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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영화음악 (Vanilla Sky OST) [블루 컬러 2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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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영화음악 (Vanilla Sky OST) [블루 컬러 2LP]

[ 게이트폴드 ]
Paul McCartney, Peter Gabriel, Monkees, looper, Josh Rouse 노래 외 1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Real Gone Music (USA) | 2018년 12월 14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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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영화음악 (Vanilla Sky OST) [블루 컬러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12월 14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LP 구매시 주의 사항 안내드립니다.

디스크

Disc1
  • 01 All The Right Friends - R.e.m.
  • 02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 Radiohead
  • 03 Vanilla Sky - Paul Mccartney
  • 04 Solsbury Hill - Peter Gabriel
  • 05 I Fall Apart - Julianna Gianni
  • 06 Porpoise Song (theme From "head") - The Monkees
  • 07 Mondo '77 - Looper Featuring Francis Macdonald
  • 08 Have You Forgotten - Red House Painters
  • 09 Directions - Josh Rouse
  • 10 Afrika Shox - Leftfield/afrika Bambaataa
Disc2
  • 01 Svefn-g-englar - Sigur Ros
  • 02 Last Goodbye - Jeff Buckley
  • 03 Can We Still Be Friends - Todd Rundgren
  • 04 Fourth Time Around - Bob Dylan
  • 05 Elevator Beat - Nancy Wilson
  • 06 Sweetness Follows - R.e.m.
  • 07 Where Do I Begin - The Chemical Brothers

아티스트 소개 (16명)

노래 : Peter Gabriel (피터 가브리엘)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 하나의 전형은 유행을 낳고, 하나의 명작은 아류를 낳는다. 어떤 뮤지션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남이 만든 형식에 자신의 능력을 맞춰나간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싱어 송라이터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다른 아티스트가 닦아 놓은 길을 거부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을 통해 음악의 프리즘을 다각화시켰고 대중 음악의 개념을 넓혔다. 아트록, 팝록, 컬리지록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음악 제국을 건설한 그는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민속 음악을 월드 뮤직(다분히 서양인 중심적인 시각이지만)이란 이름으로 알린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상업적이고 틀에 박힌 유행음악에 싫증을 느낀 팬들은 피터 가브리엘의 노래들을 통해 음악적인 갈증을 풀었고 지적인 배고픔을 채웠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피터 가브리엘은 명 프로그레시브 그룹 제네시스(Genesis)를 이끌면서 음악적인 이상을 찾았고, 1977년부터 시작된 솔로 활동은 그 유토피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실천의 시간이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제네시스는 1970년을 전후한 기간 동안 클래식을 근간으로 한 복잡한 곡 구조와 난해한 가사, 그리고 시각적인 충격 요법을 가미한 공연으로 가장 초현실적인 아트록 밴드로 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 선두엔 바로 피터 가브리엘이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친정인 제네시스를 출가한 이 영국 아티스트는 이전처럼 일반 대중들이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음악에서 좀 더 대중적인 음악으로 방향타를 틀었다. 그 대표적인 곡이 1986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Sledgehammer’이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성공이 그의 음악 철학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친숙한 멜로디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고집스런 눈으로 응시한 날카로운 가사와 긴장감을 풀지 않는 도전적인 실험 정신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은 그를 대중 음악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하고 있다. 1977년, 포크 스타일의 기타 연주로 포문을 여는 데뷔 싱글 ’Solsbury hill(68위)’이 수록된 처녀작 < Peter Gabriel >부터 1980년의 세 번째 음반까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앨범 타이틀로 정한 그는 이전 제네시스 시절과는 달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사로 거듭났다. 특히 < Peter Gabriel Ⅲ >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인륜적인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인권운동가 스티븐 비코에게 헌정한 명곡 ’Biko’와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얼음처럼 차갑고 오싹한 백보컬이 전율적인 ’Games without frontiers(48위)’가 자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1994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발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피터는 관중들과 함께 ’Biko’를 열창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감동과 환희의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다. 제네시스 시절부터 짙은 화장과 화려한 공연으로 시각적인 면에서도 앞서갔던 가브리엘은 1981년 MTV가 개국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982년의 4집 < Security >에 수록된 ’Shock the monkey(29위)’의 긴박한 멜로디를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와 공포스런 화면으로 풀어낸 뮤직비디오는 MTV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스탑 모션으로 제작된 1986년도 싱글 ’Sledgehammer’도 여러 상을 수상하면서 뮤직비디오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렇듯 영상에도 깊은 조예를 나타낸 그는 1984년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 버디 >와 1988년 마틴 스콜세지의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활동 반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상한 4개의 그래미 트로피 중에서 3개가 뮤직비디오 부문일 정도로 ’보는 것’에 대한 그의 집념과 의지는 대단하다. 또한 그는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안을 제3세계의 민속음악에서 찾기 시작했다. 피터 가브리엘은 WOMAD(World of Music, Arts and Dance) 재단을 만들어 1980년대 폴 사이먼(Paul Simon),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리더 데이비드 번(David Byrne)과 함께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음악을 서방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자신의 곡인 ’Biko’의 도입부에서 들을 수 있는 아프리카 합창단의 음원과 < So > 앨범에 수록된 세네갈 출신의 남성 가수 유쑨 두루(Youssou N’Dour)를 백보컬리스트로 모셔온 ’In your eyes’ 등은 타지역의 민속음악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의미하는 대표곡이다. 1986년에 발표된 통산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So >는 피터 가브리엘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남성 가수로 등극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싱글 ’Sledgehamm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의 고지를 점령했고 ’In your eyes(26위)’와 ’Big time(8위)’, 케이트 부시와 호흡을 맞춘 발라드 ’Don’t give up(72위)’이 무더기로 차트를 누비면서 일반 팝 팬들과의 거리감을 대폭 줄였다. < So >는 앨범 차트 2위까지 상승했고 그래미에도 여러 부문에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면서 대중성과 음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In your eyes’는 1989년에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의 영화 < 세이 애니씽 >에 삽입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다시 싱글 차트에 입적되기도 했다(41위). 1989년, 영화 <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의 사운드트랙 < Passion >으로 그래미 뉴에이지 부문을 수상한 그는 1992년에 < Us >를 발표했다. 피터 가브리엘과 핑크 빛 염문을 뿌렸던 아일랜드의 자존심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와 입을 맞춘 ’Come talk to me’를 위시해 그루브한 싱글 ’Steam(32위)’, ’Digging in the dirt(52위)’를 배출한 이 작품은 그러나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Secret Live’로 명명된 전 대규모 세계 순회 공연의 열광과 희열을 담은 음반과 비디오를 1994년에 발표해 다시 한번 그래미상을 거머쥔 피터 가브리엘은 현재 음악과 영상, 그리고 컴퓨터 산업을 아우르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에 가할 충격을 준비하고 있다.
