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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곡의 인기 러브송 모음집 (100 Greatest Love Songs)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레이찰스 외

[ 4CD ]
Elvis Presley, Brian Hyland, Brenda Lee, The Cookies, Sam Cooke 노래 외 7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Not Now | 2019년 02월 27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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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곡의 인기 러브송 모음집 (100 Greatest Love Song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02월 27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Can’t Help Falling In Love - Elvis Presley
  • 02 Love Me Do - The Beatles
  • 03 Sealed With A Kiss - Brian Hyland
  • 04 When I Fall In Love - Brenda Lee
  • 05 Chains - The Cookies
  • 06 You Send Me - Sam Cooke
  • 07 He Will Break Your Heart - Jerry Butler
  • 08 Don’t Ever Change - The Crickets ft. Glen Campbell
  • 09 Cry To Me - Solomon Burke
  • 10 A Forever Kind of Love - Bobby Vee
  • 11 I Love You - Cliff Richard
  • 12 September In The Rain - Dinah Washington
  • 13 I Can’t Stop Loving You - Ray Charles
  • 14 At Last - Etta James
  • 15 Chanson Damour (Song Of Love) - Art & Dottie Todd
  • 16 Tonight I Fell In Love - The Tokens
  • 17 Love Letters - Ketty Lester
  • 18 You Got What It Takes - Marv Johnson
  • 19 Oh-Oh, I’m Falling In Love Again - Jimmie Rodgers
  • 20 Only You (And You Alone) - The Platters
  • 21 You’ll Lose A Good Thing - Barbara Lynn
  • 22 Eddie My Love - The Teen Queens
  • 23 Island Of Dreams - The Springfields
  • 24 The Wonder Of You - Ray Peterson
  • 25 The Answer To Everything - Del Shannon
Disc2
  • 01 True Love Ways - Buddy Holly
  • 02 Pretty Little Angel Eyes - Curtis Lee
  • 03 Don’t Break The Heart That Loves You - Connie Francis
  • 04 Dream Baby (How Long Must I Dream) - Roy Orbison
  • 05 Come Go With Me - The Dell-Vikings
  • 06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 The Shirelles
  • 07 Dream Lover - Bobby Darin
  • 08 Venus In Blue Jeans - Mark Wynter
  • 09 Every Beat Of My Heart - Gladys Knight & The Pips
  • 10 It Only Took A Minute - Joe Brown
  • 11 Fools Fall In Love - The Drifters
  • 12 Cradle Of Love - Johnny Preston
  • 13 Three Steps To Heaven - Eddie Cochran
  • 14 So Sad (To Watch Good Love Go Bad) - The Everly Brothers
  • 15 Heart And Soul - The Cleftones
  • 16 Stand By Me - Ben E. King
  • 17 Last Night Was Made For Love - Billy Fury
  • 18 I Remember You - Frank Ifield
  • 19 Language Of Love - John D Loudermilk
  • 20 I Only Have Eyes For You - The Flamingos
  • 21 Only Sixteen - Craig Douglas
  • 22 Fever - Peggy Lee
  • 23 I Love How You Love Me - Jimmy Crawford
  • 24 Do You Love Me - The Contours
  • 25 A Teenager In Love - Dion & The Belmonts
Disc3
  • 01 Sherry - The Four Seasons
  • 02 Love Me Warm And Tender - Paul Anka
  • 03 Roses Are Red - Bobby Vinton
  • 04 I Need Your Love Tonight - Elvis Presley
  • 05 Portrait Of My Love - Matt Monro
  • 06 More Than I Can Say - Bobby Vee
  • 07 Theme for a Dream - Cliff Richard
  • 08 You Always Hurt The One You Love - Clarence Henry
  • 09 P.S. I Love You - The Beatles
  • 10 Win Your Love For Me - Sam Cooke
  • 11 I Can’t Help It (If I’m Still in Love With You) - Johnny Tillotson
  • 12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 - Etta James
  • 13 One Summer Night - The Danleers
  • 14 You’ve Got Love - The Crickets ft. Buddy Holly
  • 15 A Fool In Love - Ike & Tina Turner
  • 16 Chances Are - Johnny Mathis
  • 17 Ginny Come Lately - Brian Hyland
  • 18 If You Love Me (Really Love Me) - Brenda Lee
  • 19 Book Of Love - The Monotones
  • 20 For Your Precious Love - Jerry Butler
  • 21 Bless You - Tony Orlando
  • 22 Secret Love - Doris Day
  • 23 My Baby Just Cares For Me - Nina Simone
  • 24 Glory Of Love - The Platters
  • 25 To Know Him Is To Love Him - The Teddy Bears
Disc4
  • 01 Love Hurts - Roy Orbison
  • 02 My Special Angel - Bobby Helms
  • 03 Love Potion No.9 - The Clovers
  • 04 Crazy - Patsy Cline
  • 05 Because Of Love - Billy Fury
  • 06 Makin’ Love - Floyd Robinson
  • 07 Who’s Sorry Now - Connie Francis
  • 08 Under The Moon Of Love - Curtis Lee
  • 09 Moon River - Danny Williams
  • 10 Come Softly To Me - The Fleetwoods
  • 11 Words Of Love - Buddy Holly
  • 12 Stairway Of Love - Marty Robbins
  • 13 Like I Do - Maureen Evans
  • 14 We Will Make Love - Russ Hamilton
  • 15 Send Me the Pillow That You Dream On - Johnny Tillotson
  • 16 Amor - Ben E. King
  • 17 Love Letters In The Sand - Pat Boone
  • 18 Young Love - Tab Hunter
  • 19 I Listen To My Heart - Frank Ifield
  • 20 As I Love You - Shirley Bassey
  • 21 Let It Be Me - The Everly Brothers
  • 22 Sea Of Love - Phil Phillips & The Twilights
  • 23 All The Love I’ve Got - The Marvelettes
  • 24 Dedicated To The One I Love - The Shirelles
  • 25 Save The Last Dance For Me - The Drifters

