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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재즈 베스트

[ 3CD / 전곡 디지털 리마스터링 ]
Nat King Cole, Judy Garland, Sarah Vaughan, Frank Sinatra, Ray Charles 노래 외 2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클라우드뮤직코리아 | 2018년 12월 1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0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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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재즈 베스트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12월 14일
시간, 무게, 크기 750g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전설의 재즈 보컬]
  • 01 What A Wonderful World - Louis Armstrong
  • 02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 Nat King Cole
  • 03 Over The Rainbow - Judy Garland
  • 04 Fly Me To The Moon - Sarah Vaughan
  • 05 My Funny Valentine - Frank Sinatra
  • 06 Unforgettable - Nat King Cole
  • 07 Georgia On My Mind - Ray Charles
  • 08 Blue Velvet - Tony Bennett
  • 09 Lady Sings The Blues - Billie Holiday
  • 10 Cry Me A River - Julie London
  • 11 What A Difference A Day Made - Dinah Washington
  • 12 Someone To Watch Over Me - Ella Fitzgerald
  • 13 Lullaby Of Birdland - Eartha Kitt
  • 14 C'est Si Bon - Louis Armstrong
  • 15 All Of Me - Frank Sinatra
  • 16 New York State Of Mind - Carmen McRae
  • 17 Stormy Weather - Lena Horne
  • 18 Body And Soul - Billie Holiday
  • 19 Mona Lisa - Nat King Cole
  • 20 Every Time We Say Good-Bye - Ella Fitzgerald
Disc2 [감성의 시네마 재즈]
  • 01 When I Fall In Love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 Nat King Cole
  • 02 La Vie En Rose (영화 '장밋빛 인생') - Louis Armstrong
  • 03 Singing In The Rain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 Dave Brubeck
  • 04 Smoke Gets In Your Eyes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 - Dinah Washington
  • 05 As Time Goes By (영화 '카사블랑카') - Bill Evans
  • 06 Autumn In New York (영화 '뉴욕의 가을') - Frank Sinatra
  • 07 Angel Eyes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Ella Fitzgerald
  • 08 Let's Do It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 Eartha Kitt
  • 09 I Love Paris (영화 '프렌치 키스') - Annie Ross
  • 10 It Had To Be You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 Kay Starr
  • 11 I'm In The Mood For Love (영화 '화양연화') - Nat King Cole
  • 12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 (영화 '쉘 위 댄스') - Frank Sinatra
  • 13 Misty (영화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 Erroll Garner
  • 14 Gloomy Sunday (영화 '글루미 선데이') - Billie Holiday
  • 15 Prelude To A Kiss (영화 '키스의 전주곡') - Sarah Vaughan
  • 16 S Wonderful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Ella Fitzgerald
  • 17 Bye Bye Blackbird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 Miles Davis
  • 18 Round Midnight (영화 '라운드 미드나잇') - Thelonious Monk
  • 19 Autumn Leaves (영화 '야간문') - Stan Getz
  • 20 When You Wish Upon A Star (영화 '피노키오') - Bill Evans
Disc3 [불멸의 재즈 앙코르]
  • 01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 Louis Armstrong
  • 02 Sing, Sing, Sing - Benny Goodman
  • 03 In The Mood - Glenn Miller
  • 04 Take Five - Dave Brubeck
  • 05 Take The 'A' Train - Duke Ellington
  • 06 Cheek To Cheek - Sarah Vaughan & Billy Eckstine
  • 07 Waltz For Debby - Bill Evans
  • 08 Let There Be Love - Julie London
  • 09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 Louis Armstrong
  • 10 Night And Day - Frank Sinatra
  • 11 Summertime -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12 My Funny Valentine - Carmen McRae
  • 13 But Not For Me - Chet Baker
  • 14 It Never Entered My Mind - Miles Davis
  • 15 Embraceable You - Sarah Vaughan
  • 16 Autumn Leaves - Nat King Cole
  • 17 Black Coffee - Julie London
  • 18 Stardust - Ella Fitzgerald
  • 19 Over The Rainbow - Sarah Vaughan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26명)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 바로 그 곡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냇 킹 콜만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1930-40년대에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냇 킹 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던 1930년대 말-1940년 대 초까지 그는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해 발표했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독특한 재즈 트리오 양식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비밥 재즈의 봉인 버드 파웰이 드럼-베이스-피아노로 이뤄진 트리오 양식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이 편성이 굳혀지긴 했지만, 재즈 트리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 얻은 사람은 바로 냇 킹 콜이었다. ‘Route 66’(1943) 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한 냇 킹 콜 트리오는 한결 부드럽고 팝 적인 색채의 재즈 연주로 주목받으며 이후 1950년대 명성을 얻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출현을 예견케 했다. 1945년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수많은 히트곡을 팝 차트에 올리는 가수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17년 생으로 어린 시절을 시카고에서 보낸 그는, 12살 때 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형제가 모두 재즈 음악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유복했던 그는 1936년 재즈 베이스주자 에디 콜(Eddie Cole)의 밴드에서 잠시 몸을 담지만, 얼마 후 자신의 무대를 찾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이런저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에 몰두한 끝에 기타리스트 오스카 무어(Oscar Moore), 베이시스트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ce)를 만나며 ‘냇 킹 콜 트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출범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순수 연주곡 중심이었으나, 1940년 데카(Decca)레코드와 계약하면서 ‘Sweet Lorraine’(1940)을 그의 노래로 녹음했고, 이내 대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는 트리오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병행하게 되었다. 냇 킹 콜 트리오는 1940년대 초반 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Route 66’, ’Straighten up and flying right‘(1943)와 같은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40-50년대 명성을 구가했던 아마드 자말 트리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아트 테이텀 트리오는 모두 냇 킹 콜 트리오(피아노/베이스/기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The christmas song’(1947) , ’Nature boy’(1947)와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한 냇 킹 콜 트리오활동은 194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다 1950년, 그의 트리오가 오케스트라 세션을 넣어 발표한 ‘Mona risa’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하며 냇 킹 콜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인기 정상에 가수로 탈바꿈한다. 그의 노래는 어느덧 재즈뿐만 아니라 팝 청취자들의 애청 곡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대중들은 차츰 그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Unforgettable’, ’Ramblin’ rose’(1962)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차트에 올려놓으며 발라드 가수로서만 활동하게 된다. TV가 미국 대중들의 안방에 자리하면서 그는 쇼에 출연하며 50-60년대 내내 인기가수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6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음악엔 더 이상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띄게 된다. 트리오 양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재즈의 선구자’라는 호평에 반해 발라드 가수로서 백인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재즈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는 비난 역시 감수해야 했다. 재즈의 선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마일즈 데이비스, 조지 벤슨과 같은 거물급 재즈 스타가 겪은 이 대중성과 음악성과의 숙명과도 같은 패러독스는 냇 킹 콜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대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추앙 받는 뮤지션이다. 초기의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연주의 백미라 할 트리오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그의 바리톤 보컬은 샘 쿡, 마빈 게이, 루더 밴드로스로 이어지는 소울 팝 가수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보컬 연주의 교과서’로 자리 메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룩했던 위업을 지금껏 꾸준히 이어나가는 그의 딸이자 재즈 보컬 나탈리 콜(Natalie Cole)과 함께 한 ‘Unforgettable’(1994)로 탈바꿈 해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첨단 디지털 기술은 그 만의 독창적인 보컬 스타일은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후배 보컬리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배우, 가수 영화배우, 가수