노래 : Monkees (몽키즈 (팝/락 밴드))
1964년의 비틀스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스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스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 1964년의 비틀스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스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스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들을 젖히고 무대를 완전 장악, 미국인들의 기를 죽였다. 언론은 그것을 ‘영국의 침공’이라고 했다. 미국은 남의 잔치에 땅을 빌려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자존심 회복이 요구되었다. 이윽고 두 명의 미국인이 비틀스에 맞서는 미국 그룹을 만들어 긍지를 되찾고 그들처럼 막대한 부를 창출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프로듀서 밥 라펠슨과 버트 슈나이더였고 그들의 기획포인트는 ‘조립식 비틀스의 창조’였다. 그 기획하에 그룹 몽키즈가 탄생되었다. 당시 콜롬비아 영화사 사장 아들인 버트 슈나이더와 재능있는 제작자 밥 라펠슨은 리차드레스터가 만든 비틀스 영화(A Hard Day’s Night)의 대성공을 주시하고 거기서 ‘비틀스 같은 4인조 그룹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구체화했다. 그들은 65년 레이버트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먼저 주요 헐리우드 업계지에 구인광고를 냈다. “텔리비전 새 시리즈에 출연할 17~21세의 네 익살꾼을 찾습니다.” 슈나이더와 라펠슨은 한 달간 4백 37명의 응모자를 오디션했다. 응모자들 가운데는 스티븐 스틸스와 나중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킨 찰스 맨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스틸즈가 오디션을 통과했더라면, 록계는 수준높은 음악을 선보인 ‘버팔로 스프링필드’나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를 배출하지 못하게 됐으리라. 정말 스틸스에게는 불합격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사진 잘 받고 활달하며 연예계 활동 경력이 일천한 네 명의 소년이 엄선되었다. 아마추어 가수 마이크 네스미스, 그리니치 빌리지의 포크 싱어 피터 토크, 아역배우 출신의 미키 돌렌즈, 그리고 탁월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 데이비드 존스가 행운의 면면들이었다. 그들이 그룹 몽키스가 되었다. 그런데 몽키스 멤버들 중 둘은 가수, 둘은 배우였다. 온전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기에 이미 성분상 몽키스는 ‘절반의 실패’를 안고 들어갔다.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두 제작자는 몽키스라는 ‘상품’을 팔리게 하기 위해 그것의 포장 및 품질관리 작업을 했다. 윌리암 프러울리라는 언더그라운드 영화 감독을 고용하여 몽키스에게 스파르타식 연기 수업을 지도케 했다. “처음에 그들은 당황했고, 몸이 굳어 있었으며, 약간은 촌스러웠다. 때때로 마룻바닥을 굴렸으며, 동물처럼 되라고 요구했다. ‘넌 개야. 기린이 하는 식으로 말하라구. 코끼리하구 놀라구. 마치 찻잔이 얘기하는 듯이 말해야 해.’ 그건 그들을 외적으로 개조해 육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프러울리의 말이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창조되어가고 있었다. 포장은 그럴 듯해졌으나 이제 품질이 문제였다. 몽키즈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라펠슨-슈나이더팀은 그 유명한 돈 커시너에게 접근했다. 돈 커시너는 60년대 초반 ‘크리스탈즈’나 ‘로네츠’같은 여성 보컬그룹 유행을 몰고 온 음악제작업의 대부(代父)로, 그의 영향 아래 닐 세다카-하위 그린필드, 제리 고핀-캐롤 킹 등 명작곡 콤비들이 탄생했다. 커시너는 당시 ‘스크린 젬스 콜롬비아 뮤직’사 대표였는데, 그 때 막 콜젬스 레코드사를 신설했다. 그는 박력있고 흥이 넘치는 사운드를 몽키스에게 기대했지만, ‘함량 미달’이라는 것만을 확인했고, 이들을 훈련시켜 한 앨범에 22곡을 수록하고 다섯 개 TV쇼에 출연시키기엔 시간이 없었다. ‘출고 시점’을 맞춘 생산이 요구되었던 까닭이었다. 할 수 없이 돈 커시너는 그가 거느린 작곡 부대를 활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고핀-킹, 세다카-그린필드, 토큰즈, 닐 다이아먼드 등 프로 작곡가들이 몽키스 긴급 수혈을 위해 동원되었다. 연주 또한 자체로 해결할 수 없어 ‘캔디 스토어 프로페츠’라고 불린 팀이 맡았다. 몽키스는 딴 사람이 써서 연주해준 곡에 입을 벌리고 몸만 놀리면 되었다. 그들은 밴드가 아니라 서커스 원숭이들이었다. 그룹명도 몽키스이지 않았던가. 품질과 포장이 완성된 그들은 드디어 출고 시점인 1966년 6월 NBC TV의 카메라 앞에 섰다. 팬들의 반응은 라펠슨과 슈나이더의 기대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들이 출연한 < 몽키스 위클리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그 해 겨울 몽키스 프로는 회당 1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지켜보았다. 하루에 날아든 팬레터는 무려 5천통에 달했다. 비록 ‘모조된 비틀스’였지만, 몽키스는 오리지널 비틀스만큼 잘 팔렸다. 그들의 노래는 데뷔작 ‘클락스빌로 가는 마지막 열차(The Last Train to Clarksville)’가 차트 1위로 치솟은 것을 비롯, 당시 차트는 그들의 것이었다. 4장의 앨범이 연속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셔츠, 코트, 카드, 인형, 도시락 등 몽키스 기획상품은 2천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몽키스 현상’이었다. 그룹 멤버 미키 돌렌즈는 “우리가 상품을 팔고 있다. 우린 몽키스를 팔고 있다"고 자랑스레 외치기도 했다. 그들의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 영국의 데이비드 존스라는 이름의 가수가 막 데뷔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멤버 중 데이비드 존스가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데이비드 보위로 바꾸었다. 70년대 대중음악에 획을 그은 슈퍼스타 보위도 몽키스로 인하여 본명을 잃어버렸던 셈이었다. 