아티스트 소개 (78명)

노래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 : Brian Hyland (브라이언 하일랜드)
노래 : Sam Cooke (샘 쿡 ,Dale Cook)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 소울음악을 거론함에 있어 샘 쿡의 위상은 매우 지대하다. 그는 흑백통합의 광맥이었으며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레코드비즈니스를 아울러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예술가이자 사업가로서 자신이 갈 인생길을 현명하게 개척해 갔던 것. 그만큼 당대 음악계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위치는 물론 음반과 출판사를 소유하고 운영할 정도로 그의 관록은 실로 대단했다. 쿡은 그러한 가운데 사회문제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당시 흑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한 공민권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그는 노래를 통해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한 그의 의욕적 활동에 흑인들 모두 지지를 보냈다. 사회활동가로서의 지지도는 장차 그에게 돌아올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다름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기성과 청춘의 세대적 통합자로서 그의 호소력은 당대의 다른 아티스트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었다. 1931년 1월에 태어난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합창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시카고로 이주한 후 삼형제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대중음악의 흐름 또한 놓치지 않았다. 틴 하이웨이 큐씨스(Teen Hightway QCs)라는 성가대의 멤버였던 그는 1950년, 전국적 가스펠그룹 소울 스터러스(Soul Stirrers)에 합류했다. 6년여의 활동기간 중 ‘그의 옷자락을 만질 수만 있다면’(Touch the hem of his garment), ’당신에게 더 가까이‘(Nearer to thee), ’내겐 천국 이었어’(That’s heaven to me)와 같은 노래를 통해 흑인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종교와 흑인계를 넘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 소울 스터러스와 결별한 그는 1956년, 싱글 ‘사랑스러운’(Lovable)을 발표하며 진정한 자아 정체성 탐구를 위한 새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195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팝과 알앤비 차트 정상을 차지한 ’You send me’는 2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가스펠과 팝 R&B 요소가 응집력 있게 혼합된 노래는 당시로선 선구적인 소울 음반이었다. 그는 또한 로맨틱한 발라드와 틴 팝 싱글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다. ‘감상적 이유 때문에’(For sentimental reasons), ’모두 차 차 차를 좋아해‘(Everybody loves to cha cha cha), ’겨우 16세‘(Only sixte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를 비롯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yday)에게 바치는 헌정앨범 < Tribute to the Lady >에 실린 노래들까지 당대를 대표할만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소속사인 킨 레이블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메이저 레이블로의 이적을 계획, 콜롬비아(Columbia), 데카(Decca)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레이블 중 하나인 RCA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음반뿐 아니라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해 왔던 그는 출판사 칵스 뮤직(Kags Music)과 레코드레이블 SAR을 설립해 뮤직비즈니스에 본격 착수했다. RCA에 둥지를 튼 쿡은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싱글 ’한 사슬에 묶인 옥외 노동죄수들‘(Chain gang, 1960년 싱글2위)로 팝과 소울에 새 지평을 열었으며 블루스적인 로맨틱 ‘슬픈 분위기(Sad mood, 1960년 싱글29위), 목가적 로맨틱 소울 ’큐피드‘(Cupid, 1960년 싱글17위), 보통의 댄스넘버 ‘밤새도록 트위스트를 춰요’(Twistin’ the night away, 1962년 싱글9위), ’나의 집으로 그걸 가져오세요‘(Bring it on home to me, 1962년 싱글13위)’와 같이 다채로운 음악요소와 사회적 인식을 한데 엮어낸 곡들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곡들을 포함, 무려 13곡의 히트넘버가 2년간 차트를 장식했다. 틴에이저와 기성세대 그리고 흑인 전 세대에 걸쳐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그는 특히 백인 청취자들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흑인뮤지션에게 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했던 것. 1957년 초 뉴욕 코파(Copa)에서 연주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했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실패로 돌아왔다. 경험미숙이 문제였다. 1964년 그는 그러나 당당하게 클럽으로 컴백해 라이브실황을 녹음했고 그해 가장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수확을 올렸다. 중년과 백인중산층만을 위한 무대가 됐다는 주위의 냉정한 평가가 뒤따르긴 했지만. 1963년 중반 쿡은 마이애미의 할렘 스퀘어 클럽에서의 공연과 실황을 담은 음반으로 자신의 진가를 확증했다. 흑인청취자들과 함께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열창하며 황홀한 연주무대를 통해 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직설적인 소울 감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라이브 레퍼토리들은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라이브의 황제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63년 중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한 것. 쿡은 그해 말까지 깊은 시름에 잠겨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 기간 동안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매니저 앨런 클라인(Allen Klein)과 함께 재정적으로 그리고 음악활동을 위한 독립의 발판을 견고히 다졌다. 1963년 11월 초 마침내 그의 레코드들에 대한 최종 소유권을 확보했고 지휘감독권도 성취했다. 그가 다시 음반작업에 들어갈 즈음은 1960년대 초의 저항음악적 흥분과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쿡은 흑인들을 포함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치료제와 같이 작용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 크게 감화되었다. 피터, 폴&메리도 그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커다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의식있는 아티스트들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움직임에 그도 두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변화(의 시기)는 올 겁니다’(A change is gonna come)가 이때 나왔다. 공민권투쟁의 산물로 나온 가장 위대한 노래중 하나. 가스펠부터 팝까지 다양한 음악성향 안에서 탄생한 이 곡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도 우아한 예술적 찬양가였다. 이 시기동안 그는 또한 싱글 ’Shake’ 를 통해 더 진보한 댄스 본위의 소울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 두 노래는 쿡의 음악여정에 새로운 가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알리는 장이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꿈과 희망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1964년 11월 11일 이른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저급한 모텔에서 쿡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언쟁에 휘말려 모텔매니저의 총탄을 맞고 싸늘히 식어갔다.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미궁으로 남았다. 쿡의 죽음으로 흑인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5년에 발매된 싱글 ‘A change is gonna come‘과 < Sam Cooke At The Copa > 앨범이 그랬듯 싱글 ‘Shake’는 유작으로 사후 탑 텐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 : Cliff Richard (클리프 리차드)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지금은 아니지만)의 이율배반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시민회관에서 1회, 이대 강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던 클리프 라치드의 무대는 콘서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청소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어두운 교복과 청순한 단발머리를 한 여고생들의 클리프 리차드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적인 몰입은 ‘울다가 지쳐 기절까지’라는 과장된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공연장의 열기는 기성 세대들에게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이자 광적인 소란으로 비쳐지며 젊은이들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클리프 리차드는 4박 5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파티 비용을 본인이 직접 내는 것은 물론 구세군 교회에 가서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선행으로 일간지 사회면을 훈훈하게 장식해 팬들의 비난을 희석시켜 주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클리프 리차드는 우리나라에서 대중 음악 역사에 있어 전환점을 제시했던 슈퍼스타였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는 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 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 ‘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 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Stand by me’를 부른 Ben E. King이 멤버였던)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 Serious Charge >, < Summer Holiday >, < The Young Ones >처럼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 ‘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 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반숙(半熟)의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물이 끓지도 않았다. ‘Living doll(30위)’과 ‘Lucky lips(62위)’, ‘It’s all in the game(25위)’, ‘Bachelor boy(99위)’, ‘I’m the only one(92위)’, 그리고 생일 축하 곡으로 세계를 평정한 ‘Congratulations(99위)’ 만이 1960년대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을 뿐이다. 데뷔곡 ‘Move it’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노래들은 너무 소녀 취향이었으며 시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마크를 당했기 때문에 틈새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한 공연을 가졌던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지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 ‘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 제너두 >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 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 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8년에 개봉된 임창정, 고소영이 주연한 영화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의 마지막 장면에 ‘Early in the morning’이 삽입되어 다시 한번 클리프 리차드 신드롬을 재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예술 작품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힘이다”라고 했듯이 클리프 리차드의 노래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의 좌절과 아픔을 낭만과 추억으로 승화시킨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노래 : Etta James (에타 제임스)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멤버: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폴 로비(Paul Robi), 조라 테일러(Zola Taylor), 허브 리드(Herb Reed).

