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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의 킬러 [내츄럴 본 킬러] 영화음악 (Natural Born Killers OST) [그린 컬러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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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의 킬러 [내츄럴 본 킬러] 영화음악 (Natural Born Killers OST) [그린 컬러 2LP]

[ 180g 게이트폴드 / 2000장 넘버링 한정반 / 25주년 기념반 / PVC 보호 슬리브 ]
Leonard Cohen, Dan Zanes, Patti Smith, Bob Dylan, Dr. Dre 노래 외 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Music on Vinyl / Universal | 2019년 05월 2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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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의 킬러 [내츄럴 본 킬러] 영화음악 (Natural Born Killers OST) [그린 컬러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5월 24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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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

Disc1
  • A1 Leonard Cohen - Waiting For The Miracle
  • A2 L7 - Shitlist
  • A3 Dan Zanes - Moon Over Greene County
  • A4 Patti Smith - Rock N Roll Nigger
  • A5 Cowboy Junkies - Sweet Jane
  • A6 Bob Dylan - You Belong To Me
  • B1 Duane Eddy - The Trembler
  • B2 Nine Inch Nails -Burn
  • B3 Route 666
  • B4 Totally Hot
  • B5 Patsy Cline -Back In Baby'S Arms
  • B6 Peter Gabriel And Nusrat Fateh Ali Khan - Taboo
  • B7 Jane'S Addiction - Sex Is Violent
Disc2
  • C1 A.O.S - (History Repeats Itself)
  • C2 Nine Inch Nails - Something I Can Never Have
  • C3 Russel Means - I Will Take You Home
  • C4 Hollywood Persuaders - Drums A Go-Go
  • C5 Hungry Ants
  • C6 Dr. Dre - The Day The Niggaz Took Over
  • C7 Juliette Lewis - Born Bad
  • D1 Sergio Cervetti - Fall Of The Rebel Angels
  • D2 Lard - Forkboy
  • D3 Batonga In Batongaville
  • D4 Nine Inch Nails - A Warm Place
  • D5 Allah, Mohammed, Char, Yaar
  • D6 Leonard Cohen - The Future
  • D7 Tha Dogg Pound - What Would U Do

아티스트 소개 (14명)

’20세기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레너드 코헨은 비록 미국 빌보드차트 싱글 차트에 명함을 내민 적이 없지만 영미 뮤지션들이 일제히 ’음악적 사부’로 추앙할 만큼 구미 음악계에서 절대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닉 케이브, 존 케일, R.E.M. 등 후배와 동료 뮤지션들이 참여한 1991년 과 돈 헨리, 엘튼 존 등이 나선 1995년 등 트리뷰트 앨범만도 두 차례였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한다.... ’20세기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레너드 코헨은 비록 미국 빌보드차트 싱글 차트에 명함을 내민 적이 없지만 영미 뮤지션들이 일제히 ’음악적 사부’로 추앙할 만큼 구미 음악계에서 절대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닉 케이브, 존 케일, R.E.M. 등 후배와 동료 뮤지션들이 참여한 1991년 과 돈 헨리, 엘튼 존 등이 나선 1995년 등 트리뷰트 앨범만도 두 차례였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한다. 내면탐구와 현실참여의 메시지를 특징적인 낮은 키(low key)의 묵직한 바리톤과 어쿠스틱 사운드로 전하는 그의 음악은 듣는 사람을 탁월한 시(詩) 세계로 안내하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면서 널리 애청되었다. 언제나 잔뜩 힘 빼고 처진 듯 노래하면서 도리어 강한 메시지의 설득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크 브렐의 계승자’ ’로우 키의 밥 딜런’으로도 통했다. 많은 가수들이 다투어 그의 곡을 노래했다. 1966년 주디 콜린스(Judy Collins)는 그의 빼어난 ’노래 시’인 ’Suzanne’를 불렀으며 ’Bird on the wire’는 팀 하딘(Tim Hardin), 애론 네빌(Aaron Neville) 등이 리메이크했다. 이 노래는 1990년 멜 깁슨과 골디 혼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한때 그의 공연 팀 멤버였던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는 코헨의 레퍼토리인 ’Famous blue raincoat’를 타이틀로 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고, 2001년 드림웍스의 대박 영화 에서 호응을 얻은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의 ’Hallelujah’도 코헨의 작품이었다. 국내 애청곡도 부지기수로 많다. 1968년에 발표된 첫 앨범에 수록된 ’Suzanne’ ’Sisters of mercy’ ’So long, Marianne’ 등이 잇따라 라디오전파를 탔으며 2집의 ’Bird on the wire’와 특히 ’Nancy’는 그를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1988년에 발표한 곡 ’I’m your man’은 자가용 오너들마다 구입했을 만큼 폭발적으로 애청되었고, 동명의 앨범에 수록된 또 다른 곡 ’Everybody knows’도 사랑받았다. 