사라 본(Sarah Vaughan)은 과거 재즈 연주에 부산물 정도로만 여겨지던 재즈 보컬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4옥타브(지금은 7옥타브도 있지만)를 자유자제로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과 오페라의 디바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표현력은 재즈 보컬 연주의 즉흥성과 예술성을 한 차원 높였다. 국내에선 영화 ’접속’의 삽입 곡 ’A lover’s concerto’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즈 보컬이다. 빌리 ... 사라 본(Sarah Vaughan)은 과거 재즈 연주에 부산물 정도로만 여겨지던 재즈 보컬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4옥타브(지금은 7옥타브도 있지만)를 자유자제로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과 오페라의 디바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표현력은 재즈 보컬 연주의 즉흥성과 예술성을 한 차원 높였다. 국내에선 영화 ’접속’의 삽입 곡 ’A lover’s concerto’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즈 보컬이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 제럴드와 함께 재즈 보컬의 3성(星)으로 추앙 받는 그의 목소리는 1940년대 비밥으로 대변되는 모던 재즈시대의 만개와 함께 ’목소리로 연주하는 비밥’의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30-40년대 스윙 보컬의 달콤함을 뛰어 넘어 한층 세련되고 스케일이 느껴지는 보컬의 느낌을 창조해냈다. 1924년 3월 27일 미국 뉴저지주의 뉴워크에서 태어난 그녀는 다른 흑인 가정과는 달리 목사인 아버지 덕에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침례교 교회에선 성가대로 활동한다.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핏제럴드와는 달리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사라 본은 이후 음악 학교에 진학해 정규 음악 교육을 받는다. 가수가 되기 위해 그녀는 1942년 뉴욕 할렘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재즈 콘테스트에 출전, 우승 트로피를 안으며 과거 엘라 핏 제럴드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 가수로서 입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얼마 후 그녀는 당시 촉망받던 젊은 재즈 트럼펫 주자 빌리 엑스타인(Billy Ecstein)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1944년 얼 하인즈 빅 밴드의 단원으로 입단하며 정식으로 재즈 계에 입문한다. 당시 얼 하인즈 밴드에 소속된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와 같은 비밥 재즈의 기린아들의 연주에 맞춰 그녀는 노래를 했고, 이런 분위기에서 그녀는 비밥의 음악 문법을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내는 훈련을 쌓아간다. 얼 하인즈 밴드를 탈퇴한 빌리 엑스타인을 따라 사라 본은 그의 밴드에 합류해 음악 생활을 해나갔고, 1944년 빌리 엑스타인 밴드의 이름으로 발표된 앨범 < I’ll Wait And Pray >의 보컬 주자로 참여한다. 이 앨범은 ’최초의 모던 재즈 보컬 레코딩’으로 재즈 사에 기록된다. 이듬해인 1945년 빌리 엑스타인과 결별하며 사라 본은 솔로로 나선다. 1945-1948년까지 그녀는 뮤직 크래프트 사를 통해 ’If you could see me now’ , ’Tenderly’ ,’It’s magic’과 같은 보컬 곡들을 통해 비밥의 느낌이 우러나는 독보적인 보컬 연주를 펼치며 히트차트에 그녀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1949-1953년까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 소속이 되어 그녀는 지미 존슨 밴드와 함께 활동하게 되고, 당시 무명이었던 마일즈 데이비스도 그녀와 함께 일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명반 < Sarah Vaughn In Hi-Fi >(1949-1953)는 비밥의 문법에 팝 적인 감성이 우러나는 그녀의 목소리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1954년 소속사를 머큐리(Mercury)로 옮기며, 그녀의 대표작이자 재즈 보컬의 백미로 추앙 받는 앨범<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 >(1954)을 시작으로 1967년까지 머큐리, 엠알시, 롤렛 레코드를 통해 기량이 뛰어난 가수에서 독보적인 음색과 분위기를 연출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다. 이 시기부터 사라 본 음악엔 약간의 굴곡이 느껴진다. 소규모 편성의 세션들과 함께 한 모던재즈 보컬 음반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지만, 이따금씩 발표한 팝-크로스오버 앨범은 대중적으로는 환영받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깊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를 통해 모던 재즈의 고급스러움과 발라드로 대변되는 팝의 편안함에까지 자신의 음악 영역을 넓혀 나간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 바하(Bach)가 작곡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협주곡’의 테마가 들리는 ’A lover’s concerto’(1966)는 여전히 힘이 느껴지는 그녀의 풍부한 성량이 대중적인 클래식 선율과 만나면서 재즈 보컬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친숙해질 수 있게 해준 대표적인 곡이다. 70년대 들어 그녀는 메인 스트림, 파블로 레이블을 통해 앨범을 발표했고,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얘기되는 < How Long Has This Been >(1978)은 오스카 피터슨, 조 패스, 루이 벨슨, 레이 브라이언트와 같은 재즈 계의 거물급 스타들과 함께 긴밀한 호흡을 보여주며 그녀의 후반기 대표작으로 기억된다. 80년대 들어 이렇다 할 연주 활동이 없었던 사라 본은 말년인 1989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는다. 우리나라에도 뒤늦게 그녀가 소개되며 그의 1956년 앨범 < In The Land If Hi-Fi >가 1990년 폴리그램에서 발매되었다. 1990년 4월 3일 사라 본은 폐암으로 사망했다.
노래 : Frank Sinatra (프랭크 시나트라,Francis Albert Sinatra)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 스타 앞에서 소녀 팬들이 괴성을 지르다 졸도하는 장면은 팝 음악 또는 록 음악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 히스테리적 광경이다. 비틀스, 베이 시티 롤러즈, 마이클 잭슨,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이 그런 장면 하면 떠오르는 스타들일 테지만, 그 부문의 원조는 역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 이전에 십대 소녀의 아우성과 기절 소동을 일으킨 스타가 분명히 있었다. 그 주인공은 40년대의 빅 스타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셈이다. 40년대를 통해 그는 여성팬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42년 그가 ‘타미 도시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싱어로 활약하면서 뉴욕의 파라마운트 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수많은 여고생들이 입장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당시는 ‘빅 밴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지만 소녀들은 빅 밴드의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밴드의 젊고 깡마른 가수를 보려고 벌떼처럼 몰려든 것이었다. 그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서의 십대 소녀들은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고 급기야 복도에서 졸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때 졸도한 소녀들 가운데는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져 ‘흠집’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현대의 ‘팝 히스테리’가 탄생된 순간이었다. 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명의 틴에이저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나중에는 단축되어 ‘목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젊음의 음악인 록 뮤직이 아닌 당시의 팝, 그것도 ‘어른적인’ 스탠다드 팝을 가지고 소녀 관객의 흥분을 자극했다는 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그만큼 그는 충분한 매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전시(戰時)였고 젊은 남자들이 징병으로 끌려가 없고 여성들 가슴에 고독이 엄습해 왔을 때 ‘이웃집 청년’같은 그는 알맞은 해소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15년 뉴 저지주 호보큰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부르는 재질이 뛰어나 고교 때는 교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면 졸업 후에는 신문을 나르는 트럭 운전사, 스포츠 기고가로 활약했다. 36년 빙 크로스비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듬해 팝계에 데뷔했다. 그 후 그는 십대 소녀의 우상이 되었고 팝계뿐 아니라 영화계도 섭렵, 전천후 스타로 명성을 휘날렸다. 80세를 목전에 둔 지금도 활약을 계속하여 ‘팝 뮤직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음악팬들에게 ‘품위있는 노신사’, ‘노래하는 예술가’ 등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대중음악계 ‘보수 진영의 원로’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 비판적 시각의 젊은이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비난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청년 세대의 우상으로 무대생활이 펼쳐졌지만 그의 시대 이후 등장한 젊은 감각의 노래에는 등을 돌렸다. 그는 4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와 ‘중산층의’ 대중음악인 스탠다드 팝만을 고수했다. 그가 선 무대는 늘 그런 음악에 걸맞는 고급 사교홀이나 서민층은 접근하기 어려운 대극장이었다. 편안하게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는 50년대 중반 일대 위기를 맞았다. 대중음악계에 록 뮤직이 침투한 것이었다. 그는 뉴 뮤직인 록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다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자, 즉각 위기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여 록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사십대에 들어서 리듬이 강한 록 음악을 그가 수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시각은 너무도 강경했다. 그는 58년 의회의 연단에 등장, 록 음악의 폐해를 증언했다. 여기서 그는 록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다. 또 록큰롤 하는 가수들은 저능한 되풀이와 교활하고 저속한, 단순하게 말하면 더러운 노랫말로 십대를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쁘다는 어휘는 총동원시킨 듯한 이런 규탄도 부족했던지 시나트라는 “그런 빗나간 방식으로 록 음악은 지구상의 모든 구렛나룻 십대 범죄자들의 군대 음악이 되려 하고 있다”거 쏘아붙였다(구렛나룻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상징이었다). 스탠다드 팝의 위기라는 판단에서 록을 공박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록 뮤직의 이념적 특질이라고 할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도전적 가치를 혐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기 세대의 음악 스탠다드 팝에 평생 수절(?)한 만큼, 50년대 이후 록 음악과포크 음악이 내세운 ‘저항’의 기조에는 쌍심지를 켜고 반발했던 것이다. 저항을 이념으로 했던 70년대 말의 펑크를 비난한 것이나 90년대 미국 국가의 연주를 거부해 물의를 빚은 시네드 오코너의 행각에 크게 분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록 음악 불가론’을 제창했던 그는 록의 위용이 의외로 거세다고 판단, 곧 입장을 수정했고 60년 TV 프로그램에서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무대의 황제’라는 칭송과 함께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기도 했다. 그는 데뷔이래 부와 명성에 엄청난 집착을 보여온 인물로 유명하다. 한 예가 그의 대표작이 된 53년도 영화 <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와 관련된 에피소드. 40년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는 50년대 초반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갑작스런 슬럼프에 직면했다. 가수에게 중요한 목 상태가 악화되었고 두 번째 아내 에바 가드너와의 파경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것이 주원인이었다. 레코드 판매는 뚝 떨어졌고 영화 출연 제의가 끊겼으며 목에서는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재기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 지상에서 영원으로 >의 돋보이는 마지오 배역을 따내야 했다.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으며 배당금을 취소로 정하는 수모도 감내했다. 이를 악물고 덤벼든 결과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위기관리의 천재다운 면모였다. 그는 소속 레코드사인 캐피톨을 떠나 61년 리프라이즈 레코드사를 차려 사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2년 뒤인 63년 회사를 대기업인 워너브라더스에 팔아넘겼다. 