몽키스는 너무 했다 싶을 정도로 비틀스의 성공 패턴을 본떴다. 데뷔음반을 발매하기 직전 ‘몽키스가 오고 있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수천 장 개첨한 것을 포함, 광고 캠페인에 10만 달러를 썼으며 방송국의 디스크쟈키들에게 일제히 홍보판을 살포했다. 이와 같은 홍보 전략은 비틀스의 전설적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이미 활용했던 방식이었다. 그룹 이름도 비틀스처럼 고의적으로 스펠을 틀리게 했다(딱정벌레는 Beetles인데 Beatles라 한 것과 같이 Monkeys를 Monkees로 썼다.) 레이버트 프로덕션의 한 간부 스스로가 몽키스를 ‘미국판 비틀스’라고 언급할 지경이었다. < 뉴스위크 >지는 그들을 ‘외형적인 비틀스의 직계후손’이라고 표현했고, < 타임 >지는 1967년 “교활한 프로모터 한 팀이 제록스 기계로 비틀스를 복사해 몽키스를 내놓았다”고 코멘트했다. 평론가들은 애초부터 몽키스의 TV쇼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완전한 가수, 완전한 연기자 둘 가운데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틀스처럼 진지하게 대중음악을 추구하는 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악평과 무시를 유발시키기에 적합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예술적 역량이 부족했고 그것을 메울 수 있는 환경에 처하지도 못했다. 물론 몽키스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몽키스 멤버 중 가장 의식있는 마이크 네스미스는 “우리 음악은 하등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서서히 비틀스 흉내와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1967년 말부터 묻혀버린 자기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에 돌입, 악기를 연주하고 곡쓰기를 시도했으며, 순회공연을 통해 새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네스미스는 몽키스가 뮤지션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우리를 ‘제도권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우린 오늘날 ‘우상 타파적’인 청춘의 가장 진실된 표현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이러한 국면전환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간을 노린 기획상품이었기에 그들의 인기는 오래 지속될 리 만무였고 1969년에 이르러서는 시청률이 크게 하락하면서 시리즈는 방영이 중단되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밴드는 엉망이 되어 갔고 피터 포크가 그룹을 탈퇴했으면 몇 개월 후 몽키스는 마침내 공식 해체되었다. 몽키스는 조립식 비틀스 또는 제 2의 비틀스를 표방했지만, 둘간에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비틀스는 영국의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들이 ‘욕구 분출’을 위해, ‘신분 상승’을 위해 음악을 한 ‘자생적’ 그룹이었다. 그들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 제도권에 진입했지만, 주체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용해되거나 도구화되는 위험을 피하고 오히려 제도권을 요리하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었다. 반면 몽키스는 제도권 또는 자본계급이 ‘부의 축적’을 위해 만든 ‘인위적’ 그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키스는 자본가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효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쉽게 ‘폐기 처분’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비틀스는 아래에서 발생하여 위로 올라간 그룹이라면 몽키스는 위에서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낸 그룹이었다. 몽키스는 제도권에 의한, 제도권을 위한, 제도권의 그룹이었고 또한 제도권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록 뮤직이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를 향해 외치는 젊음의 의사표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할 때 몽키스는 정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록 평론가들이 몽키스를 진정한 록 그룹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티스트의 주체성을 배제한 제도권의 대중음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몽키스는 실증했다. 또 그에 의해 고정된 이미지는 쉽게 타파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었다. 몽키스 멤버들은 그룹이 해체된 후 솔로의 길을 모색하면서 고정된 이미지로 인해 일을 찾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도권이 가져다주는 명성과 부의 대가는 그처럼 잔인한 법이다! 피너 토크는 87년 주간지 < 피플 >과의 인터뷰에서 몽키스 시절을 이렇게 평했다. “60년대는 정말 분열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희망과 갈채 그리고 우아함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함이 있었다. 몽키스는 어느 면에서 좋은 쪽의 증류액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극단적인 멋, 극단적인 갈채, 극단적인 무해(無害)의 축소판이었다.” 그 때 몽키스는 20년만에 재결합하여 < 그것은 옛날, 이것은 지금 >(That was Then, This is Now)이란 히트곡을 내어 올드팬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마이크 네스미스는 참여를 거부했다). 아마 몽키즈의 좋은 쪽은 -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다 - 그때의 컴백에서처럼 올드팬의 향수를 달래주고 있다는 사실이리라...