포크 가수 윤설하는 1991년 코헨의 곡 ’Dance me to the end of love’를 ’벙어리 바이올린’으로 번안해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1934년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레너드 코헨은 1966년 소설 (Beautiful Losers)를 출간, 애초 시인이자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가수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67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부터였고, 이듬해 첫 앨범인 동시에 지금도 가장 유명한 앨범인 이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나왔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평소 시작(詩作)에서 표현된 낭만주의를 구체화하면서 구미 아티스트들에게 ’밥 딜런과 또 다른’ 언어의 충격을 던진다. 여기에는 종교적 상상력이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난 곡 ’Sisters of mercy’, 절망감이 퍼진 ’So long, Marianne’, 신비주의로 채색된 ’Master song’ 그리고 코헨의 민감한 언어감수성이 드러난 ’Suzanne’이 수록되었다. 이 곡들은 1971년 로버트 알트먼(Robert Altman)의 영화 에 삽입되어 재평가를 받았다. 1969년의 앨범 은 전작과 유사한 방식이었지만 염세적 존재론을 전한 ’Bird on the wire’, 폭력과 정치문제를 취급한 멋진 코러스의 ’The partisan’ 등 문제작을 수록했고 국내 팬들은 ’Nancy’가 금지곡으로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에 신청엽서를 보내기를 되풀이했다. 이듬해 ’Famous blue raincoat’가 수록된 와 1974년에 내놓은 이후 코헨은 고뇌와 사색을 축적하는 그의 고유 방식인 ’은둔’을 시작, 2년간이나 그리스 섬에 침잠했다. 하지만 그 앨범에 실린 곡들 ’Chelsea hotel #2’ ’Take this longing’ ’Who by fire’는 라디오전파를 오랫동안 탔다. 라이브 앨범으로 돌아온 뒤 1977년에는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프로듀스로 록의 색깔이 물씬한 음반 을 냈지만 반응은 아주 저조했다. 이후 1979년 와 1985년 등 10년간 겨우 2장의 앨범을 낼 만큼 과작(寡作)에 머물렀다. 이 앨범들은 초기 낮은 키의 어쿠스틱 사운드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1988년 자신이 프로듀스한 앨범 은 중년과 자신의 뿌리를 사고하는 깊이를 드러내면서, 국내에서 절대적 인기를 모은 ’I’m your man’을 비롯해 ’Everybody knows’ ’First we take Manhattans’ ’Ain’t no cure for love’ ’Take this waltz’ 그리고 ’Tower of song’ 등 전곡이 리퀘스트를 받았다. 이 앨범으로 그는 비평적 상업적 위치를 회복해, 당대 아티스트들로부터 재평가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91년의 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헌정앨범 이 발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2년의 앨범 는 적어도 미국사회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수작 앨범으로, 타이틀곡은 ’난 미래를 보아왔고, 형제여 그것은 살인이었지…’와 같은 메시지로 불안한 현실세계를 질타하고 ’Anthem’은 새 세계에 대한 갈망을, ’Waiting for a miracle’은 변화에 대한 기대를 묘사했다. 하지만 ’Democracy’에 의외로 미국을 찬양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을 비롯해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것을 리메이크한 ’Always’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이고 재래식 정서를 노출, 감상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한 점도 없지 않았다. 94년의 이후 또 다시 오랫동안 수도승으로 침잠한 그는 2001년 백업 보컬로 활동해온 여성 샤론 로빈슨(Sharon Robinson)을 프로듀서로 한 앨범 로 건재함을 알렸다.
히피들의 혁명적인 자유의 외침이 시들해질 무렵, 미국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는 이전의 록과는 다른 음악적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텔레비전(Television)과 레이먼즈(Ramones) 등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한 펑크 록이었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그러한 남자들의 홍수 가운데서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펑크의 대모’ 라는 칭호와 함께 70년대의 유니크한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 히피들의 혁명적인 자유의 외침이 시들해질 무렵, 미국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는 이전의 록과는 다른 음악적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텔레비전(Television)과 레이먼즈(Ramones) 등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한 펑크 록이었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그러한 남자들의 홍수 가운데서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펑크의 대모’ 라는 칭호와 함께 70년대의 유니크한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펑크와 여성 뮤지션의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줄기라고 할 그녀는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인 언어의 사용과 중성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결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전개하면서 ‘언어의 힘을 융합한 3 코드 록(Three Chord Rock Merged the Power of Words)’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성 로커들의 역할모델이 되어왔다. 어릴 적부터 랭보와 짐 모리슨, 롤링 스톤tm의 음악에 빠져있던 그녀는 학교 교육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극 공동집필과 시를 쓰며 지내던 그녀는 기타리스트 레니 케이(Lenny Kaye)를 만나게 되는데, 케이의 기타 리듬에 맞추어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계기로 음악역정에 첫 씨를 뿌리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록 전문지 크림(Creem)에 정기 기고하는 록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했다. 