리프라이즈의 매매는 그에게 엄청난 돈을 안겨주었고, 그는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엔터테이너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그에게 최고가치는 언제나 달러였고 그는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 그는 사업운영에 있어서 간혹 정계와 손을 대기도 해 논란을 빚었으며 72년에는 경마장의 부정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의회의 범죄색출위원회에 출두, 신문의 톱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같은 스캔들은 80년대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마피아와 밀월관계에 있었으며, 마피아를 등에 업고 연예활동을 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86년에는 시나트라와 마피아의 관계를 폭로한 그의 전기 『그의 길』(His Way)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가장 비난이 집중되었던 사건은 보츠와나 공화국의 ‘선 시티’ 공연 부분이었다. 81년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만든 초호화판 휴양지인 이 공연장의 개막식에 리자 미넬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특별무대를 가졌다. 그는 9일간 여기에 출연하는 대가로 1백 6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그의 선 시티 출연은 폭압적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 남아공의 체제유지에 기여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의식 있는 팝 가수 진영으로부터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 85년 리틀 스티븐(스티븐 밴 잰트)의 발의로 결성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아티스트연합’은 ‘반(反)선 시티’를 주장하면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한 일부 팝 가수들의 비양심을 맹공했다. 선 시티 출연으로 평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되어온 그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본래의 보수성을 그럭저럭 잘 감추어온 그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준 ‘오점’이 되었다. 그는 정당과 관련하여 애초 40년대에는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개혁지향적인 민주당 쪽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진보파인 민주당후보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지지했으며 루즈벨트를 존경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따 자기 아들의 이름을 프랭클린 웨인 시나트라로 짓기도 했다. 47년에는 쿠바를 방문해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할 정도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의 고수는 정치에 대한 관심과 반비례했다. 그는 74년 미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안드레오티 수상을 환영하기 위해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베푼 백악관의 만찬석상에 출연,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속뜻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입지를 변화시킨 ‘철새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히트송 레퍼터리는 나열이 벅찰 정도로 무수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나의 길(My Way)’일 것이다. 원래는 프랑스 샹송으로, 라스베가스에 함께 출연하고 있던 폴 앵카가 은퇴를 앞둔 시나트라를 위해 영어 가사를 붙여 개작해준 곡이다. 시나트라의 인생이 그려진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그다지 크게 히트하지 못했으나, 영국에서는 40위권내에 무려 122주간 랭크되는 전무후무한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인생의 종반부가 다가와 난 종막을 맞이하고 있네. 여러 벗들에게 나만이 확실히 알고 있는 인생 기록을 말하겠노라. 난 인생의 항로를 고루 밟아가며 꽉찬 삶을 살아왔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후회도 얼마간 있었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었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해내었지. 항상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전세 낸 인생 코스를 계획했지. 그게 나의 길이었소. 물론 감당하지 못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 의혹의 순간도 있었다오, 그러나 난 그것을 나 혼자 씹어 삼키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 당당히 일어섰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그것이 나의 길이었소.’ 이 노래로 인생을 정리한 그는 70년 은퇴를 공식 선언했으며, 71년에는 화려한 고별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과 2년 후인 73년 그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팝계에 복귀해 노래와 연기를 계속했다. 그러한 것이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길이었다.
블루스, 소울 가수 블루스, 소울 가수
노래 : Tony Bennett (토니 베넷,Anthony Dominick Benedetto)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노래 : Billie Holiday (빌리 할리데이)
재즈 보컬 재즈 보컬
재즈, 팝 가수 재즈, 팝 가수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노래 : Carmen McRae (카르멘 맥레이 )
재즈 보컬, 피아노 연주자 재즈 보컬, 피아노 연주자
재즈 보컬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
노래 : Billy Eckstine (빌리 엑스타인,William Clarence Eckstine)
팝/재즈 가수, 트럼펫/트롬본/기타 연주자 팝/재즈 가수, 트럼펫/트롬본/기타 연주자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 클래식을 얘기할 때 바하를, 팝을 논할 때 비틀스를 빼 놓을 수 없듯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다. 재즈에 문외한 사람일지라도 루이 암스트롱 이름을 대면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 암스트롱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음악 ‘재즈’를 정의한 거장이다. 백인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Bing Crossby)는 루이 암스트롱을 두고 ‘미국 대중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코넷/트럼펫 연주는 ‘재즈 연주에 꽃’이라 할 즉흥 솔로(Improvisation)를 창안했다. ‘트럼펫 비르투오조 1호’로 칭송되는 그의 트럼펫 연주엔 떨림(비브라토)과 미끄러짐(글리산도)와 같은 클래식 연주 주법을 독창적으로 소화해 낸 천재성이 돋보인다. 뉴 올리안스의 무명악사 시절을 거쳐 192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뉴욕을 거점으로 암약하면서 1925년 자신이 리드하는 캄보(Combo-소규모 재즈 연주 편성)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Hot Seven) 통해 본격적인 재즈의 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 여정은 ‘재즈의 선구자’로만 국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다. 그는 재즈의 천재 일뿐 아니라 팝의 제왕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엔터테이너였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개발, 재즈 보컬(Jazz vocal)의 길을 열어줬음은 물론이고 천재적인 트럼펫 연주 실력에 더해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은 그를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방만큼 크고 두터운 입술을 지녔다 하여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을 지녔던 루이 암스트롱은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끓어오르는 독특한 베이스 보컬(속칭 더티 톤)을 들려준다. 이런 그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은 재즈 보컬 빙 크로스비나 토니 베넷(Tony Bennet)을 비롯하여 1930-50년대 전설전인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창법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에서도 ‘쾌지나 칭칭 나네’의 가수 김상국도 그 보컬을 흉내냈다. 천진 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청중을 압도할 만한 열정을 뿜어내는 무대 매너로 루이는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넉넉함을 선사했다. ‘만능 재즈 맨’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01년 재즈의 고향 뉴 올리안스(New Orleans)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어머니인 메리 암스트롱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가출을 했고, 유복자로 태어난 루이는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길거리의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항상 집을 비워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결국 루이는 5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토리 빌(뉴 올리언즈의 재즈 음악인들의 활동 무대)의 홍등가를 지나다가 접한 재즈음악에 매료되어버린 어린 루이는 차츰 재즈라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1살에 학교를 그만둬 그만 폭력을 일삼는 불량 써클에 가담, 1912년 신년 축하 행사 때 술에 취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폭죽 대신 총을 쐈다는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소년원에 있는 동안 브라스 밴드에 가입,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접한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관이 약간 짧아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루이로 하여금 음악을 소명으로 삼게 한다. 1914년 소년원에서 풀려나서 시카고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며 차츰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간다. 광부로, 신문 배달부로, 청소부를 일을 전전해가며 그는 코넷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갔다. 시카고에 여러 바를 전전하며 무명악사로 밑바닥을 기었다. 1918년 기회가 왔다. 당시 재즈의 왕으로 군림하던 킹 올리버(King Oliver)의 도움을 받아 루이는 올리버의 보조 밴드였던 키드 오리(Kid Ory) 밴드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년 후인 1919년 루이는 시카고에 진출,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운행하던 증기선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밴드에서 3년 간 코넷 주자로서 내공을 다진다.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은 드디어 재즈 연주자로서 날개를 단다. 평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재즈의 왕’ 조 킹 올리버는 그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 밴드의 코넷 주자로 그를 가입시킨다. 크레올 재즈 밴드의 정식 멤버 자격으로 루이는 1923년 시카고에서 첫 레코딩을 한다. ‘Chimes blues’(1923), ’Lonesome weary blues’(1923) 등 10여 곡의 싱글 녹음을 통해 독특한 음색의 코넷 연주가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루이는 피아노 주자 릴리언 하든(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그는 일생동안 4명의 부인을 맞는다)의 권유로 크레올 밴드를 탈퇴, 이듬해인 1924년 뉴욕으로 진출해 플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밴드에 제1 트럼펫 주자로 활동한다. 1925년 솔로로 독립,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꾸고 자신의 밴드 핫 파이브 앤 핫 세븐(Hot Five & Hot seven)을 출범시킨다. 재즈 인디 레이블 오케이(Okeh)레코드 사와 계약, 스캣(scat)의 매력이 넘치는 ‘Heebie jeebies’(1926)를 비롯하여, ’Cornet’(1926), ’Big butter & egg man’(1926), ’Ski-dat-de-dat’(1926), ‘Willie the weeper’(1927), ’Potato head blues’(1927), ’I’m not rough’(1927)를 통해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재즈 연주를 선보이며 일약 재즈음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1928년 ‘핫 파이브 앤 세븐’을 해체, 자신의 빅 밴드 루이 암스트롱 앤 히스 오케스트라(Louis Armstrong And His Orchestra)’를 결성, ‘Mahogany hall stomp’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29년 ’Sweet heart on parade’를 발표하며 스윙 밴드 리더로서의 여정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활약이 눈에 띄는데, 이미 1927년 ‘핫 파이브 & 세븐‘시절 여성 보컬 메이 엘릭스와 듀엣으로 부른 ’Big butter & egg man’으로 팝 차트에 진출한 루이는 1931년 미쉘 페리시가 작사한 미국의 영원한 스탠다드 명곡 ‘Stardust’를 발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1930년대는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였다.