larry Ramos, Jim Yester, Brian Cole 멤버 : Gary 'Jules' Alexander, Ted Bluechel, Terry Kirkman, Russ Giguere, Larry Ramos, Jim Yester, Brian Cole
도어스라는 밴드를 얘기한다는 것은 한 밴드의 음악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격동하던 1960년대의 미국사회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표현한 짐 모리슨이라는 인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리드 키보드를 왼손으로는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던 밴드의 음악적 구심점 레이 만자렉과 다른 멤버들이 만들어 낸 음악만으로도 물론 도어스라는 밴드는 음악사에서 지워질 수 없겠지만 그것을 프론트에서 표출... 도어스라는 밴드를 얘기한다는 것은 한 밴드의 음악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격동하던 1960년대의 미국사회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표현한 짐 모리슨이라는 인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리드 키보드를 왼손으로는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던 밴드의 음악적 구심점 레이 만자렉과 다른 멤버들이 만들어 낸 음악만으로도 물론 도어스라는 밴드는 음악사에서 지워질 수 없겠지만 그것을 프론트에서 표출하던 짐 모리슨은 마치 영혼을 불러내듯 도어스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흡입시키는 샤먼이었다. # 1960년대 War & Peace & Love & LSD의 나날 도어스가 등장했던 1960년대는 미국 사회에서 잊혀질 수 없는 격동의 시기였다. 1960년의 쿠바에 대한 수출 금지 조항 제안과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LA 흑인 빈민들이 거주하던 와트시에서의 폭동으로 수백 명이 사상된 사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7년부터 거대해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들. 1968년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등 1960년대는 미국 전 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위해 처절하게 시달리고 있던 그야말로 격변하는 역사의 한 중간에 있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등장한 도어스는 (짐과 레이는 미국 대학 문화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말해지는 UCLA에서 만났다) 당시 그 (특히 젊은이들이 느꼈을)분열과 혼란을 음악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투영해낸 밴드였다. 이 시기는 미국 젊은이들의 음악이 거대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후 침체됐던 분위기를 다시 띄워준 것은 미국이 아닌 영국 밴드 비틀스였다. 그 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비틀스는 락 음악의 역사에서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는 미국 시장 점거를 성공했고, 비틀스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이어 많은 영국 밴드들이 속속들이 비틀스가 열어 놓은 미국이라는 황금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청교도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를 부르짖는 락큰롤의 물결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 반전의 분위기 속에서 국민 가수의 위치에 오른 밥 딜런은 어쿠스틱 사운드에서 일어나 일렉 기타를 들고서 포크 락이라는 음악으로 저항성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딜런은 그저 가수가 아니라 저항의 기수였고, 전쟁 영웅이었으며 또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비치 보이스가 ‘서프 음악’이라고 불리는 걱정 없는 행복한 음악으로 등장한 후 캘리포아는 젊은이들의 상징적인 낙원이 되었고, 그곳에 기반한 많은 밴드들이 등장한다. ‘California dreaming’을 부른 마마스 앤 파파스, ‘Happy together’의 터틀즈, 버팔로 스프링필즈, 버즈 등이 캘리포니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음악을 대변하고 1960년대 음악에 있어 가장 많은 현상을 만들어 낸 도시는 누가 뭐래도 샌프란시스코였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LSD(1966년까지 미국에서 LSD는 합법적인 약물이었다)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이키델릭을 모티브로 인간의 정신과 내면을 노래하던 샌프란시스코의 밴드들은 사랑의 종족인 히피들과 함께 사이키델릭 트립(psychedelic trip)이라고 불리던 공연을 통해 교감을 이루었고, 이렇게 공동체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의 음악적 분위기는 LA의 밴드들과 비교할 때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히피와 밴드들과의 (정신적인) ‘무브먼트’의 분위기였다면, LA의 분위기는 일정한 구심점이 없이 개개인의 영감이 중요시되는 분위기였다. LA에서 활동하던 밴드로는 프랑크 자파, 캡틴 빕하트(Captain Beefheart), 캔드 히트, 러브 등을 들 수 있는데, 도어스 역시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밴드였다. # Short Trace Of Doors 1965년 릭 & 레이븐스라는 밴드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던 레이 만자렉은 UCLA의 필름 스쿨에서 함께 공부하던 짐 모리슨을 베니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당시 자신의 동생인 릭 만자렉, 짐 만자렉과 밴드를 하고 있던 레이 만자렉은 시를 쓰듯 노래하는 짐 모리슨에게 함께 음악을 할 것을 권했고, 당시 LSD와 히피에 영향 받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시와 산문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하던 짐 모리슨은 바로 레이 만자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마하리쉬 요기의 명상회에서 만난 존 덴스모어(사이키델릭 레인저스라는 밴드에서 재즈를 연주하던) 가 가담하고 로비 크루거가 들어오면서 레이의 동생들은 팀을 떠나게 되고, 윌리엄 블레이크와 알도 헉슬리의 작품 <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에서 영감을 얻어 도어스라는 이름의 팀이 만들어진다. 몇 번의 오디션을 보고 런던 포그라는 클럽에 처음 선 도어스는 베이시스트 없이 레이 만자렉이 왼손으로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며 오른손으로 리드 건반을 연주하는 독특한 사운드로 공연을 시작한다. 정통 블루스와 락의 고전들을 카피하는 것으로 공연을 시작한 도어스는 다분히 실험적인 자신들의 사운드를 만들어 나갔다. 처음 도어스의 공연에서 짐 모리슨은 관객을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용기를 내서 관객쪽으로 돌아선 짐 모리슨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고. 