뉴욕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벌어진 ‘록과 랭보(Rock’n Rimbaud)’ 공연을 계기로 레니 케이와 다시 손잡게 되고 피아노 리차드 솔(Richard Sohl)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밴드활동을 시작한다. 1974년 그룹은 곡목부터 신랄한 ‘Piss Factory’ 라는 첫 싱글(리드 기타에 텔레비전의 톰 벌레인이 참여)을 발표하였고, 이후 블론디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반 크랠(Ivan Kral)을 영입하여 4인조로 거듭나 텔레비전 등과 함께 CBGB 클럽의 고정 출연진으로 활약하며 왕성한 라이브 활동을 펼친다. 한때 모던 러버스(Modern Lovers)를 이끌었던 조나단 리치맨(Jonathan Richman)이 드럼 파트를 맡아준 적도 있었지만, 곧 제이 디 도허티(Jay Dee Daugherty)가 들어오고 밴드가 점차 자신의 색깔을 굳힐 때쯤인 1975년 그룹은 아리스타(Arista) 레이블에 픽업되어 역사적인 첫 앨범 < Horses >를 발표한다. 전 벨벳 언더그라운드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싱을 맡고, 톰 벌레인이 참여하기도 했던 이 앨범은 화려한 그들의 지원 못지 않게 밴드의 주축인 패티 스미스와 레니 케이의 음악적인 역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펑크 록은 물론 록 전체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상징주의’로 표현되는 애매 모호하고 즉흥적인 노랫말, 강렬하지만 세련된 짜임새를 가진 사운드는 당시의 펑크 초창기 앨범들의 ‘날것’이나 ’껄렁껄렁’한 것들과는 차별된, 아트형 펑크의 새 길을 열었다. ‘예수는 남의 죄를 위해 죽었지만 나를 위해선 아냐...’하는 가사로 시작되는 록 역사의 명곡 ‘Gloria’와 ‘Land of 1,000 dances’(메들리 곡 ‘Land’)가 여기 들어있다. 이후 두 번째 앨범 < Radio Ethiopia >로 돌아온 그녀는 투어 도중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잠시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1978년 마침내 패티 스미스란 이름을 대중에게 익히게 한 세 번 째 앨범 < Easter >를 발표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과 함께 곡을 쓴 ‘Because the night’는 빌보드 팝 싱글차트 13위를 기록했고 이어 전미와 유럽 투어에 나서는 등 세계적 성공을 만끽했다. 이 곡은 나중 나탈리 머천트가 이끈 뉴욕의 포크 밴드 텐 싸우선드 매니악스(10.000 Maniacs)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에서 리메이크되어, 그때까지 차트실적이 미미했던 그들에게 고대하던 성공을 안기면서(차트 11위) 명곡의 위력을 되새김질했다. 한편 < Easter > 앨범에는 영화 < 올리버 스톤의 킬러 >에 삽입되어 패티 스미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Rock N roll nigger’가 수록되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록 스타덤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프로토 펑크 그룹 엠씨 파이브(MC5) 출신의 기타리스트 프레드 스미스(Fred ’Sonic’ Smith)와의 사랑으로 그녀는 새로운 삶을 갈구하면서 활동중단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토드 런그런(Todd Rundgren)이 프로듀스한 네 번째 앨범 < Wave >를 발표한 얼마 뒤인 1979년 가을, 수많은 예술적 이상적 목표를 묻어버린 채 이탈리아 축구 스타디움에 운집한 7만명의 관중 앞에서 ‘Bye, Bye, Hey, Hey’를 외치며 은퇴하였다. 1980년 프레드와 결혼한 스미스는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였고, 그 후 몇 년 동안은 두 아이의 양육과 음악적인 영감에만 온 힘을 쏟으며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러한 행복은 1988년 두 부부의 합작 앨범 ’Dream Of Life’에 그대로 반영되어 사람들 속에 내재된 무한한 긍정적 가능성에 대해 노래하는 한편, 어린이들에 대한 평화적인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국가 간의 평화를 기원하는 ‘People have the power’가 수록된 이 앨범은 당시 국내에 라이선스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삶의 행복 속에서 그녀의 주위에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1994년 남편 프레드가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한달 뒤에는 동생인 토드(Todd)마저 심장 마비로 죽었으며, 오랜 친구 메이플소프와 옛 동료인 리처드 솔마저 이승을 떠났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많은 소중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스미스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뼛속깊이 느낀 나머지 프레드와 함께 준비중이던 앨범 작업을 중단한 채, 슬픔과 비탄의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스미스는 무대 위에서의 청중, 팬들과의 교감을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사랑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무대 위에 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이전의 멤버들을 모아 라이브 공연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롤라팔루자 무대에 서고 영화 < 데드 맨 워킹 >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당시 모던 록계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에 대해 실험한 그녀는 1996년 통산 여섯 번째 앨범인 < Gone Again >과 함께 돌아왔다. < 롤링스톤 >지는 무려 8년 만에 신작을 낸 그녀를 ‘올해의 컴백’으로 포상했다. 이전부터 그녀와 음악적인 활동을 교류하던 톰 벌레인과 존 케일은 비롯하여 지금은 고인이 된 포크 싱어송라이터 제프(Jeff Buckley) 그리고 만돌린을 연주해준 친동생 킴벌리 스미스(Kimberly Smith)가 참여한 이 앨범은, 주변인들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벗어나 그것을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하려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으면서 초창기 때보다 더욱 성숙한 사운드를 과시함으로써,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과 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후 1997년 < Peace And Noise >과 2000년 < Gung Ho >, 두 앨범을 더 발표하여 활력을 되찾은 패티 스미스는 4반세기의 열정적 음악인생을 간직한 채 올해로 56세를 맞았다.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 Dr. Dre (닥터 드레 ,Andre Romelle Young)