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1933), ’Struttin’ with some barbecue’(1938) 등 클래식스(Classics)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그의 빅 밴드 싱글들은 동시대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악단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했으며 이어 할리우드에 진출,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하며 < 랩소디 인 블랙 & 블루 >(1933)와 1956년의 < 상류사회 >(High Society) 등의 작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스윙의 열풍은 비밥(Bebop)의 혁명으로 인해 재즈의 중심에서 차츰 언저리로 몰리고 있었다. 스윙을 부정하며 비밥에 물결에 동참한 젊은 재즈음악인들로부터 루이는 ‘엉클 톰’(백인에게 굴종하는 흑인) 식의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슬럼프를 맞게 된다. 빅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음을 느낀 루이는 결국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데카(Decca)레이블로 이적하며 초기의 소 편성 악단의 구성을 한 올 스타즈(All Stars)를 출범시킨다(이후 올 스타즈는 맴버를 교체해 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뷔 공연을 가지며 예전보다 활발한 월드투어를 갖는다. ‘High society’(1948), ‘That’s a plenty’(1949), ‘Basin street’(1947), ‘Dippermouth blues’(1947) 등을 히트시키며 1951년에는 투어 실황을 녹음해 발표한 라이브 앨범 < Satchmo At Symphony Hall >을 발표해, LP차트 10위권에 오른다. 같은 해 루이의 히트 송 ‘(When we are dancing) I get ideas’와 ‘A kiss to build a dream on’이 담긴 더블 사이드 싱글을 발표, 이듬해인 1952년 처음으로 싱글 양면이 모두 톱10을 기록한다. ‘A kiss to build a dream on’은 영화 < The Strip >에서 루이가 직접 불렀던 곡인데, 멕 라이언이 주연한 1993년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 다시 삽입돼 화제를 모았다. 1954년 데카와 재계약을 앞두고 루이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은 다른 음반사를 통해서도 발표되는데, 당대 재즈 명인들과의 협연 앨범들이 눈에 띈다. 1920년대 스트라이드 피아노 대가 팻츠 월러(Fats Waller)에게 헌정하는 < Satch plays Fats >를 1955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해 톱10을 기록했고, 재즈 보컬 엘라 핏제럴드와 호흡을 맞춘 명반 < Ella & Louis >를 1956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공개한다. 흑인 공민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56년, 백인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이 군인의 호위를 받고 등교하는 리틀 록(Little Rock)사건을 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위선자’라 비난한 사건이 신문으로 보도되면서 루이는 잠시동안 FBI의 감시를 받으며 ‘요시찰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겪기도 한다. 가뜩이나 나빠진 건강은 1959년 이태리 공연도중 심장 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끔 한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루이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제2전성기’라고 할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12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 헬로 돌리 >(Hello Dolly!)의 타이틀곡으로 미국을 침공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를 따돌리며 당당히 팝 차트 정상에 등극한다. ‘Hello dolly!’는 1964년 내내 팝 차트 5위권을 고수하며 이듬해 그에게 그래미상 보컬 퍼포먼스부문 수상의 영광도 안겨주었다. 이 곡에 이어 4년 후인 1968년 ‘What a wonderful world’로 루이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과시한다. 평소에 자신이 추구한 팝(pop)음악에 대한 철학을 담아낸 이 곡은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본토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다가, 1987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 굿모닝 베트남 >의 배경음악으로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톱40에 오른다. 넉넉한 그의 보컬이 멋진 선율과 어우러진 이 곡은 그 무렵 만화가 이현세가 출연한 모 맥주광고 CF에 깔려 국내에서도 광풍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히트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과 함께 루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와 함께 정확히 7주 후인 1971년 3월15일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고,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코로나 소재 자신의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즈와 팝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사람도 드물다. 1920-30년대 초기재즈에서 스윙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연주 스타일을 제시했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에 더해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을 줄 알았던 진정한 팝 스타였다. 사실 재즈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팬들은 그가 보여준 엔터테이너 기질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쿨(cool)의 혁명가 마일즈 데이비스도 자서전에서 “루이의 뛰어난 즉흥 연주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피력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는 50년을 넘게 연주 생활을 해온 재즈맨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음악 대중들을 위한 ‘팝’에 천착한 사실은 당연하다. 루이는 음악에 있어서 순수한 지향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고 좋아해 줄 청중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그의 음악이 꿈꾼 최종 지향점이란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까지 칭송한 팝(pop)이었던 셈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팝의 세계에 안긴 한 재즈 거장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래 팝이 옳았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야!’
연주 : Dave Brubeck (데이브 브루벡)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Erroll Garner (에롤 가너 ,Erroll Louis Garner)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연주 : 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밴드 리더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롤링스톤 >는 록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간의 톱10 뮤지션(8위)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인상적인 선율로 마음 한 가운데를 울리는 우수 어린 트럼펫 소리는 분명 ‘마일스’만의 것이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재즈 음악인이기 전에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낸 ‘스타일리스트’이다. 194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일스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가는 창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쿨, 모드,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리드해 갔다. 마일스는 현재에 유행하는 음악에 민감했고 시대 상황에 예의 주시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단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일반 뮤지션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가히 ‘대가’였다. 본명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주니어인 그는 1926년 5월 25일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환경에 자라나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3세가 되던 생일 아버지가 사주신 트럼펫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트럼펫 훈련을 받게 된다. 16세때 부터 바(Bar)에서 주말마다 연주를 한 마일스는 지역 밴드인 ‘에디 랜들스 블루 데빌스’의 멤버로 활동하다 17살이었던 1944년 비밥(Bebop)의 혁명을 몰고 온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활동하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가 그가 살던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 순회공연을 오게 됐고, 마일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길레스피와 파커의 추종자가 됨을 물론 비밥의 스타일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스피디한 연주, 두드러진 즉흥 솔로, 복잡한 리듬감으로 어우러진 비밥은 40년대 재즈계를 강타한 ‘재즈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은 모두 비밥에 심취해 있었고 마일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비밥을 추종하는 트렌드의 수혜로 그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해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줄리어드음대를 다니면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뉴욕 5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 나가 음악을 듣고 또 그곳의 전통에 따라 무대에 돌아가며 올라가고 하면서 재즈 트럼펫 연주의 정체를 깨닫는다. 1947-48년 동안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게된 마일스는 이를 통해 비밥의 문법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익힌다. 1948년 여름 마침내 마일스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9인조 빅 밴드를 조직한다.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를 비롯한 미국 서부 출신 백인 재즈 연주자들을 기용, 이듬해인 1949년 캐피톨(Capitol)을 통해 발표된 앨범 < Birth Of Cool >은 재즈의 바탕에 백인적 감수성을 가미시킨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쿨의 탄생’이란 제목이 입증하듯 이후 당시 앨범에 참여했던 리 코니츠, 제리 멀리건과 같은 뮤지션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쿨’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개척하는 데 씨앗을 뿌린 재즈사(史)의 명반이었다. 