노래 : Afrika Bambaataa (아프리카 밤바타 [케빈 도노반],Kevin Donovan)
힙합 / 일렉트로 하우스-펑크 DJ 힙합 / 일렉트로 하우스-펑크 DJ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버클리는 1960년대 유명한 포크 뮤지션이었던 팀 버클리(Tim Buckley)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음악 공부를 위해 L.A로 이동한 뒤 레게 뮤지션이었던 샤인헤드(Shinehead)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이후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Gary Lucas)와 결성했던 음악 공동체 가즈 앤 몬스터즈(Gods & Monsters)로 어느 정도 이름을 홍보하는데 성공했다. 밴드를 그만두고 결국 솔로로 전향한 제프 버클리는 1994년 데뷔작이자 생전 마지막 음반인 < Grace >를 발표했다. 앨범으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예상했던 세간의 평들을 완전히 깨부순 그만의 싱어 송라이팅 스킬을 뽐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시대의 주류였던 그런지 사운드와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포크 록 소리샘이 돋보였다. 일종의 얼터너티브에 대한 얼터너티브였던 셈. 웅장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탁월한 작곡 능력, 백 밴드의 안정감 있는 연주가 만난 걸작이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재지한 느낌은 앨범을 제목 그대로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메시지면에 있어서도 당시 얼터너티브의 염세적, 부정적인 정서가 아닌 ‘음악을 통한 사랑의 전파’라는 소신을 피력, 컬트 팬들을 세력권으로 집결시켰다. 이 후 2집 앨범을 준비하던 중에 떠난 미시시피 강으로의 여행에서 제프 버클리는 익사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데모상태로 존재했던 트랙들은 다행히도 사후 그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1998년에 <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 >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2집 역시도 1집에 버금가는 뛰어난 성과물이었으나 다만 ’그가 직접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그리고 2000년에는 제프 버클리의 첫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인 < Mystery White Boy >(제프 버클리를 일컫는 듯한)가 나와 그를 못 잊는 팬들을 달래주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싱어 송라이터’라는 개념은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뮤지션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녔었다. 특히 그들은 1960년대의 ‘우리’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감수성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바로 1960년대를 ‘we decade’, 1970년대를 ‘my(혹은me) decade’라 명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싱어 송라이터는 또한 ‘독보적인 음악 파일을 완성한’ 아티스트를 말할 때 쓰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에 제프 버클리만큼 자신만의 소리 메커니즘을 들려 준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말이다.
노래 : Todd Rundgren (토드 룬드그렌)
노래 : Bob Dylan (밥 딜런 ,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 Rubber Soul >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 Another side of Bob Dylan >, < Bring it all black home >, < Highway 61 revisited >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 Highway 61 Revisited >와 < Blonde On Blonde >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 Blonde On Blonde >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 Blood On The Tracks >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 John wesley Harding >과 < Nashiville Skyline >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 Nashiville Skyline >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 Basement Tapes >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 Self Portrait >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 Highway 61 Revisited >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 Self Portrait >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 Show Train Coming >, < Saved >, < Shot Of Love >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 Infidels >, < Empire Burlesque > 그리고 1989년에 나온 < Oh Mercy >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 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는 ‘브레이크 비트 록과 빅 비트의 제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들이 테크노 뮤지션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다소 이례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음악을 들어본 청자들은 대개 이 표현에 동의를 표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우리들은 록과 댄스를 결합하려는 십자군이 아니다’라며 강경하게 부인하지만, 그들의 음악에 록적인 필이 넘치는 것만은 사실이다. 1989년 에드 사이먼스...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는 ‘브레이크 비트 록과 빅 비트의 제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들이 테크노 뮤지션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다소 이례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음악을 들어본 청자들은 대개 이 표현에 동의를 표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우리들은 록과 댄스를 결합하려는 십자군이 아니다’라며 강경하게 부인하지만, 그들의 음악에 록적인 필이 넘치는 것만은 사실이다. 1989년 에드 사이먼스와 톰 롤랜즈는 서로의 음악적 관심사가 비슷함을 확인하고 더스트 부러더스(Dust Brothers)라는 이름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최초의 레코딩은 디스 모탈 코일(This Mortal Coil)의 곡(원곡은 팀 버클리(Tim Buckley))을 새롭게 리믹스한 'Song to the siren'이었다. 이 싱글은 맨체스터 댄스 씬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이들은 여러 뮤지션으로부터 리믹스 제의를 받게 되었다. 동시에 클럽에서 DJ활동도 겸하면서 둘은 서서히 레코딩을 준비했다. 이들의 첫 번째 성과물은 1994년의 와 였다. 싱글들 중 ‘Chemical beats’가 클럽에서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들에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안겨주었다. 미국의 더스트 브라더스가 밴드 이름에 이의를 제기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밴드의 이름을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로 바꾼 뒤 발표한 1집 (1995)는 여타 일렉트로니카 밴드와 구분되는 이들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었다. 특히 (밴드만의 트레이드마크인) 리듬 라인의 다채로운 변화와 더불어 사운드 질감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곡을 다양하게 구성한 점이 돋보였다. 불협화음의 적극적인 사용, 와우와우 이펙트처럼 들리는 효과음의 도입으로 형성되는 훵키함, 맨체스터씬 특유의 댄서블함이 한데 어울려 새로운 ‘화학적인’ 결과물을 일궈낸 것이다. 1997년에 발매된 2집 (영국 차트 1위)의 대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된 바였다. 앨범 발매 전에 나온 싱글 ‘Setting sun’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었기 때문.(특히 오아시스의 노엘 겔러거의 참여가 큰 몫을 했다.) 미국 차트에서도 테크노 앨범으로는 전례 없는 차트 13위로 등장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힙합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도입, 브레이크 비트와의 결합을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첫 싱글인 ’Block rockin’’ beats‘와 타이틀 곡 ’Dig your own hole‘이 이를 잘 보여준다. 멤버들도 ’우리는 힙합을 하는 테크노 밴드요, 테크노를 하는 힙합밴드이다.‘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3집 (1999)는 테크노라는 장르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소개서이자 개정판이었다. 초기의 크라프트베르크와 디트로이트 테크노에서부터 출발, 맨체스터 씬의 댄서블함과 애시드 하우스의 세계를 거쳐 현재의 빅 비트까지, 여러 스타일을 한데 묶어 케미컬 부라더스만의 사운드트랙으로 재창조시켰다. 임팩트는 전작들에 비해 떨어질지 모르나 대신 이들의 노련함이 빛을 발한다. 참여한 게스트의 면모도 화려하다. 오아시스의 노엘 겔러거, 뉴 오더의 버나드 섬너, 매지 스타의 호프 샌도벌 등이 바로 그들이다.
