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화된 도시 공간 속 거짓 평화에 매몰되어가는 인간들의 투사도”
1990년대 초반 지어진 신도시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 세영은 작은 약국을 경영하며 딸 도우의 교육에 온 힘을 쏟고, 남편 무원은 대학 강사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지방의 호텔을 직접 경영하며 신도시 아파트의 재건축위원회 일까지 맡아보고 있다. 자기 가족의 안온 이외에는 관심 없는 이들은 다른 이의 인생에 개입하거나 역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일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큰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실제로는 부부간의 각별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학교 폭력, 자살, 왕따, 재건축, 사이버상의 불감증이란 현대인의 병증 속에서 그들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허약한 정신적인 기반을 투명하게 노출하는 인물들이다. 표면적으로는 안전지대에 자리 잡은 듯 보이나 이들은 획일화된 지역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타락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전형적인 군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끝나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했다. ‘것이다’는 단정인가, 추측인가, 예상인가, 결심인가. 이 소설은 어쩌면 그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불미스런 사건 앞에 반발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전작의 인물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자조 섞임 읊조림이며 동시에 뒤로 물러섰던 과거의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정이현은 이번 작품을 통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화해를 시도한다.
소설 마지막 세영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결국은 죽음을 택한 친구의 빈소를 찾아간 딸 도우를 빈소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대신 자신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다고 독백한다. 남편 무원은 사이버 공간에서 숨어 익명의 자아로 살던 것을 후회하고 잘못된 모든 것을 차단하고, 딸 도우는 친구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며 친구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으로 그 예를 다한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도의적 책임과 그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일 뿐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구체적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 안에 존재한 이기적인 자아를 마주하며 자신 역시 그 폭력의 시스템 안의 작은 고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나아간다. 전작의 소설들 속에서 당면 문제에 도망치는 인물군들을 그려냈던 것에서 진일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 중산층 가족이 빠져든 정신적 퇴행의 국면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안전지대에 자리 잡은 듯 보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위태로운 일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병적인 기반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며 저지르는 죄악들은 우리의 삶을 포박하고 종내는 모두의 미래마저 위태롭게 만들 것임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거짓 평화에 매몰된 ‘표준화’된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안녕한가”
정이현의 소설은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면서 저지르는 죄악들이 채무처럼 우리의 삶을 포박하고 종내는 미래를 열어나갈 아이들의 삶마저 위태롭게 만들 것임을 두렵게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의 소설은 현대 도시의 세태를 세밀하게 지면에 묘파한 리얼리즘 서사이자 눈에 보이지 않고 느끼지도 못했던 신과 초자연적인 세계를 향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을 그린 영적 체험담이라는 중층적인 구조를 갖게 된다. 억울하게 죽은 아이의 장례식장에 외롭게 남아 있는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으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얼마나 비통하고 슬픈가. 이 풍경을 통해 정이현의 소설은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내리는 듯하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은밀한 폭력이 소중한 아이들을 떠나보낼 것이며, 투명한 거짓으로 지은 세속 도시는 머지않아 신이 지배하는 거룩한 불모의 세상이 되리라는 두려운 진실 말이다.
-이소연, 「작품해설」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끝나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했다. ‘것이다’는 단정인가, 추측인가, 예상인가, 결심인가. 이 소설은 어쩌면 그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작년 여름 썼던 초고를 올여름 수정했다. 여러 가지를 빼고 더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어떤 오후엔 해의 방향을 향해 앉은 아기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았고 어떤 저녁엔 팔을 흔들며 유리창의 얼룩을 닦았다. 아주 멀리 당도하는 꿈은 한 번도 꾸지 못했다. 맹목과 불안 사이를 서성이는 사람에 대해, 일상의 어떤 모습에 대해 쓰려 했다는 것을 완성한 후에 알게 되었다.
월간 『현대문학』이 펴내는 월간 [핀 소설], 그 여섯 번째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은 월간 현대문학이 매월 내놓는 월간 핀이기도 하다.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 후속 편들은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작가들의 신작을 정해진 날짜에 만나볼 수 있게 기획되어 있다.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 ‘샐러리북’ 개념이다.
001부터 006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출생하고,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사이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의 든든한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진다.
007부터 012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출생하고, 2000년대 중후반 등단한, 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질 예정이다.