미국의 보컬 그룹.
노래 : Del Shannon (델 섀넌,Charles Weedon Westover)
락앤롤, 컨트리 가수 락앤롤, 컨트리 가수
Listen To Me : 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와 빅 바퍼 리차드슨 주니어 (The Big Bopper Richardson Jr)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천재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영원한 별이 된 그날을 일컬어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음악이 숨을 거둔 날(The Day Music Has Died)"라고 말했다. 수많은 로큰롤의 별들이... Listen To Me : 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와 빅 바퍼 리차드슨 주니어 (The Big Bopper Richardson Jr)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천재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영원한 별이 된 그날을 일컬어 돈 맥클린(Don McLean)은 "음악이 숨을 거둔 날(The Day Music Has Died)"라고 말했다. 수많은 로큰롤의 별들이 명멸해 갔지만 버디 홀리가 숨을 거둔 그날 음악도 죽었다라고 일컬을 만큼 버디 홀리가 남겨준 유산은 그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2011년 9월 7일 그의 75회 생일을 맞아 발매된 이 앨범은 일주일 간격으로 Rave On(Fantasy/Concord)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또 한 장의 트리뷰트 앨범과 함께 그가 뿌려준 음악적 세례에 대한 수혜자들의 즐거운 음악적 고백들이다. 특히 이 앨범을 제작한 피터 애셔(Peter Asher)는 그의 영국판 카피캣이었던 피터 & 고든 (Peter & Gordon)의 바로 그 인물이란 점에서 그가 평생 동안 가져왔던 그의 음악적인 멘토였던 버디 홀리에 대한 뒤늦은 감사의 표시이다.