알이엠(R.E.M.)은 통상 얼터너티브의 원조 혹은 전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들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예외적 사운드를 보여주는 < Monster >(1994)를 제외한다면, 알이엠의 음악은 시애틀 4인방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와는 거리가 있다. 일례로 그들의 최고 히트곡인 ‘Losing my religion’은 디스토션 사운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쾌한 ‘팝송’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운... 알이엠(R.E.M.)은 통상 얼터너티브의 원조 혹은 전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들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예외적 사운드를 보여주는 < Monster >(1994)를 제외한다면, 알이엠의 음악은 시애틀 4인방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와는 거리가 있다. 일례로 그들의 최고 히트곡인 ‘Losing my religion’은 디스토션 사운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쾌한 ‘팝송’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운드가 아닌 그들의 ‘태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알이엠은 대학가에서의 인기를 기초로 전국적 돌파를 감행했던 최초의 사례이다.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내공을 갈고 닦으며 결국 주류음악계에 진입한 케이스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지금은 비록 일반화되었다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1990년대초의 많은 얼터너티브/그런지 밴드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그들의 사운드는 동시대의 그 누구와도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 점, 당시의 지배적 취향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알이엠을 ‘얼터너티브의 선구자’라고 평할 수 있겠다. 1집 < Murmur >(1983)는 레이건 신보수주의가 득세하던 때에 발매되었다. 보수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듯 당시의 미국 주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으로 대표되는 팝이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의 화려한 사운드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포크 성향이 짙은 조용한 사운드는 그래서 더욱 의외의 반역이었다. < 롤링 스톤 >은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Madonna), 폴리스(The Police) 대신 이 앨범을 ‘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했다. 1984년에 발매된 2집 < Reckoning >은 빌보드 앨범 차트 30위권에 올라가는 대성공을 거두게 됨으로서 컬리지 록의 개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곡 구조 속에서도 미묘한 변화를 일궈내는 그들의 음악적 역량이 돋보였다. 이전과는 달리 어둡고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로 일관한 3집 < Fables of Reconstruction >(1985)뒤에 발매된 4집 < Life''''s Rich Pageant >(1986)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강한 비트를 지향하는 로큰롤 밴드임을 잘 보여준 수작이었다. 5집 < Document >(1987)는 인디 시절을 총결산하는 이들의 대표작 중 하나임과 동시에 주류로의 입성을 준비하는 작품이었다. 전반적인 앨범의 톤이 선명해진 것과 메시지의 전달을 시도한 점이 돋보였다. ‘Losing my religion’과 함께 이들의 대표곡이 된 ‘The one I love’(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 기록)는 (이 후 밴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알이엠 특유의 미드 템포 발라드 넘버이고, ‘Exhuming McCarthy’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경향에 대한 이들의 경고성 메시지였다. 메이저로 입성하여 < 워너(Warner) >와 계약한 뒤 발표한 < Green >(1988)은 전반적으로 5집과 비슷한 구성과 사운드를 보였다. 하지만, 다양한 악기(페달 스틸 기타, 만돌린, 첼로)들의 도입으로 더욱 고급스러운 사운드를 생산함으로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물론 목소리도 잃지 않았다. ‘World leader pretend’에서는 정치가들의 교만을 조롱했고, ‘Orange crush’는 베트남전의 고엽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곡이다. 밴드 해체의 위기(장기 투어로 인한 스트레스가 주요 이유였다.)를 딛고 발매한 7집 < Out of Time >(1991)은 메시지가 후퇴한 대신 개인적 감정을 노래한 조용한 포크 성향의 앨범이었다. 알이엠하면 떠오르는 ‘Losing my religion’의 대성공과 함께 이들은 드디어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다음 앨범인 < Automatic for the People >(1992)은 이러한 성공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알이엠의 마스터피스라 불릴 만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정치적 발언도 잊지 않은 이들은 ‘Ignore land’에서 공화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민주당의 클린턴이 당선됨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로 인해 얼터너티브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갈 무렵 발표된 < Monster >(1994)는 난데없는 그런지 사운드를 선보인 앨범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지 사운드를 그냥 답보하지 않고 알이엠화된 사운드로 살짝 방향을 틀어놓음으로서 동시대의 다른 밴드들과 자신들을 구분지었다. 이 후, 투어 중에 써놓은 곡들을 모아 발표한 < New Adventures In Hi-Fi >(1996)는 전반적으로 자성적이고 침잠된 무드를 보여주었다. 뉴욕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참여한 ‘E-bow the letter’, 알이엠의 숨겨진 명곡으로 평가받는 ‘Leave’가 돋보였다. 