이 음반이 녹음된 당시엔 재즈계의 촉각이 비밥에 쏠려 있던 시기라 아무도 마일스의 시도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1957년 2월 캐피톨사가 이 앨범을 재발매하면서 마침내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에 이른다. 1950년대 초반 잠시 헤로인에 중독된 마일스는 위기를 맞지만 이후 프레스티지(Prestige)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Miles Davis Quintet)의 시작을 알렸던 시기인 프레스티지의 내공축적 시절 동안, 마일스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입에 오르는 ‘Round midnight’를 1955년 7월 뉴 포트 재즈페스티벌서 연주하게 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한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하여 테너 색스폰의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레드 갈런드, 베이스에 폴 챔임버, 드럼에 필리 조 존슨으로 구성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같은 해 10월 콜롬비아 레코드 데뷔작 < Round Midnight >를 발표, 그의 음악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첫 앨범을 내놓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 레코드와 5장의 음반에 대한 계약 분이 남아있었기에 마일스는 잔여 분을 해결하기 위해 단 이틀만의 전대미문 세션을 통해 녹음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나온 작품이 < Relaxin > < Cookin’ > < Workin > 그리고 < Steamin’ >이었으며 이 음반들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전작 < Round Midnight >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1957년 < Birth Of Cool >의 재발매와 동시에 그는 이전 음악 동료인 길 에반스와 다시 만난다. ‘쿨의 탄생’에서 보여준 빅 밴드 편성을 다시 도입, 길 에반스의 클래시컬한 편곡으로 ‘쿨의 탄생’에서 진일보한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1956년의 < Miles Ahead >와 이듬해 < Porgy & Bess > 그리고 1960년의 < Sketches of Spain >이 모두 마일스와 길 에반스와의 공동의 땀으로 결실을 맺은 명작들이었다. 1957년 12월에는 파리를 방문,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L’Ascenseur pour l’Echafaud )의 스코어를 맡았으며 이 영화음악으로 1960년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도 거둔다. 1958년에는 존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의 퀸텟에 알토 색스폰 주자인 캐논볼 애덜리를 영입, 6인조 섹스텟으로 새로 출발하여 < Milestone >을 녹음한다. 재즈에 모드(mode: 각 스케일, 노트에서 일곱음을 모두 사용하는 연주 방식) 주법을 처음 도입한 이 앨범을 끝으로 밴드 내의 피아노 주자 레드 갈란드가 떠나고 모드에 정통한 피아노 주자 빌 에반스(Bill Evans)가 들어오면서 그의 섹스텟의 색깔은 더욱 ‘모드’로 진행되었다. 모드 주법의 본격적인 시도를 알렸던 그의 대표작 < Kind of Blue >(1959)는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된 그의 섹스텟 연주의 정점이었다. 이 앨범은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 중심의 기존 재즈음악 스타일을 과감히 벗은 ‘모던 재즈’(modern jazz)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금까지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도 포획했다. 1960년대 초반 솔로 활동을 위해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가 마일스의 섹스텟을 떠나고 이들을 대신할 피아노 주자 윈튼 켈리와 색스폰 주자 행크 모빌이 들어온다. < Kind Of Blue > 때와 같은 창조성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대중들과의 친화력을 더 높아졌으며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1961)과 같은 수작 생산을 거르지 않는다. 섹스텟을 떠난 빌 에반스와의 작업을 이후에도 지속하여 같은 해 내놓은 앨범 < Live At Carnegie Hall >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라는 젊은 색스폰 주자가 ‘프리 재즈’를 선보이면서 재즈 음악계는 어느덧 ‘프리 재즈’ 쪽으로 말을 갈아 타고있었다. 마일스는 이런 오넷 콜먼의 시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마일스의 섹스텟의 활동이 다소간 시들해진 60년대 중반, 다시 퀸텟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때의 명분은 반(反)프리재즈에 입각한 듯한 ‘재즈-스탠더드 풍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였다. 베이시스트 론 카터,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 테너 색스폰에 웨인 쇼더와 같은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마일스의 쿼텟은 < Kind Of Blue > 이후 최고의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1965년 < E.S.P >를 시작으로 < Miles Smiles >(1966), < Sorcerer >(1967), < Nefertiti >(1967), < Miles In The Sky >(1968), < Fills De Kilimanjaro >(1968)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중 < Miles Smiles >는 1967년 그래미상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고,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참여한 < Miles In The Sky >와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가 참여한 < Filles De Kilimanjaro >는 얼마 후 마일스의 또 한차례 혁명인 ‘재즈-록 휴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1968년 마일스는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 더 훼밀리 스톤, 지미 헨드릭스 등 당시 대중들을 휘어잡은 R&B와 펑키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후 지미 헨드릭스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함께 작업할 것을 약속한다(물론 이 약속은 지미 헨드릭스의 요절로 이뤄지지 못했다.)마일스는 당시 유행하던 록 음악의 열풍을 예의 주시했고, 일렉트릭 기타와 키보드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어낼 것으로 판단한다. 콜트레인의 죽음 후 재즈는 기존 프리 재즈에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요층 측면에서 어느덧 백인 지식인이나 상류층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1968년 말 그의 두 번째 퀸텟은 해산을 맞아 색스폰 주자 웨인 쇼더를 제외하고 모두 솔로로 독립한 상황이었지만 마일스는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존재를 부각한다. 토니 윌리엄스를 대신 할 잭 드자넷, 론 카터를 대신할 데이브 홀란드, 일렉트릭 건반주자 칙 코리아, 조 자위눌이 마일스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고, 영국 출신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의 밴드에 합류한다. 이들과 함께 1969년 2월에 녹음한 < In A Silent Way >는 코드 없이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로만 진행된 방식으로서,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사운드를 집어넣어 ‘록’적인 요소를 재즈에 본격적으로 가미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재즈계의 최대 문제작인 < Bitches Brew >이 녹음되어 1970년 3월 세상에 나왔다.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도저히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즉흥성에 토대를 둔 이 앨범에서 마일스의 트럼펫은 전기 코드를 꽂은 듯 우렁찼으며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기타의 펑키(funky)감과 드럼의 강한 비트는 바야흐로 재즈-록 휴전(Jazz Rock Fusion)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미 길이 갈라선 록과 재즈의 융합을 꾀한 이 기념비적 가치의 앨범은 발매되자 마자 골드를 기록했고 빌보드 Top40에 오르는 인기를 누려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충분히 달성했다. 마일스의 재즈-록으로의 실험은 이후 5년 간 계속된다. 라이브 실황을 담은 < Miles Davis In Filmore East >(1970), < Live-Evil >(1970)를 비롯하여 흑인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 Tribute to Jack Johnson >(1970), 슬라이 스톤과 제임스 브라운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명백한 펑키 리듬의 < On the Corner >(1972)와 같은 ‘재즈-록 휴전’의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가 시도한 재즈-퓨전은 잇단 재즈 슈퍼그룹의 출현을 몰고 왔다. 칙 코리아는 1970년 말 마일스를 떠나 써클(Circle)을 거쳐 1971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를 결성했으며 기타주자 존 맥러플린도 같은 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를 만들었다. 마일스에게 일렉트릭 피아노를 소개했던 조 자위눌과 색스폰 주자 웨인 쇼터는 그들 보다 더 빠른 1970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하면서 1970년대 재즈의 대세를 재즈-록 퓨전으로 돌려놓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마일스는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6년 후인 1981년, 일렉트릭 베이스에 마커스 밀러, 일렉 기타에 마이크 스턴, 색스폰에 빌 에반스 등 젊은 재즈 뮤지션들로 완비된 밴드와 함께 재기해 < The Man With The Horn >을 발표한다. 이어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를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표지그림까지 완성한 < Star People >(1982), < Decoy >(1983), < You’re Under Arrest >(1985)를 연달아 내놓으며 에너지를 과시했다. 30년 동안의 콜롬비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1986년 워너로 이적하여 < TuTu >를 선보인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의 이름을 따온 이 앨범은 토미 리푸마, 마커스 밀러, 조지 듀크 등 3인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고, 마일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던 마커스 밀러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일렉트릭-펑키 풍의 편곡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흑인 로커 프린스(Prince)의 영향을 느끼게 했다. 이듬해 1987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두 번째로 내놓은 < Siesta >는 엘렌 바킨, 줄리앙 샌즈 주연의 동명 영화 음악으로 작품 전체가 예전 길 에반스와의 작업 < Sketches Of Spain > 때와 같이 스페니시한 연주로 가득 차있다. 마일스는 사망하기 직전인 1991년 7월 스웨덴에서 열린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서 연주자로 참여, 그의 음악적 동반자로 1988년 세상을 떠난 길 에반스와 녹음했던 많은 곳들을 재즈팬과 평론가들 앞에서 재현하며 엄청난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꿈꾸던 재즈의 진보를 평생동안 실현해온 마일스는 1991년 9월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소재의 세인트 존스 호스피탈 앤 헬스 센터에서 폐렴에 의한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숨을 모았다. 사망 후 완성된 2개의 트랙이 포함된 스튜디오 앨범 < Doo-Bop >이 1992년 공개되면서 위대한 재즈맨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마일스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그에 트럼펫에 담아 내려했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뮤지션이 되길 원했다. 비밥의 출현 때부터 재즈의 중심에 있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재즈-스탠더드를 바탕으로 현재의 음악흐름을 늘 주시했고 거기에서 항상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마일스에게 ‘재즈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임에 있어선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 에반스와의 작업과 재즈-록 퓨전을 시도할 당시 일각의 재즈평론가들로부터 ‘백인에게 아부하는 재즈 뮤지션’ 혹은 ‘재즈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거 없는 비판은 이미 루이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대가들도 경험했던 얘기들이었다. 마일스의 시도는 그의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더 접근하고 싶어 한 그 만의 것이었다. 마일스는 자신의 공연을 할 때 젊은 흑인관객과 눈이 마주치길 원했고, 그런 흑인 청중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었다.(하지만 물론 지금까지 그의 음악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백인들이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 음악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념과 인종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음악만큼이라도 퓨전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명언은 어느덧 재즈는 물론이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가로지르는 음악트렌드가 되었다.