1957년 데뷔해서 1959년 2월 사망하기까지 불과 18개월 동안 세 장의 앨범과 남겨 놓은 명곡들은 그의 음악적 인생을 반추해 보기엔 너무나 작은 숫자이지만, 그가 남겨준 음악적 영향력은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너무도 명백해 보인다. 음악적으로 두 대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밴드의 전형을 제시한 그는 외향적으로도 결코 록큰롤이 반항의 음악만이 아니었음을 그의 스타일로 입증했다. 엘튼 존에서 존 레논에 이르기까지 그의 외모가 결코 록스타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보여주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심지어 비틀즈의 이름 역시 그의 밴드 크리켓츠(귀뚜라미들)에서 따왔으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첫 레코딩 역시 버디 홀리의 That'll Be The Day 였으며, 롤링 스톤즈의 최초의 히트곡도 Not Fade Away 였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비트와 모드세대 전반을 걸쳐 록큰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Words of Love)에서 롤링 스톤즈(Not Fade Away)에 이르는 브리티쉬 인베이젼에서부터, 제임스 테일러(Everyday)에서 돈 맥클린(Mayby Baby) 등의 싱어송라이터뿐 아니라. 험블 파이 (Heartbeat), 이레이져 (True Love Ways). 그레이트풀 데드 (Not Fade Away), 블론디 (I'm Gonna Love You Too), 블라인드 페이스 (Well All Right), 모터헤드(Love's Made a Fool of You) 등 다양한 장르의 록밴드들의 음악적 자양분의 근간에 그의 음악이 있었던 점은 지난 오십년 간의 역사를 넘어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이 앨범에 참여한 폭넓은 스펙트럼의 아티스트들 링고 스타와 브라이언 윌슨과 같은 동시대의 뮤지션에서부터, 록의 다양성을 펼쳐낸 스티비 닉스(Fleetwood Mac), 잭슨 브라운, 제프 린(E.L.O), 린다 론스태트를 거쳐 크리스 아이작, 나탈리 머천트(10000 Maniacs), 팻 모나한(Train), 더 프레이, 패트릭 스텀프(Fall Out Boy), 주이 데샤넬, 이멜다 메이에 이르기 까지 그의 음악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오며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한 장의 음반에서 감동적으로 만나 볼 수 있다.

특히, 이 앨범이 참여한 거의 모든 아티스트에 그래이엄 내쉬, 폴 앵카, 키쓰 리차드와 보즈 스캑스 등의 슈퍼스타가 모두 모여 그의 75주년 생일이었던 2011년 9월 7일 헐리우드의 뮤직 박스 씨어터에서 성대한 축하공연이 열려 더욱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속에 녹아든 그의 음악의 다양한 일면들은 그의 음악이 그의 사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한 생명력으로 이 시대의 팝음악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 시켜준다.

그리고 잭슨 브라운은 돈 맥클린의 말에 대해 이렇게 화답했다.
"그날은 음악이 죽은 날이 아니다. 바로 음악이 불멸의 날이 된 날이다."
노래 : Connie Francis (코니 프랜시스)
노래 : Roy Orbison (로이 오비슨 )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10대에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꾸고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와 함께 작업하며 첫 히트곡인 ‘Ooby dooby’를 발표한다. 하지만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크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에버리 브러더스(Everly Brothers)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흥겨운 후렴 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가 비틀매니아에 굴하지 않고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톱10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 때문에 제동이 걸려야 했다.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새도 없이 이듬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 블루 벨벳 >(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 재림(再臨)을 도왔다.(’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있다.) 후배들의 협조로 그는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 Mystery Girl >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Mystery Girl >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싱글 ‘You got it’은 차트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 A Black And White Night Live >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 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 주었다.
멤버 : Shirley Owens (later Shirley Alston Reeves), Doris Coley (later Doris Kenner-Jackson), Addie "Micki" Harris (later Addie Harris McPherson), and Beverly Lee 멤버 : Shirley Owens (later Shirley Alston Reeves), Doris Coley (later Doris Kenner-Jackson), Addie "Micki" Harris (later Addie Harris McPherson), and Beverly Lee
노래 : Gladys Knight & The Pips (글래디스 나이트 앤 핍스)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노래 : Johnny Preston (조니 프레스톤)
노래 : Eddie Cochran (에디 코크란,Ray Edward Cochran)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미네소타주(州) 앨버트 리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이 에드워드 코크런(Ray Edward Cockran)이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옮겼으며 1954년에는 행크 코크런(Hank Cochran)과 함께 코크런 브라더스(the Cochran Brothers)를 결성하여 컨트리뮤직을 주로 불렀다. 1956년에 처음으로 로큰롤곡인 《스키니 짐 Skinny Jim》을 녹음하였으며 이후 《더 걸 캔트 헬프 잇 The Girl Can't Help It》(1956), 《언테임드 유스 Untamed Youth》(1957), 《고 자니 고 Go Johnny Go》(1959)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첫 히트곡인 《시틴 인 더 발코니 Sittin' in the Balcony》(1957)에 이어 힘찬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담은 《서머타임 블루스 Summertime Blues》(1958)와 《크몬 에버리바디 C'mon Everybody》(1958)는 초기 록의 완벽한 본보기로 꼽힌다.

인기가 절정이던 1960년 영국 순회공연 도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유일한 앨범인 《싱인 투 마이 베이비 Singin' to My Baby》는 그가 죽기 몇달 전에 녹음한 것으로 그 속에 수록된 《스리 스텝스 투 헤븐 Three Steps to Heaven》은 그가 죽은 뒤 영국에서 인기순위 1위에 올랐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노래 : Frank Ifield (프랭크 아이필)
노래 : Craig Douglas (크래그 더글라스)
초기 모타운의 대표주자였던 소울 그룹 초기 모타운의 대표주자였던 소울 그룹
노래 : Dion & The Belmonts (디온 앤 더 벨몬츠)
멤버 :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 1961년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 멤버 :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

1961년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가 모여 결성했다.