힙합 전문지 < 소스 >는 1996년을 정리하면서 힙합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선정하였다. 1위는 데쓰 로우 레코드 사장인 서지 나이트가 차지했고, 뮤지션으로는 유일하게 닥터 드레가 5위안에 끼었다. 닥터 드레는 1992년 데뷔 앨범 < The Chronic >으로 일약 ‘갱스터 랩의 간판스타’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의 이 작품은 웨스트코스트에 흩어져 있던 흑인 래퍼들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 힙합 전문지 < 소스 >는 1996년을 정리하면서 힙합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선정하였다. 1위는 데쓰 로우 레코드 사장인 서지 나이트가 차지했고, 뮤지션으로는 유일하게 닥터 드레가 5위안에 끼었다. 닥터 드레는 1992년 데뷔 앨범 < The Chronic >으로 일약 ‘갱스터 랩의 간판스타’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의 이 작품은 웨스트코스트에 흩어져 있던 흑인 래퍼들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때문에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그의 상위 랭크는 당연한 것이었다. 거리의 흑인들은 그의 음악에 몸을 흔들었고 그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 섹스, 폭력 등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여과 없이 그려냈던 것이다. 닥터 드레는 1980년대 후반 동부를 기점으로 퍼블릭 에너미, 런 DMC 등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한 갱스터 랩을 서부로 저변 확대시킨 전설적인 그룹 N.W.A를 통해 음악계에 입문했다. 아이스 큐브, 이지 이, MC 렌, DJ 옐라가 그 구성원들. 그룹의 면면만 살펴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룹의 88년 데뷔앨범 < Straight Outta Compton >은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행동주의 가사로 흑인들, 특히 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더욱이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곡 ‘Fuck tha police’로 그룹은 F.B.I의 감시 리스트에 올랐으며, 영국 정부는 앨범 반입을 막기 위해 보관창고를 불태우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음반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래퍼들에게 ‘갱스터 랩의 교과서’로 대접받고 있다.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갱스터 랩은 닥터 드레의 솔로 활동과 함께 주류 음악으로 본격적인 ‘상향 조정’을 꾀했다. 그의 1992년 데뷔작 < The Chronic >은 힙합의 ‘고전 목록’ 맨 앞에 꼽힐 정도로 끊임없이 랩 인구에 회자되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앨범에서 그는 일명 드레 사운드라 일컫는 ‘지-펑크’(G-Funk)라는 독창적인 랩 양식을 탄생시켰다. 갱스타 펑크(Gansta Funk)의 줄임말인 이 장르는 단순한 리듬패턴으로 진행됐던 기존의 랩에 피-펑크(P-Funk)의 대부 조지 클린턴의 음악 스타일을 응용, 계속적으로 변해 가는 멜로디 라인과 펑키한 사운드, 그리고 리듬 앤 블루스 보컬라인을 가미시킨 것이다. ‘지-펑크의 찬가’, ‘Nuthing but a ‘G’ thang’을 비롯해, ‘Let me ride’, ‘Fuck with dre day’는 높은 인기를 얻으며 8개월 동안 빌보드 앨범차트 탑10에 머물렀다. 상복도 뒤따라 그래미상과 빌보드상 시상식을 ‘드레의 날’로 만드는 저력을 과시했다. 또한 그는 이 앨범을 통해서 스눕 도기 독이라는 신인 래퍼를 발굴하여 대스타로 키워냈다. 이뿐이 아니다. 닥터 드레는 이어서 워렌 지, 독 파운드 그리고 최근의 에미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안목과 프로듀싱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들을 쟁쟁한 주류 스타로 조련시켰다. 그의 진가가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닥터 드레의 특허품은 서부 힙합씬을 한데 묶는데 기여했지만, 동부와의 지역 감정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로도 나타났다. 1996년의 투팩과 이듬해 노트리어스 B.I.G의 사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갱스터 랩은 약속이나 한 듯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폭력과 반목이 난무한 힙합씬에 대중들이 넌더리가 난 것이다. 닥터 드레 역시 힙합 다큐멘터리 영화 < 더 쇼 >에서 힙합의 순수한 정신은 변질되어 ‘엔터테인먼트’로 됐다면서 갱스터 랩에 대해 사망진단을 내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닥터 드레는 자신의 독자 레이블 애프터매스에서 발표한 1996년 프로젝트 앨범 < Dr. Dre Presents The Aftermath >에서 현악기의 사용, 여성 보컬강조 등 부드러움과 세련됨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하지만 앨범은 상업적 실패로 귀결되었고 그는 기준설정을 다시 해야만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데뷔작 이후 7년간의 장고(長考) 끝에 1999년 겨울에 내놓은 2집 [2001]. 드레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고민이 가득하다. 마약을 합법화하자는 메시지는 여전하지만 반주는 이전보다 밋밋함의 일색이다. 이제 더 이상 극단으로 치닫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로 여겨진다. 동부에 대한 ‘화해의 손짓’이기도 하다. 하지만 ‘Forgot about dre’ 같은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매력적인 곡도 있다. 닥터 드레의 이 앨범은 산타나라는 핵 폭풍을 만나 차트 1위 등극에 어려움은 겪고 있지만 400만장이라는 음반 판매고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갱스터 랩은 흑인들의 밑바닥 인생을 들춰내며 지구촌의 공유 음악으로 고속 성장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제 그들의 음악에서 치부가 아닌 ‘자신감’을 원한다. 21세기형 갱스터 랩. 그 대열에 닥터 드레가 또다시 앞장섰다.