연주 : Thelonious Monk (델로니어스 몽크)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듣고 연주해봐야 하는 스탠다드 ‘Round midnight’(1944)를 작곡자인 셀로니어스 몽크(이하 몽크)의 연주는 독특하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전위적인 건반 터치는 감상용 음악과 차원을 달리하며 피아노 연주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 몽크의 연주는 투박하고 거칠다.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하고 기분 좋은 선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피아노 주법은 청중들을 당혹스럽게까지...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듣고 연주해봐야 하는 스탠다드 ‘Round midnight’(1944)를 작곡자인 셀로니어스 몽크(이하 몽크)의 연주는 독특하다. 세련됨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전위적인 건반 터치는 감상용 음악과 차원을 달리하며 피아노 연주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 몽크의 연주는 투박하고 거칠다.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하고 기분 좋은 선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피아노 주법은 청중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한다. 버드와 디지가 40년대 소개한 그 전위적이고 난해하다고 소문난 비밥이지만, 몽크가 제시한 그 난해함엔 비할 바가 못된다. 그만큼 몽크의 음악 세계는 비밥에서도 변방에 위치했다. 몽크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의 연주엔 자지러질 만한 고난이의 테크닉으로 점철된 연주가 아닌, 자기 나름의 공식에 기반해 한가지 연주 주제를 다양한 리듬 패턴과 화성으로 조합해내는 펼쳐내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독특한 음악성 때문에 대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몰라주던 당시 연주인들에게까지 그는 냉대를 당한다. 버드나 디지가 선보였던 화려한 기교와 초스피드로 무장한 비밥 연주에 흥분했던 청중들은 몽크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난수표처럼 얽힌 그의 연주는 얼른 들어서 감이 오지 않지만,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그의 음악성은 비밥의 또 다른 모델이다. 1947년 30세 나이에 발표한 < Genius Of Modern Music Vol.1,2 >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제시한 몽크는 향후 25년 동안 데뷔 때 보여준 스타일을 견지하며 재즈 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연주 패턴’을 지닌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절모가 잘 어울리는 몽크는 1917년 태어나 5살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뉴욕에서 보낸 유년시절동안, 20년대 할렘 스트라이드(Harlem Stride) 주법의 일인자 제임스 P. 존슨(James P. Johnson)의 음악을 늘 끼고 살며(제임스 P. Johnson은 그의 이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주법을 확립해간다. 1940-1943년 비밥의 고향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 입성, 연주의 내공을 다짐과 동시에 1942년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며 피아니스트로 활동한다. 평소 작곡에 재능 있던 그는 “Epistropy"(1942), 그리고 ” ‘Round midnight"(1944)를 밴드 멤버 자격으로 처음 녹음한다. 1945-54년까지 몽크에겐 ‘시련의 시간’이었다.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알게 된 동료 버드와 디지와 함께 연주활동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특이한 그의 피아노 주법에 다들 그를 ‘엉터리 피아니스트’로 여겼다. 비밥의 주역들에게까지 소위 ‘왕따’를 당한 그였지만 ‘끝내 이기리라’는 신념으로 블루노트와 프레스티지 레코드사를 통해 수많은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화려한 프레이징 구사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던 동료 버드 파웰(Bud Powell)과는 달리 그의 처음 10년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군분투 그 자체였다.(아이러니컬하게도 버드와 그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55년 리버사이드 레코드와 계약한 몽크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듀크 엘링턴의 스탠다드를 연주한 < Plays Duke Ellington >을 시작으로 인지도를 모았고, 그 여세를 몰아 몽킅는 중기 걸작 < Brillant Corners >(1956)를 테너섹소폰에 소니 롤린스,드럼에 막스 로치가 참여해 발표한다. 이듬해 1957년 몽크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방출된 테너 섹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몽크에게 ‘제2의 음악인생’을 열게 해준 둘의 만남은 비록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찰떡궁합으로 비견되는 둘의 독창적인 음악성은 그제서야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1957년 한 해 동안 몽크는 존과 함께 < John Coltrane& Thelonious Monk >, < Monk’s Mood >, < Thelonious Himself >와 같은 모던 재즈의 걸작들을 녹음한다. < Monk’s Mddd >의 수록곡 ’Monk’s mood’는 몽크를 음지에서의 재즈계의 주요 인사로 부상시켜줬고 존 콜트레인 역시 몽크와의 만남을 계기로 마약을 끊고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개발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1962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하며 메이저로 진출, 1962-1968년 동안 자신의 쿼텟을 이끌며 재즈계의 유명인사로 군림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일군다. 70년대 초엔 디지 길레스피가 조직한 프로젝트 재즈 자이언츠(Jazz Giants)의 멤버로도 활동하지만 1973년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1982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철저히 은둔생활을 한다. ‘Round midnight’, ‘52nd street theme’, ‘Ruby my dear’ 등 그가 작곡한 수많은 재즈 스탠다드들은 지금까지도 젊은 재즈뮤지션들의 단골 연주 레퍼토리이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이렇다할 슬럼프 없었던 올곧은 그의 음악여정은 후대에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데뷔 초기에는 비록 버드나 디지, 파웰이 누린 주목을 얻진 못했지만, ‘혁신과 실험’으로 대변되는 ‘비밥의 정신’에 그 만큼 부합되는 인물은 없을지도 모른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
’스윙의 왕(King of Swing)’ 베니 굿맨(Benny Goodman)은 1935년 대공황의 터널을 지나온 미국 사회를 들뜨게 한 ’스윙 열풍’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까지 흑인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계층에까지 파급시키며 재즈의 대중화에 일익한다. 그의 음악은 비슷한 시기 인기를 얻었던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 밴드들보다 악보에 근거한 정확한 연주를 했지만 즉흥성에 있어서는... ’스윙의 왕(King of Swing)’ 베니 굿맨(Benny Goodman)은 1935년 대공황의 터널을 지나온 미국 사회를 들뜨게 한 ’스윙 열풍’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까지 흑인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계층에까지 파급시키며 재즈의 대중화에 일익한다. 그의 음악은 비슷한 시기 인기를 얻었던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 밴드들보다 악보에 근거한 정확한 연주를 했지만 즉흥성에 있어서는 다소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청감(聽感)이 빼어났고, 열정과 즐거움이 가득한 재즈 연주곡들을 많이 남기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윙 연주자로 남아있다. 1909년 5월 30일 미국 뉴욕에서 데이비드 벤자민(David Benjamin)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10살 때부터 클라리넷 연주 레슨을 받기 시작,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25년, 학교를 자퇴하고 벤 폴락(Ben Pollack)밴드의 일원으로 일하게 된다. 스무 살이 되던 1929년, 폴락 밴드를 떠나 뉴욕에 정착, 라디오 방송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프리랜서 연주인으로 생활을 해 나간다. 1931년엔 그의 이름으로 첫 음반을 발표, ’It’s not worth your tears’를 차트에 올려놓는다. 1932년 여름, 루스 콜롬보(Russ Colombo)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다,1934년 자신의 빅 밴드를 조직한다. 1934년 가을, 빌리 홀리데이를 비롯한 수많은 재즈 뮤지션을 발굴해 낸 명 프로듀서 존 하몬드(John Hammond)의 도움으로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며 ’Ain’t cha glad?’ (잭 티가든 노래), ’Riffin’ the scotch’ (빌리 홀리데이 노래), 그리고 ’Ol’ pappy’ (밀드레드 바일리 노래)를 모두 톱 10 에 올려놓으며 그의 순조로운 출발을 예견했다. 1934년 6월 그의 첫 넘버원 곡 ’Moon glow’가 발표되었고, 이어서 나온 ’Take my word’와 ’Bugle call rag’ 역시 톱 10에 오른다. 여기에1934년 11월부터 NBC 라디오 쇼 < 레츠 댄스(Let’s Dance)의 토요일 고정 출연자로 발탁되며 대중적인 관심을 얻는데 기여한다. 이듬해인 1935년 7월, 그의 밴드는 미국 투어를 시작했고, 8월 21일, L.A.소재 팔로마 무도장(Palroma Ballroom)장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대성공을 거둔다.(이 날을 기점으로 ’스윙의 시대’가 열렸다고 재즈 학자들은 얘기한다.) 스윙의 인기를 증명하듯 앨범 판매 역시 늘어나 그가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6곡의 연주를 모두 톱 텐에 올렸고, RCA에서 이적하여 내놓은 5곡의 싱글(’Sing, sing, sing’과 ’Stompin’ at the Savoy’ 포함) 역시 그 해 말까지 모두 톱 10을 기록하는 저력을 드려낸다. 바야흐로 ’스윙의 왕’으로 등극하는 순간. 인기는 그칠 줄 몰라 1936년엔 무려 15곡의 톱10 히트곡을 발표했고, 스윙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 < 카라반 >(Caravan)의 진행자로도 맹활약한다. 여기에 영화 < The Big Broadcast >(1937)에도 출연, 영화배우로도 화려한 성공 행진을 이어나간다. 같은 해 6곡의 톱10과 함께 ’This year’s kiss’로 두 번째 넘버원의 영광을 얻는다. 1938년 1월 16일, 스윙 밴드로선 물론이며 대중 음악인으로선 처음으로 뉴욕 카네기 홀 무대에 서며 그의 인기는 정점에 다다랐다. 이전까지 바(Bar)나 무도장에서만 연주되던 재즈는 이와 함께 콘서트 장에서 듣는 ’지적이고 고상한’ 음악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한다. 