1962년 《셰리 Sherry》를 시작으로 5년 동안 무려 25곡이 히트했다. 버라이어톤스(Varietones)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으며, 포 러버스(Four Lovers)로도 알려졌다. 리드싱어 프랭키 볼리의 높은 가성으로 잘 알려졌으며,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두왑에 기반을 둔 화음 중심의 보컬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프로듀서 보브 크루(Bob Crewe)와 함께 베이스 연주자 가우디오가 주로 작곡을 맡아 리듬앤드블루스와 로큰롤의 히트곡을 냈다. 인기순위 톱 10에 기록된 히트곡으로는 《빅 걸스 돈트 크라이 Big Girls Don’t Cry》(1962), 《워크 라이크 어 맨 Walk Like a Man》(1963), 《돈 (고 어웨이) Dawn (Go Away)》(1964), 《레츠 행 온! Let’s Hang On!》(1965) 등이 있다. 3옥타브에 이르는 음역의 소유자였던 볼리는 솔로로도 활동하여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스 오프 오브 유 Can’t Take My Eyes Off of You》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나 1970년대 중반 볼리가 《마이 아이스 어도어드 유 My Eyes Adored You》 《그리스 Grease》 등의 싱글을 발표하여 인기순위 1위에 올랐고, 그룹은 《후 러브스 유 Who Loves You》와 《디셈버 1963 (오 홧 어 나이트) December 1963 (Oh What a Night)》가 히트하여 한때 인기를 회복하기도 했다. 199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nely boy(1위)’, ‘Put your head on my shoulder(2위)’, ‘It’s time to cry(4위)’등이 내리 차트를 강타하면서 그의 시대가 화려히 전개되었다. 이 곡들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드러운 멜로디는 물론, 소녀들의 가려운 데까지 손을 뻗쳐 그들의 감수성을 포착해냈기 때문이었다(그는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작사하는 당시의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당연히 소녀 팬들의 열렬한 지지가 뒤따랐으며 동시대의 로큰롤 가수들을 못미더워 했던 부모들은 폴 앵카에게만은 안심했다. 1950년대 후반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로큰롤 가수들과는 달리 그는 반듯하고 예의바른 이미지로 자신을 가꾸어 당시 부모님 세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같은 시기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나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척 베리(Chuck Berry)보다는 팻 분(Pat Boone), 릭키 넬슨(Ricky Nelson), 닐 세다카(Neil Sedaka)처럼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1941년 7월 30일,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아랍계 시리아인의 이민자 2세로 태어난 폴 앵카는 어려서부터 넘쳐흐르는 음악적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14살 때 캐나다판 ‘전국 노래 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부모님의 차를 몰래 몰고 몬트리올까지 진군한 전과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은 훗날 그가 10대 스타를 거쳐 싱어 송라이터, 영화배우, 음반 제작자, 사업가 등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를 모델로 하여 16살 때 작곡한 ‘Diana’는 이 캐나다 가수의 데뷔 곡이었음에도 북미 지역과 영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음을 알린 기념비작이다. 그리고 이후의 소나기성 히트 퍼레이드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히 다져졌다. ‘Puppy love’는 1970년대 가족 그룹 오스몬즈(The Osmonds)의 막내 도니 오스몬드(Donny Osmond)가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키면서 다시 한번 틴아이돌 세대의 명곡임을 입증했고, ‘Put your head on my shoulder’는 1990년대 후반 국내의 샴푸 CF에 쓰여 옛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가수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멋진 노래들을 만들어 준 음악적 동지로서의 역할도마다하지 않았다. 모범생 스타일의 천재 로큰롤러 버디 홀리(Buddy Holly)의 ‘It doesn’t matter anymore(13위)’와 정력적인 싱어 톰 존스(Tom Jones)의 신나는 넘버 ‘She’s a lady’(2위 - 리차드 샌더슨의 발라드와는 다른 곡),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위해 프랑스의 샹송 ‘Comme d’Habitude’를 개사한 ‘My way’,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 전쟁 영화 < 지상 최대의 작전 >의 주제가인 ‘The longest day’, 그리고 TV 토크쇼의 대명사로 자니 카슨(Johnny Carson)이 진행한 < 투나잇 쇼 >의 타이틀곡까지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매일 밤 방송된 < 투나잇 쇼 >와 불후의 명곡이 된 ‘My way’만으로도 그는 막대한 로열티를 받았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왕년의 틴아이돌 스타는 환경이 변한 음악 시장에 적응해 재도약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제목 때문에 방송금지 곡으로 묶였던 ‘(You’re) Having my baby’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수복했고 ‘One man woman/One woman man(7위)’과 ‘I don’t like to sleep alone(8위)’, ‘Times of your life(7위)’ 모두 탑 텐을 기록하면서 꺼지지 않는 작곡 역량을 과시했다. 이 때가 제2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6년 이장호가 감독한 영화 < 공포의 외인구단 >의 주제곡으로 정수라가 부른 ‘난 너에게’는 ‘I don’t like to sleep alone’을 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난 너에게’는 방송 및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 불세출의 남성 가수 노래들 중에서 ‘Happy’와 ‘Papa’는 외국 차트와는 상관없이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1970년대 팝 팬들 가운데 ‘Papa’의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이 곡과 데뷔작 ‘Diana’는 심지어 우리말로 번안되기도 해, 팝송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데뷔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치지 않고 음악 활동을 하는 그는 1990년대 중반 내한해 디너쇼 공연을 가져 우리의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흥겨운 회상에 젖게 하기도 했다.
노래 : Buddy Holly & The Crickets (버디 홀리 & 더 크리켓츠)
Buddy Holly (기타), Jerry Allison (드럼), Niki Sullivan (기타), Joe Mauldin (베이스) 로 구성된 미국 로커빌리 밴드 Buddy Holly (기타), Jerry Allison (드럼), Niki Sullivan (기타), Joe Mauldin (베이스) 로 구성된 미국 로커빌리 밴드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팝, 재즈 가수 팝, 재즈 가수
노래 : Doris Day (도리스 데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 : Danny Williams (대니 윌리엄스)
연주 : Jimmy Crawford (지미 크로포드)
재즈 드럼 연주자 재즈 드럼 연주자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 < 1부 세계정복을 향한 혹독한 고행 > 비틀스에 대한 오해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들이 최고의 곡조를 선보였을지 몰라도 연주력과 가창력은 제1이 아니라고. 기타 연주를 에릭 클랩튼과 비교하고 노래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비교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은 록을, 대중음악을 테크닉과 기능주의 관점으로만 들이대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로큰롤의 중심은 결코 연주나 작곡에 있어서 천부적 재주에 위치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세와 조화를 향한 열정,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자연적 ‘감성’에 무게가 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음악은 감성이 지성을 만든다. 비틀스가 그런 그룹이다. 비틀스는 바로 피와 땀으로 세계정복의 열매와 천재라는 칭송을 획득했다. 그들의 성공은 천재성 아닌 가혹한 고행의 결과물이다. 천재성도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하늘이 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존 레논과 폴이 만난 게 1957년이고 존이 ‘Hey little girl’을 쓴 게 1958년이며 가장 멋진 밴드명인 비틀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1960년이다.