드러머 빌 베리의 탈퇴(뇌수술로 인함) 이 후 발매된 < Up >(1998)은 이들의 대표적인 음악 스타일인 징글 쟁글한 기타 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록곡 대부분이 발라드적인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빌 베리의 탈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듯한(나머지 멤버들은 이에 부인하지만)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전작보다 더욱 내면 지향적이고 고요한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2001년에 발매된 < Reveal >은 이전 앨범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반영해서인지 전성기였던 < Automatic for the People >(1992)이나 < Out of Time >(1991)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현재의 흐름에도 적극적이어서 앨범 곳곳에 배치된 일렉트로닉 효과음들은 이들에게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완전히 ‘알이엠화’된 상태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왜 아직까지도 수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린 우리 맘대로 간다!" 서태지만큼이나 국내 팬들이 간절히 기다린 앨범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신보일 것이다. 출시 오래 전부터 평단과 팬들의 가슴을 졸이며 고대했던 이번 앨범은 서태지식으로 하자면 ‘내 맘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라디오헤드는 3년만의 신작을 통해 그간 일궈놓은 자신들의 신화를 무차별하게 파괴하면서 또 다른 세계로의 확장을 꾀하고있다. 음악은 대중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 # "우린 우리 맘대로 간다!" 서태지만큼이나 국내 팬들이 간절히 기다린 앨범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신보일 것이다. 출시 오래 전부터 평단과 팬들의 가슴을 졸이며 고대했던 이번 앨범은 서태지식으로 하자면 ‘내 맘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라디오헤드는 3년만의 신작을 통해 그간 일궈놓은 자신들의 신화를 무차별하게 파괴하면서 또 다른 세계로의 확장을 꾀하고있다. 음악은 대중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생경한 사운드로 가득하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최강의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도도한 음악선언을 해부한다. 지난 9월 영국의 음악관련 여론조사로 가장 권위 있는 ‘버진(Virgin) 올 타임 톱 1000 앨범’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규모도 최대일 뿐 아니라 이번을 포함해 3차례 밖에 실시하지 않아 비상한 관심이 쏠린 이 매머드 폴은 가장 우수한 앨범 1000장을 뽑는 조사로서 이번에는 뮤지션, 음악관계자, 평론가, 팬들을 망라해 자그마치 20만 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영국을 비롯해 서구에서 실시하는 음악관련 리서치는 어떤 것이나 대부분 비틀스가 1위를 차지하는 게 일종의 법칙처럼 되어있다. 그래서 싱겁고 맥이 풀릴 때가 많다(물론 비틀스매니아는 빼고). 이번에도 1위는 어김없이 비틀스의 < Revolver >였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는 아주 눈 여겨 볼만한, 그야말로 반란에 가까운 이변이 일어났다. 비틀스의 30년 후배 밴드인 라디오헤드의 앨범 < The Bends >와 < OK Computer >가 당당 2위와 4위에 오른 것이다. 비틀스의 명반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와 < Abbey Road >는 3위와 5위였다. 정상은 여전히 비틀스였으나 라디오헤드의 < The Bends >가 이 두 역사적 명반을 꺾었다는 것은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 충격적이고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자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언제나 최고였던 비틀스의 견고한 로큰롤 왕관이 라디오헤드로부터 위협 받고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제 비틀스를 넘본다 이번 조사에 나타난 라디오헤드의 급부상은 동시대에 경쟁한 브릿 록밴드와 비교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1995년 전 영국을 휘몰아쳤던 오아시스의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는 21위에 머물렀고 다음 앨범 < Be Here Now >는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무려 400위 이상이 떨어져 459위로 침몰했다. 블러의 < Parklife >도 60계단이나 하락, 95위로 주저앉았고 프로디지의 < The Fat Of The Land >도 54위에서 269위로 비참하게 퇴각했으며 더 버브의 < Urban Hymns > 역시 2년 전 45위에서 20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10위에서 2위로 오른 < The Bends >와 21위에서 4위로 비상한 < OK Computer >의 라디오헤드와 비교할 때 이들의 퇴조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브릿팝 대회전, 아니 서바이벌게임 승리의 축포를 쏴라!) 사람들은 이 조사 이후 곧바로 라디오헤드의 신보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어쩌면 그 조사는 라디오헤드의 새 앨범에 대한 팬들의 드높은 기대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팬들은 정말 눈이 빠지게 신작을 기다려왔다. 그 학수고대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바로 4위에 오른 앨범 즉 1997년의 < OK Computer >의 높은 완성도와 대성공 때문이었다. 영미권에서만 1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이 기념비적 음반으로 그들은 이번에 증명되었듯 비틀스 신화를 잇는 ‘영국 현존 최고의 록 밴드’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때문에 이번에는 과연 어떤 음악으로 팬들과 평자들을 만족시켜 줄 것인지가 최대 관심사로 등장했다. 라디오헤드는 그러나 < Kid A >로 명명된 새 앨범에서 그러한 소박한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아니 그것을 저주하듯 철저히 록의 형식미를 파괴해버렸다. 록 밴드 본연의 일렉트릭 기타의 강렬한 소리는 찾기 힘들고 대신 모호한 전자음과 앰비언트 사운드 그리고 소음이 뒤엉켜 있다. 사실 < OK Computer >에서도 이러한 요소가 있긴 했지만 신작은 그런 반(反)록적인 사운드를 바탕으로 자신들 특유의 어둡고 병적일 만큼 암울한 심리상태를 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라디오헤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먹이는 어휘인 그들만의 비참주의(miserablism)가 확대 재생산된 것이다. 