해서 멤버들은 짐 모리슨이 쏟아대는 처음 듣는 시에 맞춰 즉흥연주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짐 모리슨은 공연 중 노래가 아닌 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쉬지 않고 무대에서 토해냈고, 멤버들은 그에 맞추어 맘껏 즉흥연주를 했다고.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로도 유명한 클럽 ‘위스키 어 고고(Whisky A Go Go)’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들의 팬을 만들어 갔고, 당대의 유명한 밴드였던 러브, 뎀(Them), 터틀즈, 시즈(Seeds) 등과 같은 무대에 서며 짧은 시간에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도어스의 새로운 사운드는 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었다. 음악은 독특했지만 실험적이고 거친 무대 매너 때문에 쉽게 계약을 하지 못하던 중 짐 모리슨의 거침없는 무대를 보고 이끌린 잭 홀츠만의 눈에 띄어 도어스는 당시엔 소규모 레이블이었던 엘렉트라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 1월 첫 앨범 < The Doors >를 발표한다. 첫 번 째 음반으로 락 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도어스는 같은 해 두 번째 앨범 < Strange Days >를 발매하고 도어스와 엘렉트라 레코드는 함께 거물 밴드와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 급성장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골치 아픈 녀석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천재적인 영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그들의 음악 속에 가지고 있었어요. 뜨겁고 무서운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었어요"라는 당시 엘렉트라 레코드 회사 관계자의 말과도 같이 당시 반전 분위기와 히피 문화 속에서 도어스의 음악은 다른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마치 새로운 구세주인양 그들을 따르는 팬들의 숫자도 불같이 퍼져 나갔다. 밴드와 공연의 규모가 커지면서 무대 위에서의 거침없고 즉흥적인 짐 모리슨의 행동 또한 많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1967년 12월 코네티컷 주에서 짐 모리슨은 공연 중 외설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점점 커져 가는 밴드의 명성과 쉴 새 없는 공연 등 거대해진 도어스의 덩치에서 오는 정신적인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짐 모리슨의 약물 복용과 술마시기는 더욱 심해졌고, 술에 취한 채 무대에 오르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 도어스의 무대에는 항상 경찰들이 함께 했다. 자신들의 팬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으나 국가에서 보기에는 거의 정신 나간 폭도들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 중 1968년, 세 번째 앨범 < Waiting For The Sun >을 발표했고, 짐 모리슨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만 갔다. 일반 관객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무대 위에서의 난폭함과 외설적인 모습에 일부 팬들조차 도어스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할 정도로 짐 모리슨의 거침없는 광기는 날로 더해갔다. 그리고 1969년, < The Soft Parade >의 발매 후 가장 많은 팬들을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마이애미 사건이라고 말해지는 이 일은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서 공연 도중 지미가 관객들 앞에서 옷을 벗은 일이다. 이 일로 인해 외설죄로 체포된 짐 모리슨은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미국 여러 도시에서는 외설적인 행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일정이 잡혀 있던 많은 공연이 최소 됐고, 이 일은 짐 모리슨에게는 정신적인 압박이었고, 다른 멤버들에게는 짐에 대한 불만을 쌓이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70년, < Morrison Hotel >을 발매하고 이어 같은 해 7월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도어스의 즉흥적인 연주의 느낌이 살아 있는 라이브 앨범 < Absolutely Live >를 발매하며 쉽게 멈추지 않는 라이브 밴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음 해인 1971년의 < LA Woman > 발매 후, 끊이지 않는 마약 복용과 쉬지 않고 마셔 대는 술 때문에 자기 파괴 속으로 가라앉아만 가던 짐 모리슨은 결국 팀을 나와 자신의 애인 파멜라와 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 짐 모리슨은 자신이 바라던 시인의 모습으로 시작 활동을 하며 < The Lizard >와 < The New Creatures >라는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그리고 짐 모리슨의 시를 좋아하며 그를 시인으로 사랑하던 여인 파멜라와 파리에서 지내던 짐 모리슨은 < LA Woman >과, 두 권의 시집이 발표된 그 해 7월, 자신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의 사인은 그와 함께 1960년대의 3J로 불리는 제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과 마찬가지로 약물에 의한 심장마비였다. 그의 사망 이후 나머지 멤버들은 짐 모리슨 없이 < Other Voice >, < First Circle >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영적 매개체인 샤먼이 없어진 도어스의 음악은 더 이상 이전처럼 관객들에게 흡입될 수 없었다. 결국 도어스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레이의 제의로 도어스는 해체했다. 비록 6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가장 많은 사건과 변화가 끓어 넘치던 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도어즈의 음악은 당시의 정신을 가장 잘 표상화한 음악이자 철학이었고 하나의 종교였다. 그리고 짐 모리슨에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와 음악은 종교였고, LSD와 알콜은 성수였으며, 그 자신은 그것을 이끄는 샤먼이었던 것이다.
밴드 : The Electric Prunes (일렉트릭 프룬즈)
멤버 : James "Weasel" Spagnola, Joe Dooley, John Herron, Ken Williams, Mark Tulin, Ron Morgan, Thaddeus James Lowe 멤버 : James "Weasel" Spagnola, Joe Dooley, John Herron, Ken Williams, Mark Tulin, Ron Morgan, Thaddeus James Lo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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