노래 : Juliette Lewis (줄리엣 루이스)
수많은 할리우드 TV 아역 스타 중 한명으로 여겨졌던 줄리엣 루이스가 연기파 배우로 인정 받게 된 작품은 마틴 스콜세지의 <케이프 피어>.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탈옥수의 유혹에 성적 호기심을 보이는 사춘기 소녀로 출연, 미묘한 감정 표현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관객과 비평가에게 찬사를 받으며 아카데미와 골든 글러브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 다음해 우디 알렌 감독의 <부부 일기>에서는 극... 수많은 할리우드 TV 아역 스타 중 한명으로 여겨졌던 줄리엣 루이스가 연기파 배우로 인정 받게 된 작품은 마틴 스콜세지의 <케이프 피어>.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탈옥수의 유혹에 성적 호기심을 보이는 사춘기 소녀로 출연, 미묘한 감정 표현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관객과 비평가에게 찬사를 받으며 아카데미와 골든 글러브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 다음해 우디 알렌 감독의 <부부 일기>에서는 극단적인 반항아로 출연해 영화팬들에게 다시 한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재능만큼 타고난 인복으로 인해 줄리엣 루이스는 마틴 스콜세지, 라세 할스트럼, 우디 알렌, 올리버 스톤 등과 같은 내로라 하는 거장 감독들과 일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상대역들도 쟁쟁했었는데 <칼리포니아>에서는 브래드 피트와 <길버트 그레이프>에서는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출연하였으며,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는 조지 클루니와 함께 출연하였다. 그녀의 개성있는 연기는 문제작 <올리버 스톤의 킬러>에서 극에 달했으며 이 영화로 인해 1994년 베니스 영화제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1999년 <사랑하고 싶은 그녀>에서의 저능아 역을 비롯하여 <웨이 오브 더 건>에서는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로 임산부 역을 완벽하게 열연해 내는 등 일련의 배역을 통해 몇 안 되는 헐리우드의 젊은 여성 연기파 배우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차기작으로는 토드 필립스의 코미디 영화 < Old School >, 뱅상 카셀과 함께 출연하는 얀 쿠넹 감독의 < Blueberry >, 우마 써먼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는 < Hysterical Blindness > 등이 있다.