그들은 1964년 세계를 휘몰아치기 전 최소 4-5년 밑바닥생활을 했다. 이 점에서 비틀스는 그들이 꽃을 피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호시절을 타고 졸속으로 결성된 다른 그룹들과는 종이 달랐다. 그들은 그동안 무수한 오디션 실패와 해외 투어로 연주력을 다졌으며 오로지 세계정복이란 목표를 위해 눈물과 배고픔을 삼켰다. 정말 그들 말대로 손이 아프도록 기타를 쳤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리버풀 캐번과 저 멀리 독일 함부르크 클럽을 왕래하며 연주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구촌 석권을 위한 숨가쁜 열정이자 가혹한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리버풀에서 길러졌지만 함부르크에서 성장했다”는 존의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 < 백비트 >에 잘 묘사되었듯 그들은 이곳 클럽무대에서 댄서들 뒤에서 반주를 했고 비좁은 단칸방에서 집단 기식했다. 그들은 그러면서 당시 서구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열심히도 챙겼다.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블루스와 로커빌리, 모타운 R&B, 틴 팬 앨리 팝, 라틴 음악 등 갖가지 계열의 곡들을 골라 커버 연주했다. 아이슬리 브라더스 ‘Twist and shout’, 스모키 로빈슨 ‘You really got a hold on me’, 캐롤 킹 ‘Chains’, 리틀 리처드 ‘Long tall Sally’, 척 베리 ‘Rock and roll music’ 등이 그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로 빚어낼 줄 알았다. 거기서 ‘Love me do’가 ‘From me to you’가 ‘A hard day’s night’가 ‘I feel fine’’이 나왔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 길러낸 창조성, 이를테면 노력에 의해 축적된 내공의 폭발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남들 곡의 템포와 볼륨을 업그레이드했고 그 작업을 통해 이후 그들만의 코드 진행감각 즉 독자적 화성을 찾아낸 것이었다.