당연히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 대중노선의 포기라고 할까. 하지만 이것을 역으로 풀어보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누구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으며 우리가 못할 음악은 없다"는 그들의 시위(?)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 Kid A >는 음악상품이 아닌 ‘아티스트의 음악’을 바라는 진지한 팬들의 기대에는 충분히 답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미학적 결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라디오헤드는 이번에 비로소 새롭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좀처럼 머물러 있기를 거부해왔다. 1993년의 1집 < Pablo Honey >에 수록된 시그니처 송 ‘Creep’은 분명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한 기틀이었지만 2년 뒤 낸 2집 < The Bends >에서 라디오헤드는 그 영광을 스스로 반납하는 용감한 자기부정의 면모를 드러냈다. ‘Creep’을 답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새 방향을 제시해 ‘High And Dry’ ‘Fake Plastic Tree’ ‘Nice Dream’ ‘Just’ 등의 곡으로 서정성과 폭발력이 어우러진 자신들의 오리지널리티를 정립해냈다.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대성공이었다. 지속적인 자기변신은 2년 뒤 발표된 3집 < OK Computer >에서 절정에 달했다. 현대인의 편집증적 분열을 변종(變種)의 미학으로 형상화한 이 앨범에서 그들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던 광범위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냈다. 소리는 한층 복잡해지고 변화무쌍해졌으며 가사는 마치 ‘해체주의 글 쓰기’처럼 난해했다. 음악집단 모두가 게릴라에게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아트 록 ‘Paranoid Android’, 현기증을 일으키는 아찔한 발라드 ‘No Surprises’와 ‘Let Down’ 등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곡들이 한 앨범에 동승한 것부터가 놀라웠다. #< Kid A >는 해독하기 어려운 난수표 노래 속에서 인간 감정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라디오헤드의 제1의 과업으로 보인다. 테크놀로지가 구축해 논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 미래에 대한 불안, 광기와 같은 현대인의 병리현상을 한사코 음울한 곡조로 묘사해왔다. 그들 눈에 지금의 세상은 일그러짐 그 자체이며 그들은 그 속에서 휴머니티를 복원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번 앨범에도 그 같은 사회인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앨범 타이틀 ‘Kid A’는 최초의 복제인간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코앞에 닥친 복제인간(톰 요크는 얼마 전 웹 채팅에서 그것이 이미 만들어져있다고 주장했다)을 보는 그들의 눈은 냉소적이고 씁쓸하다. 어쩌면 이 같은 라디오헤드의 인식 패러다임은 인간소외를 우화(寓話)로 풀어낸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들한테 인간의 윤리의식과 결부된 복제인간 문제는 당연한 화두와 쟁점일 수밖에 없다. 첫 곡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는 뭐가 제자리에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키보드 소리와 일렉트로닉 효과음이 어지럽게 떠돈다. 신비스런 소리들과 묘한 불협화음으로 시작되는 타이틀 곡 ‘Kid A’에서 톰 요크의 보컬은 복제인간을 묘사하는 듯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둔중한 베이스가 곡을 주도하는 ‘National Anthem’에서는 트롬본과 색소폰이 가미되어 프리 재즈 경향마저 나타난다. 이 처음 3곡까지 기타 소리는 전혀 없다. 록밴드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록에 대한 무차별 능멸(?)’이다. 차가운 맛을 전하는 ‘How To Disappear Completely’ 그리고 살짝 테크노 비트를 취하지만 기존 팬들이 겨우 그룹의 옛 향취를 건질 수 있을 ‘Optimistic’도 포함해서 도무지 어떤 카테고리로 집어넣을 수가 없다. 앰비언트 테크노도, 모던 록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트 팝이라고 할 수도 없다. < 롤링스톤 >은 이를 ‘스페이스 록 오페라’라고 그럴듯한 말을 붙였지만 ‘라디오헤드의 새 음악’이란 말 외에는 딴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속지에는 가사도 없다. 들으려면 듣고 싫으면 말라는 식일 터인데 ‘난 여기 없어’ ‘그건 내가 아냐, 난 가서 어디서 즐기나?’ ‘너무 외로워, 너무 외로워’ ‘잠시 후 난 없어질 거야’ 등이 이리저리 퍼진 절망적 메시지의 노랫말은 마치 난수표를 해독하는 기분이다. 대중에 대한 이러한 무(無)배려는 신보에서 단 한 곡의 싱글도, 한 클립의 뮤직 비디오도 발표하지 않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현재 신곡 가운데 ‘Optimistic’이 가장 많은 전파를 타고 있지만 그것은 라디오 측의 결정이지 라디오헤드의 선택은 아니다. 뮤직 비디오에도 상당한 메시지를 부여해왔던 터라 보통 아쉬움이 남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웅변하는 것은 비타협적 태도와 창조와 실험성으로 요약되는 아티스트의 소중한 가치들이다. 여기에 < OK Computer >의 화려한 매출 그래프를 다시 그리려고 하는 속내는 눈곱만치도 없다. 솔직히 전작으로 대성공을 창출한 뮤지션들이 받는 압박이란 엄청난 것이다. 수록곡 ‘Morning bell’을 코펜하겐에서 녹음하던 때를 기억하며 기타리스트 에드 오브리엔이 "모든 게 어둡고 추웠으며 늘 우린 택시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 말에 그 부담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이 상황에서 음반산업에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모든 중심을 ‘아티스트의 자유’로 곧추세운 것이다. 그래서 획득한 이 ‘프리 드라이브’야말로 앨범의 핵심이다. 이들의 차기 작이 늦어도 내년 초입에 나온다고 한다. < OK Computer >적이고 쉬운 앨범이라는 말이 있지만 라디오헤드는 어려운 앨범 < Kid A >로 빌보드 차트 1위 데뷔 등 이미 큰 성과를 거둔 것 같다. ‘버진 올 타임 톱 앨범 1000’ 조사를 주도한 저자 콜린 라킨은 이렇게 예측했다. "2002년 조사에서는 아마 < Kid A >가 최고 앨범으로 비틀스의 < Revolver >와 겨루게 될 것이다." 비틀스매니아들한테는 큰일 날 소리겠지만 무소속(?) 팬들에게는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한번 2년 후를 지켜보자.