[필모그래피]

케이프 피어(1991)|주연배우
로미오 이즈 블리딩(1993)|주연배우
칼리포니아(1993)|주연배우
내츄럴 본 킬러(1994)|주연배우
길버트 그레이프(1994)|주연배우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주연배우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주연배우
사랑하고 싶은 그녀(1999)|주연배우
웨이 오브 더 건(2000)|주연배우
룸 투 렌트(2000)|린다
이너프(2002)|주연배우
올드 스쿨(2003)|주연배우
콜드 크릭(2003)|주연배우
블루베리(2004)|주연배우
스타스키와 허치(2004)|주연배우
캐치 앤 릴리즈(2007)|주연배우
노래 : Duane Eddy (듀에인 에디 )
트왱(Twang) 사운드를 개발하여 조지 해리슨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포함한 후배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준 락 기타리스트 트왱(Twang) 사운드를 개발하여 조지 해리슨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포함한 후배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준 락 기타리스트
노래 : Peter Gabriel (피터 가브리엘)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음악 제국을 건설한 그는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민속 음악을 월드 뮤직(다분히 서양인 중심적인 시각이지만)이란 이름으로 알린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상업적이고 틀에 박힌 유행음악에 싫증을 느낀 팬들은 피터 가브리엘의 노래들을 통해 음악적인 갈증을 풀었고 지적인 배고픔을 채웠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피터 가브리엘은 명 프로그레시브 그룹 제네시스(Genesis)를 이끌면서 음악적인 이상을 찾았고, 1977년부터 시작된 솔로 활동은 그 유토피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실천의 시간이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제네시스는 1970년을 전후한 기간 동안 클래식을 근간으로 한 복잡한 곡 구조와 난해한 가사, 그리고 시각적인 충격 요법을 가미한 공연으로 가장 초현실적인 아트록 밴드로 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 선두엔 바로 피터 가브리엘이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친정인 제네시스를 출가한 이 영국 아티스트는 이전처럼 일반 대중들이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음악에서 좀 더 대중적인 음악으로 방향타를 틀었다. 그 대표적인 곡이 1986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Sledgehammer’이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성공이 그의 음악 철학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친숙한 멜로디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고집스런 눈으로 응시한 날카로운 가사와 긴장감을 풀지 않는 도전적인 실험 정신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은 그를 대중 음악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하고 있다. 1977년, 포크 스타일의 기타 연주로 포문을 여는 데뷔 싱글 ’Solsbury hill(68위)’이 수록된 처녀작 < Peter Gabriel >부터 1980년의 세 번째 음반까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앨범 타이틀로 정한 그는 이전 제네시스 시절과는 달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사로 거듭났다. 특히 < Peter Gabriel Ⅲ >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인륜적인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에게 헌정한 명곡 ’Biko’와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얼음처럼 차갑고 오싹한 백보컬이 전율적인 ’Games without frontiers(48위)’가 자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1994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발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피터는 관중들과 함께 ’Biko’를 열창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감동과 환희의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다. 제네시스 시절부터 짙은 화장과 화려한 공연으로 시각적인 면에서도 앞서갔던 가브리엘은 1981년 MTV가 개국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982년의 4집 < Security >에 수록된 ’Shock the monkey(29위)’의 긴박한 멜로디를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와 공포스런 화면으로 풀어낸 뮤직비디오는 MTV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스탑 모션으로 제작된 1986년도 싱글 ’Sledgehammer’도 여러 상을 수상하면서 뮤직비디오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렇듯 영상에도 깊은 조예를 나타낸 그는 1984년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 버디 >와 1988년 마틴 스콜세지의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활동 반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상한 4개의 그래미 트로피 중에서 3개가 뮤직비디오 부문일 정도로 ’보는 것’에 대한 그의 집념과 의지는 대단하다. 또한 그는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안을 제3세계의 민속음악에서 찾기 시작했다. 피터 가브리엘은 WOMAD(World of Music, Arts and Dance) 재단을 만들어 1980년대 폴 사이먼(Paul Simon),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리더 데이비드 번(David Byrne)과 함께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음악을 서방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자신의 곡인 ’Biko’의 도입부에서 들을 수 있는 아프리카 합창단의 음원과 < So > 앨범에 수록된 세네갈 출신의 남성 가수 유쑨 두루(Youssou N’Dour)를 백보컬리스트로 모셔온 ’In your eyes’ 등은 타지역의 민속음악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의미하는 대표곡이다. 1986년에 발표된 통산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So >는 피터 가브리엘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남성 가수로 등극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싱글 ’Sledgehamm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In your eyes(26위)’와 ’Big time(8위)’, 케이트 부시와 호흡을 맞춘 발라드 ’Don’t give up(72위)’이 무더기로 차트를 누비면서 일반 팝 팬들과의 거리감을 대폭 줄였다. < So >는 앨범 차트 2위까지 상승했고 그래미에도 여러 부문에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면서 대중성과 음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In your eyes’는 1989년에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의 영화 < 세이 애니씽 >에 삽입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다시 싱글 차트에 입적되기도 했다(41위). 1989년, 영화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 < Passion >으로 그래미 뉴에이지 부문을 수상한 그는 1992년에 < Us >를 발표했다. 피터 가브리엘과 핑크 빛 염문을 뿌렸던 아일랜드의 자존심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와 입을 맞춘 ’Come talk to me’를 위시해 그루브한 싱글 ’Steam(32위)’, ’Digging in the dirt(52위)’를 배출한 이 작품은 그러나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Secret Live’로 명명된 전 대규모 세계 순회 공연의 열광과 희열을 담은 음반과 비디오를 1994년에 발표해 다시 한번 그래미상을 거머쥔 피터 가브리엘은 현재 음악과 영상, 그리고 컴퓨터 산업을 아우르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에 가할 충격을 준비하고 있다.
노래 : Nusrat Fateh Ali Khan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밴드 : Cowboy Junkies (카우보이 정키스)
198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결성된 포크락 밴드. 198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결성된 포크락 밴드.