공연 실황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 Live at The Carnegie Hall >(1938)로도 출시, ’Stompin’ at the Savoy’, ’Sing, sing, sing’과 같은 스윙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들을 들려준다. 특히 ’Sing, sing, sing’에서 폭발적인 드러밍을 선보인 진 크루파는 이 앨범을 통해 일약 재즈 스타로 부상한다. 같은 해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알게 된 프로듀서 존 하몬드(John Hammond)가 기획한 미국 대중 음악을 집대성한 고전 < From Spiritual to Swing >(1938)에서도 스윙을 대표하는 연주자로 참여한다.(역시 카네기 홀에서 진행된 본 녹음 실황은 이후 3장의 CD로 엮은 박스 세트로도 출시된다.) 베니 굿맨 밴드엔 재즈 역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재즈 뮤지션들이 거쳐갔다. 트럼페터 해리 제임스(Harry James), 지기 엘만(Ziggy Elman), 비브라폰주자 라이오넬 햄프턴(Rionel hampton), 드러머 진 쿠르파(Gene Krupa)가 그의 밴드 고정 멤버들이였고, 밴드에서 피아노와 전체 편곡을 담당했던 비운의 재즈 대가 플래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 쿠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 찰리 크리스챤, 테디 윌슨도 그의 밴드를 거쳐갔다. 베니 굿맨의 인기는 상쾌한 멜로디와 신명나는 리듬이 감지되는 그의 탁월한 곡 해석력에서도 비롯됐지만, 그의 음악의 맛을 한층 우려낸 사이드 맨들의 공력이 있었기에 그의 음악은 한층 미국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특히, 당시까지 재즈에선 드문 백인 연주자였던 점은 그가 ’스타’로 떠오르는 동인이 되었다. 베니 굿맨은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는데, < Hollywood Hotel >(1937), < The Powers Girl >(1942), < The Gang’s All Here >(1943), < Stage Door Canteen >(1944), 그리고 사운드 트랙까지 담당한 < Make Mine Music >(1946)등이다. 1955년엔 그의 음악 인생을 담은 영화< The Benny Goodman Story-스티브 알렌이 베니 굿맨 역 >이 나온다. 이후 모던 재즈시대의 도래한 1944년까지 그의 밴드는 꾸준히 히트 곡을 양산하며 전성을 구가한다. 1944년 그는 자신의 빅 밴드를 해체시키고 이후로는 소규모 연주 편성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지속한다. 다른 빅 밴드 리더와는 달리 이렇다 할 창작력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가 1930-40년대 남긴 스윙 히트곡은 지금껏 미국 대중들의 애청곡 리스트로 남아있다. 베니 굿맨은 1986년 6월 13일 맨하탄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 ‘음의 마술사’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두말할 필요없이 재즈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 데뷔이래 근 50년에 이르는 오랜 활동 기간동안 무려 6000곡이라는 미증유의 창작력을 보이며 빅 밴드 재즈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선보였다. 그는 빅 밴드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 하나의 특색을 정확히 이해했다. 관악기의 독특한 울림이 들리는 그의 음악엔 그만의 음색이 느껴진다. 여기에 그는 재즈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화성 전개를 고안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나 볼 수 있는 조곡(suite) 형식의 대곡을 재즈로 소화해낸다. 사후에도 그의 음악유산은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 많은 음악 학자들이 “듀크 엘링턴은 세계 대중음악을 20년 이상 앞당겼다”고 평했을 만큼 그는 재즈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1899년 4월29일,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접한다. 아버지는 백악관에서 일하는 집사였고 당시 흑인들 중에선 드물게 중산층에 속했던 덕에 가정교사를 통해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4년, ‘Soda fountain rag’와 ’What you gonna do when the bed breaks down’를 처음으로 작곡했고, 18세 때에는 워싱턴 지역의 유명한 밴드 리더로서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1923년 재즈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 진출한 그는 자신의 밴드 ‘더 워싱턴스’(The Washingtons)를 결성한다. 이 때 자신의 이름에 영예로운 공작(Duke) 칭호를 부여하며 듀크 엘링턴으로 개칭한다. 1927년에 이르러 밴드는 뉴욕 지역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인정을 받았고, 얼마 후 백인 전용클럽이었던 코튼 클럽(Cotton Club)에 입성한다. 그가 악장으로 일하게 된 코튼 클럽은 미국의 상류층들이 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이후 재즈의 상징어가 된다. 뉴 올리언즈의 스토리 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음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바야흐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그의 첫 출세작 ‘East St. Louis toddle-oo’(1927)가 발표된다. ’와우-와우‘하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당시까지의 재즈 연주가 대부분 장조였던 것과 달리 구슬픈 멜로디가 들리는 단조 풍의 연주곡이었다. 독특한 악기 음색과 치밀한 계산이 돋보이는 연주 편곡은 당시 28세를 갓 넘은 청년 듀크 엘링턴을 일약 재즈의 비범한 뮤지션으로 상승시킨다. 1931년까지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Black beauty’(1928), ’Mood indigo’(1930)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경제 한파는 코튼 클럽에 사람들의 발길을 주춤케 했고 그는 잠시 유럽으로 진출, 이후에 있을 전성기를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미국 사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 여기에 NBC, CBS, ABC 미국 3대 라디오 방송국이 뉴욕에 생기면서 재즈 음악인들은 금주(禁酒)령으로 묶인 그들의 창작 혼을 다시금 살려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맞이한다. 듀크 엘링턴은 이 절호의 찬스를 통해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며 1930-40년대를 그의 음악 경력 상 최고의 절정기로 기록되게 한다. 경제 공황이라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1930년대 미국 시민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필요로 했고, 1935년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의 폭발은 뉴욕 시내의 무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코튼 클럽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은 듀크 엘링턴은 이 시기에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1932), ’Echoes of Harlem’(1936), ‘Dimuniendo in blue’(1937), ‘Cotton tail’(1940), ’Ko-ko’(1940), ’Take the “A" train’(1941) 등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1937년에 발표한 ’Dimuniendo in blue’는 재즈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7분이 넘는 대곡이다. ‘Dimuniendo in blue’가 탄생하기까지엔 웃지 못할 애피소드가 있다. 1930년대 당시 SP(78회전)음반 한 면에는 대략 3분 정도의 음악 밖에 수록할 수 없었다. 이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앞뒷면을 전부 사용해서 녹음을 했고, 결국 7분이 넘는 연주 테입은 SP 음반에 앞뒷면으로 나뉘어져 실린다. ‘3분 짜리 춤곡’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스윙 음악 스타일에 그는 자신의 음악성을 한정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윙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그는 스윙이라는 음악을 단순한 ’춤곡‘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던 플런저(Plunger; 트럼펫 앞을 막았다 닫았다 하며 음색을 조절하는 기구, 우리말로 소음기라고도 한다)를 이용한 트럼펫의 독특한 울림은 여전히 연주 전체에 ’약방의 감초‘처럼 짜릿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연출하는 세련된 편곡은 스윙 연주 편곡의 전형을 제시했다. 단조와 장조를 교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 정교한 멜로디 진행,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이용한 원활한 감정 처리,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빠르기 조절과 다양한 악기 음색을 실험하며 그는 정통 재즈(mainstream)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자신의 음악에 모두 담아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재즈의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의 선풍에 아랑곳없이 듀크 엘링턴은 여전히 자신의 빅 밴드를 지속시키며 스윙을 고집했고, 주변의 많은 밴드들을 위해 수많은 곡을 써 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유지한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그는 작곡 구조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조곡’(suite)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갖고 여러 소품들을 만들어 전체가 하나의 큰 대곡 형식을 갖추는 조곡을 재즈에 도입해 그는 다시 한번 재즈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작곡 콤비로 오랜 동안 함께 해온 작곡가 빌리 스트레이혼(Biily Strayhorn)과 공동으로 작, 편곡하여 1957년 발표한 < Such Sweet Thunder >같은 앨범은 조곡 스타일의 재즈 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을 받았다. 세익스피어(Shakespear)의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재즈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56년 뉴욕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듀크 엘링턴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0년대 말엽과 1960년대의 활동은 비록 1930년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빅 밴드를 이끌며 세계 투어를 비롯하여, 활발한 음반 발표와 곡 작업을 지속한다. 이 당시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Tourist point of view’(1966)같은 곡에선 말년에 아랑곳없이 기세 등등한 멤버들의 연주실력과 그의 변함 없는 음악성이 느껴진다. 빅 밴드 단원들은 기복 없는 안정적인 연주를 했는데, 이는 1930년대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한 단원들이 함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리톤 색스폰 주자 해리 카네이(Harry Carney)는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데뷔한 1927년 때부터 무려 47년 동안 그가 그의 밴드 멤버로서 활동한다. 