비평가 그렉 쇼(Greg Shaw)는 말한다. “비틀스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그리고 첫째가는 로큰롤 팬이었다. 그리고 바로 음악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감성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그 두 가지의 환상적 퓨전! 비틀스의 이 무명시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이번에 나온 앨범 < The Beatles 1 >에서 초기 곡인 ‘Love me do’에서 ‘Help!’까지는 이 출발 이전의 워밍업 시기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실상 비틀스 초기 작품은 이 준비기를 떼어놓고는 논할 수도 없다. 하긴 연습 없이 실전을 잘 치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비틀스는 나중 실전을 연습처럼 해야한다는 진리도 잊지 않았다. 제2부 < 지구촌 전체를 손에 넣다 > 1964년 2월7일 영국의 더벅머리 네 남자가 미국 케네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세계의 음악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비틀매니아’의 시작. 그것은 이후 음악의 중심이 ‘젊은이들’과 ‘대중음악’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른과 고전음악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비틀스가 먼저 1963년 영국을 뒤흔들었을 때 그 광풍은 당시 내각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추문 이른바 ‘프로퓨모 스캔들’도 잠재워버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정치 판에 관심을 깡그리 잊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지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비틀스가 오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전국이 들썩들썩했다. 비틀스는 이처럼 정치 사회적 회오리마저 제압하는 엄청난 팝 폭발(pop explosion)현상이었다. 비틀스 초기 음악은 한마디로 경쾌한 로큰롤이었다. 1950년대 미국 로큰롤에 영국 특유의 셔플 리듬과 보컬 하모니를 덧입힌 스타일로, 강했으되 느낌은 밝았다. 기본 코드를 이용한 로큰롤만의 단순한 진행이었지만 1950년대의 로큰롤보다는 훨씬 템포도 빠르고 볼륨도 컸다. 본격적인 밴드중심 로큰롤의 개막이었다.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들처럼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비틀매니아 시대의 음악은 이처럼 ‘로큰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1963년 ‘From me to you’는 7주간 1위에 오르면서 당시로 볼 때는 경이적인 65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것은 비틀스가 이후 발표한 11장의 싱글이 모두 정상에 오르는 ‘넘버원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다음 싱글 ‘She loves you’는 선(先)주문만도 31만장에 달하면서 영국에서만 160만장이 팔려나갔다. 이 기록은 폴 매카트니의 1977년 ‘Mull of kintyre’에 의해 깨질 때까지 무려 14년 간 ‘영국 최고판매의 싱글’ 타이틀을 지켰다. 같은 해 12월 발표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She loves you’로부터 1위 자리를 승계하며 선주문 94만장에 총 15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들의 꿈이던 미국정복을 이룩해낸 곡도 바로 이 노래였다. 이 곡은 전미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1964년 미국에서 ‘Can’t buy me love’는 판매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주문 170만장에 발매와 동시에 모두 200만장이 팔려나간 것이다(영국에서도 첫 주 122만6천장). 굳이 판매고를 거듭 언급하는 것은 비틀스광풍을 설명하기에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공할 행진은 직접 출연한 영화의 주제곡 ‘A hard day’s night’, ‘I feel fine’, 두 번째 영화에 삽입된 ‘Ticket to ride’ ‘Help!’로 이어진다. 이 때까지 넘버원 싱글 가운데 느린 곡은 하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당시 세대와 호흡하는 로큰롤의 대중성을 신뢰했다. ‘Help!’ 만해도 존 레논은 "원래 느린 곡조로 썼으나 대중의 반응을 고려해 빠르게 불렀다"고 밝혔다. 그 속도감을 갖춘 로큰롤에 소녀들을 미치게 한 곡 중간의 함성 ‘yeah yeah yeah’(비틀스 시대의 상징어가 됐다)으로 그들은 영국의 침공을 견인하며 지구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성공하기 전 그들이 주로 커버했던 곡을 골라 녹음한 폴 매카트니의 1999년 앨범 < Run Devil Run >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I got stung’를 부른 경위에 대한 폴의 설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엘비스 레퍼토리는 아니었으나 인트로가 맘에 들었고 난 엘비스보다 조금은 더 난폭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뜨리고 질러대는 로큰롤을 가지고 그들은 마침내 ‘최강의 로큰롤밴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비틀스는 더 나아가 ‘최강의 팝 밴드’가 되고자 했다. 그 비상을 알리듯 1965년 가을 때마침 현악 반주의 ‘Yesterday’가 나왔다. 제3부 < 거리의 록을 전당의 예술로 >(중기 비틀스) 엄밀히 말해서 로큰롤은 거리의 젊은이들 음악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그것이 등장했을 때 그것은 어른들이 듣는 이전의 스윙 재즈와 스탠더드 팝 발라드와 완전히 ‘분리와 독립’의 선을 그었다.

비틀스도 초기 로큰롤의 영웅들인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할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로큰롤(전에 지적한 듯 좀 더 강하긴 했지만)을 구사했다. 초기에 그들은 기타로 곡을 썼고 그래서 그 때의 곡들은 업 비트의 장조계열 곡들이었다. 그러나 ‘제5의 비틀’이라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그로부터 피아노의 미학을 터득하면서 그들은 느린 단조계열의 발라드 팝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의 록은 완전히 근사한 전당의 예술로 ‘신분상승’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곡이 ‘Yesterday’ ‘Eleanor Rigby’ 그리고 앨범 < Rubber Soul > < Revolver >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였다. 또 하나의 변화는 가사였다. 이전의 그들의 신나는 로큰롤에 담긴 노랫말이라곤 고작 젊은 남녀의 풋사랑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한마디로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내용이 주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포크와 통기타의 영웅 밥 딜런(Bob Dylan)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가사의 중력을 절감했다. 특히 존 레논에게 이 부분의 충격은 절대적이었다. 갑자기 비틀스 노래는 사랑타령에서 ‘사색과 인생’으로 바뀌어갔다. 중기의 대표적인 노래들인 ‘Girl’ ‘In my life’ ‘Eleanor Rigby’는 이전 노래와는 확실히 깊이가 달랐다. 비틀스는 싱글 중심이 아닌 앨범 중심으로 음악작업의 축을 전환했다. 곡도 커버 버전은 완전히 걷어치우고 철저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콤비(더러 조지 해리슨)의 자작으로 앨범을 채우기 시작했다. 평자들이나 대중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비틀스의 최고 명반으로 중기작품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런 저간의 상황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도 우수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영국인들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권위 있는 ‘버진 올 타임 톱 1000 앨범’ 여론조사가 말해준다. 이 리서치에서 < Revolver >가 당당 1위를 차지했으며 < Sgt. Pepper’s.. >는 3위, < Rubber Soul >은 34위에 올랐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미국 문화계 인사들과 히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간 싸이키델릭(psychedelic) 풍향이다. 환각과 약물로 이미지화된 이 흐름은 기존의 지배적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문화적 대안(代案)을 찾고자 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의식확장을 위해 약물 LSD를 실험했고 동양종교를 탐색했고 갖가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항의의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적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평화’였다. 버진 조사에서 1등을 뺏겼지만 여전히 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1967년 앨범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는 바로 싸이키델릭과 히피의 ‘안티’ 성향을 농축해낸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다시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타임에 커버로 두 번 등장한 대중가수는 비틀스밖에 없다). < The Beatles 1 > 앨범은 넘버원 곡들만 수록해 싱글을 내지 않은 이 앨범의 레퍼토리들이 수록되어있지 않지만 대신 ‘Yellow submarine’ ‘All you need is love’로 그 메시지와 분위기를 희미하게 맛볼 수 있다. 중기의 포크와 싸이키델릭 시대를 통해 비틀스는 ‘자기 음악중심’을 확립했다.