밴드 : Nine Inch Nails (나인 인치 네일스)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의 원 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는 세기말 사운드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결정체이다. 혼돈과 무질서로 대변되는 어지러운 시대에 그가 퍼트린 ‘소음의 미학’은 일대 사운드의 반란이었다. 기존 록음악의 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예쁘장한 소리대신 귀에 거슬리는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채택했다.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였다. 대중들도 ...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의 원 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는 세기말 사운드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결정체이다. 혼돈과 무질서로 대변되는 어지러운 시대에 그가 퍼트린 ‘소음의 미학’은 일대 사운드의 반란이었다. 기존 록음악의 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예쁘장한 소리대신 귀에 거슬리는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채택했다.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였다. 대중들도 열렬히 환영하며 기꺼이 그의 추종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또한 한때 절친한 친구이자 수제자였던 ‘맨슨교 교주’ 마를린 맨슨(Marilyn Manson)도 레즈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세기 끝물에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인더스트리얼 전도는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하지만 트렌트 레즈너가 인더스트리얼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음악 장르가 그렇듯 긴 세월동안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번듯하게 세기말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전통적인 대중 음악의 패턴을 전복시키고자 기계의 각종 소음들을 전자 사운드에 결합시켜 생소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같은 영국 그룹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사운드의 거부감 때문에 별다른 조명한번 받지 못하고 사라져간 선배그룹들과 달리 그는 ‘대중성’을 가미시켜 음악 트렌드로 이끌어냈다. 음지에 갇혀있던 사운드를 양지로 길어 올린 것이다. 트렌트 레즈너가 인더스트리얼로 귀의(歸依)한 연유는 그의 성장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는 1965년 5월 17일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머서(Mercer)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의 관심 속에 피아노와 색소폰, 튜바 등을 배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클래식음악에 빠져있던 그가 극단적 음악으로 선회하게 된 계기는 인근 알리제니 대학(Allegheny College)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면서부터였다. 전자 음악의 아이콘인 컴퓨터를 다루면서 풍성하고 이질적인 효과음과 소리들에 심취하게 됐다. 졸업 후에는 클리브랜드로 이주, 악기점과 스튜디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노이즈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와 병행하여 이노센트(Innocent), 엑소틱 버즈(Exotic Byrds), 프러블럼스(Problems)같은 그룹에서 활동하며 앨범을 발표하는 등 실전에도 전념했다. 그는 1988년 언더그라운드에서 갈고 닦은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데모 음반을 제작하고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 나인 인치 네일스를 출범시켰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다른 인디스트리얼 밴드에 비해 접근이 용이하다. 멜로디에 생동감이 넘치며, 사운드도 라이브무대에서 실제 연주가 가능하게끔 제작하기 때문에 기계적이면서 기계적이 아니다. 그 내면에 인간의 박동소리가 고동친다. 1997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하면서 "트렌트 레즈너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황제이다. 그는 암울한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인간성을 부여한 시인이다."라는 코멘트가 웅변한다. 그가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1989년의 데뷔작 < Pretty Hate Machine >에서 잘 드러난다. 레즈너의 최고 싱글 중 하나로 꼽히는 ‘Head like a hole’, 테크노의 전형을 보여주는 ‘Sin’ 등 ‘깨끗함으로 세탁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선사한다. 그는 그러나 이후 발매되는 앨범들부터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느 정도 지키고 있지만 기계의 실험성에 보다 더 집착했다. 1992년에 내놓은 미니 앨범 < Broken >에 수록된 ‘Happiness in slavery’, ‘Wish’에서 그 포문을 열었다. 사운드의 벽이 한층 두꺼워졌고, 공격적이며 폭발력이 강해졌다. 다음해 ‘Wish’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메탈 퍼포먼스’상을 받은 것은 그의 음악 텍스쳐에 대중들이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고 그것의 최고 절정은 2년 뒤에 발표한 2집 앨범 < The Downward Spiral >에서 만개했다. EP < Broken >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르며, 그 위에 현대 산업사회의 천사이자 악마인 기계에 대한 모티브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프로그레시브적인 형식을 입혔다. 미국에서는 2위, 영국에서는 7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March of the pigs’, ‘Closer’ 같은 곡들이 꾸준한 인기몰이를 했다. 트렌트 레즈너의 후속작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돌봐왔던 할머니의 죽음과 절친했던 마를린 맨슨과의 결별 등 죽음과 믿음 상실이라는 고통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를 향한 언론과 팬들의 무조건적인 기대감 역시 ‘좋은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 영화 ‘내추럴 본 킬러스’와 ‘로스트 하이웨이’의 음악 감독을 맡아 그의 음악을 갈망하는 팬들에게 잠깐이나마 위로를 해주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1998년 공개된 3집 앨범 < The Fragile >은 수록곡 23곡에 러닝 타임 100분의 두 장 짜리 CD로 그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피아노 발라드 ‘La mer’에서 증명되듯 전작보다 멜로디 라인이 수려해 데뷔 앨범처럼 듣기가 수월하다.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웅장함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실험정신을 버린 것은 아니다. 첫 싱글 ‘We`re in this together’에서 보여지는 비트의 쪼개짐은 놀랍다. 리듬을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며 음악의 숲을 일궈나간다. 레즈너 특유의 탐미도 여전했다. < 롤링스톤 >은 이 앨범을 ‘소외와 공포의 출구인 핑크 플로이드의 < The Wall >의 트렌트 레즈너 버전’이라며 극찬했다. 이어서 그는 올해 초 < The Fragile >의 리믹스 버전인 < Things Falling Apart >를 발표했다. 그의 작업 경로로 볼 때 리믹스 작업은 당연한 후속 조치다. 하나의 곡을 가지고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해석, 변형시켜 한 곳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자세가 빚어낸 결과이다. 그는 이미 2집의 리믹스 앨범 < Further Down The Spiral >을 1995년에 내놓은 바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늘 공존하기 마련이다. 트렌트 레즈너가 대중 음악계에 쌓아 올린 가장 큰 메리트는 인더스트리얼의 대중화다. 소음의 놀이터로만 머물던 것을 ‘소음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보여줬다. 반대로 이것은 또한 상업성을 타도하자는 정신에서 출발한 인더스트리얼의 기조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마를린 맨슨을 ‘돈 잘 버는 사업가’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작용과 반작용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도 나인 인치 네일스의 주인공 트렌트 레즈너는 전진하고 있다.