폴 데일리(Paul Daley)와 닐 반스(Neil Barnes)의 듀오 밴드인 레프트필드(Leftfield)는 통상 프로그레시브 하우스(Progressive House)계열로 분류된다. 하지만 여기서의 ‘프로그레시브’란 수식어는 70년대의 대곡 지향의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차용된 뜻이 아니다. 이것은 이들이 하우스라는 이름 아래 여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적극 도입, 실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의외로)... 폴 데일리(Paul Daley)와 닐 반스(Neil Barnes)의 듀오 밴드인 레프트필드(Leftfield)는 통상 프로그레시브 하우스(Progressive House)계열로 분류된다. 하지만 여기서의 ‘프로그레시브’란 수식어는 70년대의 대곡 지향의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차용된 뜻이 아니다. 이것은 이들이 하우스라는 이름 아래 여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적극 도입, 실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의외로) 단순히 ‘진보적인, 실험적인’ 이라는 뜻을 지니는 수식어인 것이다. 본래 레프트필드는 닐 반스의 원 맨 밴드였다. 하지만 반스가 리듬 킹(Rhythm King)레이블과 계약하고 ‘Not forgotten’을 다시 레코딩하던 중 폴 데일리가 리믹서로 참여하면서 듀오밴드로 전향하게 되었다. 사실 이 둘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이였고 서로의 음악적 관심사도 일치했기 때문에 하나의 팀으로 활동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Not forgotten’은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의 교과서격인 싱글이 되었고, 레프트필드는 하우스 씬의 기대주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후 이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의 리믹스 작업에 중점을 둔 활동을 시작했다. 단순한 리믹스가 아닌 ‘전혀 새로운’ 스타일로의 재창조를 목표로 한 이들의 작업은 음악계에서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리믹스 작업기간 동안 계속되었던 리듬 킹 레이블과의 법정 투쟁이 끝나고, 이들은 직접 하드 핸즈(Hard Hands)레이블을 설립해서 싱글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음악들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모아 정식 음반으로 제작한 앨범이 바로 1집 < Leftism >(1995)이다. 물론 ‘Storm 2000’등의 신곡들도 다수 선보였다. 앨범은 첫 곡 ‘Release the pressure’부터 렘 시세이(Lemn Sissay)가 참여한 마지막 곡‘21th century poem’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요소들을 혼합한 새로운 하우스의 형태를 제시했다. 4년 뒤에 발표한 2집 < Rhythm and Stealth >(1999)는 1집과 마찬가지로 하우스의 우산 아래 여러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혼합하고 있다. 물론 1집에서 보여주었던 신선함(1집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은 보이지 않지만, 대신 이들의 관록과 노련미가 그 자리를 충실히 보완하고 있다. 첫 트랙인 ‘Dusted‘의 사이키델릭한 무드, ‘Chant of a poor man’에서의 덥과 트립합적인 면모, 속도감 있는 비트의 향연이 돋보이는 ‘Phat planet’등에서 보듯이 그들은 또 한번의 ‘진보적인’ 스타일을 개척해 낸 것이다. 단 2장의 앨범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뮤지션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밴드 : Sigur Ros (시규어 로스)
≫ 욘 쏘르 비르기손 (Jon Por Birgisson, 통칭 '욘시') ≫ 1975년생. 보컬, 기타, 신스 담당. ≫ 캬르탄 스베인손 (Kjartan Sveinsson) ≫ 1978년생. 피아노, 키보드, 기타, 플루트 담당. ≫ 기오르크 홀름 (Georg Holm) ≫ 1976년생. 베이스, 실로폰 담당. ≫ 오리 파울 디러손(Orri Pall Dyrason) ≫ 1977년생. 드럼, 키보드 담당... ≫ 욘 쏘르 비르기손 (Jon Por Birgisson, 통칭 '욘시') ≫ 1975년생. 보컬, 기타, 신스 담당.
≫ 캬르탄 스베인손 (Kjartan Sveinsson) ≫ 1978년생. 피아노, 키보드, 기타, 플루트 담당.
≫ 기오르크 홀름 (Georg Holm) ≫ 1976년생. 베이스, 실로폰 담당.
≫ 오리 파울 디러손(Orri Pall Dyrason) ≫ 1977년생. 드럼, 키보드 담당.

Sigur Ros Discography:
[Von] (1997)
[?gætis Byrjun] (1999)
[( )] (2002)
[Takk...] (2005)
[Hvarf-Heim] (2007)
[Heima] (2007, Live Film)
[Með Suð ? Eyrum Við Spilum Endalaust] (2008)
[Inni] (2011, Live Film)
[Valtari]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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