단순한 성공공식으로 일관하면서 실험을 배제하는 여타 그룹들과는 달랐다. 초기에 그토록 흔하던 히트싱글 발표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의, 소위 얼터너티브를 찾아 실험하고 탐구했다. 오늘날에도 비틀스가 최강의 그룹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음악혁명’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비틀스의 이러한 성과의 뒷면에는 그룹의 결속력의 약화라는 음지가 존재했다. 4인 각자의 개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서적으로 하나의 그룹 아닌 ‘존 폴 조지 링고’로 흩어지면서 비틀스는 말기를 맞는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반 생산을 게을리 하지는 않지만.. 제4부 < 미래의 기약-4분의 4는 역시 하나! >(말기 비틀스) 1968년 자신들의 음반사 애플(Apple)을 설립했을 때, 그리고 애플의 첫 싱글 ‘Hey Jude’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 때 비틀스의 웅대한 새 출발은 이상하게도 그룹의 결속력 와해로 이어졌다. 비틀스라는 우산 아래 뭉쳤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독자 영역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그룹을 대표하던 존은 비틀스 아닌 필생의 동반자 오노 요코와의 관계에 빠져 들어갔으며, 폴은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넷 가운데 단연 최강자로, 실세로 솟아났다.

존과 폴 간의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헤쳐’ 상황은 비틀스를 ‘존과 폴의 그룹’에서 ‘폴의 그룹’으로 재편했다. 조지 역시 자신의 음악세계에 액센트를 두기 시작했고 곡을 쓰지 못했던 링고도 마침내 ‘Don’t pass me by’나 ‘Octopus’s garden’과 같은 곡을 써내면서 자신감을 획득했다. 애플사에서 낸 첫 앨범 < The Beatles >(일명 화이트 앨범)는 불가피하게 ‘한지붕 네가족’의 앨범이 되어 나왔다. 자신이 쓴 곡을 녹음할 때 다른 멤버들은 그룹동료가 아니라 거의 세션 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틀스의 재정문제를 관장하는 사업고문 발탁을 놓고 존 조지 링고와 폴 간의 입장차이가 불거지면서 멤버들간의 갈등도 노출되었다. 존과 폴은 모든 면에서 가령 예를 들면 결혼날짜와 장소와 같은 문제에서도 사사건건 경쟁적 심리전을 전개했다. 말기에서 비틀스가 차지한 차트 넘버원 곡들은 존의 ‘The ballad of John & Yoko’ ‘Come together’, 조지의 ‘Something’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폴이 주도적으로 쓴 곡이었다. 폴의 작곡 감각은 이후에도 접하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해산 직전에 나온 ‘Let it be’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드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곡들은 비틀스 작품이기보다는 폴의 솔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폴의 천재성은 말기의 앨범 < The White Album > < Abbey Road >에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굳이 싱글이 아니었어도 전자의 ‘Obladi oblada’ ‘Martha my dear’ ‘I will’, 후자에서는 ‘You never give your money’ ‘Golden slumber’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 등 그가 주조한 곡들은 어떤 싱글보다도 사랑을 받았다.

기습적인 비틀스 해산 기자회견을 가진 것도 폴이었다. 전설의 4인들은 해산 후에도 각각의 길을 걸으면서 누구 할 것 없이 1970년대의 어떤 싱어 송 라이터나 팝 스타들보다 굵직한 행보를 보였다. 네 사람 모두 차트 넘버원 곡을 기록했다. 그룹 출신으로 솔로활동에서 멤버 모두가 1위 곡을 가진 그룹은 비틀스밖에 없고 이는 앞으로도 깨질 수 없는 기록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윙스(Wings)라는 그룹을 만든 폴의 히트행진은 비틀스 업적을 거의 재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존 폴 조지 링고를 아무리 개별적으로 기억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비틀스라는 집합으로 기억한다. 말기 이후가 ‘4분의 4’이었을지언정 대중의 뇌리에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임은 비틀스 재결합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관측을 깨고 1995년 폴 조지 링고가 투합해 존의 노래 ‘Free as a bird’ ‘Real love’를 만들어 내놓았을 때 다시금 입증되었다. 여기서 링고 스타의 비틀스론(論)을 들어보자. "우린 신비로웠고 그것은 텔레파시였다. 우리가 녹음실에서 작업했을 때…그걸 묘사하기란 정말 어렵다. 우린 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였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동시에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비틀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에 묻히지 않고 갈수록 위대성과 가치가 증대한다. 미국 브라질 쿠바 일본 그리고 한국을 가리지 않고 < The Beatles 1 >가 전 세계적으로 판매열풍을 일으키고있다는 사실은 뉴 밀레니엄 첫 스타가 비틀스라는 것을 말해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1960년과 2000년 사이의 40년 세월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비틀스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멤버 : Harold Winley, King Raymond Green, Franklen Poole, Carlos Wilson, Edward "Ike" Bowers 멤버 : Harold Winley, King Raymond Green, Franklen Poole, Carlos Wilson, Edward "Ike" B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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