후반기 명작으로 거론되는 재즈 조곡 < Latin American Suite >(1970)를 발표하고 끊임없는 투어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되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듀크 엘링턴은 결국 1974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끊임없이 재즈 음악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자기개발에 부단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놓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재즈 맨’ 듀크 엘링턴은 그의 밴드와 자신의 곡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국보인 재즈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 기여했다. 클래식 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지금까지도 초연 되지 않은 그의 곡들을 연구하며 지금도 그의 놀라운 음악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들고 나온 쿨(Cool)이라는 재즈의 새로운 경향은 50년대가 들면서 미국 웨스트 코스트(L.A./켈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뻗어갔다. ‘쿨’의 씨앗은 마일즈가 뿌렸지만, 애석하게 그는 마약으로 인해 긴 슬럼프를 겪어야 했고, 이 틈을 타 마일즈의 데뷔작< Birth of Cool >(1949)에 참여했던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 리 코니츠(Le...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들고 나온 쿨(Cool)이라는 재즈의 새로운 경향은 50년대가 들면서 미국 웨스트 코스트(L.A./켈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뻗어갔다. ‘쿨’의 씨앗은 마일즈가 뿌렸지만, 애석하게 그는 마약으로 인해 긴 슬럼프를 겪어야 했고, 이 틈을 타 마일즈의 데뷔작< Birth of Cool >(1949)에 참여했던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 리 코니츠(Lee Konitz)등과 같은 백인 뮤지션들이 그 독점적 수혜자가 된다. 하지만 ‘쿨’이 동부의 하드 밥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된 데에는 50년대 들어 소위 ‘스타’의 등장에 힘입은 바 크다. 스탄 게츠, 데이브 브루벡, 제리 멀리건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에서의 격렬한 하드 밥과는 다른 관조하듯 차분하고 지적인, 때로는 우울한 멜로디가 우러나는 ‘쿨’의 정체성을 정립시켰고, ‘쿨=백인 재즈’식의 공식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노래로 따라 부르기 힘든 비밥의 난해성을 쿨은 보컬이 첨가되며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여기서 다시 한번 재즈 역시 흑인은 팔리고 백인을 판다는 속설이 입증된다.) 쳇 베이커의 등장은 그래서 주목받을 만했다. ‘My funny valentine’(1953)을 차트에 진입시키며 연주자보다는 재즈 보컬로 알려졌지만, 애처로운 듯 폐부를 찌르는 그의 트럼펫 소리는 또한 당시로선 새로웠다. 잘 훈련된 크루닝(crooning)을 구사한 그는 하지만 이런 대중 영합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평론가들에겐 처음엔 마일즈 데이비스의 아류정도로 취급되는 수모를 겪는다. 창백하리만큼 뽀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래서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용모를 지닌 그는 수많은 도시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모성심리를 자극했지만, 실제 그의 삶은 마약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1929년 오클라호마주 태생인 그는 기타리스트인 아버지 덕에 일찍 음악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어린시절 교회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일선물인 트럼본으로 처음 재즈를 접하게 된다.(얼마 후 이 악기는 트럼펫으로 바뀐다.) 예술 고등학교를 진학해 음악수업을 받았지만, 일찍 프로로 진출하고 싶은 마음에 16살 되던 1945년 학교를 자퇴한다. 육군에 입대해 군악대에서 연주를 연마한 그는, 제대 후인 1948년 잠시 음악 대학에서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웠고, 다시 대학을 2년 만에 자퇴, 군악대에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1950년 두 번째 제대를 하고 본격적으로 클럽 가에 진출해 프로로 나선다. 23살이 되던 1952년, 그는 테너 색스폰 연주인 스탄 게츠(Stan Getz)와 만나며 그해 3월 스탄 게츠와 함께 비도 무소(Viddo Musso) 쿼텟 일원으로 첫 레코딩을 한다. 그리고 그해 3월 29일,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메카 티파니 하우스(Tiffany House)에서 공식적인 데뷔 공연을 연다. 얼마 후 제리 멀리건으로부터 자신의 밴드에 가입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리 멀리건 쿼텟’의 일원으로 헤이그(Haig) 나이트 클럽에 전속 출연하며 서부지역에서 그는 줏가를 올리기 시작한다. 파시픽(Pacific)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하며 그는 제리 멀리건 쿼텟의 멤버 자격으로 모두 10장의 음반을 녹음하다.(그 유명한 “My funny valentine”은 이 때의 작품이다) ‘My funny valentine’으로 소위 ’스타덤‘을 맛본 그는 얼마 후 상습적인 마약 복용협의로 구속되었고, 제리 멀리건과의 창조적인 연주는 채 1년이 못 되 끝나고 만다.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1953년 솔로로 나서며 러스 프리먼(피아노), 레드 미첼(베이스), 바비 화이트(드럼)과 자신의 쿼텟을 결성한다. 1953년 7월, 파시픽에서 그의 첫 리더 작을 발표하고, 평론가와 팬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는다.(그해 그는 재즈 팬들이 선정한 인기투표에서도 1위로 뽑힌다.) 재즈 연주인으로서 수절하기를 거부하고 대중적으로 영합했다는 비난을 받은 루이 암스트롱처럼 그도 차츰 대중스타로서의 이미지를 갖기 시작했다. 이듬해 1954년 < Chet Baker Sings >을 발표하며 그의 인기는 치솟았고 연주자보다는 가수로서 대중들은 그를 인식하게 된다. 어느덧 특유의 창백한 트럼펫 톤보다 감미로운 발라드 노래를 원하게 된 팬들은 이 미남 재즈 뮤지션을 추종하고, 수많은 여성팬을 거느린 몇 안되는(?) 재즈 뮤지션으로 등극한다. 얼마 후 헐리우드의 러브 콜을 받으며 영화 < Hell’s Horizon >(1956)에서 주역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적인 면에서 그는 평론가들의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대중 스타가 되버린 그의 음악성은 날로 퇴보하고 있다는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다. 이에 심기일전 해 한층 연주에 무게를 실은 밥(Bop)스타일의 퀸텟 연주로 꾸민 < Chet Baker & Crew >(1956)로 본연의 재즈 연주자로서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50년대 말까지 퀸텟 연주활동으로 전세계 투어로 바쁜 나날을 보낸 뒤 쿨의 전성이 끝나가려던 무렵인 1959년, 자신의 창조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그는 미국을 떠나 이태리로 향한다. 자신의 음악성을 평소 높이 사던 유럽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그는 죽을 때까지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야말로 방랑인과 같은 삶을 이어간다. 60년대 내내 파리에 거주하면서 프레스티지 레코드사를 통해 음악활동을 하지만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헤로인 중독은 향후 몇 년간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갔다. 1960년 마약 소지 혐의로 이태리에서 체포되 근 1년을 감옥에서 생활한 그는 이후에도 마약으로 감옥을 집 드나들듯이 해야 했다. < Lonely Star >(1965)를 제외하고 이렇다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이 시기동안 그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화된 건강으로 말미암아 70년대 초엔 완전히 연주생활에서 멀어졌다. 마약으로 끝장날 것 같던 그의 음악 인생은, 하지만 옛 동료인 제리 멀리건이 그와 다시 만나며 1973년 카네기 홀 콘서트를 통해 극적인 재기에 성공한다. 크리드 테일러가 이끄는 CTI 레이블에서 간간이 세션을 하던 그는 하지만 다시 미국을 떠나 유럽 각지를 돌며 떠돌이 연주생활을 이어나간다. 클럽에서 세션이나 하며 마약 살 돈을 벌던 중 그는 198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방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외롭게 객사한다. 말년의 그의 모습은 과거 수줍은 소년을 연상시키는 뽀얀 얼굴의 쳇 베이커가 아닌 인생의 풍파에 찌든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쓸쓸히 죽어간 그는 하지만 차츰 후대의 재평가를 받는다. 그 발원지는 다름 아닌 록음악 씬이었는데, 펑크의 작가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는 그에게 헌정하는 곡 ‘Almost blue’(1982)를 앨범 < Imperial Bedromm >에 수록하며 ’처절하리 외롭고 슬픈‘ 정감이 서린 그의 음악성에 경의를 표했고, 이듬해 그의 앨범 < Punch the Clock >(1983)에서 그를 초청해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곡 ’Shipbuilding’에서 트럼펫 세션을 부탁하기도 한다.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 브루스 웨버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1987년에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돌입한다. < Let’s get lost >라는 쳇 베이커의 기록 영화는 이듬해인 1988년 아카데미 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죽기 전까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그의 음악 세계는 그의 사후 루이 암스트롱의 뒤를 잇는 ‘최고의 즉흥 연주자’라는 훈장을 얻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수많은 미발표 음원들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되고 있다. (추천 앨범: 쳇 베이커를 처음 접하시려는 분들은 작년에 EMI를 통해 나온 < Deep in a Dream: The Ultimate Chet Baker >(2002)를 먼저 접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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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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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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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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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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