제인스 어딕션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5년 남짓한 활동기간 동안 단 두 장의 정규 앨범만을 세상에 던져 넣고 홀연히 불타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그 짧고 치열했던 시간 속에서 음악계, 특히 얼터너티브 록에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회자될 만큼 길고도 강했다. 그룹의 음악 감독이자 이미지 메이커 페리 패럴(Perryc Farrell)은 1990년 두 번째 앨범 < Ritual De Lo ... 제인스 어딕션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5년 남짓한 활동기간 동안 단 두 장의 정규 앨범만을 세상에 던져 넣고 홀연히 불타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그 짧고 치열했던 시간 속에서 음악계, 특히 얼터너티브 록에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회자될 만큼 길고도 강했다. 그룹의 음악 감독이자 이미지 메이커 페리 패럴(Perryc Farrell)은 1990년 두 번째 앨범 < Ritual De Lo Habitual >을 끝으로 제인스 어딕션을 해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밴드의 마지막 고별 공연을 위해 1991년 ‘롤라팔루자(Lollapalooza)’를 기획했다. 출연진은 제인스 어딕션은 물론이고, 흑인 메탈 밴드 리빙 컬러(Living Colour), 영국의 ‘고딕 여왕’ 수지(Siouxsie), 하드코어 래퍼 아이스 티(Ice-T), 하드코어 펑크의 대부 헨리 롤린스(Henry Rollins) 등 국적과 인종, 장르를 가리지 않고 크로스 오버됐다. 어떤 특정한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즐길 수 있는 얼터너티브 페스티발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통해 말이 그룹의 엔딩을 위한 공연이지, 사실은 음반 자본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거대한 음악 축제나 기성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공연의 대항수단으로 롤라팔루자가 창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제인스 어딕션, 페리 패럴의 최대 업적이다. 젊은이들과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롤라팔루자는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후 해마다 열리는 1990년대 최고의 록 페스티발로 자리 매김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다시 페리 패럴이 롤라팔루자를 고안한 시점인 1991년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바로 너바나(Nirvana)가 ‘Smells like teen spirit''와 < Nevermind >를 발표한 때이다. 커트 코베인은 음악으로, 롤라팔루자는 그 음악을 공개하는 장(場)으로써 얼터너티브 물결을 오버그라운드로 길어 올린 것이다. 페리 패럴의 두 번째 공헌이 여기에 있다. 제인스 어딕션은 1986년 LA에서 사이 콤(Psi Com)출신의 보컬리스트 페리 패럴에 의해 결성됐다. 베이시스트 에릭 애버리(Eric Avery), 드러머 스테펀 퍼킨스(Stephen Perkins), 기타리스트 데이브 나바로(Dave Navarro)가 나머지 멤버들이었다. 그룹은 1987년 인디 레이블 < 트리플 엑스(Triple X) >에서 데뷔 앨범 < Jane''s Addiction >를 발표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자신들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거대 음반사 < 워너 >에 의해 전격 발탁되어 공식 메이저 데뷔작 < Nothing''s Shocking >을 내놓았다. 이어 1990년에는 플래티넘을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둔 두 번째 음반 < Ritual De Lo Habitual >를 발표했다. 앨범은 스래시 메탈, 펑크, 펑크(Funk), 재즈 등 다양한 요소들이 혼합된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를 선사했다. 그러나 제인스 어딕션은 1992년 전격 해산을 선언하여 많은 팬들과 비평가들을 충격 속에 휩싸이게 했다. 이후 페리 패럴은 포르노 포 파이러스(Prono For Pyros)를 조직했고, 데이브 나바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에 참여했다. 각자의 음악 길을 향해 가던 멤버들은 1997년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재결합하여 공연을 갖기도 했고, 미발표 곡과 라이브 트랙을 모은 작품 < Kettle Whistle >을 내놓았다. 올해도 제인스 어딕션은 기념 투어를 위해 한자리에 모일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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